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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경제] 대우그룹(대우자동차)붕괴원인 평가A좋아요
    한 국 경 제 론REPORTS(대우의 붕괴원인 및 과정평가)서론------------------------------------------------------- 3본론1. 대우그룹의 성장배경 및 과정----------------------------------- 42. 대우자동차의 성장과정 및 내용--------------------------------- 51) 대우자동차의 연혁 및 개발과정2) 대우자동차의 경쟁력3. 대우그룹의 실패과정----------------------------------------- 81) 대우사태 발생의 원인(1) 무리한 확대경영의 지속(2) 그룹내 확실한 수익기반의 부재(3) 단기차입금의 폭발적 증가(4) 재무구조 악화와 금융비용의 상승(5) 낙후된 직접자금 상품시장(6) 구조조정의 지연4. 대우그룹(자동차 중심)의 구조조정 현황----------------------------121) 대우 구조조정 일지2) 대우 계열사 워크아웃 처리방안 진행 과정3) 대우차 매각관련(1) 대우차 매각관련 일지(2) 경실련의 입장(대우자동차 매각과 관련해서)4) 대우차 최종부도와 그 파장(1) 대우자동차 법정관리 신청과 금융권 여신(2) 대우자동차 부도 피해 현황5. 대우그룹(자동차) 이해관계자의 입장----------------------------- 191) 노동조합의 입장2) 경영자의 입장3) 정부의 입장5. 대우그룹의 문제점------------------------------------------- 321) 노동조합의 문제점2) 경영자의 문제점3) 정부의 문제점4) 자산·부채에 대한 정확한 실사 자료 부재5) 구조조정 주체의 미확립6) 노동자·국민의 참여의 문제7) 구조조정 방안의 비현실성8) 단체교섭의 문제점6. 대우그룹의 회생방안------------------------------------------ 481) 국내매각2) 해외매각결론-----------------------------------------------------을 추진하였던 반면, 상대적으로 허약한 계열사 사정에도 불구하고 대우는 구조조정의 절박성을 외면하고 단지 GM과의 전략적 제휴에만 집착하는 등 본격적인 구조조정을 1년 이상 지체하였다.실제 GM과의 전략제휴 협상과정에서 대우는 전혀 현실성없는 가격을 고수하는 등 협상에 성의있는 자세로 임하지 않았다. 협상이 진척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대내적으로는 마치 외자유치가 성공될 것처럼 당국과 시장참여자들에게 선전함으로서 결과적으로 대우그룹의 구조조정 전체에 대한 시장의 신뢰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98년 10월말 노무라증권의 대우계열 자금악화 관련 보고서 발표를 계기로 자금악화설이 표면화되었고, 외국인 투자자의 대우그룹에 대한 신뢰가 하락하고 국내외 금융기관이 기존여신을 회수하려는 움직임이 확산되어 자금사정 악화를 가중시켰다.결국 대우그룹은 98년 12월 7일 재계·정부·채권금융기관간 「5대그룹 구조조정을 위한 20개항의 실천계획에 대한 합의」발표후 비로소 본격적인 구조조정에 나서게 되었다. 동 합의에 따라 대우는 자동차·중공업·무역/건설·금융/서비스 등 4개 업종을 핵심업종으로 하여 계열사를 대폭축소(98.11월 현재 36→99년말 10개)시키고 총 15조원의 자구노력으로 99년말 부채비율을 199.5%로 감축하는 내용의 『재무구조개선약정』을 주채권은행과 체결 (98.12.19)하였다.그러나 이미 차입금은 98년중 15조 1,950억원이 (국내기업分만) 증가한 상태였고, 단기채무 상환연장에 시달리고 있었고, 98년 중 한해에 금융비용으로 5조 9,235억원을 지출하는 등 재무구조가 극심하게 악화되었다.4. 대우 구조조정 현황(워크아웃)1) 대우 구조조정 일지{대우 구조조정 일지시 기주 요 내 용7월 19일김우중회장 전재산 등 10조 1천억원 자산 담보제공을 통한 유동성 위기 극복방안 발표7월 22일채권단, 대우에 신규자금 4조원 지원 결의7월 25일정부, 대우사태 관련 종합대책회의.