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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학] 경험론
    ◐ 목 차 ◑Ⅰ. 서론(序論)Ⅱ. 본론(本論)1. 경험론2. 영국 고전 경험론3. 주요 철학자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22∼1626.4.9)◈ 로크(John Locke, 1632. 8. 29∼1704. 10. 28)◈ 버클리(George Berkeley, 1685.3.12∼1753.1.14)◈ 흄(David Hume, 1711.4.26∼1776.8.25)4. 합리론과 경험론의 비교Ⅲ. 결론(結論)※ 참고문헌 ※Ⅰ. 서론(序論)철학자라는 희랍 말은 인식을 사랑하는 의미하는 말이다. 곧 진리의 탐구를 의미한다. 철학의 질문은 그의 대답보다 더 본질적이요, 그리고 모든 대답은 새로운 질문이 되는 것이다. 도중에 있음은 깊은 만족의 가능성을 가진 가운데 간직되고 있다. 이러한 가능성은 결코 어떠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기존지식, 명제, 고백 가운데에 잇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체가 명백하게 되는 인간존재의 역사적인 실현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이 현실성을 인간이 때때로 놓여지게 되는 정황 가운데서 얻어보혀는 것이 철학의 의미인 것이다. 우리는 철학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의 의미란 현실을 근원 가운데서 보는 것이다. 철학은 인간을 단순하고 유력한 사상이 형태 가운데서 감동시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의식적인 형성은 결코 완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언제나 되풀이되는 항상 현재적인 전제로서 성취되는 과제인 것이다. 철학은 그것이 자기의 유용성 때문에 권한을 가지고 잇는 어떠한 다른 것으로부터 자신을 변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철학은 그것이 버림을 받았을 때 아무러한 반항도 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철학에 귀를 기울인 경우에는 자부하지도 않는다. 철학은 인간성의 근저에서 모든 것과 결합할 있는 일치성 가운데서 살고 있다. 철학함의 다양성, 모순, 그리고 서로 배척하는 진리주장, 이러한 이 하나를 소유하고 있지 않으나 어느 대나 모든 진지한 노력이 그 주위를 감돌고 있다. 곧 영원한 하나의 철학, 영원의 철학인 것인 능력보다 감각과 내성(內省)을 통하여 얻는 구체적인 사실을 중시하여, 전자도 후자에 의해 설명된다는 사고 방식이며, 지식의 근원을 이성에서 찾는 이성론·합리론과 대립된다. 철학 이론으로서 경험론은 이미 고대 철학의 역사 속에 존재한다. 따라서 경험론은 그 역사적 형태에 따라 고대적ㆍ근대적 및 현대적인 것으로 구별해야 한다.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 원자론자, 소그라테스파(派)의 일부(퀴닉파ㆍ키레네파), 에피쿠로스학파 등이 이 경향에 속하며, 플라톤ㆍ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이성주의ㆍ초월주의의 경향과 대립된다. 그러나 이 경향이 유력해진 것은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경험적 사실이 중시되고, 또 인식론(認識論)이 철학의 중심 과제가 된 근대 이후의 일이다.2. 영국 고전 경험론영국은 F.베이컨을 중심으로 한 경험론 전통에서 대륙의 이성론이나 독일 관념론 등과는 대조적인 성격을 나타낸다. 경험론이란 생득관념(innate idea)이란 결코 있을 수 없으며 모든 인식·지식의 근원을 감각적 경험에 기초하여 후천적으로 얻어진다고 주장하는 인식론적 학설이다. 모든 경험의 내용은 개개인의 감각에 반영된 사실이기 때문에 언제나 개별적이고 구체적이며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다. 그러므로 경험론은 시ㆍ공간을 초월한 절대적 사상이나 보편적ㆍ필연적인 진리에 대한 인식을 부정한다. 가치 판단의 기준에 있어서도 초월적인 것을 거부하고 상대적ㆍ공리적ㆍ관능적인 것을 택하는 일종의 주관주의에 속한다. 경험론은 고대 그리스의 여러 가지 학설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고대의 소피스트, 키레네 학파,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 등이 경험론과 비슷한 입장을 취하였으며, 중세기의 유명론도 경험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중세에는 크리스트교 철학이 지배했기 때문에 경험론이 거부되었고, 경험론이 본격적으로 대두된 것은 스콜라 철학이 붕괴된 후 영국의 철학자들에 의해서이다. 따라서 근세 경험론이라 하면 17ㆍ18세기의 영국 경험론을 의미하게 된다. 위의 경향은 T.홉스를 거쳐 J.로크에 이으러 선천적인 본유관에 소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실험과 관찰에 기본을 둔 귀납적 방법을 중시하였다. 즉, 그것만이 다수의 사례를 모아서 표나 목록을 만들어 사상(事象)의 본질을 파악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베이컨이 말한 본질은 여전히 중세적 형상(形相) 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자연법칙의 의미도 명확하지 못하며, 수학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자연속의 보편적 법칙을 양적 관계로서 파악하는 수단을 동반하고 있지 않은 점에서 그 이론이 매우 불충분하였지만, 근대 과학의 방법의 중요한 일면을 강조한 것만은 틀림없다. 바꾸어 말하면, 베이컨에 있어 형상 의 탐구는 형이상학이었지만, 그 형이상학의 응용부분은 미신적 마술과 구별된 자연적 마술 이었다.◈ 로크(John Locke, 1632. 8. 29∼1704. 10. 28)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 사상가인 로크는 계몽철학 및 경험론 철학의 원조라 일컬어진다. 그가 쓴 저서 은 G.버클리, D.흄에게로 영향을 미쳤고, 경험론과 내재적 내재적현상론(內在的現象論)의 입장에서, I.칸트에 이르러 결실을 보게 된는 인식을 근본 과제로 하였다. 제1권에서는 본유관념(本有觀念)과 원리를 부정하고, 그 위에 2권에서는, 인지(人知)는 모두 감각과 반성이라는 경험을 통하여 얻어지는 단순관념에 유래하며, 그로부터의 복합관념으로 설명된다고 주장했다. 