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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양사적의 해제] 사마천의 사기와 사마광의 자치통감
    『史記』와 『資治通鑑』의 解題Ⅰ. 序論역사서를 서술 방법으로 구분하였을 때 가장 대표되는 두 가지 서술체계가 있다.기전체(紀傳體)와 편년체(編年體)인데 진(秦)·한(漢) 시기의 새로운 서술체계인 기전체 역사서와 송대(宋代)의 편년체 역사서를 대표할 수 있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 史記』와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 資治通鑑』의 해제를 통해 두 사서의 역사적 가치를 알아보고자 한다.Ⅱ.本論1. 사마천(司馬遷)의 『사기 史記』『사기』는 처음에는 태사공서 太史公書』라 했다. 본기 12권, 표 10권, 서 8권, 세가 30권, 열전 70권으로 모두 130권 52만 6500자이다) 이것은 『태사공자서 太史公自書』에 실린 자수이다. 지금은 중화서국 표점본(標點本)에 실제 55만여자가 있어, 『사기』는 유통되는 과정에서 망실되고 증보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기는 조직이 짜임새가 있고 내용이 풍부한 백과사전식의 통사이다.사기의 구성은 본기·표·서·세가·열전의 다섯 부분이다. 본기는 주로 천하의 대세를 좌우한 대표적 인물을 선택하여 주체로 삼았으며 정치적 사건을 서술하였다. 3대에서 한 문제 시기까지 흥망성쇠의 정치적 변천을 연속적이고 집중적으로 전개하였다. 표는 보첩의 형식을 사용하여 역사적 대사건을 기록했다. 본기와 표는 모두 시기순에 따라 안배했다. 서는 사건을 유형별로 기술했는데 주로 각 문물제도의 연혁과 발전과정을 기록했다. 세가는 사회적으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인물이나 대사건에 관련되 제후 또는 공적이 있는 귀족을 편년과 열전의 서술기법을 사용하여 서술했다.열전의 유형은 주로 인물전기, 전전(專傳), 합전(合傳), 기전(寄傳), 잡전(雜傳) 등이다. 이 가운데 소수민족과 주변국가의 역사편(專)도 있다. 이러한 5개 부문의 체재는 각 부분이 독자성을 갖되 내용적으로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연계되고 또 병렬되거나 결합되어 인류사회사의 체계를 유기적으로 종합하였다. 이것은 『사기』가 처음으로 창안한 구성방법이다.예를 들어 그것은 진한의 사실을 기술하는 데 있어 진한 의 실제행동과 대 조하고 살폈다. 대략 3대를 추정하고 진한을 기록했으며, 위로는 헌원(軒轅)에서부터 아래 로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12본기를 짓고 조리있게 기술했다. 시대가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으며 연차가 명확하지 않아 10표를 지었다. 예법과 음악제도의 감소와 증가, 법률 과 일력의 개정, 병기권모(兵機權謀), 산천형세, 귀신 혹은 하늘과 사람의 관계 등에 관해 8서를 지었다. 28개의 별자리가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고 30개의 수레바퀴 살대가 바퀴통 에 다같이 모여 운행이 무궁한 것처럼, 임금을 보필하는 데 팔다리가 되는 신하들이 줄이 어 서 있다. 그들이 충성, 신의, 도덕을 실행함으로써 임금을 받드니 30세가를 지었다. 의 (義)를 세우고 용맹과 재주가 남보다 뛰어나 스스로 때를 높치지 않고 천하에 공명을 세 우니 70열전을 지었다.-『태사공자서 太史公自序』여기서 『사기』의 표현방식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즉 바로 통일된 중앙집권적인 봉건국가 구조 속에 존재했던 작자 자신의 사상이 『사기』라는 역사서 안에 투영되었다. 지주계급의 입장에서 보아도 그것은 그 사회가 역사적으로 포괄할 수 있는 용량을 최대한 반영하였다. 이후의 모든 정사가 예외없이 『사기』의 저작 형식을 참고한 것은 이와 같은 배경에서 비롯하였다.『사기』의 또다른 특색은 전서를 통해 관철된 '실록'정신이다. 작자는 정치적 압력에 굴하지 않고 고대사뿐 아니라 당대사인 현대사까지 서술하여 자신이 속했던 시대상을 반영하였다. 역사를 기술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이 황제에 관한 기록인데 그는 유방을 개국의 군주로 기록하지 않음으로써 그 추악함을 서술하지 않았다. 또한 고후(高后)를 여왕으로 칭제하지 않음으로써 당시의 정치적 업적에 대한 언급을 피앴다. 문(文)·경(景)의 통치를 들지 않아 그 내란을 말하지 않았고, 무제(武帝)의 여러 단점을 열거하지 않음으로써 그 공적을 기술하지 않았다. 『사기』의 실록정신은 중국고대사 저술의 규범이 되었다.『사기』는 역사 사실의 정확성을 위해 수집된 자료는 』 「태사공왈」은 바로 장건(張騫)이 제공한 대하(大夏)의 자료를 근거로 했고, 『우본기 禹本紀』의 「하출곤륜 河出昆崙」의 설법을 부정했다. 한번으로 규정을 내릴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의문점을 제기하거나 빼버리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사료를 누적시키거나 고증하는 방법이 완벽하고 세밀하지는 못했다.『사기』는 역사와 문학을 하나로 결합하여 빼어난 문학작품의 경지에 이른 저작이다. 그것은 사실을 산만하지 않게 조직적이고 조리있게 서술했는데 「서남이열전 西南夷列傳」이 전형적인 예이다. 간결한 문체와 분명한 맥락 구분으로 지리적 위치, 사회조직, 생활습관 등의 정황을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각 지방의 반란도 서술하였으나 읽을 때 무질서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또한 『사기』는 묘사가 뛰어나다. 성을 공격하여 노예를 약탈하고 기병들이 대치되어 싸우고 화각(畵角)에 따라 신음소리가 난무하는 슬픈 장면이, 한마디로 웃음을 자아내고 노래가 되는 생생한 인간행동으로 절묘하고 생동감있게 그려냄으로써 화려한 색채감을 띤 한폭의 그림으로 역사를 재현하여 독자에게 감동을 준다. 그 가운데 가장 탁월한 것은 『사기』의 인물전기다) 본기와 세가 가운데 전기적인 성격을 띤 편장을 포함한다.. 중점적으로 서술한 100여명의 역사인물의 풍부한 형상과 선명한 성격이 독자에게 마치 살아있는 듯한 강한 인상을 준다.역사학의 시각에서도 『사기』는 역사적 인물의 활동과정과 인물들의 우연한 조우를 그리는 기법을 통해 당시의 사회생활과 정치상황을 묘사했다. 예를 들어 「혹리열전 酷吏列傳」의 조우(趙禹), 장탕(張湯) 등을 통해 집중적으로 경무(景武)시기 정치의 어두운 면을 파헤쳤다. 「화식열전 貨殖列傳」의 범리(范 ), 자공(子貢), 촉탁씨(蜀卓氏) 등의 대공상업자(大工商業者)를 통해 춘추 말기에서 진한에 이르는 시기의 민영 수공업과 상업을 발전 상황을 반영했다. 「유협열전 遊俠列傳」은 주가(朱家)·극맹(劇猛)·곽해(郭解) 등의 협객을 그려 한나라 시기의 민간 습속과건을 기술하였기 때문에 특히 문학적 가치가 높다.』