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序論현대 지구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단어라면 단연 ‘資本主義’일 것이다. 90년대에 접어들어 사회주의와의 체제 경쟁에서 승리한 이후 여세를 몰아 전 지구적인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더불어 많은 문제를 양산하고 있기도 하지만, 그 토대는 너무도 단단해 보인다.자본주의의 성립 그 자체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지만, 그 始初的 모습이 영국의 농촌에서 시작했다는 것에서는 누구도 반박하지 못하는 것이며, 그러한 맥락에서 영국의 자본주의의 발전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하나의 단계일 것이다.그러나 여기에서는 영국 자본주의의 모든 것을 보기에는 힘들며, 다만 그 시초의 단계 중 하나였던 영국의 제 1?2차 Enclosure 현상을 살펴보고, 이것이 영국 산업혁명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1. 서유럽 中世 封建 經濟體制의 崩壞와 世界體制의 變化14세기 후반에 접어든 유럽의 경제는 전역에 걸쳐 뚜렷한 축소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農業生産은 전반적으로 위축되고 耕地는 내팽개쳐져 있었으며, 봉건영주의 수입은 크게 감소하였다. 상업에 있어서도 중세 상업도시가 쇠퇴하고 외국무역이 축소되었다. 이는 중세 봉건적 영주경제를 주축으로 하는 유럽 경제의 쇠퇴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14세기 이전과 16세기 이후의 경제 발전의 사이에 나타나는 경제적 쇠퇴를 흔히 ‘封建的 危機’라고 한다.이러한 봉건적 위기의 원인으로는 우선 14세기 중엽의 ‘黑死病’을 정점으로 하는 거듭된 전염병을 들 수 있겠다. 또한 이와 같이 찾아온 ‘百年戰爭’을 위시한 봉건 전쟁이 커다란 원인이다. 그러나 이보다도 더욱 중요한 원인으로는 莊園制(Grundherrschaft)의 해체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미 13세기에 접어들면 영주계급의 화폐 수요가 늘어 賦役의 金納化는 진전되며, 이에 따라 순수장원제가 성립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15세기의 농촌에서의 생산력의 향상은 농촌공업에도 미쳐서 농민의 화폐 수요 또한 강화되어 결국 金納化는 급속히 진전되었다. 金納化 현상은 화의 붕괴는 더불어 중세적 세계 무역체제를 붕괴시켰다. 중세적 세계 경제에 있어서 상업 활동은 기본적으로 領主的 경제체제와 결합되어 있었다. 그러나 왕권과 국민국가가 형성됨에 따라 차츰 규제가 강화되면서, 결국 국민경제의 벽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던 것이다. 즉, 장원제의 해체와 농촌의 사회적 분업의 전개 및 농촌 공업 발달이라는 양상은 遠隔地 상업의 특징이 강한 중세의 세계 경제를 허물어 버렸다.2. 제 1 차 Enclosure 現狀의 展開 樣相일반적으로 Enclosure 현상은 영국에서 크게 두 번에 걸쳐 나타난다. 물론 근대화 과정이 진전됨에 따라 유럽 여기저기에서 이와 비슷한 토지개혁의 움직임이 있었으나, 영국의 경우가 가장 역사적 성격이 뚜렷하고 철저히 수행된 예를 찾기는 어렵다.Enclosure란 일정 규모의 독립된 農庄이나 放牧地를 조성하는 것이다. 생울타리나 혹은 돌담으로 둘러싸 다른 사람이 경영하는 농지와 구별되면서 자주적 경영이 가능한 토지를 조성하는 토지를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형태의 토지는 13세기에 이미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의 주체가 누구인가에 따라 의미는 크게 달라지며, 여기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Enclosure는 독립 농지를 조성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중세적 토지소유구조를 파괴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점차 완성되어가고 있던 소부르주아적 발전에 적합한 농업?토지구조를 창출하는 역할을 수행한 토지개혁 운동으로서의 Enclosure이다.이러한 Enclosure는 크게 小農 인클로저(Enclosure by peasantry or small Enclosure)와 牧羊 인클로저로 나뉘는데, 양자는 상호 복잡한 관련성을 가지면서 진행되다가 종국에 가서는 합류하게 된다.1. Enclosure by peasantry or small Enclosure(小農 인클로저)14세기가 지나면서 농민들은 아직 중세의 전통이 남아있는 와중에서도 점차 상품 생산적 농업에 눈뜨게 되었다. 그에 따라 경제적 합리성에 민감하게 되었고, 이를 추구하기 위해농민 스스로에 의한 Enclosure는 농업 경영의 수익성, 생산성, 시장에 대한 탄력성 등에 있어서 과거의 三圃制와는 비교할 수 없는 위치를 점하고 있었으며, 더불어 과거의 봉건적 영주 경제로부터의 탈피에도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농민경영의 발전은 貧富의 양극분해를 가져왔기에, 점차 새로운 형태의 대규모 농업과 대규모 목축경영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그 주체는 Gentleman으로써 農業資本家의 성격이 매우 농후하였다.2. 牧羊 Enclosure小農 Enclosure와는 별도로 大牧羊經營의 창출을 위한 Enclosure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이것은 중세 이래의 촌락을 근저로부터 말살하였기에, 소농 Enclosure와는 다르게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그 양상을 살펴보면, 우선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것보다 그 綜劃의 비율은 낮았다. 1455년부터 1637년에 이를 때까지도 전국토의 기껏 2.1%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비율도 지역차가 매우 컸다. 중부의 9개 주는 8%에 달하는 고율을 보였는데, 이는 이 부근의 농촌모직물공업지대가 발달하였기에, 모직물의 수요가 컸기 때문이다. 또한 농촌에서 추방된 농민은 34,262명이었다.) 물론 이와 같은 수치는 어디까지나 왕실에 의해 조직된 ‘Enclosure 억제 위원회’에서 보고한 것을 근거한 것이며 실제 수치는 이보다 훨씬 높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Enclosure에 의해 생겨난 廢村(Lost Village)는 1518~68년 사이에 잉글랜드 중부의 11%에 달한다는 연구 또한 발표되었기 때문이다.