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2.14後三國의 國際關係머리말Ⅰ. 후백제의 국제관계Ⅱ. 후고구려의 국제관계Ⅲ. 고려의 국제관계맺음말머리말지금까지 우리는 지방세력의 존재양태와 변화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제까지의 내용은 후삼국의 국내 정치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당시 중국 등 국제정세 역시 혼란기를 겪고 있었으며 이 같은 상황에서 각국의 외교관계는 중요한 의미를 가졌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비추어볼 때, 이와 같은 혼란상황에서 후삼국 각국은 과연 어떤 국제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을 이번 발제의 목표로 삼겠다. 후삼국 사이의 외교관계 역시 대외관계임이 분명하나 이미 많은 부분이 이전 발제에서 다루어져 생략하기로 하겠다. 또한 신라의 대중국관계에 대해서는 후당을 제외한 외교관계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여 서술하지 못한 것을 미리 밝혀두겠다.Ⅰ. 후백제의 국제관계후백제의 해외교섭 범위는 실로 광범위하였다. 長城 이북의 契丹에서부터 남쪽으로 화북지방의 後唐, 강남의 吳越과 교섭하였고, 동쪽으로는 日本에까지 사신을 보내 교섭을 시도하였다. 후삼국의 쟁패전이 한창이던 10세기 전반기에 후백제가 이처럼 많은 나라와 교섭을 한데는 나름대로 목적이 있었다.1. 吳越과의 관계견훤은 일찍부터 특히 서남해에서 해상교통에 편리한 남강의 오월과 긴밀한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광화 3년,900) 오월에 사신을 파견하여 入朝하니 오월왕이 報聘使를 파견하여 견훤에게 검교대보를 加授하고 다른 직은 전)과 같이 하였다(『 삼국사기』견훤전)이는 견훤이 900년에 오월왕에게 사신을 파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오월 외교에 관한 첫 기록이다. 이 시기가 견훤이 전주로 천도하여 후백제라는 국호를 정하고 정치조직을 수립한 중요한 시기였음을 고려해보면 이렇게 오월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견훤이 백제국 수립 사실을 오월에 전하고 오월왕으로부터 이를 공인받고자 한 것이라고 이해된다. 그 후에도 견훤은 국내정치에 중요한 변수가 있을 때마다 오월에 사신을 보냈던 것으로 여겨진다.(정명 4년,918,8) 견훤이 오월에 구가 모여있던 곳이기 때문에 세계각국의 物産이 모여들었다. 이에 후백제는 오월과의 정치적 친선관계의 연장선 위에서 오월지방과의 무역을 통한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오월간의 경제적 이득을 얻고자 했던 후백제의 의도는 남중국 출입관문이었던 서남해안이 고려의 수중에 들어감에 따라 대중국 통행로는 막히게 되었고, 이후 서남해안의 해상권을 빼앗긴 후백제는 남중국과의 무역에 많은 제약을 받았을 것이다.)2. 후당, 거란과의 관계견훤은 북중국의 후당에도 사신을 파견 稱藩함으로써 후당과도 공적인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동광 3년 925,12) 후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稱藩하였다. 이때 후당에서 檢校大尉兼侍中判百濟軍事를 제수하고 전과 같이 “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海東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等事百濟王食邑二千五百戶”를 책봉하였다.(『삼국사기』견훤전))위와 같이 후백제는 후당과의 교섭을 통하여 고려와 신라에 버금가는 국제적 위상을 갖추고자 했고 내적으로는 후당으로부터 백제왕을 승인받음으로써 이탈해가던 민심을 수습하고 왕권을 안정시키려 하였다.(936년 1월) 백제국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조공하였다.『冊府元龜』 92, 외신부조공문청태 3년 정월한편 936년 1월에도 후당에 사신을 파견한 기록이 나타나는데 이는 유일하게 중국측 사서에 보이는 것으로 이때는 이미 견훤이 신검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 왕건에 귀부한 후이다. 따라서 이것은 신검이 파견한 것으로 생각되며 이렇게 견훤과 신검이 후당과의 외교 관계에 노력한 것은 오월의 경우처럼 그들과의 외교 관계를 통하여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또한 견훤정권에서는 거란과도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다음의 사료를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천성 2년,927) 거란의 사신 裟姑, 馬拙등 35인이 來聘하니 견훤은 장군 崔堅에게 명하여 馬拙등을 伴送토록했다. 그러나 북으로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唐의 登州에 이르러 모두 殺戮되었다.『 삼국사기』견훤전, 天成 2년위의 사료에 의하면 거란과 후백제와의 교섭은 거란이 먼저보면 견훤정권이 일본과의 통교를 위해 두 차례의 사신 파견 등 지속적인 노력을 하였으나 견훤을 신라의 신하라 하여 사사로운 외교를 거절하고 다만 식량을 주어 돌려보냈다)라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일본측이 신라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거절함으로써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후백제인이 탐라와 교역하고 있었던 사실등 당시 견훤정권이 대외 교역에 매우 열심이었음을 살펴보면 일본과의 외교에도 노력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고 이는 오월등 중국과의 통교가 주로 정치 외교적인 목적을 가졌던 것과는 달리 해상무역에 더 큰 목적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Ⅱ. 궁예정권의 국제관계견훤이나 태조가 나라를 세운 후에 자신이 국왕임을 인정해 줄 수 있는 권위에 대한 바람에 따라 오월과 활발한 교섭을 하지만 이와 달리 궁예는 오월과 외교관계를 맺은 자료를 찾을 수 없다. 이런 외교정책의 차이를 이들의 출신세력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견훤이나 태조는 지방세력 출신이었기 때문에 오월로부터 국왕의 지위를 인정받는 것의 의미는 남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본래부터 진골귀족 출신이었던 궁예는 자신의 권력에 대해 인정받으려는 생각이 강하지 않았던 듯 하다. 