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교육◎ 근대, 근대적 인간?우리나라는 지금 세계 10위의 무역 강국이다. 핸드폰과 IT를 주름잡고 있으며 산업사회를 거쳐 정보화 사회의 선두격인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성공에 앞서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쳐 조국의 분단. 아프리카와 비슷하게 기아에 허덕이고 해외의 원조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나라였다. 이런 나라가 그토록 잘 살 수 있게 된 원인 중에 하나는 바로 조국의 근대화 덕분이라 할 수 있다.1970년대에 새마을운동을 통해 우리는 조국을 근대화 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역사의 진보에 매력을 느끼는지 근대화란 단어에 참으로 세련되고 좋은 단어란 느낌을 받는다. 무엇인가 시대에 앞서나간다는 느낌이다. 마치 근대적이지 못한 인간은 시대에 뒤쳐져 있고 합리적인 인간을 만들기 위해 교정이 필요한 인간이란 생각이 든다. 그에 반해 근대적 인간은 자신의 이성을 가지고 합리적이고 개인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이루며 역사의 진보에 앞장서는 행위를 한다고 생각된다. 과연 그러할까?◎ 근대 그리고 진보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잠재적으로 서양의 시각과 취향, 그리고 그들의 삶을 동경하고 살아간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검은색의 피부를 가진 사람들을 멸시하고 우리와 같은 피부인 중국인과 동남아인을 멸시하며 심지어는 같은 핏줄은 중국 동포를 냉대한다. 바로 이것은 서양 것은 좋은 것이고 우리 것은 낙후된 것, 서양인은 우월하고 비서양인은 열등하다는 시야가 우리에게 내재되 있는 것이다. 어쩌면 각국의 역사를 근대화 하였는가 그렇지 못했는가에 따라 그들을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나 자신의 정체성을 올바로 세우지 못하고 남의 시각을 빌러 우리를 평가하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행위라고 할 수 있다.서양역사는 우리의 역사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들과 우리 역사의 큰 차이점은 봉건시대가 없다는 것이다. 원시 공동체 사회를 거쳐 고대 노예제 시대와 중세의 봉건제, 그리고 근대의 자본주의를 거치는 일련의 행위는 그들은 진보라 규정한다. 그러나 봉건제 시대가 없는 우리나라에 일부러 중세라는 틀을 가지고 우리의 역사를 바라보고 또한 근세라는 없던 것도 만들어내는 행위는 참으로 놀라운 발상이라 할 수 있다.서양의 외모를 동경하여 성형하는 우리현실과 우리의 역사를 그들의 잣대에 맞춰 나누는 행위는 무엇이 다른가? 참으로 우려할만한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역사에서의 근대역사에서 역사가 진보한다는 관점을 보면 다음과 같다.첫째는 권력이 누구한테 이양되는가 이다. 원시 사회에서는 모두 평등하고 공동체가 만든 생산물을 고루 분배했다. 그러나 노예제 봉건제를 거쳐 왕과 영주의 권력을 민중에게 어떻게 돌려주는가에 따라 그 성패를 나타낸다. 부르주아 혁명인 프랑스혁명을 통해 귀족과 왕에서 부르주아로 마르크스가 말하는 사회주의도 부르주아에서 프롤레타리아로 이러한 그들의 역사적 진보과정에서의 하나의 축이라 할 수 있다.둘째는 얼마나 집단에서 개인화 되어가는가이다. 중세나 고대 사회에서는 ‘나’라는 개인은 없다. 개인은 철저하게 신에 의해서 혹은 왕이나 영주에 의해 가정이라는 집단에 구속되어있다. 혹자는 활자라는 매체를 통하여 개인이라는 개념이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바로 활자와 교육이라는 시스템을 통하여 집단에서의 자아가 개인적인 자아로 나아가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 것이 서양과 동양에 모두 획일적으로 적용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바로 근대의 역사는 바로 서양을 토대로 있기 때문이다.◎ 근대 서양의 교육서양에서 근대의 교육을 이루는 큰 주춧돌은 자본주의와 데모크라시, 그리고 내셔널리즘이다. 우선 자본주의는 18~19세기는 유럽사회가 산업혁명을 통하여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이루게 되고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 혁명을 통하여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이루는 시기였다. 따라서 노동자를 비교적 체계적으로 양성할 필요가 있었으며 의무와 권리를 착실하게 실행 할 수 있는 시민을 길러내는 것도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18세기 등장한 근대의 교육은 국민을 길러내는데 초점을 둔 국민교육이라 할 수 있으며 초등학교의 시스템이 근대의 교육으로 정착된 시기는 바로 이시기라 할 수 있다.둘째는 데모크라시이다. 18세기에 들어 피지배층을 대상으로 공식적인 교육이 행해졌다. 