이러한 Enclosure의 일반적 실행자는 신흥 중소지주층(esquire, gentry)이었다. 이들은 영주재정의 핍박을 틈타 대부분의 영주의 토지를 구입하였다. 그렇기에 이들은 이전의 농업경영을 버리고 많은 이익을 보장)하는 목양업)에 자신의 토지를 맡겼던 것이다. 초기에는 지주가 직접 경영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 借地 農業家나 牧羊業者에 의해 경영되었으며, 이에 따라 지대는 농민의 잉여노동을 수취하는 가 되었다.이에 국가는 救貧法으로 대처하였는데, 이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매우 가혹했다. 노동능력이 있는 자에 대해서는 慈善的인 施輿를 금지하였고, 각종의 형벌로 노동을 강요하였으며, 여왕치하의 1576년 법률에서는 지방단체가 강압적으로 각종 산업에 취업시켰으며, 不應할 경우 가혹한 형벌을 가했다. 최소 1개월에서 6개월간의 구금과 매질이 가해졌으며, 再犯者일 경우에는 投獄하여 烙印이나 귀나 코를 자르는 형벌을 가했다. 1610년, 1722년, 1782년, 1843년의 개정을 통하였으나, 이 가혹함의 정도는 여전하였으며, 1948년에 들어서야 진정한 社會保障制度로 발전하였다. 프랑스에서는 1571년의 무앙 法令, 1656년의 勅令이 이에 해당한다. 이렇듯 가혹한 상황에 있어서 농민들은 무력으로 Enclosure 현상에 대응하기도 하였다. 국가도 법률)로 Enclosure현상을 제재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시대의 흐름에 조응할 수밖에 없었다.4, Enclosure 現狀의 結果Enclosure는 이러한 참상에도 불구하고 영국 농업을 봉건적 생산관계에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로 전환케 하였다. 共有地도 대상으로 하여 共同體的 所有規制를 소멸시켰으며, 왕의 간섭과 三圃農法의 규제도 적용의 여지를 잃음으로써, 비로소 근대적 토지 소유관계가 명확해졌다. 그리고 토지는 완전 私有의 형태를 띠게 되고, 추방된 부랑인은 상대적 規制人口로서 賃勞動에 고용되었다.이에 따라 영국의 농업은 三分割制의 완전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 三分割制는 地主?農業資本家?農業勞動者의 분리를 전제로 하는 자본주의적 농업경영형태를 말하는 것인데, 이처럼 Enclosure를 시작으로 영국의 농업은 자본주의적 성장을 겪게 되었다.농민은 小農 Enclosure로써 大借地農(tenant farmer)으로서 자본가적 상승을 하고 gentry 등은 小資本家層을 형성하여 그 규모와 면적은 확대되어 갔다. 반면 한때 농민의 황금시대를 대표하던 yeoman(獨立自營農民層)은 계층 분해로 소멸되었고, 그 부는 자본가적 부의 형성서로 4년 주기로 돌려짓기를 한다. 따라서 三圃農業에서는 없앨 수 없었던 休閑地가 필요 없고, 농업생산력을 크게 높일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러한 輪栽式 농법의 합리성을 깨달은 영국은 적극적으로 이 농법을 수입하였고 18세기 초에는 전국에 보급되었다. 그러나 이 농법은 대농지경영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개방 경지의 소농상태에 머물고 있는 한에는 그 효율성을 볼 수 없었다. 그렇기에 A. Young(1741~1820)등은 大農化를 위한 Enclosure를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이것은 당시의 국가에도 받아들여져 전국적으로 토지개혁이 시행되었다.大農企業者(tenant Farmer), 牧羊業者(grazier) 그리고 이들에게 토지를 貸用 賃貸한 지주들도 농업생산량 확대에는 매우 커다란 유혹을 느꼈다. 이들은 Enclosure를 필요로 했으며, 18세기에는 Enclosure가 지주층의 적극적인 주도와 보호 아래 진행되었다. 이것은 정부의 정책에도 반영되어 1709년의 綜劃法에 의해 정부와 의회는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즉 16세기 이전의 Enclosure가 暴力的?非合法的 牧羊 Enclosure임에 비하여 이제는 평화리에 농경 Enclosure가 추진되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를 議會 Enclosure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러한 가운데 1760~1840년 사이에 Enclosure는 급진전하고 농촌공동체의 거점인 共有地도 18세기에 이르면 완전히 소멸하였다. 더불어 영국의 농업생산량은 급격히 향상되어 인구증가에도 불구하고 小麥需要의 90%이상을 자급할 수 있었다.그러나 역시 이 가운데에서 농민은 대규모적으로 추방되었다. 물론 약간의 토지나 금액을 보상받았으나, 이것은 생계에는 거의 무력했으며, 결국 임노동자로 전락하였다. yeoman 또한 마찬가지로 한때 民富의 主軸이며, 영국사회의 주요 계층이었으나, 이제는 결국 임노동자로 전락하거나 Enclosure에 적극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4. Enclosure 現狀의 結果와 以後의 農業의 處地이와 같은 농민층의 분해과정에.
1. 기독교 이전의 로마의 종교1 로마에서의 종교1) 고대 로마 사회에서의 종교의 의미고대사회에서의 종교는 현재와는 많이 다르다. 특히 지중해 고대 세계에서 지금처럼 신학적 체계와 조직을 갖춘 하나의 실체라고 본다면 이교주의의 최종형태를 제외하고는 그런 '종교'가 존재하지 않았다. 특히 로마에서는 종교가 법 또는 정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는데, 도시국가 로마가 확장되고 다른 민족과의 접촉이 빈번해지면서 국가의 종교와 법은 둘 다 확대되었다. 즉, 고대 로마의 종교는 일종의 공동체의식, 나아가 사회나 정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정치적 엘리트들이 종교적인 영역에서도 여전히 엘리트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라틴어에서 종교를 뜻하는 용어는 'religio'이다. 이는 대개 국가의 신들에게 표해진 관례적인 경배이다. 즉, 'religio'는 공적인 국가신들에 대한 공적인 행위를 의미하는 용어이며, 종교라기 보다는 신들에 대한 의례 행위였다. 그리고 이것은 어떠한 면에서는 거래의 형식을 띠고 있었다. 로마의 신들은 대개가 수호신인데 로마를 지키는 것은 유피테르를 비롯한 신이고 농업은 케레스 여신이, 포도주 제조는 바쿠스 신이, 경제력 향상은 메르쿠리우스 신 등등 이렇게 수많은 신들이 자신들을 지켜준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리스와는 달리 수없이 많은 신들이 살게 된다. 