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aget와 Vygotsky 이론에 대한 감상문올해 4세인 나의 조카는 Piaget의 전조작기에서 전 개념기와 직관적 사고기의 경계를 이루는 유아로써 이 강의를 이해하는데 있어 본의 아니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물론 나 역시 우리 집안의 귀염둥이인 첫째 조카의 행동과 언어양식에 대해 새로이 의미를 담아 보게 되었고 평소에 의미 없이 지나쳤던 사소한 행동들도 재고해 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Piaget는 인간의 발달에 대하여 단계를 구분하는 즉, 형식주의를 근간으로 인지발달에 대하여 논하였다. 감각운동기와 구체적 조작기 사이의 유아들은 논리적 개념에 이르지 못하여 물활론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이기주의와는 구별되는)과 상징적 기능의 발달과 언어적 발달의 동시 성장을 통한 상징적인 놀이를 하는 단계를 거쳐 개념에 대하여 보다 구체화하고 복잡한 직관을 통한 사고가 가능하게 된다. 또 사물을 공간적으로 분류하고 관계를 인식하기도 하나 일반화된 명제는 만들 수 없고 눈 앞에 보이는 구체적 조작을 통하여만 개념으로 파악한다. 단, 가역적인 사고는 결여 되어 있다. 또한 비도적인 사고만이 가능하기 때문에 어떤 일의 처음과 마지막은 말할 수 있으나 그 중간과정에 다루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모든 일에는 목적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수많은 질문을 하고 모든 이는 자기와 같은 생각으로 행동하리라 믿고 있다.이에 반해 Vygotsky는 인지발달에서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한 언어습득을 가장 중요시 여긴다. 언어발달의 최종단계는 말이 생각 속으로 들어가는 내적언어의 출현, 즉 언어적 사고라 말했다. 아동은 이러한 내적언어를 외적언어와 구분 짓지 않고 모두 소리내어 말하는데 Piaget는 이러한 말하는 내적언어를 자기 중심적 언어라 했다. 이는 곧, 논리적 사고, 특히 형식적 조작의 사고에 있어서 Piaget는 언어의 사회성 덕분이라고 하였고, Vygotsky는 내적 언어의 덕분이라고 주장하여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리하여 Vygotsky의 사회발달이론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학습자들의 사회적 교류가 인식발달에 있어서 기초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 둘째, 아동의 모든 기능은 사회적인 수준에서 먼저 일어나며, 후에 개인적인 수준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그리고 모든 고등정신기능은 개개인 사이의 실제적인 관계에서 일어난다. 셋째, 인지발달의 가능성은 "근접발달영역(ZDP)"이라 불리는 특정한 기간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 또한 근접발달의 완전한 발달은 사회적 교류에 전적으로 달려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인지적 발달은 특정한 나이에 있어서 특정한 범위에 제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리하여 귀찮을 정도로 “왜요?”라고 물어오는 우리 조카의 행동이 단순한 지적 호기심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고, 아무리 내가 한개, 두개 설명을 해 봤자 결국엔 그 갯수가 아니라 높이나 양으로 파악하는 숫자 놀이였음도 말이다. 동생에게 장난감을 나눠주지 않고 독차지 하던 조카를 욕심쟁이라고 혼내줘서 끝내 울음을 터뜨리게 했던 나의 무지함을 힐책하기도 했다. 또 가베와 몬테소리교육이니 짐보리, 시쯔다 교육을 외치며 알록달록하고 특이한 재질의 장난감이나 책, 여러용품등에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나의 새언니를 보며 과연 저런 것들이 도움이 될까? 하던 나의 의구심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식으로든 말이다...
