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 때 붕당의 전환경실 /기사 /갑술 환국경실환국 : 2차 예송에서 승리한 남인을 20세가 된 숙종이 미워하기 시작, 허적의 집에서 잔치가 있었음. 숙종이 기름천막(유악을) 영의정 허적집(남인)에 가져다 주라고 했더니, 유악(군수품)을 이미 가져다 쓰고 있었던거 아니겠나. 열받은 숙종이 허적 및 윤휴를 죽여버림서인이 양분됨 (경실환국 때 노론과 소론으로 양분)노론 : 송시열 중심 – 남인을 다죽여버려소론 : 윤증 중심 – 남인을 너무 강하게 하지마라기사환국 : 장희빈(남인)의 등장, 인현왕후는 폐위됨, 숙종은 장희빈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고, 송시열은 유배지에서 올라오며, 반대의 글을 올림 . 숙종은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림, 장희빈이 중전이됨남인의 대거 등장, 서인은 완전히 몰락함갑술환국 : 최숙빈(무수리 – 동이)가 아들을 낳아 영조가 되고, 인현왕후를 중전으로 봉함 인현왕후는 원래 서인이었음서인이 다시 권력을 잡음, 이때는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격화됨[문제]서인이 역모를 고발하여 허적과 윤휴 등이 처형되고 수많은 남인이 관직에서 쫓겨남남인 대신들이 관직이 삭탈되고, 노론과 소론이 정계에 복귀하였으며 인현왕후가 복귀되었다.(나)의 사이에 오는 사건은?서인과 남인이 두차례에 걸쳐 예송을 전개했다. -현종때 있었던 사건(숙종 전)장희빈이 처형당(무고의옥)하고 노론이 조정에 크게 진출하였다. (갑술환국때)장희빈의 소생이 세자가되면서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이 집권하였다(기사환국)남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하였다.고려시대 광종의 업적 : 왕권강화공신들 호족들을 숙청하였다. (삼족의 씨를 말려) – 왕동/준홍 등을 죽여버림노비안검법 실시(사병혁파하자는 의미.. 사병이 노비였음) 노비에게 자유를 줌과거제도의 시행(호족의 견제책) – 우리나라 최초의 과거제도(중국 쌍기가 고문이 됨)주현공부법 : 고려의 세금 제도는 크게 조세(가을에 내는 토지세, 수확물의 1/10을 납부), 공부(공납이라고도 하며 거주하는 지역의 특산물을 현물로 납부하는 것), 역(요역-군역/노동력을 세금으로 납부하는 것)[참고] 주현공거법 : 고려 초기에는 지방의 유력자인 '향리'들의 자제들은 과거시험을 볼 수 없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8대 현종 때 제정된 제도로서 이 주현공거법이 제정됨에 따라 향리들 중 상층 향리(부호장-호장 급)들의 자제들은 과거 응시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칭제건원(왕권강화) : 연호를 사용함 광덕 준풍공복의 제정 : 백관의 공복을 제정(자/단/비/녹)수도를 황도라고 칭함예송논쟁현종때 효종(아버지)가 세상을 떠남,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의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기해년 (1659년) : 기해예송 (서인 1년 상복, 남인 3년 상복)남인이던 윤선도는 서인이 역모라고 주장하였으나(효종의 정통성을 부정) 윤선도를 귀양보내고 상복을 1년만 입었음 1592 1627 1636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신분제가 붕괴되고 있었으나, 둘째아들임을 인정 상복을 1년만 입음갑인년 (1674년) : 인선왕후가 죽으면서 자의대비가 얼마나 입어야 하는지 논쟁, 상복을 서인은 9개월을, 남인은 1년을 입어야 한다고 함. 이번에는 남인의 편을듬. 자의대비는 1년간 입음송시열은 귀양가게됨. 