과 『국어 國語) 주(周)나라 좌구명(左丘明)이 『좌씨전 左氏傳』을 쓰기 위하여 각국의 역사를 모아 찬술(撰述)한 것으로, 주어(周語) 3권, 노어(魯語) 2권, 제어(齊語) 1권, 진어(晋語) 9권, 정어(鄭語) 1권, 초어(楚語) 2권, 오어(吳語) 1권, 월어(越語) 2권으로 되어 있다. 허신(許愼)의 『설문 說文』에서는 ‘춘추국어’라 적혀 있고, 또 주로 노(魯)나라에 대하여 기술한 『좌씨전』을 『내전 內傳』이라 하는 데 대해서 이를 『외전 外傳』이라 하며, 사마 천(司馬遷)이 좌구명을 무식꾼으로 몰았다 하여 『맹사 盲史』라고도 한다. 또 당(唐)나라 유종원(柳宗元)이 『비국어 非國語』를 지어 이 책을 비난하자, 송(宋)나라의 강단례(江端禮)가 『비비국어 非非國語)』를 지어 이를 반박했으며, 그 후로 학자들의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현재는 오(吳)나라 위소(韋昭)의 주(註)만이 완전하게 남아 있다. 중국의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필요한 귀중한 책이다.』의 저자가 시도한 직접 논평하는 방법을 계승하였다. 내용 가운데 혹은 끝에 흔히 '태사공왈(太史公曰)'이라고 덧붙이거나 사실의 서술 가운데 감탄사형의 표현을 통해 저자의 깊은 뜻을 나타내었다. 각 편의 끝이나 맨 처음에 보이는 '태사공왈'은 저자인 사마천이 주관적으로 내용을 부연하고 논평하기 위해 창조한 독특한 형식이며 문자이다. 이처럼 객관적인 역사서슬인 본문과 자기 의견인 주관적 표현이 전편에 뒤섞여 있다.예를 들어 「평준서 平準書」, 「백이열전 伯夷列傳」, 「화식열전」 등이 이것이다. 또한 사실적 기록은 부차적으로 다루었으며, 「혹리열전」, 「순리열전 循吏列傳」, 「골계열전 滑稽列傳」, 「화식열전」 등은 서문에 일정한 역사 시기의 특색과 사회분제의 처리에 관한 당시의 역사적 경험을 통합하는 성격의 논평을 덧붙였다. 이것은 『좌전』과 『국어』의 사론에 비하여 크게 발전하였고, 선진 시대의 제자백가들이 역사에 대해 논평했던 경향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것이다.403년부터 5대(五代) 후주(後周)의 세종(世宗) 때인 960년에 이르기까지 1362년간의 역사를 1년씩 묶어서 편찬한 것이다. 주기(周紀) 5권, 진기(秦紀) 3권, 한기(漢紀) 60권, 위기(魏紀) 10권, 진기(晉紀) 40권, 송기(宋紀) 16권, 제기(齊紀) 10권, 양기(梁紀) 22권, 진기(陳紀) 10권, 수기(隋紀) 8권, 당기(唐紀) 81권, 후량기(後梁紀) 6권, 후당기(後唐紀) 8권, 후진기(後晉紀) 6권, 후한기(後漢紀) 4권, 후주기(後周紀) 5권 등 모두 16기(紀) 24권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사마 광이 『통지 通志』 8권을 찬진(撰進)하자 영종(英宗)이 편찬국(編纂局)을 개설하고 사마 광의 주재하에 유반(劉)이 전 ·후한(前後漢)을, 유서(劉恕)가 삼국(三國)으로부터 남북조(南北朝)까지를, 범조우(范祖禹)가 당(唐)나라 및 5대를 각각 분담하여 기술하였다. 정사(正史)는 물론 실록(實錄) ·야사(野史) ·소설(小說) ·묘지류(墓誌類) 등 322종의 각종 자료를 참고로 하여 『춘추좌씨전 春秋左氏傳』의 서법(書法)에 따라 완성하여 신종(神宗)이 『자치통감』이라 이름을 붙이고 자서(自序)를 지었다.자치통감이라 함은 치도(治道)에 자료가 되고 역대를 통하여 거울이 된다는 뜻으로, 곧 역대 사실(史實)을 밝혀 정치의 규범으로 삼으며, 또한 왕조 흥망의 원인과 대의명분을 밝히려 한 데 그 뜻이 있었다. 따라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지 않고 독특한 사관(史觀)에 의하여 기사를 선택하고, 정치나 인물의 득실(得失)을 평론하여 감계(鑑戒)가 될 만한 사적을 많이 습록(拾錄)하였다. 편년에 있어서도 3국의 경우에는 위(魏)나라의 연호를, 남북조의 경우에는 남조의 연호를 각각 써서 그것이 정통(正統)임을 명시하였다.특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기사에는‘신광왈(臣光曰)’이라고 하여 사마광 자신의 평론을 가하고 있어 그의 사관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의 사실의 진부에 대해서는 사마광이 따로 『통감고이 通鑑考異』 30권을 지어 사실의 고증에 참고가 되게 하
    인문/어학| 2002.12.16| 7페이지| 1,000원| 조회(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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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양 근대사] 주원장의 통치제도로 본 명초의 절대왕권에 관하여 평가A+최고예요
    朱元璋의 統治制度로 본 明初의 絶對王權에 관하여Ⅰ.序論Ⅱ.本論1. 朱元璋의 成長背景 및 統一科程2. 朱元璋의 統治制度① 經濟制度② 政治制度③ 그 밖의 制度改革 및 疑獄Ⅲ.結論Ⅰ.序論주원장은 원말 혼란기 지방세력들을 진압하고 중국을 통일하였으며, 명조의 건국 후 다양한 분야에서 과감한 개혁으로 어지러운 민심을 안정시키고, 정치적으로 왕권강화를 꾀하여 절대왕권을 이룩한 황제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집권 말기 무리한 권력 유지로 독재정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명대 뿐 아니라 이후 청대와 조선왕조에까지 영향을 미친 명이라는 나라의 기반을 닦은 주원장에 대해서 알아보고 또 그의 정책을 보면서 절대왕권의 생성과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Ⅱ.本論1. 주원장의 성장배경 및 통일 과정주원장은 원조의 중국지배가 점차 혼란으로 함몰해 가던 무렵인 1328년 9월, 회하(淮河)연변에 위치한 호주(濠洲)) 안휘성 봉양현의 빈농가문서 태어났다. 그는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과 함께 중국역사상 가장 낮은 신분출신의 황제라고 말해진다. 문자 그대로 그는 빈농출신이어서 어린 시절에는 지주집안의 가축 몰이군 노릇을 하거나 소작 심부름을 하며 보냈다. 그러나 그 생활도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원말의 정치적 혼란 가운데 천재와 역병·기근이 계속되어, 그의 집안도 그 영향을 받게 된 것이다. 주원장이 17세 되던 해 역병에 의해 가족 모두가 사망하여 그는 기근을 벗어나기 위해 황각사(皇覺寺)로 들어가 탁발승이 되었다. 3년간 회서 일대를 돌아다니던 그는 1352년 그의 향리 호주에서 홍건군으로 반기를 든 곽자흥을 찾아가 그의 휘하에 들어가게 된다. 그는 즉시 십부장(十夫長)이라는 하급장교에 임명되어 곽자흥의 신임을 획득했으며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의 부대를 소유할 정도로 성공했다. 원군과의 전투에서 상당한 희생을 치른 곽자흥군은 조직의 재편이 불가피했는데, 그때 주원장은 급거 향리에 돌아가 동향의 청년들을 모은 다음 700여명의 부대를 편성했던 것이다. 이 군특히 유기(劉基)·송렴(宋 )은 주원장을 전통적 유고주의 입장에 서게 하였으며, 남경점령 후 주원장이 명실공히 일반 민중 측이 아니라 지배자의 입장에 서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하지만 천하를 평정하기 위해서는 주변의 막강한 지방세력인 진우량) 진우량은 1360년 그 주군인 서수휘를 살해하고 자립하여 대한국(大漢國)을 세웠다. 