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념처관과 오정심관사념처관과 오정심관은 초기불교의 기본적인 수행방법으로 인간과 세상간의 관찰에서 나오는 마음을 아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즉, 차를 마시는 것과 차를 마시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의 차이를 앎으로써 차를 마시는 행위와 인식이 하나됨으로써 자유롭게 하나가 되는 수행방법이다.사념처관은 대상을 알아차림, 관찰함, 응시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포괄적인 수행방법이다. 四念을 파자하여 보면,먼저 四은 알아차림, 관찰함, 응시함의 대상을 말한다. 첫 번째는 身은 몸을 알아차리는 것(관찰하는 것), 受는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관찰하는 것), 心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관찰하는 것), 法은 의식의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관찰하는 것)을 말한다.念을 살펴보면, 마음이 지금에 머뭄, 마음은 지금을 지나가는 것을 앎, 집중, 알아차림, sati라는 의미가 있다.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①身은 內身(안의 몸), 外身 (밖의 몸), 內外身(안밖의 몸)으로 나눌 수 있다. 방법은 바라봐주거나 관찰하여 주는 대상은 문제 있는 장기로써 이 방법의 목적은 현재의 나와 나 아닌 것의 경계를 나누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眞實相(진실된 모습)으로는 나와 나아닌 것을 구분할 수 없는 것이 존재의 본질이다.②受의 종류는 樂受(즐거운 느낌), 苦受(괴로운, 슬픈 느낌), 不苦不樂受(즐겁지고 괴롭지고 않은 느낌)으로 나눌 수 있으며, 受의 대상은 內(안), 外(밖), 內外(안과 밖)으로 구분할 수 있다.受(느낌)의 종류가 영원하지 않은 것을 無常이라 한다. 여기서의 無常은 물리적 변화로써 항상 변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존재의 진실상을 보는 훈련으로 매 순간의 관찰, 매순간의 알아차림으로 훈련하는 것이다.受(느낌)의 대상을 구분하는 궁극적 목적은 나와 나 아닌 것을 달리하지 않고/거부하지 않고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바라보는 것속에서 진실이 나오는 것이다. 자신의 주도적인 삶, 자신의 몸, 생각의 변화를 바라보고 주변에 휘둘리지 않고 동화(一如)되는 것이다. 이때 이기거나 정복각, 잡념④法(개념) : 의식의 대상, 생각의 대상개요오정심관은 어떤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일시적인 방편일뿐이며 끊임없이 스승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오점심관의 종류는 부정관, 자비관, 인연관, 계분별관, 수식관으로 나눌 수 있다.1.不淨觀1)깨끗하지 않은 욕망(삼독 중 탐욕)을 대상으로 하며, 이 욕망을 관찰하는 수행법으로 이 욕망의 滅(오욕락에 대한 욕망의 극복)을 목적으로 한다. 즉, 몸에 대한 비관이 목적이 아니다.즉, 나의 욕망을 내가 확인하는 것이다. 나의 욕망을 관찰(알아차림)을 하지 않고 방치해두면 언제 어떻게 튈지 알 수 없다. 이러한 욕망이 특정 조건, 상황과 만나면 욕망이 일어날 때 어떤 느낌이 있는지를 관찰하면 일어나는 욕망이 시들해진다.2)부정관법의 종류a.내관과 외관의 썩고 더러운 것에 대한 관찰을 함으로써 우리 자신 속에 일어날 수 있는 컴프렉스가 허상일 수 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법.b.고통이 일어나는 몸과 마음의 느낌을 통해 우리 몸이 부정(不淨,不定)함을 알아차리는 수행법.여기서 不定은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없다는 것으로 無常의 의미를 담고 있다. 즉, 나라는 경계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가령 똥을 예를 들면,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고,식도를 지나서, 위를 지나고, 소장을 지나, 대장을 지나서 똥이 된다면, 각각의 위치에 있는 것들은 나와 나 아닌 것으로 구분하는 경계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수 있다.c.자세한 비교를 통하여 부정하다는 것을 관찰함으로써 자신의 자만심을 없애고, 나와 나아닌 것에 대한 긍정적인 비교를 하게 된다. (?)d.어떤 사람에게 똥을 관찰하는 것이 심념처일 뿐일 수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심념처이기도 하고 법념처가 될 수 있다.3)부정관의 폐단우리 몸은 결코 아름답고, 부드럽고, 건강함이 영원하지 않다. 실제 모습이 어떤지를 바라보라. 고대 인도 고행자 중 이에 비관하여 자살하는 경우가 있었다. 왜냐하면 몸이 깨달음에 장애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차라리 몸이 업슨 것이 낫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와 남, 일체 존재에게 사랑을 함께 나누는 것이고, 悲(슬플 비)는 남의 고통, 어려움을 함께 슬퍼하는 것이다. 즉, 慈는 사랑나누기, 悲는 고통가져오기이다. 慈는 사랑나누기는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다. 