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육의 양극화 현상과 그 대책 >1. 서론2. 교육 양극화의 개념1) 국내2) 국외3. 교육 양극화의 요인1) 내적 요인2) 외적 요인4. 교육 양극화의 해결 방안1) 교육복지투자 우선지역 사업2) 대학생 멘토링 제도3) 방과 후 학교 운영의 활성화5. 맺음말1. 서론‘빈익빈 부익부’라는 말은 경제적으로 양극화가 되는 현상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런데 이 ‘빈익빈 부익부’라는 말은 이제 경제가 아닌 생활의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경제라는 것은 생활전반의 밑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한가지 면 - 교육에서만은 경제력이 교육의 선택권을 좌우하지 않아야 하고 또 정부에서도 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그러나 현실적으로 부모의 높은 학력 수준이나 가정의 경제적 풍요로움은 자녀의 고학력으로 이어지기 쉽고 반대로 부모의 낮은 학력 수준이나 경제적 빈곤은 자녀의 저학력으로 이어지기 쉽다. 이것이 경제력과 맞물려 있는 교육의 양극화 현상이다. 이런 양극화 현상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심해지고 있어 하나의 사회문제로까지 인식되고 있다.이 글에서는 이렇게 심화되어 가는 교육의 양극화에 대해 교육 양극화가 어떤 것인지 개념적으로 살펴보고 그 요인을 파악하고자 한다. 아울러 이런 교육 양극화의 해결 방안까지 생각해보고자 한다.2. 교육 양극화의 개념일반적으로 국내?외에서 교육 양극화의 개념은 아직 학문적으로 정립되어 있지 않다. 때문에 학자들마다 여러 가지 관점에서 다양한 접근을 시도해왔다. 그러면 여러 학자들의 교육 양극화의 개념을 국내, 국외로 나누어 살펴보겠다.1) 국내에서의 교육 양극화 개념국내에서의 교육 양극화에 대한 개념을 살펴보면, 배종근은 ‘교육격차(양극화)는 교육 input의 부족, 불비 또는 결합과정의 잘못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교육 output의 불충실성의 차의 정도’) 라고 하였고, 김병성은 ‘교육격차는 사회 및 학교의 사회구조적 측면과 아울러 그 기능적 측면에서의 교육과정과 결과적 측면’)이라고 하였다. 이일용은 ‘신체, 지역적, 사회경제적 요인 등으로 인해 적절한 교육기회를 보장받지 못함에 따라 우리사회에서 보장하는 최소한도의 교육수준을 누리지 못하는 현상’)이라 하였다.이를 바탕으로 이종재는 각각의 교육격차에 대한 개념을 비판적인 관점으로 지적하였다.)첫째, 차경수는 교육격차의 개념을 교육의 기회균등으로 파악하고, 교육기회의 불균형의 측면을 학교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 학교교육의 과정, 학교 교육의 성과의 측면으로 구분하고, 현재 관찰되고 있는 불균형의 양상을 지적하면서 교육체제를 통제가능한 내적요인과 통제 불가능한 외적 요인을 구분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둘째, 황정규는 교육격차를 Jencks 등의 불균형 연구 모형에 준하여 교육에 관련된 불균형의 뜻으로 교육격차를 의미하고 있으나 그 범위의 한정은 분명치 못하다고 지적하였다. 셋째, 한정신은 교육격차의 개념 규정이 분명하지 못한 체 교육에 관련된 기회의 불균형, 교육의 차이, 결과의 불균형의 뜻으로 교육격차를 의미한다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교육격차의 의미를 계속 사용해야 할 경우 명확한 개념 규정이 필요하며 도한 우리의 현실을 보다 의미가 있도록 그 개념 규정을 새롭게 시도할 필요가 있고, 교육격차는 교육에서의 차이)라는 방향에서 그 뜻을 찾으면서 동시에, 교육의 기회균등의 개념과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2) 국외에서의 교육 양극화 개념국외에서의 교육 양극화의 개념은 첫째, 교육기회의 불균형(educational inequality), 둘째, 교육결과의 불평등(educational outcomes)으로 보고 있다. OECD 교육정책보고서에(2003)에 의하면 교육 양극화에서의 소외계층은 ‘사회경제학적, 문화적 언어적 요인과 관련 있는 학생의 교육적 필요’라고 정의 하였다. 학교 중심 사회에서의 교육 소외는 주로 학력격차를 의미한다는 것이다.Coleman은 교육의 기회균등에 관한 언어적 정의는 내리지 않았고) 또 Jencks, Smith, Moster와 Moynihan 등도인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입장의 연구자는 Coleman, Plowden, Boudon, Husen 등이다. 그러나 Bowles 와 Gintis 등은 이러한 관점은 교육격차를 줄이는데 아무런 공헌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인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그러나 최근에는 학교 교육에 관심을 두고 학교내에서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그리고 그 교육이 사회내에서 어떻게 기능을 하는가에 대한 내적 요인에 중심을 두는 연구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연구의 대표적인 연구자가 Persell, Brookover 등인데 이들 연구를 종합하면 학업성취에 영향을 주는 내적 요인은 학교의 사회 체제, 교사와 학생의 상호 작용 관계이다.) 그 외에 김병성은 내적요인을 학교조직 운영, 행정, 재정 지원체제, 교육과정 구성과 실천과정, 학교의 학구적 풍토를 들고 있다.)교사?학생 간의 상호작용의 변인들은 Bloom의 연구에서는 교수방법 혹은 교수의 질이 학습효과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였고, Rosenthal과 Jacobson은 자기충족예언(pygmalion effect)에 관한 연구에서 교사의 학생 개개인에 대한 지각 혹은 기대가 학생들의 학력차를 유발한다고 주장하였고, Persell 역시 교사의 지각과 기대가 매우 중요한 요인임을 밝히고 교사 기대의 원천 및 결과를 규명하였다. 김영철은 학생의 경제적 배경, 학교의 지역적 위치, 학교 유형 및 학교간의 특성에 따라 교육의 차이가 발생한다고 하였다.)2) 외적 요인교육 양극화의 외적 요인은 가정의 사회문화적 요인에 따른 가정의 사회적 계층 및 이에 따른 가정 환경의 중요성이라고 할 수 있다.대표적인 연구는 Plowden 보고서, Jencks, Dave 등으로 이들은 가정환경 중에서 물리적 환경보다 사회심리적, 또는 사회문화적 환경이 학업성취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였다. 이러한 연구를 종합해보면 교육 양극화 관련 외적 요인은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인지양식, 언어모형, 성취를 위한 동기 등이다. )그 서는 교육 양극화의 해결 방안을 알아보겠다.4. 교육 양극화의 해결 방안교육 양극화의 문제는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만큼 한 번에, 한 가지 정책으로 해결 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교육 양극화의 문제 아래에는 경제적 빈곤이라는 국가적인 문제가 있고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교육 양극화 문제도 해결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계층간, 사회?