이것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지만 종교적으로 원시적인 로마인의 성향이 낳은 결과이다. 또한 타민족의 신들도 배척하지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아마도 신은 모두 수호신이니까 많으면 많을수록 구석구석까지 지켜줄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키케로가 말했듯이 로마인이 종교, 신에 대한 숭배에 관한 한은 다른 민족보다도 우월하다고 말한 이유를 알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숭배는 그만한 결과를 바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열성적으로 하는 것일 것이다.그러나 폴리비우스는 우매한 평민들에게는 신들에 대한 두려움이야말로 로마의 공공안녕을 유지하는 가장 좋은 도구라고 하면서 종교의것이다.2) 초기 로마 종교, 즉 이교주의의 의미흔히 그리스 로마의 다신교를 기독교에 대비되는 의미로 이교(異敎)라고 표현한다. 이교주의(paganism)의 어원으로는 라틴어의 'paganus'를 드는데 이는 그리스어의 'Hellenes'라는 단어와 관련이 깊다. 슈벵(P. Chuvin)은 'paganus'를 'pagus',즉 자신의 거주지, 조상의 유산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보았다. 조상의 종교로서 전통적 관행과 믿음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는 후기에 2세기 켈수스나 4세기의 율리아누스 황제의 기독교 비판에서도 보이는 바이다. 그러므로 'paganism'이 당시에 오래 전부터 존재하던 전통적 종교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다. 그리고 'Hellenes'는 처음에는 그리스인, 그리스적인 것, 그 문화를 따르는 자를 의미했었는데, 4세기 경부터는 서서히 고대 종교의 보유자란 의미로 쓰였다. 이때는 부정적인 의미는 없었다. 율리아누스 황제가 그 예이다. 그러나 이것이 후에 기독교가 정통 종교가 된 이후에는 '정통종교를 가지지 않은 자'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담게 된다. 즉 더 이상 기독교 국가인 로마의 정통적 계승자인 '로마누스(Romanus)'가 아니라는 경멸의 용어가 된 것이다. 이것은 당시에 헬레니즘 문화가 기독교에 가장 커다란 적임을 보여준다.2. 초기 로마 종교의 특성과 성립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종교는 다신교이다. 로마의 신들은 그리스에 비해 인간으로서의 형상화 과정이 덜 되어 개성도 없고, 성의 구분조차 불완전하다. 고유한 신화도 없고 창세신화, 종말 신화, 거기에 따른 인간의 역할을 노래한 신화조차도 없다. 실제로 로마인들의 종교는 영토의 확장과 더불러 확대되었다. 토착 신(dii indigetes)과 후의 외래 신(dii novensiles)들이 한데 섞이는 것이다.1) 기독교 이전 로마 종교의 특징로마 초기 종교의 특징은 매우 지역적이며, 가정적이라는 것이다. 각 신들은 특정한 지역, 활동과 연결되어 있다. 로마인의 초기 종교누스(농장 경계의 신), 페나테스(찬장의 신), 라레스(가정의 신), 팔레스(가축과 목장의 신) 게니우스(정령) 등의 신들이 로마인들의 가정과 일상생활 곳곳에 있다.이러한 가족 혹은 씨족의 수호 정령을 숭배하는 믿음은 로마 제국 말기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사회의 발전에 따라 같이 발전했다. 이를테면 게니우스는 나중에 황제 숭배로 연결된다.2) 국가적 공식 신앙의 성립로마가 도시국가적 형태를 갖추기 시작할 무렵 로마인들은 유피테르(Iuppiter), 마르스(Mars), 퀴리누스(Quirinus)의 세신을 섬기게 된다. 이 신들은 후에 외부와의 빈번한 접촉을 통해 공식적인 로마의 12주신이 성립된다. 유피테르(Iuppiter), 유노(Iuno), 넵투누스(Neptunus), 플루토(Pluto), 베스타(Vesta), 케레스(Ceres), 아폴로(Apollo), 베누스(Venus), 불카누스(Volcanus), 디아나(Diana), 미네르바(Minerba), 마르스(Mars), 메르쿠리우스(Mercqurius) 등이 그것이다. 이 12신 이외에도 바쿠스, 헤라클레스, 큐피트 등의 신들도 인기가 좋았다. 동시에 소아시아 지역에서도 아시아 계통의 신들이 유입되었다. 그리고 로마의 신들이 다른 곳에서는 그곳에서 숭배되는 신들과 융합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로마에서는 추상화 된 힘이 그 자체로서 신격화 되는 경우도 있었다.로마 종교의 특징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1 - 국가종교 : 로마의 종교는 국가에서 관리하는 것이었다. 로마의 종교는 개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중개인을 필요로 했다. 이러한 중개인,즉 성직자들은 로마에서는 선거에 의해 임명되었다. 즉, 어떠한 종교적 훈련기간을 거치지도 않았고 정신적인 소명감이 필요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즉 이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국가 공무원과 같은 위치였다.2 - 관용성과 보수성 : 로마는 그 영토를 넓혀가는 동안 수많은 다른 신들과 마주쳤기 때문에 그 많은 신들을 모두 자신들의 신으로 편입시켰다. 그러나 반면으로는현실 세계의 어려움으로부터 개인을 구할 수 있다고 확실하게 천명한다. 즉, 악령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그것을 퇴치하는 모습을 제시한 것이다. 둘째로 혼란에 빠져있던 로마인들에게 안정감과 소속감을 주었다. 기독교의 신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확실히 구원을 약속하였다. 셋째로는 박해에 맞서 싸운 기독교인들의 용기이다. 로마에서는 공적으로 기독교를 박해하였으나 오히려 이러한 박해에서 기독교인들이 보여준 용기가 신의 압도적인 권능이 존재한다고 믿게 하였다. 그리고 기독교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는 모든 구성원을 보호하고 고난에서 구해줄 수 있는 장치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로마 정부를 믿을 수 없게 된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4) 기독교의 공인3세기 이후의 격렬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경험한 로마인들은 당대의 위기에 대해 종교적 전통의 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전통으로 복귀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전통적 제례들을 철저히 준수함으로써 제국의 안정이 회복되고 과거의 영광이 재현될 것을 기대하였고, 전통적 신과 황제에 대한 숭배를 거절하는 것을 신의 분노를 유발하는 범죄행위로 해석했다. 