교육을 받는 것이 모든 인간의 기본권이라는 생각이 이시기에 팽배하게 되었다. 프랑스혁명을 통하여 교육은 민중의 권리와 의무로 돌아왔으며 국가적으로 보았을 때에도 교육을 통하여 수준 높은 국민들을 길러내는 것이 국가를 부강하게 하는 길이라 생각하게 되어 교육의 혜택이 피지배층인 민중들에 돌아가기 시작했다.셋째는 내셔널리즘이다. 국민이라는 개념이 형성되어 국가 간의 식민지 쟁탈전과 국가의 부국강병이 이시대의 흐름이었다. 따라서 국가는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가진 집단에게 공통된 역사와 언어 그리고 문화를 가르칠 필요가 있었다.◎ 근대와 식민지의 동양 교육동양의 근대는 식민지 지배와 때려야 땔 수가 없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한국은 중국은 반식민지 시대, 한국은 식민지 36년의 시대로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개항이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조선은 일제에 의한 가슴 아픈 식민통치가 이루어지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 걸쳐 철저하게 그들에 의해 유린당했다. 바로 천황의 2등 신민으로 조선 사람들을 기르기 위해서도 교육은 그들에게 무척 유용한 도구였을 것이다.
교육열 올바로 보기◎ 교육열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우리나라는세계에서 유래가 드물 정도로 높은 교육열을 가진 나라이다. 매년 입시전쟁이라는 말이 연상될 정도로 대입전쟁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모든 언론매체와 국민들의 관심속에 11월의 하루를 보낸다. 이러한 현상은 서구의 다른 나라들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현상이다. 일본, 중국 등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에서도 높은 교육열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의 교육열은 당연 최고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유별난 교육열이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가면 다행이지만 지금 한국교육은 그렇지 못하다. 자원이 빈약한 우리나라의 경제를 지금과 같이 끌어 온 원인중 하나가 교육열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교육열의 방향이 점점 어긋나고 있다는 사실도 부정하지 못한다. 따라서 교육에 관한 모든 뉴스나 신문기사들은 잘못된 교육열에 대해 비판하고 교육제도의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교육제도가 문제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개선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교육은 입시위주의 교육이고 그 결과에 따라 개인의 인생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명문대에 목을 맨 수많은 사람들과 자신의 인생목표를 오로지 진학과 학벌에만 매달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우리사회에서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아직도 학벌이라는 점에서 교육열의 심화가 초래되고 있지만 사회 구조적으로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것은 우리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와 핏줄이 같은 북한의 교육현상을 설명한 글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북한 교육의 기본목적은 공산주의적 혁명인재양성입니다. 우리나라의 초등학교랑 비슷하다고 할수있는 인민학교에서 전체 교과목에서 44%에 해당하는 시간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교육을 받는다고 합니다. 교과목의 내용이 주로 정치사상위주로 되어있고 각종시험에서도 비중이 높습니다. 또한 국어와 수학이 우리나라와 같이 비중이 높습니다. 수업시간에 여학생들은 뜨개질을게하니 학교성적을 조작하기도 하고 부정입학도 상당히 많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서울대처럼 북한에서는 김일성종합대, 평양외국어대 와같은 일류 대학을 선호합니다.이런 원인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원인이 있지만 바로 과열된 교육열 때문에 지금과 같은 현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체제가 다른 형제국가이면서 비슷한 결과가 이루어지는 것은 무엇일까? 참으로 재미있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교육열에 대한 설명을 `교육열 올바로 보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린다.