경제적 격차가 더 커지고 있는 지금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대책이 시급하다. 하지만 이 글에서 새로운 해결 방안을 제시하기에는 자료가 부족하므로 이미 국가에서 실행하고 있는 정책을 중심으로 더 효율적이고 발전적인 방안을 생각해보도록 하겠다.1) 교육복지투자 우선지역 사업교육부는 2003년부터 교육복지투자우선지역 지원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이 사업은 대도시 내 저소득 지역 중 교육 조건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지역을 ‘교육복지우선지역’으로 선장하여 특별한 정책적 배려와 지원을 통해 해당 지역이 교육환경이 질을 개선하려는데 목적이 있다.)이 사업은 향후 빈곤 아동이나 청소년 정책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으며, 해당 지역에서 학교를 중심으로 지역사회 교육공동체를 구축하여 지역 내 아동?청소년에게 교육?문화?복지가 연계된 통합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기본 전략으로 하고 있다.하지만 이 사업은 보완해야 할 점이 있다. 그 첫째는, 사업 방향이 중소도시 지역으로의 확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업의 중심은 대도시이다. 하지만 교육 양극화 현상은 지역별로 심한 편차를 드러내고 있고, 특히 대도시보다는 중소도시의 교육적 환경은 열악하기 짝이 없다. 또한 교육복지 혜택의 대상을 이주 노동자, 탈북자, 농어촌 지역에 까지로 확대 하여야 한다.)둘째는 지역에 대한 사업의 역량을 강화한 후 점진적으로 지역의 역할이 증대되도록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사업 초기 정부 지원을 통해 지역의 사업 역량을 강화한 후 점진적으로 지역의 역할을 증대하여 지방자치단체의 교육복지투자 사업에 대한 예산 투자를 유도해야한다.셋째는 학교와 지역이 학교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지지체계가 되어주는 것을 포함한다.둘째, 개인적 성장 면에서는 여러 가지 위기에 처해있는 학생들이 멘토와의 관계를 통하여 어려움을 극복하고, 정상적인 발달을 성취하도록 돕는대 초점을 맞춘다. 낮은 자존감이나 부족한 의사결정력을 가진 학생, 비행 등의 사회적 문제행동을 일으킬 위험이 있는 학생, 적절한 지지체계가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이 대상이 된다.이런 멘토링 제도에서 주의해야할 것은 대학생 멘토의 역할이 비형식적이고 보다 자연스럽고 친밀한 환경에서 자유롭게 질문하고 도움을 청하여 삶에 대한 상담도 할 수 있도록 Big brother 혹은 Big sister과도 같은 신뢰할 수 있는 대학생 멘토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멘토링 제도에서 멘토의 선발과정이 체계적이고 명확하게 세워져야 한다.3) 방과 후 학교 운영의 활성화방과 후 학교 운영은 종전에 학교에서 방과 후 교육활동으로 실시해오던 초?중등학교 특기적성교육, 초등학교 저학년 방과 후 교실, 고등학교 방과 후 수준별 보충학습을 보다 내실화하고 활성화하기 위한 운영체제이다. 2006년부터는 특기적성교육, 초등 저학년 방과 후 교실, 방과 후 수분별 보충학습 등 각각 사용되던 명칭과 프로그램을 ‘방과 후 학교’라는 용어로 통합하여 사용하고 있다.)방과 후 학교는 다양한 양질의 프로그램 운영으로 사교육 수요를 학교 내로 흡수하는 것과 맞벌이 부부, 저소득층 자녀의 보육 기능 등을 담당하는 교육복지 실현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이 방과 후 학교에서 보완해야 하 것은 프로그램의 개발이다. 교육소외 아동이 중심이 되는 방과 후 교육은 아동의 정의적, 지적, 사회적, 신체적 발달특성을 감안하여 프로그램이 개발되어야 한다. 방과 후 학교 운영에 있어서 학교에서는 학교운영위원회가, 지역사회에서는 방과 후 아동지도 시설에서 지역주민이 주체가 되어 서로 협조, 협력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방과 후 학교의 질 높은 교육프로그램은 아동의 건전한 생활습관과다.
소비에트 붕괴와 그 여파1. 머리말소비에트 연방은 지구 육지 면적의 1/6을 차지하는 광대한 영토에 100여 민족들이 함께 살았던 연방국가였다. 1922년 12월 30일 탄생한 이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 역사, 언어, 종교, 전통, 풍습이 서로 다른 많은 민족들이 69년이란 세월을 어울려 살았던 것은 연방의 중심이자 관리자인 공산당이 일당독재를 통해 민족주의를 통제해왔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런 소련의 사회주의 체제는 부단한 체제의 변화를 경험하였고 1991년 8월 붕괴하였다. 사회체제 붕괴 이후 러시아를 비롯하여 사회주의권 국가들은 정치적 민주화와 시장경제화를 표방하며 많은 개혁이 이루어지고 있다.이 글에서는 이런 소비에트의 붕괴 배경과 과정, 그리고 그 후 러시아의 변화를 경제, 사회, 정치의 세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이것은 체제 자체의 붕괴와 나아가 이 지역에서 사회주의 이후의 체제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이런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에 대한 이해는 북한 등 잔존 사회주의 체제의 변화를 전망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현실적으로도 큰 의의가 있을 것이다.2. 소련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 배경소련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를 보기에 앞서 붕괴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소련의 붕괴 배경에 대해 먼저 살펴보겠다.제정 러시아의 전제 왕정은 1917년 2월 혁명으로 종말을 고했다. 그리고 10월 혁명 후 공산 독재 하에 경제체제에는 국유ㆍ계획경제가 도입되었다. 이런 스탈린주의의 국유ㆍ계획경제는 당독재에 의해 운영되면서 반민주주의가 더욱 심화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의 고속 경제 성장,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 대전 후의 초강대국으로의 부상 등 가시적 성과로 인해 사회주의로부터 비판이 억제되었다. 스탈린주의에 대한 본격적 비판은 부분적이기는 하나 소련 내부에서 1950년대 후반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를 통해 시작되었다. 그리고 브레즈네프 말기부터 시작된 경기침체는 사회주의에 대한 확신을 뿌리채 흔들어 놓았다. 이것은 체제의 정당성에 대한 위과정에 대해 알아보겠다.3. 