김우중회장, 국내외 차입금 발표 및 경영정상화 이후 명예퇴진7월 27일채권단, 대우 구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회사와 경영위기 극복을 위하여 사업구조, 부품 및 제품가격, 인력 등을 포함한 전 분야에 걸친 문제를 회사와 노동조합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경영혁신위원회 에서 협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 협의서가 정부, 채권단, 회사, 그리고 언론에 의해 포위, 고립 당함으로써 강요된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 문제의 합의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노사합의만 하면 공장 운영자금, 체불임금 모든 것이 다 해결될수 있다고 해서 조인했으나 그이후 달라진 것이 없었고 12월 7일 1달치 체불임금만 달랑 나왔을 뿐이었다.이러한 구조조정 동의서 이면에는 사실 GM이 도사리고 있다. 회사와 노동조합 사이에는 고용안정특별협약 이 있는데 2000년 8월 임단협에서 맺은 것이다. 여기에는 대우자동차와 부평공장의 미래가 담겨있는 협약으로서 단일법인의 유지, 향후 5년간 인위적인 인원조정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차량개발을 계속한다는 협약이었다. 그러다 GM은 고용안정특별협약을 우려하여 정부를 시켜서 고용안정 협정서를 무력화 시키기위해 구조조정 동의서가 필요했던 것이다.인수의사를 밝히는 해외업체들의 포기와 지연이 계속되고 결국 회사는 2001년 2월 16일 정리해고를 실시하겠다고 주장하였고 결국 실제로 2001년 2월 16일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의 생산직 1750명에 대한 정리해고가 단행되었다. 이는 1996년 노동법이 통과된 이후 사상최대의 숫자였다. 노조에서는 의원퇴직을 인정하는 최종안을 제시했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고 1750장의 해고통지서가 노동자들에게 전달되었다. 김우중회장의 해외 비자금 조성, 경영진의 부실경영으로 무너진 대우는 생존의 유일한 방법으로 정리해고를 택했고, 1750명의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거리로 내몰렸다. 결국은 구조조정 시행에 대한 노사의 첨예한 대립 회사의 일방적인 인원정리에 대한 노동조합의 힘겨운 투쟁 그리고 정리해고 통보앞에서 끝내 거리로 내몰린 노동자들은 그들의 생존의 갈림길에서 기업의 구조조정과정과 그리고 기업의 경영부실의 최종 위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김 회장은 경영권이나 소유권에 연연해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최근 출혈 할부판매를 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정상 판매 보다는 싸지만 무이자 판매나 다른 할부조건에 비해 크게 무리 없는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1999년 11월 23일 김우중 회장은 임직원에 작별서한을 보냈다.“대우의 지난 세월에는 국가와 명예와 미래를 지향하는 꿈이 항상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랑스러웠던 여정은 오늘 국가경제의 짐으로 남게 됐고 우리의 명예도 날개가 꺾이고 말았습니다” 대우는 한달 이상 유럽에 체류중인 김우중 대우회장이 22일 대우 전 임직원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임직원과 가족 여러분께 드리는 글’이라는 제목의 서한을 보내다.A4용지 2장 분량인 이 서한에서 김회장은 “한없는 미안함을 가슴에 안고 대우가족 여러분께 마지막 작별인사를 드린다”며 “여러분과 고락을 함께 한 지난 시절을 진실한 정이자 값진 보람으로 마음속 깊이 간직하겠다”고 말했다.김회장은 대우 구조조정 과정에 대해 “구조조정의 긴 터널을 지나오는 동안 빚어진 경영자원의 동원과 배분에 대한 주의 소홀, 용인되지 않은 방식으로 접근하려 했던 위기관리 등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초래된 경영상의 판단오류는 지금도 가슴아프게 느껴진다”고 자성했다.