그후 그의 세력은 강서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한층 신장되어 양자강 중류유역에 강력한 세혁을 떨치며 상류로부터 주원장세력을 압박했다.과 장사성) 1356년 소주를 본거지로 하여 자립했다. 스스로를 오왕(吳王)이라 칭하고 홍건적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어 강남 각지의 지주 및 부호들은 농민반란의 난리를 피해 장사성의 세력 아래 결집했다. 장사성도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이들 부호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한림아) 백련교가 성행할 당시 큰 세력을 가졌었으며 이후 주원장의 보호아래 있었으나 저주지방에 세력이 건재했었다. 이는 천하통일을 거의 완수한 주원장에게 걸림돌이 되는 존재였다.에 대한 공략이 필요했다. 이에 1364년 화공책으로 진우량 세력을 타도하고 양자강 유역에 걸친 세력권을 형성하게 됐으며) 주원장은 계책을 써서 진우량의 함대를 남경으로 유인하여 이에 대타격을 준 후, 여세를 몰아 강서로 진출하여 파양호( 陽湖)에서 천하를 겨루는 결전을 벌였다. 그러나 강대한 진용을 자랑하는 진우량의 함대에 대해 주원장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여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주원장은 수척의 작은 배에 화약을 실은 다음 짚으로 만든 인형을 세워두고, 그 뒤에서 결사대로 하여금 불을 지르게 하여 적의 선단에 돌진시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1366년 한림아가 죽고 난 후 이 지역도 주원장의 지배하에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1367년 9월 수개월에 걸친 공방전 끝에 소주성은 함락) 주원장은 진우량을 패퇴시킨 후 총력을 기울여 장사성 토벌에 나선다. 준비를 갖춘 주원장은 우선 강북에 있는 장사성의 세력을 내쫓은 후 남방으로부터 향주를 공격했다帝)나 영락제(永樂帝)등과 같이 연호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2. 주원장의 통치제도천한 신분에서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른 태조 주원장에게 있어 천하 평정의 사업보다도 오히려 더 어려운 사업이 있었다. 명제국의 지배를 확고부동하게 하는 것으로 이를 위해서는 20여년에 걸친 전란으로 말미암아 피폐해진 국력을 시급히 회복시키는 것과, 장시간에 걸친 몽고지배의 영향을 일소하면서 동시에 제국의 지배기구를 정비하는 일이 중요하였다. 먼저 경제제도의 개혁을 통한 국력의 회복을 알아보도록 하겠다.①경제제도명 태조는 신제국의 경제적 기초인 농촌 부흥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원조 말기 가혹한 수탈 및 장기간에 걸친 전란으로 말미암아 농촌의 피폐는 극한상태에 도달해 있었다. 농민의 질고에 대해서는 태조 자신이 직접 몸소 체험하여, 그러한 상태로 내몰렸을 때 농민의 반항이 어느 정도로 폭발하게 되는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농촌부흥과 농민 생활의 안정이 당시 가장 긴급한 과제였다.그래서 그가 우선 최초로 실행한 정책이 이민 개간정책이었다. 전란으로 인해 당시 전국각처에는 농민이 유망하여 황폐화된 채 경지가 방치되어 있는 농촌이 산재해 있었다. 태조는 우선 타향으로 유망한 농민들을 고향으로 송환함과 함께 인구가 많고 토지가 부족한 지방에 거주하는 무토지농민들을 황폐화된 지방으로 이주시키고 소와 종자 등을 주어 황무지를 경작시킴으로써 농업생산의 회복을 도모하는 방책을 취했던 것이다. 나아가 이 정책과 나란히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하여 군대와 농민에 의한 둔전(屯田)도 대대적으로 실시하여 황무지를 개간했다. 그 결과 정부통계에 의하면 1368년으로부터 1381년 사이에 개간된 전토는 180만경에 달했다. 이는 건국시의 전국 경지면적에 거의 맞먹는 규모였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또한 1387년의 경지면적은 통계상 실로 건국 당초의 5배 가까운 증가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숫자만으로도 태조 일대 동안 농업생산이 눈부시게 회복되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또 농업 장려책도 기입시킨 다음 이를 종합하여 호적을 작성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준비를 거쳐 1381년 전국에서 일제히 「부역황책 賦役黃冊」) 여기에는 각호의 토지소유액, 가족의 숫자, 조세부담액 등이 기입되어 있어, 정부가 농민들에게 조세와 요역을 부과할 때 기초적인 대장으로 이용되었다.이 작성되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부역황책 작성의 기반이자 동시에 조세징수의 역할을 담당하는 말단조직으로 이갑제(里甲制)가 시행되었다.이갑제란 인접한 농가 110호를 1리(里)로 하고 그 가운데 부유한 지주 10호를 선발하여 이장호(里長戶), 나머지 100호를 갑수호(甲首戶)로 편성한 다음, 이를 10호씩 10갑(甲)으로 나누어 매년 이장 한 사람과 갑수 10인이 윤번으로 리(里)안의 역(役)을 담당하도록 한 제도였다. 이 조직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황책의 작성과 조세의 징수이지만, 그밖에도 이장과는 별도로 이노인(里老人)이 설치되어 리 안의 권농과 농민교화, 사소한 분쟁을 판결하는 등의 임무가 부과되었다. 이 제도에 의해 명왕조는 국가의 경제적 기반을 공고히 함과 더불어 농촌의 구석구석까지 지배력을 파급시키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이와 같이 제도면에서 농민지배를 철저히 하고 그로 인한 국가 재정을 확실히 하는 기능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도 농민교화에 노력했다. 태조는 '성유육언(聖諭六言)) 그 내용을 보면,부모에게 효도하며 따르라 (孝順父母)웃어른을 공경하라 (尊敬長上)향리에서 화목히 지내라 (和睦鄕里)자손을 교훈시키는 데 힘써라 (敎訓子孫)각자 생업에 만족하고 힘써라 (各安生理)잘못을 저지르지 말아라 (母作非爲)이렇게 6조목이다.', 즉 '육유(六諭)'를 발포하여 이를 이노인을 통해 농민에게 교습시켰다. 주원장을 이를 통해 가족도덕을 중심으로 하여 '분수(分)'를 분별하고 왕조지배에 순응하는 농민을 만들어내려 했다. 이는 명태조의 전제적 정치의 성격을 알 수 있는 것으로 이러한 이갑제의 실시에 앞서 대지주 주는 호옥 등으로 숙청 당한 것으로 보인다. 