소련 사회주의의 붕괴고르바초프가 집권한 이후 소련 정치는 혁명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소위 개혁 공산주의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는 처음 개혁을 경제부문에 한정했으나 점차 정치 분야로 확대, 공개주의와 민주화의 기치 하에 정치 쇄신을 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을 폐지하고 자유선거의 실시와 서방식 대통령제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개혁은 소련의 붕괴를 앞당기게 되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사회주의 체제의 잘못된 점을 고쳐 개선하는 ‘체제내 개혁’이었다. 하지만 이 개혁에 반대하는 보수 세력의 저항은 완강했고 경제위기는 심화되었다. 또한 소련 제국의 변두리를 구성하던 민족 공화국들은 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를 배경으로 보수 세력이 1991년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함으로써 소련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여기서는 고르바초프의 집권 이후 소련의 붕괴까지의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고르바초프의 집권 후 권력강화)에도 불구하고 집권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체제는 급속하게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다음의 네 가지 원인이 더해져서 소련의 붕괴로까지 이어진다.(경제 위기) 첫째는 경기침제로 소련 체제의 위기가 시작된 것이 경기 침체와 때를 같이하고 있다. 소련의 경제는 이미 브레즈네프 집권기인 1970년대부터 성장이 둔화되기 시작, 특히 1980년대 이후 둔화가 가속화되고 있으며, 1991년에는 국민총생산(GNP)상으로 17%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그래도 브레즈네프 집권 중에는 그나마 속도가 완만했기에 체제의 유지가 가능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의 집권 중인 1989~1991년 사이에 경제는 급격히 악화되어 생필품 품귀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여기에 고르바초프의 경제 개혁은 임금 상승과 가계소득의 증가를 초래했으나 구매력의 증대는 상품 기근 때문에 국민경제로 적절히 환류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물가상승과 재정적자로 이어졌다. 이런 국민의 생활고는 항의와노동자들의 파업 등으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있었다. ) 이렇게 소련사회는 스탈린 치하의 농업사회에서 이후 산업사회로 탈바꿈하여 온 것이다. 중요한 것은 중산층을 주축으로 하는 소련 사회가 사회주의 체제에 환멸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소련 사회는 경기 침체, 지배층의 특권 및 부패, 환경오염 등 생활수준의 저하에 아무런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중산층의 환멸은 소극적인 저항을 지나 고르바초프 시기에 정치단체로 바뀌기 시작했다. 보수계를 제외한 이들 체제 밖 세력은 그 기반이 취약하고 분열된 상태여서 구심점을 잃은 채 경제적 어려움을 배경으로 반체제화 되고 있었다.셋째는 소수민족 공화국의 도전이다. 다민족 국가인 소련 사회에서 민족의 자주권 요구는 체제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되었다. 소련의 많은 소수민족들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사이의 분규와 같은 민족 갈등뿐만이 아니라 중앙, 즉 소연방으로부터 자주권의 확대를 요구하거나, 더 나아가 발트 공화국들과 같이 독립을 주장하여 왔다. 이런 민족자결 운동은 고르바초프의 민주화 개혁으로 활성화되어 가열되었다. 고르바초프는 이런 소수민족의 열망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을 토착 민족엘리트에 의하여 막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들 집권 엘리트들도 한계를 느끼자 중앙에 대해 소속 민족의 대변자가 되었다.마지막은 보수 쿠데타와 지배 엘리트의 분열이다. 경제 침체와 사회 근대화 등 구조적 요인의 변화는 소련의 지배 엘리트의 분열을 조장했다. 1991년 소련 정치는 한편으로는 보수-개혁, 다른 한편으로는 중앙-지방(소수민족 공화국)간의 대립이 점차 과격화되었다. 개혁을 지지하던 세력은 체제의 권위를 부인하였으며, 소수민족 공화국은 독립을 선언하게 되었다. 이 위기의 대응으로 고르바초프는 개혁과 보수 사이에서 중도노선을 표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90년말 까지 고르바초프는 개혁과 보수 세력 모두로부터 지지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르바초프는 1991년 4월 옐친(Boris Yeltsin) 등 공화국 지도자들과 협상을 갖고 새로운 연 해체를 막아보려 노력했으나 11월 25일 7개 공화국과의 조약 조인에 실패했다. 12월 1일에는 우크라이나가 독립하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로루시의 3개 슬라브계 공화국이 12월 8일에 독립 국가 연합을 선언했다. 이어 카자흐스탄 등 8개 공화국들이 이에 가담함으로써 연말까지 소련자체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4. 소련 붕괴 후고르바초프는 85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하면서 경제부문에 이어 정치부문에서도 개혁을 추진하지만 90년 8월 보수파의 쿠데타로 개혁은 실패했고 그에 이어 옐친(Boris Yeltsin)이 집권하게 되었다. 옐친 대통령과 가이다르 전 총리대행, 추바이스 제 1 부총리 등으로 이어지는 러시아의 개혁은 수구세력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개혁정치를 추구했다. 또한 러시아 지도층 내에 개혁에 관한 광범위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어 전망이 밝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 소련 붕괴 후의 러시아에서 개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경제, 사회-언론과 교육-, 정치의 면에서 살펴보겠다.(경제 성장) 소련 붕괴 후의 러시아 경제는 큰 변화를 겪게 된다. 가장 큰 변화는 경제의 생산 주체가 국유기업이 아닌 사유기업에게 넘어간 것이다. 현재 민간 은행은 2천 5백 개, 투자기관은 6백 개, 주식 소유자는 4천만 명에 달한다. 이들은 경제활력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데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핵심적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사유재산권, 상속, 주식시장 등의 개념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는 체제전환 이후 5년 만에 국내총생산이 1/2로 하락했으며 , 초 인플레이션, 높은 실업률, 부익부 빈익빈 현상 등으로 총체적 위기를 경험했다. 그러나 2000년 푸틴 대통령 취임 이후의 경제는 안정과 성장을 구가하고 있다. 2005년 러시아의 GDP성장은 1999년 대비 57%까지 올랐으며, 이것은 동기간 동안 연간 평균 6.6%의 성장률을 달성한 수치이다. 