물질적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도, 의식적으로없어지지 않으면 자신의 것이라는 것들에 대한 애착을 버릴 수 없게 된다. 사랑나누기 수행을 통해 의식 속에서 나라는 것을 없애는 연습을 할 수 있게된다. 보살의 길은 남의 고통가져오기, 남의 고통없애기을 말하는 것이며 남의 고통을 가져오면 자신은 離苦得樂(고통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게 된다)하게 된다. 자비관을 나타내는 다른 말로는 拔苦與樂(발고여락))이 있다.우리는 자비관을 통하여 나에게 어떤 화가 나는지를 알아야 한다. 나에게 일어나는 화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궁극적으로 자비관 수행법을 통해서 자신을 보살피는 에너기가 생기게 된다.2)자비관법의 목적: 善法은 증장하고, 不善法은 억제하는 것.(1)칠불통계(七佛通戒)- 과거칠불(過去七佛)의 공통된 가르침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행을 받들어 행하라, 그 뜻(생각)을 스스로 밝혀라. 이것이 모든 깨달은 자의 가르침이다.)(2)정정진이란 무엇입니까?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악행은 일어나지 않도록② 이미 일어난 악행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도록③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행은 일어나도록④ 이미 일어난 선행은 거듭거듭 생기도록 노력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4 가지3)자비관법 (화관찰법)의 방법①어떨 때, 나에게 화가 생겨나는가?②생겨난 화가 어떻게 진행되는가?③어느 시점에 화가 사라지는가?4)화의 풀이(단계)왜 화가 났을까? 무엇이 나의 자존심을 건드렸을까? 내가 화가 나는 순간 무엇이 나에게 아픔을 주었을까? 왜 상대방이 나의 자존심을 건드렸을까? 상대방의 상황을 바라보고, 상대방과 나의 입장을 생각해본다.①화가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관찰한다.②화가나는 상황을 벗어난다③의식적 호흡으로 방금 전 상황을 바라본다(관찰한다)즉상황)→나의 어떤 요인/상대방의 어떤 상황)5)화의 풀이 효과서로가 가해자/피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서로에게 연민이 생긴다. 서보 보살펴 줄 사람이다라는 자비심, 사랑이 생기게 된다.6)화의 관찰만으로도 지혜이다.화를 관찰, 극복한다는 것의 바탕에는 ‘지혜’가 있다. 화가 나는 것은 지혜를 얻을 수 있는 chance를 갖게된다는 것이다. 화가 나는 것을 오직 바라보기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지혜’이다.7)화 안에는 습관적 인자가 내재되어 있다.①화 안에 내재된 습관적 인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드러난다. 화는 습관적 인자(뿌리)가 어떤 기회와 마주치면, 상대방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어떤 욕망이 습관적 인자와 마주칠 때 ‘화나는 상황’이 전개된다.②그 예로는 프롬빌리지에 명상프로그램에 참석한 어떤 남성은 자신의 의지와도 모르게 자신의 동생에게 폭력을 행사하려고 하였던 순간을 알아차렸을 때, 자신에게도 그러한 행동을 한 아버지의 아픔을 느끼게 된다. 즉, 아버지 또한 피해자라는 것이다. 그동안 아버지가 피해자인지를 모르고 단지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만 한 것을 알게 되었다.3.因緣觀인연관은 무지와 어리석음)을 대상으로 하며 무지와 어리석음의 滅을 목적으로 한다. 즉, 모든 존재는 서로 상호관계, 상호영향을 상대적인 관계임을 알고 이것에 대한 관찰을 함으로써 행동을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우리가 말하는 無知는 육근과 육경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이러한 고정관념이 강할 때 인연관수행을 하게 된다. 즉, 나라는 생각이 어떻게 갖고 있는지를 확인하여 준다. 육근과 육경의 접촉을 통해 상호관련성을 통해서 ‘나’라는 것을 육근과 육경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 간다는 것을 확인한다.결론적으로 나라는 것은 육경(색성향미촉법)의 영향을 받으며 변화되어 가는 것이다라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다. 육경, 즉, 모든 세계는 우리에게, 나에게 알려진 만큼의 세계이다. 끊임없이 세계와 교류하면서 나도 변한다. 그리고 세계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한다. 즉, 인연관은 변화하意(정신)가 있는 것은 육체와 정신이 함께 한다는 것이며, 육경에 法(관념)이 있다는 것은 세계와 관념이 함께 한다는 것이다.즉, 자신과 세계가 어떻게 형성되어가는가를 알려준다.4.界分別觀1) 육근관찰이 우리를 중심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라면, 계분별관은 나보다는 세계(자연)에 중점을 두고 우리를 바라보는 관찰법으로 이를 part별로 나누어서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2)界의 구분즉, 界를 地,水,火,風,空,識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다.여기서 地,水,火,風을 四大를 말하며 나를 구성하는 4가지의 큰 요소이다. 사대중 하나가 망가지면 하나의 병이 생긴다. 사대 모두가 망가지면 404가지의 병이 발생한다. 