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기 분석법우선, 회귀 분석(regression analysis)이란 통계적 분석방법을 설명하기에 앞서 '회귀'의 원리라 할 수 있는 예제를 보면아버지의 키와 아들의 키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있을까??영국의 우생학자 F.Galton(1822 - 1911)은 아버지의 신장과 아들의 신장 사이에는 비례관계가 있다고 보았는데 먼저, 아버지의 신장이 인간 전체의 평균신장 보다 작은 경우에 아들은 아버지의 신장보다 크거나 같은 경향을 보이고 한편, 아버지의 신장이 전체 평균키보다 큰 경우에는 아들의 키가 아버지보다 작거나 같은 경향을 보인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이처럼 아들들의 신장은 인간 전체의 평균신장에 되돌아 가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regression(회귀)" 라고 처음 표현한 사람이 F.Galton 이며, 이것이 유래가 되어 통계학에서는 변수간의 어떤 함수관계를 표현하는 식은 회귀식(regression equation)이라는 용어로 사용하게 됐다.* 주요 용어 정리회귀분석: 독립변수와 종속변수들간의 관련성을 수학적 모형을 이용하여 측정된 변수들의 자료로부터 추정하고 분석하는 통계적 방법독립변수: 서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둘 이상의 변수들 중에서 다른 변수에게 영향을 주는 변수(independent variable, explanatory variable)종속변수: 독립변수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 변수(dependent variable, response variable)1. 단순 회귀모형회귀식: 독립변수 x와 종속변수 y의 관계를 식으로 나타낸 것scale 90 y~=~alpha ~+~ beta `x(3.2)독립변수 x는 수학변수(mathematical variable), 종속변수 y는 측정오차를 수반하는 확률 변수, 측정오차들은 모든 x에 대하여 서로 독립이다.(1) 오차 ε은 정규분포를 따른다.(2) 오차 ε은 그 평균값이 0이다.(3) 서로 다른 두 개의 오차는 서로 독립적이다.(4) 오차 ε은 모든 xi, i = 1,2,...,n 의 값에서 동일한 분산나의 독립변수를 가지며, 모집단 회귀계수는 지수나 곱의 형태가 아니므로 선형이며, 또한 독립변수 x의 차수가 1차이므로 독립변수로 볼 때에도 선형이 되어 단순회귀모형이라 부른다. 일반형은 다음과 같다.scale 90 y~=~ beta_0 ~+~ beta_1 x ~+~ epsilon여기서scale 90 beta ~=~pmatrix {beta_0# beta_1},acute x ~=~ pmatrix {1 ~x}라 놓으면,scale 90 y~=~ acute x `beta ~+~ epsilon(3.5)로 쓸 수 있다.관찰치 y는 β0 + β1x 와 확률변수 ε의 합으로 표현되므로 y도 확률변수가 되며 주어진 x의 값에서 E(y) = β0 + β1x, Var(y) = σ2 이 된다.E(y) ~&=~ E (beta_0 ~+~ beta_1 x ~+~ epsilon)#&=~ beta_0 ~+~ beta_1 x ~+~ E(epsilon)#&=~ beta_0 ~+~ beta_1 x#&=~ mu_y.x(3.6.a)rm Var it (y) ~&=~ rm Var it(beta_0 ~+~ beta_1 x ~+~ epsilon)#&=~ rm Var `(epsilon)#&=~ sigma^2(3.6b)오차항 ε = y - (β0 + β1x) 이 정규분포 N(0,σ2) 을 따르면, 관측치 y는 정규분포 N(β0 + β1x, σ2) 을 따른다.식 (3.6a)를 모집단 회귀식이라고 하는데 x의 값에 따라 변하며, 식 (3.6b)의 분산은 x의 값에 관계없이 일정한 값, 즉 등분산(homoscedastic)을 갖는다.모형 (3.3)에서 독립변수 x는 수학변수로 가정하였으나, 실제로는 확률변수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x의 확률분포가 β0, β1, σ2 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면 모형 (3.3)으로 분석해도 된다. 식 (3.4)는 다음과 같은 대체모형으로 사용하는 것이 편리한 경우도 있다.y&~=~beta_0 ~+~ beta_1 x ~+~ epsilon#&~=~ (beta_0 ~+~ beta_1 bar{x}) ~+~ epsilon," " (acute beta_0 ~=~ beta_0 ~+~ beta_1 bar{x})#&~=~ acute beta_0 ~+~ beta_1 acute x ~+~ epsilon," " ``(acute x ~=~ x - bar{x})(3.8)2. 회귀선의 추정표본회귀식: 표본의 자료를 이용하여 모집단 회귀계수를 추정하여 만든 회귀식scale 90 hat y ~=~ b_0 ~+~ b_1 x(3.9)b0 : 절편(intercept)b1 : 기울기(slope)ei : 잔차(residual). 실제값 μy.x와 추정치 i 의 차이.scale 90 e_i ~=~ y_i ~-~ hat {y}`_i(3.10)최소 자승법회귀모형 (3.3)으로부터 모든 표본점(xi, yi)에서의 오차의 자승합을 최소로 하는 β0와 β1의 값을 추정치로 택하는 방법오차scale 90 epsilon_i ~=~ y_i ~-~ (beta_0 ~+~ beta_1 x_1 )오차자승합scale 80 Q ~=~ sum from i=1 to n epsilon_i ^2~=~ sum from i=1 to n [y_i ~-~ (beta_0 ~+~ beta_1 x_i )]^2(3.11)Q는 2개의 서로 독립된 변량 β0, β1의 함수이며 이차편미분 행렬 K는scale 90 K ~&=~ bmatrix { lcol {2n ~&~ 2 sum from i=1 to n x_i ~~###2 sum from i=1 to n x_1 ~&~ 2 sum from i=1 to n x_i ^2~~}}#이 되고,scale 90 {delta^2 Q} over {delta beta_0 `^2} ~=~ 2n ~>~ 0scale 90 dmatrix {K``}~&=~ 4n sum from i=1 to n x_i`^2 ~-~ 4 pmatrix { sum from i=1 to n x_i }`^2 #scale 90 ~&=~ 4n sum from i=1 to n (x_i ~-~ bar x )^2 ~>~0이므로 K 는 양정치행렬이 i=1 to n (y_i ~-~ beta_0 ~-~ beta_1 x_i ) #scale 90 {delta Q} over {delta beta_1} ~&=~ -2 sum from i=1 to n x_i `(y_i ~-~ beta_0 ~-~ beta_1 x_i )(3.12)위 식을 0 으로 만드는 β0 와 β1 을 b0, b1이라 하면scale 