이어 “(나는)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작은 몸짓조차 하지 않겠다”고 강조하고 “대우의 밝고 새로운 미래를 위해서라면 지나온 어두운 과거는 제 스스로 짊어질 생각이며 뜬 구름이 된 여생 동안 그 모든 것을 아프게 느끼며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해 대우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김회장은 또 “대우 만큼은 우리 경제를 위한 값진 재산이 돼야 한다”며 “새로 선임될 유능한 경영진과 힘을 합쳐 희망찬 회사로 재탄생시켜 주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는 말로 글을 매듭지었다.3) 정부의 입장 변화97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대우그룹의 자금 위기설과 함께 정부의 재벌개혁으로 시작된 대우그룹의 구조조정은 98년 12같았을지 몰라도 속내용을 들여다보면 너무나도 달랐다.노조는 10월31일 사측이 발표한 구조조정 계획안을 무시하고 왜곡했다. 당시 회사는 한 달 작업 끝에 3,500여명의 인력조정을 포함한 구조조정안을 발표했다. 당시 대우자동차는 포드 입찰 포기 선언 이후 채권단의 소극적인 태도로 자금이 경색되기 시작했고, 대우자동차의 향방이 불투명해 짐에 따라 판매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군산과 창원공장은 여전히 2교대 생산을 하였고, 해외 네트워크도 온전했다. 여기서 3,500여명의 인력구조조정은 생산·사무직을 포함하는 것이었으며, 군산과 창원으로의 전환배치와 RV정비부문의 쌍용차로의 환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에 '정리해고'는 들어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노조 집행부는 노사합의와 희망자에 의한 '전환배치'조차 거부했다. 김일섭 집행부는 나중에 창원 전환배치자 172명에 대해서도 창원지부에서 받지 말 것을 요구했다가 거둬들이기까지 했다. 이런 일들은 노조가 주장해온 '원칙'의 당연한 결과였다.당시 상황을 돌이켜보면, 노사가 심한 충돌 없이 인력구조조정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노조 집행부는 '회사가 정리해고 하려는 수작이다'라고 떠들어대며 조합원들의 불안감을 고조시켰고, 이를 통해 자신들이 '동의서'를 쓰지 않는 행위를 '원칙'이라고 정당화하는 선전을 해댔을 뿐이다. 그 이후에 나타날 파장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서….결과적으로 잘못된 현실인식과 상황판단으로 노동조합은 '동의서' 한 장으로 회사를 부도낸 원인제공자로 매도당했으며, 이후 전개과정에서 확인되었듯 이제 3,500여명이 아니라 6,800여명이 '구조조정' 당하는 상황으로 몰리고 말았다. 사실 동의서 문제는 김일섭 집행부가 주장하듯 '원칙' 문제는 아니었다. 그것은 주체적 힘 관계와 객관적 상황에 따라 판단할 '전술' 문제였다.. 단 1명의 정리해고도 없다는 것의 실현가능성여부동의서와 이에 따른 부도사태는 백 번 양보해서 집행부에 올라온 지 1달도 되지 않아 제대로 판단하기 어려웠던 문제
    경영/경제| 2001.12.01| 57페이지| 1,500원| 조회(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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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헨리포드에서 정주영까지 평가C아쉬워요
    헨리포드에서 정주영까지1. 헨리포드1)줄거리 요약헨리포드는 아일랜드계 미국인으로써 유명한 모델T 자동차로 미국의 산업 및 현대화에 크게 이바지한 창업기술자이자 기업가이다. 적은 월급을 받는 기술자이던 헨리포드는 젊은 시절에 자신의 시간과 돈을 모두 자동차 엔진 및 자동차 제작 연구에 바쳤다. 1903년 맬컴슨의 자금지원으로 포드자동차가 정식 설립되는해 그의 나이는 40이었다. 이 회사는 비교적 순탄하게 성장했지만 이 회사는 여러번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준비과정을 거쳐왔다. 비교적 잘 운영되던 포드 자동차 회사는 생산문제가 아닌 대주주이며 동업자인 맬컴슨과의 의견 대립에서 시작된다. 맬컴슨은 고급자동차를 생산하여 큰 이익을 올리려는데 반해 헨리포드는 값싼 자동차를 공급하는 전략을 고수했다. 대립 끝에 포드의 승리로 끝나고 이를 통해 포드자동차를 가족회사로 발전시키는 기초를 닦았다. 