향촌사회에서 토지를 기반으로 기득권을태조의 앞서 말했던 이민정책) 정치·군사·경제 모든 면에서 아무런 이점이 없는 자신의 고향 임호(臨濠)에 중도(中都)건설을 계획하여 강남의 관민(官民)을 대거 사민(徙民)시키고, 도성(都城)·능침(陵寢)을 조성하여 인력·재력을 소모시킴을 기화로 나타났다에서 시작되었는데 유기는 애초 이를 반대하였고, 홍무 8년 그가 죽은 후 남부출신관료의 중도건설에 대한 비판은 급격히 증가하고, 나아가 창업과 수성은 다른데 어떻게 수성을 할 것인가 하는 정치적인 비판이 나오고 있다. 태조는 이러한 비판 앞에 동향집단이 요직을 독점하고 있는 지배체제에 대해 변화를 강구해야 했다.태조가 직면해야 했던 또 하나의 문제는 남부출신관료의 문제이다. 『명실록 明實錄』에는 홍무연간에 걸쳐 75건의 민란이 기록되고 있고, 그 대부분이 남부지역에서 발생하였다는 것은 초기 강남지주집단에 크게 의존한 명조정권의 성격을 반영한다. 그러나 남부출신관료의 수적 비대와 그들과 출신지와의 유착관계는 회뢰(賄賂), 남거(濫擧), 경제적 문란을 동반하고 더욱이 그들 세력의 확대재생산을 초래하는 것이다. 홍무 3년부터 부활되어 3년간 연속 실시된 과거시(科擧試)에서의 회시(會試)면제 등의 변칙적인 운영이나, 갑작스런 과거시 폐지 이후 홍무 6년 실시된 천거(薦擧)등은 남부출신을 억제하고 문사에 약한 북부출신자를 채용하기 위한 편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건국 후 통치영역을 전국적으로 확대함에 따라 북부출신관료의 수적 균형을 유지하려는 것이었지만 남부 출신을 억제한 보다 큰 요인은 그들과 출신지와의 유착을 경계한 것이다. 이와 함께 홍무 4년부터 실시된 '남북경조제(南北更調制)) 남·북출신의 관료로 하여금 서로 지역을 바꾸어 근무케 한 제도이다.'도 남부출신관료를 그 세력기반으로부터 단절시키려는 의도였던 것이다.홍무 9년 북변방위에 여유가 생기자 태조는 내정정비로 들어가 '공인(空印)의 안(案)) 매년 호부(戶部)에서 지방재정의 수지결산(收支決算)을 하고 완료 후 호부와 지방관청의 인인(認印)을 찍는 것인데, 의 옥
    인문/어학| 2002.12.16| 7페이지| 1,500원| 조회(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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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고대사] 개신정권의 성립과 동아시아 외교
    개신정권(改新政權)의 성립과 동아시아 외교-을사의 정변에서 백촌강 전투까지-1. 서언645년 일본에서는 120여 년 간 권력을 독점해온 거대호족 소아본종가(蘇我本宗家)가 을사(乙巳)의 정변에 의해 타도되고 대화개신(大化改新)이라는 정치적 변혁을 거쳐 왕족주도의 개신정권이 탄생한다. 이는 변화하는 주변정세에 대처하기 위해 호족세력을 배제시키고 강력한 왕권의 출현을 요구하는 시대적 분위기가 조정 내에서 싹트고 있었던 것을 반영하는 사건인 것이다.개신정권(改新政權)의 성립은 대외관계에 있어서도 커다란 변화를 낳게 된다. 종전 소아씨 주도의 일방적 친백제정책으로부터 외교의 대상이 다면화되는 이른바 전방위 외교가 적극적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 이후 그동안 적극적으로 친신라·친당책을 추진해왔던 왜 왕권이 다시 일방적 친백제노선으로 회귀한 까닭은 무엇일까? 특히 백제구원전쟁은 과거의 백제지원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대규모적이었고 동시에 거대한 당제국과 신라를 상대로 한 것이었기에 이러한 왜왕권의 군사적 모험주의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의문을 제기한다.본 장은 개신정권이 성립한 이후부터 백제구원전에 이르는 약 20여 년간의 왜왕권의 동아시아외교의 실태를 추적해 봄으로써 당시 이러한 외교방침을 결정하는 요인이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2. 을사의 정변과 개신정권의 성립을사의 정변은 앞서 말한대로 당시 권력의 핵심이었던 소아본종가가 멸망하는 사건이다. 소아본종가의 멸망원인으로 크게 거론되는 것이 소아씨의 전횡과 소아하이가 자관(紫冠)을 그의 아들 입록에게 몰래 물려주어 대신의 권한을 부여하는 등 최소한의 형식조차 무시한 것은 조정의 반감을 사기에 충분하였다. 특히 소아씨의 전횡이 극점에 달한 것은 643년 입록에 의한 산배대형왕가(山背大兄王家)의 습격살해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고인대형(古人大兄)을 왕으로 삼으려는 입록의 음모에 의해 이루어졌다. 요컨대 혈연적으로 보면 산배대형이 소아씨와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제거한 것 되었던 것일까. 중신겸직은 수·당 교체기의 대혁명을 직접 체험하면서 유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남연청안(南淵請安)으로부터 배운 이 유교의 혁명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유교적 왕도정치를 실현하려 하였으며 644년 신기백(神祇伯)의 임명을 고사하고 병을 빙자하여 삼도(三島)에 첩거했다는 전승은 가직인 신관을 포기하고 거사를 준비하기 위한 결단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이 유교의 정치사상은 아스카(飛鳥)의 청년귀족들에게 정치비판의 학문으로서 수용되었고, 이러한 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개신정권을 연 신세력은 새로운 법과 질서를 세워 왕에게 권력을 집중하는 중앙집권적 전제국가의 건설을 추구해 나갔다. 이 신정권의 정치개혁을 주도한 것은 앞서 지적한 대로 중대형과 중신겸족이었다.소아입록이 주살된 다음 날 황극이 퇴위하고, 중대형과 중신겸족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경황자(輕皇子)가 즉위하게 되었고, 이에 그는 한낱 로봇적인 존재에 불과했으며 권력은 중대형-중신겸족에게 집중되어 있었다.이렇듯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서 여러 가지 국정에 대한 변화가 있게 되었다. 내신이라는 특수직을 만들어 중신겸족에게 봉하였고 그에게 좌우대신을 능가하는 권한을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특징적인 것은 국박사가 존재하였다는 것인데, 국박사는 국정상의 고문직으로 이해되고 있다. 여기에 임명되었던 사람들이 대수·대당 유학자로서 중국의 선진사상과 문물·제도에 정통한 지식을 갖고 있었고 국제(國制)의 개혁과 외교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아 일종의 외무부장관과 같은 격으로 당시 신정권이 외교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3. 동아시아 외교의 전개개신정권의 수립후 왜왕권의 수뇌부는 대외관계에 있어 외교노선을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종전에 개신정권의 외교노선은 ① 소아씨에 의한 친백제노선으로부터 중대형-중신겸족 등에 의한 친신라노선으로 전환했다는 이시모다설 ② 조정 내부의 대립되는 2개의 권력인 친백제파와 친신라·친에서 문제점이 남는다.당시 동아시아 정국은 고구려-백제와 당-신라의 세력이 대립의 양상을 보이게 된다. 