空은 허공, 공간등의 요소로 지수화풍에 암묵적으로 차지하고 있는 요소이며, 識은 자연과 인간의 상호만남, 물질과 정신의 만남으로 알아차림, 분별, 판단함, 인식함을 말한다. 즉, 地를 地라고 알아차림, 水를 水라고 알아차림, 火를 火라고 알아차림, 風을 風이라고 알아차림이다. 이때 알아차림은 물질과 정신이 하나가 된다는 활동(識)속에서 있게 된다.3)각각의 성질각각의 성질을 알아보면, 地는 단단함, 근본을 지탱하는 것, 묻어둠,고집, 집착이고, 水는 시간, 넉넉함, 여유, 유여함이며, 火는 스트레스, 분노, 욕망, 열정, 의욕이고, 風은 흔들림,불안감, 우유부단(결정하지 못함), 자유, 분방, 걸림없음(무애행)이며, 空은 비워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것, 비워야 새로운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識은 판단, 분별, 이것은 내가 좋아한다. 싫어한다. 생각, 알아차림, 나와 대상이 둘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음(이어졌음)을 알아차림이다.4)계분별관의 종류(1)내부적 계분별관:육근-육경의 관찰육근과 육경이 만나는 속에서 일어나는 마음이 고정되어서 점차 하나의 의식으로 존재하게 됨. 나와 세계의 부분이 만나는 부분에서 일어나게 됨.(2)외부적 계분별관:자연속에서의 관찰地(돌,바위,산,평아, 나는 이것을 왜 좋아하는지),水(호수,강,폭포,시냇물,비),火(촛불,태양),風(허다.
니체의 '신의 죽음'과 불교철학의 무신론에 대하여 비교 서술하시오.1)니체의 '신의 죽음'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다. 현대철학은 니체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니체 철학의 문제는 니체 이전에 있었던 다시말해 니체가 1900년도에 죽는 20세기 초를 기점으로 1900년도 이전을 근대라고 하고 1900년도 이후를 탈근대라고 한다. 니체는 근대와 탈근대의 접점에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있다. 니체 사상은 근대적인 사상과 탈 근대적인 사상을 같이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근대라고 할 때 근대는 항상 他子에 의미를 두고 있었다. 他子라고 할 때 중심에 있는 것은 자아와 이성이다. 자아라고 이성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거사이다. 탈아적이다. 자아라고 부터 벗어나는 것이 니체철학으로 부터 나온다. 그래서 니체철학은 현대철학의 맹아라고 한다. 현대철학의 의미는 데카르트의 근대철학은 죽고 니체의 현대철학이 태어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아가 아닌 타아적인 개념으로 간다는 것이다. 나중에 이런 것들이 脫我, 비이성주의로 나타나 현대철학에서 이성이라는 신비적인 것들이 사그라진다. 그러면서 비이성주의에 근거하여 나타난 것이 현상론(실존주의)이다. 이성에 반하는 것,여기서 현상이란 실존주의를 말하며 나중에는 이성의 해체로 나아가고 현대에는 인지과학으로 나타나고 있다.니체가 말하는 것은 기독교의 반대의 입장에 서서 기독교 사상이 그리스 정신을 모두 죽여버렸다는 것이다. 그리스의 창조적인 문화, 사상이 중세 근대를 통하여 죽어졌다고 말하고 그것의 회복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대표작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니체 자신의 이성적인 분신을 말하며 신랄하게 기독교의 사상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니체 철학의 기초를 살펴보면 그리스의 비극정신은 삶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삶을 기꺼이 긍정하는 정신을 말하며 이것울 긍정적인 허무주의라고 한다. 사실 허무주의는 삶의 가치가 없다고 삶을 부정하고 배제하는 것이다. 내가 살아서 뭐하냐 인생에 대하살하게 된다. 자살의 의미는 극단적인 삶의 가치를 상실하였을때 선택하는 것이 자살이다. 불교에서는 자살을 니체 철학의 기초를 살펴보면그리스의 비극정신은 삶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삶을 기꺼이 긍정하는 정신을 말하며 이것울 긍정적인 허무주의라고 한다. 사실 허무주의는 삶의 가치가 없다고 삶을 부정하고 배제하는 것이다. 내가 살아서 뭐하냐 인생에 대하여 삶에 대하여 비극적인 가치관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희망을 놓는 것이다. 가치상실이 되고 자기학대, 자기함몰하고 궁극적으로 자살하게 된다. 자살의 의미는 극단적인 삶의 가치를 상실하였을때 선택하는 것이 자살이다. 불교에서는 인위적인 자살보다는 자연사되는 것을 더 좋다고 본다. 불교적으로 자살이라는 것이 해석이 되어야한다. 니체가 말하는 허무주의란 신의 죽음으로 나타나는 허무주의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니체의 긍정적 허무주의 자체가 신의 죽음이다. 즉, 기독교에서의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에 대한 부정이다. 천국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를 주장하는 것이다. 신의 죽음을 갈파하면서 허무주의가 되는 것이다. 그냥 신의 죽음을 이야기하면 가치적 기준, 철학적 기준이 사라지는데, 니체는 이를 긍정적인 개념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삶이 고통스럽지만 이 삶이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긍정적인 허무주의이다. 