이는 훗날 모델T를 생산하는 기틀이 된다. 1908년 처음 등장한 모델T는 20년간 총 1500만대 이상이 팔린 가장좋은 차로써 천문학적인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이 모델T로써 포드자동차는 세계적인 명성과 자동차업계의 왕좌자리를 가져다 주었으며 헨리포드 개인에게도 일생일대의 영광을 가져다 주었다. 성공비결을 보면 혁신적이고 우수한 품질, 이동조립기법을 창안함으로써 대량생산에 성공한 생산기법, 생산성 향상에 크게 기여한 새롭고 근대적인 인적자원경영 등을 들수 있다. 그리고 모델T의 놀라운 성능은 대량생산기법을 혁신적으로 도입 개발한 과학적 경영방법의 성공이라고도 할 수 있다. 포드는 이 새로운 생산기법을 도입하기 위해 디트로이트교외에 현대식 콘크리트 공장을 세웠다. 이 공장의 조립 라인은 조립판이 계속적으로 이동해서 조립 팀 앞으로 오면 기능공들이 과학적으로 분업작업을 하는 혁신적인 생산과정이다. 이 라인의 특징을 살펴보면 설계의 단순화, 부품의 표준화, 기계의 정밀성, 생산과정의 속도조정, 계속적 생산과정, 창의적 노동력 절약시책 등이 있다. 포드는 셀던 소송에서 승리하면서 자타가 인정 하였다. 포드는 막대한 사업이익을 주주 외에도 근로자들에게 나눠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제도는 포드에게 막대한 이익을 남겨주게 된다. 결국 그는 인적자원에 과감히 투자하면 생산성 향상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교훈을 남겨주게 된다. 55세에 회사를 가족기업화한 포드는 장남 에드셀을 20세에 사장으로 임명하였으나 형식적일뿐 실질적인 회사운영은 자식이 다스려나갔다. 이런 독선적인 모습은 아들이 40이 넘어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포드회사의 경영권 집중화와 가족기업화는 창업과 발전을 주도한 여러 창업동업자들을 떠나게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치명적인 일은 윌리엄 크눗슨이 경영권에서 밀려나서 경쟁회사인 제너럴 모터스에 가서 모델T를 능가하는 공적을 세운 일이다. 포드는 그야말로 내 기업 내 마음대로 식의 권위적인 리더가 되어있었다. 포드는 또 신문사 경영을 시도하였으나 그의 창업 이상과는 달리 굴욕감만 안겨준채 자진폐간하게 된다. 포드는 상원의원에 출마하였으나 역시 실패하게 된다. 포드는 아들 에드셀이 모델T 외에 새로운 모델을 만들자는 제안을 철저히 무시했고 모델TDP 대한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러나 경쟁회사인 제너럴 모터스의 시보레에 밀리고 심지어 경제 공황 이후에 크라이슬러에도 밀리는 삼류회사로 전락하게 된다. 또한 아들 에드셀이 젊은 나이에 위암으로 사망하게 되자 헨리포드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괴로워하게 된다. 포드의 손자인 헨리 포드 2세는 아버지 에드셀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 고생한 것을 잘 알고있었으며 자신이 그 역할을 맡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할아버지인 헨리포드와 화합하는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헨리 포드는 기업가로서의 영욕을 뒤로한채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2)감상문헨리 포드가 미국의 위대한 창업자이며 기업가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볼모지였던 자동차산업을 미국 최대의 산업으로 일군 최고의 공로자이며 기술자이다. 특히 포드회사 초기의 값싼 자동차를 만들어 농부들도 탈 수 있는 싸고 성능좋은 자동차를 만든다는 노동시간 단축 등은 그당시로는 파격적인 창안들이었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기업인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러한 기업가적인 특징들은 포드자동차회사를 굴지의 회사로 등극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포드회사를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하는 요인도 된다. 