이런 상황들로 골드만 삭스(Goldman Sachs)는 2003년 발간한 BRICs보고서에서 러시아 경제는 지속적인 언론의 폐지를 선언하여 자유나 독립, 권력의 불개입이 원칙적으로는 보장되었다. 하지만 1992년 ‘새로운 미디어법’)이 통과되면서 언론의 새로운 독재가 출현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으나, 언론이 지나칠 정도로 정치에 민감해졌다는 것과 언론 제작 상황이 악화되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여기에 언론 관련 시설을 독점하고 있는 정부의 정책, 새롭게 부를 형성해 러시아를 지배하고 있는 신흥 재벌의 언론사 경영참여 등은 언론이 국가권력에 묶여가고 있는 현실적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다음은 교육을 살펴보겠다. 소련 붕괴 전의 러시아는 국ㆍ공립 형태의 교육기관만이 존재했으나 소련 붕괴 후에는 사립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2년 교육법에 의해 다양한 형태의 교육제도) 설치가 허용되었다. 새로운 형태의 교육기관은 다양한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문적인 상업적 형태를 띠고 일명 선택적 학교망으로 불리며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이런 새로운 형태의 교육기관은 1993년 초에 특히 도시를 중심으로 약 400여 개가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1996년 이후 정부는 교육관련 법규를 개정하여 규제와 통제를 강화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래서 정부의 ‘허가’뿐만 아니라 ‘보증’을 받은 사립학교만이 공신력을 갖게 되었고, 이런 보증제도는 사립학교의 독자적 운영 및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렇게 사립학교가 증가하고 있지만 취학아동은 일부 특수계층에 한정)이 되어 있어 국민들의 기본 교육권의 보장 및 교육을 통한 사회 계층화의 심화를 제한해야하는 문제점을 갖고 있다.(강한 중앙정부) 마지막으로 러시아의 정치에 대해 보겠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는 모스크바의 연방정부와 89개의 연방구성주체가 결합되어 있는 연방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적어도 제도적으로는 권력의 분산이 이루어져 있는 연방국가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러시아의 연방제는 서구의 연방제와는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중앙집권화된 연방제’이다. 1990년하겠다.
쉰들러리스트를 보고원래는 수업시간에 보던 피아니스트를 보려했는데 아쉽게도 대여중이라 쉰들러리스트를 골랐다. 예전에 감동 있게 보았던 인생은 아름다워를 다시 보려했으나 이미 보았던 것이고 그것은 유대인의 실제 생생한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서 쉰들러리스트를 골랐다. 이 쉰들러리스트는 한번쯤 제목은 들어봤지만 실제로 어떤 내용인지도 몰랐고 재밌다는 것보다는 잔인하다는 말만 들었던 영화이다.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감독이 만들었으니 유명세는 당연하고 제66회 아카데미상 7개 부문 수상을 한 것에다가 잔인하다고까지 하니 사람들이 한 번 볼만하겠다는 생각이 전부였다. 사실 수업을 듣기 전까지 종교에 관심이 없어서 유대인에 대해서 아는 바도 별로 없었으며 그저 나치와 관련하여 학살당하고 억압받은 민족, 지혜롭고 돈 잘 버는 민족이구나 했었다. 하지만 이 수업을 들으면서 유대인은 유럽인들이 칭했던 것처럼 그렇게 이상스런, 유럽 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짐승 같은 민족은 아니었다. 유대인도 엄연한 존엄성이 있는 하나의 사람이다. 그들의 삶의 배경이 그들을 짐승 같은 사람으로 만든 것이지 결코 그들은 우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아니다. 현재 유대인은 차별대우를 받지 않는다. 하지만 현재 받지 않는다고 하여 과거에 치욕스럽게, 너무나 서럽게 받았던 핍박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뭐 그런 것들은 마음 깊이 새겨서 계속 아파할 것도 아니다.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음을 안타까워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 서론은 여기서 마치고 쉰들러리스트의 줄거리에 대해서 말하겠다.쉰들러리스트라는 제목은 무엇인가? 쉰들러는 이 영화의 주인공 오스카 쉰들러를 말하는 것이고 리스트는 말 그대로 어떤 표나 명단 같은 것을 뜻한다. 이영화의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쉰들러의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나타내는 게 바로 이 쉰들러리스트이다. 주인공 쉰들러는 체코슬로바키아출신으로 가난하게 태어나서 돈에 눈이 먼 사람이다. 그는 독일군이 점령한 폴란드로 와서 무일푼으로 에 따라야하는 군인들이지만 민간인인 내가 보기에 이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닌 군인이다. 그들은 유대인을 인간이 아닌 것으로 취급했겠지만...... 이렇게 유대인 주거지역은 폐쇄가 되고 모든 유대인들은 강제 수용소에 머무르게 되는데 여기에 아몬이라는 사령관이 온다. 처음 온 날, 그 사령관은 헬렌 허쉬라는 여자 유대인을 가정부로 들이며 수용소를 통치한다. 상쾌한 아침 그는 일어나서 베란다로 나와 담배를 하나 물으면서 수용소의 유대인들을 둘러본다. 그러다가 총을 가져와 일하지 않고 가만있는 유대인을 쏴서 죽여버린다. 옆에서는 같이 일하던 사람이 죽어도 일하던 동료는 두려움에 떨면서 계속 일을 해야 한다. 살기위해서 그들은 독일군의 눈밖에 나는 행동은 삼가야한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쉰들러는 자꾸 생각이 바뀐다. 자신을 도와주는 회계사인 스턴도 유대인이기에 받는 부당한 대우들을 직접 보면서 그리고 스턴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 유대인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또한 스턴은 쉰들러가 모르게 유대인들에게 일자리를 주고는 쉰들러에게 어떤 사람이 감사의 말을 전하려 한다고 한다. 갑작스럽게 알지도 못하는 팔이 하나 없는 노인이 와서는 정말 감사하다고 굽신거리는 노인에게 쉰들러는 알겠다고 하면서 돌려보낸다. 그 노인이 간 후 쉰들러는 스턴에게 이런 일을 하지 말라고 하지만 분명 마음속에 무언가가 움직였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 출근하던 사람들은 눈이 많이 와서 출근을 하다가 재설작업에 들어간다. 여기서 그 팔이 하나 없는 노인은 독일군에게 총으로 죽임을 당하고 그것을 본 쉰들러는 자기에게 손해가 있다며 배상을 요구한다. 그는 실제로 배상보다도 사령관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저 노인이 무엇을 잘못하여 저기서 저렇게 개죽임을 당해야하나요 라고... 