왜왕권이 전통적 외교방식인 친백제 일변도의 노선에서 탈피하여 외교의 다면화를 추구한 것은 통일왕조 중국에 대한 동경과 경외감 때문으로 생각된다. 중국의 선진제도와 문화는 왜왕권의 대중국통교를 촉발시켰다. 여기에 친당노선을 적극화하고 있는 신라와의 유화정책은 필연적이었다.이처럼 개신정권 성립 이후의 외교는 추고조 이래의 외교노선에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으나 대백제 외교보다는 사대적으로 친신라·친당책을 활발히 추진하였다는 데 특징이 있다. 이후 646년 9월 개신정권의 최초의 외국사절이 신라에 파견되는 것과 소아입록이 주살될 당시 고인대형이 외친 "한인(韓人)이 안작신(鞍作臣)을 죽였다"라는 발언이다. 한인이 안작신(소아입록)을 죽였다는 이 기록은 해석의 문제와 신뢰성에 논의가 있으나 사실에 가깝다고 현재 알려지고 있다. 당시에는 신라·백제의 대왜 군사외교가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고 왜왕권 내에서도 외교노선을 둘러싸고 갈등이 존재하고 있었다. 대외적인 측면에서 소아입록의 주살이 외교노선과 관련이 있다면 친백제노선을 취한 소아씨의 타도에 한인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아마도 친신라계인물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개신정권의 견신라사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선 개신정권의 정통성을 알리고 신라에 대한 우호적 입장을 전하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인다. 또 신라의 김춘추는 왜국과 당의 통교를 중개하여 왜국에서 견당사가 파견되게 하는데 일등공신이 된다. 이는 개신정권의 대신라관계가 형식적이 아닌 실질적인 우호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왜-신라-당을 잇는 교섭루트는, 새로 출범한 개신정권에게는 당나라를 모델로 한 국제의 개혁과 나·당의 선진문물의 수용등에 없어서는 안 될 라인이었다고 생각한다.그러나 개신정권은 긴박한 국제정세하에서 곧 정치적인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신라-당 라인의 강한 결합을 과시하며 왜왕권으로 하여금 문화적 교류관계를 넘어 정치적·군어 신라가 고구려·백제의 공격을 받을 시 출병하여 구원할 것을 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후 신라의 북계 30여성이 백제와 고구려, 말갈에 의해 함락당했을 때 왜국에서 신라를 위해 출병한 흔적은 보이지 않고 있다.신라의 왜왕권에 대한 외교자세의 변화와 654년 당 고종의 새서사건, 그리고 655년 당 고종이 고구려를 침략한 사건으로 왜국과 백제·고구려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신라-당 라인에의 일방적 편입을 거부한 채 균형외교를 취해 온 왜왕권은 그 동안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던 백제·고구려와의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된 것이다. 당시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파견된 사절단의 규모는 유례없는 것이고, 왜왕권측에서도 개신정권 성립 초기에는 볼 수 없었던 교류 규모였다. 특히 고구려에 파견된 왜의 사절단은 마치 견당사의 구성원을 방불케 한다. 왜왕권의 이러한 외교방침은 신라·당 라인에서도 탈락하지 않고 백제·고구려와도 우호관계를 유지하고자 한 균형외교의 방침을 고수하려는 의도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655년 당의 고구려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적 공격은 왜왕권에게도 위기의식을 불러왔다. 이에 왜조정에서는 656년 아스카를 방어하기 위한 대규모의 군사시설물을 축조하였다. 이러한 사태는 분명 당·신라가 왜국을 적대하고 있다는 왜왕권의 위기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당에서는 당에 접근하면서도 고구려·백제와 통하는 왜왕권의 이면적 외교를 허용하지 않았다. 신라 역시 당의 거대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당의 외교방침에 동조했다. 따라서 657년 왜왕권이 신라사신에 딸려서 사문(沙門) 지달(智達) 등을 당에 보내려고 하자 신라는 이를 거절한다. 그러나 이듬해 왜와권은 신라선을 통해 사문 지통(智通)과 지달을 당에 보내고 있다. 또 659년에는 백제를 경유하여 견당사를 파견한다. 이것은 왜왕권의 문화수입에 대한 강렬한 열망과 끝까지 당·신라 노선에서 탈락하지 않고 등거리 외교를 견지하려는 의지로 보인다. 이 사건 이후 왜와 신라·당 교류기사는 보이지 않아 양측의 국교는 단절된 것으로 생각된다.노선의 선택백제가 멸망하였다는 소식은 660년 9월 백제사에 의해 아스카 조정에 전해졌다. 이에 왜왕권은 출병을 위해 동국(東國)지방을 포함한 각지로부터 병력과 물자의 징집을 단행하고 북큐슈의 축자를 본영으로 하는 조직적인 출병계획에 의해 백제부흥군을 파견하였다. 이전에 파견된 백제지원병의 수가 1천명을 넘지 않은 것에 비하면 이 때는국가의 에너지를 총결집시킨 군사동원령이었다. 이는 왜국이 단지 백제와 전통적으로 우호관계였다는 이유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며 이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① 일본열도 위기론, ② 백제에 대핸 종주국론, ③ 백제로부터의 조(調)의 수취론 등이 제기되어 왔다. ①설은 당의 위협으로부터 왜국을 보호해야 한다는 방위전쟁론이고, ②설은 왜왕권이 당에 대신하여 백제에 대한 종주국의 지위를 획득한다는 이른바 '동이(東夷)의 소제국론(小帝國論)' 과 백제왕 책립론으로 나눠져 있고, 이 양 설에 기초해서 강력한 군주권의 수립을 지향했다는 건쟁개입설이 있다. ③설에서는 임나의 조의취득설, 백제·신라에 대한 공납관계의 유지설, 그리고 백제로부터의 조를 포함한 선진문물 수용설이다. 이중에서 ①설은 일본국내의 지배층 내부의 모순과 관련하여, ②설은 권력집중의 측면에서 ③설은 선진문물 수용이라는 보다 넓은 시야에서 계승하고자 한다. 출병 요인은 복합적이라 특정한 하나의 면만을 강조하기는 어렵고 국내외적 계기를 종합적으로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당군이 한반도에 군사적 공격을 감행하여 백제가 멸망한 직후 고구려사는 을상(乙相) 하취문(賀取文)을 수석으로 하는 100여명에 달하는 대규모 사절단을 왜에 파견하였으며 이는 당의 고구려·백제의 원정에 대한 군사외교로 보여진다. 고구려사는 『인왕반야바라밀경 仁王般若波羅密經』을 읽는 인왕반야회를 개최하여 불법수호의 귀신에 의해 국토를 수호하고자 하는 모습도 보여진다. 이 때의 법회는 당의 대백제 공격에 대한 안전을 비는 차원을 넘어 왜국의 국토방위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것은 백제의 위기가 왜국의 위기로 받아들여졌기 때이다.