게다가 화북은 907년 당이 망한 후 960년 송왕조가 일어나기 전까지 반세기 동안 5대 10국으로 나뉘어 권위나 영향력은 당과 비교해 현저히 떨어졌을 것이다. 즉, 궁예는 본래 진골귀족 출신이어서 견훤 태조에 비해 자신의 권위에 대한 인정을 받기위한 갈망이 적었을 것이고 이에 실질적이기 보다 상징적 의미가 큰 오월이나 후량과의 관계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었을 것이다. 또한 궁예는 독자적으로 국가를 설립하고 태봉, 수덕만세 등 독특한 용어를 사용하면서 탈중국화를 꾀했기 때문에 구태여 중국으로부터 권위를 빌려올 필요가 없었다.)반면에 궁예가 거란과의 외교에는 오월과 후량에게 한 것과는 달리 매우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① 압록강에서 고기를 낚았다.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고, 고다. 이를 볼 때 궁예로서는 신흥 강국 거란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절실하였을 것이다. 사료상 에도 궁예가 915년 거란의 태조에게 보검을 진상하였으며, 918년에는 2월과 3월에 연이어 사신을 파견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내주고 있다.거란과의 교섭에 적극적이었던 만큼 발해와의 관계는 소원하였던 듯하다. 911년 거란이를 병탄한 이후 발해는 거란의 진출에 위협을 느껴 신라 등 주변국들과 비밀리에 연계를 맺었다. 태봉도 이에 포함되는지는 모르지만 만일 그렇더라도 양국의 관계는 915년 태봉이 거란에 사신을 보내어 보검을 진상함(사료①)으로써 끝났을 것이라 여겨진다.이런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보았을 때 궁예는 당에 비해 힘이 상대적으로 약한 오월, 후량이나 기울어져 가고 있는 발해보다는 나라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는 거란과의 적극적인 교섭을 추구했을 것이다.Ⅲ. 고려의 국제관계1. 대중국 관계고려 태조가 건국 이후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한 나라는 吳越이었다. 이는 당시 오월이 후백제뿐만이 아니라 신라 및 발해와도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 오월과 교섭함으로써 외교적인 고립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이후 태조 5년을 전후하여 국내 정치가 안정에 접어들면서 태조는 후량 등에 사신을 파견한다. 중국과의 외교는 불교문화 수용 등 중국 문물 수용에 그 목적이 있었다.그 이후로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외교를 이끌어나간 듯 하다. 후당과 후진의 연호 사용과 봉책)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태조가 왕에 등극하였을 당시 나라의 연호를 天授로 재정(918)을 하였다. 그러나 후당의 봉책을 받은 태조 16년 이후에는 후당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다.① 自是, 除天授年號, 行後唐年號(後唐 明宗 封冊詔書)② 始行唐年號 (高麗史節要 券1 太祖神聖大王 16年 )③ 是月, 始行後晋年號(高麗史節要 券1 太祖神聖大王21년)위 ①은 후당의 봉책조서에 써있는 연호를 쓰라는 조서이다. ②, ③은 고려사절요에서 후당과 후진의 연호를 사용한 기록이다. 이처럼 후당으로부터의 책봉 이후에 태조는 기존 연호인 천수를 서 거란의 후원을 얻기가 어려워 진데다 앞서 발해멸망으로 거란과 직접적으로 국경을 맞대게 된 것도 거란과의 우호적 관계유지를 어렵게 했을 것이다.이후 고려는 거란으로 사신을 파견하지 않았으며 태조 25년에는 거란에서 보내온 외교 사절을 거절하고 푸대접하는 對契丹정책을 취한다.) 위의 배경은 후진의 출제가 등극하면서 거란에 대한 군신관계를 거부하는데 이에 거란은 후진에 대해 정벌을 계획하게 된다. 따라서 거란은 배후에 위치한 고려와의 관계개선이 필요하게 되었다. 하지만 고려는 비밀리에 후진과 군사 협력을 모색하던 상황)이었으며 이는 후진과의 군사 협력 관계를 통해 북방개척을 용이하게 하고 거란을 견제할 수 있는 역학 구도를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거란에 대해 발해가 멸망한지 16년이 지났는데 불구하고 ‘거란이 발해와 맺은 국제적 의를 배반한 무도함을 책하는 것이다’라는 명분을 이유로 단교를 취하게 된다.고려태조의 대외교섭 내용)連番年 月派遣國對象國派遣使臣交涉內容典 據1태조 2년 7월高麗吳越金立奇(佐良尉)『資』270.後粱紀. 均王2태조 5년 2월契丹高麗낙타ㆍ말ㆍ氈보냄『高』1. 世家3태조 6년 6월高麗後粱尹質(福府卿)오백나한상 받음『高』1. 世家4태조 7년高麗契丹『遼』115. 二國外紀 455태조 8년 10월高麗契丹『遼』2. 本紀 2.太祖下6태조 8년 11월高麗後唐韓申一(廣評侍郞)朴巖(春部少卿)중국 관직 받음『冊』972..外臣部. 朝貢 57태조 9년 2월高麗契丹『遼』2. 本紀 2.太祖下8태조 9년高麗後唐張彬『高』1. 世家9태조 10년 927高麗契丹『遼』115. 二國外紀 4510태조 12년高麗後唐張?(廣評侍郞)『五』30. 高麗傳11태조 15년高麗後唐王仲儒(大相)후당에 파견『高』2. 世家12태조 16년 3월後唐高麗王瓊(太僕卿)楊昭業(大府少卿)태조를 왕으로 冊封후당의 연호 사용『高』2. 世家13태조 17년高麗後唐金吉중국 청주에서 교역『冊』972. 外臣部 朝貢 514태조 18년 12월高麗後唐邢順(禮賓卿)崔遠중국 관직 받음『高』2. 世家『五』30. 高麗傳15태조 19년음말
