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 후 감도 서 명21세기, 신사유람단의 밥상 경제학저 자현 의 송출 판 사이 가 서□ 독후감 내용이 책을 다 읽고나니 한 문장이 머리 속을 스쳤다. ‘우리 농업에도 희망이 있다’였다. 저자가 이 책에서 일본의 농업과 농촌 그리고 농민의 실상을 그저 묵묵히 보여줄 뿐,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농업의 암울한 현실과 그에 대한 대책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은 이유도 이런 희망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닐까. 늘어가는 농가부채, FTA와 DDA에 따른 개방의 가속화, 농촌의 노령화, 농업인 내부의 양극화 등등 우리 농업이 직면한 현실은 암담하다. 하지만 여러 부분에서 한국농업과 닮은 일본의 농업이 똑같이 거센 세계화의 파도에 휩쓸리면서도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저자는 이처럼 우리도 자신감을 갖고 우리 농업의 경쟁력을 키워나간다면 희망이 있음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그렇다면 도시보다 잘사는 일본 농촌의 성공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8개월 동안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며 급변한 일본 농촌을 돌아본 저자는 가장 먼저 농민들의 의식변화에서 그 이유을 찾았다. 일본 농민은 시장경제를 인정하고 발빠르게 이에 대처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반면 우리 농민은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이를 쉽게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FTA 반대 등 시장경제의 대세를 막으려 하기보다 살아남을 수 있는 경쟁력 확보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이러한 의식 변화와 함께 일본 농민은 전문가를 지향하고, 농장은 다양한 이벤트로 도시민을 불러들이며, 영농은 집단화했다. 농민들은 단순히 농작물을 생산만하는 단계에 머물지 않고 프로의식을 가진 농업 경영자가 되어 생산은 물론이고 유통?가공?판매 등의 분야까지 그 범위를 확대하였다. 저자는 이것을 1차 산업, 2차 산업 그리고 3차 산업을 아우르는 의미에서 6차 산업이라고 명명했다.책에 나와있는 여러 가지 사례 중 6차 산업의 효시인 후나카타 종합농장이 가장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야마구치 현 아도우 읍에 위치하고 있는 후나카다 종합농장에는 직영목장과 농장이 있고 생산된 낙농품과 농산물을 직접 가공하는 공장은 물론 가공제품을 판매하는 직매장도 함께 있다. 또한 직영목장에서 생산한 쇠고기를 먹을 수 있는 바비큐 식당도 있다. 더 인상적인 것은 지역 농업 인력의 고령화와 후계자 부족 문제를 대응하기 위해 주변 농가와 제휴해서 벼 수확을 도와주는 대신 볏짚을 받아 목장에서 나온 축분과 배합해 퇴비를 만들어 사용한다는 것이다. 또한 벼농사에서 나온 왕겨는 태워서 꽃 재배와 과수원에 사용한다고 한다. 이를 ‘후나카다식 순환시스템’이라고 하는데 목장과 벼농사 그리고 과수원 및 꽃재배 등 겸업 경영을 통해 시너지 효과를 창출했다.여기에 더하여 후나카다 그룹은 농장 규모확대와 함께 나타난 축산환경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지역 사회 그리고 도시 지역과 공생하는 경영전략을 수립했다. 즉 지역 사회와 도시 지역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체험관광 및 교류관광을 활성화한 것이다. 그 결과 관광객이 크게 늘었고 총 매출액도 급속히 상승했다. 전국 각지에 후나카다 농장을 벤치마킹한 여러 농장들이 연이어 나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농업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꾼 것이었다. 1차 산업에 머물러 있는 농업을 2차, 3차를 넘어 6차 산업으로 끌어올렸다. 생산 중심농업에서 가공과 직접 판매 그리고 체험관광에 중점을 둔 농업으로 변신한 것이다.일본 농촌의 성공에는 공통적으로 한국에는 없는 특이점이 있다고 한다. 일본의 지역경제가 활성화된 곳에는 반드시 리더가 있는데 그중 90%가 지자체 공무원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보통 한 시?군에 700~800명 정도의 공무원이 있지만 거의 전부가 인근 도시에서 출퇴근하기 때문에 그 지역의 발전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지만 일본의 경우 거의 100%가 그 지역에 살고 있다고 한다. 