90 b_0 n ~+ b_1 sum from i=1 to n x_i ~&=~ sum from i=1 to n y_i#(3.13a)scale 90 b_0 sum from i=1 to n x_i ~+~ b_1 sum from i=1 to n x_i ^2 ~&=~ sum from i=1 to n x_i y_i(3.13b)이 식을 b0, b1 에 대하여 풀면scale 90 b_1 ~=~ {sum from i=1 to n x_i `y_i ~-~ { sum from i=1 to n x_i` sum from i=1 to n y_i} over n} over {sum from i=1 to n x_i ^2 ~-~ {pmatrix {sum from i=1 to n x_i}`^2} over n}~=~ { sum from i=1 to n (x_i ~-~ bar x )`(y_i ~-~ bar y ) } over { sum from i=1 to n (x_i ~-~ bar x )^2}(3.14a)scale 90 b_0 ~=~ {sum from i=1 to n y_i} over n ~-~ b_1 {sum from i=1 to n x_i} over n~=~ bar y ~-~ b_1 bar x(3.14b)이 식으로부터 모집단 회귀식의 추정 회귀식을 구하면,hat y ~=~ b_0 ~+~ b_1 x(3.16)이 되며, 이를 적합된 회귀직선(fitted regression line)이라고도 한다.(3.8)의 대체 모형의 경우, 적합된 회귀직선은 다음과 같다.scale 90 hat y ~&=~ acute b_0 ~+~ b_1 (x ~-~ bar x )#scal1} sum from i=1 to n (y_i ~-~ mu_y.x )^2~&=~ sum from i=1 to n (y_i ~-~ hat {y}`_i )^2 ##scale 90 ~&=~ sum from i=1 to n (y_i ~-~ b_0 ~-~ b_1 x_i )^2회귀계수 β0와 β1 의 최소자승추정량 b0, b1 은 최량선형 불편추정량이 된다.최량선형 불편추정량이란 모든 추정량 중에서 관측치들의 선형결합으로 이루어진 추정량이어야 하고, 불편성을 만족하며, 최소 분산을 가진다.회귀직선scale 90 hat y ~=~ b_0 ~+~ b_1 x는 다음과 같은 성질을 갖는다.⑴ 잔차 ei = yi - i 의 합은 0 이다.⑵ 잔차 자승의 합scale 80 sum from i=1 to n e_i ^2은 최소가 된다.⑶ 잔차들의 xi 에 의한 가중합은 0 이다.⑷ 잔차들의 i 에 의한 가중합은 0 이다.⑸ 적합된 회귀선scale 80 hat y ~=~ b_0 ~+~ b_1 x_i는 항상 점(bar x , ~ bar y )를 지난다.일반적 모집단의 산포도를 나타내는 모분산 σ2 의 불편추정량은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scale 90 s^2~=~ 1 over (n-1) sum from i=1 to n (x_i - bar x )^2(3.39)같은 방법으로 회귀모형에서 오차항 ε의 분산 σ2을 추정하면 다음과 같다.e_i ~=~ y_i ~-~ hat {y} `_i잔차자승합(residual sum of squares)을 SSE라고 표시하면scale 90 rm SSE it ~=~ sum from i=1 to n (y_i ~-~ hat{y}`_i )^2 ~=~ sum from i=1 to n (y_i ~-~ b_0 ~-~ b_1 x_i )^2(3.40)여기서 b0, b1 2개를 추정하므로 자유도는 n-2 가 된다. 따라서, 잔차의 자승평균은,scale 90 rm MSE ~=~ {SSE} over {it n-2}~=~ it {sum from i=1 to n (y_i - hat{y}`-~2}
고개지(顧愷之)약 345~406)의 자는 장강(長康)이고 아명은 호두(虎頭)라 했다. 강소성 무석 사람으로 장강 이남의 명문 출신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다재 다능하여 시가(詩歌)에 능하고 글씨도 잘 썼으며 특히 회화에 뛰어났다. 고개지가 살아 있을 당시 육조 시대(위.진.남북조시대)의 지배적인 미학 사상은 주로 '형사성(形似性)'을 추구하는 것이었으나 고개지의 회화는 이와는 다른 '박진성(迫眞性)'을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그의 회화 이론도 '형(形)으로써 박진성을 표현한다'는 논점에서 중국 회화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고개지는 많은 작품을 남겼다. 당.송의 사료에 의하면 기록되어 있는 작품만도 70여 종에 이르고 있고 회화에 관한 저술도 3편이나 있다. 현재 전하는 작품으로'여사잠도(女史箴圖) . 낙신부도(洛神賦圖) . 열녀도(烈女圖)'의 세 작품뿐인데 감정결과 이 작품들은 당.송 때의 대가가 모사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어쨌든 지금까지도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기품을 잃지 않고 있다. 고개지는 회화 예술면에서 다재 다능한 인물이었다. 뛰어난 서도가, 시인을 각각 '서성','시성'이라 부르는 것과 같이 고개지는 중국 고대의 '화성(畵聖)'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확실히 고개지는 '화성'이라 일컬어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는 위대한 화가였다.왕희지(王羲之)중국 동진(321∼379)때 사람으로 자는 일소(逸少)이다. 귀족 출신으로 세칭 왕우군(王右軍)이라고도 부른다. 서예를 예술로 끌어올리는 데 눈부신 공을 세웠으며 왕희지 이후의 역대 서예가들이 왕희지를 배우지 않고서는 안 되었을 정도로 끼친 영향이 막대하며 서성(書聖)이라 칭한다. 근거에 의하면 왕희지는 어렸을 때에는 말을 잘 하지 못하였으나 자라면서 오히려 재주가 뛰어나고 성격도 진솔하면서 지조와 절개가 굳었다고 한다. 특히 왕희지는 결코 옛사람의 글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스스로 이치를 깨달아 공부하였며고법에 얽매이지도 않았다. 그의 대표작은 행서인 '난정서'가 있고, 초서에는 '17첩'이 있다.형향력이 컸던 글씨체이다. 이 그림은, 북송의 산수화가 이성과 곽희의 양식을 답습한 이른바 이곽파 산수화에 속한다. 제목에 있는 그대로 강을 따라 첩첩이 펼쳐지는 산의 모습을 부드러운 선염과 짙은 먹의 대비 로 표현하였다. 굽이치며 뒤로 멀어져가는 산봉우리의 모습은 곽희의 의 주봉과 흡사하지만, 두루마리의 제일 끝 부분에 보이는 소나무의 묘사는 조맹부 회화의 서예적 특징을 잘 나타낸다. 즉 해조묘로 불리는 앙상한 한림의 과장된 모습은 기본적으로 이곽파의 특징이지만, 갈필의 감각적 면을 살린 필선은 원대 이곽파 그림의 새로운 요소라고 하겠다. 