포드는 결국 자만과 독선, 인격성숙이 덜된 가부장적이고 독선적인 리더가 되어 나중에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혼자서 권력을 쥐기 위해 창업동업자들을 몰아내고 실력보다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심복들을 신임하는 행위는 기업이 쇠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된다.헨리 포드는 기업가로서보다는 창업가로써 그 능력이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창업자가 갖추어야 할 도전정신이나 끊임없는 연구 개발 등은 헨리포드가 갖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동차에 대한 열정으로 몇번의 좌절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결국 포드자동차 회사를 창립하는 업적을 이루어 냈다. 이는 헨리 포드의 창업자로써의 자질을 잘 나타내준다. 그러나 기업가로써의 헨리 포드는 몇가지 문제점이 드러난다. 회사 초기의 헨리 포드는 앞서 언급했듯이 기업가로써의 자질도 뛰어나 보인다. 하지만 오래된 독선은 그의 기업가로써의 판단을 흐리게 했고, 나중에 신문사 경영이나 정치계 입문 시도등으로 외도를 하게 된다. 물론 이런 시도들은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이런 결과는 더욱 않좋은 결과를 낳게 된다. 포드가 기업가로써 저지른 가장 큰 실패는 바로 인재의 축출 이었다. 어떤 회사도 인재가 없이는 성공할 수가 없다. 특히 크눗슨의 GM으로의 방출은 그의 일생일대의 실수라고 할 수 있다. 크눗슨은 당시 포드회사의 최고의 기술자였고 포드 회사의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그가 GM에서 개발한 시보레는 포드자동차를 압도하여 포드회사는 크나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그는 사업가로서 재능은 있었을런지는 몰라도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낙제점이었고, 심지어 가족들한테조차 믿음을 주지 못했다. 인간관계의 부족은 생각보다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독단과 독선에 맞선 그의 동업자들과 주주들은 헨리 포드에게 떠나서 경쟁회사를 만들거나 경쟁 회사에 들어가게 되면 아무리 기업경영을 잘 한다고 할지라도 지속적인 발전을 하기는 어렵다. 우수한 기업가라면 시대의 변화나 사업의 흐름에 맞추어 혁신을 실행하여야 하나 헨리 포드의 말년은 오히려 기업의 성장에 방해가 될 뿐이었다. 경쟁사인 제너럴 모터스가 우수한 인재를 영입하여 눈부신 발전을 거듭한 것과는 대조적이 아닐수 없다.우수한 기업가란 창의적 발상과 시대의 흐름에 맞춰나가는 혁신능력, 또한 기업내 인재를 등용하는 인사관리와 주주나 동료간의 인간관계도 중요한 덕목이라고 할 수 있겠다.2.마쓰시타 고노스케1)줄거리 요약마쓰시타 고노스케는 가난했던 소년시절을 겪었다. 그만큼 가난하고서도 그만큼 일을 좋아하고 사랑했던 사람도 없을 것이다. 마쓰시타는 평범한 소지주 가정에서 태어나 남부럽지 않은 어린시절을 보내는 듯 했으나, 아버지의 투기행위 실패로 6세부터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을 하게된다. 이런 집안형편 때문에 마쓰시타는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를 따라 낮선 도시 오사카로 가서 애보기 심부름꾼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가는곳마다 사랑을 받았던 마쓰시타는 어려서부터 무슨 일이든지 즐겁게 열심히 하는 성실한 소년이었다. 그는 전기산업이 유망하리라는 생각에 전기회사에 취직을 하고 성실하게 일한 대가로 곧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게 된다. 그는 남는 여가시간을 이용하여 전기 소켓의 개발에 몰두한다. 그가 만든 소켓에 회사가 시큰둥하자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전기소켓회사를 만들었다. 그러나 비교적 순탄치 못한 과정을 겪어야만 했다. 계속된 연구와 개발로 그는 결국 4년만에 큰 공장을 짓게된다. 