♤ 교육열의 4개의 분화교육열은 교육열과, 교육관, 교육열 행동, 교육열 현상의 4가지를 구분되어 사용되어야 한다.① 교육열 : 동기체제(동기문화) - 교육에 관한 욕망 - 기본적 욕망(생존과 성공)의 하위 욕망(수단)② 교육관 : 인징체제(인지문화) - 교육에 관한 한국인의 사고문법 - 문맥속의 교육에 관한 해석방식이자 행동지침③ 교육열 행동 : 행동체제(행동문화)- 일련의 행동유형 - 주어진 제도와 환경 속에서의 교육열을 실천하는 행동들④ 교육열 현상 : 교육열 행동의 집합적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들 - 과열과외, 입시지옥등♤ 교육열의 개념화①「교육열」은 「교육열 현상」과 구분되어야 한다. 교육열은 그 자체가 현상이나 행동이 아니라 특정 현상과 행동에 내재된 속성을 추정해낸 동기체제이며, 일종의 심리적 에너지이다.② 교육열은 사회제도화된 교육으로부터 발생하는 이익을 취하려는 욕구로서, 제도교육이 널리 발달함에 따라 더 좋은 교육기관을 더 많이 통과하려는 행위나 현상으로 나타난다.③ 교육열은 그것의 「가변성」과 「결합성」을 나타낼 수 있도록 개념화되어야 한다.④ 오늘날 우리가 교육열이라고 부르는 운동에너지는 후천적으로 습득되고, 사회문화적으로 학습되었으며, 역사적으로 누적?확산되어온 것이다.우리가 문제로 진단하는 교육열은 우리는 위와같은 분석적인 과정없이 혼재되어 사용한다. 아는 만큼 보이듯이 위의 상황을 인지하고 세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교육열의 원인은 무엇인가?교육열 올바로 보기에는 우리의 교육적. 그리고 우리 학부모의 높은 대학 진학열이 높고 현실적 교육열과 이상적 교육열 사이의 격차가 크다. 이러한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을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가장 큰 요인을 손에 꼽자면 개인의 능력이 평가되지 못하고 출신학교로 사람을 평가하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분위기가 도래했을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방식의 학력위주의 교육열은 그 자체로는 나쁘지 않을것이라 생각한다. 오히려 교육열이 없는것보다 긍정적인 측면이 작용했을 것이다. 과거시대의 출신성분에 따른 계층 진입이 아니기 때문에 사회적 계층적 평등화가 이루어 졌고 학력을 중시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학교교육을 중시하게 되었다. 결과론적으로 학교교육의 급격한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해방 이후의 우리나라의 공교육의 발전과정에서 근대화의 초석을 닦은 것도 사실일것이다. 초기의 학교 교육은 빈곤의 극복을 위한 노력을 시작하게 되고 농업중심의 전통사회에서 공업화, 산업화되면서 경제성장의 원동력으로서 값싼 노동력을 제시했으며 교육을 통한 노동력의 질적 향상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로 산업의 발전과 경제의 성장이 이루어 역할을 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정상적인 사회의 근대화가 이루어졌다면 대학진학보다는 기술을 우선 중시하는 풍조가 생겨야했겠지만 다수의 교육받지 못한 노동자계층에게는 경제적으로 큰 소득이 생기지 않고 고등교육을 받은 사회적 지도계층의 부의 축적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면서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대학진학을 통한 신분상승의 욕구만 키우는 꼴이 되어 버렸다. 즉 과거에는 양반과 상민의 계층의 구분이 태생적인 한계로만 여겨졌지만 현대사회로 들어오면서 지식의 획득을 통해 신분의 상승, 성공의 욕구 등을 충족할 수 있게 되면서 사회적인 교육열이 확대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일부의 명문대를 향한 과도한 인력과 자본의 집중이 가져오면서 지금과 같은 교육열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문제의 원인은 우리나라 즉 한국사회에서 학력과 학벌이 개인의 삶의 기회 선택뿐만 아니라 개인과 집단의 사회 차별을 만들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학력을 중시하고 학벌을 중시함으로써 경쟁의 동기와 기회균등을 보장하고, 능력으로 평가한다는 순기능 보다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심화시키고 교육의 기형적인 성장과 교육의 구조적 모순을 심화시키고, 한정된 교육 자원의 낭비를 가져오게 됐다.◎ 우리나라의 교육열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은?그 동안 우리나라 교육은 양적팽창을 우선으로 해왔다. 그 결과 국민 모두에게 교육의 기회적 시급한 것이다. 지금이라도 개선한다면 늦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력과 학벌에 대한 사회적 가치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사회제도의 개선을 통한 학력, 학벌의 타파를 위한 정치, 사회적 결단이 필평등은 고루 제공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회는 성공적으로 제공되었지만 인간성을 함양되지 못한 인성교육의 부재와 전반적인 교육의 질의 하락은 우리와 비슷한 수준의 다른 나라에 비해 현저하게 뒤떨어져 있다. 