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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작가비평]권지예 소설론
    -행복한 재앙에 대한 예찬 : 권지예론-국어국문학과 2002130047 강윤정# 들어가며권지예는 1990년대 후반 들어 주목받기 시작한 신진 작가다. 그녀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7대학에서 비교문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학중이던 1997년 단편 「두 개의 꼭두각시 인형」 (후에 「꿈꾸는 마리오네트」로 제목이 바뀜) 를 『라쁠륨』에 발표하면서 등단한 그녀는 99년 귀국한 이후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2000년 1월 논문을 마치고 박사학위를 받은 뒤 교통사고로 넉달쯤 병원에 누워지냈는데 그녀의 평판작이 된 「뱀장어 스튜」는 이 때 완성했다고 한다. 오랜 병원생활의 고통과 절망이 "뱀장어 스튜"를 끓인 화력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2002년 제26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하면서 관심을 끌었다. 수상작 「뱀장어 스튜」는 심사위원 7명이 첫 투표에서 전원 수상작으로 합의했을 만큼 작품성을 인정받았다.최근 한국소설은 여성 취향이라는 중론이다. 또한 대다수의 여성작가군(은희경, 김형경, 김인숙, 공지영, 전경린, 서하진 등)이 '불륜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는 지적도 일고 있고 문학계에서는 이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지적에 대해 권지예는 "일상을 맴돌거나 이로 인해 파생되는 전망 부재는 여성작가들의 사회적 경험폭이 좁아 생길 수 있는 일"이라며 "여성작가들은 행동반경이 좁은 대신 집요하고 지적인 작업을 통해 예술적 영토를 확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그녀는 자신의 소설에 ‘불륜 소설’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것을 사양하며 “섹스는 인간에게 중요한 부분이지만, 30분의 순간적인 쾌락이 지나면 살아야 하는 것은 훨씬 길잖아요. 허무하고 쓸쓸해요. 저는 연애나 본격적인 불륜보다는 격정과 사랑이 지나간 쓸쓸한 인간의 자아 찾기를 그리고 싶어요.” 라고 말한다.이어령, 유재용, 윤후명, 김인환 등의 호평을 받으며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한 권지예의 소설은 가쁜 호흡의 문장으로 독자를 강하게 흡인하면서도 상쾌하게 만드는 풋이 자신을 친친 감아대지 않도록 변기통에 버리는 것이었다.이것은 남편과의 부부관계를 끝내거나, 남편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의미가 아니다. 그녀는 인간의 의지와는 늘 어긋나는 삶의 법칙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그것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도록 스스로를 놓아준 것이다.1-2. 「정육점 여자」결혼의 형식 뒤에 숨겨진 기만적 책략은 「정육점 여자」에서도 드러난다. 「정육점 여자」의 ‘나’는 빠리 유학시절에 사랑 했던 라라의 존재를 잊지 못한다. 라라와의 사랑이 불꽃같은 정열이었다면 현재 아내와의 사랑은 가식적이고 위악적이기 그지없다. 그는 자신이 무정자증인 것을 모른 채 두 번이나 불륜의 씨앗을 잉태한 아내를 ‘토막을 내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지만 유산을 권할 뿐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아내를 고깃덩어리로 보‘고 있는 것이다.이 작품 속의 섹스는 살육과 코드를 함께 한다. 작품의 시작부분에서 ’나‘가 여자를 사러 홍등가를 가는 이유는 홍등가의 분홍색 불빛이 정육점의 불빛과 닮아 있어 ’둘 다 진열장의 고기를 먹음직스럽게 보이도록 한다’고 시작하는 것에서, 연극배우답게 ’나‘의 아이를 유산시킨 것 같은 연기를 하는 아내를 강간하다시피하고 나면 아내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라라를 떠올릴 때면 ’나는 먹이를 발견한 육식동물처럼 그녀를 뜯어먹고 싶은 강렬한 식욕을 느꼈다.‘ 라는 ’나‘에게서, “난 이상하게 냉동고의 고기를 보면 누군가와 섹스를 하고 싶어요.” 라고 말하는 라라에게서 이러한 특징이 드러난다.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소통 방식이자 생명을 잉태하고자 하는 숭고한 의미가 아닌 살의를 담은 채 사랑의 소멸과정과 궤도이탈의 욕망을 드러내고, 따라서 생명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섹스는 황폐화된 성과 사랑을 상징하고 있다.1-3. 