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제목 노자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비교: 이성과 진리에 관하여시작하며1. 시작하면서: 문제 제기2. 노자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이성 비판- 1. 이성 비판(노자의 입장)- 1) 지(知)3)와 인간의 욕欲(욕망)- 2) 지혜에 대한 노자의 비판- 2. 포스트모더니즘의 이성 비판3. 진리에 대한 입장- 1. 진리로서의 도- 2. 서구에 있어서 진리4. 마치면서: 노자와 포스트모더니즘의 편차와 근접성노자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비교: 이성과 진리에 관하여시작하며이 글에서는 노자와 포스트모더니즘을 비교함으로써 두 사상의 편차와 근접성을 살펴보았다.노자와 포스트모더니즘은 각각 세속적인 지知(지혜)와 이성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다. 세속적인 지(지혜)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노자의 입장은 이성이 도구화된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과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노자와 포스트모더니즘 모두 욕欲(욕망)이 결부된 지는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노자의 경우 무욕(無慾)을 주장하는 데 비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욕망의 부활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편차를 보이고 있다. 노자의 입장에서는 단순한 욕망의 부활보다는 그것을 초월한 무욕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진리에 대한 노자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논의는 결국 진리에 대한 인식문제에서 그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노자는 인간이 현실의 세속적인 지로서는 진리를 파악할 수 없다고 보았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도 진리가 가지는 절대성의 측면을 비판하고 있다. 인간이 현실에서 추구하는 진리란 노자와 포스트모더니즘 모두 거부한다. 한편 노자는 절대적 진리인 도道의 존재를 확신한다.그에 비해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이러한 절대적 진리인 도마저 부정의 대상이 된다. 도가 절대적 진리로서 존재한다는 점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볼 때 역시 또 다른 한계를 가질지 모른다. 그러나 도는 분별적이고 세속적인 지로서는 인식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분별과 차별성을 극복한 진리로서 존재한다. 따라서 문제는 그것을 인식하는 데 있다. 그것은 무 이성 비판- 1. 이성 비판(노자의 입장)먼저 무위無爲에 관한 노자의 논의에서 이성에 대한 비판을 살펴보고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비판하는 이성은 무엇인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노자는 인간의 한계를 육신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까닭은 나에게 몸이 있기 때문이다.吾所以有大患者 爲吾有身(『老子』, 제13장).인간은 자신의 육체적 생존을 위해서 인위적으로 자연을 개발하게 된다. 그리고 자연을 개발하는 데 있어서 인간은 무한한 욕망을 가지게 된다. 즉 욕망의 실현으로 나타나게 된다. 노자의 무위에 대한 언명은 인위(人爲)에 의한 욕망의 추구라는 서구의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의 근거가 된다.1) 그리고 이러한 인위는 결국 이성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성은 자연을 하나의 대상으로 놓고 그 대상을 이용하는 데 이용되는 것이다.노자는 인간이 지적인 능력에만 가치를 부여하는, 이른바 문명의 발달이 인간에게 행복이라는 점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 노자는 문명, 문화의 발달이 오히려 인간의 퇴폐와 생명의 쇠약이라는 현상을 낳게 한다는 것이다.한편 포스트모더니즘의 이성에 대한 비판은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된다. 모더니즘은, 첫째 이성에 대한 믿음, 둘째 자연은 일반적 법칙이 존재하며 그 법칙을 인간의 이성에 의해 이용할 수 있다는 의식 즉 자연에 대한 이용 가능성, 셋째 이성의 믿음을 바탕으로 한 진보에 대한 믿음으로 정리될 수 있다(윤평중, 1992: 13∼20). 즉 모더니즘은 객관적 과학, 보편적 도덕과 법 그리고 자율적인 예술의 발전에 대한 믿음인 것이다. 이러한 모더니즘은 자연에 대한 지배뿐만 아니라 세계, 자아, 도덕적 진보, 제도, 인간의 행복에 대한 이해까지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마단 사럽, 1992: 149). 이러한 모더니즘에 대해 포스트모더니즘은 비판을 가하고 있다.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은 서구에서 이성과 합리성(데카르트의 합리론의 영향)의 근원이었던 계몽주의와 그에 따른 영향에 대한 논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忌諱 而民彌貧 民多利器 國家滋昏 人多技巧 奇物滋起 法令滋彰 盜賊多有(『老子』, 제57장).천하가 불안한 것은 유위로서의 유사(有事)에 의해 많은 욕심을 부리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이기와 제도에 대해 비판이다. 인간의 욕망의 실현을 위해 각종의 문명의 이기와 제도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푸코의 경우 이성에 대한 신뢰로 포장되는 계몽 사상은 다른 담론 체계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억압하는 하나의 특수한 담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즉 모더니즘의 도입으로 인해 이성과 비이성이 구분되었고 이성이 정상적이라는 도덕적 우위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푸코가 보기에 이러한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은 바로 권력에 의한 지식의 형성을 은폐하는 것이다(윤평중, 1993: 151).