이를테면 전통적인 실체(實體) 의 개념도 단순관념의 복합이며, 기체(基體)는 그 배후에 상정된는 불가지(不可知)의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단, 색(色)ㆍ향(香)ㆍ음(音)과 같이 감각에 대하여 상대적인 제2성질과, 연장(延長)ㆍ운동ㆍ고체성(固體性)과 같이 물(物)자체에 구비된 1차성질과 구별하여, 전자(前者)는 후자가 감각기관에 자극을 줌으로써 생긴다고 생각하여, 당시의 과학적 실재론을 전제로 삼았다. 또, 불가지인 물적 실체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정신에 대해서도 반성의 관념과 기능적 인격에 의한 설명을 하고 있지만, 정신실체나 신의 존재를 인정한 점에서, 그 문제를 다음의 버클리와 흄에게 남겨놓았다 마찬가지로 신념과 습관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 또한 G.버클리가 인정한 정신실체(精神實體)도 지각이 지나가는 무대 지각의 다발 로서가 아니면 부정(否定)된다. 따라서, 흄의 인식론은 표면상으로는 회의주의적(懷疑主義的) 결말에 도달하는데, 그것은 내재적 현상학의 한 귀결이다. 이성은 감정의 노예 라는 유명한 구절이 대표하듯이, 감정은 오성·지성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으며, 그것이 인상·관념과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점에서만 인식론에 관계된다.4. 합리론과 경험론의 비교합리론과 경험론은 주장하는 바는 서로 다르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방법을 확립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자연과학의 성공은 신학적ㆍ철학적인 모든 선입관을 버리고 오로지 관찰과 실험에 의해서 나타나는 감각적 경험에만 충실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 것이 베이컨에서 시작하는 근세 경험론이다. 이른바 자연과학의 엄정한 객관적 태도이다. 경험론은 이 객관적 태도를 철학에 도입하고자 한다. 이에 대해 모든 지식 중에서 가장 정확하고 엄밀한 지식이라고 여겨온 수학을 도입하여 자연현상을 수학적으로 다룬 데에 자연과학 성공의 비결이 있다고 해석한 것이 테카르트에서 시작되는 근세 합리론이다. 그리하여 합리론은 수학의 엄밀한 방법에 따르고자 했고, 경험론은 오로지 감각적 경험에만 충실하고자 했다. 그러면 합리론이 도입한 수학적 방법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가? 합리론의 시조 데카르트는 그의 「정신지도의 규칙」에서 철학에 수학적 방법을 도입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하면서 진리의 확실한 인식을 위해서 인간에게 허용된 길은 명증적 직관과 필연적 연역 이외에는 없다 는 말을 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직관과 연역이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직관과 연역, 이것은 알고 보면 모든 명제를 자명적인 공리로부터 연역해 내는 기하학의 방법이다. 기하학의 골자를 이루고 있는 것은 공리ㆍ정리ㆍ계이다. 공리라고 일컫는 것은 다른 명제들의 의해서 논증되고 증명될 필요 없이 스스로 진리임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직관적으로 명백한 자명만, 정신은 자유로운 것이고 어떤 법칙에 구애받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볼 때 정신과 물체는 별개의 실체들이고, 서로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체는 연장성을 지니는 것이고 수동적인 것이며, 기계적인데 반하여 정신은 사고하는 것이고 능동적인 것이며 자유로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데카르트의 정신과 육체라는 이원론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들어맞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에서는 정신과 육체(물체)사이에 밀접한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정신과 육체는 송과선을 통해 서로 작용한다고 한다. 이를 인과적 상호 작용설이라 하는데, 데카르트는 그의 상호 작용설이 어떻게 그의 형이상학적 이원론과 양립되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다음으로 경험론은 우리의 인식은 오로지 감각적 경험에서부터만 생긴다고 주장한다. 베이컨은 근세 영국 경험론의 선구자이다. 그것은 그가 자연연구의 방법을 확립했기 때문이다. 베이컨은 이러한 방법을 꿀벌의 방법이라고 부르면서, 소극적 측면과 적극적 측면의 두 방법으로 나누는데, 그것을 각각 우상론, 귀납법이라고 한다. 먼저 우상론이란 과학적 연구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되는 여러 편견 또는 선입견을 말한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종족 즉, 인류의 본성에 유래하는 편견인 종족의 우상, 개인차를 토대로한 우물 속의 개구리와 같은 편견인 동굴의 우상, 언어사용에 따르는 편견인 시장의 우상, 전통적인 학설이나 권위에 따르고자 하는 극장의 우상이 그것이다. 이렇게 모든 우상, 모든 편견을 버리고 베이컨은 사실의 세계, 경험의 세계에 돌아갈 것을 권유한다. 참된 학문 연구는 먼저 관찰과 실험에 의해서 사실을 수집하고 다음에 이 사실들의 원인과 법칙을 발견하는데 있다. 이것이 적극적 측면인 귀납법이다. 종전의 연역법은 이미 아는 진리를 새로이 배열하는 데 그치며 그것은 설명의 논리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면서 귀납법이 자연연구의 참된 방법임을 역설한다. 베
    인문/어학| 2003.06.19| 9페이지| 1,000원| 조회(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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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실습] 사례연구 평가D별로예요