1. 스트리트 퍼니처일명 스트리트 퍼니처(street furniture: 거리의 가구)라 불리우는 보도 블록, 벤치, 공중 전화 부스, 가로수, 재떨이, 간판대, 화단 및 나무 보호대 등은 도시 환경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생활 환경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디자인의 요소이다. 온통 회색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건축물들 사이에 경쾌하고 산뜻한 스트리트 퍼니처의 존재는 도시의 성격이 달라질 정도로 도시 환경에 끼치는 영향이 크다.거리의 문화와 정서를 담고, 주변 환경과의 조형적인 조화를 이루고, 도시 생활을 유지하는 일종의 도구의 개념으로 그 기능성 곧 실용성과, 조형적인 아름다움까지 고려해야 하는 스트리트 퍼니처는 점차 가정 내에서 밖으로 생활의 장을 넓혀 나가, 보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분위기와 인간적인 접촉을 찾아 생활 양식 자체가 밖으로 지향하는 우리의 삶에 크나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에 스트리트 퍼니처의 역할이 갈수록 증대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2. 스트리트 퍼니처의 트렌드스트리트 퍼니처는 환경 디자인의 일종으로써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을 더욱 아름답고 생기 있게 만들려는 활동으로, 도시 자체의 자연스러운 형성을 북돋아 주어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공해와 같은 모든 요소들을 없애려는 데 기울인 인류의 연구와 시행, 실천의 과정이자 결과이다. 삭막해진 거리에 환경 시설물로서의 스트리트 퍼니처의 역할은 매우 크다. 급속하게 늘어난 도심지의 차들과 그로 인한 갑갑한 대기와 아스팔트 거리는 보행자들로 하여금 걷고 싶지 않은 거리로 만들고 있다. 허나 점차 커져만 가는 자연 친화적인 삶에 대한 관심과 과거에 대한 향수는 삭막하기만 한 도시 생활에 생명수와 같은 스트리트 퍼니처에 대한 관심을 높여 주고 있다.이에 그 미적인 기능은 물론 이거니와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고려한 배치와 색감, 기능적인 역할, 그리고 인간 감성과의 교류까지 고려해야만 하는 것이 스트리트 퍼니처의 조건이자 현 경향이기도 하다.3. 쓰레기통스트리트 퍼니처의 많은 종류 중에서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쓰레기통은 만감이 교차하게 하는 거리의 가구이다.내가 처음 중국을 여행할 때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길가에, 강가에 심지어는 기차안에서까지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중국인들을 보고 참으로 황당해 하고 있을 때 한 관광지에서 해태상을 한 조각물을 보고 너무 이뻐서 그 옆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쓰레기통이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먹고 난 사탕 껍질을 엄마에게 주면 엄마는 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대로 길에다 내던지고 마는 중국인들로 인해 만신창이가 되었던 거리들도 그곳만은 깨끗했던 이유가 바로 그 쓰레기통에 있었던 것이다. 조각상이 아닐까 착각에 빠지게 할 정도로 예쁘고 깔끔한 쓰레기통으로 인해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행위마저 의식적으로 바꾸게 한 것이다.조금은 비약적인 생각이 아닐까? 라고 의심치 말라. 당신 스스로를 한번 살펴 보아라. 어떤가? 거리에 두개의 쓰레기통이 있다. 하나는 너무나 지저분하고 냄새는 물론이거니와 주변에 쓰레기도 넘쳐난다. 다른 하나는 모양도 예쁘고 깔끔하기까지 한다면 지금 당신의 손에 있는 쓰레기를 어느 곳에 버리겠는가? 아마 그 더러운 쓰레기통에는 근처조차 가기 싫을 것이다.그래서 나는 쓰레기통을 택하게 되었다. 가장 흔하지만 가장 부주의하기 쉬운 쓰레기통이니까 더러운게 당연하다는 그래서 더욱 더러워 질 수 밖에 없는 쓰레기통을 말이다.가. 현 쓰레기통의 문제점과연 무엇이 문제이겠는가?나는 첫째로 쓰레기통의 모양을 문제로 삼았다. 쓰레기통은 이제 단지 쓰레기통을 버리는 기능만이 아니라 말 그대로 거리의 가구이다. 보다 미적인 모양을 갖춘다면 단순히 ‘쓰레기를 버리는 곳’이라는 생각이 변화하지 않을까?둘째는 쓰레기의 부피이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의 쓰레기통은 금방 꽉차게 되고 넘쳐나 거리로 흐르기 일쑤인 것이다. 허나 쓰레기통의 크기를 크게 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이 쓰레기의 부피를 줄이게 할 수 는 없을까?셋째는 흘러넘쳐난 쓰레기로 인한 냄새이다. 우리들이 행한 결과 임에도 불구하고 일단 넘쳐난 쓰레기통 주위의 악취와 파리와 같은 벌레들로 인해 근처에 접근하기도 싫어한다. 그래서 보다 멀리 하나둘 버리게 되는 쓰레기로 인해 쓰레기통 주위는 더욱 더러워지게 되는 것이다.나. 