노자는 인간의 자연과 사회, 정치에 대한 욕망으로 인간이 황폐화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때의 욕망은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나타난다. 결국 이성의 논리에 의해 자연은 인간의 욕망 충족을 위해 봉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의 조짐은 니체에게서도 보인다. 객관적 진리, 이성적 삶, 보편적 도덕률, 종교적 가치, 합리적 주체개념에 대한 니체의 비판은 포스트모더니즘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니체는 아폴로적 차원과 디오니소스적 차원을 논하며 현대의 철학을 이성과 감성의 이원적 대립으로 보면서, 이성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곧 이성 중심주의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는 또한 이성과 욕망간의 관계를 설명하여, 인간의 인식적 관계에는 이미 평가적 관계가 개입하고, 지적 기능을 발휘하기에 앞서 욕망적 기능을 표현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이성 중심의 현대성이 인간을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이상 노자의 무위에 대한 논의와 일부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들의 이성 비판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았다. 우선 노자의 『도덕경』에 나타난 무위의 개념은 인위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것은 인간 인식의 한계, 욕망에 의한 인간의 황폐화, 인간(인간의 이성)의 학문·지식에 의한 대상의 분리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논의는 포스트모더니여기서 보면 노자는 교활한 지혜를 가진 자들은 결국 세속적인 이익을 취하려 한다는 점을 밝혀주고 있다. 이러한 욕망에 대한 논의는 서구의 세속적인 자연 파괴로 나타난다. 노자의 언명은 서양의 욕망에 대한 사고 방식의 비판으로 나타날 수 있다. 즉 서양은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밖으로 분출함으로써 그것을 추구해 나간다. 즉 과학이나 물질적 발달을 추구하는 사고 방식이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조화된 자연을 상정하면서 자연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을 행복으로 알았던 것이다.헤아림으로써 지혜와 사려를 날카롭게 하면 길이 보존하지 못한다.端而銳之 不可長保(『老子』, 제9장).인간의 지혜라는 것은 계속될 수 없으며 결국은 단기적인 인간의 욕망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성인의 교묘한 지혜를 끊어 버려야만 백성이 이익을 백 배나 누리고, 인의를 끊어 버려야만 백성들이 효도와 자애로 회복하며, 교묘한 지혜를 끊어 버려야만 도적이 없으리라.絶聖棄智 民利百倍 絶仁棄義 民復孝慈 絶巧棄利 盜賊無有(『老子』, 제19장).교묘한 지혜란 본래 천하를 편안하게 하려 함 때문이었는데 지금은 교묘한 지혜를 표절하여 도적질의 밑천으로 삼고 있다. 세속의 진실한 지혜가 없는 사람은 교묘한 지혜와 인의의 일을 배우고 나서는 자기의 목적을 실천하려 한다. 실천하는 과정에서 노심초사하면서 공리에 급급하여 교묘한 지혜의 사이에서 진력한다. 일반 사람들은 교묘한 지혜로 많은 방법을 구사하여 만족함 없이 탐욕을 부린다(감산대사, 1993: 83∼87).다른 사람을 아는 사람은 지혜롭지만 스스로를 아는 사람이라야만 총명하다.知人者 智 自知者 明(『老子』, 제33장).문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알고, 창을 엿보지 않아도 하늘의 도를 볼 수 있다. 나가서 더 멀어질수록 그 앎이 작아진다.不出戶 知天下 不窺유 見天道 其出彌遠 其知彌少(『老子』, 제47장).일반 사람들의 경우는 이익의 욕심에 깊이 빠져 마음이 외부로 치달으면서 이익 때문에 지혜가 어두워지게 한다. 그 때문에 본성과의 간격이 멀리 떨어질수록 망상의 티끌면 도는 인간의 언어, 감각을 초월하는 것이다.도라는 의미를 정리해 보면 먼저 우주, 천지, 만물의 실체, 둘째 모든 창조, 변화, 발전의 원동력, 셋째 만물 운행 질서의 원리, 넷째 인간 행위의 근원적 준칙으로 표현된다. 결국 도라는 것은 우리의 감각으로 지각할 수 없으며, 사물의 색체나 형태에 제약되어 있는 것이 아니지만 사물 속에 내재하며, 분별 이전에 존재하며, 이것을 알면 고금을 통괄하게 되는 것으로서, 모든 대립이 하나로 융합되어 갈등이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노자에 있어서 도는 상주불변하면서 주관과 객관을 초월하는 진리로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위에서 살펴본 도는 인간의 세속적인 지혜4)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즉 세속적인 지혜는 사물을 분별하고 주관과 객관을 분리하여 진리(道)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면 노자의 지(知)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도록 하겠다.다른 사람을 아는 사람은 지혜롭지만 스스로를 아는 사람이라야 밝다.知人者 智 自知者 明(『老子』, 제33장).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知者 不言 言者 不知(『老子』, 제56장).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것이 최상이요 알지 못하면서 아는 것이 병이다.知不知 上 不知知 病(『老子』, 제71장).학문을 하면 날로 (지식이) 늘어나고 도를 하면 날로 줄어든다.爲學日益 爲道日損(『老子』, 제48장).아는 사람은 박식하지 않고 박식한 사람은 알지 못한다.知者 不博 博者 不知(『老子』, 제81장)이상의 노자의 언명에서 볼 때 도라는 주관적 지(知)는 언어, 학문, 현실적인 박식함으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33장의 명(明)은 지(知)의 궁극인 절대적 지를 의미한다. 따라서 노자는 상대적 지를 절대적 지라고 생각하고 상대적인 지를 극복하지 않는 입장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오오하마 아끼라, 1993: 114∼116).노자에게 있어서는 다음 절에서 언급될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 달리 진리로서의 도가 존재한다. 단지 문제가 되는 것은 도를 어떻게 인식.