이곽파 양식은 북송 멸망 이후 금나라의 화가들에 의해 계속되었다가 원대 초기에 다시금 조맹부를 위시한 일부 문인화가들에 의해 좀더 활발하게 채택되었다광태사학파명대(明代) 절파 화풍(浙派畵風)의 후기에 활동하였던 오위(吳偉), 장숭(蔣嵩), 장로(張路)와 같은 화가들의 화풍을 일컫는다.이들이 몹시 거칠고 강렬한 필묵법을 사용하여 그린 그림을 당시 문인 화가들이 마치 미치광이 같은 사학(邪學)이라고 부른 데서 이름 붙여진 것이다.예찬예찬(1301-1374)은 원대(元代)의 산수화가로, 자는 원진(元鎭), 호는 운림(雲林)이며 강소성(江蘇省) 무석(無錫) 출신이다.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으나 학문과 예술에 뜻을 두어 젊은 시절에는 책과 골동품과 서화를 사 모았다. 그러다 그 재산을 모두 친지들에게 나누어주고 방랑 생활을 하였다.그는 끊임없이 목욕을 하는 등 심한 결벽증을 보였는데, 그림에서도 간결한 구도에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빈 정자와 강가의 모습이 주를 이룬다. 붓을 씀에 있어서도 물기 없는 마른 붓질을 더함으로써 담백하고 스산한 분위기의 산수화를 특징으로 한다.황공망(1269-1354)원대(元代)의 산수화가로 자는 자구(子久), 호는 대치도인(大痴道人) 혹은 일봉(一峯) 등 여러 가지 호를 사용하였다. 오진(吳鎭), 예찬(倪瓚), 왕몽(王蒙)과 함께 원말 사대가(元末四大家)의 한 사람으로서, 담백한 문인화풍의 산수화로 후대되고 힘찬 기운이 나타났다. 그는 마원(馬遠)과 같은 시대에 활동했으며, 유사한 풍격을 구사하여 '마·하'로 병칭되었다.왕유(王維)699 중국 산시 성[山西省] 치 현[祁縣]~759.중국 문화사의 황금기에 활동한 유명한 예술가·문인.자는 마힐(摩詰). 시·음악·그림으로 표현되는 인문 교육의 귀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7세기의 화가이자 문인인 동기창(董基昌)은 그의 화론서에서 왕유를 남종화(南宗畵)의 시조로 규정했다. 남종화는 문인 취향의 그림으로서, 피상적인 묘사보다는 개인적인 감정 표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나중에 거의 신화적인 존재로까지 추앙받았기 때문에, 진정한 왕유의 모습을 탐지해내기는 어렵다. 왕유는 당대(唐代 : 618~907)에 태어나서 자랐다. 당시 당의 수도 장안(長安)은 부와 안정을 동시에 누린 국제적 도시였다. 왕유는 21세 때 진사(進士)시험에 급제했다. 9세 때부터 이미 문학적 재능을 보였다고 하지만, 진사 급제는 특히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으로 추정된다.형호(荊浩)?~?910~950년경에 활동한 중국 오대(五代:907~960)의 산수화가·문장가.자는 호연(浩然), 호는 홍곡자(洪谷子). 허난 성[河南省] 친수이[沁水] 사람이다. 생의 대부분을 산시 성[山西省] 타이항 산[太行山]에 은거하며 논밭을 일구면서 살았다. 그의 작품은 모사본조차 남아 있지 않지만 이성(李成)·관동(關同)과 함께 북송시대(北宋時代:960~1127)에 꽃을 피운 거비파(巨碑派) 산수화의 선구자로 간주된다. 그가 지었다고 알려진 〈필법기 筆法記〉에는 자연과 혼연일체를 이룬 전통 산수화가의 목표와 이상, 방법 등이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송대 및 후대 산수화의 미학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이성(李成)919~967경.중국 오대 송초(五代宋初)의 화가.산둥 성[山東省] 칭저우[靑州] 사람이다. 선조가 당(唐) 황실의 종친이었다. 평론가들은 일찍이 산수화에서의 그의 위치가 종교인물화에서의 오도현(吳道玄)과 필적한다고 언급했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적막한 기상며, 여백을 많이 살렸기 때문에 화면 대부분이 비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그림에는 흔히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오두막 1채와 나무 몇 그루, 그밖에 전원생활을 나타내주는 약간의 요소들, 그리고 온통 쓸쓸하고 적막한 원초적인 땅의 형태가 그려져 있다.왕몽(王蒙)1308 중국 저장 성[浙江省] 우싱[吳興]~1385.중국의 화가.후에 원4대가(元四大家)로 알려진 일군의 중국 화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과거 대가들의 화풍을 답습하는 데 역점을 두기보다는 좀더 독자적인 양식을 추구했다. 왕몽은 원대(元代 : 1279~1368)의 유명한 화가였던 조맹부(趙孟)의 외손자였는데, 외할머니 관도승(菅道昇)도 화가였다. 왕몽은 원과 명대(明代 : 1368~1644)의 양대에 걸쳐 말단 조정관리로 일했는데, 승상 호유용(胡惟庸)의 모반에 연루되어(나중에 그의 무고가 밝혀짐) 투옥된 뒤 결국 생애의 마지막 5년을 옥중에서 보내다 죽었다. 왕몽은 대개 필선이 가늘고 간결한 그림을 그렸던 예찬(倪瓚)과 가까운 친구였지만 그와는 대조적인 양식을 추구했다. 즉 아낌없이 먹을 써서 동요하는 듯한 형체들로 가득 메운 농도 짙은 그림을 그렸다.오진(吳鎭)1280 중국 저장 성[浙江省] 자싱[嘉興]~1354.나중에 원4대가(元四大家)로 알려진 일군의 중국 화가들 가운데 한 사람.오진이 수묵으로 그린 (1352)자는 중규(仲圭), 호는 매화도인(梅花道人). 그는 특히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 조정에 출사(出仕)하지 않고 점쟁이 노릇을 하며 은둔자로 살면서 권세를 멀리한 것으로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동기창(董其昌)1555 중국 장쑤 성[江蘇省] 화정(華亭)~1636.중국의 화가·서예가·화론가.명대(明代) 말기의 가장 뛰어난 예술가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당대 가장 유명한 미술전문가였던 그가 제시한 개념들은 중국 미학(美學) 이론에 계속 영향을 미쳤다. 가난한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과거시험에 떨어졌지만 34세 때인 1589년에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처음 관직에 올랐고, 그후 잇달아)의 위대한 문인화가들도 존경했다. 하나의 화풍을 추구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그림에는 전반적으로 고인(古人)들의 화풍연구와 심사숙고의 정신이 담겨 있다.진순(陳淳)1483~1544.중국 명대(明代)의 화가.자는 도복(道復), 호는 백양산인(白陽山人). 장주(長洲:지금의 장쑤 성[江蘇省] 우 현[吳縣]) 사람이다. 문징명(文徵明:1470~1559)의 제자였지만 나중에는 스승의 방식을 답습하지 않았다. 