신의 죽음을 통하여 반기독교사상을 주장하게 된다. 기독교사상은 이성인 반면 반기독교적인 니체사상은 반이성주의가 된다. 근대의 이성은 사유의 권력이었다. 즉 사유하기 때문에 권력을 가지고 있고 이것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권력이 된다. 근대의 이성이란 권력성이다. 이런 것을 부정하는 것이 니체 사상의 기본이 된다.그러므로 이 세계의 삶은 신이 아닌 인간이 끌고 가는 것이다. 이때 인간은 그냥 인간이 아닌 초인이 된다. 여기서 초인은 신과 같은 존재가 되고자 하는 인간이다. 즉, 근대부터 갖고 있던 사유의 권력은 놓치는 않겠다는 말이다. 신을 대신하여 인간이 지배하게다는 것이지만, 신의 능력을 가진 완전한 인간으로 초인의 출현을 갈구하는 것이 니체 사상의 핵심이다.르네상스나 종교개혁의 사상을 부정하고 초극하고자 한 것이 니체의 사상이다. 니체는 유일신사상에 대한 반동으로 그리스철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기독교의 이성에 대한 반감으로 새로운 사유의 추구이다. 자연주의적 철학은 전개시키는 그리스적 철학의 문제는 신을 부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신의 의미는 항상 긍정하는 것이다. 그리스적 신은 중세의 유일신이 아닌 그리스신화에서 나오는 다신의 존재은 긍정하는 것이다. 신은 부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니체에서는 다신이나 유일신이나 모두 인간의 사변의 극대화 인간이 만든 허구라도 보았다. 그러나 서양철학이나 종교에 있어서 신의 부정은 없었다. 그것이 니체에 와서 완벽하게 신을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신의 죽음이다. 니체가 출연하기 이전까지 모든 철학이 신이라는 모토를 깔고 왔다. 니체는 신과 자아의 이성의 집착되고 있던 모든 근대인들에 대한 부정, 다시 말해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을 말하는 것이다.'신은 죽었다'에서 광인은 신을 찾는 근대인을 말한다. 나는 신을 찾는다라는 말은 신이 무엇인지 신의 존재가 무엇인지 찾아보자는 의미이다. 니체이전까지 모두 신을 찾았다. 근대사에서 신을 비방하고 비판하는 것은 바로 죽음이었다. 데카르트도 근대의 사상을 이끌어도 신에 대한 부정을 하지 못한다. 즉, 근대는 종교적으로 억압된 종교비판을 하지 못하는 시대였다. 44:32니체가 느꼇던 방황감이 현대인에게도 있다. 방황상실을 통하여 허무주의에 빠져들고 가치상실세계로 자신을 몰아가기도 한다. 인문적 소양이 중요한 것은 문제가 되었을 때 우리가 쓸 수 있는 기틀인 가치관을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생에서 쓸 수 있는 것은 돈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돈은 자본은 서로에 대한 용역이다. 서로를 교환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지 우리 삶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없는 무인도에서는 필요없는 것이다. 사람관이라는 것이다. 즉, 삶을 정리할 수 있는 가치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인문적 교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가치적인 삶을 스스로 이끄는 발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허무주의로 빨려가게 된다. 여러분의 생을 이끌어 가는 베이스는 무엇인가 고민하여 볼 필요가 있다. 자본, 사랑, 권력, 이것은 가치관이 아니다. 이런 것은 수단일 뿐이다. 그렇다고 이런 것을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이런 것은 인간의 욕망이다. 이런 것을 부정하지 않고 필요악이다는 것이다. 욕망은 인정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욕망, 깨달음의 욕망등 필요한 것이 있다. 불교에서는 부정하는 것은 욕망에 대한 집착이다. 집착을 버려라는 것이다. 즉, 욕망의 내재적 성격은 이해하지만 그의 집착은 인정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집착의 분기점에 있는 것이 취이다. 집착이 심하면 갈망이 일어난다.인간이 신이 되고자 하였던 것을 초인이라고한다. 신의 죽음을 통하여 신이 가지고 있던 권력을 인간이 행사하고자 하였던 것, 초인도 인간적 지배권력이라고 볼 수 있다. 불교는 지배권력을 놓았다. 지배하지 말라 집착하지 말라 이것은 타오르는 갈망을 낳는다. 불길같은 욕망이다. 불길을 존재자까지 모두 타버리게 한다. 불이 타고 있는데 불나비가 뛰어들어 자신을 태우는 것. 그것이 욕망, 갈애이다. 자기 존재의 상실을 유도한 것이다.신을 죽이고 나서 더 극단적인 인간중심 세계를 가고자하는 것이다. 지배권력을 내려놓지 않는 것이다. 니체는 신이 지배권력을 가지고 가겠다는 것이다. 인간이 신이 된다는 것을 불교적 맥락에서 보면 중생즉부처을 살펴볼 수 있는데, 니체의 초인과 다른 것은 지배권력을 내려놓는 것이다.2) 신은 죽었다라는 현대철학적 의미와 불교적 무신론을 살펴본다.서로 의도하는 바가 어떻게 같고 다른지를 비교하여본다. 니체는 기독교비판이 핵심이다. 기독교적 사고틀은 인간은 신을 숭배하고 인간만이 신을 숭배할 정신적 영혼을 가지고 있다 반대급부로 자연을 지배하는 구조이다. 중세는 인간이 신을 숭배하였고 신장에서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라고 외친다고 하더라도 진정한 주인은 아니다. 