「섬」「섬」의 여주인공은 한때 남편의 후배와 금지된 사랑에 빠져든 적이 있다. 여자에게 있어 후배와의 불륜은 「꿈꾸는 마리오네뜨」에서처럼 진정한 사랑에 대한 갈망 때문이 아닌 빠리라는 외롭고 무인도 같은 공간 속에 던 『꿈꾸는 마리오네트』와 『폭소』사이를 연결해 준다는 의미가 있다. 권지예가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 동안 발표했던 작품들을 살펴보면 그녀의 작품이 또 다른 색채로 물들어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변화를 간단하게 말한다면『꿈꾸는 마리오네트』는 ‘우먼’이고 『폭소』를 ‘휴먼’으로 볼 수 있으며「뱀장어 스튜」는 ‘우먼에서 휴먼으로’ 정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작품이 쓰여진 시기 역시 두 소설집 사이에 위치하므로 이러한 해석에 큰 무리가 없다고 본다.「뱀장어 스튜」는 독특한 액자식 구성의 소설이다. 액자 내/외부의 인물이 동일 인물임을 명백하게 밝히지는 않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액자 내의 일이 있은 후 오랜 시간이 지나 그때의 일을 액자 밖의 여자가 회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액자 외부에서 한 여자가 피카소의 그림을 감상하고 있다. 피카소의 마지막 연인 자끌린이 피카소를 위해 만든 뱀장어 스튜의 그림을 보면서 여자는 액자 내부의 여자를 떠올린다. 액자 외부의 여자는 내부의 여자를 15년 동안 지켜본다.액자 내부에서는 자끌린의 뱀장어 스튜가 아닌, 여자의 남편의 삼계탕이다. 여자는 ‘오른 손목에 자벌레처럼 오돌토돌하게 남은’ 자살 기도의 흉터와 ‘오래전 자궁에서 아이를 꺼내느라 생긴’ ‘가시 돋친 철사줄’ 같은 흉터를 가지고 있다. ‘그 상처를 지닌 스무 살부터 많은 남자들을 만났지만, 그녀에게 모독감을 느끼게 하지 않고도 그 상처들을 따뜻하게 핥아 주는 남자’가 지금의 남편이며 그녀는 남편에게서 치유되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여자는 그 느낌을 지닌 채 평온한 부부관계를 이끌어 가지 못한다. 아랫배의 흉터를 남긴 채 생겨난 아이를 외국으로 입양을 보내야 했던 여자는 언제나 그 ‘흉터’처럼 기억되는 옛 남자를 주기적으로 찾아간다.그녀가 최근에 다시 한국의 남자를 찾게 된 것은 남편과 여행하던 중 자기가 낳고 버렸던 아이와 동갑내기인 한 한국인 입양 딸아이를 만나고 나서였다. ‘철사줄의 상처’가 재발하여 ‘균열의 순간’당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우리는 이상의 시 「오감도 제 1호」의 한 부분에서 이와 유사한 맥락을 발견할 수 있다.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이상 「오감도 제 1호」中즉, “가면 같은 얼굴들”, 그 익명성 속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하지 않은, 언제든 나도 가해자 혹은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삶의 아이러니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스토킹을 했던 보험 설계사 여자는 울고 나면 힘이 난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 여자는 좀처럼 울지 않는다. 벙어리인 남편을 부양하며 고객을 끌기 위해 스토킹까지 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그녀가 힘을 내기 위해 울 수도 없게 만드는 것은 결국 속악한 세상이다. 이러한 위악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과연 가해자라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일까. 권지예는 “세상에 위선을 떠는 자들보다는 위악을 떨어대는 자들이 훨씬 순수해 보였다.” (「행복한 재앙」,『폭소』)라고 말하며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어쩔 수 없이 부리는 악이거나 스스로 악임을 아는 위악이 위선보다 오히려 더 인간적이고 건전하다고 이야기한다.“나도 요즘은 저 노인네 때문에 속을 너무 끓여서 정신과 치료라도 받아야 될 지경이야. 하지만 저 노인에 얼굴 좀 봐. 얼마나 행복해 뵈니?”‘듣지도 못하는 벙어리 남자의 눈에 비친 세상은 그저 너무도 고요하고 아름답다. 마치 창틀 밖의 세상이 액자 속 그림인 것처럼......’