그러한 이유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Diocletianus, 284~305년)에게는 전통적 제례 중에 십자를 그으며 전통적 제례를 거부한 기독교인의 행위는 신성모독 뿐만 아니라 반역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의 박해가 250년과 303년의 대대적인 박해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는 제국 전체적으로 전통적 종교로의 회귀를 추진하였음을 나타낸다.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인 문제가 황제의 관심사가 되었다는 자체가 이미 기독교가 제국 내에서 대단한 위치를 차지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Constantinus,306~337년)가 기독교를 공인한 것은 이들이 가진 현실적 능력과 가능성을 인정하고 이것을 통해 제국을 유지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에게 굉장한 성리고 평민 출신의 신흥귀족계급은 구 귀족계급과는 달리 전통적 문화나 종교에 그리 큰 애착도 없었기 때문에 세속적 목적을 위해 자발적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점차 기독교는 귀족들이 자신들의 세속적 권력을 확장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대중기독교화가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100 여년 후인 430년 경이었다. 그리하여 5세기 중엽에는 로마제국에서 이교도를 찾기가 힘들어졌다.물론 모든 지역에서 고루 이러한 기독교화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동로마제국에서는 비교적 빨리 이러한 기독교화가 이루어졌다. 이는 율리아누스 황제(Julianus, 361~363년)가 기독교를 배척하고 이교문화를 부흥시키려 했을 때의 시민들의 반응으로 알 수 있다. 그들은 대부분 매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에 비해서 서부는 기독교화가 늦었다. 서부에서는 4세기 말의 심마쿠스(Symmachus) 등의 반대 운동은 매우 완강하였다. 430년 경에 이들의 후손조차도 모두 기독교인이 된 후에야 서방의 기독교화가 달성되었다.2) 고전문화와 기독교의 경쟁4세기 무렵의 로마 세계의 지적 환경에서 종교는 단순한 신앙이라기보다는 지적 안내자의 역할이 중요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구세주보다는 스승으로 인식했다. 그래서 오리게누스(Origenus,185~254)와 같은 기독교 학자들은 현자가 되려면 하느님의 음성을 들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스승으로서의 기독교가 강화되어가자 이교도 철학의 입지가 줄어들어갔다. 그리고 철학도 종교적인 면에서 기독교에 도전하였는데, 진리를 통한 영혼의 구원이라는 신앙적 측면도 중요시했기 때문이다.로마사회에서의 철학과 기독교의 주교가 벌인 주도권 다툼은 때로는 폭력으로 얼룩질 수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정한 우위는 적당히 학문적이고 개방적이며 탄력적이라는 것이었다. 기독교는 이미 고전 문화를 흡수하여 고전 문화의 기독교화에 성공했다. 그리하여 4세기 경에는 주교와 철학자의 차이는 교회를 가느냐 아니냐의 차이 외에는 다를 것이 없게 되었다. 또 기독교가 이길 수 있되었다.
맑스 이전의 경제사상- 경제사상의 춘추전국시대 -발표에 앞서이 글은 아담스미스에서 밀에 이르는 이른바 ‘고전 경제학파’에 관한 것이다. 고전경제학파의 정치경제학은 오늘날 ‘주류 경제학’의 형성과 발전에 사상적,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현대 자본주의를 이해하는데 초석이 될 뿐만 아니라 17 ~ 19세기의 유럽사를 보다 구조적으로 바라보는데 있어 반드시 거쳐 가야할 오아시스와도 같다. 그런데 ‘모든 사상은 사회적으로 사유화된다.’라는 정치경제학적 명제는 개개 사상가들의 복잡 다단한 이론적 측면보다는 그들의 입장, 말하자면 그들의 사상이 자의든 타의든 어느 계층, 혹은 어느 계급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었나를 봐야할 필요를 느끼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개별 경제학자들보다는 ‘경제학설사의 춘추전국시대’에 그 각 경제학자들이 대변했던 ‘이해관계들 간의 격돌’에 주목해야 한다. 개별 경제학자들의 치밀한 논리에 갇히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우리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강건하게 지탱해주는 소위 주류문화와 상품관계를 살펴보아야 한다. 상품관계라는 내부의 복잡한 이해관계는 이를 대변하는 주류문화, 혹은 대세라는 이데올로기로 미화?은닉되고 있으며, 이러한 자본주의 구조에 대한 분석은 고전경제학파가 궁극적으로 동일한 입장 -상이한 것처럼 보이지만- 에 있음을 흐림없는 눈으로 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개미와 배짱이 우화’는 과학인가, 이데올로기인가?실제로 개미에 관한 생물책의 기록을 보면 개미는 하나도 부지런하지 않다. 내내 놀다가 겨우 베짱이가 고생고생해서 파놓은 자리를 떼로 몰려가서 빼앗고 차지하는 놈들이다. 그런데 개미는 여름 내내 부지런히 일해서 겨울에 편히 지내고, 베짱이는 여름 내내 놀다가 겨울에 개미네 집에 찾아가 동냥한다는 얘기는 무엇인가? 이 우화는 이데올로기이다. 열심히 일하라는 얘기이다. 열심히 일하면 성공한다는 이 우화는 과학의 외관을 갖춘 아주 강력한 이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때문에 경제적 요인의 규정과 결정, 우위론 어쩌면 “에이 이놈의 삽!”하고 괜히 고장낼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비효율이다. 