해결방안모든 문제에는 반드시 해결방안이 있는 법! 이제 원인을 찾았으니 보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우리네 거리를 위하여 쓰레기통을 변신해 보도록 하자.지금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도 나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아름다운 거리와 도시생활의 작은 위안을 얻기 위해 스트리트 퍼니처의 디자인데 많은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물론 쓰레기통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현재 독일에서는 2004년부터 실행계획에 있는 말하는 쓰레기통을 준비중이다. 쓰레기를 넣으면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는 쓰레기통. 어떤가?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기에는 미안해지지 않겠는가? 밤에는 사람들이 놀랄까봐 말은 하지 않고 낮 동안의 태양열을 통한 발광 쓰레기통으로 변신까지 준비중이라고 하다. 또 쓰레기의 부피를 줄이기 위하여 쓰레기를 넣으면 미세한 무게까지 감지하여 스스로 압축하는 쓰레기통, 분리수거를 통한 캔 압축 쓰레기통이나 음식물 찌꺼기를 건조, 분쇄까지 하는 쓰레기통은 현재 보편화 되고 있는 실정이다. 첫 번째 문제로 제시하였던 쓰레기통 모양이야 그 거리의 분위기에 맞게 다양하게 디자인 할 수 있으리라 본다. 가령 대학교 같은 곳은 연필 모양으로 색깔도 젊은이들의 취향에 맞도록 밝게, 그리고 개성있게 만드는 것이다. 인사동과 같이 고즈넉하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거리에는 한복을 입은 신랑, 신부 모양으로 한다던지 말이다. 그리고 벌레들이 싫어하는 향을 담은 쓰레기통 등등...
최근 추징금 환수를 위한 검찰의 재산명시 신청에 따라 전두환 전 대통령의 가재도구 일체 -심지어는 그의 진돗개 2마리까지-가 총감정가 1790만원에 경매에 부쳐 진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씁쓸함을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우리나라는 해방 후 공화주의시대 반세기 동안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현직까지 합쳐 9명인데, 그중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의 저항으로 쫓겨났고, 윤보선·최규하 두 대통령은 자의건 타의건 스스로 자리를 물러나는 상황이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현직 중에 암살당했고, 전두환·노태우 두 대통령은 퇴임 후 징역을 살았다.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은 자식들인 김현철·김홍업의 비리 사건으로 골머리를 섞었고, 현직 노무현 대통령은 적극적인 국민의 지지를 받고 선출 되었음에도 ‘성실하되 리더는 아니다’라는 최악의 평가까지 받고 있으니 우리는 참으로 대통령 복이 없는 셈이다.허나 이런 상황 하에서도 몇 해 전 실시했던 여론조사에서 가장 복제하고 싶은 대통령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뽑혔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고도 주목해 볼 만한 것이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수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몸서리치는 유신헌법이라든지 언론탄압, 5.16군사쿠데타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사실에 언제나 그랬듯 나의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을 수가 없다.그럼 이제 맥시멈까지 도달한 나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도 더 이상의 서론은 생략하고 살펴보도록 하자.1. 경제적인 측면박정희가 집권한 시기동안 연 평균 성장률은 9.8%, 경제규모는 4.8배가 확대 되었다. 초기 박정희의 경제개발계획은 외자 도입을 통한 수출증대와 경제의 고도성장을 이룩한 후 무역수지 흑자를 통한 외채 상환하고 국제수지의 균형을 달성하는 것이었다.이를 위해 그는 '선성장 후분배'라는 모토 하에 자본축적을 이루기 위해서 저임금, 저곡가 정책을 합법, 비합법적으로 강력히 추진하였다. 따라서 재벌위주의 경제개발의 결과 노동운동의 탄압, 농업부문의 정책적 소 외, 내수위주의 중소기업의 소외라는 결과를 가져 왔으며,기업은 경영합리화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사회적 경직성에 따른 경제적 효율의 상실을 불러오게 된 것이다.