남인들의 정치참여도가 올라감외세의 침략, 자연재해(경신 대기근) 등에 의해 나라가 피폐해졌으므로 성리학을 통한 사회질서를 바로잡기를 원했음서인 : 율곡이이의 이기일원론 (왕=사대부) -주자가례를 따라야 한다.(일반 서민과 동일 정통성 의심)남인(동인에서 분파) : 퇴계이황의 이기이원론 (왕과 사대부는 다름) –왕은 특별하므로 국조오례의에 따라야 한다.당시 조정은 인조반정이후 서인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음. 예송논쟁은 왕의 자격에 대한 논쟁이었으며, 경신대기근에는 논쟁 자체를 하지 않았음.붕당정치의 전개와 변질17세기의 두개사건예송논쟁과 환국선조(16세기) 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숙종(17세기) 경종(18세기) 영조 정조사림파가 선조때 동인과 서인으로 나뉨 동인은 정철 처벌문제를 놓고 북인과 남인으로 나뉨광해군은 북인과 함께 정권을 잡음인조 : 정묘호란, 병자호란 (서인 남인 공존)효종 : 북벌론 (서인 남인 공존)서인과 남인의 싸움 (예송논쟁과 환국)예송논쟁 : 자의대비의 상복착용기간의 문제, 자의대비는 인조의 계비1차 예송논쟁(기해예송)효종이 죽었을 때 상복을 자의대비가 몇 년 입어야 하나 (현종때 발생)서인 – 효종은 둘째아들로 1년만 입으면 된다.남인 – 왕이므로 당연히 3년만 입으면 된다.서인이 이겼다.2차 예송논쟁(갑인예송)서인 - 9개월만 입으면 된다.남인 – 왕이므로 1년은 입어줘야 한다.남인이 승예송논쟁의 의미 : 단순한 상복의 싸움이나 당파싸움이 아니라 예송논쟁의 역사적 의의는 서인은 신권을 중심으로 보고 남인은 왕권을 중심(효종의 정통성 부각)으로 보았다.이이일원론(율곡이이-보편성 강조)과 이기이원론(퇴계이황-특수성, 질서의 강조)의 대립예송논쟁까지는 사망자가 없었다. 붕당정치의 공존원칙이 지켜짐환국 : 갑작스럽게 정권이 교체되는 국면경신환국 : 서인(이때 노론과 소론으로 서인이 분화됨)기사환국 : 남인(장희빈의 등장)갑술환국 : 서인공존의 원칙이 붕괴 일당 전제화자의대비 복상문제로 기해예송이 전개됨 (예송논쟁)인현왕후가 폐위되고 남인이 권력을 장악했다.(경신 환국)남인이 축출되고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기사 환국)경기도가 갑이다 = 경/기/갑 , 서인 남인 서인 집권순서 = SNS
조선시대의 3대 도적그 무리들이 번성한지 벌써 십년이 지났으나 아직 잡지 못하고 있다. 지난번 양덕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그 무리들을 체포하려고 포위하였지만 끝내 잡지 못하였으니 역시 그 음흉함을 알만하다. 지금 이영창의 심문기록을 살펴보니 더욱 통탄스럽다.숙종실록 31권 –(1697년)-구월산(해서지방)을 근거지로 황해도, 평안도에 활동함임꺽정양주 백정 출신의 임꺽정은 황해도를 중심으로 활동함1559년(명종 14년), 마을을 약탈하고 관아를 습격, 관군의 포도관 살해황해도 농민 반란의 우두머리양주 백정 출신임거정, 임거질정 이라고도 불리움1562년 체포되어 사형당함임꺽정이 활보하던 시기는 을사사화(1545년)가 있어 대윤과 소윤이 권력다툼을 하던 혼란한 시기로써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던 혼란한 시기 였다.조선조정은 포고문을 내리고 잡으려 하였으나 실패함1560년에는 장통방(지금의 종로2가)까지 내려와 횡포를 부림임금은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함경도 대장을 두어 이들을 잡게 시킴1562년 토포사 남치근이 관군에 체포조선후기 이익의 성호사설에는 임꺽정을 조선의 3대 도둑으로 평가하고 있음사신은 논한다. 국가에 선정이 없고 교화가 밝혀지지않아 재상들의 횡포와 수령들의 포학이 백성들의 살과 뼈를 깎고 기름과 피를 말려 손발을 둘 곳이 없고 호소할 곳도 없으니 기름과 피를 말려 손발을 둘 곳도 호소할 곳도 없으니 기한이 절박하여 하루도 살기가 어려워 잠시라도 연명하기 위해 도적이 되었다면, 도적이 된 원인은 정치를 잘못하였기 때문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 어찌 불쌍하지 않은가?