위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세상을 선하게만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치매 걸린 노인이나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인간 불량품’ (「폭소」,『폭소』) 뿐이고, 그들은 생생한 현실이 아닌 액자 속 그림 같은 세상을 살기에 선할 수 있다.3-2. 「행복한 재앙」세상을 순면(純綿)처럼 살 수 없음은「행복한 재앙」의 ‘나이롱 인생’들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인공적이고 비본질적이지만 엄청 질긴 특성을 지닌 ‘나이롱’은 인간을 순수하게 남겨두지 않는 삶을 꿋꿋하고 질기게존재하는 아이는 괴성을 지르면서 몸을 흔들며, 입술을 찢거나 벽에 머리를 짓찧는 자해행동을 보인다. 이런 아이 때문에 피폐해져가는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 남편은 성교를 시도한다. 그런데 그때마다 아내는 어느 순간 폭소를 터뜨린다. 아내의 이런 폭소는 “완전한 사랑, 엄숙한 삶의 존엄성”을 조롱하는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인간을 훼손시키는 삶의 무자비한 폭력과 그로 인해 무고한 인간이 겪게 되는 불공정하고도 불가항력적인 고통을 보여준다. 무조건적인 사랑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폭력의 잔인성과 때문에 아내는 웃을 수조차 없어 사나워진 웃음을 웃는 것이다. 그래서 폭소는 ‘크게 웃는’ 웃음이 아니라 ‘폭력적인’ 웃음이 된다. 결국 아내는 그들을 떠나 미국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되고 남편은 아이와 함께 생을 마감할 생각을 하고 바닷가로 떠난다. 그곳에서 아이가 발을 헛디뎌 가파른 방파제 벽에 매달리게 되고 ‘마치 보이지 않는 달의 인력이 밧줄처럼 끌어올려주기라도 하는 듯’ 아이 스스로가 벽을 타고 올라온다. 그는 아이를 껴안고 마침내 통곡을 토해낸다.자폐증을 앓고 있던 아들은 바퀴나 굴렁쇠와 같이 둥근 것에 유난히 집착한다. 아이가 살아 있어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지 않은, 즉 죽은 것처럼 존재할 때 둥근 것은 출구 없는 감옥과 같은 ‘폐곡선‘을 의미했다. 그러나 방파제 벽에 매달린 아이의 살고 싶은 본능과 둥근 것이 연결되면서 그것은 ’보름달‘, ’하얀 동그라미‘로 변한다.작가는 『폭소』를 통해 삶이란 원(怨)에 부딪히면서 그것을 꿋꿋하게 보듬어 안고 원(願)으로 나아가는 과정임을 말한다. 눈물점만 남긴 채 이제는 울지도 못하던 그녀의 소설 속 인물(「스토커」)은 제대로 된 울음을 울지 못하고 사나운 웃음만 웃다가(「폭소」) 비로소 서럽게 울 수 있게 된다.# 아직은 곳곳에서 드러나는 고압적 몸짓어떻게 보면 작가는 거의 강박적으로 삶에 대한 엄숙한 긍정을 보여주려는 듯하다. 그래서 소설의 결말은 점차 다소 도식적인 패턴으로 맺어지고 있다. 다음의 예를 살펴보자.인생이)
    인문/어학| 2005.12.09| 13페이지| 1,500원| 조회(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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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평] 당신들의 대한민국
    들어가는말-요란한 구호만 가득한 시지프의 언어{) 그리스-로마 신화의 시지프스가 돌을 굴려 올리는 무의미한 행동을 반복하는 것처럼 한국사 회의 문제점을 꼬집는 과거의 체계적이고 이론적이지 못한 목소리들은 무의미하다들얼마 전부터 모 방송사의 뉴스에서 정정당당 코리아 라는 시리즈가 나오기 시작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 사회의 여러 부조리와 추한 면들을 공개하고 시정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사실 한국사회내의 모순과 문제점들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전부터 있어왔다. 하지만 자성을 요구하는 그런 지적의 목소리들은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구체적인 실천이 빠진 일회성 행사나 요란한 구호에 지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 역시 사실이다. 혹은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한국인 비판 의 경우처럼 저자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인한 반일감정 때문에 저자의 의도 즉 한국·한국인 비판이 객관성을 상실했다고 지레짐작되는 경우조차 있었다.