    사례연구를 위한 학생을 찾았지만 특정한 문제가 있는 학생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담임 선생님께 자문을 구했는데 담임선생님께서 OOO을 지목해 주셨다. 교생실습 첫 주, 우리 반 아이들과 말 한 마디라도 건네 보고 얼굴이라도 익혀보려는 마음에 점심식사가 끝나고 나면 교실로 발걸음을 옮기곤 했었다. OOO는 부모님이 이혼하셔 아버지와 살고 있고 그래서 그런지 표정이 많이 어둡고 잘 웃지 않는다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 이후 OOO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얘기도 나누어보면서 OO에 대해 알아보려고 노력했다. 조용하기는 하지만 담임선생님 말씀과는 다르게 나와 눈을 마주치면 방긋방긋 웃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다. 이것저것 물어보면 볼 양쪽이 발그레해져서 살풋이 웃는 그 모습이 얼마나 이쁜지..... 하지만 그 이쁜 모습을 보이는 중에서도 적극적이지 못한 행동들로 인해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많이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일상생활에서의 자신감이 없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그다지 아끼고 사랑하지 않는 것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말하기에 앞서 손으로 입을 가리거나 하는 순간적이고 무의식적인 행동들이 이를 반영해주는 모습이다. 이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여러 가지 일들을 연관시켜 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수많은 좋은 점들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단점이 있겠지만 장점 또한 많다. 그게 장점인지 모르거나 기준이 높아 장점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때도 있지만 조금만 다시 생각해보면 자신 안에 수많은 좋은 점과 잠재력이 있음을 알게 된다. 아주 사소하게 여겨지는 것도 장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손이 예쁘다거나, 어느 곳에서나 적응을 잘 한다거나, 나를 사랑하고 걱정해주는 부모님이 있다거나 등등... OO는 방긋방긋 수줍듯이 웃는 모습이 예쁜 것과 뭐든지 열심히 하는 것이 장점이다. 이 장점을 말해주며 자기 자신에게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람마다 타고나 성향과 성품이 다 다르기 때문에, 모두다 똑같을 순 없다.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내성적인 성향과 다른 사람과 어울리기를 좋아하고 쉽게 어울리는 외향적인 성향이 있듯이 말이다. 자신의 성향을 잘 알고 장점은 더욱 살려가며, 부족한 점이 있다면 채워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인다. 그리고 학습능력에 있어서 자신이 열심히 노력한 만큼 그 결과가 좋지 않은 것도 자신감 결여에 한 부분을 차지했다고 생각한다.세상에는 내성적인 사람도 있고 외향적인 사람도 있다. 두 가지 성격 모두가 그것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편안하게도 불편하게도 만든다. 내성적인 사람은 자신의 고민이나 힘든 점을 혼자서 속으로만 삭히려고 하기 때문에 겉으로 많은 표현을 하지 않는 것 같다. 여러 상황 중에 부모님의 이혼이라는 것이 OO에게는 많은 상실감을 느끼게 하고 남 앞에서 자신감없어 하는 것 같아하며 자기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는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자기 자신에게 있어 이런 자신없는 부분을 고치기 위해 시도하려고 할 때는 처음부터 잘하려고 하면 안되고 처음에는 조금 부담이 되기는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을 정도의 일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같은 반 친구들과 함께 재미있게 지내고, 친구도 많이 사귀며 학교를 다니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지 못해 안쓰러웠다. 한 편으로는 우리 반 아이들 중에 나쁜 아이들은 하나도 없어 보이는데 알게 모르게 한 친구에게 아픔을 주는 것이 야속하기도 했다.OO의 학교 생활이 재미없는 것은 친구가 없어서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고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서 OO는 좋은 친구를 충분히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해주었던 몇 가지 부족한 조언 중에 하나는 사귀고 싶은 친구가 있으면 용기를 가지고 먼저 말을 걸어보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다소 어색하고 힘들 수도 있지만 또 어쩌면 내가 말을 걸어도 무안을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고 어색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용기 있는 사람은 삶을 더욱 멋지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진실한 마음으로 다가갈 때 상대방도 문을 열어 줄 거라고 나는 말해주었더랬다. 먼저 친한 친구에게 조금씩 재미있는 이야기 등을 하는 연습을 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같은 반 아이들 중 몇몇만 친하기 때문에 그 아이들하고만 몰려다니지 말고 다른 아이들과도 말을 트고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먼저 같은 반 아이들에게 한 마디씩이라도 말을 거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이전에 인사도 안하고 말도 안 했던 한 명, 한 명에게 매일 아침 인사나 하교인사, 학용품 빌리기, 간단한 칭찬 등과 같은 간단한 말을 건네고 교실에서도 가만히 앉아 있지만 말고, 하루에 적어도 한번은 교실주위를 걸어다니다가 마주치는 아이들에게 말을 걸어보고 하면 어느새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편해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노력하지 않으면 변화를 기대하기 힘들다. 마음속으로만 이렇게 하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곤란하므로 여러 가지 시행착오도 겪어가면서 실수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마음으로 실천했으면 한다. 각각 장점과 단점이 있듯이 자신의 성향을 알고 장점은 더욱 살리며 부족한 점은 노력하면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OOO는 자신을 더욱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겼으면 좋겠다. 조금씩 변화해나가는 노력도 아끼지 않으면서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도록 말이다.