장길산조선 숙종때 구월산을 필두로 활동하였으며, 서얼과 승려세력과 결탁하였음본인은 광대출신. 10년 넘게 잡지 못함실록에 기록이 없으므로 끝까지 체포되지 않은 것으로 추측됨홍길동연산군 시절 충청도 지역의 우두머리 도적(실존인물)홍경래조선시대 3대 도적이 아님. 1811년(순조) 홍경래의 난을 총지휘대동계 : 조선 선조때 정여립이(1589년 대동계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새 왕조를 세우려는 역성혁명을 꿈꿨다. 대동계는 역모 준비를 위한 조직으로 간주정여립 모반사건 – 기축옥사의 원인이 됨당시 서인의 거두인 송강 정철이 정여립 모반사건 진압지휘 – 사건확대 – 천여명이 화를 입음동인의 몰락 – 서인의 득세정여립 : 천하공물설, 하사 비군론천하공물설 : 천하에 주인이 따로 있을 수 없다.하사비군론 : 누구를 섬기던 임김이 아니겠는가?
훈련도감조선전기 임시기구로 설립되어 임진왜란을 계기로 상설기구화 되었다.임진왜란 초기의 조선군 연패 -> 새로운 군사편제의 필요성 대두임진왜란중인 1593년(선조 26년) 8월 임시기구로 설치, 점차 상설기구가 됨포수/살수/사수로 구성되어있었고 삼수병이라 칭하였음급료를 지급하는 상비군 제도였다. (중앙의 급료병, 직업군인)의무복무병이 아닌 일종의 직업군인, 초기에 군사 1인당 1개월에 쌀 여섯말의 급료지급전란 종료후 피폐한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삼수미를 거두어 기반을 마련함명나라 척계광이 저술한[기효신서]의 영향으로 설치[기효신서] : 명나라 척계광이 왜구 격퇴시 사용한 전법으로 군사를 포수, 살수, 사수로 나누어 전투시 효과적으로 활용. 삼수기법에 따라 훈련도감의 편제를 삼수병으로 구성하였음훈련도감 : 종로구 신문로에 훈련도감 터임을 알려주는 비석이 있음. 임진왜란 중에 설치- 1592년 임진왜란 발발4월 13일 왜군이 정명가도라는 명분으로 침략부산진 첨사 정발, 동래부사 송상현 전사4월 28일 순변사 신립 탄금대에서 전사4월 30일 선조 피난 출발(의주까지 피난)임진왜란 초기 육군의 어이없는 연전연패평양성 탈환작전시 명군의 공격전술-1593년 류성룡의 주장과 명나라 장수 낙상지의 권유- 명나라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참고하여 조직됨(초기에는 명나라 군대 절강병의 훈련법을 습득하기 시작함)- 조선시대 5군영 가운데 가장 먼저 설치됨-훈련도감의 인원구성 – 급료를 받는 상비군(직업군인)-전란으로 국가재정의 피폐 -> 군영의 운영비 부족-전란후 1602년부터 삼수미를 거두어 재정기반 마련- 둔전 설치를 통한 군비 확충 노력- 난전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부여(투잡)- 5군영 체제하에서는 어영청, 금위영과 함께 삼군문으로 불리며 도성을 방어- 1746년(영조 22)에 속대전에 정식으로 수록됨- 1881년 (고종 18년) 별기군이 설치되면서 1882년 해체됨갑사와 정군 : 조선전기 중앙군인 5위의 구성원제승방략체제 : 각지역의 군사들을 군사적 거점이나 요충지에 집결시켜 중앙에서 장수가 내려와 지휘에서 통솔하는 방식 – 본진이 무너질시 후방에 타격이 됨. 임진왜란 초기의 패전원인이 되어, 폐지됨속오군 : 신분의 구분없이 노비에서 양반까지 편성되었음-조선후기 속오법에 따라 편성한 지방군으로-신분 구분없이 노비에서 양반까지 편성-병농 일치의 원칙->신분제 동요에 영향