下戶와 豪民의 성격1.머리말그 동안 三國志 魏書 東夷傳에 나와있는 기록을 바탕으로 당시의 사회계층에 대한 다양한 분석이 시도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관심이 집중되었던 것은 民과 下戶의 관계, 그리고 豪民과 下戶의 관계가 어떠하였는가 하는 점이었다. 삼국시대 이전의 읍락사회 내부에는 渠帥와 호민, 그리고 하호와 노비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신분 간 차별이 존재하던 전통시대에 노비는 사회의 다른 구성원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존재였고, 거수 역시 정치적 지배권을 장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른 일반 성원과는 성격이 확연히 구분되었다. 반면에 호민과 하호의 성격 및 양자간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읍락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는 중요한 문제이며 당시 사회의 전반적인 성격을 규정짓는데 꼭 필요한 일일 것이다. 따라서 고대 사회의 하호와 호민의 성격을 각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나누어 보고 이를 바탕으로 고대 사회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시키게 되는지 간단히 알아보도록 하겠다.*豪民과 下戶①“其國中大家不佃作 坐食者萬餘口 下戶遠擔糧米糧 魚鹽 供給之...無大倉庫家家自有小倉 名之爲?京..拔奇怨 爲兄 而不得立 與涓奴家各將下戶三萬 餘口 詣康降“ (三國志 魏書 東夷傳 高句麗)②“其俗好衣? 下戶詣郡朝謁 皆假衣? 自服印綬衣? 千有餘人”(三國志 魏書 東夷傳 韓)③“無大君長 自漢已來 其官有候邑君三老 統主下戶”(三國志 魏書 東夷傳 濊)④“邑落有豪民 各(民)下戶 皆爲奴僕 諸加別主四出道...有敵諸加自戰 下戶俱擔糧飮食之”(三國志 魏書 東夷傳 夫餘)⑤“大家不佃作 下戶給賦稅 如奴客”(太平御覽 東夷 高句麗)⑥“師古曰 言下戶貧人 自無田而墾耕豪富家田 十分之中 以五 輸本主田也”(漢書 食貨志4 上)2. 下戶下戶라는 존재는 「三國志魏書東夷傳?에 高句麗, 夫餘를 비롯해 韓, 濊, 倭 관련 기사에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기사마다 차이가 있어 각기 豪民, 大加, 渠帥 등에 예속된 존재로 나타나고 있으며, 그 성격이 조금씩 다르게 묘사되고 있어 피지배층 일반과 관련해 가장 많은 쟁점이 나타나고 논의의 대상이 되어왔다. 지금부터 학자들의 하호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제시해보겠다.(1)노예론자(奴隸論者)①백남운(白南雲)백남운씨는『三國志』魏志 東夷傳에 표현된 夫餘의 (지배층인) 上戶(諸加〓渠帥)에 대별되는 下戶를 상정해 이를 고전고대의 노예로서 규정하였고, 고대국가의 기본적인 생산력의 형태는 도구 및 축군(畜群)과 같은 노예군의 노동력이라 주장하였다. 또한 순장제에도 유의하여 이 관점을 보강하였다.②임건상(林建相)“농민들은 공동체적 통일체에 대한 자기 의무가 부과되는바 …즉 조세부담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 바로 그 소농민의 잉여물 수취의 내용이 공물은 ’조?부‘ 혹은 ’부세'로써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며, 그 어떠한 봉건제 지대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명백하다.”임건상씨는 위에 저술한 바와 같이 下戶는 공동체적 틀안에서만 생존이 보장될 수 있고, 이들에 대한 착취는 토지영유로 맺어진 것이 아니라 노동력 예속의 결과로 발생한 복속관계이기 때문에 인격적 예속이 강한만큼 ‘노예의 공납적 성격’을 가졌다고 주장하였다.(2)봉건론자(封建論者)①김광진(金洸鎭)김광진씨는 下戶는 노비와는 전혀 다른 계급이고 농노와 같은 비자유민도 아니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이들은 小經里를 가지고 관습상 또는 강제로 봉건영주나 씨족적 귀족에게 공조또는 부역을 바치는 의무를 지녔기 때문에 夫餘?高句麗의 下戶의 성격은 노예로 설정하기 어려우며 오히려 봉건농노와 유사한 형태라고 주장하였다.②김석형(金錫亨)1950년 중반 삼국시기 노비와 천민을 검토하면서 노비라는 존재에 대한 용어가 존재하는 시기에 고구려의 하호는 노비가 아닌 하층민으로서 주로 부곡, 장 등에 거주하는 인민으로 보았다. 그들은 자기의 경작지를 가지고 일정한 공납을 지불하는 의무를 지녔는데, 이를 봉건적 예속민이며 농노적 농민의 유형이라 보고 후에 양인농민의 시원을 이루는 것으로 보았다.(3)氏族社會 해체기 일반 씨족원으로 보는 견해①김철준(金哲埈)하호는 일반민, 곧 일반씨족원인데 ‘皆爲奴僕’ 인양 보는 것은 씨족 공동체 관계가 강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4)기타견해.①홍승기(洪承基) 《民=下戶》홍승기씨는 하호를 지배계층과 노비와의 중간에 위치한 계층이며, 국가에 예속되어 있고 국가에 대하여 公役˙公果의 의무를 지고 있는 존재라 하였다. 또한 대다수의 하호들은 농사를 짓고 사는 농민이며, 이들 사이에서도 신분적으로 똑같은 자유민이지만 사회경제적인 지위에 차이가 있어서 자급농민(가난한 하호의 노동력을 사는 계층)과 용작농민(자신의 용력을 팔아서 삶은 연명해가는 계층)으로 나누어진다고 보았고, 이들 상호간의 계급분화로 말미암아 계층이동도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②노태돈(虜泰敦)노태돈씨는 부를 기점으로 해서 시대적 여건과 각 읍락사회가 처한 위치에 따른 지배복속관계를 통해 체계적으로 하호의 성격을 분석하였다. 시대별로 살펴볼 때 3세기 무렵 고구려나 부여, 옥저, 동예의 하호는 다같이 그 사회의 하층민으로써 부역과 부세를 받쳐야 했고 원칙적으로 신분적 자유와 재산의 소유권이 인정되었다. 하지만 고구려나 부여에 비해 상대적으로 후진적인 동예나 옥저의 하호는 고구려의 被腹屬民으로 邑落全體로서 신분이 비자유농으로 규정지어졌고 족장에게 당하는 수탈 혹은 부역징발이외에 고구려에 보낼 공납이나 조세가 더 가중되어 괴로운 삶을 영위해 나갔을 것이라 언급하고 있다.3.豪民(1)호민의 개념호민은 ‘재산이 많고 세력이 있는 백성’, ‘세력이 있는 민’, ‘평민 신분의 부호’라 말할 수 있다. 즉, 호민은 일반백성, 다시 말해 평민 신분층인 ‘民’을 기반으로 하여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면서 성립된 개념으로 이미 호민이라 불리 울 때는 일반 평민과는 구분되는 상층민으로 이해 될 수 있다. 즉 ‘가난한 민’을 의미하는 하호의 상대적 개념의 용어로 이해될 수 있겠다. 이러한 호민은 국가의 행정력과 밀착하여 국가의 인정을 받고 ‘豪民田’을 통한 농업이나, 豪民富賈와 같이 상업을 통해 경제적으로 많은 부를 축적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호민은 외적 방비에 필요한 조세의 부족분이나, 재난으로 인한 하호의 구휼, 진대의 일부를 보조하는 일 등을 담당함으로써 사회 경제적으로 상당히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이를 통해 호민은 하호에 대해 실질적인 지배 예속 관계를 확대시켜나갔다.(2)호민의 성립豪民層으로 성립되어져 가는 계층은 크게 다음의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겠다.먼저 部長, 部內部長을 위시한 그 친족들을 비롯하여, 신분상징의 물품으로 이해되는 依責이나 印綏를 자복한 삼한의 下戶千餘人을 들 수 있겠다. 이들은 부의 통치담당자로서 부원들이 내는 부세와 집단예민 들이 바치는 공납물 로서 생활하며, 나아가 노예들을 부려 상당 규모의 노예경작을 하였다고 한다.