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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범일지 독후감 평가B괜찮아요
    ‘백범일지’를 읽고-들어가는 글-평소 나의 머릿속의 백범은 중절모에 동그란 안경을 끼고 웃음을 짓고 있는 인자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백범일지’를 읽고 나서 그의 인자한 웃음만이 아닌 마치 활화산과도 같은 민족을 사랑하는 모습과 독립에의 열정을 볼 수 있었다."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나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로다"-백범일지 中-백범이 치하포에서 국모를 시해했던 왜국의 장교를 살해하고자 마음먹고 되 뇌이던 말이다. 한 평생 자신의 안위나 이름을 위하기보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살았던 민족의 지도자 백범. '나의 소원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조국의 독립'이라 말할 수 있었던 백범의 愛國?愛族 정신은 새삼 나에게 민족과 국가에 대해 생각하게 해 주었다. 백범이 타민족도 아닌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돌아가신지 50여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우리는 백범이 남긴 자서전을 통해 그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자서전에인 ‘백범일지’에는 백범의 삶과 정신, 그리고 한국의 근현대사가 담백하게 담겨있다.‘인?신 두 아들에게’라는 편지로 시작하는‘백범 일지’는 백범 김구 선생이 손수 쓴 유언격인 자서전으로 일제시대 우리나라의 상황과 백범이 우리 민족에게 당부하는 백범의 사상이 녹아있는 책이다. 자서전 이지만 단순히 한 인간의 삶을 그리는 것을 넘어 민족에 대한 교훈과 한국의 근현대사가 녹아있는 한편의 역사서이자 민족문학서 이기도 한 것이다. 백범은 주어진 삶을 너무도 치열하게 살았으며 쉽게 얘기하는 파란만장하다는 표현이 딱 어울릴 정도로 고된 삶을 이어갔다. 韓민족의 지도자였던 ‘백범일지’속의 백범은 폭풍의 시대에 어떤 생을 살았으며 그는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고자 하였을까.백범은 우선 ‘백범일지’의 상권은 자신의 최후를 예감하면서 두 아들에게 이를 전하기 위해서라고 밝혔으며, 하권은 자신의 "50년 분투 사정을 보고 허다한 과오를 원감으로 삼아서 복철을 밟지 말기를 원하는 노파심"에서 쓴다고 밝혔다. 백범일지는 백범이 5,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로의 망명 등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하권은 50년의 과정이 많은 과오를 남겼다고 말하면서 해외에 있는 동지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기를 바란다는 의미에서 쓴 글이다. 헌데 김구 선생이 말하는 그 잘못이란 무엇인가? 단결하지 못하고 우리만의 힘으로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을 이루어내지 못했다는 점인가? 아니면 자신이 살아온 삶의 발자취를 말하는 것 일까? ‘백범일지’속에 녹아있는 김구의 삶을 생각해 보았을 때 너무나 겸손한 부탁이 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부터 백범의 삶의 발자취를 간단하게 더듬어 보고자 한다.-백범의 삶-백범선생은 1876년 황해도의 벽지인 백운방 텃골에서 농민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7세에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곳에서 벼슬자리를 사고파는 부정부패들을 목격하게 된다. 이시기부터 그는 개혁적인 운동가의 성향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보여 진다. 백범은 과거에 낙방한 후 동학운동을 하다 20살에 왜인들의 손에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일본군 장교를 죽이고 비겁하게 도망하는 일 없이 순순히 잡혀갔다. 왜인을 죽이고도 당당히 잡혀간 백범의 이러한 행동은 자신의 행동이 전혀 부끄럽거나 비겁한 일이 아닌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정당한 일이었다는 명확한 소신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도 나라를 위한 그의 정신과 대범함은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할 때까지 이어져 한인 애국단을 만들어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에게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의거들을 지시하게 했으며, 이봉창 의사에게는 일본 천황의 저격을, 윤봉길 의사에게는 홍커우 공원 일본 천황의 생일 기념장에서 폭탄을 던지게 한 것이다. 이렇게 백범 선생은 우리의 독립 운동을 주도했으며 독립에의 의지를 만방에 알리는 데 노력했다.백범을 위시한 독립투사들은 항시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고 살아야했다. 자신의 목숨은 누구에게나 제일 소중한 것이지만 독립투사들은 자신의 죽음을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그 길을 택했다. 이봉창 의사는 동경에서 배후를 캐내려는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그 분들은 끝까지 묵비권을 행사했다. 이 같은 행동은 백범이 그들을 신의를 가지고 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에 대한 믿음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목숨까지 버릴 수 있게 한 것이었다.백범의 인품은 다른 점에서도 잘 나타난다.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가 높아지면 남을 업신여기고 옛 정을 잊어버리기 보통이다. 하지만 백범은 정을 소중히 여기는 인간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남 앞에서는 항상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 겸손함은 앞에서도 언급한 것이다. 아울러 백범에게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는 투철한 의지가 있었다. 예를들어 우리나라를 대표해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던 민족대표 33인중 만해 한용운 선생을 제외한 대부분이 일본에 의해 끌려간 뒤 모두 자신들은 일본의 조선 합병을 크게 반대하지 않는다고 변절하는 등 자신의 고통 앞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은 신념이 물러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백범선생은 가시밭길 속에서도 자신이 믿는 신념을 철회하지 않고 평생을 지켜나갔다.