그런 시대에서 농노제로 옮겨가자 농노에게는 결혼과 가족구성의 자유가 주어지게 되고, 일정한 자기 텃밭을 가꿀 수 있게 되었으며, 완전한 노예가 아니라 일정한 사적 공간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데서 전대의 모순은 후대에서 일정하게 극복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노예노동을 기반으로 했던 사회에서 농노의 노동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로, 다시 이 관계가 해체되고 자본과 임노동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로 이어진 것이다.『노동계급의 탄생과 봉건제의 붕괴‘노동계급’이라고 하는 것은 ‘사회적 형태로서의 노동계급’을 말하는 것이다. 이 노동계급의 문제란 ‘사회적 생산의 담당계급을 누가 장악하느냐?’의 문제이다. 일단 우리가 ‘이름의 관념’속으로 들어가지 말고 현실 속으로 나와야 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질문해 보자. ‘무엇을 많이 소유한 사람이 주인인가?’ 〈주역〉에 보면 ‘음양오행설’이 나온다. 여기서 ‘오행’이라는 것은 ‘水, 火, 金, 木, 土’를 가리킨다. 이는 사실 당시의 생산관계에서 ‘다섯가지 자원’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에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당시가 고대사회, 신분제 사회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신분제가 붕괴하고 사람이 독립된 자원으로 활용되기 시작하면서 이른바 ‘인적자원’이라는 것이 중요한 수단으로 등장하게 된다).우리는 이 ‘노동계급의 탄생, 혹은 등장’이라는 개념을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바꿔야 한다. ‘노동력의 지배구조가 누구의 지배로부터 누구의 지배로 바뀌었는가?’ 영주의 지배에서 자본의 지배로 바뀌는 이 관계를 ‘사회구조 내에서 누가 장악했는가?’로 되물어야 한다. 그리고 이 ‘인간지배, 인적 자원의 담당’이 지금 현재에도 가장 핵심적인 권력이다. 그런데 어차피 노동만으로는 생산이 불가능하다. 노동이 생산을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자본과 결합해야 한다. 그래서 노동이 자본과 수평적으로 결합하는가? 우리들이 알고 있다시피 노동은 자본에 복속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 관심을 끄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크레마티스티케〉를 혐오함에도 불구하고, 시장 활동에 도덕적인 면뿐만 아니라 분석적인 면도 있음을 처음으로 감지한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The Nichomachean Ethics)에서 “화폐는 모든 것을 측정하는데, 그 결과 사물 서로간의 초과량과 부족분을 측정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화폐는 구두 몇 켤레가 가옥 한 채 또는 한 끼 식사와 맞먹는가를 계량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참고로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그의 예술론에서도 나타난다. idea와 copy를 이분하여 idea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copy의 존재를 혐오했던 플라톤과는 달리 copy안에도 본질이 존재할 수 있다고 보아 예술의 힘을 일견 긍정적으로 이해했던 것이다.3. 토마스 아퀴나스아퀴나스와 아리스토텔레스는 경제적 행위가 야기하는 물질적인 결과보다는 도덕적 측면에 더 관심을 두었다는 점에서 서로 비슷하지만, 흥미로운 차이점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에코노미아〉와 〈크레마티스티케〉를 구분하면서, 모든 상행위를 〈자연스러움〉과 〈비자연스러움〉이라는 측면에서 구분하는 합리적인 방법을 택했지만, 아퀴나스는 상행위의 특성에 대한 자신의 평가보다는 자신의 판단 기준에 의거하여 모든 상행위를 합법화 또는 불법화하고 있다. 그 바탕이 신약성서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에서 “마태복음 7장 12절에 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물건을 값어치보다 비싸게 주고 사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누구든 다른 사람에게 값어치 이상으로 비싸게 팔아서는 안된다”라고 하는 것이다.경제학의 영역을 가치의 문제로 인식하던 시대는 라는 전혀 새로운 문제를 탐구하는 시대로 바뀌게 된다. 이 새로운 시대에는 아리스토텔레스나 아퀴나스가 제기했던 문제들은 거의 이해할 수 없게 된다. 형이상학적 존재, 혹은 신에 의한 인간 지배에서 시장과 자본이 인간을 지배하는 사회로 점차 변하게 되는 것이다. 육체와 정신, 즉 인간 주체를 계속된 방법론적 회의를 통해 암흑 속에서 그 제도에 기생하면서 이윤을 생산하고자 하는 생산형태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미리 생산자금을 대여했던 ‘선대제’같은 제도가 있다. 기존의 제도로 이윤이 생산되는 구조에서 이후의 역사진행을 이 중상주의와 상업자본이 억제하고자 했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게다가 이러한 생산형태는 기존의 생산조직의 발전을 저해한다.) 결국 이러한 중상주의는 여타 중상주의 국가들 간의 ‘금은 확보경쟁’을 발생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 즉 생산력은 일정하게 정체된 환경에서 유럽으로 유입된 막대한 양의 금은은 마침내 ‘가격폭등, 혹은 가격혁명’을 유발시킨다. 기존의 생산력 발전이 절실히 요청되게 된 것이다. 한편 이러한 과정에서 당시의 생산자였던 산업자본과 농민들은 엄청난 피해를 받게 된다.스미스의 생산력 성장주의정리하면 상인자본과 산업자본 간의 모순관계가 심화되었다는 것이고, 스미스는 이러한 대결구조에서 산업자본의 편에 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미스는 당시로서는 역사발전의 진보적 입장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생산력의 성장(그의 분업론과 관련하여)을 중시했던 입장을 가리켜 흔히 ‘생산력 성장주의’라고 한다. 예컨대 ‘우선은 파이의 크기를 키워야 한다.’는 주장이 가장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비록 당대에는 진보적인 관점이었으나 스미스는 점차 물질(상품)과 생산력 중심으로만 나아갔다. ‘노동’이란 결국 ‘인간, 혹은 사람’인데 물질의 생산주체로서의 노동이 오히려 물질의 생산요소로 종속, 전락해간 것이다.