그랬으니까 수용소내에 자신의 공장을 짓도록 하고 유대인 일꾼을 쓰려 한 것이다. 이때는 일꾼이라는 파란 카드가 있으면 그나마 유대인들 중에는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공장에서 일한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죽을 것처럼 하려고 한다. 그래서 하인 아이가 잘못을 했는데 내가 널 용서하겠다며 그냥 가라고 한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이 그리 쉽게 바뀌진 않는 것이다. 그는 곧 베란다로 총을 가지고 나가서 걸어가는 하인아이를 쏴 죽인다. 그리곤 가정부에게 가서 사랑을 느끼는 것 같다고 진정으로 보호하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뿐이었다. 그는 헬렌에게 너는 유대의 더러운 계집이라며 때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가던 중 하루는 기차가 도착한다. 이 기차는 일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싣고 가서 그 사람들을 죽이는 황천행 기차였다. 건강검진을 받으러 나오라는 소리에 모두들 좀 더 생기 있게 보이려고 손가락 살을 뜯어 피를 내어 얼굴에 바른다. 정말 처참하다. 이 무렵 쉰들러가 일시 수감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는 생일 날 자신에게 선물을 바치던 유대인 소녀에게 사람들 앞에서 키스를 해준 적이 있었는데, 이런 행위가 재식민 정책법을 위반하였다고 하여 수감된 것이다. 이 때 쉰들러를 옹호해 준 사람은 바로 아몬이었다. 그 결과 쉰들러는 가벼운 경고를 받고 석방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은 독일군에게 불리한 쪽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독일군은 이미 학살되었던 만 명 이상의 묻혀진 유대인을 다시 꺼내어 태우기로 한다. 나중을 대비해서 이다. 나중에 전쟁이 끝나 인권문제가 터지면 안되니까 그것의 증거를 없애려는 것이다. 여기서 빨간 코트를 입을 여자아이의 모습이 잡히는데 이것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게 흑백영화인줄로만 알았을 것이다. 물론 흑백이 지배적이지만 가끔가다가 보면 컬러로 나오는 부분이 있다. 아무래도 주의 깊게 봐야하는, 감독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인물을 컬러로 한 것 같다. 그 후 유대인은 모두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내질 것이라는 소식이 들린다. 이것을 들은 쉰들러는 스턴을 찾아가 술을 한 잔 하며 스턴도 그곳에 가게 되었음을 안타까워한다. 그러면서 자기는 고향에 내려가겠다고 한다. 하지만 쉰들러는 정말 유대인을 하나의 사람으로 보았고 그들을 사람으로서 사음엔 그것만은 안된다던 아몬은 역시 돈 얘기가 나오니까 허락하였다. 이렇게 헬렌을 마지막으로 작성된 리스트로 아우슈비츠로 가게 된 수용소의 유대인은 모두 쉰들러의 보호아래 그의 고향인 체코로 가는 기차를 탄다. 이 기차는 한 대에는 남자와 아이들이 다른 한 대에는 여자들이 타고 갔는데 남자와 아이들은 체코에 잘 도착했으나 여자들이 탄 기차는 서류 착오로 원래의 이송지인 아우슈비츠로 갔다. 나중에 또 이 사실을 알게 된 쉰들러는 이들을 구해기 위해 값진 보석을 갖고 높은 사람을 찾아가서 뇌물로 300명을 빼내 온다. 이렇게 하셔 수용소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쉰들러의 공장으로 왔는데 여기서 그는 그만의 수용소의 법을 말한다. 절대로 이유 없는 사살은 더 이상 허락하지 않는다고...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공장에서 예전과는 다른 기분으로 일을 하게 되었고 쉰들러의 부인도 이제는 쉰들러와 함께 공장에서 지냈다. 하지만 이 유대인들은 능력이 좋은 사람들이 아니라서 이들이 만든 물건은 품질검사에서 한번의 합격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쉰들러는 이런 사실을 알고서도 유대인의 안식일까지 챙긴다. 그래서 6개월 동안 이 공장은 전혀 이윤이 없는 상태로 운영되게 되고 쉰들러는 유대인들은 먹여 살리느라고 정부에 수백만의 마르크를 뇌물로 바친다. 이렇게 7개월이 되던 날 쉰들러는 스턴으로부터 파산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때마침 전쟁은 끝나고 6년간의 악몽같은 학살도 끝나게 된다. 이때 쉰들러는 유대인에게 자신은 나치라며 자신의 용서를 구하고 찾기는 힘들겠지만 모두 가족을 찾으라고 한다. 그리고 절대 살인자는 되지 말라며 3분간 학살당한 유대인을 위한 묵념을 한다. 쉰들러는 짐을 꾸려 도망을 가려고 하는데 유대인들이 쪽지를 하나 건넨다. 그것을 유대인들의 서명이 담긴 것으로 혹시라도 쉰들러가 위험에 처했을 때 쓰라고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스턴도 하나의 쪽지를 주는데 거기에는 탈무드에 나오는 하나의 글귀가 적혀 있었다. ‘하나의 생명을 구하는 것은 세계를 구하는 것’ 이라는 글귀이다. 아다. 어쨌든 끝까지 다 본 후에는 정말 감동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부러 쉰들러리스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알아보지 않고 보았다. 내용을 미리 파악하면 내용이해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집중도도 떨어지고 나만의 시각으로, 생각으로 보는데 지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엔 이해하는데 좀 어려웠으나 그것은 처음의 잠시뿐이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재미있어졌다. 여기서 내가 생각하기에는 중요한 인물이 4명이다. 물론 첫째는 쉰들러이고 다음은 이작 스턴 다음은 아몬 커트 그리고 마지막으로 헬렌 허쉬이다. 그럼 나는 이 인물들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면서 영화에 대해 내가 느낀 것을 이야기 할까 한다.가장 중요한 인물인 쉰들러는 인간다운 사람이다. 난 처음에 쉰들러가 유대인의 등을 쳐서 돈을 벌려는 사기꾼인줄로 알았다. 처음에는 그런 면이 전혀 없진 않았던 것 같지만 아무튼 쉰들러는 참으로 인간적인 사람이다. 그리고 뛰어난 입담과 수완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없었더라면 그 많은 유대인을 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중에는 그다지 행복하게 산 것 같지는 않지만 쉰들러는 유대인을 구할 때 정말 행복했다. 그는 전혀 생산이 안되는 공장을 둘러보면서도 전혀 인상이 나빠지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며 유대인의 안식일을 챙기었다. 그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이순간이 아니었을까? 영화 초반에서 쉰들러는 이런 말을 한다. 잔인하게 사람들은 죽이는 군인을 보고 전쟁시라서 악한면만 드러나는 것이지 실제로 평화로운 상태였다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고 선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고 한다. 이 말에는 일리가 있는 것 같다. 얼마 전 이라크에 간 미군들만 보아도 그렇다 일반 민간인이었을 때는 그렇게 착실하던 사람이 거기 가니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도어 이라크인을 사람이 아닌 동물처럼 대한 것은 그 미군이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사람은 상황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오죽하면 우리나라 속담에는 화장실 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맘이 다르다는 속담이 있을까. 그렇다..