사의(寫義)적인 화훼화(花卉畵)에 뛰어났으며 심주(沈周:1427~1509)의 영향을 받았다. 색은 담묵으로 옅게 사용했으며 그 풍격이 소탈하고 호탕하면서도 빼어나 화법에 있어서 새 기원을 이루었다. 중년부터는 산수화를 그리기 시작하여, 송대(宋代)의 미불(米)·미우인(米友仁)과 원대(元代)의 고방산(高房山)의 화풍을 적절히 섞어놓은 듯 발묵이 아주 힘찬 것이 고원(高遠)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산수권(山水卷) 〈암화도 畵圖〉를 꼽을 수 있다.서위(徐謂)1521 중국 저장 성[浙江省] 산인[山陰]~1593.중국 명대(明代)의 화가.중국 회화사에서 신동(神童)·관료·화가·광인(狂人) 등의 다양한 면모를 지녔던 인물이다. 한때 감옥살이를 하게 된 적이 있으나 미친 사람으로 행세해 풀려났다. 지독한 술꾼으로도 알려졌으며, 가난에 시달리다가 죽었다. 나중에 절파(浙派) 화가로 꼽혔는데, 대진(戴進)으로 대표되던 절파는 마원(馬遠)과 하규(夏珪)의 남송원체화(南宋院體畵) 전통을 이은 화파이다. 그러나 기질과 화풍면에서는 석도(石濤)라든가 8대산인(八大山人) 같은 17세기 개성주의 화가들에 더 가까웠다. 그의 화풍은 자유분방하면서도 때로는 폭발적이다.사왕오운(四王吳 )중국 청대(淸代)의 산수화파(山水畵派) 가운데 하나.문인화(文人畵)의 6대가인 왕시민(王時敏)·왕감(王鑑)·왕원기(王原祁)·왕휘(王)·오력(吳歷)·운격(格)의 약칭이다. 이들은 서로 긴밀한 사제관계나 친구관계로 맺어져, 명대(明代)의 화가인 동기창(董其昌)에 의해 확립된 문인화의 전형주의를 추구하고
1. 고려청자의 역사·청자란 무엇인가?청자는 투명하고 신비로운 비취색을 띠는 자기로서 한국에서는 이미 12세기에 빛깔이나 형태, 문양에서 최고의 품격으로 전성기를 이루었다. 청자의 재료가 되는 흙은 철분이 조금 섞인 백토인데 이 백토로 그릇을 빚은 후 철분이 1∼3%정도 함유되어 있는 유약을 입혀 1300도 정도의 온도에서 구워낸 것이 청자이다. 유약의 색은 초록이 섞인 푸른색으로 백토를 구웠을 때 나타나는 옅은 회색과 어울려 청자의 색은 투명한 비취빛을 띠게 되는 것이다. 흙이나 유약등 재료가 시대나 지방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청자는 그것을 만든 시기나 지방에 따라 빛깔이나 품질이 조금씩 차이가 난다.· 11세기 전반10세기 말에서 11세기에 들어서면서 고려의 도자 기술은 바야흐로 숙련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기형이 다양해지고 종전의 기형에 변화가 있으며 문양 표현기법과 내용이 다양해졌다. 대접의 경우 주종을 이루던 월주요식의 굽다리 밑이 넓고 측사면이 직선인 형식이 굽다리 밑이 좁아지며 대접이 우묵해지고 측사면이 완만한 내경된 곡선을 그리다가 구연부에서 약간 외반되는 형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또 내면 구연밑이 외반되기 시작하는 곳에 한 줄의 음각대선이 생겼다. 초기 청자 시기의 병, 주전자 등은 금속기에서 영향을 받았던 각 부위가 예리하게 꺾이는 강인한 형태에서 점차 모든 부위가 도자기의 특색이 나타나는 유연한 곡면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음각문양은 가늘고 부드럽게 세련되고 국당초문, 파어문, 앵무문 등 그 종류가 다양해지며 양인각문이 많이 등장했다.초보적인 양각 문과 철화문, 퇴화문이 나타나며 상감문양도 계속 시도된다. 전대에 이어 화형 대접, 접시 등이 계속 나타나며 과형 등 상형 기명도 등장한다. 유약은 점차 밝아져서 12세기 전반기의 비색유로 접근한다. 용인시 이동면의 가마를 제외하고는 내화도가 강한 갑발로 발전하여 갑발이 얇으면서 커지고 두 번 세 번 사용할 수 있어 11세기 이후의 요지에서는 갑발의 퇴적(堆積)도 점차 줄어든다. 이 11세기 전반기에年)'명 청자발 : "계축년조상 대성지발(癸丑年造上 大聖持鉢)"의 상감 명문. 1073년 추정.(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동원 선생기증 유물) 청자퇴주기(靑磁退酒器) 등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 고려 고분 출토 청자 일괄 : 11세기말경 추정.(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자철화초문반구치마병(靑磁鐵畵草文盤口馳馬甁) : 11세기 초∼중엽 추정.(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백자철화반구병 : 11세기 말경 추정(김형태 소장), 백자철화매병(白磁鐵畵梅甁) : (白磁鐵畵盤口甁) 11세기 말경 추정,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 고려 고분 출토 백자 일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시기에는 연질 백자에 거친 철화문을 시문한 예가 많이 등장한다. 백자정병(白磁淨甁) : 11세기 말경 추정, 경기도 광주군 광주군 상산곡리 출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러한 11세기 중 후반 고려 도자의 세련기에 있어서 눈에 띄는 특색은 유약과 태토의 질이 일정하고 유약은 기포가 많으며 반투명성이며 전반기보다 녹색이 좀더 줄었고 태토도 철분이 줄어 밝은 회색을 띠며 번조할 때 환원이 잘 보장되고 있다.따라서 이 시기는 바야흐로 다가오는 12세기 전반 고려 청자의 절정기를 앞에 두고 북송 도자 수준의 차원에서 발돋움하면서 독창적인 고려 도자 예술 창조의 기틀을 착실하게 다져 나가던 시대였다. 고려 순청자의 절정기(12세기 전반) 순청자의 세련 고려 청자의 아름다움은 우선 색의 아름다움에 있다. 고려 청자의 색택(色澤)은 11세기에 들어서면 고려 특유의 비색(翡色)으로 세련되기 시작하여 그 절정기는 12세기 전반기이다. 순청자는 청자 표면에 아무 문양이 없는 것과 음각·양각을 하거나 상형 등을 지칭하며 상감문양과 같이 청자 태토에 다른 색의 자토(磁土 : 철분 안료로 쇠녹물이나 흑색)나 백토를 사용하거나 철화와 동화와 같이 산화철분이나 산화동으로 문양을 나타낸 것은 제외된다. 순청자의 전성기인 12세기 전반기 50년 동안은 고려 도자기로서뿐만 아니라 한국 도자사와 세계 도자사에서 하나의 절정기였다.11세기 후반기이래 고려청자는 도자기기술의 최고 경지라 할 수 있는 신비의 색깔과 선의 아름다움, 그리고 섬세하고 세련된 문양의 조화로 그 예술적 가치를 널리 인정받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어느 정도 우리 문화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일반화된 상식이기도 하다.그러나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에 대해 표현해 보라고 하면 쉽게 대답하기가 어렵다. 