    인문/어학| 2002.12.16| 6페이지| 1,000원| 조회(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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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 미술사]서양 중세의 교회 양식 변화
    Ⅰ.序論서양 미술작품에 대해 공부할 때 기독교라는 요소를 빼놓고 본다면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된다. 그만큼 그리스-로마 즉, 고전기 이후 르네상스인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간동안 미술에 큰 영향력을 끼친 것이 기독교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미술이라함은 복음서나 회화 등에서도 많은 부분 찾을 수 있으나, 기독교의 상징인 교회의 양식을 통해서 기독교 미술, 건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Ⅱ.本論1. 교회의 시작-바실리카(basilica) 양식311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를 정하고 교회를 국가의 지주로 삼게 되자 기독교를 박해하던 그전의 교회나 회당들은 규모가 작고 보잘 것 없었다. 그러나 일단 교회가 국가의 최대 세력이 되자 미술과의 모든 관계는 재검토되어져야만 했다. 고대의 신전과 교회의 기능은 전혀 다르기 때문에) 신전의 내부는 보통 신상을 모시는 작은 사당이 있을 뿐이었고 제사나 의식은 선물 밖에서 행해졌다. 반면에 교회는 사제가 높은 제단 위에서 미사를 올리거나 설교를 할 때 모여드는 모든 회중을 수용할 공간을 마련해야 했다.교회의 양식을 신전에서 빌려올 수 없으므로 고전기에 '바실리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커다란 집회소 형태를 본뜨게 되었다. 바실리카란 대충 '큰 회당'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건물들은 지붕으로 덮여있는 시장(市場)이나 공공 재판소와 같은 것으로 사용되었는데 주로 커다란 장방형의 방과 기둥들로 구분된 양옆의 보다 좁고 낮은 복도로 구성되어 있다. 맨 끝에는 흔히 반원형의 감실(혹은 후진)이라고 불리는 공간이 있다 이곳에는 집회의 장이나 재판관이 앉는 자리가 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는 교회로 사용하기 위해 이런 바실리카를 세우게 했다. 그래서 바실리카라는 말이 이런 형태의 교회당을 의미하게 되었고 반원형의 감실 또는 후진(apse)은 예배자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높은 제단으로 사용되었다. 제단이 위치해 있던 이 부분은 나중에 성가대석(choir)으로 되었다. 신자들이 모이는 중앙의 커다란 방은 뒤에 신랑(身廊,nave)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배(船)'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리고 양옆의 낮은 천장의 복도는 측랑(側廊, side-aisle)이라고 불리었는데 이는 '날개(翼)'라는 의미이다. 대부분의 바실리카에서 천장이 높은 신랑은 흔히 목재로 지붕을 했으며 들보는 노출되어 있었다. 측랑은 지붕을 평평하게 만들 때가 많았다. 신랑과 측랑을 구분하는 기둥들은 대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측랑은 창문이 나서 밝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신랑보다 항상 낮게 지었으며, 반구형의 후진이 항상 있다는 점은 바실리카 양식의 변하지 않는 특징이다. 이러한 바실리카들의 내부를 어떻게 장식하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신중한 문제였다. 당시 형상(形象)을 종교에 사용한다는 문제가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를 성상논쟁이라 하는데 이러한 논쟁으로 인해 교회 내부의 조각이나 그림 등에 그리스도에 대한 표현방식의 다양화를 가져온다. 이는 라벤나 바실리카의 모자이크《빵과 물고기의 기적》에서처럼 그리스도를 사람처럼 표현한 것과, 이와 달리 성상의 직접적 표현 대신 기호로 대신하는 키로( )모노그램) 3세기 말경 로마 제국의 여러 황제는 거대한 제국을 함께 다스리면서 패권다툼에 휘말려 있었다. 4세기 초 로마출신의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동반자이자 적이었던 막센티우스와 싸우기 전날 밤 꿈을 꾸었다. 그 앞에 그리스도가 나타나 자신의 이름을 첫 부분의 두 자음을 보이면서 "이 기호의 가호로 너는 승리하리라"고 말했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다음날 그리스도의 이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의 두 자음 '키(X)'와 '로(P)'를 그의 군기에 붙이도록 명했는데, 그날 전쟁에서 정말 승리했다고 한다. 키로모노그램은 이후 평화를 상징하는 기호로 표현되며 그리스도를 상징하기도 한다.이 있다. 교회 내부를 장식하는 방식 중 하나인 모자이크는 벽화보다 화려하고 수명이 길어 오늘날까지 많이 남아 있다.2. 중세의 교회-로마네스크(Romanesque) 양식중세를 암흑의 시대라고 한다. 하지만 암흑의 시대라고 해도 최초의 교회로 사용된 바실리카의 기억과 로마인들이 그들의 건축에 사용한 양식이 완전히 잊혀진 것은 아니었다. 후진과 성가대석에 이르는 중앙의 신랑, 그리고 그 양쪽의 이중 또는 사중의 측랑으로 이루어지는 평면설계는 그 이전과 다름이 없었다. 이 간단한 평면설계를 몇몇 부속물을 붙여서 화려하게 만들 때도 있었다. 어떤 건축가들은 교회를 십자형으로 짓는다는 발상에서 성가대석과 신랑사이에 수랑(袖廊, transept)라고 불리는 것을 첨가했다. 그러나 이들 노르만 양식의 교회, 즉 로마네스크 양식 교회의일반적인 인상은 옛날 바실리카와는 대단히 달랐다. 초기의 바실리카에는 수평의 '엔타블레이처'를 받쳐주는 고전적인 원주(圓柱)들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로마네스크나 노르만식 교회 건물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대체로 육중한 각주(角柱, pier)가 받쳐주는 둥근 아치들이다. 이런 교회들이 주는 내부와 외부의 전체적인 인상은 중후한 힘이다. 이런 교회 건물에는 장식도 거의 없고 창문도 몇 개밖에 없었으며 중세의 성체를 연상시키는 견고하고 잇따른 벽과 탑뿐이었다. 교회 건축과 관련하여 새로운 문제에 봉착하였는데 그것은 인상적인 석조 건물에 어울리는 석조 지붕을 올리는 것이었다. 바실리카 성당에 통상적으로 사용되었던 목조 지붕은 위엄이 없고 불이 날 경우 쉽게 타버릴 위험이 있었다. 이렇게 큰 건물에 궁륭(穹 )을 올리는 로마의 기술에는 많은 석재가 필요하였고 여러모로 어려움이 뒤따랐다.그래서 로마네스크 건축가들은 이와는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가로지르는 몇 개의 단단한 아치를 세우고 그 사이사이를 가벼운 재료로 메우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여 기둥들 사이에 아치나 늑재를 서로 엇갈리게 걸쳐놓고 나서 이 늑재 사이의 삼각형 부분을 메우기 시작했고 이는 훨씬 과학적인 발견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로마네스크 양식은 셍 세르넹 교회와 오텅 대성당에서 찾아 볼 수 있다.3. 화려한 교회로의 변신- 고딕(Gothic)양식서기 약600년부터 시작된 유럽의 중세는 초기 기독교의 이상에 따라 미술로 신의 영광을 가시화하려 했다. 따라서 중세의 미술작품은 오랫동안 신에 대한 경배의 역할만 맡았다. 건축분야에서 커다란 변화와 발전을 찾아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이전 로마네스크 양식을 기본으로 하여 그 위에 덧붙여져 고딕이라는 양식을 만들어 낸 것이다.