만약 지금과 같은 소수의 특정대학에 대한 맹신과 맹목적인 추구가 계속해서 이루어진다면 우리나라의 학교교육의 붕괴는 물론이요 우리의 미래도 그리 밝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처럼 학력이라는 것이 학벌이라는 말과 동일시 되는 현실은 반대시 개선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에게는 기형적 입시위주의 교육이 아닌 다양한 적성에 맞고 개인의 개성과 특성을 존중하며 능력을 계발할 수 있는 학교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교육열 올바로 보기에서의 해법은 다음과 같다.① 한국 사회의 교육열을 개인에서 사회집단, 국가의 교육열로 전환해야 한다.② 한국 사회의 교육열을 사적에서 공적 교육열로 전환해야 한다.③ 한국 사회의 교육열을 도구적에서 본질적 교육열로 전환해야 한다.④ 한국 사회의 교육열을 협의에서 광의의 교육열로 전환해야 한다.⑤ 우리 사회가 우리의 높은 교육열을 정상화 시키기 위해서는 사적이고 도국적인 교육열로부터 공적이고 본질적인 교육열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개인적으로도 위와 같은 의견에 동의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첫째, 학교교육의 정 그 방법으로는 적성에 맡는 특기교육, 지식의 주입이 아닌 학생의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학생의 창의적인 생각과 능력을 계발하여야 하며 학교에서 다양한 체험을 가능하도록 해주어야 한다. 지금의 획일적인 대학진학 풍조는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여러 가지 직업교육을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계발, 활용하거나 예체능 적성교육의 실시 등이 좋은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충분한 교육재정의 학보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으나 현재의 잘못된 교육재정을 개선한다면 가능할 것이다.둘째, 학력, 학벌 만능주의 사회의 의식구조를 개혁이라 할 수 있다. 21세기는 과거와 같은 시대가 아니다. 개인의 능력이 강조되고 그에대한 성과를 중요시 하는 시대이다. 이런 시대에도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학력과 학벌만능주의가 만연해 있다. 그 사람의 능력이 아닌 출신학교로 사람을 평가하는 이런 의식에서는 입시위주의 기형적 교육열을 개선할 여지가 있을 수가 없다. 그런 면에서 사회의식의 개혁은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요새 아무리 학력, 학벌보다는 능력을 중심으로 인재를 양성하고 기업체에서 사원을 뽑는다고 해도 깊이 살펴보면 눈에 띄지 않는 부분에서의 차별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이런 뿌리 깊은 학력과 학벌에 대한 맹목적인 광신을 해결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차원에서는 철저한 의식개혁, 사회적 차원에서의 지속적인 사회개혁, 국가적 차원에서 법과 제도의 정비 등이 이루어 져야한다.셋째, 대학의 역할을 그저 단순한 대학 졸업생의 배출이 아닌 다양한 능력을 지닌 인재의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서의 대학의 역할을 정립시키는 것이다. 대학을 졸업해도 당장 실무적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인 현실이라는 것을 보면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능력을 지닌 인재의 양성을 위해 기업과의 협력을 통한 교육 프로그램 구상과 운영을 한다면 간판을 보기보다는 미래의 선택과 성공을 위해서라도 지금의 기형적인 입시교육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 질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마지막으로 대학입시 위주의.
죽은시인의 사회를 보고..카르페 디엠 (carpe diem)!!이 영화를 보며 내가 가장 인상깊었던 단어이다. 대충 문맥의 뜻은 알고 있으나 정확힌 뜻을 알지못했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카르페 디엠에 대한 정의를 찾아보았다. 그 정의는 다음과 같다.카르페 디엠 (carpe diem)주어진 여건에 만족하며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현재를 즐기며 살라는 뜻의 용어과연 우리는 카르페디엠처럼 우리상황에 만족하며 긍정적으로 살고있는가? 지금 한국교육의 대학입시라는 병폐는 무엇 때문에 나오는 것일까? 참으로 우리는 욕심이 많다. 무한경쟁에서 승리하여야만 하고 좋은직업을 가져야 이 인생의 승리자라고 말한다. 