전족이란 것을 한 번쯤은 누구나 들어보았을 것이다. 나 또한 전족에 대해 막연하게 발을 작게 만들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작은 신발을 신기고 그것으로 인해 멀리 다니지 못하게 하였다고만 들었고, 그렇게 알고 있었다. 우스운 얘기지만 어릴 적에는 그런 얘기를 듣고 중국에는 여자가 많지 않아서 여자를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었다. 커서도 전족에 대한 나의 생각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저 조금 힘든 과정을 거쳐 전족을 하고 그것이 미의 기준이었다는 정도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중국여성의 슬픔-전족의 역사를 읽고 많은 것을 새로이 알게 되었고, 놀랐고, 생각하게 되었다.먼저, 전족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보겠다. 전족이란 여성의 발을 인위적으로, 기형적으로 작게 만드는 것으로 10세기 후반에 도입되어 20세기 초까지 존속했다. 놀랍게도 무려 천 년이나 이런 악습이 행해졌던 것이다. 이런 전족은 어린아이가 대여섯 살이 되면 시작하는데 그 고통은 형언할 수 없다고 한다. 한창 자라고 있는 어린아이의 발을 억지로 구부려 메는 것도 매우 고통스러운 일일텐데, 그것을 하고나서 계속 걸어 다녀야 했다고 하니 그 고통은 어느 정도일까. 하지만 이런 고통을 참아가며 걸어야 후에 어느 정도 걸을 수 있지 아프다고 걷지 않으면 평생 걷지 못할 수도 있다. 뒤에 말하겠지만 이런 점은 여성을 남성에게 의존하는 존재로 만드는 바탕이 되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억지로 메어놓은 발은 서서히 죽어가서 겨울에는 항상 동상이 걸렸고 여름에는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고름이 줄줄 흘러 악취를 풍겼다. 발을 맨 붕대는 3~4일에 한 번씩 풀고 새 붕대로 갈고 더 꽉 조여 맨다. 그러기를 꼬박 몇 년 동안 해야 완성되는 것이 10cm정도의 예쁘다고 생각되던 발-내 생각에는 전혀 예쁘지 않은-이다. 이런 비인간적이고 믿기 힘든 관습은 20세기 초까지 존속했다.이 전족의 기원을 두고는 여러 설이 있으나 당대 이전에는 전족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작은 발을 아름답게 여기는 미 감각은 존재했었다. 특히 문학작품에서는 작은 발을 아름답게 찬미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오대(五代)때 궁중에서 후궁이 비단으로 발을 졸라매고 춤추던 모습이 너무 인상 깊어 그것이 궁중에 퍼졌고 북송말기에는 민간에 퍼져 작품 속에도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전족용 신발인 궁혜(弓鞋)의 탄생도 한몫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명청시대에는 전족이 지배계층뿐만이 아니라 일반민중에까지 전족이 확산되고 한족, 소수민족들과 명의 뒤를 이어 지배하던 만주족까지도 전족을 폐지하려다 자신들도 하게 된다.이 전족이란 것이 이렇게 널리, 오랜 시간동안 행해진 것은 단순히 ‘여성의 아름다운 발’ 이라는 전족 문화보다는 그 속에 무언가가 더 있기 때문이 아닐까.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전족이 확산되었던 송대에는 여성의 지위에 있어서 매우 큰 변화가 있는 시기라는 것이다. 송대에는 이학 내지 정주학이 발전되면서 여성의 지위가 매우 하락하였고, 이 시기는 전족이 확산된 시기와 맞물리게 된다. 여기서 전족이 의미하는 것을 몇 가지 살펴보아야 한다. 첫 번째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전족은 남성들의 성적인 욕구가 반영되어 있다. 고통으로 만들어진 작은 발은 남성들에게 애처롭고 앙증맞은, 성적인 상징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발은 가장 은밀한 부분이 되었고 남성에게 발을 내맡긴다는 것은 자신의 육체와 모든 것을 허용한다는 의미까지도 되었다. 또 전족을 한 여성은 걸을 때 작은 발이 불편하여 뒤뚱거리며 걷게 되고 이것은 불가피하게 엉덩이 근육을 발달시켜 성행위시 성감을 증폭시킨다고-어이없게-생각하기도 하였다. 소설에서도 성의 매개물로 전족이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두 번째로 전족은 여성들의 활동력을 통제하였다. 이런 통제로 인해 여성은 철저히 남에게 의존하는 존재가 되었다. 전족을 한 여성은 발을 보이면 안되기 때문에 긴 치마를 입어야 했고 먼 거리는 반드시 남의 도움을 받아야 갈 수 있을 정도로 걷는데 불편했다. 또한 전족을 한 발로는 생산이나 노동을 할 수 없어 주체적인 인격을 가지기 힘들었다. 그래서 여성은 인간이라기보다는 관상물 내지는 애완동물로 여겨지게 된다. 또한 이런 것들은 활동 공간을 규방으로 제한하게 하였고 여성에게 생리적으로 결함을 줌으로써 자신감을 상실하게 하였으며, 철저히 남에게 의존하도록 하였다. 이 결과 전족은 여성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의미를 가졌다. 세 번째로 전족은 신분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위에서 말했듯이 전족을 한 여성은 노동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은 다시 말하면, 그 사람이 생산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하였기 때문에 노동을 안해도 되는 신분을 상징하기도 하였다. 또 용모는 의지와는 상관없이 선천적으로 주어지지만 전족은 순종적인 성향과 가정의 훈육을 보증하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래서 남자들은 발이 큰 여인과 혼인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전족은 여성에게 있어 유아 때부터 성년, 그리고 그 이후로도 평생을 구속하는 요소였다.이렇게 여성의 통제 역할을 하였던 전족은 당연히 그것을 즐기는 남성들로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전족은 글을 쓰는 문인들에게는 찬탄의 대상이었고 명청시대에는 성적으로 농후해진 전족의 모습을 문학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또한 이때에는 전족애호가임을 자임하고 전족의 품격을 논하는 논객들까지 출현하게 되었다. 이에 맞추어 현재의 미인선발대회처럼 전족미인선발대회까지도 있었다. 