보 고 서과 목 명: 한일문화교류사학 과: 철학과학 번: 96657003이 름: 김승우제 출 일: 2003년 5월 29일담당교수: 박석순 교수님철학과 김승우* 발해와 일본의 교역1. 서론우리 역사상 만주를 최후로 지배했고 가장 거대한 영토를 가졌던 왕조 발해.우리는 근래 들어서 다시 부각되고 있는 발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고 논의를 해볼 필요가 있을것이다.그러면 발해와 일본과의 관계 중 주요한 문제인 두 나라간의 교역에 관하여서 이 교역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또 그것이 가지는 여러 가지 의미들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2. 본론(1) 발해의 경제생활발해 사회는 9세기에 이르러 농업, 어업, 수공업 등 산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생산 활동에서 기본이 된 것은 역시 농업이었는데, 기후가 찬 관계로 논농사보다는 밭농사를 주로 하여 콩, 조 같은 곡물이 더 많이 재배되었다. 그러나 철제 농기구가 널리 사용되고 수리 시설이 확충되며 서 점차로 재배하는 곡물의 수가 많아졌고 벼농사도 이루어졌다. 발해에서는 수공업도 발전하였다. 그 중에서도 제철업이 발달하여 금속가공업이 성행하였고, 방직업이나 목재, 피혁의 가공업도 발전하였다. 그밖에, 목축이나 수렵 등도 발해인의 경제 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특히 솔빈부에서는 명마가 많이 생산되었으며, 옷감으로는 짐승의 털가죽이나 베, 비단이 사용되었다. 후에 이런 모피등이 일본과의 교역을 하는데 있어 중요한 물품으로 자리 매김을 하게 된다. 또 어업이 발달하였는데 고기잡이 도구가 개량되어 그물을 사용하였을 뿐 아니라 먼바다에 나가서 고래를 잡기도 하였다.(2) 발해와 일본 교역 (물품, 시기, 유물)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서 동해와 황해를 양쪽에 두고 만주를 차지한 국가였으므로 육지활동과 함께 해양활동이 활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초기에는 북방의 흑수말갈과 당나라 신라로부터의 압박을 해소하기 위하여 732년에는 대규모의 수군을 동원하여 당나라의 등주 (현재 산동반도 봉래시) 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발해는 황해동해를 건너 일 본과 강력한 정치동맹을 맺는다면 신라를 가운데 둔 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고, 군사적으로 도 위협할 수 있었다. 또한 그 힘을 배경으로 당나라와 유리한 위치에서 교섭을 할 수 있었다. 이른바 해양포위외교를 추진하는 현실적인 힘을 가진 채 동아시아 외교의 실력자로 부상하는 것이다.그러던 중 발해인 들은 점차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목적을 띄고 항해를 하게 되었다. 그들은 배에다 호랑이 담비 곰 등 고급 모피를 싣고 가서 몇 개월간을 머물며 팔고, 돌아올 때에는 빈 배에 다 섬유제품 금 수은 등 을 실은 채 귀국하였다. 이 무역으로 발해인 들은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었다. 황해를 장보고 선단이 장악한 것과 마찬가지로 발해인 들은 환 동해 무역권을 장악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9세기에 이르러 일본이 신라, 당나라와 소원해지면서 발해선 들의 역할 은 더욱 커졌다. 장보고가 죽은 이후에는 그 역할까지 이어받아 당나라의 남방(현재 절강성 지방)과 일본 그리고 발해와 북방을 잇는 환동아지중해(環東亞地中海)의 해양네트워크를 만 들어 그 주역이 되었다. 발해인들은 해양능력이 매우 뛰어 났다. 약 200여 년 동안에 공식적인 발해사신만 34회나 파견되었고, 1,100명에 달하는 민간인들이 대량 파견된 일도 있었다. 그 외에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비공식적인 민간교역은 헤아릴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현재 혼슈우 북방의 아끼다(秋田)에서 중간의 노토(能登)반도 가하(加賀), 쓰루가(若狹) 지역, 남쪽의 오끼(隱岐)제도, 이즈모(出雲)지역과 큐슈 지역 등 거의 전지역이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홋카이도는 물론 사할린에도 도착하였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발해인 들은 범선을 타고 북서풍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자연 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파도가 높고 찬바람이 몰아치는 한겨울의 황천항해가 불가피 했다. 더구나 동해는 황해나 남해와 달리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일이 많아 기술적으로 매우 어려운 항해이었다. 발해는 초기에는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목적을 위해서 일본과 경제가 국교에 우선되었다. 발해는 삼베나 명주의 원료가 부족하였기에 섬유를 요구하였고, 일본은 모피를 요구하여 왕실과 귀족의 욕구에 의해서 두 나라의 관계가 유지되었던 것이다.6대 발해 사절단이 무관에서 문관으로 바뀌면서 이러한 경제적 목적이 강화되었으며, 일본의 귀족들은 모피를 손에 넣기 위해서 경합을 벌렸다. 그 예로 919년 34회 발해 사절인 '배구'가 왔을 때, 그 이듬해 5월 12일의 풍락전의 연회석에서 일본의 중명친왕은 검은 담비의 가죽옷 8벌을 겹쳐 입고 참석하여 배구를 놀라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한 여름에 모피를 입었던 것이다.일본 조정은 과도한 모피 경쟁을 방지하기 위해서 '모피 금지령'을 내렸으며 모피 사용의 기준까지 정하였다.발해는 3대 문왕 시대에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국서 없이 일본에 파견하는 등 높은 외교 자세를 유지하였다. 