과연 과연 그것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참다운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인가?영화에 나오는 학교교육과 교육관의 모습은 우리 한국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시험이라는 경쟁을 통하여 승리하여야 하고 명문고를 나왔기 때문에 명문대를 가야만 하는 압박감..이것은 전인교육과 대학입시 사이에서 방황하는 수많은 한국의 교사와 학생들이 처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다른점이 있다면 영화 속의 이야기는 40여 년 전의 미국의 부유층 기숙학교를 무대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공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금방 사건 속의 주인공인 것처럼 영화에 매료 되었다. 아마도 마치 나의 과거 학창시절과 미래의 교사가 된 후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기에 이 영화에 쉽게 재미를 느끼고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명문대학에 진학시켜 자신의 꿈을 자식에게 대신 잇게 하려는 영화 속의 학부모들. 대사를 인용하자면 '자식은 계약직 노동자가 아니다.' 맙소사. 계약직 노동자는 부당한 대우는 받을 수는 있어도 부당한 목표로 일을 하진 않을 것이다. 단지 이러한 목표로 힘든 학교생활을 해 나가는 학생들을 모습에 나의 고등학교시절의 모습이 자연스레 겹쳐서 보였었다.나에겐 꿈이 있었다. 멋진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의 꿈을 함께 나누는 그런날이 오길 바라는 꿈이. 그 꿈을 이루는데, 다시 말해 내가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칠 때, 지금 배우는 수학공식하나, 화학원소기호 하나가 어디에 필요한지 왜 배워야 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답답해 하며 그저 선생님들이 시키는대로 달달 외우기만 했던 내 모습이 왜 떠올랐을까...명문대학 진학이라는 미명아래 기계처럼 암기위주의 그야말로 죽은 수업을 하던 이 학교의 학생들에게 새로 온 국어선생님 키팅의 수업방식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적어도 관습적이고 완고한, 개인주의를 일체 용납하지 않고 있는 지금까지의 교육방침에 위반되는, 즉 봉건적인 틀을 과감하게 집어던진 그런 수업을 하면서 학생들은 자신들의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되고 진짜 하고 싶어 하는 일을 발견하는 등, 그의 수업은 학생들을 변화시켰다.키팅의 수업방식에는 백점이 아니라 천점, 만점이라도 주고싶었다. 난 교사의 꿈을 가지면서 ?이런 선생님이 되어야겠다?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내가 꿈꾸는 교사상은 암기위주의 지식을 쌓기위한 수업보다는 인성이라던가 사람을 대하는 방법 등 사회를 살아가는데 어찌보면 더 유익할 그런것들을 가르치는 그런것이다. 물론 현재의 교육현실상 어려운일임은 틀림이 없을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학교는 공부하러 가는곳이라 생각하고있으며 그 공부란 ?과학적? 지식이라고 믿는 사람이 많으니깐.
여론조사 뒤집기신문이나 잡지에는 다양한 기사거리들이 나온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부터 정치, 경제, 문화, 스포츠등 거시적인 사회흐름까지.. 그러나 많은 기사거리들 중에서 우리의 입맛에 당기는 기사들에 대해 눈이 돌아가기 마련이다. 딱딱한 정치나 경제 기사를 그냥 바라볼 의욕이 생기질 않을것이다. 빼곡히 꽉 찬 기사로 있었을때 우리는 그것을 재미있게 바라보고 있는가? 아니다. 지금의 시대는 비쥬얼한 시대이므로 일목요현하게 그래프와 도표를 사용한 신문기사에 더 눈길이 갈지 모른다.신문의 기사에서는 그래프와 도표를 사용한 예는 무수히 많다. 이러한 것들은 통계학적 기초하에 모두 재작되는 것이다. 그럼 통계학으로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것으로 사용되는 여론조사란 것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우리주변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신문을 활짝 펴보았을때 얼마나 많은 여론조사란 것이 나오는가? 특히 대선이나 총선을 보면 그래프와 도표는 끊없는 주가를 달린다. 그리고 TV를 보자. 어떤 코미디 프로(SBS의 야심만만)에서는 인터넷의 설문 결과를 가지고 어떤 내용이 베스트5에 드는지 알아보는 활동을 한다. 또 가요톱텐과 같은 프로도 ARS 조사와 인터넷 조사를 통하여 가요의 순위를 집계한다. 이렇듯 여론조사는 우리생활에 밀접한 것이 되어버렸다.그럼 여론이란 무엇인가? 어떤 학자는 여론을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국민의 다양한 의견들을 이야기하고 수렴함으로써 이것을 정책적으로 반영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위와 같은 ’민주주의의 꽃‘이란 말이 일리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통상적으로 여론이라고 말하면 국민의 의견의 반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을 바로 신뢰할 수 있는가? 