로마네스크 양식은 12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교회 양식에 대한 새로운 이념이 생겨났는데 이는 프랑스 북부에서 생겨난 고딕양식이다. 서로 교차하는 아치를 이용하여 교회의 둥근 천장을 만드는 방법은 로마네스크 건축가들이 꿈꾸었던 것 이상으로 일관성 있고 보다 훌륭한 건축의 실현을 가능케 하는 방향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만일 기둥들이 또 다른 석조로 메워져 있는 궁륭의 아치를 지탱할 수 있다면 기둥들 사이의 육중한 벽들은 모두 불필요한 것들이 되며, 그래서 건물 전체를 떠받치는 일종의 돌의 골조(骨組)를 세우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렇게 하는데 필요한 것은 가느다란 기둥과 좁은 늑재(肋材, rib)정도였다. 그 골조가 주저앉을 위험이 없는 한, 그 사이에 있는 것들은 다 없애도 상관없었다. 육중한 돌로 벽을 쌓을 필요가 없어지고 그 대신 큰 창문을 낼 수 있었다. 여기서 채색된 창유리에 성인들의 이야기를 표현한 스테인드 글라스) 초기 교회의 벽화를 대신한 것으로 예수와 마리아, 성인의 생애 그리고 구약성서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따로는 교회 건축에 참여한 수공업자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가 나오게 되고 고딕의 화려한 양식에 한 몫하게 된다.기존의 늑재의 형식에서 바꿔서 두 개의 활 모양의 늑재를 접합시킨 첨형 아치형태가 기존의 둥근 아치에서 발전되어 나왔으며 이것은 늑재나 기둥에 부담이 둥근아치보다 줄어들게 된다. 하지만 기둥만을 가지고 외부의 압력을 지탱하기 어렵기에 건물 전체가 제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주 강한 버팀목이 필요했다. 궁륭 천장을 가진 측랑 부분에서는 어려운 문제가 없었으나, 그보다 높은 신랑을 지탱하기위해 공중부벽(空中扶壁,flying buttress)을 도입하였다. 고딕 식 교회 건물은 갸냘픈 돌 구조 사이에 걸려서 그 하중을 지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전체의 견교함을 유지하며 그 구조에 필요한 자재를 점점 줄일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각 부분에 무게를 균등히 배분하는 것이다.과거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들은 그 힘과 권세에 있어서 악의 공격에 대해서 피난처를 제공해주는 '전투적인 교회'라는 인상을 주었을 테지만 이 새로운 고딕 성당들은 신자들에게 전혀 다른 세계를 엿보게 해주었다. 성당의 벽은 루비나 에메랄드처럼 빛나는 스테인드 글라스로 만들어졌다. 기둥과 늑재, 창의 트레이서리 장식은 황금빛으로 빛났다. 육중하고 세속적이고 단조로운 것은 모두다 제거되었다. 이러한 건물들은 멀리서 보아도 마치 하늘의 영광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고딕양식의 건물중에서 가장 완벽한 것으로 뽑히는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역시 현관과 창문의 배열은 매우 명료하고도 힘이 안들어 보이며, 회랑의 트레이서리 장시도 아주 날씬하고 우아하기 때문에 돌더미의 무게감을 잊게 해준다. 천상의 주인처럼 현관의 좌우에 배치된 조각들도 경쾌하고 중량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처럼 거대한 교회의 주현관에는 언제나 인물상을 배치하였다. 초기에는 그 상을 뒤의 원주와 거의 붙여 제작하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원주와 떨어뜨려 좀더 동적으로 표현하였다. 기쁨이나 고통 같은 인간적 감성 표현도 점차 다시 나타났다.
    인문/어학| 2002.12.16| 4페이지| 1,500원| 조회(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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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차(茶) 평가B괜찮아요
    韓國의 茶Ⅰ. 차의 기원차(茶)는 차나무의 잎을 따서 만든 기호음료를 말한다. 사람들은 불을 발견하면서부터 물을 끓여 마시는 법을 배우게 되었고, 거기에다 식물의 뿌리·잎·열매·줄기 등을 첨가시켜 마시게 되면서 맹물보다 훨씬 맛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되어 점차 차 마시는 생활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런 차의 기원에 대해 여러 가지 전설이 있는데 모두 그것을 뒷받침해 줄 사료가 부족하여 명확하게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 연대가 가장 오래된 것은 염제신농(炎帝神農)씨 발견 설로써 두 가지 설이 있다.그 중 하나로, 신농씨는 야생의 풀을 일일이 씹어 자세하게 성질과 용법을 기술했는데, 하루는 독초를 씹어 독이 온몸에 번져 죽음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눈앞에 나무도 풀도 아닌 가지가 보여 그 잎을 따 씹으니 순식간에 해독이 되고 살아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신농은 그 나무를 차(茶)나무라 이름하고, 해독을 제일의 효능으로 전하게 되었다{) 풀 초(艸)와 나무 목(木) 사이에 사람 인(人)이 있는 차(茶)라는 글자는, 이 때 신농씨를 죽음 에서 살려낸 데 기인하여 만들어진 것이라 전한다..신농씨에 관한 설 중 나머지 하나는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신농씨가 마실 물을 끓이고 있는데, 땔감으로 사용하던 나뭇가지의 잎이 바람에 날려 뚜껑이 열린 주전자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마침 그 물을 마신 황제는 향기에 취해 그때부터 그런 것만 마시기를 고집했고, 그 일로 해서 차 마시는 풍습이 널리 성행했다고 전한다는 것이다.다음은 전국시대 명의(名醫) 편작(扁鵲)에 얽힌 일화이다. 그 당시 편작은 천하의 명의로 제자들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8만 4천가지 병에 대한 약방문 중 절반도 안돼는 4만가지 약방문을 전했을 때 경쟁자의 흉계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다. 이에 제자들이 선생의 무덤 가에서 100일을 슬퍼하니 편작의 무덤에서 한 나무가 솟아올랐다. 그것이 차나무였는데 하도 신기하여 제자들이 그 나무를 이리저리 관찰하고 연구해보니, 그 잎에 담긴 여러 성분이 신비한다고 추측한다.세 번째 전래설은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경덕왕과 충담선사가 만나 차를 나누는 장면을 보다 구체적으로 전하고 있다.스님이 걸망을 푸니 차와 다구(茶具)가 나왔다. 정성껏 차를 다려 경덕왕께 드리니 왕은 그 맛의 은은함과 기이한 향기를 극찬했다. 충담은 주위의 신하들에게도 차를 나누어주었다.경덕왕은 신라 제3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이 742년부터 765년이니 세계 최초로 다경(茶經) {) 중국 당(唐)나라의 육우가 간추린 대표적인 다도(茶道)에 관한 책이다. 권 1에는 차에 대한 설 명과 도구, 만드는 법이 실려있고 권 2에는 다기(茶器), 권3에는 끓이는 법, 마시는 법, 산지 및 역사, 간단히 만드는 법, 도식(圖式)의 소개 등이 실려있다.을 썼다고 하는 육우(陸羽)가 막 태어나 자랄 무렵이다.이와 같이 차의 전래설은 시대와 들어오게 된 계기가 다 다르다. 하지만 대부분의 차가 중국에서 불교의 전래와 함께 건너온 것으로 보고있는 것이 차의 전래에 대한 일반적 견해이다.Ⅲ. 