천박한 한국사회의 오늘은 대책을 필요로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한국사회의 정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요즘처럼 높아지고 또 필요한 시점이 과거에 있었나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월드컵 기간이기 때문에 외국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분장을 해야하고 때문에 사회정화가 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국제화 시대이므로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효과적으로 편승하기 위해서 한국병이라 불리는 것들을 털어 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지적한 한국사회의 단점들이 시정되지 않으면 인류의 보편적 가치라 불리는 평등과 자유 그리고 번영이 한국사회에서 사라질지도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대우자동차 노동조합원들에 대한 국가의 폭력진압이나 시그네틱스 노동조합 여성들에게 가해진 알몸수색,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비정규직, 장애인의 문제, 안암동 고대병원 뒷산에서 벌어지는 폭력철거의 문제등 오늘날 한국사회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야만적이고 보수화 되어가고 있다.냉철한 현실인식과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현실비판, 대안제시가 필요하다.위에서 단편적으로 나열한 한국사회의 문제들에 대한 냉철한 인식, 원인 탐구, 해결과제 제시가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객관적이면서도 (동시에 한국의 역사적, 지리적 현실에 기반한)상황적 특수성을 고려한 체계적인 문제지적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박노자 교수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은 위에서 언급한 객관성확보와 특수성인식 그리고 체계적 연구라는 세 요소를 두루 갖춘 책이라 할 수 있겠다. 귀화 한국인{) 귀화하지 않은 한국인 즉 박노자씨 같은 경우가 아닌 우리들이므로 객관적인 시각이 담보되며 학부시절부터 한국을 오래 연구했으므로 한국의 특수성에 대한 인식을 기반으로 한 비판 역시 가능하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서양인들이 동양을 대할 때 자주 범하는 실수 즉 한국을 무작정 신비스러운 눈으로도, 서구중심의 계몽적 시각으로도 보지 않았다.이방인의 눈에 비친 한국의 모습들-가관이군박노자 교수는 자신의 책 당신들의 대한민국 에서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한다. 그가 보기에 오늘날의 한국은 한국전쟁 당시 수많은 피난민들이 피난열차 지붕에 올라타려고 아비규환을 하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민주인사 탄압에 앞장섰으며 경제구조를 서구에 종속시켜버린 박정희를 경제성장의 아버지라고 추앙하고 숭배하며, 그 딸이 대선에 나오면 찍어 주겠다고 말하는 모습들, 타당한 이유도 없이 맹목적으로 서구를 숭배하는 사대주의적인 모습들, 영어공용화론을 정부가 앞장서서 제기하는 모습들에서 해방이후 계속된 서구중심의 사대적인 근대화 논리가 지금에서 얼마나 커다란 폐해를 가져오고 있는지를 지적한다. 한국인의 뇌리에 깊이 박혀있는, 서방 선진국이나 일본에 대한 사대의식이, 비서구지역 사람들인 조선족 동포나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멸시와 천대로 이어지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군대가면 철들어 온다 ? No. 복종과 패배의식의 내면화군대가 한국사회에 끼쳐온 부정적인 영향에 대한 그의 지적은 탁월하다. 남자라면 누구나 군대를 다녀와야 하고 군대야말로 철이 든 남자를 만드는 곳이라는 통념이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해 왔다. 하지만 안보논리와 냉전논리로 인해 온 나라가 병영화되고 국민들의 의식이 복종과 억압에 익숙한 비겁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그는 지적한다. 물론 현실적으로 남한과 북한은 서로 휴전선을 사이에 대고 대치하고 있다. 휴전이기 때문에 언제든 전쟁이 터질수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지금의 상황은 휴전이 아니라 정전이라고 여긴다고 생각한다. 휴전이면 모든 생산력을 전쟁물자 생산에 주력해야하는데 오늘날 한국인 가운데 왜 총력으로 전쟁물자 생산에 매진하지 않느냐고 혈압을 올리는 이는 없다.군대를 다녀온 남성들은 군복무를 안한 남성들을 신성한 국방의 의무 를 이행하지 않은 사람이라 손가락질하고 한편으로 군대에 가지 않는 여성들을 업신여기는 현실을 박노자는 개탄한다. 