흔히들 고도성장의 주요 요인의 하나로 박정희의 창조력과 지도력을 꼽는데 다들 알다시피 경제개발계획은 박정희 정권의 창조물이 아니라 장면정권이 준비한 계획이었다.70년대 초 중화학 공업화로의 전환 역시 미국 등의 외부적 강요에 의해 결정된 계획으로 1차 오일쇼크 이후 후유증으로 미국등지에서 스테그플레이션이 발생함에 따라 선진각국은 고에너지 사용산업의 후진국 이 전을 적극 추진하게 된다. 그 대상국으로 남미각국과 한국이 포함되었던 것이다. 이는 79년 2차 오일파동 이후 중화학공업이 우리경제의 발목을 잡아 엄청난 공황 속에 빠져 들게 하였던 점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다음으로는 우리나라의 고도성장을 박정희 대통령의 지도력에서 기인했다는 점에 대해서 얘기해 보자. 흔히들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을 '한강의 기적' 이라 한다. 1960년대 중반, 우리경제의 고도성장은 대외여건이 수출 지향적 경공업화에 매우 유리한 상황이었다. 선진국에서 생산제의 과잉생산이 이뤄진 상태에서 생산제의 저가매입이 가능 했고, 세계경제의 호황에 힘입어 유동성 역시 과잉상태에 있었던 시기였다. 더구나 선진국에서는 이미 탈 경공업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국내에는 양질의 노동력이 풍부하게 존재하던 시기였다.수출의 비약적 증대(연평균 30% 신장률) 74년부터 2차 산업이 1차 산업을 능가함으로 선진국형 산업구조를 갖게 되었고 수출에 있어서도 공산품 비중이 크게 증가 되었다. 사회적 유동성이 증대되어 도시화, 국제화를 이루게 되었으나 외연적 성장에 급급하여 기술개발을 소홀히 함으로 한국경제의 구조적 취약성을 심화시켜온 측면은 잊고 있다.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점은 첫째, 산업구조의 천박성을 들 수 있습니다. 즉 조립식가공형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결국 기술기반의 취약성으로 수출 지향적 체제에서 대외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주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둘째, 대내적인 불균형과 불평등을 들 수 있다. 금융 등 각종 지원 정책이 수출부문에 집중됨으로 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내수산업의 비중이 감소하여 국내수요의 수입의존도를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여 내수산업의 국민 경제적 지위는 더욱 크게 하락되었다. 농업에 있어서도 정책적 소홀로 식량자급도가 급격히 떨어져 결국 식량수입의 증대는 국제수지의 압박요인으로 등장하여 경제 전체에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이는 한국경제의 구조적 건전성을 해치는 것일 뿐 아니라 농촌과 도시 간의 지역간 격차에 따른 분배의 불평등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셋째, 대외적 종속이 이뤄진 것이다. 재벌위주의 정책으로 우리 경제의 대외 종속은 심화되어 1970년 말까지 90%를 상회하는 무역의존도를 보여준다. 원자재, 중간재의 해외의존도가 그렇다 치더라도 내수용품의 수입의존도 상승은 우리경제의 수입 유발적 구조의 심화를 반영한 것 이라 하겠습니다. 이는 결국 국제수지의 악화를 불러와 외채의 누적적 증대를 낳게 되었다.결국 박정희식 경제개발은 세계경제의 호황 속에서는 그 구조적 취약성을 은폐 할 수 있었으나 세계경제의 불황과 고 유가 시대에서는 구조적 취약성으로 인해 우리 경제의 발목잡기가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박정희의 수출주도형 경제성장계획은 결국 거대 재벌을 키웠고, 재벌위주의 성장정책을 주도적으로 실시한 결과 소수 재벌의 지위를 강화해 주게 됨으로 사회전반의 경제적 불평등을 양산하고, 부의 격차를 확대시키게 된 것이다.2.정치적인 측면5·16군사쿠데타로 권력을 획득한 박정희 정권은 생래적으로 정통성의 빈곤에 허덕이고 있었다. 정통성의 빈곤을 보완하기 위해 박정희 정권은 조국근대화와 경제건설을 국가 목표로 상정하고 산업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결국 한국경제는 고도성장을 이룩했고, 총량지표면에서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향상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나 이를 위해서우리가 지불한 정치적 대가가 너무 크지 않았나 생각된다. 