그 지배자의 주인에 주인이 또 있기 때문이다.니체가 되고자 한 것은 진짜 주인인 신이 되고자 한 것이다. 인간이 주인이 되고자 한 것이 니체가 말한 것이고 진짜 주인이 되는 것은 강력한 지배권력의지이 나오게 된다. 니체 이전까지 있었던 신중심주의에 기댄 인간중심주의가 아닌 인간 그 자신이 주인이 되는 중심이 되기 위하여는 신중심주의에 의존하여서는 안된다.그러기 때문에 신중심주의에 기초가 되었던 신은 죽었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것을 통해 인간 자신이 주인이 된 것이고 이렇게 강력한 주인이된 인간을 초인이라고 하였다.니체는 신중심주의에 기댄 인간중심주의를 타파한다는 점에서 본다면 근대철학을 뛰어넘는다고 볼 수 있지만, 여전히 근대보다 더 강력한 인간중심주의를 주장하는 것으로 근대적 인간중심주의를 크게 벗어나지도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명제 속에서 근대적인 인간중심적인 성격과 탈인간중심주의가 혼재하고 있다.그러므로 니체철학은 현대철학의 맹아적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맹아적 성격에는 근대적 성격과 탈근대적 성격이 혼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의미에서 대표자는 니체이다. 니체는 신의 죽음을 이야기하여 새로운 인간을 주장하여 초인을 등장시켰다.초인도 과거의 신이 가졌던 주인의 권능을 스스로가 행사하는 가장 강력한 주인이라는 점에서 보면 가장 철저한 인간중심주의이다. 인간의 또다른 권력화를 확인할 수 있다. 니체-신의죽음-초인-인간의 또다른 권력화, 프로이드-의식의 죽음-무의식-자아의 절대화, 막스-정신의 죽음-물질-생산성의 신화화신은 죽었다고 할 때의 신은 기독교의 신이 죽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 그리스적 다신은 아니다. 신의 죽음은 샘족에 대한 공격이다. 기독교는 이세상과 저세상으로 나누고 이 세상은 부정하고 신앙을 통해서 저 세상으로 가고자(긍정) 한다. 이 세상에 대한 온갖 비방과 험담을 부정하고 저 세상에 대한 온갖 공식들을 이야다.
서양 전통사상의 전복이라는 관점에서 니체와 하이데거의 유사성은 무엇인가?니체는 특출한 기독교의 성장배경을 가졌다면 하이데거는 카톨릭적 성장배경을 가지고 있다. 니체는 기독교적 성장배경을 가지만 나중에는 철저한 반기독교적 주장을 하게 된다. 반면에 하이데거는 기독교사상에 반대는 하지않지만, 그리스적인 사상에서 하이데거의 사상이 나오게 된다. 특히 하이데거의 전집을 보면 신을 이야기할때 단독자로서의 신을 이야기하지 않고 多神들을 이야기한다. 즉, 그리스적인 신을 이야기한다. 그리적인 신이라는 것은 소크라테스 이전을 말한다. 하이데거의 사상의 맥락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철학에 배경을 가지고 있다. 니체, 하이데거 모두 소크라테스가 서양철학을 망쳤다고 비판한다. 소크라테스 철학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고 있다.니체는 그리스 사상의 두 기둥을 아폴론적 이성주의아 디오니소스적 감성주의 2가지로 보았다. 아폴론적 이성주의, 합리주의는 소크라테스-플라톤 대에 확립된 서양 과학적, 자연철학적 합리주의, 2원론적 이데라를 말한다. 이것이 오늘날 서양과학을 발전시킨 원동력이며 기독교의 이원론적 사상의 틀을 마련한 바탕철학이 바로 아폴론적 이성적 합리주의라고 니체는 비평하였다.그래서 서양문명에 아폴론적 합리주의로 치우쳐서 발생한 서양문명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디오니소스적 영감적 감성주의를 주장했다. 이는 예술,종교,영감의 원천으로 아폴론주의에 압도되었던 디오니소스적 1원론적 일체주의, 감성주의의 영감력이 상실되어 서양문명에 미래100년 동안 검은 그림자가 드리울 것이라고 예언했던 철학자가 니체이다.디오니스적 일체주의적 감성주의는 그리스 신탁문화에서 "인간이 우주자연, 신과 합일되는 경계'에서 나올 수 있는 종교,예술,철학적 영감을 말한다.유복하지 못한 가정, 카톨릭적 배경하이데거 20세기 철학과의 단절을 통해서 새로운 철학을 시작한다.하이데거가 존재에 대하여 관심을 두는 것은 니체가 말한 신의 죽음한 이후 테마를 더 이상 신을 하지 않고 존재로 잡는다. 하이데거 볼때는 존재의 근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당시전까지의 서양철학은 존재의 근거(원인)이 중심이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최고의 존재자이다. 이런 식으로 존재를 탐구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기독교적 인과성에 맞추어서 세상을 해석하고자 하는 틀이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의미를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의미의 부여는 인간이 하기 때문에 의미부여자로써 인간의 활동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인신록적으로 관념론이 아니라 존재라는 것이 인간을 통해서 드러나기때문에 인간이라는 것은 존재가 드러나는 터전이다라는 것이다. 인간을 통해서 존재의 의미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제는 인간의 문제가 된 것이다. 존재라는 것이 그 자체라는 것이다라는 것이고 그것이 인간이다. 새로운 존재론을 펼쳐간다.