    교육학| 2003.06.19| 2페이지| 1,000원| 조회(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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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방사] 경남의 조운과 봉수 평가B괜찮아요
    ★ 목 차 ★▶ 경상남도(慶尙南道)의 연혁▶ 조운(漕運)이란...?※ 고려의 조운제도※ 조선시대의 조운▶ 봉수(烽燧)란...?▶ 경상남도(慶尙南道)의 봉수대(烽燧臺) 현황※ 마산시※ 진주시※ 거제시※ 밀양시※ 사천시※ 양산시※ 진해시※ 통영시※ 하동군※ 함안군※ 합천군※ 고성군※ 남해군※ 의령군▶ 경상남도(慶尙南道)의 연혁부족국가시대에 북부는 진한, 남부는 변한의 땅이었고, 그 후 금관가야 등 6가야가 할거하여 가야문화가 발달하였다. 532년(법흥왕 19)에 신라에 병합되고, 양주(良州)와 강주(康州)가 되어 신라의 9주 5경의 일부가 되었다. 995년(고려 성종 14)에는 영동도(嶺東道)와 산남도(山南道), 1106년(예종 1)에는 경상진주도(慶尙晋州道), 1171년(명종 1)에는 경상진주도와 진합주도(晋陜州道)로 분할, 1186년(명종 16)에 다시 합쳐 경상진주도가 되었다가 경상진안도라 고치고, 1314년(충숙왕 1)에 경주와 상주의 머릿글자를 따서 경상도가 되었다. 1407년(조선 태종 7) 군사행정 편의를 위해 낙동강 동쪽은 경상좌도, 낙동강 서쪽은 경상우도로 나누었다가 1413년(태종 13)에 8도제 실시로 다시 경상도가 되었다. 1896년(고종 33) 전국을 23부 13도로 고치며 경상도를 남, 북으로 나눌 때 경상남도가 되어, 진주에 도청소재지를 두고 1부 29군을 관할하였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2부 19군으로 재편하였다. 1925년 도청을 부산부로 이전하였다. 1939년 진주읍은 진주부로, 진주군은 진양군으로 고쳤다. 1944년 김해군에 미군정청을 설치하였다. 1949년 지방자치제 시행으로 부산ㆍ마산ㆍ진주가 시가 되었고, 1953년 통영군에서 거제가 군으로 분리되어 3시 20군이 되었다. 1962년 울산군이 공업지구에 설정되어 울산시와 울주군으로 고쳐졌고, 1963년 부산시가 정부 직할시로 분리 승격해, 6시 20군으로 축소되었다. 1973년에는 동래군을 폐지, 양산군에 병합시켰으며, 창원군 일부를 마산시에 편입하였다. 197 곧 운송료를 각포별로 정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성종 11년에 책정한 조선수경가는 원결한 곳은 '운5석가1석' 곧 5석을 나르는데 1석을 운송료로 받고 가까운 곳은 21석에 1석씩을 받았다. 성종대를 전후해서는 기한 지명의 변개가 있었으므로 상계포명이 후세지지에 전연 전해지지 않는 것도 있으나 말수의 고총포, 서하군포를 제외하면 대략 함평 이북에서 금강 이남에 걸친 전라도 서해안임을 알 수 있다. 고총포는 안산군이라 했는데 안산은 경기도 인천과 남양사이의 현 안양 서방 화성군에 속하나 그 이남인 아주(아산) 하양창의 변섭포가 13석에 1석이므로 오히려 면곳이 저렴한 셈인데 이는 수로의 험양에 따라 다를 것으로 생각된다. 서하군포는 서해도 풍주, 곧 후의 황해도 풍천이다. 정종대에 가서는 12창의 조서수와 적재량을 정하였는데, 내륙지방의 남한강수로를 제외한 각 창은 조선 6소와 초마선을 두고 1선당 1천 명씩을 싣도록하고 한강조운인 충주 덕흥창은 20소, 원주 흥원창은 21소와 평저선을 두되 각 2백 명씩을 싣게 하였다. 결국 현 군산시가 자리한 금강구는 전라도 조세의 조창으로서 고려 초부터 12조창의 하나인 진성창과 이의 이곡발강지로서의 의의를 크게 지니고 있었던 것이며, 따라서 왜구가 조서능 탈취하다가 해상 조운의 길이 막히자 직접 조차을 노리게 되어 금강구의 왜구침입 방어의 새로운 군사적 의의을 띠게 된다. 경창에서 가장 먼 경상도 지방으로부터의 운송비는 운송량의 20%에 이르는 등 매우 비쌌고, 경창과의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그 율이 낮아진 것으로 보아 경창까지의 거리는 물론 항해의 난이 등 여러가지 조건을 고려한 것으로 보이지만, 상당히 비쌌는데 이러한 비용을 농민들이 부담하였다.※ 조선시대의 조운조선시대의 세제는 시대에 따라 명칭과 그 내용이 다소 달라지기는 하였으나, 대체로 조세, 부역 및 공물의 3 가지였다. 이 중 조세는 과세대상이 일정한 토지(전결)에 귀결되는 일종의 지대였다. 따라서 조운은 당초 조세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는 바, 이의청남도 서산군 서쪽 끝에 있는 조운항로 중 가장 어려운 곳, 암초가 있음)을 지나고자 할 때에는 그 직전에 원산에 휴박하여 선체를 점검하고, 역풍이 부는 때나 야간에는 다시 출항해서는 안되며, 5 조선항로를 관할하는 수령은 조선이 다가올 무렵 그 관내에 있는 암초나 모래톱에 표지를 세워야 하며, 6 조선이 다가오면 그 항로의 연안을 관할하는 수령은 수로에 익숙한 자를 각 선박에 2, 3명씩 승선시켜 도선토록 하였다. 두 번째로 화물 관리에 관한 규정을 살펴보면, 1 호남 및 호북의 조선은 800석, 그리고 영남의 조선은 1,000석 이상을 적재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이같은 제한을 어기는 경우 선인이나 수령 모두가 처벌되었다. 2 조선에는 개인의 곡물이나 화물을 적재하지 못하도록 금하였다. 이를 위반한 조졸, 물주 및 그 비위를 적발하지 못한 압령차사원 등 모두가 처벌되었고, 그러한 화물도 몰수되었다. 즉 10석을 적재한 경우에는 금고 3년, 100석 이상을 적재한 경우에는 금고 5년의 처벌을 받았다. 그리고 3 조운선에 전세를 적재한 뒤에는 다른 선박에 환적할 수 없도록 하였다. 이를 위반한 경우에는 감색 및 사격 모두에게 난파에 준하는 죄를 적용하여 처벌하였다. 셋째, 화물운송과 관련된 사항으로는 1 세수 담당관이 세곡을 징수하기 시작하여 완료하기까지의 기간(매년 11월 1일부터 다음 해 1월까지) 중에 조운을 책임지는 담당 관원에게 발선에 지장이 없도록 선척을 점검할 책임도 지웠다. 