시장에 대한 스미스의 견해와 그의 한계아담 스미스의 Key-words는 다음 두 가지이다. 바로 ‘인간본성’과 ‘시장’이다. 이 중 ‘시장’에 관해 말하자면, 이 당시에는 독점시장이란 아직 존재하지 않을 때이다. 이른바 자본주의의 맹아와 초기자본주의적 양식들이 막 발아하고 있을 당시로서는 이른바 ‘자유경쟁시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시장이 가격결정, 생산량 결정, 자원 분배를 결정했다고 보며, 이 시장기능을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몰하는 썩은 늪지대 주변에 마을을 건설하도록 하며, 병균이 득실거리는 우물 입구를 폐쇄하지 말 것과, 동시에 이러한 병자들을 치료하고 꺼져가는 생명을 구제하려는 자들을 비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될 수 있으면 잘 죽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이 등장한 것 역시 나름대로의 배경을 가진다. 당시 영국의 인구는 400만에서 800만으로 급증했으며, 감자열병이라는 병충해가 발생하여 식량부족 사태가 터져 기아자가 속출했기 때문이다.“인구는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식량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며) 과잉인구는 알아서 자동적으로 감소할 것이라고 주장한 그의 인구론은 결국 자본주의 경제구조의 해부에서 ‘공황론’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공황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곡물법을 위한 맬더스의 변명’을 알아봐야 한다.곡물법을 위한 맬더스의 변명먼저 이 곡물법 사건의 역사적 배경을 알아보자. 당시 나폴레옹이 영국을 고사시키고자 ‘대륙봉쇄령’을 내린다. 당장 유럽대륙에서 밀의 유입이 끊기자 영국의 밀가격은 폭등한다. 당연히 지주들은 폭리를 취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패전하자 이 대륙봉쇄령이 풀리고 대륙의 값싼 밀이 수입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당시 지주들로 구성되어 있던 영국의 의회에서는 이른바, ‘곡물수입 반대법’을 제정하기에 이른다.그런데 이렇게 값싼 곡물의 수입이 되지 않으면, 산업자본가들은 그야말로 엄청난 피해를 받게 된다. 주식이 밀이었는데 당장 밀 가격이 비싸면 고임금이 형성되고, 그렇게 되면 생산비가 많아져 자연히 상품가격도 올라가 상품의 판매부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수입제한 조치는 국가간 상호 수출입에 수많은 장애들을 발생시키게 된다.바로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맬더스가 곡물의 수입을 반대하는 것이다. 맬더스의 곡물수입 반대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이다. 첫째, 국가는 식량은 자급해야 한다. 둘째, 저곡가는 저임금을 낳게 되고 산업자본을 뒷받침하게 되어 노동자 생활을 궁핍하게 만들고 농지를 축소시키며 농 있다.
바람직한 교사-바람직한 사회과 교사-“왜 우리들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사회를 가르쳐야 할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바람직한 敎師像에 대해 생각해보자. 교사는 현재 살고 있는 사회라는 공간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도록 동반자적 역할을 해야 한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학교교육을 통해 사회화를 하는 학생들에게, 사회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을 가지며 좋은 시민이 되어야겠다는 생각만을 심어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선동적이고 이데올로기적 사회(즉 근대 민족과 민족주의 사회)는 정체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근대시민이라는 허울로 눈을 가린다. 자아정체성과 사회에 대한 판단능력이 아직 미숙한 학생들에게 이것보다 위험한 눈가리개는 없다. 교사의 역할은 이러한 눈가리개를 없애려고 시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사가 이러한 역할을 충실히 할 때 학생들은 현대 사회에 도움이 되는 어떠한 것들을 말할 수 있으며 사회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울 것이다.그렇다면 학생들 스스로 문제해결 능력을 키우기 위한 교사의 바람직한 역할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교사는 복잡한 사회현상에 대하여 객관적이고도 합리적인 사고를 가지고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다. 최근 중국의 국가적 프로그램인 ‘東北工程’의 역사적 왜곡에 대한 교사들의 수업목표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첫째, 교사들은 감정만을 앞세워 중국의 논리에 대응하여 학생들에게 우리민족의 우수성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중국에 대한 적개심을 심어주는 ‘식민지적민족주의’에 호소해서는 안된다. 둘째, 역사 사실에 대한 중국의 주장이 정치적 목적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합리적 대응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시각차를 좁혀 나가고 서로의 이해를 확대하여 왜곡된 것을 시정해야 한다는 것을 학생들 스스로 깨닫게 해 민주적 사회에 적응하는 법을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다음으로 교사는 함께 살아가는 법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우리 사회는 사람들마다 서로 다른 생각과 행동양식을 보여준다. 다양성이 강조되는 사회에서 함께하는 사회 그리고 대화와 타협이라는 기술을 익힐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실이라는 닫힌 공간에서 학생들에게 함께하는 사회를 교수학습하기에는 많은 애로사항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교사가 있는 것이다. 바람직한 교사는 학생들에게 수업목표에 맞는 교수학습법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수업시간에 힘들면 방학이라는 긴 시간을 이용해서 학생들이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교사의 적극성이 매우 중요하리라 생각된다.