니체와 하이데거의 사상의 비교1. 서론현대에 동구의 공산주의의 몰락은 남한사회 내에서 맑스주의 이론에 대하여 두가지 편향을 나타나게 만들었는데, 그 첫번째는 맑스주의에 대한 거부이다. 더 이상 맑스주의는 현실 자본주의 사회의 메카니즘을 설명할 수 없다는 논리이며, 그 이면에는 부르주아지들의 자유주의 이론들의 승리를 인정하는 경향이다. 이들은 이제 맑스주의를 그의 무덤옆에 묻어버리고 영원히 잠들게 만들어 버리려고 한다. 그들은 전염병처럼 빠르게 확산하고 있는 포스트주의에 대한 무비판적 탐닉에 그의 학문의 열정을 쏟아 붓는다.그 두번째 편향은 절대적 이념으로서 맑스주의를 계속 고집하는 것이다. 현재의 공산주의 이념의 쇠퇴는 일시적인 것이며, 더욱 철저한 맑스주의에 입각할 때 지금의 난국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들은 맑스주의 이외의 현실 자본주의에 대한 성찰과 비판마저도 사이비로 치부하며 그들의 논의를 외면하려고 한다.이 두 가지 편향은 맑스주의에 대한 몰이해이며 현실 자본주의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되어진다. 맑스주의의 역사는 분명 노동자들 실천의 역사이며, 그 이론들은 천재적인 한 사람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역동적인 - 실로 자본은 역동적이다. 그 발전의 방해와 저해의 요소를 자기 증식의 도움인자로 만들어 버리니 말이다 -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 변화에 맞추어 노동자들의 실천운동은 자기 변모를 해 왔으며 이론들은 그 변모의 형태를 분석하고 운동의 발전 방향을 제시하여 주어 왔을 뿐이다. 그 노동자 역사의 모든 실천과 이론들이 바로 맑스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분명 현실 맑스주의에 대한 이전의 독단과 도그마틱한 접근을 벗어 던짐과 동시에 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틀들을 수렴해야 할 것이다.푸코는 그의 사상에서 절대로 맑스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맑스주의가 더 이상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죽어버린 이론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이론의 전개에서 맑스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실로 불가능하기 때 현상들을 나타나게끔 하여 주는, 현실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 세계의 모습이다. 진리는 영원히 불변하고 그 스스로 존재하는 일자이며,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는 그 자체의 모습이다. 인간의 실존이 들어설 자리는 공간은 여기선 없다. 고대의 사상이 적어도 존재론적이 문제를 다루었다면 바로 이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근대에 있어 진리는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주체와 외부 대상의 일치의 문제이다. 일치할 경우 우리는 그것을 진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일치의 문제가 핵심이 되며 이것은 인식론을 가장 큰 철학의 영역으로 만들어 버렸다. 고대의 진리에 대한 논의든 근대의 진리에 대한 논의든 간에 공통적인 지반이 있다면 그것은 진리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저 인간세계를 벗어나 있든, 인간에 의한 대상의 인식이든지간에 말이다. 누구나 부정할 수 없는, 참된 그 어떤 것은 존재하고 있으며, 인간은 이성이라는 능력에 의해 그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것에 사고가 아무런 회의 없이 그 인간 인식의 저변에 음흉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사고는 독일 관념 철학의 최고봉인 헤겔에 의해 모든 것이 완수되어진다. 절대정신은 모든 것의 순수하고 완전한 모습으로 이제 역사적 필연성을 거친 후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 버린다.전통적인 형이상학의 이러한 모습을 철저하게 간파하고 넘어서려고 했던 사람은 아마도 맑스일 것이다. 맑스에게 위의 진리의 모든 기준은 순수한 사변적인 이성의 범주에서 해결될 수는 없는 문제였다. 그가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에서 말하듯이 사유의 영역에서 진리에 대한 논의를 펼치는 것은 스콜라적이다. 모든 것의 기반은 현실에서 찾아져야만 한다.우리가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현실적 전제이다. ... 그것은 현실의 개인들 및 그들의 행위이며, 또한 이미 존재하는 것과 그들의 행위를 통해 산출된 것을 비롯한 그들 생활의 물질적 조건이다.맑스에게 있어서 현실적 조건은 사회적 관계이다. 그것은 인간의 행위와 사고를 만들어 내고 통제하는 기본적 인간 존재에 대한 의미를 획득함으로써 '존재'라고 하는 일반적인 의미를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현존재(인간이란 의미를 하이데거는 이렇게 표현한다. 