그리고 2 경기, 충청 및 황해도의 경우에는 2월 20일 이전에 발선하여 3월 10일 이내에, 전라도의 경우에는 3월 15일 이전에 발선하여 4월 10일 이내에, 또 경상도의 경우에는 3월 25일 이전에 발선하여 5월 13일 이내에 경강에 도착시켜 상납하도록 조운기를 설정하였다. 3 이와 같은 발선기한을 늦춘 당해 수령에 대해서는 평생 임관자격을 박탈하였으며, 해운판관은 파직되었다. 또 기한 내에 발선시켰더라도 기한 내에 도착시키지 못한 경우에는 감색 및 사격 모두를 일백장에 당하였고, 오장은 대상(臺上)에서 함께 기거하면서 봉수군을 통솔하고 봉수대의 이상유무를 수령에게 보고하였다. 수령은 이를 받아 유사시에는 즉시, 무사시에는 월말마다 관찰사에 보고하는 한편, 3ㆍ6ㆍ9ㆍ12월에 병조에 보고하였다. 서울 경수봉에는 봉수군 및 오장을 오원(五員)이라 하여 배치하는 외에, 금군(禁軍) 중에서 고액녹봉자(高額祿俸者)를 봉수군장에 임명, 윤회수직(輪回守直)하도록 하여 변방으로부터 올라온 정보를 병조에 보고하게 했다. 봉수군과 오장의 정원 및 교대는 연변봉수가 1봉수당 정원 50명에 10일 교대, 내지봉수는 1봉수당 정원 30명에 10일 교대, 경봉수는 정원 20명에 5개소의 봉수마다 4명씩 상하양번(上下兩番)으로 나누었다. 봉수군은 출퇴번(出退番)의 편의를 위하여 반드시 부근의 주민을 중심으로 차출하였는데, 그 신분은 초기에는 염간(鹽干)ㆍ진척(津尺) 등과 같이 봉화간(烽火干)이라고도 하여 신량천역(身良賤役:良人과 賤人의 중간)에 속하였다. 그러나 봉수의 역(役)이 고달프고 갈수록 신분이 낮아, 조선 후기에는 이른바 칠반천역(七般賤役)의 하나로 손꼽혔다.봉수대에서는 거수를 달리하여 정세의 완급(緩急)을 나타냈는데, 평상시에는 1거(炬), 왜적이 해상에 나타나거나 적이 국경에 나타나면 2거, 왜적이 해안에 가까이 오거나 적이 변경에 가까이 오면 3거, 우리 병선(兵船)과 접전하거나 국경을 침범하면 4거, 왜적이 상륙하거나 국경에 침범한 적과 접전하면 5거씩 올리도록 하였다. 만약 적침이 있을 때 안개ㆍ구름ㆍ비ㆍ바람 등으로 봉수에 의해 전달이 불가능할 때 봉수대는 포성(砲聲:信砲ㆍ發火 등)과 각성(角聲:角吹)으로 주위의 주민과 수비군인에게 급보를 알리고, 봉수군이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서 알리기도 하였다. 서울 남산에 있는 5개의 봉대는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정보를 병조(兵曹)에 종합보고하는 종점이 되었다. 병조에서는 매일 새벽 승정원(承政院)에 보고하여 임금에게 알리고, 변란이 있으면 밤중이라도 즉시 승정원에 보고하였다. 봉수는 동서남북고》에 의하면 직봉 402, 간봉 271, 계 673개소였다. 각 봉수대의 상거거리(相距距離)는 변방 제일선의 연대가 그 중요성에 비추어 10∼15리 이하로 조밀하게 배치되었고, 내지봉수로 옮겨갈수록 거리가 멀어지는데, 평상시 낮에 연기로써 신호하는 서울에서 먼 주수(晝燧)지역은 20∼30리 간격, 서울에 가까운 야화(夜火)지역은 40∼50리 정도가 기준이었다. 그리고 각 봉수 노선별로 봉수 상준처(相準處)의 산명(山名)과 거리 등을 수록하여 이를 관할 지방관아의 영진(營鎭)으로부터 중앙의 병조ㆍ승정원에 소장케 하였는데, 이는 봉수제도가 그만큼 국가안보 문제와 직접 연결되는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상남도(慶尙南道)의 봉수대(烽燧臺) 현황※ 마산시-마산가을포봉수대소재지 : 마산시 합포구 진동면 산60지정일 : 1997.12.31문화재지정번호 : 시도기념물169가을포 봉수대는 진동면 광암마을 뒷산 능선에 있으며, 서울 목멱산(지금의 남산) 중앙 봉수에 이르는 봉화선로의 중간노선을 연결하는 간봉(間烽)이다. 가을포 봉수대는 진해읍성과 관계가 있으며, 인접한 고성 우산봉수, 곡산 봉수의 신호를 받아 함안 파산 봉수, 의령 가막산 봉수로 전달하였다. 현재 직경 13m 정도의 원형 축대 안쪽에 화덕 1기를 복원해두고 있으나 학술적인 고증을 거치지 않고 복원하여 원형에 손상이 많다.- 봉화산봉수대소재지 : 마산시 회원구 회원동 18지정일 : 1997.01.30문화재지정번호 : 시도기념물157무학산 줄기인 해발 265m 봉화산에 있는 봉화산 봉수대는 고려 말기에 왜구의 침입 등 위급 상황을 서울에 알리기 위한 신호수단으로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곳 봉화산 봉수대는 동래에서 서울 목멱산(지금의 남산) 중앙 봉수에 이르는 봉화 선로를 연결하고 있다. 처음 동래 다대포 봉수대에서 시작하여 진해 고산봉수대, 봉화산 봉수대, 함안 칠서 안곡산 봉수대, 창녕 소산 봉수대를 거쳐 최종적으로 서울 목멱산 봉수대로 이어졌다.※ 진주시- 광제산봉수대소재지 : 진주시 명석면
    인문/어학| 2003.06.19| 11페이지| 1,000원| 조회(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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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감상문] (영화감상문) 거짓말
    처음 이 영화를 선택했을 때 영화를 즐기기보다는 영화를 분석하는 관점으로 보았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큰 방향을 일으켰던 영화라 보기 전부터 많은 긴장을 했었다. 노골적인 성적표현은 성인인 나에게 신선함과 충격을 같이 가져왔다. 이런 류의 영화를 처음으로 보아서인지 거리감이 먼저 들었다. 이란 영화가 만들어졌을 당시 사회적 인식을 보면 외설이냐 예술이냐라는 논란은 당연했다고 생각한다.은 한 쌍의 남녀가 만나 장소를 바꿔가며 성애를 나누는 영화이다. 영화 맨 처음에 J가 여관방에 앉아있는데 화면에 보이지 않는 사람이 질문을 하고, J는 몸짓을 섞어 진지하게 대답한다. "Y는 천사다. 그녀와의 정사 중에 느끼는 오르가즘은 접신의 경지"라는 구원이나 무아지경 같은 느낌을 과장없는 표정으로 대답한다. 이렇게 영화는 남자 주인공 J와의 인터뷰로 시작한다. 이런 인터뷰 장면을 통해 이후 보여질 이야기가 기획된 것이 아닌 실제 상황인 듯한 효과를 준다. 이것은 다큐멘터리 기법을 영화에 이용하고 있음으로 영화를 현실로 받아들이게 하는 현실감을 살리고 있다. 그리고 Y가 기차 내에 앉아 있는 장면이 이어진다. Y는 J를 어떻게 만났으며, 첫 만남과 첫 정사의 느낌이 어떠했는가를 고백하듯이 털어놓는다. 