정말로 단순한 월급쟁이가 아닌 지역 발전을 내 일처럼 생각하는 공직자가 절실히 필요한 때임을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외에도 소비자 중심의 마케팅 및 땅심 높이기 전략이 일본 농촌의 성공에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한편 노인과 여성인력의 활용은 농촌을 살리는 밑거름이자 또 하나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세계 최장수 국가인 일본에서 노인복지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인데 농촌 살리기 운동과 더불어 그들이 갖고 있는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살릴 수 있도록 일자리를 제공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돌봄의 복지를 넘어 경제적 성취감과 자립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진정한 복지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여성이 일자리를 가지면서 자신을 계발하고 가계를 일으키는 사례들은 여성들이 개인과 가정을 넘어 어떻게 지역사회의 발전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지 보여준다.
“부자의 생각 빈자의 생각”을 읽고이 책을 처음 받고서 생각이 인생에 영향을 미친다는 수많은 책 중의 하나쯤으로 여겼다. 누구나 알고 있는 식상하고 원론적인 사실을 멋지게 포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을 조금씩 읽어가는 과정에서 이전에 알고 있던 책과는 사뭇 다름을 느꼈다. 이 책은 저자가 생각하는 위대한 생각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제시하였고 그 생각을 자신의 생각으로 바꾸면 누구든지 원하는 삶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강조했다.자신에 관한 생각의 첫 부분에서 나온 부자의 생각과 빈자의 생각을 읽어보니 현재 내 생각은 빈자의 생각에 가까웠다. 부자의 생각은 내가 환경을 바꾼다는 것이고 빈자의 생각은 환경이 나를 통제한다는 것이다. 내 생각이 빈자의 생각에 가까운 것도 사실은 환경 탓이다.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다닌 나로서는 신이 내게 주신 환경을 바꾸기보다 그 안에서 만족하며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난 환경을 탓하기보다 환경에 적응하는 사고를 해왔다. 어려운 상황이 오면 그걸 극복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기보다 그 상황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갖기 위해 노력해왔다. 환경을 바꾸려는 시도를 신에 대한 도전을 간주했을 지도 모른다. 이런 내게 저자의 주장은 신선하고 새로웠다. 내가 환경을 만들어 간다는 생각은 새로운 패러다임처럼 느껴졌다.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에 대한 생각이외에도 타인, 조직, 가정 그리고 사회에 대한 위대한 생각의 리스트를 나열한다. 그 생각 중에는 기존의 내 생각과 일치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많은 부분 내 생각과 달랐다.타인에 대한 생각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다르다는 제목의 글에 보면 빈자는 재능은 계발하면 되고 적성은 맞추면 된다고 생각하는 반면 부자는 재능이 있고 적성에 맞는 일을 해야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난 전자의 생각을 해왔다. 비록 처음엔 적성에 맞지 않더라도 하다보면 적응하고 적성에 맞게 된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내 적성을 찾기보다 그냥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내 자신을 맞추게 만들었다. 내가 지금하고 일에 큰 만족을 얻지 못하는 이유가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내 적성과 재능에 맞는 일이 어떤 것인지 더 고민해 봐야겠다.가정에 대한 저자의 생각도 새로웠다. 가정도 경영해야한다는 것이다. 가정이 기업도 아닌데 경영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처음에는 별로 탐탁지 않았지만 책을 읽어가면서 가정도 하나의 계약으로 만들어진 공동체임을 깨닫게 되었다. 가정도 성공과 실패가 있고 그 결과는 가정을 어떻게 경영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젊은 세대의 이혼과 황혼이혼이 증가하는 요즘 가정경영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변화를 두려워하면 1등은 없다”를 읽고최근 서울시 3% 퇴출제 시행으로 논란이 일고 있다. 공무원이 철밥통인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는 생각이 든다. 기업처럼 공무원도 혁신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가 된 것 같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왜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공공기관이 혁신해야 하는 걸까? 