이런 이유로 종종 일본과 마찰이 있었는데,771년 7회 발해 사절 대사인 '일만복'의 경우는 지참한 국서가 무례하다고 하여 일본측으로부터 되돌려 받자 일만복이 국서를 일본측의 요구대로 고쳐 씀으로써 사태가 수습되는 경우도 있었다.이것은 발해가 경제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현실적 대안이었다.825년 22회 발해 사절이 왔을 때 일본 조정에서는 발해 사신을 보고 " 실제로는 상업을 하는 무리"라 하였으며,827년에는 발해 사신들이 일본인들과 사사로이 교역을 하자 일본 정부는 이를 금지한 후, 관리로서 이 예에 어긋난 사람은 무거운 죄로 처벌하고 서민이 어긋난 경우는 매 100대를 때린다고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모피의 거래는 일반 시장까지 확대되었으며, 872년 28회 발해 사절인 '양성규'의 일행이 대표적이다. 양성규는 진화를 가져가서 일본 정부에서 교환하여 40만의 관전으로 시정 사람들과 거래한 것이다.발해 수도 상경 용천부에서 일본의 '화동 개보'가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발해와 일본의 무역 관계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발해는 당이 9세기 중반 이후 혼란에 빠지자 무역의 의존도를 일본측에 강화할 수밖부 삿뽀로시 주변의 7-9세기 분묘에서 출토된 석제품이다. 주석은 합금이나 안료에 사용되는 귀중한 원료로서, 주석을 산출하지 않는 이들 지역에서,주석 제품은 발해에서 수입된 가능성이 크다.한편 9세기 이래의 나가오카쿄, 헤이안쿄 등에서 발해의 토기는 지금까지 알려져 있지 않다. 또한 훗카이도 요이치정 오타와 유적지에 출토된 10세기경의 흑색토기는 일본 열도 내에서는 예가 없는 색과 형태를 나타내는 단경호이고 발해 말 요·여진 초기의 토기로 비정되지만 확증은 얻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3) 발해와 일본교역의 의의일본에서 발해로 사절을 파견한 것은 728년에서 811년까지 모두 13차례에 불과하다. 그나마 이 13차례의 사절은 발해의 사절파견에 대한 답례의 형식이었고, 그 이후에는 사절단을 다시는 파견하지 않았다. 즉 일본은 발해에 대해 전기에는 적극적이었던 반면, 후기에는 소극적이었다는 것이다. 그 주된 이유는 9세기에서 10세기에 이르기까지 일본이 경제적 정치적으로 쇠락한 발해의 상황에 따라 쇄국정책을 취했던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발해와 일본의 193년간에 걸친 상호 왕래는 양국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의 관계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양국은 서로의 문화 내용을 풍부하게 할 수 있었다. 아울러 발해는 일본과 당 왕조 사이의 교량역할도 수행함으로써 일본과 중국의 관계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3. 결론발해는 7세기 말 고구려의 유민들이 창건하여 조국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그 문화를 계승발전시켜 아시아의 강국으로 2백 수십년 동안이나 융성했던 나라이다.발해국의 영역은 한반도 북부의 대부분과 요동·흑룡강 이남 및 연해주까지 펼쳐져 있었으며, 신라·일본·당 멀리는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와도 무역 및 문화교류를 활발히 벌였다.발해사는 고려 때 스님 일연이《삼국유사》에서 발해를 우리민족의 정통 왕조로 인정한 이래 유득공·정약용·신채호 선생 등에 의해 우리의 역사로 재조명되었으나, 이조 봉건 사학자들과 일에 대한 인식의 틀에서 벗어나 200여년간 한반도 이북과 널리 만주지방까지 영역을 넓혔던 해동성국 발해에 대해서 새로운 시선을 가지고 접근을 해야 할것이다.--->발해 사신이 떠났던 만량진--->일본에서 발견된 발해 관계 문서 - 발해에서 온 사절단에 관한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참고 자료 정음사 "김정신, 유재신" 1998년http://www.koguryo.or.kr/ 예문 출판사 "최무장" 1988년 교보문고 "최봉렬" 1994년고구려를 계승한 조선중세의 주권국가 발해에 대하여《민주조선》(9 8 년 8월 20일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기관지 《민주조선》(8월 20일부)은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와 고고학연구소의 발해사연구집단이 최근년간 이 분야에서 이룩한 성과들가운데서 대표적인 문제들을 《고구려를 계승한 조선중세의 주권국가 발해에 대하여》라는 표제밑에 소개하였다.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올해 1 9 9 8 년은 우리 나라 력사에서 해동성국(동방의 륭성하는 나라)으로 그 위용을 널리 떨친 고구려의 계승국 발해가 창립된 때로부터 1300돐이 되는 해이다.동방의 강대한 봉건국가였던 고구려가 자기의 존재를 끝마친후 그 유민들은 장기간의 줄기찬 투쟁을 통하여 마침내 698년에 옛 고구려땅우에 발해국을 일떠세웠다. 200수십년간 존재한 발해는 우리 나라 력사를 빛내이는데 크게 기여한 조선중세의 당당한 주권국가의 하나였다. 그러나 지난날 복잡다단한 세월의 흐름속에서 발해와 관련한 력사자료가 많이 인멸되고 더우기 봉건국가들과 제국주의어용사가들에 의하여 발해력사가 심히 외곡날조되였기때문에 그 참모습을 밝히는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로 남아있었다.김정일총비서는 우리 나라에서의 첫 통일국가형성문제와 조선민족사발전의 기본흐름을 종래의 기성관념에서 벗어나 전혀 새롭게 과학적으로 해명할데 대하여 밝혀주었다.발해사연구집단은 발해의 건국과정과 령역 및 주민 그리고 정치, 경제, 문화, 대외관계 등 여러 분야의 문제들을 취급하면서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조선중세의 당당한 주권국가였다.