다음으로 여러 부류의 평민들이 성장하여 호민층을 형성하였다. 첫째로 부의 전투에 참여하여 전공을 세우는 경우로서 고구려의 유유를 예로 들 수 있겠다. 둘째로 열심히 경박하여 부농으로 성공하는 경우인데 미천왕이 왕이 되기 전 그를 庸作人으로 부렸던 수실촌인 음모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셋째로 鐵冶匠을 들 수 있는데 고대 삼국 시대가 발전되어 나가는 시기에는 튼튼하고 날카로운 무구를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제 8장 지방인민위원회의 개관2007.3.23-目次-Ⅰ. 序Ⅱ. 지방인민위원회가 생기게 된 배경Ⅲ. 지방인민위원회의 활약Ⅳ. 인민위원회의 지배범위Ⅴ. 지방인민위원회의 개관Ⅵ. 結Ⅰ. 序인민위원회는 한국정치형태로서는 보기 드물게 지방에 뿌리를 둔 참여적인 정치조직이었다. 한국역사를 통하여 농민의 자발적인 정치참여가 활발했던 때는 바로 인민위원회가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인민위원회에 대한 연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기존에 있는 현대사 개설서에서조차 잘 언급되어 있지 않고 심지어는 북한에서만 존재했다는 통설이 나돌고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인민위원회는 남한에 상당수 분포되어있었고, 오늘날의 정치적 통합과 정치참여에 미친 영향은 상당히 크고 절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라 본다.Ⅱ. 지방인민위원회가 생기게 된 배경1. 경제적 요인해방이후, 분해되었던 농민들은 고국으로 돌아오고 남한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고국으로 돌아온 농민들은 자신들의 토지관계가 자신들이 떠날 때와 별 차이가 없음을 알았고, 오히려 친일행각의 오점을 가진 지주들이 오히려 전보다 더 많은 토지를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로인해 농민들은 일본의 동원에 분노를 느끼고 한국농업구조의 불평등성에 대해 깊이 인식하게 되었으며 이들은 대부분 농민정치가가 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의식은 경험의 부족으로 인해 크게 발전하지 못하였으며 어느 정도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2. 농업의 상업화지방정치에 중요한 영향을 미쳐왔었던 요인은 농업의 상업화 수준이다. 상업화는 군산, 목포, 부산과 같은 대규모 쌀수출항에 인접한 지역에서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는 타지방에 비해 높은 정치참여율이 나타났다. 상업화된 지역에서 정치적 상황은 다양하게 농촌의 제계급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상업적 농업으로 부유하게 된 농민들은 토지를 평균화하는 토지개혁에 반대했을 것이다. 또한 식민지시대의 상업화는 지주들이 시장으로 진출하여 투기하고, 외국에 수출하면서, 동시에 ‘봉건적’ 방법을 사산되었다. 이후 대부분의 도시에도 건준 8월말경 지부가 설치되었으며 3개월에 걸쳐서 아주 조그만 마을에까지 모든 행정조직을 갖춘 지부가 탄생하였다. 9월 6일 인민공화국이 형성된 후 비교적 쉽게 건준지방지부는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지방지부가 인민위원회로의 개편을 거부하고 건준의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기도 하고, 10월에 한민당과 통합하기도 했으며, 후에 인민당이 생기자 인민당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인민위원회는 여러방면, 즉 농민조합, 노동조합, 치안대, 학생단체, 청년단체, 부녀단체 등으로 보충되었고 거의 모든 지역에서 인민위원회와 대중조직들은 협력하여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대중조직과 인민위원회는 중복되는 회원이 많았으며 인민위원회의 활동은 전국 어디에서나 펼쳐졌다. 또한 이런 인민위원회 확산운동은 한국에서 전무후무한 지방조직의 정치참여를 불러일으켰다.Ⅲ. 지방인민위원회의 활약많은 지방인민위원회는 놀랄만한 정도로 기민하게 지방의 일본인들이나 부유한 한국인들로부터 자발적 혹은 강제적 기부금을 거두어들임으로써 세입을 증가시키기도 하였다. 인민위원회는 조그만 집으로부터 큰 공장에 이르기까지 일본인 재산의 경영권 이전이나 명칭변경을 서약하는 증서를 떠나는 일본인들로부터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후 미군정이 들어오면서 인민위원회가 패배함으로써 이러한 활동은 지속되지 못하였고, 현재까지 친일의 과거를 가진 후손들이 부유하게 살수있는 불합리한 환경을 제공하게 되었다.Ⅳ. 인민위원회의 지배범위.남한전체의 반 이상은 한동안 인민위원회에 의해 지배되었다. 통치기능을 행사했건 혹은 그렇지 못했건 간에 인민위원회는 연달아 남한에 확산되었다. 인민위원회의 강약정도를 도별로 매겨보면 (1)경남 (2)전남, 전북 (3)전북, 충남, 경기 (4)강원도 (5)충북의 순이다. 또한 1946년까지 전남에 소속되어 있다가 도로 승격된 제주도는 미군정 3년내내 인민위원회가 통치했던 곳이다. 물론 군마다 통제의 정도는 다르지만 위에 언급했던 군들은 실제로 한동안신분변동으로 인해 자기들 의사와 상관없이 동원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인위성으로 인해 1945년의 한국에는 격에 맞지 않는 유사노동계급이 존재했다. 당시 노동자들이 대부분은 임금노동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해방이 된 후 옛날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기를 고대하며 귀국했지만 그들이 가질 수 있는 것은 깊은 분노뿐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해방을 전후해서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수백 명씩 한국에 돌아온 노동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좌익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았으며 일본인들에 의해 가혹한 차별을 받았다. 이들의 인구변동은 각 지방의 급진성과 1946년에 일어났던 농민봉기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가장 반란이 심했던 경북과 경남은 1930년대와 1940년대 인구유출량 1,2위를 기록했고 1944년에서 1946년까지 인구증가율 역시 1.2위를 기록하고 있다. 