하지만 박노자의 펜끝은 군대를 다녀온 남성에게 향해져 있지 않다. 군대에 강제로 갈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체제와 구조의 문제에 집중한다. 분단논리를 통해서 이득을 취하는 수구 기득권층이 만든 체제를 비판하며, 한편으로 양심적 병역거부를 할 것을 젊은이들에게 요청한다. 그의 지적처럼 국방의 의무라는 것이 과연 군대 3년 다녀온 것이 전부라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사회에서 생산활동(가사활동을 포함)에 종사하는 것 역시 국방의 의무라 할 수 있지 않을까.대학사회-민주적이어야 할...전혀 민주적이지 않은.....한국의 대학사회역시 박노자의 펜끝을 피하기 힘들다. 박노자는 자신이 한국유학 당시부터 느낀 한국 대학사회에 대해서 크게 두가지로 지적한다.첫 번째로 한국사회에 만연한 폭력과 굴종은 가장 진보적이고 민주적이어야 할 대학교수들 사이에서도 쉽게 나타난다고 그는 개탄한다. 교수와 조교간의 비민주적 상하관계는 지식과 실천사이의 간극을 채워줄 실천이성이 최고의 지식인이라는 교수들에게도 진정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대목이다.특히 내가 다니고 있는 학교인 고려대학교의 총장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총장을 포함한 일부교수들의 모습이 실망을 안겨주는 이 시점에서 사학재단의 부당한 요구에 복종하는 모습을 보이는 교수들을 비판하는 그의 지적은 더욱 커다란 느낌으로 다가온다한편으로 대학사회의 구성원 가운데 하나인 학생들에 대한 지적도 잊지 않았다. 시험시간에 부정행위를 하는 학생들에 대한 비판은 시험이 인류역사에 있어온 후부터 계속되어 왔으니 논외로 치더라도 운동권 학생들 사이에 가득한 거대담론에의 몰두, 개성과 자율성 말살 그리고 국가주의에 대한 신봉은 비판받을 만하다. 오늘날 지적되고 있는 운동권 내의 가부장성이나 비민주성 반여성성은 박노자의 지적과 서로 같은 맥락을 같이한다고 생각한다.민족주의와 인종주의-한국사회의 야만의 결정판한국사회의 여러 문제점들 가운데 박노자를 특히 몸서리치게 만들었던 것은 민족주의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인종주의이다.한국사회는 서양에 의한 원치않는 개항에서부터 일제치하에 이르는 일련의 역사적 과정을 통해 외국에 대해서 극히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 민족주의가 횡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 근대사의 굴곡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박노자는 한국의 민족주의가 2차대전 독일의 국가사회주의수준은 아니더라도 분명히 이성적인 수준은 넘어섰다고 본다. 그가 보기에 한국은 우리나라 우리민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서구 몇몇 선진국을 제외한 외국에 대해서는 극히 배타적이다. 그가 보기에 옳지 않은, 발해의 역사까지 끌어 들여가면서 민족감정을 자극하고 있다. 실제로 한국이 외국과 특히 일본과 축구 경기를 갖는 날이면 온 나라가 전쟁터가 된다. 다른 나라 민족은 타도의 대상일 뿐이다. 공존과 화합이란 없는듯 보인다. 이런 현실 앞에서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를 말한다면 몰매를 맞을지도 모른다.
    독후감/창작| 2003.06.06| 4페이지| 1,000원| 조회(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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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가사상] 이강수 [노자와 장자]를 읽고
    노장 사상의 언어관을 중심으로 살펴본 道- 이강수 [노자와 장자]를 읽고국어 국문학과 2002130047 강윤정# 들어가며내가 처음 도가 사상을 접한 것은 대학에 들어와 선택했던 첫 학기의 수업 중 동양 사상에 관련된 강의에서였다. 당시 교수님께서 도가 사상에 대한 수업 첫머리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서양에서는 어떤 사물을 정의 할 때 예를 들어, -이것은 동그라미이다-라고 한다. 그렇지만 동양에서는 -이것은 동그라미가 아니다, 이것도 동그라미가 아니다.....-라는 형식으로 아닌 것을 나열함으로써 불확실하고 모호하게 그 형태를 만들어간다. 하지만 이러한 불확실함이 오히려 분명한 정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나에게는 굉장히 매력적인 이야기였다. 