- 목 차 -Ⅰ. 서론Ⅱ. 다문화 이론1. 다문화 교육의 개념2. 다문화교육의 이념적 기초3. 다문화교육의 목표와 성격4. 다문화 교육의 영역Ⅲ. 교과서 분석1. 지역2. 장애인3. 계급4. 계층5. 그 외Ⅳ. 대안1. 교육과정 및 교과서2. 교실수업Ⅴ. 결론Ⅵ. 수업1. 단원명2. 단원 설정의 이유3. 지도상 유의점4. 수업 지도안5. 학습 자료※. 참고 및 참고문헌Ⅰ. 서론초 중학교를 다니다보면 이른바 발달장애인라고 불리는 아이들을 한명 정도는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된다. 그런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겪게 되는 가장 큰 문제는 부적응이다. 왜 그 아이들은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일까? 물론 학교라는 제도권 교육 자체에 대한 부적응도 있겠지만 실상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따돌림이다. 적어도 학교에서 그 아이들은 친구도 없고, 믿고 의지할 사람도 없다. 무엇이 그 아이들을 외톨이로 만들었을까?다문화 교육에 대한 접근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해야 한다. 자신과 다른 생김새, 다른 생각, 다른 피부, 다른 성장환경을 가진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 씀씀이를 가지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다문화교육인 것이다.어떤 사람은 우리나라에서의 다문화 교육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애초에 다문화 교육에 대한 연구 자체가 미국의 흑백문제에서 시작이 되었고, 우리나라는 단일 민족국가이므로 그러한 논의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단일 민족이라는 단어 자체에도 이미 모순이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국적을 가진 백인, 흑인, 혼혈인종들은 분명 우리와 다른 피부를 가지고 있지만 그들도 한국인이다. 하지만 우린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우리민족은 단일민족이라고 배워왔다. 자랑스러운 단일민족국가인 대한민국에 다른 피부, 다른 생김새,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우린 이미 세뇌되어 왔는지도 모른다.다문화 교육에 관한 논의는 인종에 관한 문제로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최근에는 세계화와 다원화라는 사회변화 의미에서 다문화교육은 교육에 대한 하나의 철학이며 신념이자 그러한 신념의 구현을 추구하는 교육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4. 다문화교육의 영역다문화교육은 초기에는 주로 기존의 교과내용에 소수집단의 문화와 관련된 내용을 삽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Gaedke & Shaughnessy, 2002). 예를 들어, 인디언의 이야기, 흑인들의 영웅, 히스패닉의 풍습 등을 교육과정 안에 포함시켜 수업의 자료로 활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다문화교육은 교과교육의 범위를 넘어서 다양한 범위로 확대되어 나가고 있다.다문화교육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Banks(2002)는 다문화교육의 영역을 1)교육과정 및 교과서를 구성할 때 다양한 문화 및 집단과 관련된 사례와 내용을 추출하여 활용하는 내용통합(Content Integration), 2) 암묵적인 문화적 가정, 관점, 편견들이 어떻게 지식이 구성되는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지 학생들에게 이해시키는 지식구성(Knowledge Construction), 3) 교수법과 자료를 활용하여 학생들이 다른 문화 집단에 대해 긍정적이고 우호적인 태도와 가치를 발달시키도록 돕는 편견감소(Prejudice Reduction), 4) 다양한 집단의 학생들이 학업성취를 돕기 위해 교사가 자신의 교수법을 수정하는 것과 관련 있는 평등한 교수법(Equity Pedagogy), 5) 다양한 집단적 배경을 지닌 학생들이 교육적 평등과 문화적 능력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학교의 문화와 조직을 재구조화하는 과정과 관련 있는 학교 문화재조직(Empowering School Culture)의 다섯 가지로 나누어 제시한다.우리는 이제까지 다문화 교육의 개념, 이념적 기초, 목표와 성격, 영역 등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항목들은 기존의 미국의 연구를 정리한 것으로, 우리나라 실정에 딱 맞는 것은 아님을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번 발표에서는 미흡하나마 다양한 범위의 다문화교육 영역 중에서 지금 우리사회와 관련성이 깊은 지역, 장애, 계급/다. 물론 그것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설정에 있어서도 악영향을 끼친다.3. 계급- 성장 중심의 서술과 자본가적 입장에서의 서술사회교과서에서 사회 계급과 관련한 부분, 즉 자본가 및 노동자와 관련된 내용은 주로 경제부분에서 찾을 수가 있다. 경제와 관련해서 핵심적으로 생각해 볼 것은 교과서가 성장과 분배 중 어느 부분에 더 초점을 두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즉 성장을 중심으로 교과서가 구성되어 있을 경우, 이는 자본가(사회의 강자)적 입장에서 교과서를 서술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반대로 분배가 강조되어 있을 경우에는 노동자나 사회 약자의 입장이 많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 사회교과서에서는 성장이 매우 강조되고 있다. 그것도 삶의 질적인 성장이라기보다는 이른바 국내총생산(GDP)으로 대표되는 양적인 성장이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성장 중심적인 교과서의 시각은 경제부분의 소단원 제목들을 통해서도 알 수가 있다.1. 