거란의 침입거란의 1차 칩입(993년)소순녕은 전쟁의 명분을 거란이 고구려를 계승하였으므로 옛 고구려 땅을 돌려달라는 것을 명분으로 고려를 침공하였다. 중국의 신당서에는 고구려도 고려라고 칭하고 있다. 태조왕건은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국호를 고려라고 칭하였다. 991년 거란은 1차침입전 압로강 부근에 성을 쌓고 있었다.(전쟁준비) 내원성 지역(압록강 요충지-의주인접, 도강지역)에 군사를 배치하기 시작했다. 993년 안용진을 공격하였다. 고려는 건국 이후 최대의 국난에 봉착하게 되었다.소순녕은 80만대군(요사 – 80만 대군을 동원했다는 기록 없음, 약 6만 추정)으로 침략을 하고 거란에 평양 이북의 땅을 넘겨주고 항복할 것을 종용했다. 고려는 평양을 중시하고 있었으며, 왕을 100일이상 평양에 머물라 했다. (훈요 10조)고려의 성종은 평양에 군량미를 대동강에 수장한 후 평양을 거란에 넘겨 주려 했다. 그때 서희가 외교론을 펼치며 이에 반기를 들었다.서희의 담판 : 압록강의 강동 6주를 넘겨주고 여진을 협공하면, (강동 6주의 획득), 거란에 적대적 행위를 하지 않는다. 거란에 조공하겠다. 화친을 하겠다. (소순녕의 수락)이는 거란과 고려가 win-win할 수 있는 훌륭한 외교였다.서희는 이후 이 강동 6주에 성을 쌓고 거란의 침입에 대비했다.강동 6주 : 용주, 흥화진, 철주, 귀주, 곽주, 통주(압록강과 청천강의 사이)성종은 1차 침입 이후 거란과 국교를 맺게 되었음[거란족은 어떤 종족인가]유목민이지만 농사도 짓는 종족이었음. 시라무렌 강/ 라오허 강이 발원지 916년 야율아보기(태조)가 거란부족을 통일함. 발해를 멸망시킴. 거란은 ‘요’나라를 세웠고 상경성(요나라 수도)에 도읍을 마련함(내몽고 지역) 현재는 한족, 여진족 등에 융합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불교가 흥성하였다. 거란인은 묘실 벽화를 통해 생활모습을 알 수 있는데, 곤발(변발의 일종)을 하고 머리 끝을 뾰족하게 세운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귀에는 큰 귀걸이를 하고 있다. 매장시 금이나 은으로 가면을 만들어 매장했다. 거란의 문화수준이 높았던 이유에는 발해의 문화를 흡수한데 있다. 서역과의 교류도 활발했음. 거란 성종 시절 가장 번성했으며, 이때 고려에 대한 침공도 가장 강력했다. 송나라도 굴복시켰다. (송나라를 거란의 조공국가로 전락시킴) 전연의 맹약(송이 거란에 조공하겠다는 맹약)거란의 2차 칩입(1010년)강조의변 : 서경유수 강조가 목종을 살해하고 현종을 옹립했다. 이것은 거란의 2차 침입에 대한 명분이 되었다. 이를 빌미로 거란이 직접 고려를 친정하겠다는 내용을 고려에 통보해왔다.경북 예천 개심사지 석탑 : 1009년에 세워진 탑으로 탑신 하단부에는 당시 고려군인의 모습이 음각되어 있다. 고려 지방군이 세운 탑이다. 지방 군사조직인 광군이 세운 탑이다.거란의 성종의 40만 대군은 강조의 변을 이유로 고려를 침공한다. 양규가 이끄는 군사가 성종의 침입을 흥화진에서 7일간 항전했다. 성종은 20만 대군을 남겨두고 20만 대군으로 개경을 향해 내진출 한다. 통주에는 30만 대군을 이끈 강조가 버티고 있었다. (검차 군사무기의 활약)거란의 성종은 1011년 1월 1일 개경에 무혈 입성했다. 현종은 전라도 나주로 피난을 갔다. 양주는 곽주를 수복하고(700명의 결사대). 결국 개경 정복 10일만에 성종은 항복을 받아내고 후퇴하게 되었다.거란의 3차 침입(1019년)소배압이 이끄는 10만의 거란군이 침략함, 이번에는 흥화진을 거치지 않고 침략함강감찬/강민첨 – 강듀오의 활약(20만 8천명을 국경에 배치함) 강감찬은 삼교천에서 고려군의 수공과 매복에 의해 패배하고, 강민첨은 개경으로 가는 이들을 몰살시킨다.귀주대첩 : 강감찬이 퇴각하는 8만명의 거란군을 전멸시킨 사건이후에 거란은 다시 고려를 공격하지 않았음. 거란을 제압한 고려를 보고 주변 부족들이 고려를 대하는 태도는 달라졌다. 여진에서 고려에 조공을 바치기 시작함. 탐라국도 조공을 바침. 고려는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 송과, 주변국과 교류하는 독자국가가 되었다. 이후 발해유민이 거란에 반기를 들고 흥요국을 건설하였다. 흥요국은 거란의 침입에 대해 고려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고려는 이를 거부하였다. 27년간 지속된 고려 거란전쟁의 종결을 통해 우리는 고려의 힘을 느낄 수 있다.