어떤 사물에 대해 정의 가 내려지는 순간, 그 사물에 대한 더 이상의 설명은 불필요해지는 것이 왠지 못마땅했던 나는 자연스럽게 도가 사상에 관심이 많아졌고 수업 시간에 배운 『노자』의 첫머리에 있는 道可道, 非常道 (말로 표현 할 수 있는 道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道가 아니다) 는 구절은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평소 문자를 포함한 언어 라는 것에 관심이 많은 나는 어떠한 새로운 학문이나 사상을 접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그 사상에서의 언어관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따라서 도가 사상에 대해서도 강의를 듣거나 참고될 만한 자료를 읽을 때에도 그것의 언어관에 초점을 두었다. 도가 사상에 대해서는 수박 겉핥기 식으로밖에 몰랐던 나는 막연하게 그것의 탈속적 아우라에 끌렸고 개론적이었던 교양 수업이 끝난 후 다른 일상에 치인다는 핑계로 그저 거기에 머무른 채 더 이상의 관심을 쏟을 수 없었다.이번 -중국문학과 동양문화-라는 새로운 수업에서 다시 만난 도가 사상은 또다른 방향으로 나에게 자극이 되었다. 그것 역시 장자의 언어관에 대한 수업 중에서였다. 그는 성현들의 지혜 속의 의미에 지나치게 중요성을 부여함으로써 문자라는 것은 의미를 파악하면 버려야 하는 부차적이고 단순한 도구라고 보았고 그것이 언어의 힘에 매료되어있던 나에게는 거북하게 느껴졌다. 의미 전달에 있어 선행되는 조건이 언어이며(문자를 포함한) 그것이 하는 저장소로써의 역할을 무시해버려 그것이 설령 성현의 찌꺼기일지라도 후대에 전달되지 않은 채 그저 당대에서만 끝나버리는 지혜가 더 좋은 것인가- 물론 의미를 뒷전으로 둔 채 표면적인 문자 자체를 습득하기에 급급한 것에 대한 비판이겠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말하기엔 너무나 모호한 문제는 아닌가-하는 생각과 함께 작년에 받았던 신선한 자극이 함께 떠올랐다.도대체 이들의 언어관은 무엇인가- 하는 궁금증과 함께 마침 [노자와 장자]를 읽게 될 기회가 생겼고 이번 기회를 통해 노장 사상에서의 언어관에 초점을 두고 道란 어떤 것인지 나름대로 정리해 보기로 하였다.# 도(道)와 언어道可道 非常道 나에게 처음 남겨진 도가의 흔적인 이 구절을 되새겨보았다. 최근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과 함께 생각해보니 어떠한 존재가 설명되고 전달되기 위해서는 언어를 필요로 하게 되는데 이것이 때때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언어=존재 로 생각되어지는 경우가 생긴다. 이 구절에서 노자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이러한 상황에 대한 비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언어는 존재와 같은 것이 아니며 언어화된 의미는 그 이전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 즉 언어는 존재에 비해 부수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며 언어로써 존재를 완전히 표현할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는 생각. 좀더 생각해보면, 여기서 노자는 존재와 언어 사이의 완전히 투명한 구분이 있음을 가정하고 있다는 것이 보인다. 그러나 만약 언어를 통하지 않고는 주어지는 대상에 대한 인식이 불가능하다면, 즉 칸트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의 모든 인식은 언어를 매개로 하는 언어매개적인 것이라면 존재와 언어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노자 사상이 어떠한 해명을 해주지 않았다.이런 비판의 여지가 있겠지만 道를 언어 이전의 궁극의 존재로 이해를 해본다면, 이렇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언어를 통한 이해를 해야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개념적이고 논리적인 이해 대신 필요한 것은 고유한 내적인 체험, 즉 노장 사상에서 말하는 좌망(坐忘)일 것이다.이 책의 저자인 이강수는 도에 대해 말할 수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설명한다.-도는 인간의 감각 기관에 드러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유 기관에도 드러 나지 않는다. (중략) 이처럼 인간의 감각 기관이나 사유기관에 드러나지 않는다는 면에서 보면 도는 무(無)라고 할 수 있다. 이때 무는 무형(無形), 무명(無名)을 뜻한 다. 도는 형체도 없고 어떠한 명사나 개념으로도 규정할 수 없다.-{) 이강수, 『노자와 장자』 58~60쪽-언어는 감각 기관과 사유 기관으로 인식 가능한 사물, 사건들을 규정할 수는 있으 나, 그들 사물, 사건들을 존재하게 하고 변화하게 하는 물물자(物物者)로서의 도를 규정하지는 못한다.