또 청자색에 대하여 감상적 표현을 말하라고 하면 이것 역시 마찬가지로 어렵다. 청자란 글자가 지닌 뜻으로 풀이해 보면 푸른 빛깔의 자기그릇이다. 그런데 청자에서의 청색이라는 색의 정의가 막연하다. 자연과 도공의 혼이 어루러져 나타나는 청자의 색을 어떤 사람은 푸른 하늘의 색에 비유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먼산의 푸르름에 비유하기도 하며, 어떤 이는 깊은 물의 색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그리고 평소 청자를 잘 몰랐던 사람들도 청자를 곁에서 보면 무언가 신비스러움에 도취되고, 그윽한 색깔과 청아함, 섬세하고 다양한 무늬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게 된다. 어쩌면 이런 것이 청자가 지니고 있는 신비함이요, 아름다움이요, 가치일지도 모른다. 청자문화의 선진국이라고 자부하는 중국에서까지 자기 나라의 청자를 제쳐두고 고려청자를 천하에서 제일 귀하고 값진 것 중의 하나로 지목한 바 있어 고려청자의 예술적 가치를 가름해 볼 수 있다. 실제로 천년이나 지난 오늘날의 우리에게 까지도 그 신비스런 아름다움과 예술적 감각을 공감하게 하는 고려청자는 인간이 이루어 낼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예술품이며 한국문화의 진수라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단군 숭배의 전통적인 토속 신앙과 불교, 노장, 풍수도참 사상 등을 배경으로 청자를 주로 생산하였고 세련시켜 12세기 전반에 비색 순청자로서 유례가 없는 독특한 특색을 나타냈고 12세기 중엽에 유약을 맑고 밝게 발전시켜 청자 상감으로서 다시 한번 꽃을 피웠다. 토기에서 청자로의 이행은 인류 문화 발전의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으나 고려 도자기 가운데에는 청자가 특히 많이 생산되었다.고려청자에는 자연의 향기가 넘쳐흐른다로 만든 것이 상형청자(象形靑磁)이다. 고려 전기부터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한 상형청자는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고려 청자 조형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하겠다.(6) 청자 상감류청자 상감은 이미 초기 청자 형식 시기인 10세기 후반경에 매우 드물지만 그 실례가 있어 그 발생을 알 수가 있다. 10세기 후반경에는 아주 단순 소박한 문양이 있고 11세기에는 명문을 상감으로 나타낸 경우가 있을 뿐 그 기법이 아직 거칠고 문양 효과도 두드러지지 못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청자 상감은 이때에 이미 음각·양각문양과 병행하여 각 문양 구성원 중에 종속문으로 등장하거나 절지문 형식의 단독문으로 조금씩 나타나지만 이미 그 기술이 숙련되고 문양 효과가 두드러지기 시작하였다.(7) 철채청자(鐵彩靑磁)철채는 청자 태토 위에 철분을 바르고 그 위에 청자 유약을 입혀 번조한 것으로 발색은 대체로 흑청색을 나타내는데 철분이 많은 안료를 바른 경우 적갈색이 된다. 적갈색의 경우 유약은 얇게 입혀진다. 11세기 후반경으로부터 12 내지 13세기경까지 만들어졌는데 흑청색 발색의 경우에는 여기 퇴화분과 상감문양이 있고 적갈색 발색인 경우에는 면상감문양이 있다.(8) 연리문청자(練理文靑磁)굽고 난 뒤 청자의 태토는 회색인데 청자 태토에 검게 되는 철분이 많이 섞인 태토와 희 게 되는 백자 태토를 한데 섞어 이겨 태토를 만들면 태토 안에 회색, 백색, 흑색이 자연스럽게 섞여 마치 대리석의 돌무늬 같게 된다. 이 태토로 그릇을 빚고 표면을 얇게 깎아낸 다음 청자 유약을 입혀 환원 번조하면 그 겉면에 대리석과 같은 문양이 나타나게 된다. 우리나라 연리문은 세 가지 색깔의 흙이 이기고 밝은 대로 섞여 그 문양이 자연 그대로여서 아름다운 대리석의 돌무의 같지만 중국에는 이미 당대에 연리문이 시작되었으나 흙을 이기고 밟는 과정이 인위적으로 특정한 문양 효과를 내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일정한 곡선의 중첩 반복으로 자연스러움과는 거리가 멀다.(9) 화금청자(畵金靑磁)화금청자는 완성된 청자의 유약 표면60∼70일 정도가 소요되며, 소성과정에서는 초벌은 800℃, 본벌은 1,300℃의 열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주야간 이틀 이상을 연속 불을 지펴야 한다. 또 신비스러운 비색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불과 태토(胎土)와 유약의 3요소가 조화를 이루어야 되고, 가마 내에서 불의 작용과 기상 조건에 따라 변화무쌍한 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에 청자를 제작하는 어려움은 이루다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어느 한 부분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전체적인 균형미를 잃게 되는 것이 청자이다. 그래서 청자 제작이 어렵다고 한다. 그러면 청자는 어떤 과정을 거쳐 제작되는지 전문가들의 설명을 참고하여 청자의 제작 과정을 알아보기로 한다.▷ 점토선정 및 수비 - 성형 - 조각 - 건조 - 초벌구이 - 시유 - 본벌구이 - 상회구이1. 점토 선정 및 수비청자를 만들기 위한 점토는 점력이 풍부하고 내화도(耐火度)가 높으며 립도(粒度)가 균 일 하고 철분 함량이 과다하지 않으며 수숙율(收宿率)이 크지 않고 재벌구이 후의 태토색 (胎土色)이 회청색(灰靑色)을 띠는 흙을 찾아 사용한다. 여기에 내화도가 다소 부족하거나 철분 함량이 기준치 보다 초과되면 백토를 첨가하여 사용한다. 이러한 흙들은 채토하여 바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수비(水飛)를 하게 되는데 흙을 물에다 풀어(현재는 교반기를 사용하여 흙덩어리를 흙탕물로 만듦) 120目의 채로 걸러서 철분을 제거한 다음 건조실에서 수십일 간을 말려서 사용한다.2. 성형(成形)흙이 다 마르면 거두어 토련실(土練室)로 옮겨 알맞게 물을 뿌리고 흙이 찰기가 있도록 짓이기게 된다. 잘 이겨진 흙은 필요한 만큼 한 덩어리씩 떼어 내어 또 다시 흙 속에 들 어 있는 공기가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여러 차례 이겨서 비로소 형태를 만드는 성형을 한 다. 흙이 잘못 이겨 성형을 하게 되면 소성시에 흙 속에 들어 있던 공기가 팽창하여 혹처럼 부풀어오르기 때문에 흙을 잘 이겨 사용해야 한다. 成形은 주로 물레를 많이 사용한다. 성형이 끝난 것들은 적당히 건조시켜서 다시 물레 위에 올려있다.