그가 개발한 포탄형 자전거 전등은 판매부진을 재고가 쌓이게 되고 마쓰시타는 새로운 판매술로 위기를 극복하여 판매술의 귀재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마쓰시타를 경영의 귀재라고 일컫는다. 훗날 세계 굴지의 전기전자회사로 거듭난 마쓰시타 전기회사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마쓰시타의 강점은 우수한 판매술이다. 대량판매를 위해 막대한 에 충당함으로써 제품개량의 노력을 지향하는 카이젠 전략 등을 통해 발명보다는 창안 및 개선에 더 힘을 기울였다. 둘째, 사업부별 독립성과 자율경영이다. 중간사장제와 소규모조직의 자율경영을 철저하게 실천할수 있는 조직개혁을 꾸준히 실행해 왔다. 이는 기업이 성장하면서 비대한 관료조직으로 변화하는 실수를 사전에 방지할수 있는 조직혁신이다. 셋째, 통제의 조직망이다. 마쓰시타의 조직개혁안이 성공할수 있었던 것은 회계재무 관리자 다가하시 아라다의 혁신적 관리방침을 기획과 관리, 통제기구로 나누어 철저히 활용한 덕분이었다. 넷째, 인재경영의 원칙이다. 사람들에게 열의와 책임감을 갖게하는 인재경영의 원칙이다. 그는 소규모 회사일때는 늘 앞장서는 리더쉽 스타일이었으나 천명이상으로 늘어나자 대열 중간에서 함께 뛰는 리더쉬 스타일로 변했고, 만명 이상으로 늘어나자 뒤에 물러서서 부하들에게 절을 하는 스타일로 바뀌어 갔다. 그는 특히 상황에 적응하는 리더쉽 스타일을 강조하면서 리더쉽을 통한 장기적인 인간관계와 인재양성을 활성화시켜 나갔다. 다섯째, 우수한 경영기술이다. 때로는 엄격함과 인자함을 고루 갖춘 유연한 리더쉽, 사회성 및 문화성의 다양한 어우러짐, 정신적인 도덕무장 등을 통해 열의와 충성을 다하는 사내가족을 만들어내는 폭넓은 교류를 실천한 마쓰시타의 경영기술이 돋보였다. 여섯째, 가치경영과 기업문화의 핵심가치의 강조이다. 그의 수돗물 경영철학은, 즉 값싸고 좋은 물건을 많이 만들어 사회에 공급함으로써 수돗물처럼 넘쳐흐르는 경제적인 풍요가 모두에게 돌아갈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기업의 기본임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마쓰시타는 순조로운 발전을 거듭해 가던중 1929년 뉴욕 증시의 대폭락으로 인해 갑자기 위기를 맞게 되었다. 주변에서는 인원을 반으로 줄여서라도 회사를 위한 비상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했으나 고민 끝에 내놓은 방법은 놀랄만한 것이었다. 그는 회사 직원들에게 반나절만 생한하고 생산도 반으로 줄이되 종업원들에게는 일급 전액을 지급하고, 대신 휴일도 반납하고 재고품 판겼다.
    독후감/창작| 2001.05.16| 6페이지| 1,000원| 조회(1,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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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통일 중국분열 평가C아쉬워요
    『중국통일·중국분열』report동양문화사라는 수업을 들으면서 중국의 역사와 문화, 사회 등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를 하게 된 것 같다. 나는 어려서부터 중국역사에 대해 약간이나마 접할 기회가 있었다. 집에 있던 『황하』나 『사기』,소설『손자병법』등과 같은 책을 많이 읽었으나, 워낙 어릴 때 읽었고 체계적인 지식이 전혀 없었기에 흥미 이외에 별다른 기억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동양문화사라는 수업은 미처 몰랐지만 중국 역사를 배우는 수업이었고, 예전에 대충 읽기만 했던 내용들을 보다 체계적이고 자세하게 배우는 시간이 되어서 나에게는 더욱 유익했던 것 같다. 아직까지 확실하게는 정리되지 않았지만 대략적인 중국 고대 국가들의 출현순서나 상호 관계 등을 간략하게나마 정리할수 있었던 것 같다. 『중국통일 중국분열』이라는 책은 현대의 중국인이 쓴 책으로 나로서는 이러한 시각의 중국역사책은 처음이다. 역사책이라고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지만 역사적 내용이 많고 중국 역사에 비중을 두고 읽었기 때문에 역사책이라고 하겠다. 