기출로 배우는 공무원 한국사 2020년연천 적곡리 유적(주먹도끼)동남아시아, 동북아시아에서는 아슐리안형의 양면핵석기보다 덜 발달된 석기만 출토된다는 뫼비우스의 이론이 무너짐청동기시대의 대표적 유물은 비파형동검, 반달돌칼신석기시대의 대표적 유물은 갈돌과 갈판, 가락바퀴, 뼈바늘[선사 시대별 생활모습]내 용비 고구석기 시대사냥, 어로, 채집불을 사용하여 음식을 익혀먹기 시작주로 동굴이나 바위그늘, 강가의 막집에서 거주이동생활신석기 시대해안이나 강가에 원형이나 모서리가 둥근 네모꼴의 움집가락바퀴와 뼈바늘로 실을 뽑아 의복을 지어 입음자연현상이나 모든 사물에 정령이 있다고 믿기 시작애니미즘, 토테미즘, 샤머니즘의 시작청동기 시대벼농사를 짓기 시작, 농경이 경제생활의 중심이 됨불평등 사회의 도래(계급의 분화)고조선의 전개연은 장군진개를 보내 조선의 서방을 공격하여 땅 2,000여리를 빼앗고 만번한에 이르러 경계로 삼으니 조선은 드디어 약해지고 말았다. (연과의 대립)기원전 3세기경 고조선은 연나라의 진개의 침략을 받아 서쪽의 영토를 상실하고 수도를 왕검성으로 옮긴다.위만이 망명하여 무리 1,000명을 모아 상투를 틀고 만이 복장을 하고는 동쪽으로 달아나 요새를 나왔다.위만은 중국의 진/한 교체기에 고조선에 들어와 기원전 194년에 준왕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다.이계상 참이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항복해 왔다. 그러나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았는데 우거왕의 대신이었던 성이가 거듭 항전해왔다.왕검성의 함락직전의 사료이며, 왕검성 함락(고조선의 멸망)은 기원전 108년의 일이다.고대국가의 풍습(삼국지 위서 동이전)고구려 :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넓은 들이 없다.주몽이 건국하였음형이 죽으면 아우가 아내를 취하는 형사 취수제가 존재함고려시대에 이규보는 이나라의 개국설화를 바탕으로 동명왕편을 남겼다.삼한 : 해마다 5월이면 씨뿌리기를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변한에서는 철이 생산되어 한, 예, 왜가 모두와서 사간다. 시장에서 모든 매매는 철을 이용하는데 마치 중국에서 돈날마다 먹고 마시고 춤추는데 그 이름을 영고(12월)라고 하였다.여러 가들은 왕과 별도로 사출도를 나누어 다스렸음동예 : 부락을 함부로 침범하면 벌로 노비와 소 말을 부과하는데 이를 책화라 하였다.특산물로 단궁, 과하마, 반어피가 있다.고조선의 8조법사람을 죽인자는 즉시 죽이고 남에게 상처를 입힌자는 곡식으로 갚는다. 도둑질을 한 자는 노비로 삼는다. 용서받고자 하는 자는 한 사람마다 50만 전을 내야한다.주요유물 : 비파형동검, 북방식 고인돌, 미송리식 토기고조선의 성장 : 기원전 4세기경 중국 전국시대의 맹주 연나라와 맞설 정도로 성장통치이념으로 홍익인간을 내세웠다.김알지 설화9간들이 모두 기뻐하며 노래하고 춤을춘다. 얼마뒤 자주색 줄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땅에 닿았다. 줄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에 금빛 상자가 싸여있었다. 상자 안에는 황금알 여섯 개가 있었다. 9간들이 놀라 절하고 상자를 싸서 아도간의 집으로 돌아왔다. 열 사흘째날 아침 다시모여 상자를 열어보니 여섯알이 어린아이가 되어있었다. ---- (중략) – 그달 보름에 맏이를 왕위에 추대하고 수로라 하였다.가야의 건국 설화로써 중앙집권국가로는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연맹왕국)전기가야 연맹은 금관가야가, 후기 가야연맹은 대가야가 주도하였다.