차 례--------------------------------------Ⅰ. Degar의 일생.Ⅱ. Degar의 작품과 평.Ⅲ. Degar의 예술 세계ⅰ. 모색의 시절ⅱ. 인상주의 시절ⅲ. 원숙한 손놀림의 시절Ⅳ. EpilogueⅠ. Degar의 일생.에드가 드가는 1834년 7월 19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가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창립한 은행의 파리 지점장이 아버지였기에, 경제적으로 윤택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적어도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은 돈에 궁색함이 없이 지낼 수 있었다. 먼저 드가의 작품을 유심히 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서명의 차이인데, 드가의 이름은 자료에 따라 표기가 둘로 갈라진다. 하나는 드가(Degas)이고, 다른 하나는 드(De) 가(Gas)이다. 드가의 젊은시절 작품에는 서명이 De Gas로, 이후에는 Degas로 표기되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할아버지에게서 찾아진다. 프랑스가 대혁명의 혼란기에 빠졌을 때 할아버지는 나폴리로 피신해서 은행가로 성공한 인물이다. 성공한 만큼 귀족인 체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드가 Degas'라는 성을 둘로 나눠서 '드 De 가 Gas'라고 행세했다. 그러나 드가의 가문이 정말로 귀족의 혈통이었는지를 알 수 없어서, 그것이 할아버지의 창작이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어쨌든 드가는 1860년대에야 원래의 성을 되찾는데 그것은 그의 예술관에서 보듯이 냉철한 이성과 지독한 자존심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드가(1834년 파리의 생 조르쥬 거리에서 태어나 1917년 몽마르뜨르의 묘지에 묻혔다.)는 미술과 음악을 사랑했던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예술적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그는 청년기에 루이 르 그랑 중등학교를 졸업하고 파리 대학 법학부를 들어갔지만 법률공부를 곧 포기하고 만다. 1855년 앵그르의 제자 라모트의 소개로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하면서 그림의 세계로 달려들었다. 드가는 루브르 미술관을 드나들면서 옛 거장들의 그림을 익혔고, 정직한 여인이었다.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은 거의 언제나 여자였다. 그럼에도 드가는 여자에게 결코 관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니, 그는 여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관대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나는 나 자신이 부족하고, 유약하고, 무능한 사람이라 생각한다."그는 이렇게 그 자신을 표현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그 자신에 대한 회의적 생각을 감추고 싶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관대하고 싶은 것을 꺼려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또한 그의 예술적 감각은 언제나 정확함을 추구했다. 특히 그의 파스텔화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에게 데생은 회화의 한 부분이 아니라 전부였을지도 모른다.세월이 흐를수록 눈은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고, 1875년 동생의 사업 실패와 아버지가 남긴 부채로 그는 평생 처음 금전적인 곤경에 처하게 된다. 육체적 고통과 물질적 고통은 정신적 고통으로 이어지는 법이므로 그를 더욱 힘들게 했다. 그때부터 드가는 집안을 책임져야 했으므로, 본격적으로 그림을 팔기 시작했다.1886년 마지막 인상주의 전시회에 참여한 이후, 드가는 1892년 뒤랑-뤼엘 화랑에서 파스텔화 풍경화전을 가진 것 이외에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거의 25년 동안 한 차례의 전시회도 갖지 않았다. 예순 살이 되었을 때, 드가는 거의 시력을 잃어서 그림보다는 조각에 열중하게 된다. 어찌 보면 당연한 변화일 수 있다. 그림의 미묘한 차이를 판단하려면 무엇보다 시력이 필요하지만, 조각은 손가락의 감각으로 형태의 미묘함을 파악하고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조각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도 여전히 무희와 말이었다. 물론 생동감 있게 살아 움직이는 무희와 말이었다.드가의 말년은 불행했다. 젊은 시절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경제적 어려움은 견딜 수 있었겠지만, 읾어버린 시력은 그에게 예술적 삶을 빼앗아간 원흉이 되었다. 그렇기에 그는 더욱 외로웠을 것이다.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었다. 그렇다고 동거한 여자가 있었다는 기록 또한 없다. 그는전에 참여했지만 그들과는 관심이 달랐고, 무엇보다관람석 앞의 기수들회화는 붓 자국이 두드러지지 않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밝은 대기 표현이나 채도 높은 색의 사용도 하지 않았다.발레 수업댄서들을 다룬 작품들 중 대표적인 무용 수업(The dancing Class 1874) /과 발레 수업( Ballet Class 1878-80) 이 있다. 유명한 발레 선생의 개인 스튜디오에서 춤추는 무용수들의 모습이 보인다. 역시 전경의 우측 하단을 사선으로 갈라 인물을 한쪽으로 치우치는 구도를 쓴다. 거기로부터 공백이 크게 있고 멀리 떨어진 좌측 상단에 보이는 한 무리의 무희들은 그들의 자세만큼이나 공간 안의 다른 사람들과 불안정한 관계를 보인다. 그 두 그룹은 마치 이 스튜디오 안의 스승과 제자의 관계처럼 거리가 있지만 균형을 이룬다. 드가는 이렇게 한쪽에 무게를 두는 구도를 자주 이용한다. 아주 급하게 잘려진 사람의 인체도 흔히 보이는데, 어색하지 않음은, 드가가 단순히 형태적 무게만을 상정하지 않고 그들 간의 심리적 관계까지 이해하고 표현하기 때문일 것이다. 