이만큼 전족은 중국인의 생활에 일부가 되어있었다.물론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북송말엽부터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전족의 반대는 흐지부지해졌고 원대, 명대를 지나면서는 유력한 지식인들 사이에서 전족에 대한 반대론자들이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민족 출신의 왕조인 청조에서 전족에 대한 반대론이 시도된바 있으나 거센 반발로 인해 전족 습속은 용인되고 부분적으로는 자신조차 채용하기에 이르렀다. 이랬던 전족에 대한 반대가 다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개항전후 시기의 서구의 영향이 미치면서부터이다. 중국에 도래한 서양인들도 전족에 대한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청말에는 전족을 반대하는 이른바 천족운동(天足運動)이 일어난다. 1850년대의 태평천국운동에서는 전족금지를 실행에 옮겼으나 태평천국운동이 실패로 끝나면서 천족운동도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특히 1898년 무술개혁운동을 계기로 전족반대운동은 거세어졌고 1902년에는 청정부가 공식적으로 전족금지령을 반포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여기에 학교와 교회의 힘으로, 민간에서도 천족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20세기 초에는 민관(民官)의 노력으로 천족운동이 큰 발전을 보인다.하지만 천족운동에는 혼인이라는 본질적인 제약이 있었다. 그것은 남성들이 전족을 한 여자와만 결혼을 해야 한다는 낡은 인식을 가지고 있는것인데 그것으로인해 천족운동은 한 발 후퇴해야 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의식의 개혁이 필요했고 이것은 5?4 운동을 통해 실현되었다. 이러한 끊임없는 과정을 거쳐 전족은 서서히 도시부터 없어져갔다. 그 후 1930년대 까지도 일부지역에서 전족이 행해지기도 하였지만 1930년대 말엽에는 기본적으로 전족은 자취를 감추어버린다.전족이라는 것은 결국 궁중에서 무희와 가기(歌妓)로부터 시작되어 상류층 규방에 그리고 시대가 지나면 농민층에까지 확산되었다가 또다시 시간이 흐르고 오랜 노력으로 상류층에서부터 없어진 것으로, 이 과정은 천년을 두고 일어났다. 이런 글을 읽으면서 내 얼굴은 쉴새 없이 찌그러들었고 온몸에 소름이 돋기도 하였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이런 일들이 실제로 몇 십 년 전까지 일어났다는 사실에 한 번 더 놀랐다. 물론 만약 내가 명청시대에 중국에서 여자로 태어났다면 나도 역시 전족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만약’이라는 가정하이고 결코 생각하고 싶지 않은 ‘만약’이다. 나는 전족이라는 것이 남성들에게 그들이 만들어낸 허상의 그리고 끔찍한 아름다움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전족은 썩어 문들어지고 괴상하게 생긴 발을 가지고 성적인 상상을 하며 여자를 독립된 하나의 인격체로 생각하지 못한 남성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분명 남성들도 그 전족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았을 텐데 거기에 대해서는 느낀 것이 없는 지 정말 궁금하다. 전족을 하는 철이 되면 아침, 저녁으로 여자 아이들이 우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렸다고 하는데, 그 소릴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정말 궁금하다.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생각했다면 당연히 ‘전족’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겠지만 말이다. 물론 내가 만약 그 시기에 중국에서 남자로 태어났다면 나도 전족을 원하고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그 시대의 문화를 탓해야지 사람은 하나도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행동은 분명 사람이 했는데...
< 조선시대 궁중의 식생활 문화 >1. 머리말2. 문헌을 통한 궁중 음식의 전승1) 일상식에 대한 문헌자료2) 궁중의 영접과 가례 의궤3) 궁중 음식 발기3. 궁중 음식 관련 관청1) 이조2) 호조3) 예조4) 주방4. 궁중 음식 조리인5. 궁중 음식의 분류1) 일상식2) 의례식3) 시절식4) 천신6. 맺음말1. 머리말우리나라는 아시아 동부에 위치하여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반도이며, 사계절의 구분이 뚜렷하고 기후의 지역적인 차이가 있다. 이런 자연 환경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수산물, 축산품 등의 재료는 다양하게 지역적 특성을 잘 살린 음식들이 고루 발달하게 하였다. 한반도에서는 BC 6000년쯤부터 신석기 문화가 시작되어 이때부터 신석기인들은 고기잡이와 사냥을 주로 하였으며 후기에는 원시 농경생활로 점차 바뀌었다. 이후 BC 2000~1500년에는 벼의 재배도 시작되었고 밥이나 떡, 술 같은 단순한 조리음식도 행해졌다. 한편 우리 조상은 중국에서 전래된 농작물 외에 콩을 처음으로 재배하였으며 이것은 중국과 일본에 전해져 동북아 세 나라가 세계 조미료의 분포상 콩장 문화권을 이루게 하였다.)삼국시대에는 철기의 발달로 농경기술이 혁신되어 벼농사가 크게 보급되었고 불교문화가 들어오면서 살생을 금하고 육식을 못하는 계율로 식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다.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더욱 융성해져서 육식습관은 쇠퇴하고 사찰음식이 발달하였다.) 또한 불교가 융성함에 따라 부처님께 차를 바치는 헌다의 예와 풍류로 차를 즐기는 습관이 성행하고 다기(茶器)도 매우 발달하였으며 다도(茶道)의 예절도 생기게 되었다. 또한 고려시대 전반기에는 권농정책(勸農政策)으로 농업이 성하였고, 농경기구의 개선에 힘썼으며 곡물을 비축하는 제도가 실시되었다. 고려시대 중기 이후에는 승려보다 무관의 세력이 강해져 사회풍조에도 변화가 생겼다. 이에 따라 육식의 습관이 다시 대두되었으며, 몽고의 침입과 원나라의 교류가 빈번해지고 설탕, 후추, 포도주등이 교역품으로 들어왔다.) 고려시대에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가 있다. 이것은 1700년대의 일상식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의궤로 권수 5권 부록 4권 합 8책이다. 그 내용은 왕과 자궁(慈宮,혜경궁 홍씨)여형제들이 창덕궁을 출발하여 화성에 가서 진찬(進饌)을 베풀고 다시 환궁할 때까지 8일간 대접한 식단이 4권 찬품(饌品)조에 대한 것이다. 행로 중에 궁중의 수라간이 이동하면서 마련한 행행식(行幸食)으로 특히 일상식에 해당하는 수라상과 죽상, 응이상, 고임상, 그리고 다과상에 해당하는 다소반과(茶小盤果)가 실려 있다. 