'국화와 칼'태평양 전쟁중이던 1944년 여름, 사이판 섬에 상륙한 미군은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문제가 된 것이 일본인의 사고와 행동양식에 관한 것이었다. 즉, 밀리고 있는 일본군이 앞으로 어떻게 저항할 것이며, 항복을 하게 될 때에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에 미군이 통치할 때에는 어떤 형태가 좋을 것인가 하는 것 등등 일본인의 사고와 행동양식을 예측하는 일이 중요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연구를 맡게 된 것이 루스 베네딕트 여사였다.그녀는 미국 인류학계의 일인자로 알려져 있었지만 그 때까지는 일본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적이 없었을 뿐 아니라, 일본어도 모르고 일본에 간 적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최고의 학자답게 온갖 방대한 자료를 섭렵하고 일본인의 가치관과 감정의 특질을 체계적으로 파악하여 을 펴내기에 이르렀다.서구인을 비롯한 외국인에게 있어 일본인은 모순덩어리로 여겨진다. 아주 예의가 바른가하면 무섭도록 공격적이고 잔혹해지기도 하고, 극히 고집스러운가 하면 새로운 것에 잘 순응하기도 하고, 예술을 사랑하는가하면 냉정한 살인자가 되기도 한다. '국화'와 '칼'로 비유되는 양극단의 성질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의 정신 속에 들어가 보면 이것은 모순이라기보다 합리적이고 질서정연한 원칙과 체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각자 그 위치를 갖는다' 는 것이다. 국가든 개인이든 일본인은 각자가 현 상황에서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가를 보고 행동을 결정한다. 전쟁에서의 패배를 부인하며 끝까지 저항했던 일본은 일단 항복한 후에는 미국에 순종하는 민주국가로 변신한다. 목숨을 걸고 미군에 저항했던 일본군 병사 또한 한번 포로가 되면 완전히 변하여 스스로 미군에 협조하기도 하고 정보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는 내적인 원칙의 일관성을 중시하는 외국인이라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상황에 적응하여 행동을 결정한다는 원칙을 가진 일본인에게는 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양식이다. 이러한 행동양식은 전통적인 계층제도에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에도막부 시대에 가장 뚜렷이 나타나지만, 천황제도와 쇼오군(장군)제도, 신도와 기타 종교 등의 여러 영역에서, 각 주체가 자신의 분수에 맞게 위치를 지키며 공존하는 행동양식은 일본사회에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그리고 이러한 일본사회의 특질이 내면세계에 정착되면 '은혜'와 '의리'로 대표되는 독특한 도덕체계가 된다. 일본에는 유교의 '인'이나 기독교의 '사랑'과 같은 전인격적 도덕이 없으며, 여러 종류의 '은혜'와 그에 대응하는 '보은'의 의무가 짝을 이루어 도덕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즉 천황으로부터 받는 '은혜', 부모로부터 받는 '은혜', 스승으로부터 받는 '은혜'등과 그에 대한 '충,효'의 의무 등이 그것이다.특이한 것은 이 '보은'에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일생동안 계속되는 의무이며, 또 하나는 일정한 범위에서 '은혜'를 받은 만큼 갚아주면 끝나는 의무이다. 예를 들어 부모에 대한 '효'의 의무는 전자에 속하고, 직장 상사에 대한 '보은'의 의무는 후자에 속한다. 이 후자에 대한 의무를 일본인은 '의리'라 부르며 대단히 중시한다. 그것은 자발적인 감정과는 무관한 일종의 계약관계지만, 사회질서의 근간이 되고 엄격히 이행할 것이 요구된다. 그 결과 자발적인 감정 즉, 인정과 충돌하기도 하고 전자의 의무와 충돌하기도 하여 일본인은 고뇌에 빠지기도 한다.일본인의 행동원칙은 이렇게 다양한 의무의 영역, 그리고 인정이나 욕망의 영역을 서로 교묘하게 조정해 가는 데에 있다. 거기에는 서구인처럼 죄의식을 바탕으로 한 내면적, 절대적 도덕기준은 없다. 의무를 위반했는가 어떤가, 그에 따라 세상으로부터 수치를 당했는가 어떤가 하는 것을 따지는 상대적인 기준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일본인은 선한 행동을 하려고 하기보다는, 의무를 위반하여 세상으로부터 수치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자신을 억제하는 훈련과 수양을 쌓는다.일본문화의 이러한 특질들은 어린이 양육방법에 집약적으로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리광부리며 자라던 어린이는 철이 들 무렵이면 남녀나 신분 또는 그 외의 구분에 따라 엄격히 자기를 억제하고 위치에 맞는 행동을 하도록 훈련되어 간다. 여기에서 일반적인 일본인의 국민성이 생겨나는 것이다.은 그 때까지만 해도 막연하고 불명확했던 일본인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구조적, 원리적 측면에서 명확히 했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오해나 편견이 있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내용은 아직도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 객관적이고 구조적이며, 사회과학적인 일본연구의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들을 외국어로 완전하게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수 있다. 그런 뜻에서인지 위의 옮긴이들은 개념을 나타내는 용어를 일본어 발음으로 적고 있다. 즉 '은혜'를 '온'이라 하고, '의무'를 '기무'라 하며, '의리'를 '기리'라 하고, '효'를 '고', '충'을 '주'라 표기하는 것이다. 어쨌든 이 책은 현대적인 일본연구의 고전으로서 아직도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또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다.하지만 요즘에 와서 일본인들의 작금을 보면 베네딕트가 다 맞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책은 100쇄를 거듭해 230만부 이상 팔려나간 이 책은 베네딕트가 일본을 한번도 방문하지 않고 집필한 것으로 찬사 못지 않게 수많은 비판에도 직면해야 했다. 그러나 이 책이 베네딕트가 2차대전의 종결을 앞두고 미 국무성 해외전의분석과(海外戰意分析課)에 제출한 '리포트25-일본인의 행동패턴'을 토대로 집필됐음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이 리포트야말로 '국화와 칼'이 문학적으로 윤색돼 명확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부분들을 날 것으로 보여주는 자료다. '일본인의 행동패턴'(서정완 옮김.소화)은 베네딕트의 일본인에 대한 생각들을 보다 생생하게 보여주는 자료다.새삼스럽게 '일본인의 행동패턴'이 북리뷰의 대상으로 오른 것은 작금의 일본이 보여주고 있는 군국주의 회귀 경향과 전쟁범죄에 대한 의도적인 망각 때문이다. 요즘의 일본을 보면 베네딕트는 감상적 휴머니즘으로 일본인을 지나치게 관대하게 보아 넘김으로써 되풀이될 역사의 비극을 방지하지 못했다는 의구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베네딕트는 이 보고서를 통해 궁극적으로 천황제는 유지시켜야 하며, 일본인들은 야만인이 아니라 평화시에는 긍정적으로 기여할 만한 자질이 충분히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휴머니즘에 입각해 베네딕트가 추구했던 평화세계에 대한 희망을 투사해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다시 뻔뻔스럽게 교과서를 왜곡해가며 자신들의 범죄를 부인하려 드는 일본을 보면 베네딕트의 생각이 얼마나 옳은 것이었는지 회의적이다.