단지 남들이 하니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에 대한 대답을 에서 찾을 수 있었다.경영학의 대가인 피터 드러커가 쓴 에 보면 혁신이란 기존의 자원이 부를 창출하도록 새로운 능력을 부여하는 활동을 의미한다. 이런의미에서 공공기관의 혁신은 기존의 자원 즉 구성원과 조직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공공기관의 혁신이 필요할까? 이에 대해 피터 드러커는 공공서비스 부분이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중요하고 규모가 커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회적?기술적?경제적 그리고 인구구조 등 모든 측면에서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는 시대에 공공기관의 서비스가 변화하지 않으면 사회 전체 발전에 역행하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민원인들은 다른 기업들의 고객서비스와 비슷한 수준의 서비스를 공공기관에서도 찾는다. 예전에 비하면 공공기관의 서비스가 굉장히 좋아졌지만 여전히 더 높은 기대를 갖고 있다. 그만큼 사회가 급속히 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공공기관도 그에 발맞춰 변해야 하는 것을 뜻한다.하지만 공공서비스 기관이 혁신을 추진하는 것은 기업 가운데 가장 ‘관료적’인 회사의 경우보다 훨씬 더 어렵다고 한다. 이에 대해 피터 드러커는 세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우선 공공기관은 실적에 따라서가 아니라 예산을 기초로 보상을 받고 둘째로 이해관계자들이 많아 모두를 만족시키기가 어려우며 마지막으로 공공기관 자체가 선한 일을 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했다.과감한 경영혁신으로 고객만족도 최하위 기업에서 경영평가 1위 기업으로 발돋음한 KOTRA의 사례가 의미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KOTRA의 혁신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성과중심의 사업과 실적중심의 평가이다. 기존의 공공기관들은 주어진 예산을 집행하고 발생한 민원을 해결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러다보니 계속해서 조직의 규모는 점점 비대해졌고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게 변하기 어려운 구조가 되었다. 또한 기존의 일을 답습하기에 바쁜 나머지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는 둔감했던 것이 사실이다.이제는 성과 중심의 사업을 시행해야한다. 여기에서 성과란 기업처럼 재무적 순이익은 아니다. KOTRA는 수출과 투자증진으로 그 성과의 기준을 삼았다. 즉 기관의 비전에 맞는 성과 기준이 필요하고 그 기준을 바탕으로 조직의 성과평가가 이루어져야한다. 지방자치단체처럼 다양한 고객을 상대하는 경우 그 기준을 정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다양한 의견을 통해 의미있는 성과 기준을 도출하지 않으면 혁신이 도리어 또 하나의 짐이 될지 모른다.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1장 조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세우다1) 건국의 중심이 된 인민위원회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선언으로 한반도는 환희에 쌓였고 1944년부터 일본의 패망을 예감하고 건국동맹 이라는 비밀조직을 만든 여운형은 서울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를 결성하여 건국 준비를 하였다. 38선 이북에서도 다양한 조직이 만들어졌다. 평양에는 조만식을 중심으로 한 평남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고 공산주의자들도 조선공산당 평남지구 위원회를 결성하였다. 그 당시는 좌우익의 대립이 없이 서로 협력하는 분위기였다.그러나 미군과 소련군이 들어오면서 건국운동은 큰 영향을 받았다. 소련군은 일본과의 계속되는 접전 끝에 8월 22일 일본으로부터 공식적인 항복을 받아내고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의 행정권 이양조치를 취하였다. 당시 이북지역에 대한 정보력 부족으로 임시적으로 일본측이 행정권을 계속 행사하도록 조치하였으나 조선민족함남집행위원회 가 결성된 것을 통보받고 조선인들의 행정권을 인정하였다. 그 후 이 기구는 치안유지와 물자확보를 하면서 함경남도의 행정권을 장악했고 명칭도 함남인민위원회로 바꾸었다. 원산에서도 원산인민위원회가 행정권을 장악했다.8월 25일 소련군이 평양에 입성했고 그곳의 정치 지도자들과 일본 측 대표들과 행정권 이양 논의를 한 후 평남건국준비위원회의 후신인 평남인민정치위원회에 행정권이 이양되었다. 평남인민정치위원회도 함남인민위원회와 같이 좌우의 정치지도자들이 함께 참여한 기구였다. 