이 책은 중국이 통일 상태와 분열 상태를 거치면서 지금의 중국의 모습이 갖추어진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우선 이 책을 읽으면서 힘들었던 점은 너무나 다양한 분야와 다양한 시대를 언급하기에 이 책의 분량이 적기에 자세히 이해하기가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과거 중국의 지리적 명칭 등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기에 책을 읽어가면서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 이 책은 주제별로 분류가 되어 있어서 시대순으로 열거하는데에 익숙한 나로서는 더욱 힘들었는 지도 모른다. 그리고 의외였던 점은 그 동안 역사책 등에서 잠깐 언급하거나 그냥 지나쳤던 세세한 부분 - 어떻게 보면 불필요한 부분 - 까지 자세히 다루는 곳이 많아서 다소 생소했던 것 같다.여하튼, 책에 나온 바와 같이 중국은 통일과 분열을 거치면서 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발전했다. 여기서 통일과 분열에 대한 정확한 개념은 지금도 명확하게 말할 수는 없다. 아무튼 이제까지 역사책에서 배운 대로 말하자면 秦나라가 최초일이란 현재의 한 국가와 같이 모든 국경선까지 중앙정부의 권력이 강력하게 미치는 그런 것을 상상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서는 중국과 같이 어마어마하게 큰 대륙의 통일이란 쉽지 않을뿐더러 그 관리조차 힘들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했다고는 하지만 변방까지는 그 힘이 완전히 미치기는 무리였고 체제를 정비하였으나 완벽하게 실행하기에는 그 기간이 너무 짧았다. 우리 나라와 같이 비교적 국토가 좁은 나라는 통일을 이루는 것이 비교적 쉽고 또한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중국과 같이 방대한 국토를 가졌다면 그 얘기는 틀려진다. 게다가 수십개가 넘는 소수민족들 때문에 인위적인 통일을 이룬다 하더라고 그 저항이 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책에서는 중국의 통일 기간에 짧았었고 많이 잡아도 50%안팎의 기간이라고 했다. 하지만 거기서 말하는 통일조차 엄밀하게 따지면 내가 생각하는 통일이 아닌 것이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제까지의 중국역사는 중국의 통일을 안정기, 분열기간을 혼란기라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만의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읽었던 책들 중 상당수는 그런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통일 상태는 부국 강병을 할 수 있는 바람직한 상태이고, 분열 상태는 전쟁 등으로 국력을 소비하고 인명을 경시하는 시기라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다른 시각으로도 보고 있다. 통일과 분열은 제각각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통일 중국의 황제들이 어떻게 그 국력을 낭비했는가를 궁전/능묘의 건설, 비축의 비합리적 활용 등을 통하여 잘 보여주고 있다. 중국의 분열기는 그 말 자체에서 하나의 중국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실재로 춘추전국 시대와 같이 분열이 심한 시기에 제자백가와 같은 사상이 가장 성행했고 이와 같은 상태는 중국 문화에 큰 발전을 가져왔다. 저자와 비슷한 생각이지만 중국이 분열과 통일을 반복하는 상태에서 중국 문화의 발이 있으며, 분열 상태도 마찬가지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춘추 전국 시대에 큰 발전을 이루었던 제자 백가 중 법가 사상 이외의 다른 사상을 억제한 역사적 사실은 통일 상태의 단점을 잘 말해주고 있다. 결국 이러한 강압 정책은 또다시 분열의 중요한 원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게다가 진시황은 강력한 정책으로 만리장성을 신축, 개축했으며, 엄청난 규모의 묘지를 건설하여 원성을 샀고 이는 또 다른 분열의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물론 진시황이 덕치를 펼치고 백성들의 안정에 신경을 썼더라고 분열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의문스럽고 이해가 안된 부분의 하나가 바로 중화사상과 민족 문제에 관련된 것이다. 