이런 장면 역시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실제 상황에 대하여 진솔하게 보여주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J와 Y는 우리라는 친구를 통해 만나게 되는데 우리는 예술 지망생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조각을 하고 싶어한다. 그러다가 조각가인 J를 알게되어 그를 흠모하며 홀로 가슴을 태우지만 소심한 성격이어서 J에게 구체적인 접근을 시도하지는 못한다. 우리의 가장 친한 친구인 Y가 보다 못해 J에게 이 사실을 전해주려고 대신 전화를 거는데 Y는 J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목소리가 너무 근사하다"며 J와 사랑에 빠진다. 이처럼 Y와 J의 만남에는 어떤 필연성도 없다. 만남이 즉흥적이고 우연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J의 인터뷰 장면, Y의 고백 장면, 우연한 만남 등이 오히려 이야기의 개연성을 높여주고 있는 것이다. 실제 우리들의 삶은 우연과 충동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영화는 실제 흔히있는 주위의 이야기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Y는 두 언니가 자살과 강간이란 상처를 입었다는 점을 가슴 아파하며 자신은 그런 상처를 피하고 싶어하고 자신은 그런 상처를 입기 싫어하는데 그 위로의 대상으로 J를 만나는 것이다. 이렇게 상당히 상반된 두 인물은 여관이란 외부 세계와 절연된 공간에서 서로에게 탐닉하게 된다. 물론 탐닉의 대상은 정신이 거의 배제된 육체이다. 두 인물이 관계를 맺고 있는 공간뿐 아니라 영화 전체에서 두 인물은 외부 세계로부터 어떤 구속도 받지 않으며 그것에 구체적인 참여도 하지 않는다. 이런 주인공의 단절이라는 장치를 통해 외부의 개입이 없는 순수한 그들만의 관계를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기법과 따라 다니는 듯한 카메라는 보는 이로 하여금 그들을 쫑아다니며 직접 괸찰하는 기분을 느끼게 하고 주인공의 이름을 누구누구가 아닌 영어의 이니셜을 사용함으로써 일반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영화 속이 아닌 현대에도 다양한 성적행위가 있으며 통신에서 번개라는 즉석 만남을 통해 즐기기 위한 원 나잇 스탠드 유형이 비일비재 한 것이다. 배우들의 인터뷰 장면이나 영화 중간중간의 특이한 시도들, 거기에 더해지는 매저티즘과 새디즘의 폭력성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작은 축소판이다. 우리 사회의 사랑과 애정이라는 미명하에 이루어지는 폭력의 거짓성에 대한 일그러진 쾌감을 통한 작은 탈출구라고 말할 수 있다. 영화 초반부에 나오는데 J는 국졸이다. 그래서 그는 Y의 찌꺼기, 똥을 좋아한다. 자신과 동질감을 느끼면서 말이다. 사회로부터의 낙오가 행동의 일탈을 낳았다. 그리고 그것은 폭력을 잉태했고, 거기서 J는 일그러진 쾌감을 느낀다.영화의 대부분은 일반 포르노와 같이 대부분 성관계로 그려졌다. 포르노는 상업적인 목적으로 예술성이나 학문성, 정치성이 전혀 없이 오로지 성욕을 자극하기 위해 만든 것 으로 정의될 것이다. 포르노는 크게 에로스와 타나토스로 나뉜다. 이중 에로스는 정상적인 성행위를 나타내는 작품이다. 반면 타나토스(변태적인 성행위)는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묘사(즉 가학적 성행위, 수간 등)하고 있는 작품이다. 은 포르노계에서도 금기시하는 타나토스(사디즘적으로)를 묘사했다. 이것은 형식면에서 보면 완전히 저급 포르노이다. 영화에서 두 남녀의 성행위에 대한 묘사가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그 묘사가 포르노의 정의의 기본 요소인 관객에 대한 성적 자극을 의도한다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선 도입부에서 보여지는 두 주연 배우와의 인터뷰, 영화 만들기 과정의 노출, 상당히 모호하면서 객관적인 나레이션은 영화에 빠져들기보다는 철저히 관찰자의 시선으로 보는 것이며 영화에서 묘사되는 성행위들은 궁극적인 차원에서는 현실 내의 다양한 권력 관계들(남녀간의, 가족간의, 세대간의 등등)을 은유하거나 전복적으로 비판하는 함의를 지닌다. 처음에는 J에 대한 Y의 숭배에 가까운 관계로 시작하지만 점차 두 사람의 관계는 '성'을 통해 수평화 되다가 결국에는 전도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여기에서 '성'은 부모와 자식, 형제, 부부, 친구를 비롯한 제도적 또는 사적인 관계가 지닌 억압성이나 책임 등을 조롱하거나 비판하거나 또는 거기에서부터 급진적으로 일탈하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에 등장하는 성적 이미지들은 기존의 수많은 영화들에서 단지 볼거리를 위해, 우리 사회의 천박한 성문화를 핑계삼아, 여성에 대한 성차별주의적인 관념을 토대로 해서, '성'을 통한 비판적인 문화읽기의 시각 없이 반복적으로 이용되어온 것들과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생각하는 관점을 던져준다. 남녀 주인공인 J와 Y가 공원에서 일하고 있는 인부들을 봤을 때 J가 던지는 대사인 저 사람들은 왜 일하지 않고 살 수 없을까 . 이 말은 일하지 말자라는 뜻을 내표하고 있다. 그 때 당시 한국은 최고의 경제위기에 빠져있었던 시기로 열심히 일해서 경제 재건하자는 슬로건 아래 뭉친 시대에 이렇게 놀고먹자라는 식의 화두를 던진 것이다. 또 100만명 서명에서 J의 서명할래 라는 말에 Y는 난 100만명이 싫어. 한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는 그런 나라가 나는 좋아 라고 말한다. 이는 감독이 이 영화를 내놓으면서 우리 사회에 하고 싶은 말일 것이다. 100만 명의 정상인 이 1명의 비정상인 을 매장하는 사회. 어느 것이 정상이고 어느 것이 비정상인가라는 화두도 던져준다.