보 고 서제 목: 라틴아메리카의 춤과 문화과 목 명:아메리카 사회와 문화학 과:철학과학 번:96657003이 름:김승우제 출 일:2002년 월 일담당교수:김세건 교수님1. 들어가면서나는 저번 과제의 주제였던 라틴 아메리카 국가인 쿠바와 연관시켜 쿠바(라틴 아메리카)의 춤과 그 문화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했다.쿠바는 살사댄스의 본고장이다.살사는 수백년 전부터 룸바, 차차차, 메렝게 등의 라틴댄스와 함께 쿠바 대중문화의 주류를 이뤘다.19세기 스페인 식민지배 하에서 쿠바인들의 한(恨)을 풀어준 게 살사였고, 이 때문에 국민들은 더욱 살사에 몰두한다.수도 아바나나 마탄사스를 걷다 보면 살사를 출 수 있는 라틴댄스바가 쉽게 눈에 띈다.쿠바인들은 태어난 후 12개월이 넘으면 부모로부터 살사를 배우며, 70세 노인들도 살사리듬에 몸을 흔든다.중남미 특유의 유연한 몸에 '조기교육'까지 받아 쿠바인들은 '살사 세계챔피언'으로 통하기도 한다는 말이 있다.라틴댄스바는 주로 오후 10시부터 다음날 오전 3시까지 운영되며, 오후 3시부터 문을 열어 외국인들을 받는 호텔도 있다고 한다.2.댄스 스포츠에 관하여댄스스포츠란, 17세기 유럽의 궁중무도회에서 사교를 목적으로 남녀가 서로 원형을 이루고 파트너를 바꾸어 추는 춤인 사교댄스(social dance)에서 시작하여 볼륨댄스(ballroom dance;영국왕실의 궁전은 둥그런 돔 형식으로 되어 있음, 둥그런 큰 방에서 춤을 춘다고 해서 볼륨댄스라는 명칭이 붙었음)로 불리워 왔다가 각종 국제경기대회에서 경기댄스로 발전하면서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을 목표로 창설된 ICAD(현재, 국제댄스스포츠연맹;IDSF)가 1995년 IOC에 가입이 되면서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시범종목으로 채택되고, 댄스스포츠라는 새로운 용어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댄스스포츠의 종류는 볼륨댄스와 라틴댄스의 두 종류로 크게 나뉘어지는데, 볼륨댄스는 1924년에 ISTD(영국왕실무도교사협회)분과위원회에서 5종목을 정립시켰고, 라틴댄스는 라틴계 나라들 즉 쿠바, 브라질 등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나라들의 댄스로 1974년에 ISTD에서 경기 5종목을 정립시킨 것이다.우리나라에서 Sports Dance라 불리워지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정식명칭은 Dance Sport라 불리워져야 한다.댄스스포츠를 통한 레크리에이션은 연령과 배경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휴식 및 개선된 사회생활과 더불어 많은 기쁨과 활력을 제공하며,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에너지의 재충전을 시켜준다.긴장과 스트레스가 많고 오래 앉아있어야 하는 현대인들에게는 가벼운 운동과 다양한 오락들을 통해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이상적인 방법이다.오랜 시간을 텔레비젼 앞에 앉아 있기보다는 그 시간에 댄스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은 지대한 정신적, 신체적 보상을 얻게 된다.스포츠댄스하면 사교춤, 볼룸댄스, 라틴댄스로 구성되는 줄 아는 사람들도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일컫는 사교춤은 정식춤이 아닌 약식춤이다.원래는 'social dance'라하여 옛날 영국의 상류계층 사람들이 즐기던 춤이 우리나라에서는 '캬바레춤'으로 불리며 변질된 것이다.캬바레가 처음 생길 때는 floor가 있어 일정방향을 따라(=line of dance) 춤을 추었다. 그러나 이후 술자리 테이블이 들어가면서 춤추는 floor가 거의 사라지기 시작했고, 캬바레춤도 일정한 방향이 사라지기 시작했다.그이유는 공간이 좁기 때문이다.외국에는 Ballroom이 정식으로 허가된 곳이나, 우리나라에는 아직까지 Ballroom이 없는 상태이다.3. 라틴댄스(쿠바의춤)에 대한 소개1) 룸바이 춤은 쿠바에 들여온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의 춤이며, 양발보다는 몸의 동작만을 강조한 춤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이 춤에서는 항아리나 스푼, 병을 서로 두드려서 만들어지는 교차되는 듯한 복잡한 리듬이, 멜로디보다 더욱 중요하게 여겨졌었다.룸바는 19세기에 하바나에서 유럽의 콘트라댄자와 혼합되어 발전하였다."룸바"라는 명칭은 아마도 1807년 한 댄스 밴드를 위해 사용되었던 "룸보소 오케스트라rumboso orquestra"라는 용어에서 파생된 듯 싶다.물론, 스페인어에서는, "길(route)"를 나타내는 "rumbo", "무더기(heap pile)"을 나타내는 "rumba"와 카리브해에서 유명한 술인 "rhum"이라는 용어가 있으며, 이 용어들은 이미 이 춤이 만들어졌을 때 각기 쓰이고 있었던 것 같다.이 룸바라는 명칭은 또한 스페인어의 "회전목마"를 나타내는 말에서 파생되었다는 주장도 있다.쿠바의 지방 룸바는 농가 마당의 동물들을 흉내낸 팬터마임으로서, 일반인들이 참가해서 추는 춤이라기 보다는 일반인들에게 보여주는 공연용 춤이다.춤을 추는 동안 양어깨의 높이를 계속 유지하는 것은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동안의 노예들의 동작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것이다.룸바는 1930년대에 지방의 룸바와 구아라차(the Guaracha), 쿠바 볼레로(the Cuban Bolero)-(스페인 볼레로와는 상관이 없는), 손(the Son)이 혼합된 형태로 미국에 소개되었다.