대립도 있었지만 일제시기 신간회때 부터 함께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이북지역의 중앙정권과 같은 역할을 하는 평남인민정치위원회는 「시정대강」에 근거하여 소작료 3·7제에 관한 규정을 발표하여 농민들의 부담을 줄여 준 뒤 이름을 평남인민위원회로 바꾸고 이북지역의 개혁작업을 주도해나갔다.그러나 함경남도와 평안남도에서의 좌우 정치인들의 순조로운 건국 준비활동과는 달리 평안북도와 황해도 지역에서는 좌우간의 충돌이 적지 않게 나타났다. 소련군의 진주와력의 변화와 더불어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개혁이 시작되었다. 시급한 문제인 문맹퇴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행정 10국에 교육국을 만들고 그 아래에 성인교육부를 설치했다. 문맹퇴치와 기본교육에 대한 국가차원의 지원으로 학교의 신설과 교원의 양성이 이루어졌고 이러한 사업을 지원하기 위한 재정지원도 동시에 이루어졌다. 한편, 교과서도 새롭게 제작되었고 기타 교육에 필요한 각종 문구들을 공급하기 위한 학교기금헌납운동도 전개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년만에 1,110개의 6년제 인민학교, 217개의 중학교가 세워졌다. 또한 두 개의 사범전문학교와 여덟 개의 사법학교도 세워졌다.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대중적인 교육활동과 더불어 중앙당학교와 평양학원 그리고 만경대혁명학원을 세워 당 간부 양성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평양에서는 경제성장과 문화적 욕구를 좀더 높이 실현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히 진행되어 평양을 혁명의 수도, 민주의 수도로 만들 뿐 만 아니라 경제의 수도를 만들자는 구호가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평양의 상하수도 공사와 석탄운반 철도 및 도로공사 등이 대대적으로 진행되었고 박물관과 도서관 그리고 네 개의 극장, 일곱 개의 영화관이 건립되었다.그런데 이 시기 평양에는 보통강 범람이라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평양을 홍수에서 보호할 뿐만 아니라 하층민의 고단한 삶의 상징인 보통강 일대를 아름다운 곳으로 바꾼다는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중요한 공사였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공사였다. 그러나 전국 각지의 지원과 전 공산당원의 노력으로 약 45일만에 성공적으로 공사를 마무리하였다. 일제가 10년을 매달려도 성공하지 못했던 공사를 약 45일만에 끝낸 것이었다. 이것은 인민들에게 건국의 자신감을 주는 계기가 되었고 대중 동원의 중요한 전례가 되었다.여세를 몰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3차 확대위원회에서는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이 전개되었고 새 조국 건설과 새 사회건설을 위한 일대 사상개조운동과 경제문화 건설과 밀접히 결부된 전 군중적 애국운동이 선포되를 적극적으로 고려하였다. 이는 인민을 통합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정책이었다. 이에 따라 전국주요도시에는 유자녀 보육원 , 유자녀 학원 , 전쟁고아들을 위한 초등학원 등이 설치되었다.북한은 인민을 동원할 때 배려와 적절한 통제를 활용하였다. 전쟁피해자들과 전문가들에 대한 배려를 기반으로 각급 조직을 강화하고 그에 따른 규율의 강조를 통해 효과적인 통제를 실현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선전선동 사업의 강화를 통해 리 단위의 일반인민에까지 당의 통제력을 강화시켰나갔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농촌에서 후방지원사업을 독려했다.노동분야에서도 엄격한 동원이 진행되었다. 노동시간이 두시간에서 네시간까지 연장되었고 직업총동맹을 통하여 노동력에 대한 원천조사가 진행되었다. 철도부분에서는 가장 엄격한 규율생활이 적용되었다. 이북지도자들의 배려와 통제를 통한 인민동원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전쟁기간동안 민간인 수가 180여만명이나 감소하였지만 경제활동 인구수는 거의 감소하지 않았다. 이러한 동원의 성공은 후방의 헌신적인 현금, 현물 헌납이 큰 역할을 하였다.이 모든 것은 전쟁의 피해로 인한 좌절과 분노, 그리고 미국에 대한 적개심이 고조되었기에 가능했다. 이북의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분노를 사회주의를 향한 통합과 동원의 방편으로 활용했다.3장. 폐허 위에 세운 사회주의1) 폐허의 땅에 사회주의를 건설하다3년간의 전쟁으로 북한은 폐허상태가 되었다. 피해가 제일 심한 부분은 공업부문으로 8천7백개의 공장이 파괴되었다. 농업생산의 피해도 컸는데 폭격으로 관개시설과 제방 그리고 저수지가 파괴되었고 37만 정보의 논밭이 피해를 입었으며 경지면적은 9만정보가 줄었다. 