반란이 심하게 일어났던 제주도 역시 1930년대 인구유출이 심했고 1944년에서 1946년까지 26%의 인구증가가 있었다. 만약에 해방전에 한 명씩 고향으로 돌아왔다면 급진성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광범위한 인구변동이 있었기 때문에 그 만큼 응집력은 강력해질 수 있었고, 지방인민위원회가 강력하게 존재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2. 운송과 통신망운송과 통신망은 정치적으로 혼란된 시기에 두 가지 양상을 띨 수 있다. 반란군의 수중에 있을 때 그것들은 반란군의 상호연락을 용이하게 해주지만 진압군의 손에 있으며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강력한 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해방 후 한국에서 인민위원회는 상황에 따라 근대적인 지역과 후진지역 양쪽에서 힘을 발휘했다는 역설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경찰이나 기타의 진압군이 이 시설들을 재 장악하면 그들은 그것들을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하였다. 운송과 통신시설은 좌익을 평정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였으며, 1945년에서 1950년까지 남한이 단지 몇 개의 고립된 지역에서만 근거지를 갖춘 반란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해주는 에 이르는 동부해안선은 1945년 당시 거의 쓸모가 없었다. 게다가 제주도에는 철도가 없었다. 인민위원회는 철도가 있는 지역과 없는 지역을 모두 다 통치했지만 철도에 가까운 지역은 대부분, 부산에서 진주에 이르는 지역을 제외하곤, 단시일내에 인민위원회가 몰락한 곳이었다. 서울로부터 병력을 파송하기 힘들었던 제주도나 강원도, 혹은 내륙산악지방에 있는 인민위원회는 타지역에 비해 전복시키기가 힘들었다. 위와같이 전북같이 도로와 철도사정이 좋았던 전북지방의 인민위원회는 쉽게 몰락한 반면 교통통신망이 취약했던 강원도는 인민위원회가 오랫동안 버티었다. 이와 같이 교통 통신수단을 동반한 근대화는 최소한 인민위원회의 성장에 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인민위원회가 힘을 유지하는 데는 방해가 되었다. 그러나 또한 후진성이 인민위원회의 성장을 고무시키진 못했지만, 일단 급진성이 발로되면 후진성은 인민위원회가 오래버틸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3. 토지관계인민위원회와 농민조합과 같은 가난하고 짓밟힌 자들을 위해 활동했던 조직의 성장은 비교적 부유한 지역보다는 가난한 지역에서 일어났다고 추정할 수 있다. 1945년의 한국처럼 토지관계가 불평등한 나라는 없었을 것이다. 분명이 이러한 조건 때문에 야기된 농민의 분노는 위원회의 활동을 촉발시켰으며, 위원회의 주장을 신뢰케 만들었고, 소작체제와 미곡수집 및 지주제에 대한 위원회의 공격이 농민들에게 호소력을 지니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위원회의 활동이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확산된 것은 아니었다. 남한의 곡창지대인 전북은 세입에 관심을 둔 총독부와 돈에 눈이 먼 일본이주자들의 착취를 벗어날 수 없었다. 또한 경기지역의 소작인들과 반소작인들은 전북에서보다는 많은 토지를 경작했지만 소작료는 전북 다음으로 지불했다. 이들 지역은 가장 높은 빈곤지수를 보였으며 강력한 위원회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존재했던 위원회마저도 쉽게 소멸했다. 이것은 농촌에서의 수탈이 가장 심한도에서 강력한 위원회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해주는 것이다. 사실상 정반대의 경이 보다 많은 경우의 - 토지환경하에서는 대중조직가와 토지개혁안이 성공할 확률이 더욱 크다. 그러므로 정치권력의 문제이기도 한 이러한 접근의 문제는 더 수탈당한 지역에서 농촌의 급진주의가 잘 나타나는 이유의 일부인 것이다. 한국에 있어 전북과 경기는 강력한 행정적 통제 및 지주의 통제구조와 더불어 해방 후 전북으로 귀환한 인구유입의 효과를 상쇄시킨 듯하다.이 당시 급진성과 소작률 간의 관계를 살펴보면 급진성은 소작률이 아주 높은 곳에서는 아주 약했다. 소작률이 높고 토지값이 높은 지역에서는 토지를 소유한 계층이 보다 강력하여 보다 신속히 분화하게 되며, 현실에 보다 잘 적응하게 되고 그리하여 반대세력을 보다 용이하게 다룰 수 있다. 중간정도의 소작률을 보이는 지역의 경우 많은 중농과 자영농, 그리고 이에 따른 지주의 지배완화는 집단적 행동, 혹은 개인적 ? 가족적 계층상승에 대한 보다 넓은 여지를 제공한다. 중농과 빈농은 연합하기도 하고 또는 부농이나 지주가 되기 위해 좀 더 많은 토지와 부를 축적하려 노력하기도 한다. 이것이 중농으로 하여금 사회경제적 시기에 그토록 적극성을 띠게 하고, 활력이 넘쳐 흐르게 하며, 농민정치운동에 참여토록 만드는 요인이다. 이와 같이 한국에서는 중간정도의 소작료를 내는 주변지역의 농민들이 - 강원도 해안지방이나 제주도지방의 농민들이 - 보다 많은 정치행동의 자유와 공간을 가졌음이 나타났다. 그 이유는 그 지방에서는 지주들이 부재하거나, 타지역에 비해 강력한 통제수단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4. 지리적 위치여러 인민위원회의 지리적 위치는 위원회의 힘을 평가하는 데 고려해야 할 중요한 요인이다. 주요 운송과 통신시설의 중심지에 근접해 있다는 것은 인민위원회의 발전을 가로막진 않았으되 위원회의 힘을 유지하는 데 방해가 되었다. 반면에 지리적 고립성은 위원회가 힘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지리적으로 외진 강원도와 경상도의 해안지방은 한 군을 제외하고는 거의 인민위원회가 지배하였다. 남한 중부내륙지방의 문경과 영동은 소백산맥과 지리다.