민주주의의 후퇴, 시민사회의 구석구석까지 이루어진 감시와 통제, 정경유착의 심화, 소득불평등과 지역감정의 악화 등은 박정희 정권의 부산물로 현재까지 남아 있다. 경제성장이 이러한 구조적 모순을 상쇄시킬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는 않는다.그것은 민주적 토론을 통해 생산력 발전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희생해도 좋다는 민주적인 국민적 합의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신들에게 '역사적 사명'을 물리력으로 부여한 소수 정치군인들의 자의적 판단에 의해서 이루어진 성장 제일주의 개발독재의 논리는 개발독재의 논리는 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했고, 정치 부재, 인권탄압 등 과오를 범했다. 또 정책과정은 하향식 일변도로 운용되었고 국민들의 요구 등 투입기제는 봉쇄되었다.국가 관료 기구는 박정희가 자신의 권력토대를 강화하기 위한 지배수단으로 사용되었고, 보안사나 수도경비사령부, 중앙정보부 등 국가의 억압기구는 치외 법권적인 지위와 특권을 향유하면서 사회 각 부문을 통제했다. 공작정치가 난무했고 이로 이해 정치적 불신과 냉소가 만연되었다. 지역간의 갈등과 괴리감도 박정희 정권의 부산물이다. 개발사업의 지역적 편중과 엘리트 충원과정에서의 지역간 차별대우 등으로 지역격차와 갈등이 심화되었다.그리고 군사문화의 보급과 확산을 통해 정치인과 관료는 물론 일반국민들의 의식과 행태를 획일주의와 흑백논리에 빠지게 했고, 냉전의식과 북한 콤플렉스를 심화시켰으며,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고 힘이 곧 정의라는 인식을 팽배시켰다.또한 유신체제는 박정희 대통령의 개인독재와 영구집권을 위해 만들어진 극도로 억압적인 권위주의 체제로써 유신체제하에서 박정희는 국민적 동의에 기초해서 권력을 위임받고 행사하려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자신을 행정, 입법·사법 3부위에 군림하는 초헌법적인 독재자로 부상시켰다. 유신체제하에서 대의정치와 정당정치는 황혼을 맞이했다. 유신체제에서 국회의원의 임기는 6년으로 그 가운데 2/3는 1구 2의석의 중선거구에서 선출하고 1/3은 대통령의 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도록 했다. 이러한 체제 하에서 박정희는 1/3에 달하는 유신정우회 의원을 확보하게 되었고 자연히 여당인 공화당에의 의존은 줄어들게 되었다. 강한 여당은 강한 야당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야당과의 권력경쟁 자체가 소멸된 상황 하에서 집권 여당은 할 일이 없어졌다. 유신체제하에서 여당도 야당도 아닌 박정희의 친위 보안부대인 중앙정보부, 경호실, 보안사령부 등이 국민의 여론을 수집하고 감시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시민사회는 해체를 강요당했다. 노동자들은 병영식으로 통제되었고 농민들은 새마을 운동의 일원으로 편성되었으며, 학생들은 학도호국단으로 조직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강압적 통제도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운동을 멈출 수 없었다. 비민주적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투쟁이 야당은 물론 원외 재야인사들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어나갔고 이에 대해 정부는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발동으로 대처했으나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투쟁은 확대되어 갔다. 민심이 민주공화당 정권을 떠나버린 결과로 마침내 1978년 12월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여당인 공화당보다도 더 많은 표를 획득하는 이변이 일어났고(신민당 32.8%, 민주공화당 31.7%), 이에 고무된 신민당은 김영삼을 새 총재로 선출하여 유신체제에 대한 공격을 가중시켰고, 이에 대해 박정희 정권은 김영삼의 의원직을 박탈했다. 그 결과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의 시위소요사태인 부마사태(釜馬事態)가 일어났고 부마사태의 진압을 위해 부산과 마산지역에 계엄령이 발동된 가운데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했다. 유신체제는 사실상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끝나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