이를 통하여 1700년대 수라상 차림이 조선 말기 궁중의 마지막 주방상궁인 한희순)을 비롯한 생존의 상궁들이 전하는 12첩 수라상의 형식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2) 영접과 가례 의궤중국의 사신을 접대하기 위하여 영접도감을 설치하고, 도감에서 하는 일의 전말을 기록한 등록과 의궤에는 영접 절차와 각종 의식 및 이에 소요되는 물품 조달, 인력 동원 등에 관한 제반 사항이 기록되어있다. 영접도감 의궤와 등록은 현재 20종이 전해지고 있다. 왕실의 혼례는 국혼(國婚)이라는 단어로 일괄되지만, 이는 가례(嘉禮)와 길례(吉禮)로 나뉜다. 가례는 왕의 결혼을 위시하여 세자, 세손 등 왕통에 관계있는 경우이고, 길례는 일반 왕자녀의 혼례를 말한다. 가례는 왕의 혼례와 즉위, 왕세자의 혼례, 책봉(冊封) 등의 의례로 가장 경사스러운 의례이다. 가례의 경우 가례청 또는 가례도감이 설치되어 혼례에 따르는 여러 의식 절차를 거행한다. 동뢰연(同牢宴)의 의식이나 찬품을 알아볼 수 있는 궁중 혼례의 과정을 기록한 가례도감 의궤가 약 20종 남아있다. 영접식 의궤와 가례식 의궤는 이성우 교수가 쓴 『조선왕조행행식 가례식 영접식의궤』(미원문화재단부설 한국음식문화연구원, 1988)에 축소 영인되어 모두 실려 있다.3) 궁중 음식 발기궁중 음식 발기(發記, 撥記)란 여러 소규모의 접대식이나 제사식 등의 궁중 의례에 사용되는 물품과 수량, 상차림 등을 적어둔 고문서로 한자로 건기(件記)나 단자(單子(昭格署)술과 감주빙고(氷庫)얼음 창고전생서(典牲暑)제사에 쓸 희생(犧牲:제사에 올리는 날고기)의 사육사축서(司畜署)제물(祭物)이 아닌 여러 가지 짐승을 사양하는 일4) 궁중의 주방관청이라고 하기엔 조금 어색하지만 식문화에 있어서 주방은 관청보다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궐내에서는 왕, 왕비, 대왕대비, 세자는 각각 대전, 중궁전(왕비전), 대비전, 세자궁의 전각에서 기거했다. 일상의 식사는 각 전에 딸린 주방에서 담당이 정해진 벼슬아치나 차비들이 만들어 올렸다. 왕과 왕비는 침전에서 수라를 드신다. 왕과 왕비의 수라를 만드는 곳을 수라간(水刺間) 또는 소주방(燒廚房)이라고 하며 별채에 배치되어 있다. 창덕궁의 수라간은 침전인 대조전(大造殿)과는 상당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수라상을 올릴 때는 배선실(配膳室)에 해당하는 퇴선간(退膳間)에서 상을 차리고 물린 상을 정리한다. 생과방(生果房)에서는 후식을 만들어 올린다. 그럼 주방의 구성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다.안소주방(內燒廚房)은 왕, 왕비의 평상시의 조석(朝夕) 수라상과 낮것(點心)주식에 따르는 각종 찬품(饌品)을 맡아 한다. 식전의 자리조반), 낮것, 야참 등을 생과방과 협조하여 올린다. 자릿조반으로는 응이, 잣죽, 깨죽, 타락죽 등의 유동식을 차리고, 낮것은 국수를 만 장국상이나 다과를 내고, 야참은 수정과, 식혜, 과실 등을 낸다. 밖소주방(外燒廚房)은 주로 궁중의 크고 작은 잔치 음식을 장만하는 곳으로 평상시의 일상식을 만드는 안소주방과 대조된다. 여기서는 궐내의 대소 잔치는 물론 윗분의 탄일에 잔칫상을 차리며 차례, 고사 등도 담당한다. 왕자녀의 백일, 탄일에 는 백설기를 몇 십 시루씩 쪄서 궁내의 각 궁에 돌리고 종친과 외척에 골고루 돌리는 일도 담당했다. 생과방(生果房)은 평상시의 조석 식사인 수라 이외에 후식에 속하는 것, 즉 생과, 숙실과, 조과, 차, 화채 등을 만든다. 조석 수라상에 소주방 내인을 도와서 함께 거행하며, 잔치 음식의 다과류도 이곳에서 관장한다. 퇴선간(退膳間)은 수라간에매상으로 장국상 또는 다과상이다. 세 번의 식사 외에 야참으로는 면, 약식, 식혜 또는 우유죽(酪粥) 등을 올렸다. 현재 전하여지는 수라상의 차림은 한말 궁중의 상궁들과 왕손들의 구전에 의해 전하여진 것으로 조선시대 전반에 걸친 수라상 차림이라고 할 수 없다.『영조실록』에는 ‘대궐에서 왕족의 식사는 고래로 하루 다섯 번이다’라고 적혀 있으나 영조는 검박(儉朴)하여 오식(午食)과 야식(夜食)을 두 번 줄여서 하루 3회로 하였다고 한다.궁중의 일상식에 대한 문헌 자료는 연회식에 관한 자료보다 훨씬 부족한 형편이다. 그 중 유일하게 궁중 일상식을 알 수 있는 문헌으로『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가 남아있다. 정조 19년(1795)에 모후인 혜경궁 홍씨(사도세자빈)의 갑년(甲年, 회갑)을 맞아 화성(華城)의 현융원(顯隆園)에 행차하여 잔치를 베푼 기록이다. 이 의궤는 왕과 자궁(慈宮, 혜경궁 홍씨)과 여형제들이 한성 창덕궁을 출발하여 화성에 가서 진찬(進饌)을 베풀고 다시 환궁할 때까지 8일간 대접한 식단이 자세히 실려 있다. 그 당시는 18세기 후반으로 한말보다 약 1세기 앞선 시대인데 수라상을 비롯하여 음식의 내용이 구한말과는 아주 다른 것을 알 수 있다.궁중의 일상식은 왕의 인생관에 따라서 사치스럽게 산해진미(山海珍味)를 즐기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검박을 몸소 시범하는 현주(賢主)의 경우도 있다. 임금에 따라서 수라상의 규모가 다르나 한말에 전해진 수라상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① 수라상궁중에서는 이른 아침에 보약을 드시거나 또는 미음, 응이를 드시고 아침 수라(朝水刺)는 10시가 지나야 드시고 저녁 수라는 저녁 5시경에 드신다. 평상시의 수라상은 수라간(水刺間)에서 주방 상궁들이 만들어 왕과 왕비께서 각각 동온돌과 서온돌에서 받으시며 결코 겸상을 하는 법은 없다. 그리고 왕족인 대왕대비전과 세자전은 각각의 전각에서 따로 살림을 하며 거기에 딸린 주방에서 만들어 올린다. 수라상에 올리는 찬물은 왕의 침전과 거리가 떨어져 있는 수라간에서 만들어서 지밀에 부속 소금이나 새우젓국으로 간을 맞춘 찌개이다.③ 낮것상점심(點心)은 ‘낮것’이라 하여 평소에는 마음에 점을 찍을 정도로 가벼운 음식인 응이, 미음, 죽 등의 유동식이나 간단한 다과상을 차려서 올린다. 왕가의 친척이나 손님들이 점심시간에 방문한 때는 국수장국이나 다과상을 차려서 대접한다.④ 면상(麵床)탄일이나 명절에는 면상인 장국상을 차려서 손님을 대접한다. 진찬이나 진연 등 궁중의 큰 잔치 때는 병과, 생실과와 찬물 등을 고루 갖추어 높이 고이는 고임상(高排床)을 차린다. 실제로 드시는 것을 입매상으로 국수와 찬물을 차린다. 면상에는 여러 병과류와 생과, 면류, 찬물을 한데 차린다. 주식으로는 밥이 아니고 온면, 냉면 또는 떡국이나 만두 중 한 가지를 차리고 찬물로 편육, 회, 전유화, 신선로 등을 차린다. 면상에는 반상에 오르는 찬물인 장과, 젓갈, 마른찬, 조리개 등은 놓이지 않으며 김치는 국물이 많은 나박김치, 장김치, 동치미 등을 놓는다.2) 의례식① 궁중의 연회식궁중에서는 일 년 내내 특별한 행사가 빈번하게 있다 연례적인 행사로는 정월, 단오, 추석, 동지 등의 명절과 궁내의 왕족들의 탄일을 비롯하여 궁 밖에 사는 종친들의 생신 등이 있어 대소 잔치가 열렸다. 규모가 비교적 작은 잔치는 탄일, 왕손의 관례나 다례, 병 회복 등 경사가 있을 때에 수시로 베풀어졌다. 국가적 행사나 왕이나 대왕대비의 육순, 칠순 등의 큰 경사가 있을 때는 대규모의 잔치가 베풀어졌다.② 진연과 진찬조선시대에 궁중에서는 왕, 왕비, 대비 등의 회갑(回甲), 탄신(誕辰), 4순(旬), 5순(旬), 망(望)5(41세), 망(望)6(51세) 등이 특별한 날이다. 이들이 존호(尊號)를 받거나 왕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거나 왕세자 책봉, 가례(嘉禮) 등과 외국의 사신을 맞을 때 등의 국가적인 경사가 있을 때 왕의 윤허(允許)를 받아 큰 연회를 베풀었다. 잔치의 규모나 의식 절차에 따라 진연(進宴), 진찬(進饌), 진작(進爵), 수작(受爵) 등으로 나뉘는데 진찬은 나라에 행사가 있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