-{) 이강수, 『노자와 장자』187쪽인간의 감각 기관에 나타나는 경험적 대상들에 대해서 우리가 명명하고 말할 수 있지만 도는 이러한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대상언어의 차원에서는 도가 말해질 수 없다고 하더라도, 도가 무형(無形), 무명(無名) 이라면 메타적인 개념의 언어는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사실을 가리키는 말은 아닌 것이다.마찬가지로 감각 기관에 드러나지 않는 어떤 것들, 가령 플라톤의 이데아나 보편자들은 비록 감각 기관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것은 경험적 대상의 차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무(無)이지만 선험적인 차원에서는 존재하는 것들이기도 하다. 이러한 것이 비록 감각기관에 드러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의 사유 대상이 될 수 있고 그것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도가 사유 기관에조차도 드러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인간의 모든 의식이 배제된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된다. 즉, 도는 어떠한 지향성도 가지지 않는 절대적인 것이므로 이것은 동그라미가 아니다, 이것도 동그라미가 아니다.. 와 같은 우회적인 서술이 더 효과적인 것이 된다.노자나 장자가 주장하는 도는 존재의 전체성을 의미한다. 저자가 표현한대로 그것은 물물자(物物者)로서의 도 이다. 그러나 우리 사유와 언어는 전체로서의 도를 표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언어가 언제나 표상하는 것과 표상되는 것으로 분리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근거인 동시에 하나의 전체인 도는 바로 이런 문맥에서 언어나 표상적 사유로서는 나타낼 수 없다. 결국 우리가 이해하거나 말하는 것들은 결국 전체성을 보여 주는 진정한 도, 즉 상도(常道) 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단지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표상적이든 아니든 적어도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면서 우리 사유를 형성하는 한에 있어서 도의 전체성은 결코 언어적 대상이 될 수 없다. 동시에 비트겐슈타인이 주장했던 것처럼 이러한 전체로서의 도는 우리가 그 안에 존재하고 이상 결국 알 수 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가리키거나 머릿속에 그릴 수 없는 도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은 마치 눈과 시야와의 관계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언급을 빌려 비유하자면 보는 눈 자체를 보려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이처럼 우리 인간의 인식적, 언어적 한계 때문에 우리는 기껏해야 부분적으로나 도를 인지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체로서의 도에 대해 상상할 수 있고 그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 말할 수 있다. 또한 이렇게 상상된 전체로서의 도는 우리가 인지하는 부분적인 도를 도이게끔 해 주는 선험적 기능을 담당한다고 상정할 수 있고, 따라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부분적인 도는 이러한 전체적인 도에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말할 수 없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전체로서의 도는 우리가 이야기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에 올바른 근거를 부여해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즉 우리가 적절하게 이야기하고 생각할 수 있다면, 바로 그러한 말이나 생각을 통하여 전체로서의 도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인문/어학| 2003.06.06| 4페이지| 1,000원| 조회(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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