대가야는 6세기 초에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음(법흥왕때 결혼동맹)금관가야는 진흥왕때 병합되었음금관가야는 고구려 광개토 대왕의 신라구원때 쇠퇴하는 계기를 가져옴(5세기)금관가야 532년 법흥왕 때 병합, 대가야 562년 진흥왕때 병합신라 법흥왕때 이사부는 우산국을 병합하였음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은 우리나라 고대 불교조각사 연구의 출발점이자 6, 7세기 동아시아의 가장 대표적인 불교조각품 가운데 하나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이 상은 일찍이 일본 교토의 고류지 [廣隆寺] 목조반가사유상과 형상이 매우 흡사하여 한국과 일본의 고대 불교조각 교류 연구에 있어서도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일반적으로 반가사유상은 중국에서는 대개 어떤 주된 불상에 이 연꽃에서 탄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신선들이 사는 이상세계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도교전북익산 미륵사지석탑목탑양식으로써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석탑이다.불국사 3층석탑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출토된 석탑으로 통일신라대의 유물이다.백제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목탑의 양식을 따라 세워진 석탑이다.감은사지 3층석탑통일신라 시대에 세워진 석탑이다.경주 분황사 석탑모전석탑으로 벽돌처럼 돌을 다듬어서 쌓았다. 신라시기에 만들어진 석탑이다.감은사지 3층석탑왕(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하여 감은사를 짓고 추모하는데, 죽어서 바다의 용이된 문무왕과 하늘의 신이된 김유심이 합심하여 동해의 한 섬에 대나무를 보냈다. 이 대나무를 베어서 피리를 만들어 불어보니 적의 군사는 물러가고 병은 낫고 물결은 평온해 졌다. 나라의 근심이 생길 때 마다 이 피리를 물면 평온해져서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 불렀다.호국사상과 모든 정치적 불안이 진정되고 평화가 오기를 소망하는 신라인의 염원이 담겨있음김부식은 삼국사기에 왕위계승을 기준으로 신라를 상대/중대/하대로 구분하며 신문왕은 중대의 왕이다.신라상대신라중대신라하대박혁거세~진덕여왕무열왕~혜공왕선덕왕~경순왕지증왕(6세기)부터 왕의 칭호 사용진골출신 김춘추의 후손들이 왕위를 계승(7세기 중반~8세기 후반)왕권이 전제화 되며, 기밀사무를 관장하는 집사부 장관인 시중의 기능이 강화되고 귀족의 대표인 상대등의 세력이 약화됨진골귀족간의 권력다툼지방호족세력의 성장상대등의 세력이 다시 강화됨[호족의 성장]나라 안의 여러 주군에서 공부를 바치지 않고 왕이 사신을 보내어 독촉해도 이로 말미암아 도적이 벌떼같이 일어났다. 이에 원종, 애노 등이 사벌주에 의거하여 반란을 이르키니 왕이나마 영기에게 명하여 잡게하였으나, 영기가 적진을 쳐다보고 두려워서 나아가지를 못했다. 이때 혼란한 사회에 스스로 성주, 장군이라 칭하는 세력이 성장 하였다.[각 시대별 세력]신라하대 호족지방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한 반 독립접 세력신라하대 진골왕위 계승의 다툼을 벌이며 중앙정치의 부패종, 애노의 난양길의 난889년 진성여왕때 발생원종, 애노의 난은 농민봉기였음궁예도 한때 양길의 수하에 있었음진성여왕때 나라가 혼란하자 최승로는 시무10조를 올려서개혁을 하고자 하였음고구려의 발전장수왕 63년 9월에 왕이 군사 3만을 이끌고 백제에 침입하여 백제왕의 도읍 한성을 함락시키고 백제왕 부여경을 죽이고 남녀 8천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백제의 개로왕이 전사하고 수도 한성이 함락 된 것은 5세기의 사실백제왕 명농이 가야와 함께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신주의 군주인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하였는데 비장인 삼년산국의 고간도도가 급히 공격하여 백제왕을 죽었다.6세기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였음장수왕에 의해 백제의 한성이 함락되지 22대 문주왕 즉위년인 475년에 백제는 웅진(공주)로 천도하였다.