또한 백범은 외세에 의한 광복 후에도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민족만의 자결을 주장했다. 훗날 민족이 갈라지고 싸우는 비극을 백범은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하나의 민족이 분단되는 비극을 막기 위해 백범은 38선을 넘나들며 회담을 계속하며 남북한 총선거를 추진했다. 그리고 삼천만 동포에게 자주 독립의 통일 정부를 세우자고 강력히 호소하였다. 하지만 외세에 의해 남?북은 자신들의 정부를 각기 설립하고 민족을 둘로 나누고 말았다. 6.25전쟁과 수많은 이산가족을 만들어낸 민족적 비극의 발단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백범은 포기하지 않고 재야에서 민족 통일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1949년 6월 26일 6.25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 육군 소위 안두희의 총에 맞아 74세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백범에 대한 단상-세계의 범위가 좁아지고 있는 지금, 민족주의를 말하면 비웃거나 혹은 위험한 사상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세계가 하나라는 지금 민족주의를 말하 사회를 집합적인 공동체로 유지해 주는 역할을 해왔다. 분명 우리 현대사에서 민족주의는 역사발전의 원동력으로 자리해 왔으며 통일을 민족 목표로 둔 상태에서 민족주의의 역할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물론 21세기 세계화 사회에서 민족주의는 과거와 같은 국수주의나 자민족우월 의식과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 21세기의 민족주의는 협력의 정신에 바탕 하면서 지역적 문제의 해결을 위한 공생?공존의식에 기초해야 한다. 그리고 타민족과의 차이를 이해하고 수용될 수 있는 민족주의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백범일지’를 통해 이 같은 새로운 민족주의의 정신을 읽을 수 있다. 무력이나 경제력으로 세계의 제일이 되기보다 높은 문화의 힘으로 행복을 누리는 나라를 원했던 백범. 그는 이미 50여 년 전부터 미래 우리민족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앞으로의 세상을 준비하자 예기하고 있는 것이다.백범일지의 끝 부분인 「나의 소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무릇 한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 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의 독립,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을 의지하고저희끼리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中略...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우리의 서울은 될 수 없는 것이니,만일 그것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예전에 동경을 서울로 하자는 자와 다름없다.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백범일지 中-이 글에서 우리는 백범의 단호하고도 분명한 민족지도자로서의 모습과 사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 동안 김구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제각기 다른 배경과 동기에서 제멋대로 이루어져 왔다. 정치집단 내의 권력투쟁과 반민족적인 이념적 갈등의 와중에서 이른바 우파적 시각에서는 좌파 성향의 지도자로 비판했는가 하면, 이른바 좌파적 시각에서는 그를 우익적 성향의 지도자로 매도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광복 반세기가 지난 오늘, 아직도 민족험을 통해서 볼 때, 통일 한국의 건설이라는 진정한 민족의 광복을 위해서 이미 반세기 전에 백범은 우리민족이 나아갈 길을 제시 하였던 것이다. 다만 형식 표현만이 그때와는 달라졌을 뿐이고 약간의 현실적인 조정이 필요할 뿐이라고 생각한다.또한 백범의 일생은 한국 근현대사의 중심에 있었다. 19세기 후반 폭풍과도 같은 격변의 시기에 태어난 백범은 청년 시절부터 신념을 가지고 구국 운동에 뛰어들었고 일제가 한국을 강점했던 암흑의 시기에는 민족의 광복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3.1운동 이후에는 온갖 고초와 역경을 뚫고 임시정부를 이끌면서 민족의 자주독립을 추구했으며, 외세에 의한 광복 이후에는 우리 민족 자신에 의한 민족의 자주 통일과 독립 정부의 수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같은 민족에 의해 그 생을 마쳤다. 그의 죽음은 바로 그 자신의 비극이기에 앞서 민족의 비극이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의 비극적 죽음은 한국 현대사의 전개에 크나큰 손실을 가져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첫째로, 그의 죽음은 일제 식민통치의 유산을 적극적으로 청산할 수 있는 주도 세력이 상실되었음을 뜻하였다. 많은 수의 항일 애국지사들이 일제에 항거하는 투쟁에서 온갖 고초를 당한 끝에 순국하였고, 일제에 쫓기면서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며, 다행하게 살아서 광복을 맞이한 인사들도 분단과 혼란의 군정기에 권력투쟁과 이념적 갈등 속에서 친일청산의 목소리를 내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정은 남한의 사회체제 관리를 효과적으로 수행한다는 이유로 일제식민당국의 앞잡이였던 경찰, 법조인, 교육자, 기업인, 행정관리, 언론인, 문화인 등등의 친일세력들을 다시 채용하여 미군정의 하부 조직으로 충원하였고, 이에 이들 친일 세력들은 건국 과정에서 강력한 정치 세력으로 조직화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였던 것이다. 거기에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정권 안보를 위해서 친일 세력의 숙정을 소극적으로 하다가 드디어 친일 세력을 정치적으로 충원하였다. 이것이다.
    독후감/창작| 2004.07.19| 7페이지| 1,000원| 조회(1,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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