차의역사1 고대 사회의 차우리 나라 고유의 차는 초의 선사의 『동다송 東茶頌』에 의하면 고래(古來)로 장백산에 백산차가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사람들은 장백산 중에 있는 나뭇잎을 따서 알맞게 다려 마셨다고 한다. 효당(曉堂) 최범술(崔凡述){) 1904∼1979. 승려·독립운동가·교육자·다도인(茶道人)·정치가이다. 젊은 시절 이름은 영환 (英煥)이며 당호는 금봉(錦峯), 법호는 효당(曉堂)이다. 1915년 곤양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6 년 사천 다솔사(多率寺)로 출가하였다. 1960년 이후 다솔사의 조실(祖室)로 원효교학(元曉敎 學) 및 다도연구에 전념하였고, 1969년 국민훈장무궁화장을 받았다. 1977년 7월 10일 입적하자 다솔사에 부도(浮屠)를 봉안하였고, 1986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은 이 나무를 생강나무일 것이라 하고 응송(應松) 스님은 석남과에 속하는 철쭉꽃이라고 하였다. 우리 민족이 한반도에 이동하여 농경생활을 하면서 정착하여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게 되면서 이전에 이미 차를 마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따라서 백제는 지리적 위치나 기후로 보아 일찍이 차나무를 재배하고 차를 생산하였을 것이다.3 신라·통일 신라 시대신라는 지리적 위치로 인해 사회적, 문화적으로 그 발전이 고구려와 백제에 비하여 후진적이었으나 6세기 초 불교의 공인과 더불어 왕권의 강화와 귀족사회의 안정이 확립되고 문화가 전반적으로 발전되고 있었다. 특히 진흥왕(579-632)이후 화랑제도의 공인으로 청소년들의 인재양성과 불교의 호국적 신앙의 성격은 국가발전과 삼국통일의 토대가 되었다. 법흥왕 19년(532)에는 김해를 중심으로 수로(首露)를 시조로 받드는 금관가야를 합병하고, 진흥왕 23년(562)에는 고령 중심의 대가야를 정복하였다. 이 두 지역 모두 차가 많이 나는 지역이므로 신라가 차 문화를 인식한 것은 중국문화의 수용과 더불어 6세기쯤으로 짐작된다. 또 『삼국사기』제 10권 흥덕왕 조에 실린 기록{) 3년(828) 12월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대렴(大廉)이 차종자를 가져왔으므로 왕 은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성행하였다.을 보면 7세기인 선덕왕 때 이미 토산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 시대에는 왕과 귀족, 승려와 화랑도, 학자들을 중심으로 차 생활이 영위되었다. 차는 정신을 맑게 하고 잠을 쫓아주기에 선(禪)을 행하는 승려들에게 도움을 주었으며, 나아가 불전(佛前)에 공양하기까지 이르렀다. 또한 미륵부처께 올린 차는 현세뿐만 아니라 미륵신앙을 통해 미래의 이상향을 기원했으리라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삼국을 통일하는 데 공헌한 화랑들도 차를 즐겨 마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신라의 사선(四仙){) 신라시대의 네명의 국선(國仙)으로, 영랑(永郞)·술랑(述郞)·안상(安詳)·남석행(南石行)이 있다.들이 차를 마셨다는 기록이 고려와 조선시대의 문헌들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이런 지배계층들 뿐만 아니라 가야를 흡수하면서 음다풍속을 가진 가야의 일반 백성들을 통해 신라 서민들도 차를 용모단정한 자 백 명으로 줄이기도 했으며 때로는 종군(從軍)하게 하였다. 차군사 제도는 이 웃나라에서 볼 수 없는 제도인데, 이는 신라 시대의 국선(國仙) 및 화랑들과 낭도들이 산천을 유람하며 수련할 때 차를 마실 도구를 지니고 다니던 풍습에서 유래되어 제도화 된 것으로 보인다., 다원(茶院), 다시(茶時), 차점(茶店) 등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조정이나 궁중의 여러 가지 행사에서 차를 준비하여 올리고 베푸는 등의 의례적인 찻일을 맡아 진행하는 벼슬이나 사람을 말하는 다방과 궁중 밖에서 왕족에게 차를 올리거나 준비하는 일을 위해 다구와 짐을 나르는 차군사가 있었다. 또 차를 마시기에 좋은 샘물이나 정자 또는 차가 유명한 원{) 원이란 임금이나 관원, 혹은 승려를 포함한 귀족이 먼 길을 가다가 도중에서 쉬는 집으로, 요 로(要路)나 인가가 드문 곳에 두었던 국영 여관인데 승려가 거처하기도 하였다.을 다원이라고 하였고, 사헌부에서 공정한 판결을 하기 위해 머리를 맑게 하는 다시를 가졌다. 그리고 일반 백성들은 차점(茶店)에서 돈과 물건으로 차를 사 마셨는데 이로 인해 차를 마시는 풍속이 사회 전반에 성행하였다.차는 궁중의 의례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여 나라의 큰 행사인 팔관회(八關會)와 연등회(煙燈會)때 토신(土神)과 부처님께 헌다(獻茶)하고 궁중의 각종 의식에도 다례가 베풀어졌다. 고려의 승려들은 수행 때와 불교 행사 때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차를 즐겨 마셨으며 사원에서는 차 끓이기를 서로 겨루는 명선(茗禪)이라는 풍속이 행해졌다. 이렇듯 사원에서 차의 쓰임새가 많아지자 사원 주변에는 사원에 차를 진공(進供)하기 위한 다촌(茶村)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귀족과 문인사회에서 또한 헌다 풍속이 매우 성행하여 명석(茗席){) 고려의 문인들도 서로 약속하여 찻자리를 마련하였다. 때로는 초대장을 보낸 경우도 있었으 며 찻자리에서 반나절을 보냈다는 기록도 볼 수 있다. 문인들 간에는 훌륭한 찻자리에 참석하 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였고, 김서(金 )는 자신을 「찻자리의- 이규보(李奎報 1168-1241) : 고려 중기의 대문장가로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로 무신정권시대에 큰 뜻을 펴지 못하였지만 뛰어난 문인으로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 『백운소설 白雲小說』,『국선생전 麴先生傳』등의 저서와 다시(茶詩) 40여편을 남기고 있다.. 차를 끓여 마시어 바위 앞의 샘물을 말리고 싶다고 할 정도로 차를 좋아하여 손수 차를 끓여 마셨으며,「다는 선(禪)의 시작이고」「차맛은 도(道)의 맛이다」라고 하여 세계 최초이며 유일하게 다도일미(茶道一味)를 주장하였다.- 이제현(李齊賢 1287-1367) : 고려말의 문인이요 성리학자이다. 충선왕 때 원에 유학하였으며 『익제집』, 『익제난고』, 『역옹패설』등의 문집을 남겼다. 원나라에서 화전춘차(火前春茶)를 가져와 손수 달여 마시며 다인들에게 나누어 준 기록도 있다. 그는 경포대와 한송정에서 신라의 사선(四仙)들이 차끓여 마시던 것과 똑같은 석지조{) 돌못화덕를 개성 근처 묘련사에서 발견된 것을 기념하여, 그 내력에 대한 기문(記文)을 쓰고 여러 문인들과 그 석지조에 차를 끓여 마셨다. 또 송광사 스님들로부터 차를 선물로 받고 쓴 편지체의 장시(長詩)가 있어 이제현의 차 생활 경지를 알 수 있다.- 이색 (李穡1328-1396) : 고려말 문인이며 성리학자 이다. 호는 목은(牧隱)이며 관직이 성균관 대사성(大事成)에 이르렀다. 고려가 멸망하자 절의를 지켜 조선조에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목은은 차를 좋아하며, 차를 끓여 마시니 편견이 없어지고 마음이 밝아 생각에 그릇됨 이 없다하여 무사의(無邪意)한 경지를 표현하였다. 송광사, 문천사 승려들이 보내준 차를 받고 이에 감사의 다시(茶詩)를 남겼다.5 조선시대고려 말엽부터 선비들이나 귀족층에서 즐겨 마시던 차는 조선시대에도 주류를 이루어, 궁중 제사에도 차를 썼다. 조선 초엽에는 조정과 왕실의 제도나 의례에서 고려의 음다 풍속을 잇고자 노력하였고, 선비 차인들도 매우 많았다. 조선시대 문인들은 대체로 대자연 속에서 소박하게 차를 즐겼다. 소나무 .
    사회과학| 2001.12.11| 11페이지| 2,000원| 조회(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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