전쟁을 일으킨 대가였지만 그 속에서 북한 인민이 겪은 고통은 처참하였고 전후 북한 정권은 우선적으로 경제복구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1953년 8월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6차 전원회의를 열어 전쟁을 총결산하고 전후 경제 복구의 기본방향을 세웠다. 김일성의 권력은 이 회의에서 더욱 강화되었고 그를 중심으로 김두봉·박정다 3년 뒤인 1970년에 가서야 마무리되었다. 1960년대 중반이후 북한의 경제성장은 점차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반면에 남한의 박정희 정권은 산업화 정책에 의해 점차 북한 경제력을 따라잡게 되었다.북한의 1960년대 중반 이후 경제성장이 벽에 부딪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국방비 부담이 계속 커졌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보호를 받는 남한과 달리 북한은 스스로 국방을 책임져야했고 미국의 베트남 참전이 확대되면서 위기감을 갖고 국방비를 대대적으로 늘렸다. 두 번째 원인은 소련과 중국의 대립 속에서 북한이 점차 고립화되었기 때문이었다. 북한은 주체와 자주를 강조하였지만 이는 소련에서 들어오는 원조의 축소를 감수해야만 했다.2) 자주노선의 선택과 주체사상의 탄생북한이 본래 원했던 것은 내부적 주체의식이었지 현재와 같은 고립의 길을 아니었다. 북한의 문제는 북한의 실정에 맞게 풀어나가야지 소련식이나 중국식에 너무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이었지 소련과 중국에 대해 자주를 선언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소련과 중국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공산권과의 단결을 원하는 북한정부의 희망은 점차 깨져갔다중국과 소련간의 갈등 즉 중소갈등은 이념 논쟁 형태로 시작했다. 우선 소련공산당 제 20차대회에서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을 비판하고 사회주의 사회가 건설되면 계급투쟁 없이도 평화적으로 공산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고 선언하자 중국은 이런 소련의 평화공존론을 수정주의라고 공격했고 소련은 중국에 대해 교조주의라고 맞대응하였다. 북한은 어느 쪽도 공개적으로 비난하지 않고 사회주의 국가들이 하나의 대가정으로 굳게 단합하기를 원했다. 자원과 기술이 부족한 북한으로서는 특히 소련의 원조가 항상 절실했다.김일성은 1961년 6∼7월에 직접 정부 대표단을 이끌고 소련과 중국을 방문하여 두 나라와 각각 우호·협조 및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하였다. 북한 정부는 그 해 조선로동당 대회를 통해 소련과 중국을 포함해 32개 국가와 공산당을 대표하는 외교사절을 초청하여 국제적인 우의를 다지고자 노력하였다. 북한은 교조주의 공산주의 혁명가 로 키우고, 온 사회의 인텔리화 를 촉진시키는 등 유일체제의 교육방법론이 완성되었다.유일체계가 강화되고 사회주의 제도가 법적으로 완성되면서 사회적으로 계급주의적 분위기가 등장했다. 1970년대 중반 인민재등록 사업에서 부농 출신, 일제 복무자 등 독재대상과 복잡한 계층은 직장의 배치나 대학 진학 등 사회생활에서 차별을 감내해야 했다. 이러한 차별은 시간이 지나면서 완화되긴 했지만 분단체계가 낳은 부정적인 산물이었다.주체사상은 1978년 말 우리식대로 살아나가자 라는 구호로 시작해서 숨은영웅모범따라배우는 운동 과 전군의 주체사상화 등 여러 방면에 큰 파급효과를 낳았다. 1980년 10월, 북한은 조선로동당 제6차 당 대회를 개최하여 지난 시기를 결산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앞으로의 새로운 시기에 대한 전망을 내놓았다. 경제분야에서 10대 전망목표를 제시하였고 이를 추진하기 위해 80년대 속도 창조운동을 발기하였다. 이 운동은 3대혁명소조운동,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 숨은영웅모범따라배우기운동 등 기존에 전개되던 대중운동들과 밀접히 결합되어 전개되었다. 이 운동은 90년대속도 창조운동으로 연장되었으나 1990년대 위기상황으로 자취를 감취었다.김정일이 1982년 3월에 발표한 논문「주체사상에 대하여」은 종래의 주체사상을 전면적으로 심화, 발전 시킨 것이며, 전일적으로 체계화 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이 논문에는 주체사상의 구성, 즉 철학적 원리와 사회역사원리, 그리고 지도적 원칙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유일체계의 형성이후 북한사회는 수령과 당의 권위에 의해 이끌어졌다. 수령은 사회통합의 상징으로 절대권력의 위치를 차지했고 한편으로 정치적으로 인민대중의 의사를 구현하는 존재였다. 김일성은 현장정치나 인민과의 접촉을 중시하여 1만 8천여개의 단위를 찾아 55만 킬로미터의 현지지도를 수행했다. 그러나 일심단결을 내세운 수령-당-인민의 통일체는 개성과 다양성이 존중되고 사회적 동력이 지속적으로 확장되는 사회상과는 거리가 멀었다.1980년대 중반 이후 북한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