한국사의 이론과 방법역사가와 사실1. 역사란 무엇인가?‘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답하려 할 때 우리의 대답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 자신이 처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게 되며,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어떤 관점에서 보고 있는가라는 좀 더 광범한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의 일부를 이루게 된다. 왜냐하면 역사적 사실의 선택은 역사가의 해석이 큰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이다.2. 사실 존중의 시대특히 19세기는 사실을 매우 존중하던 시대였다. 특히 랑케는 ‘도덕주의적 역사에 대해서 정당한 항의를 시도하고, 오직 틀림없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뿐이다’라고 말하면서 역사가의 임무는 객관성을 유지하며 정확한 사실을 기록하여 후세에게 전달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사실을 존중하는 분위기는 로크와 러셀에 이르는 영국 철학의 지배적 조류인 경험론의 전통과 완전히 조화를 이루어 19세기 문화 사조를 지배했다. ‘우선 사실을 확실하게 손에 넣어라. 그런 다름 해석이라는 모래의 흐름으로 용감하게 돌진하라’ , ‘사실은 신성하며, 의견은 제멋대로이다’ ... 이러한 단편적인 말들이 그 시대의 역사가의 역할과 역사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분명하게 말해 주는 것 같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역사관은 자신의 일에만 충실하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저절로 조화를 한다는 자유분방한 경제학설이라는 한가하고 자신에 찬 세계관의 산물과 관계가 있었다. 그야말로 순진한 시대였던 것이다.3. 역사적 사실이란 무엇인가?도대체 역사적 사실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우리가 좀 더 면밀히 검토해야할 중대한 문제이다. 상식적인 관점에 따른다면, 어떤 역사가에게나 동일한, 그리고 역사의 중추를 이루는 기초적인 사실들이 있다. 예를 들어 헤이스팅스의 전투)는 1066년에 있었다는 사실 같은 것이 한 예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고찰이 필요하다.첫째, 역사가의 주된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와 같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이 같은 큰 전투가 일어난 시기, 장소를 정확히 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더군다나 역사가가 이런 사실들을 잘못 알아서는 안된다. 그러나 역사가가 정확하다고 해서 칭찬하는 것은 잘 말린 목재를 썼다거나 잘 반죽된 콘크리트를 썼다고 해서 건축가를 칭찬하는 것과 같다.그것은 그의 작업의 필요조건이지 역사가가 가지는 본질적인 기능은 아닌것이다. 이런 일이라면 역사학의 ‘보조학문’으로 일컬어져 온 고고학 ? 금석학 ? 고전학 ? 연대학 ? 등에 의존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역사가에게는 위의 전문가들이 해야하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는 않다. 모든 역사가들에게 공통적으로 똑같은 이런 따위의 소위 기초적 사실들은, 역사 자체에 속한다기 보다는 역사가들이 사용하는 원료의 범주에 속한다는 것이다.둘째로 고찰해야 할 점은, 기초적 사실들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사실들 자체에 어떤 특질이 있어서가 아니라 역사가의 선험적 결정에 좌우된다는 점이다. 속된 말로 사실들은 제 스스로가 이야기한다고 흔히 말한다. 물론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 사실이란 역사가가 그것을 찾아줄 때에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어떤 사실에 발언권을 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도, 그리고 어떤 순서와 맥락속에서 이야기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도 역사가인 것이다. 위에 예로 들은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에 우리가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실을 놓고 역사가들은 역사적 대사건으로 보기 때문이다. 위와 같이 역사가는 불가피하게 선택적이다. 역사가의 해석과는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존립하는 역사적 사실들의 단단한 씨를 믿는 것은 앞뒤가 뒤바뀐 오류이지만, 오류를 근절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4. 역사적 사실이 생기는 과정여기서 과거에 관한 단순한 사실이 역사적 사실로 변화게 되는 과정을 잠깐 살펴보자. 예를 들어 19세기 영국에서는 싸구려 물건을 파는 지극히 평범한 노점상 한 사람을 사소한 시비끝에 성난 군중이 고의로 쳐 죽인 일이 있었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일 수 있겠는가? 일반적으로 생각해봤을 때는 그 누구라도 역사적 사실이라고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키트슨 클라크 박사는 옥스퍼드의 포드 강연에서 이러한 사실을 강의 내용에 인용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이 과연 역사적 사실이 된 것일까? 이러한 사실을 인용한 것 만으로는 역사적 사실이 될 수 있다고는 말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만약에 이러한 사실을 가지고 19세기의 영국에 관한 논문이나 책들의 각주에 기록되고 후에 본문에 나타난다면 역사적 사실로 자리잡게 될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아무도 이 사실을 중시하는 사람이 없을 경우에는 비역사적 사실이라는 연옥으로 다시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두 가지 상태중에서 어느쪽으로 키우느냐 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키드슨 클라크 박사가 이 사건을 이용하여 뒷받침 하려고 했던 논제나 해석을 다른 역사가들이 유효하고 의미있는 것으로 받아들여 주느냐 않느냐에 달린 문제라고 생각된다. 역사적 사실로서 그 지위는 결국 해석의 문제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이 해석이라는 요소는 역사의 모든 사실속에 들어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역사적 사실은 어떤 특수한 견해의 감화를 받고, 그런 견해를 뒷받침해 주는 사실이어야만 보존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다.5. 