국내 총생산이란 무엇인가?2. 나라마다 왜 국내총생산이 다른가?3. 경제성장이란 무엇인가?4. 경제성장에 기여하는 요인은 무엇인가?5.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위의 소단원 제목들은 ‘Ⅷ. 국민경제와 합리적 선택’ 단원의 ‘1. 국민소득과 경제성장 단원의 소단원 제목들’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경제의 중심을 성장으로 보고 있으며 성장의 판단기준을 국내총생산(GDP)에 두고 있다. 이러한 성장 중심 전개의 문제점은 성장의 판단 기준을 국내총생산(GDP)에 두고 전체적 관점에서 성장을 바라봄으로서 부의 분배라는 경제의 또 다른 부분을 설명하고 있지 못하는 것이다.성장 중심의 교과서 전개는 다음을 통해서 보다 명확하게 알 수 있다.p229 19세기에 세계제일의 경제력을 보유하였던 영국은 20세기 들어 소위 ‘영국병’ 이라 불리게 된 지속적인 생산성의 하락과 수출 시장의 축소를 경험하였다. 이러한 ‘영국병’의 원인은 정부 주도의 산업 육성 정책, 공공부분의 지나친 비대화, 강성 노조로 인한 노동시장의 경직성 등에 있었다. 특히, 국내 총는 것이며, ‘열심히 일하는 자’라면 자영업자든, 농민이든, 자본가든 전부 ‘근로자’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라는 교과서는 ‘현대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경제 체제와 경제 이론을 주요 분석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렇기에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임금노동자를 지칭하는 ‘노동자’를 대신하고 있는 ‘근로자’라는 용어의 사용은 적합하지 못하다. 거의 임금노동자를 지칭하고 있는 교과서 내의 ‘근로자’를 대체하여 ‘노동자’란 용어를 사용하여야 한다. 교과서는 ‘근로자’란 용어를 통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를 억압하고 있는 자본가의 입장을 교묘히 은폐하고 있다. 우리는 노동부, 노동조합 등의 용어만 보아도 어떤 용어가 합당한지 알 수 있다.또한 자료의 제시에 있어서 주로 자본가가 중심이 되는 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하고 있는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p35 [탐구 활동 2] 시장 경제 체제와 계획 경제 체제의 장단점 비교자료1) 계획 경제 체제의 등장 배경봉건 사회에서는 신분을 기준으로 차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근대 사회에 들어와 민주주의가 발달하면서 신분에 의한 차별은 사라졌다. 대신 자유로운 경쟁을 통한 이윤 추구가 보장되면서 자본을 ‘소유한 자’와 ‘소유하지 못한 자’라는 두 개의 계급으로 나누어졌다.사회주의자들은 근대 시장 경제 체제가 자유를 중시한 결과 실질적인 평등을 침해했다고 보았다. 따라서 부의 공평한 분배를 통해 실질적인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유 재산 제도를 폐지하고, 국가나 공공 단체에 의해 경제적 배분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다.자료 2) 남북한 국민 총소득(GNI 국내총생산(GDP)에다 교역조건 변화에 따른 무역 손익을 반영한 소득지표.) 비교자료 3) 중국 샤오강촌의 기적열린과제 1. 자료 1를 읽고 계획 경제 체제가 등장한 이유를 설명해 보자.2. 자료 2에서 보면 북한 경제가 남한보다 낙후된 것을 알 수 있다.3. 자료 3은 21세기 중국 경제 체제를 변화시킨 계기가 된 ‘샤오강촌의 기적’에 대해, 한 기자가 당시 샤오강촌의 촌장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되었음에도 사회과에서 이 부분을 다루지 않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혹자는 세계에서 인종차별이 가장 심한 나라가 어디냐는 물음에 주저 없이 대한민국이라고 답한다. 중심사상으로서의 유교와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가 그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세계는 급변하고 있다. 국제결혼이 더 이상 낯설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사회는 개방화 되고 있고, 이러한 개방화의 물결과 함께, 대한민국 내에서의 외국인 혹은 혼혈 문제는 점점 더 커져 갈 것이다. 이제는 교과서, 교육과정에서 그들을 감싸 안아야 한다.- 가족p110 우리나라의 가족법(민법 중의 친족상속편)은 가족을 혼인, 혈연, 입양의 관계로 맺어진 동일 호적 내의 친족 집단으로 규정하고 있다. 즉, 법률에서 규정하고 있는 신고 절차를 따르지 않고서는 가족을 형성할 수 없다. 따라서 혼인하지 않은 동거인이나 미혼모, 동성애자 부부 등은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이 부분은 가족법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데, 여기서 서술이 그친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법률상으로는 혼인하지 않은 동거인이나 미혼모, 동성애자 부부 등은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것도 가족으로 인정해야 한다. 라고 뒷부분의 서술이 이루어져 혼인하지 않은 동거인이나 미혼모, 동성애자 부부 등이 소외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한 교과서 상의 편모, 편부, 결손가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들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은 심어 줘서는 안 된다. 이런 용어 사용도 다문화 교육을 위한 교과서 서술에서 적합하지 않는 지양되어야 할 용어이다.Ⅳ. 대안1. 교육과정 및 교과서살펴본 바와 같이 현재 우리의 교과서는 문화 다원주의적인 경향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계급, 계층, 지역 등 우리는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으나 교과서에는 이러한 다양한 문화들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과정과 교과서의 대폭적인 수정이 필요하다. 교육과정은 모든 학생들이 학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