드가 그림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이런 내적, 심리적 복합성과 관계의 가시화이다.발레가 당시 소녀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끌었고 많은 수의 발레 지망생들을 거리에서 볼 수 있었다는 주장들을 근거로 파리 소녀들에게 발레는 하나의 통과의례가 되면서 그들을 둘러싼 문화 - 발레 강습소, 그들을 돌보는 샤프롱과 후원자들까지 - 가 자연스레 생성되었다. 당시 발레리나가 사회에서, 여성이란 다른 성(the other sex)의 존재에서 벗어날 수 없었음을 의미하는데, 그녀들은 쉽게 남성의 관람의 대상이 되면서 발레리나로 성공하기 전부터 이들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게 되고 그러한 경향은 사회에 유통되던 여성에 대한 이데오르기와 맥을 같이 한다. 그렇기에 드가의 작품 중에는 무대 뒤에서 발레리나를 기다리는 나이가 지긋한 부르주아 남성들을 묘사한 것들이 많이 있다.실제 모델이었던 여인들이 당시 사회 내에서 겪었던 여러 가지 경험들과, 그표현되었고, 이런 점이 드가의 회화를 모던한 것으로 만드는Bath Tub결정적 요소들이다. 재치가 있는 과감한 구성이 주제와 형식에 모두 존재한다.드가는 후기에 가면서 마치 모네처럼 몇 가지 주제를 연작으로 제작하게 된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으로 "목욕"(Bath Tub)장면을 다룬 누드화가 있다. 드가의 이미지를 연구한 페미니스트 미술사학자인 암스트롱(Carol Armstrong)은 "Edgar Degas and the Presentation of the Female Body"란 논문에서 여성의 신체를 표현한 작품들에 대해 논의하면서 드가와 이전 작가들과의 달라진 시각을 이야기한다.(reprinted in Odd Man Out: Readings of the Work and Reputation of Edgar Degas, Chicago, 1991.) "Bath Tub"(c.1890) 연작들은 여성 누드와 남성의 시선을 주제로 삼은 작품이다. 열쇠구멍으로 들여다 본 것 같은 구도는 앵그르의 터키탕을 연상시키는데 관음증(Voyeurism)이란 오래된 방식을 빌어 실내 장면을 묘사했다. 관객을 의식하지 않은 듯 자연스런 여인의 포즈와 시선은 이 작품에서도 여전히 보인다. 그러나 드가 작품에서의 여인들은 어떤 성적 이미지를 강조하지 않는다. 목욕을 위해 구부린 등과 다리, 탕 안으로 발을 뻗어 들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은 평면적이고 추상화되었다. 윤곽선이 거칠게 칠해진 몸의 마디들도 화면 안의 인체를 딱딱하고 평면적으로 보이게 할뿐이다. 신체의 이상적 비례, 피부의 촉각적 느낌, 양감 있는 풍만함, 선정적 자세 그 어느 것에도 이들은 해당되지 않는다. 공간 안에서 순간적인 동작을 보이는 그녀의 몸은 이미 입체감이나 사실감을 많이 상실했기 때문이다.Young Girls Challenging Spartans드가는 여인 누드를 남성 관객의 탐미적 대상으로 여겼던 과거의 신화, 환상을 제거한다. 남성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여성 누드라는 장르의 성격에서 자유로와 진 여인들은 더 러 현상에 민감했으며 거기에 여성은 중요한 부분이었다는 것이다.미술사가인 립튼(Eunice Lipton)은 자신의 저서 Looking into Degas에서 "Bath Tub"을 다루면서, 그림 속의 주인공을 창녀로 보았다.(Berkeley, 1986) 당시 피부병이 파리에 만연해서 하루 1번 물로 목욕하는 것을 법으로 정했고 모든 시민들은 반드시 이에 따라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립튼은 집안에서 목욕 용구를 구비한 그림 속 여자들은 직업적으로 남성을 상대했던 여자임을 강조하고 목욕이란 행위의 구체적 의미를 고려해야한다고 주장한다.물론 그녀들의 정체성의 애매하지만, 오히려 계급과 성이 흐려지고 가려진 당시 상황을 잘 나타내준다고 볼 수 있다. 립튼도 '목욕하는 여인들'의 몸을 숙인 자세가 추하고 보기에 흉하다고 주장함으로 과거의 욕녀들과 상당히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그녀들의 목욕은 그들의 직업의 상징으로 더 이상 미적 관심의 대상이 아닌 사회적 현상이자 기호라는 것이다. 립튼은 발레리나나 오페라에 참여하는 대중 공연 자들의 정체성도 이렇게 사회화 과정에서 빚어진 이중적 본질을 가진 애매하고 혼돈 된 여성들로 아주 성적 대상으로 상품화되기도 하지만, 표면은 가리워 진 것으로 본다. 크락의 해석과 본질적으로 많이 유사한 립튼은 19세기 작가들과 그들의 모델에 초점을 맞추고 꾸준히 글을 내고 있다. 그러나 당시 사회 안에서 활동하는카페 테라스의 여인들여인들과 그들의 이미지는 -그들이 어떠한 형태로 등장하든지 - 직접적, 간접적 성적 욕망의 대상임을 강조하는 립튼의 결론은 너무나 단선적이란 비난 또한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을 관과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카페 테라스의 여인들은 수직의 선들이 인물들을 적당히 자르고 구획해주는데, 카페에 앉아있는 이 여인들은 손님을 기다리는 거리의 여인들이다. 단순해지는 인물의 표현이 희화화되었는데, 이렇게 창녀촌이나 창녀들의 모습을 다룬 그림들은 아주 대담한 표현과 구도로 눈길을 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도발적인 포즈의 사창가의.
처음에 인터넷은 "유해하다", "이롭다" 딱히 한가지의 의견에 치중할만한 성격의 것이 아니라고 봤었다. 그러나 토론을 하면서 여러 사람들의 의견과 인터넷을 조회하다 보니 나의 생각은 조금씩 변하게 되었다. 지금의 나의 생각은 이렇다. "인터넷은 유익함 속에서 출발했지만 지금은 유해하다"라고. 그 동안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로 불리웠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인터넷은 유저가 원하는 정보를 손쉽고 빠르게 찾을 수 있어 시간의 낭비를 막을 수 있다는 최상의 장점 아래, 원활한 업무 능력 향상과 지식의 확장에 커다란 도움이 되고 있다. 허나 이것에도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흔히 전자 사전보다는 두꺼운 책을 보며 일일이 찾아가며 공부하는 게 더 기억에 많이 남고 공부가 된다는 말을 우리는 종종 듣는다. 이것은 바로" 쉽게 얻는 것은 쉽게 잃는다"는 옛말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라 본다. 