문서가 말하는 것19세기의 사실숭배는 문서숭배라는 것으로 완성되고 정당화되었다. 즉, 기록에서 발견되는 것은곧 사실로서 받아들여졌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떤 문서도 그 문서의 필자가 생각하고 있던 것 이상을 우리에게 말해 줄 수는 없다. - 일어났다고 그가 생각한 일, 일어나야만 한다고 그가 생각했던 일,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일, 혹은 자기가 생각한데로 다른 사람들도 생각해 주기를 바랐던 일, 심지어 자기 혼자만이 생각했던 일, 이런 것이 그 전부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문서에 의해 말해지는 것은, 역사가들의 마음속에서 재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실제의 사실과 문서는 역사가에게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나 맹목적으로 떠받들어 모셔서는 안된다. 사실과 문서만으로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6. 역사가가 역사를 만든다.콜링우드는 역사철학이 취급하는 것은 ‘과거자체’나 ‘과거 자체에 대한 역사가의 사상’의 그 어느것과도 상관이 없고, ‘상호관계에 놓여 있는 그 양자’와 관계가 있다고 말하였다. 즉 역사가가 연구하는 과거는 죽어버린 과거가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아직도 현재 속에 살아 있는 과거라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행위라는 것은 역사가가 그 배후에 놓인 사상을 이해할 수 없는 한 그에게는 죽은 것이며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는 사상의 역사’라는 것이다. 또한 ‘역사란 역사가가 연구하고 있는 역사의 사상을 자기의 마음속에서 재구성한 것’이라는 것이다. 역사가의 마음속에서 과거의 재구성은 경험적인 근거에 의거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재구성 과정 그 자체는 경험적인 과정이 아닐 뿐만 아니라 사실의 단순한 나열만으로 가능한 것도 아니다. 재구성의 과정은 사실의 선택 및 해석을 주관하는 것이며, 바로 이 과정이야말로 사실을 역사적 사실로 성립케 한다는 것이다.7. 콜링우드의 역사관콜링우드는 19세기의 사조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통하여. 몇 가지의 잊혀진 진리를 일깨워주고 있다. 그는 ‘역사상의 사실은 순수한 형식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또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이므로, 결코 순수하게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즉 언제나 기록자의 마음을 통해서 굴절해 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그 책에 어떤 사실이 기술되어 있느냐가 아니라 그 책을 쓴 역사가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역사가가 어떠한 환경에서 태어났으며,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고, 어떤 경향성을 띄는지 먼저 연구를 해야 올바른 역사 이해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역사가는 자기가 다루는 인간들의 심리와 그들의 행위의 배후에 있는 사상을 상상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역사가는, 자기가 쓰고 이는 인물과의 어떤 심리적인 교류를 가지지 못하고서는 역사를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가는 그 자신의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이며, 인간 존재의 조건으로 그 시대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사실은 현재의 눈을 통하지 않고는 과거를 바라볼 수 없고, 또 과거의 이해에 성공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 시대의 주류를 이루는 사상적 학풍, 언어, 관습 등등이 역사가를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위치에 머물 수 없게 하는 것이다.8. 콜링우드 역사관의 위험성콜링우드의 역사관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콜링우드의 견해대로라면 역사는 역사기술에서 그 논리적 귀결에 집착한 나머지 역사가의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결국 객관적 역사를 전연 배재하게 되고, 역사란 역사가가 만들어 내는 것이 되고 만다. 결국 콜링우드도 ‘가위와 풀로 짜맞춘 역사’에 반대하다가, 위험하게도 역사란 인간의 두뇌에서 짜내는 것이라고 보는 결론으로 밖에 귀결될 수 없는 것이다. 즉 완전히 객관적인 역사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결론으로 밖에는 귀결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가설을 받아들이게 되면 역사상의 사실은 무가 되고 해석이 전부가 되어 역사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결론으로 치닫게 된다.