영국의 무도교사인 피에르 라벨르(Pierre Lavelle)가 1947년 하바나를 방문하여, 룸바가 미국 룸바처럼 첫 번째 박자가 아닌 두 번째 박자에서 한 스텝을 쉬는 것(break step)을 발견하였다.그는 이 스텝을 하바나의 Pepe Rivera에게서 배운 많은 스텝들과 함께 영국에 들여왔다. 첫 번째 박자가 아닌 두 번째 박자에서 한 스텝을 쉬는 것과 함께 이러한 스텝들이 표준 인터내셔널 쿠바 룸바의 부분을 이루게 되었다.각 마디의 첫 번째 박자에서 체중만을 한발에서 다른 발로 옮기는 것과, 이 박자에서 실질적인 스텝이 없다는 것 때문에 이 춤은 매우 감각적인 춤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첫 번째 박자가 음악에서 가장 센 박자이지만, 이 박자에서 움직이는 것은 힙 뿐이어서, 음악은 힙의 움직임을 강조하게 된다. 이것은 음악의 느린 템포(분당 116박자)와 함께 이 춤을 매우 로맨틱하게 만들게 된다. 실질적인 스텝은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박자에 있게 된다. 무릎을 펴면서 체중을 옮기고, 중간의 1/2박자에 턴을 하게 된다. 삼바에서와 같이 체중은 앞쪽에 두고, 전진은 토(toe)로 하며, 상체의 움직임은 곧게 유지한다.2) 차차차차차라는 명칭은, 많은 스텝에 포함되어 있는 샷세시 두 발의 구르는 소리가 의성화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어떤 이들은 이 춤을 아래 리듬을 따라 "차차차(Cha Cha Cha)"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차차라는 용어는 서인도 제도의 특이한 식물의 씨앗인 Cha Cha 또는 kwa Kwa를 이용하여 만든 cha cha라는 악기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봉고 드럼이나 '마라카스'를 두드리는 음악 소리 자체가 차차차로 들린다.차차차는 쿠바의 흑인노예들 사이에서 시작되었고 맘보가 그 선구자이다.차차차는 원래의 룸바 음악에 관악기들의 강한 리듬을 곁들인 새로운 음악으로 창작된 빠른 템포의 맘보(Mambo)를, 영국에서 느린 곡조로 편곡한 음악에 맞추어 출 수 있도록 다시 개량하여 만든 춤이다.사교댄스에 익숙한 사람들은 맘보 음률보다 차차차 음률을 더 편안하게 생각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즐김에 따라 여러 가지 다양한 스텝들이 고안되어 오늘날까지 발전하였다.미국에서도 차차차가 가장 인기 있는 남미의 댄스로 인정 받고 있다.영국 무도교사인 피에르 라벨르(Pierre Lavelle)가 1952년 쿠바를 방문했을 때, 종종 룸바가 여분의 박자를 가지고 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영국에 돌아와서, 그는 이 스텝을 별개의 춤으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1954년에는 이 춤을 "가이로 리듬(guiro rhythm)을 가미한 맘보"로 설명하기도 했다.맘보는 원래 하이티 춤으로서 1948년 파르도(Prado)에 의해 서방에 소개되었다."맘보Mambo"라는 말은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 노예들의 종교인 부두교 여사제의 명칭이다. 그래서 차차차는 서아프리카의 종교 의식 춤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맘보에는 싱글, 더블, 트리플 이 세가지의 형태가 있다.트리플은 한 마디당 5박자로 구성되는데, 이것이 차차차로 발전하게된 버전이다.80년대 후반에 라틴댄스 붐이 불 때 람바다, 마카레나 등과 함께 국내에 소개.하지만 밝고 따라하기 쉬운 다른 라틴 리듬에 비해 복잡한 리듬에 애조 띤 음색이 일반 대중에 사랑 받는데는 10여 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a. 차차차의 음악차차차 음악의 타임은 2/4. 4/4박자이며 시험이나 또는 무도경기대회에서의 표준템포는 1분간에 32-34소절의 속도로 연주하도록 규정하고 있다.정식의 음악에서는 각각의 소절 사이에 매우 분명한 리듬의 연속음을 들을 수가 있다. 따라서 전체를 통해서 1, 2, 3, 4, 8, 1, 2, 3, 4, 8, 1 이라는 리듬으로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차차차를 출때에는 2, 3, 4, &, 1(박자가치는 1, 1, . 1/2, 1박자)의 리듬에 발의 동작을 맞추어서 연출하여야 한다.3. 자이브이 춤은 미국 남동부 지역의 흑인들에게서 비롯되었는데, 이것은 플로리다에 있는 세미놀(Seminole) 인디언들의 전쟁 춤과도 유사하다."자이브"라는 말은 또한 "혼동스러운 말, 과장(誇張)"을 의미하는 흑인들의 속어와도 유사한 의미를 갖고 있다.물론 이 말은 영어의 "지베(jibe)"가 변형된 것일 수도 있다.이 말은 "촌스럽게 번지르르한 상인", "마리화나", "성교(性交)"와 같은 속어의 의미도 갖고 있다.이 춤의 명칭이 사용되기 전부터 이 중 어떤 것이 사용되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래서 어떤 말이 이 춤의 비유로 사용되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이 춤은 종종 커플들의 종교의식과 정열적인 공연 두 가지 형태로 번갈아 가며 추어졌는데, 가장 좋은 의상을 입고 추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 춤에 어울리는 음악은 래그타임(Ragtime)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참가자들이 그들의 가장 좋은 "래그"나 옷을 입었기 때문이기도하고, 음악이 분절음과 "래그"리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기도 했었을 것이다. 이 음악과 춤은 점차 시카고와 뉴욕에 사는 흑인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모으게 되었다.