    독후감/창작| 2003.06.19| 3페이지| 1,000원| 조회(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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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인식] 한국 전근대사학의 특징 평가A좋아요
    ★ 목 차 ★◎ 서론◎ 본론Ⅰ 고대의 역사인식1. 삼국시대의 역사인식과 역사편찬1) 고구려의 역사편찬2) 백제의 역사편찬3) 신라의 역사편찬2. 통일신라시대의 역사인식-김대문과 최치원을 중심으로-1) 김대문의 역사서술2) 최치원의 역사서술Ⅱ 고려시대의 역사인식과 역사서술(중세)1. 고려전기의 역사인식1) 고구려 계승의식2) 신라계승의식2. 무인집권의 성립과 역사계승의식3. 원의 간섭과 역사계승의식4. 고려 후기의 역사인식◎ 결론◎ 참고문헌◎ 서론전근대사학이란 근대 이전까지 유지된 한국 역사의 방법과 인식체계를 말하며 전통사학이라고도 한다. 대체로 중국의 역사인식과 형태를 바탕으로 한 유교주의적 사관으로서 어디까지나 경사일체(京司一體)의 학문이었던 동시에 유교이념을 구현하는 지배자의 정치수단(철학)이었고, 과거 사실을 교훈으로 삼아 훈계하기 위해 기록한 내용이다. 따라서 전통사학은 정치의 거울 이며 과거 속에서 규범을 찾아 포폄(褒貶)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이었다. 이러한 전통사학은 왕권강화의 기념물이며, 유교의 왕도정치 구현의 표현이었다. 따라서 삼국시대 왕권이 안정됨에 따라 남아있지는 않으나 각기 국사편찬이 이루어졌고 통일신라 이후 무열왕권 강화와 당의 사관제 수용으로 국사편찬의 가능성이 높아졌다. 고려초 왕권의 강화과정에서 전통사학의 정립은 본격화되었다. 고려까지의 전근대사학의 특징을 알아보고자 한다.◎ 본론Ⅰ 고대의 역사인식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 역사서는 고려 인종 23년(1145)에 김부식등에 의해서 편찬된 삼국사기이다. 물론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에도 역사서가 편찬되었으나. 어느 때부터인지 모두 없어지고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 중의 어떤 것은 삼국사기가 편찬될 당시까지 남아 있어 편찬 참고가 된 것도 사실이고 이는 더러 삼국사기의 개찬이며 나아가 구삼국사 역시 종래의 기록을 토대로 하여 편찬된 것이라면 이처럼 삼국사기에 특별한 주기가 없는 경우에도 그 전반적인 기사내용은 기본적으로 고대사서(고려이전의 여러 기록)의 그것에백 교수는 이들을 위서로 단정했지만 이기동 교수는 그 원형이 본래 백제 조정에 의해서 편찬되었고 조국이 멸망한 후 이를 지참하고 일본에 망명한 백제의 지배층과 그 후예들이 일본 조정에서 관료로 복무하게 된 상황에서 일본 수사당국의 요청에 의해서 제출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일본 수사당국에 의해서 윤색되어 '일본서기'에 인용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이와 같이 이들 역사책의 본래의 성격을 알아내는 일은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백제기에는 전설적인 기사가 많지만 그보다 후에 편찬된 것으로 짐작되는 백제본기는 일자와 간자 두 가지가 기록될 정도로 실록으로서 확실성이 풍부한 편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볼 때 백제의 역사학은 후기에 이르러 크게 진전하고 있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3) 신라의 역사편찬신라의 국사에 대한 사료는 아래와 같다. 伊 異斯夫奏曰 國史者 記君臣之善惡 示褒貶於萬代 不有修撰 後大何觀 王深然之 明大阿贊居柒 夫等 廣集文士 殺之修撰 이에 의하면 신라의 국사 편찬은 진흥왕 초년에 정치군사상 최고 요직에 있던 이사부의 건의에 따라 거칠부 등이 중심이 되어 추진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국사편찬이 국가의 큰 사업의 중시되었던 것은 이 책이 완성된 후 왕이 거칠부를 파진찬의 관등으로 한 등급 승진시킨데서도 충분히 짐작된다. 다시 말하면 진흥왕 때의 국사책은 바야흐로 제도문물의 정비에 따라 현실의 김씨 왕조의 정통성을 천명하고, 나아가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하여 왕자의 위엄을 내외에 과시하려는 성격의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이상으로 삼국시대의 역사인식과 역사편찬에 대해서 선학들의 연구업적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현재 남아있지도 않은 역사서를 다만 책이름이나 저자의 경력과 사상 혹은 시대적 배경만을 가지고 논의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여 결론을 맺고자 한다. 첫째로, 삼국시대에는 주로 관찬사서가 편찬되었다. 고구려의유기나 이를 토대로 하여 만들어진 신집, 백제의 서기, 신라의 국사등은 모두가 왕의 명령에 그는 유교적 교훈이라는 기준에서 사료를 취사 선택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김대문의 관심이 신라사에 집중되고 있었음에 비해 최치원의 경우 역사적 관심의 대상이 확대되었음도 그 특징의 하나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국학에서 공부하고 또 거기서 관료생활을 하고 그들과 사귀면서 문명까지 날려 동시대 신라의 누구보다도 중국을 잘 이해하였던 최치원은 중국적인 역사개념을 갖고, 나아가 중국의 역사가치를 포함시켜 신라의 흥망사를 연대기적으로 기술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김대문이나 최치원은 모두 각자의 독특한 입장에서 일정한 목적 아래 역사를 서술하였다. 