도대체 나는 의견을 이야기 한 적이 없는데 어째서 그것을 여론이라고 정의하는 것인가? 우선 여론은 형체가 없다. 또한 누가 그 여론의 구성원인지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여론은 우리의 주변사람들의 의견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 없다. 여론이라는 것이 없다면 어떤 문제에 대하여 100이면 100이라는 답변이 다 맞을 것이라고 우길 것이니까 말이다.그럼 다시 신문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자. 신문들은 정당의 예상 의석수라던가 수능점수의 분포도와 평균 그리고 연예인 인기순위 등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조사를 한다. 그런데 왜 신문마다 결과가 다른 것인가? 물론 결과가 근사하게 예측하게 나오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모집단에서 추출한 표본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다. 어떠한 특정부류에 대한 인사가 많다거나 아니면 연령대나 지역이 다른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예들 들자면 ‘행정수도 이전’에 관한 문제가 있다. 이러한 사항에 대한 여론조사를 했을 때 충청권인사 50명 그리고 나머지는 그 밖의 인원들이 채워진다면 ‘행정수도 이전’은 많은 국민들의 바람이라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또한 ‘호주제 폐지’에 관한 여론조사를 했을 때 60대 이상인분들이 100명중 60명 20, 30, 40대가 40명이 있다면 이것도 잘못된 결과가 나올 것이다.또한 표본의 크기가 작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짜장면과 짬봉, 볶음밥을 좋아하는 경우에 대해 여론조사를 벌였다고 하자. 10중에 6명 짜장면 3명 짬봉 1명이 볶음밥 이렇게 결과가 나왔을 때 이것을 가지고 대한민국 국민은 60%는 짜장면 30% 짬봉 10% 볶음밥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는가? 표본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그것에 대한 표본오차율을 작아진다. 물론 이러한 조사에서 전수조사를 한다면 대한민국 국민의 여론이 좀 더 정확하게 반영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나 금전적인 문제 때문에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현실적인 면과 정확도에서 적당히 타협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위와 같은 경우는 통계 과정에서 문제가 있음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요인은 없는 것일까? 그리고 통계조사가 어떤 사람의 의견을 반영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면?인간 내적인 심리학적으로 바라보았을 때 첫째로 사람들은 긍정적으로 대답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따라서 ‘당신은 이것을 좋아하죠?’ 라고 물었을 때 소신이 있는 몇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예‘라고 말한다. 그러나 ’당신은 이것을 좋아하나요? 싫어하나요?‘라고 말했을 때는 그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다. 이것은 질문을 어떤 식으로 했는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다르다는 이야기이다.둘째로는 질문하는 방식에 따라 대답이 달라진다. 이것은 다양한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단어의 선정에 따른 결과가 확연히 다르다. ‘미군의 이라크에 대한 전쟁‘이란 느낌과 ’미군의 이라크에 대한 해방’ 분명히 느낌이 달라진다. 이렇듯 질문자체 속에 긍정이나 부정하는 대답을 하기위해 어떤 기제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세 번째로는 객관식이다. 객관식 질문은 응답자의 자유로운 생각을 제한하게끔 만든다. 만약 어떤 정책에서 예산을 국민에게 물어서 수렴한다면 고 하자. 그 정책자는 ①1000원 ②1500원 ③2000원 중에서 선택하라고 했을 때 대부분의 국민들은 어떤 번호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를 가지고 예산을 꾸린다고 한다면 국민들은 정책자의 선택지에 따라 국민의 의견이라고 잘 못된 판단을 할 수 있다. 위와 같은 경우와 다른 경우도 무척이나 많기 때문이다.