인간이란 의미는 과거의 형이상학적 물음에서 기인하는 용어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하이데거는 이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의 가장 큰 특징은 탈존이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초기의 생각으로 사료되는데 그것은 인간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그 첫번째는 현존재는 존재자로서 사물들의 객관적 조건을 벗어나서 우리자신에 대해 물어 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것이며 따라서 자기의식에 대한 비판적이고 반성적 태도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의 의미는 인간 자신을 선행하여, 지금의 나에게 자아를 부여하는 본질적인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데카르트적인 cogito의 부정이다. 탈존으로서의 현존재는 이제 사물들의 객관적 존재를 아무런 선입견이나 장애없이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객관적 사물은 현존재의 영역안으로 들어와 그의 존재로서의 영역에서 참다운 모습을 발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탈존의 개념은 실상 주관적 관념론으로 해석될 수 있는바 그것은 바로 존재자들이 현존재에 의해 재해석된다는 입장에서 말해질 수 있다. 물론 현존재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초탈하여 세계를 향한다고는 할지라도 결코 그것이 '모든 존재자가 너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냐?'라는 것과 큰 차별성을 가지지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또 다른 개념이 필요로 하는 데 그것은 '피투사성'의 개념이다. 피투사성은 현존재가 그를 구성하고 있는 객관적 존재자 세계로 던져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존재는 모든 사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단은 그를 구성하는 세계속에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세계는 현존재의 탈존에 의해 새롭게 구성되어지는 것이며, 진정한 존재자의 모습으로 구성되어지는 것이다. 전통적 형이상학이 말하는 인간에 대한 정의는 하이데거에게서 다른 의미로 전개되어진다. 하이데거의 인간은 자기를 규정맺음은 언제나 가능하며 이것은 사건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세계는 이렇게 수많은 힘들이 조합가능성으로 존재하는 곳이다.니체에게는 인간조차도 이러한 힘들간의 하나에 불과한가?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렇다. 인간도 역시 세계에서 존재하는 하나의 힘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도 관계속에서 존재하게 된다. 그 관계맺음의 다양성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인간들 사이의 관계들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가족의 일원으로서, 학교에 다니는 학생으로서, 또래집단의 한 사람으로서, 또한 수많은 우연한 모임의 구성원으로서, 다양하고 복수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되고 그 각각의 관계속에서 자신의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각각의 자신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데 그것은 힘들의 차이에서 기원하는 것 다름 아니다. 그 안에서 누구도 동등한 위치를 점할 수는 없다. 각각의 지위가 주어지고 역할이 부여된다. 그 안에서 명령하고 통제하는 힘이 있고 명령받고 통제받는 힘이 있다. 그렇다면 인간과 여타의 외부대상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인간은 이제까지 인간 중심적인 입장에서 인간 이외의 사물을 평가하여 왔다. 그것은 언제나 인간의 활동의 대상이었으며, 수단이었으며, 종속의 것들이었다. 따라서 외부대상은 하나의 자립적 어떤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활동안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외부대상이 인간활동에 대해서 수동적이었다 하더라도 외부대상은 반작용의 힘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은 반작용하는 외부 대상에 대하여 작용하는 힘으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외부대상의 어느면과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대상에 대한 인간의 의식은 그 모양을 다르게 가진다. 이것이 바로 각각의 사람마다 대상을 다르게 느낄 수 있는 점이며 그 정당성의 근거인 것이다.이런 의미에서 니체에게도 주어져 있는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아는 단지 다른 힘들과의 수많은 관계항들속에서 파생되어지는 부산물일 뿐이다. 명석한 판단과 대상을 참되게 인식할 수 있는 선험적 능력 - 이성 -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하이데거나 니체 모두에게 인간숨어있지 않음이며 자신의 드러냄이라고 했을 때 왜 그 드러냄의 공간인 밝음은 그와는 달리 존재의 숨김을 제공하고 있는가? 단지 인간의 인식의 한계를 말하고 싶음인가? 아니면 진리에 대한 회의적 사고 -진리란 결코 취득될 수 없다-에서 인가? 진리가 언제나 숨어있지 않음이라고만 한다면 그것은 하이데거가 생각하기에는 진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은 그 존재의 드러남만을 볼 것이고 존재망각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진리는 비진리이다. 