즉 진골귀족 출신인 김대문은 왕권이 전제화하여 진곡귀족들이 소외당하고 있던 8세기 초의 시대적 상황속에서 역사서를 쓰는데, 여기에는 전제왕권에 반발하는 의도가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되기도 한다(이기백 교수의 경우 전제왕권을 옹호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아울러 그에게는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부터 물밀듯이 신라에 들어오고 있던 중국의 사상이나 제도문물에 대항하여 신라 고유의 것을 내세우려는 속셈도 작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육두품 출신으로 중국에서 벼슬하고 돌아온 최치원은 9세기말 진골귀족 만능의 정치풍토에 반발하는 유학자의 입장에서 신라의 멸망을 바로 눈앞에 두고 연대기를 저술하였다. 그는 중국적인 개념과 지식을 갖고 신라의 역사를 썼는데, 이는 그의 경력과 사상에 비추어 볼 때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들의 역사인식 단계는 삼국시대의 신화적설화적 단계에 비하면 한발짝 진전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다고 생각된다Ⅱ 고려시대의 역사인식과 역사서술(중세)1. 고려전기의 역사인식고려전기의 역사인식을 서술함에 있어서 고려전기라함은 고려 건국의 해인 918년에서 무신란이 일어나는 1170년까지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고려전기의 역사인식을 이해할 때 신라하대의 상황이 언급되어야 한다, 이것은 고려의 건국이 신라하대의 정치 사회적인 모순으로 발생했으며 또한 그 모순을 해결하는 것은 고려적인 조건뿐만 아니라 대외적인 여건이 매우 복잡한 시기였다. 태조의 통일 이념은 신라와 백제의 통합뿐만 아니라 고구려 국가의 회복에 있었다. 따라서 고려는 신라 경내에서 그 전통과 문화를 토대로 건국하였으나 신라사회의 계승으로 그치지 않고 고구려의 계승자로서 자처하였다. 태조는 민심에 잠재해 있던 삼국에 대한 역사인식을 건국과제에 크게 반영하면서 이를 건국이념으로 정립하였는데 이것이 곧 북진정책이었다. 고려는 역대 어느 왕조보다는 적극적으로 강력하게 북진정책을 실현하였다. 고려초기에 북진정책이 강력히 추진될 수 있었던 것은 건국주체 세력의 출신성분을 음미하면 분명하여진다. 고려 건국의 주체세력은 주로 고구려 영역내의 지방 호족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므로 호족세력은 고구려의 후계자 또는 계승자로서의 자부심으로 고구려의 부흥을 위한 북진정책을 표방하였던 것이다. 그 후 호족은 초기 권력구조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왕권을 압도하는 세력으로 군림하였다. 다시 말해 고려는 삼국 중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한 왕조로 자각하는 역사인식이 성립되었으며 이것은 문화민족으로서의 자존심이 강하게 작용하여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광종때에 왕을 황제로 칭하고 개경을 황도로 칭한 것과 북방민족과의 투쟁에서 고구려 계승의식과 자주성과의 연결을 통해 잘 알 수 있다.2) 신라계승의식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신라계승의 역사인식도 강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그것은 고려가 통일신라의 장구한 역사지배를 계승한 왕조로 교체되었지만 신라에의 강한 집착은 신라적인 것으로부터 탈피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우선 고려를 신라왕실과 직결시킨 점과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태조는 신라의 제도를 많이 수용 참작하였는데 고려태조는 개국 초에 신라와 태봉의 제도를 병용하여 관을 설하고 직을 나누어 서무를 맡게 하였다. 는 점에서 잘 알 수 있다. 더욱이 성종때에는 최승로를 비롯한 신라 육두품 계열의 유학자들이 정치의 주도권을 잡고 고려의 새로운 지배층으로 등장하여 정국을 석권하게 되자 고려는 신라를 계승한 왕조라 점에서 무인집권시대의 역사의식은 삼국사기 에 비해 대외적 자존의식은 한층 높여 주었으나, 대내적 국가 경영능력을 한 단계 낮춘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이 바로 유교적 합리정신의 결여와 관련된 것이다.3. 원의 간섭과 역사계승의식고려왕조는 13세기에 세계제국을 형성하였던 몽고족과 30년에 걸친 투쟁 끝에 강화하고 평화를 되찾았으나, 원으로부터 온갖 간섭과 업력을 받게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시기에 무엇보다도 주목할 것은 단일민족으로서의 자각이 생기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한국사에 대한 인식과 역사계승의식을 민족적 차원에서 생각하게하는 변화를 일으키게 하였다. 민족의 상징으로서 단군에 대한 인식은 우리민족이 다른 민족과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의식을 확립하게 하였다. 또한 단군에 대한 인식은 단군에서 삼국에 이르는 한국 고대의 역사적 추이를 주목하게 하고, 이것을 결과적으로 한국사에 대한 시야을 넓히게 하였던 것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와 제왕운기(帝王韻紀) 를 보면 한국고대사에 대한 시야가 훨씬 넓어지고 있다. 우선 삼국유사 에 의하면 고조선, 위만조선 , 마한 , 이부(二府), 칠십이국, 낙랑국, 북대방, 남대방, 말갈, 발해, 이서국(伊西國), 오가야(五加耶), 북부여, 동부여, 고구려, 변한, 백제, 진한 등에 대한 기사를 수록하고 있으며, 제왕운기 에서는 단군, 후조선, 위만 , 사군, 삼한, 부여, 남북옥저, 예맥, 그리고 발해의 역사적 변천 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항목만을 통해서도 한국사에 대한 역사인식이 어느정도 확대되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특히 삼국사기 에서는 완전히 무시되고 있는 발행에 대해서 다같이 서술하고 있는 점이 특히 주목된다. 다음에 삼국유사 와 제왕운기 에 나타난 역사인식태도룰 좀 더 구체적으로 비교검토해 보고자 한다. 일연의 삼국유사 와 이승휴의 제왕운기 는 유교적 사서의 격식을 갖춘 관찬사서와 비교하여 사서로서의 체제는 미숙하다고 할
    인문/어학| 2003.06.19| 10페이지| 1,000원| 조회(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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