1. 들어가면서각기 저마다의 국가와 민족마다 그네들의 고유한 문화와 전통이 있다는 것은 다들 잘 알 수가 있을 것이다.유태인은 나라 없이 2000년을 떠돌아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적인 전통이 그들 민족의 구심점이 되어 민족이 말살되지 않는데 크게 한 몫을 했고우리 한민족은 다른 민족과는 상대가 안 되는 교육열이라는 훌륭한 전통이 있어 일찍부터 문화를 숭상하고 아끼는 우수한 전통을 이루어 왔다.이 글에서 우리는 이런 우리의 우수한 전통과 문화가 남북전쟁이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남과 북이 서로 어떤 견해를 가지고 우리 전통과 문화를 바라보는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 글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2. 본론우리 민족은 조선왕조를 비롯한 5000년 역사를 통해 이룩한 문치주의 전통은 아무리 강조를 한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19 세기말의 국제적인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임한 결과 나라가 망하게 되고 그 결과 우리는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해 부정적, 자학적 비하의 사고를 갖게 되기도 한다.솔직히 우리가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해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일제치하의 식민사관에서 비롯되었다고도 볼 수가 있을 것이다.또 우리는 해방 후 그러한 부정적 식민사관을 제대로 고칠 기회를 자주적으로도 갖지 못했을 분만 아니라 얼마 후 남북이 분단되어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그럴 기회를 갖지 못한데서 더욱더 큰 근본적 원인이 있지 않았나 한다.그리고 그러한 분단에 따른 남과 북의 전통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차이는 곧바로 이념의 대립과 연관되어 많은 차이를 보여 서로의 괴리감을 좁히지 못하는 것 또한 오늘날의 가장 큰 문제라고 볼 수가 있을 것이다.이미 지난 오십여 년 넘도록 이념과 체제의 우월성을 지속해왔고 그 결과로 말미암아 체제의 이질성과 배타적 감정의 골 또한 깊어졌다고 말할 수가 있다.그렇기 때문에 남과 북의 상호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을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고,그 부분을 확대하여 상호 인정과 교류를 통한다면 암울했던 분단시대에서 오는 괴리감은 서로 산이 가능할 것이라고 본다.그러한 방법의 상호 공유 부분에 있어서 가장 적당한 것이 바로 전통사상에 대한 시각일 것이다.하지만 우리의 전통사상은 중국을 겨냥한 사대주의와 일제 식민사관에 의해 심각하게 왜곡되고 굴절되어 왔기 때문에 우리는 전통사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해 가능한 모든 사고를 동원하여 왜곡된 점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걸 강조해두고 싶다.전통사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만이 새로운 통일시대와 국제화, 세계화 시대를 이끌어 갈수 있는 사고의 틀을 확립할 수 있을 것이다.남. 북한을 통틀어서 한국철학 전반에 걸쳐 일관된 관점에 따라 통사적으로 서술한 한국철학사는 그리 많지가 않다.뿐만 아니라 남북한이 공유할 수 있는 일치된 사상사관을 제시한 철학사는 단 한 권도 찾아보기 힘들다고 하니 반세기의 분단이 얼마나 많은 부분의 공통점을 파괴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잘알 수가 있을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양측이 공통된 사상사관을 모색하는 일은 아예 할 수가 없었지만 향후의 연구와 통일된 철학사의 서술을 위해서라도 해방 후 남북한에서 발간되었던 한국 철학사 가운데서 양측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고 공동으로 연구를 진척시켜 나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과제라고 보아 마땅할 것이다.남과 북의 한국철학사에 대한 저술들을 살펴보면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기본 이념들은 하등의 문제가 될 것이 없고 유사한 부분이 많으나 북한의 문제는 그들이 전통사상의 장단점을 평가하는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하는 점에서 우리와는 많은 차이를 보이는 것이 사실인 듯 하다.우선 그들이 전통 사상을 평가하는 잣대는 다름 아닌 마르크스 레닌주의 철학이고 그 잣대를 통해서 전통 사상을 관념론과 유물론의 투쟁사로 도식화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철학 사상사를 이와 같이 투쟁사로 이해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정치적 이념인 공산 혁명론 에 뿌리를 둔 혁명의 당위성을 이끌어내기 위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가 있다.때문에 남북한의 사상사 연구를 하는 과정에 있어서 제일먼저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사상사의 시대를 어떻게 구분하느냐 하는 문제라고 보여진다.그러나 남북한 기존의 철학사들은 그 서술하는 철학적인 입장과 시대구분 등이 같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다루어지는 인물과 내용이 상이하여 양측의 시대구분상의 실상을 밝히고 차이점과 공통성을 밝히는 작업이 남북한의 전통사상에 대한 접점을 찾아가는 출발점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수가 있을 것이다.한국 철학사에 관한 남한의 기술은 기본적으로 시대 순서에 따라 왕조사를 중심으로 전개하고 있다.하지만 북한의 철학자들은 시대구분을 마르크스의 역사발전 5 단계 설에 입각하고 있으므로 이렇게 볼 때 양쪽의 시대구분상의문제는 철학사를 서로 다른 해석의 틀을 원용하여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그 세부적인 내용들의 기술에서 더욱 시각을 달리하게 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이러한 면을 잘 들여다보면 몇 가지의 예를 들어 말할 수가 있는데 이것은 유학의 성격에 관한 해석의 차이를 갖는 양측의 입장을 봐도 알 수가 있을 것이다.남한은 한국철학사를 정리하면서 고려유학을 전 후기로 나누고 전기의 유학과 후기의 유학의 구분을 명확하게 설명하면서 그 시기의 구분을 하는 반면에 북한의 학계는주자학의 수용을 현실과 거리가 먼 불교와 도교를 버리고 윤리 도덕성이 강한 실학을 받아들인 때가 후기 유학의 시기라고 구분을 한다.또 이러한 시대구분에 있어 남북한이 차이를 보이는 다른 이유중의 하나는 종교의 수용여부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