통계라는 이름의 거짓말우리는 학교란 집단에서 많은 학문들을 배운다. 그러한 대부분의 학문들은 쉽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매진해야 그것의 참다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것이다. 우리는 국어, 영어, 과학 등 많은 과목들을 배운다. 그러나 이것들중에 가장 어렵고 힘든 것은 수학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느낌으로 그것의 답안을 기입하지 않아야하고 어떠한 수학적 원리와 공식이 유도되는 과정을 증명해야한다. 따라서 수학은 고도의 이성적 활동과 사고과정을 필요로 한다.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수학은 어렵운 학문이라는 생각과 우리 생활과 동떨어졌다는 생각으로 수학의 세계에서 길들여져 왔다. 따라서 보통 숫자에 대해 막연한 환상이나 저주, 맹목적인 믿음이 비판적 사고를 거치지 않고 따라다닌다. 이러한 연유때문에 신문의 기사나 뉴스에서의 왜곡된 변이통계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맹목적으로 믿는다.이 책의 저자는 통계에 대해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을 분류해 놓았는데 통계를 대체로 정확하고 합리적이라 믿는 ‘순진형’과 통계 숫자에 대해 맹목적인 비판을 하고 있지만 자신에게 대해서는 관대한 ‘냉소형’, 숫자를 평가하고 훌륭한 통계와 엉터리 통계를 구분하는 ‘비판형’으로 나누어 놓았다. 우리 대부분은 저자가 나누어 놓은 사람 중에서 맹목적인 순진형에 해당되지 않나 싶다. 그만큼 우리는 숫자에 대해 두려움과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나 역시도 이런 책을 접하기 전까지는 순진형이지 않았나 싶다. 개인적으로 2권의 책과 ‘확률 및 통계’란 과목을 들으면서 숫자에 대한 감각보다는 비판적 사고에 더 초점이 가기 시작했다. 저번 과제였던 ‘잘못된 그래프나 왜곡된 그래프 찾기’는 많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신문의 그래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생각보다 많은 자료들이 왜곡보도 되었으며 근거없는 추측성 기사와 편파적인 시각으로 씌어진 것이 많았다. 한쪽 시각으로만 씌어졌다는 것은 그 기사를 왜곡할 소지가 있으며 이것을 통해 특정한 목적을 얻을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우리나라 아이들중 100명중에 15명은 아침밥을 못 먹을 정도로 배고파...’라는 기사가 있다고 치자. 이것은 우라나라 아이들이 빈곤한 사람들이 많다는 냄새가 난다. 따라서 진보적인 입장에서 이 기사를 접한다고 가정하면 빈곤한 아이들은 100명에 15명 꼴로 있으며 이들을 위해 사회보장(아침밥을 제공해주자는 이유)을 더욱 확대해 나가자고 근거를 제공할 것이다.그러나 위 기사는 어떤 사실을 왜곡된 체 기사를 내보낼 수도 있다. 그냥 단순하게 시간이 없어서 아침밥을 못 먹는 아이도 포함될 수도 있고 아침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도 포함 할 수 있다. 즉 문제의 일부가 아닌 것을 잘못 판정하는 경우가 될 수가 있다.(위양성)이 책의 변이통계편을 보면서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님이 생각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장안에 떠도는 ‘선화공주가 밤마다 몰래 서동의 방을 찾아간다’는 유언비어를 통해 무왕은 예쁜 선화공주를 얻지만 당사자인 선화공주님은 무척이나 억울했을 것 같다. 바로 왜곡된 변이통계(선화공주가 밤마다 몰래 서동의 방을 찾아간다)가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장안에 퍼지면서 결국 임금의 귀까지 가는) 굳건하게 살아남는다. 바로 변이통계는 그 자료를 원하는 사람에 의해서 언제든지 왜곡된 통계가 다시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통계란 학문은 크게 대량의 사실을 조사하여 숫자로 정리하는 기술통계학과 표본의 성질로부터 모집단의 성질을 추측하거나 그 추측이 어느 정도 신뢰하는지 알아보는 추측통계학으로 나눈다.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는 기술통계학보다는 추측통계학이 많이 쓰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추측통계학은 실제로 존재하는 자료를 근거로 한다기 보다 말 그대로 추측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논란거리를 많이 제공한다.어떤 지역 학교에서 100명의 고1 남학생을 향해 설문조사를 벌인다고 치자. 이들중 30명은 국어를 좋아하고 50명은 영어을 좋아하며 20명만이 수학을 좋아한다고 응답했다. 이 대답은 전국의 고1학생이 30%는 국어를, 50%는 영어를, 20%는 수학을 좋아한다고 결론 내릴 수 있는가? 이 결과를 대푯값이라고 말할 수 없다. 상식적으로도 이러한 상황은 잘못된 경우이며 상황을 개선하려면 더 많은 표본들이 있어야 한다.그러나 대부분의 신문기사와 뉴스들은 시간과 경제적인 여건 때문에 위와 같이 웃기는 상황들이 연출된다. 그리고 많은 자료들이 임의로 추측하거나 변이통계를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