또한 다른 각도에서 문제를 직시해보면 남의 지식을 도용하여 자기의 것인 양 이용을 하는 것으로 지적 혹은 물적 소유권의 침해 현상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이다.특히 요즘 문제시되는 것은, 잘 걸러지지 않은 정보들의 남용으로 인터넷을 접하는 유저들에게 해를 입히는 그러한 정보들에 대해서, 그것들을 막을 만한 제도적 장치가 완벽할 수 없다는데 있다. 대표적인 예로, 성인물의 남용과 이것을 제어 할만한 장치가 ( 일부 프로그램이 있다고는 하나 그것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음. ) 유저 자신의 양심에만 맏길 수밖에 없다는 그런 하나의 관념에만 치우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커다란 사회의 악영향으로 미성연자에 정서 발달에 반하는 정보라고 생각한다. 또한 무분별한 인터넷 프로그램도 하나의 유해환경을 제공하는 장치라고 본다. 왜냐하면 인터넷의 최강의 장점중 하나인 정보의 공유가 있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주민등록생성기 같은 그러한 프로그램으로 인터넷상에서 타 유저의 개인 정보를 누설시키고 그것을 이용해 개인의 편리함을 추구한다는 것이 그 예이다. 아무리 하찮은 프로그램이라 할지라도 올바른 제작동기와 쓰임새를 충분히 생각하고 만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생각한다. 자신의 실력만을 과시하기 위해 행하는 해킹이나 크래킹과 같은 행위로 타인의 재산을 위협하는 행위도 이와 같다고 본다. 어쨋든, 이러한 유해적인 정보를 제재할만한 도구적 수단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에 힘입어 정부는 이번에 전초단계의 하나로 획기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바로 인터넷 내용등급제가 그것이다. 따라서 지금부터 나는 이것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얼마전 청소년으로부터 유해정보를 차단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인터넷 정보제공자가 내용물의 등급을 자율적으로 표시하도록 하는 '인터넷 내용등급제'의 시행 방침이 정부에서 발표되었다. 그것은 과거 불건전 사이트 목록 차단방식이나 건전 사이트 목록접근방식에서 진보한 보안형태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과거의 이 두가지 방식은 모두 이용자 연령, 수준 등을 고려하지 않고 소프트웨어 제조회사에서 일방적으로 목록을 작성하여 이용자들에게 제공하였기 때문에 전세계에서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가장 큰 논쟁은 민주시민의 기본권인 인터넷 이용자의 알권리 침해에 집중되었다. 즉 이용자가 자신이 원하는 정보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적이고 교육적인 유용한 정보까지도 자녀들이 접근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한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이와 같이 불건전 사이트나 건전 사이트 목록을 이용한 차단방식의 단점을 해소하기 위하여 등장한 것이 바로 인터넷 내용등급제이다. 정보내용등급제는 정보제공자들이 스스로 자신이 제공하는 정보내용에 일정한 기준에 따라 등급을 표시하면 이를 바탕으로 정보이용 자들이 원하는 정보내용을 선별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라고 한다. 정보내용등급제의 주요 요소는 등급기준, 등급부여체계, 내용선별 체계 등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데 먼저, 등급기준은 정보제공 자가 자신의 정보내용에 부여하는 내용분류의 기준이고, 등급부여체계는 정보제공자가 등급기준을 참고하여 자율적으로 등급정보를 표시하도록 하는 표준적인 체계이며, 내용선별체계는 이용자가 자신이 접할 정보의 종류와 수준을 설정하는 응용 체계를 말한다. 이러한 것들은 정보 내용의 선택권을 소프트웨어 제조업체로부터 이용자들에게 넘어온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 선택권을 행사하는 주체는 자녀가 아닌 그들의 보호자들인 것이다. 따라서 자녀에 대한 책임은 학부모가 지게 되었다고 한다. 미성년자들의 인터넷 정보접근을 보호자들의 자율적 판단에 맡기게 된 것이 되는데, 이로써 인터넷 내용차단 소프트웨어 제조업체 등 제3자에 의한 정보검열이라는 논쟁은 어느 정도 가라앉게 될 것 같다. 하지만 사회인식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있다. 정보통신부는 인터넷 건전화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라며 설득하고 있지만,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인터넷 내용을 국가가 관리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위험하고 청소년 보호 효과도 의문시된다며 인터넷 등급제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는게 바로 그 이유이다.이제 사이버세계는 떼어놓을 수 없는 생활의 일부가 됐다. 따라서 인터넷이 적절히 규제되고 통제돼야 할 필요성이 시급히 대두되고, 여과되지 않은 채 범람하는 음란, 폭력물에 대한 대책마련도 시급하다고 생각된다. 정부는 인터넷등급제가 시행되면 연령별로 다양한 맞춤정보를 제공할 수 있게 되어 오히려 표현의 자유가 신장되며, 이용자가 등급을 보고 적절한 정보를 선택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그러나 정부의 설득력있는 여러 주장에도 불구하고 인터넷등급제는 표현의 자유의 심각한 제한, 정보교육상의 자율과 창의성의 상실, 인터넷 산업의 발전을 해칠 우려 등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나 자신은 생각한다.첫째, 통신 공간의 음란 폭력물 규제는 오늘날 세계 모든 나라가 공통적으로 고민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터넷의 쌍방향성은 끊임없이 정보이용자들의 능동적 활동과 참여를 요구하고 정보에 대한 안목을 키워주는 만큼 궁극적으로 유해정보를 이용자 스스로 잘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으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