백제의 24대 동성왕(479~501)은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서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었다.백제의 26대 성왕(523~554)는 538년에 사비로 천도하고 한강 하류를 회복하는 등의 백제 부흥을 꾀하였다.백제의 25대 무령왕(501~523)은 성왕의 아버지로 22담로를 설치하여 중앙권력을 강화하였다.백제의 15대 침류왕(384~385)는 불교수용을 하여서 중앙집권 국가의 틀을 다졌다.고구려 연표로 본 시기313년 미천왕337년 소수림왕427년 장수왕598년645년낙랑군 추출율령반포평양천도수나라침입안시성 싸움영락은 광개토 대왕의 연호이다.빈민구휼제도왕이(고국천왕)이 사냥에 나갔다가 길거리에서 주저앉아 울고 있는 자를 보고 왜 우는지 물으니 “신이 가난하여 품팔이로 어미를 봉양해왔는데, 올해는 흉년이 들어 한 줌의 양식도 얻지 못하였습니다.” 왕이 말하기를 “아아. 내가 백성의 부모가 되어 백성들을 이 지경까지 이르게 하였으니, 나의 죄악이다.” 하고 먹을것과 입을것을 주었다.이후 해마다 봄 3월~가을 7월까지 관곡을 내어 백성의 가구의 다소에 따라 진대함에 차등을 두고 겨울 10월에 이르러 도로 거둬들이게 법규를 만드니 모든이가 기뻐산둥지방을 공격하기도 하였음대조영은 발해를 걸립함발해는 926년 거란의 공격으로 멸망함발해는 선왕때 전성기를 누렸음(9세기 전반) 중국인들은 이시기에 발해를 해동성국으로 칭함굴식 돌방무덤굴식 돌방무덤은 고대 고분양식의 하나로 흙으로 덮은 봉토의 내부에 돌방이 있고 출입구에서 그 돌방까지 굴처럼 통로가 나있는 무덤이다. 구조상 도굴이 쉬워 껴묻거리들이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일반적(신라 대표무덤인 돌무지 덧널무덤은 껴묻거리가 많이 출토)다양한 양식의 벽화들이 그려져 있어서 당시의 생활상과 문화상을 이해하고 파악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굴식 돌방무덤은 삼국에서 모두 발견되고 있으며, 대표무덤으로는 강서고분, 만주 집안의 무용총이 있다. (신라 돌무지 덧널무덤 : 천마총, 호우총, 황남총)대표적인 예 : 사신도, 무용총 벽화굴식 돌방무덤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에서 모두 나타남돌무지 덧널무덤은 신라에서 주로 만들어진 무덤으로 도굴이 어려운 구조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은 무령왕릉천마총, 호우총, 황남총은 돌무지 덧널무덤이다발해에 정혜공주 무덤과 같은 고구려식 굴식 돌방무덤이 나타난다.(고구려 계승)독서삼품과(통일신라시대)학생들을 유교경전의 독해 능력에 따라 상/중/하로 구분하는 일종의 졸업시험이며, 이성적으로 관리 임용에 참고하였음. 하품은 곡례, 효경을 읽은사람, 중품은 곡례, 효경, 논어를 읽은 사람, 상품은 곡례, 효경, 논어, 춘추좌씨전, 예기, 문선을 읽어 뜻에 능통한 사람 이중 특히 오경, 삼사, 제자백가의 서적에 모두 능통한 사람은 특품으로 추대됨독서삼품과는 신라의 관리 선발제도로 국학의 학생들을 독서 등력에 따라 구분하고 관리임용에 참가함 이는 국학출신자들의 관직 진출을 강화하기 위한 제도임고려시대의 과거제도는 제술과와 명경과 잡과로 나눔제술과: 문장의 작문능력을 평가하는 시험명경과: 유교경전의 숙지여부를 평가하는 시험잡과: 법률, 의학, 천문, 지리 등의 기술과목 시험조선시대 조광조는 숨은 인재를 발탁하기 위한 천거제로 현량과를 실시함고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