은폐성은 비은폐의 기본 전재이다. 존재는 항상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려고 한다고 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존재는 인간현존재에 의해 발견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영역안으로 존재의 숨어있지 않음을 채취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현존재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는 대지위에 피투사되었지만 그는 그 자신의 존재영역을 구축하여야 한다. 존재의 숨어있지 않음은 이제 현존재의 세계안에서 의식적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진리의 비진리성에 대한 언급은 매우 모호하다. 기실 하이데거는 사물들이 존재로서의 근원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한데, 진리가 비진리로서 말해진다면 개별적인 인간의 사물에 다양한 접근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 아닌지. 왜냐하면 존재의 거부를 밝힘의 하나의 다른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는 한, 그리고 위장을 통한 다른 모습의 드러남을 인정하는 한 진정 숨어있지 않음 자체를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상대주의적인 진리관으로 해석되질 수 있는 생각이다.니체의 진리에 대한 비판은 차이를 거부하는 동일성에 대한 비판에서 보여질 수 있다. 부단한 변화와 생성의 현상속에서 인간은 항상 동일한 일자로서 존재하려는 것을 찾아왔다고 말한다. 이것은 니체에 의하면 노예적 평가양식에 속하는 것으로서, 모든 차이를 거부하고 동질화 시키려는 시도에서 나타나게 되었다. 약한 자는 항상 강한자의 삶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지니고 있다 강한자의 생활은 존재하는 것을 정복하고 파괴하고 부수는 것이다. 그 곳에 그들은 새로운 있어야
발심 수행장 (원효스님)해동사문 원효 술대저 모든 부처님이 적멸궁을 장엄하신 것은오랜 세월동안 욕심을 버리고 고행한 때문이요수많은 중생들이 불타는 집에서 맴도는 것은한없는 세상에서 탐욕을 버리지 못한 때문일세막지 않는 저 천당에 가는 사람 적은 것은삼독심과 번뇌를 나의 집 재물로 삼기 때문이요꾀임 없는 저 악도에 많은 사람 가는 것은네 마리 뱀과 오욕으로 망심의 보물을 삼기 때문일세그 누군들 산에서 도 닦을 마음 없으리애욕에 얽히어서 하지 못할 뿐이라네비록 산 속에서 마음 닦지 못할지라도자신의 힘을 따라 선행을 버리지 말지어다.자신의 즐거움을 버리면 믿고 공경하기를 성인과 같이 하고하기 어려운 일 능히 하면 존경하기를 부처님 같이 하리라재물을 아끼고 탐하는 이는 마귀의 권속과 다를 바 없고자비로써 보시하는 이는 곧 법왕의 아들이니라높은산 높은 바위 지혜로운 이의 살 곳이요푸른 솔 깊은 골짜기 수행인이 살 곳이라나무 열매로 주린 창자 위로하고흐르는 물 마시며 갈증을 식히네좋은 음식으로 아껴 보살펴도 이 몸은 결정코 무너지고비단으로 감싸 보호해도 목숨은 반드시 마치나니메아리 울리는 바위굴로 염불당을 삼고슬피 우는 기러기로 마음의 벗을 삼을지라절하는 무릎이 얼음처럼 시려도 불 생각을 하지 않고주린 창자 끊어져도 먹을 생각 말지어다백년이 잠깐인데 어찌 배우지 아니하며일생이 얼마이기 닦지 않고 방일하랴마음 가운데의 애착을 떠난 이를 사문이라 이름하고세속에 연연하지 않는 것을 출가라 하는도다수행인이 비단옷 걸치는 것은 개가 코끼리 가죽을 쓴 것과 같고도인이 세속 그리워함은 고슴도치가 쥐구멍에 들어간 것과 같다비록 재주와 지혜가 있더라도 마을에 사는 이에게는모든 부처님이 슬피 여기고 근심하시며설사 도행이 없더라도 산 중에 사는 이에 대해서는여러 성현들이 기뻐하고 사랑하느니라재주 있고 학문이 높아도 계와 행이 없는 이는보배가 있는 곳으로 인도해도 가지 않는 것과 같고부지런히 행하지만 지혜가 없는 이는동쪽으로 가고자 하면서 서쪽으로 가는 것과 같도다지혜로운 이의 행하는 바는쌀을 쪄서 밥을 짓는 것과 같고어리석은 이들이 행하는 바는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것과 같네사람마다 밥을 먹어 주린 배를 채울 줄 알면서도불법을 배워서 어리석은 마음 고치려고 하지 않네행과 지혜 갖추는 것 수레의 두 바퀴와 같고자리이타 보살행은 새의 양쪽 날개와 같도다죽을 얻어 축원하면서도 그 뜻을 알지 못한다면시주하는 그 정성에 부끄럽지 아니하며공양 얻어 염불하면서도 깊은 이치 깨닫지 못한다면불보살님 성현 앞에 죄스럽지 아니한가깨끗함과 더러움을 구별 못하는 벌레를 사람들이 미워하듯깨끗함과 더러움을 분별 못하는 사문을 성현들은 걱정하네세상의 시끄러움을 버리고 천상으로 가는 데는계행이 가장 좋은 사다리이니라그러므로 계를 파한 이가 남의 복전이 되려 하는 것은날개 부러진 새가 거북을 등에 업고 나는 것과 같도다자기의 허물 벗지 못하면 남의 허물도 벗겨줄 수 없나니어찌 계행 없이 남의 공양을 받을 수 있으리행이 없는 빈 몸은 길러도 이익이 없고덧없는 뜬 목숨은 아껴본들 보전하기 어렵도다용상의 덕을 바라거든 오랜 고통을 능히 참고사자좌를 기약하려거든 욕심과 쾌락을 버려야 하리행자의 마음이 깨끗하면 모든 하늘이 칭찬하고도인이 색을 생각하면 선신들이 떠나가느니라사대로 된 홀연히 흩어질 몸은 오래 보존키 어려운 것오늘도 벌써 저물었으니 아침부터 서둘렀어야 하리고통이 뒤따르는 세상의 즐거움에 어찌 탐착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