영성 1 독후감2007. 11. 13예수의 생애 를 읽고처음 이 과제를 부여받았을 때 나는 내심 걱정을 많이 했다. 왜냐하면 종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내가 예수의 생애에 대해 독후감을 쓴다면, 글 자체에 비판과 비난으로 덮힐 것은 뻔한 일이고, 심지어는 욕설까지 글에 써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엔도슈사쿠씨의 책을 읽은 후에는 나의 걱정은 씻은 듯이 사라졌고, 내가 평소 때 ‘예수’라는 존재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과 공통된 부분이 많아서 그의 견해를 무리없이 수용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내가 이런 느낌을 받게 되었고, 그의 견해를 수용할 수 있었는지 써보도록 하겠다.보통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는 신성시 되어있고, 기적을 이뤄내며 인간을 구원해주는 존재이다. 또한 그는 완전한 인성을 갖추었고 완전한 신성도 갖추고 있는 존재로 알고 있다. 심지어는 성경에 나와 있는 전반적인 예수의 모습도 그렇다.그러나 나는 이러한 모든 현상에 대해서 거부감이 든다. 사실 나는 ‘예수’라는 성인이 과거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예수가 조그만 빵을 늘려서 굶주린 유대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든지, 나병환자를 치료했다든지, 십자가에 못 박히어 돌아가셨다가 다시 부활하셨다든지 하는 이야기들은 상당히 거부감이 든다. 왜냐하면 앞에 나열했던 사건 자체가 현실 세계에서는 일어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상황이 발생했다는 객관적인 정황증거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현상들을 가지고 자세히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아직도 만인을 위해 하늘에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이것은 마치 한국 고대사회에 지배권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천손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며 만들어졌었던 신화를 액면그대로 무비판적으로 믿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예수는 신이 아니다. 과거에 존재했고 사랑을 실천하고자 했던 성자일뿐이다.엔도슈사쿠의 ‘예수의 생애’라는 책에서도 같은 맥락에 입각하여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신’적인 존재의 예수를 철저히 배제하고, 인간적인 모습인 예수의 생애로 접근하고 있다.예수가 현실에서 살아가면서 인간의 눈에는 믿을 수 없는 신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어떻게 고투하였으며 고민하였는지를 보여주며, 예수가 어떻게 하여 사람들에게서 그토록 영향을 발휘하게 되었는가를 보여주고, 그들 중에서 어떻게 하여 제자를 삼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또한 예수에게 열광하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어찌하여 떠나게 되고, 어떻게 하여 마침내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는지를 저자는 인간적인 예수의 생애로 접근하며 글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예수의 부활’에 대해 쟁점화 시켜서 각종 사료와 정황증거에 의해 접근을 시도하며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이와같이 이 책의 저자는 예수를 시종일관 고뇌에 찬 인간의 모습으로 보고 있다.나는 이 책을 보면서 정말 작가와 많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내가 사실 의 진위여부를 놓고 의구심을 가졌던 부분까지도 해소시켜주어서 정말 기쁘기 그지없었다. 매우 많은 부분을 해소시켜주었는 데 몇 가지만 추려서 나열해보겠다.첫째로, 성경에 나온 예수가 행했던 기적에 대한 부분이다. 성경을 봐도 나는 이 부분에 대해 절대 신뢰할 수 없었고 상당히 거부감을 가졌었다. 왜냐하면 인세에서는 어떤 과학적인 근거를 찾아봐도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고대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와 결부시켜서 생각해보기도 했었지만 도무지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러나 엔도쇼사쿠는 이것을 현실적인 부분과 성경, 사료를 잘 고증하여서 글로 잘 써놓았다. 저자는 이런 기적이야기에 대해 실제 일어났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사랑’ 이라는 정신적 양식을 나누어주었다는 행위로 기술하였고, 이에 대한 근거로 각종 사료와 문헌정보를 잘 드러내고 있다. 또한 이러한 실제 기적을 바랬던 대중과 대중이 원하는 기적을 행해줄 수 없는 예수와의 인간적인 고뇌를 현실적으로 잘 나타내었다.둘째로, 예수를 구원을 받은 많은 대중들이 예수를 지속적으로 따랐다는 부분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 부분에 대해 가장 민감했었다. 현실적으로 사람이란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뒤따르지 않는 한 맹목적으로 관계를 맺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예수와 제자들, 또한 그를 따르는 대중의 관계는 맹목적인 숭배가 전제되어 기술되어 있으며 그를 배반하거나 따르지 않았던 로마인들은 무지했기 때문이라고 나와있는것 같다. 하지만 작가는 또한 이 부분에서도 객관적으로 잘 고증해내었다. 책에 따르면 예수를 처음에 따랐던 부류는 예수를 성인이 아니라 유대민족을 로마로부터 해방시켜줄 민족지도자로 믿고 따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예수는 이런 메시아적인 위치를 거부하였고 이에 따라 많은 군중들은 동요되었고 예수의 곁을 떠났다. 이와 같이 예수는 시종일관 존경만 받은 것은 아니었고 심지어는 대중에게 실망을 안겨준 예수는 몇 번이나 죽을 뻔한 위기도 겪는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예수의 제자들마저도 그를 배신하고 떠났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성경에는 이와 달리 예수와 제자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한번의 배신(유다)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신성성을 부여한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는 예수가 죽기 직전, 제자와 예수와의 관계, 그리고 유대권의 권력을 쥐고 있는 권력층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현실에 입각해서 가설해보고 복음서나 성경을 통해서도 객관적으로 고찰해보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