중국의 대표적이고 절대적인 민족이 바로 漢족이다. 현재 중국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이 한족은 혈통상으로 모두 한족으로 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 역사적으로도 한족에 융화되고 흡수된 소수민족을 한족으로 인정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 한족이라는 개념은 혈통적인 것보다는 문화적인 측면을 더욱 강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중원을 가운데 두고 사방으로 확장과 후퇴를 반복하면서 수많은 종족과의 교류가 있어왔고 흡수가 이루어져 왔으므로 문화적으로 중원의 전통문화를 흡수하고 한족과 섞이면 한족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한족은 다른 민족에 비해 우월하고 발전된 문화를 가지고 있으므로 흡인력이 크고 다른 종족의 선망을 받았으므로 소수민족들이 한족이 되는 것을 바라는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특히 오늘날 자신의 조상을 한족이라고 믿고 있는 소수민족들이 많다는 점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표면적으로는 단일민족이며 같은 혈통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을 중국 계통과 일본 계통 등 많은 피가 섞여 있다고 한다. 하지만 서로 동일한 문화를 유지하고 융화되었으며 구분이 어렵기 때문에 단일 민족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한다. 게다가 중국의 경우 통일을 이루려면 우선 민족적 동질감이 중요닌가 한다.중원의 관점에서 본 세계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것이다. 한족만이 가장 우월한 민족이며 그 밖의 세상은 오랑캐 등으로 불렀다. 자신들의 우월함을 과시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그것이 중국 사람들의 특성으로 자리잡게 된 것 같다. 좋게 말하면 호탕하며 낙관적이나 달리 표현하면 과장을 좋아하고 형식을 따지는 특성이 있다. 이러한 중국인들의 특성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성장 배경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다. 책에서 나온 예와 같이, 중국은 서구 열강의 침략을 받고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도 기록상으로는 자신들의 자존심을 세우는 쪽으로 남기는 경향을 보였다. 변방 국가들을 침략하고 조공을 요구하면서도 실재로는 중국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더욱 많은 하사품을 주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이것이 실속보다 체면을 중시하는 대륙민족의 특징이 아닌가 한다. 체면과 과시를 좋아하는 민족적 특징은 역사적인 자부심과 우월감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예전에 중국 역사 소설이나 무협소설을 읽을 때에도 이와 같은 기질이 잘 나타났다. 비록 약간의 과장은 있을지라고 전반적인 중국인의 특징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는 없다. 예전에 들었던 우스개 소리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중국인이 터널을 양쪽에서 파면 가운데서 만나지 못하고 결국 두 개의 터널을 뚫는 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인의 특징을 간략하게 나타내주는 유머인데 좋게 생각하면 대륙적 기질의 여유있는 중국인의 특징이라고도 할수 있겠다.과거 중국은 전통적인 농업국가이며 지금도 농업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우리 나라하고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의 방대한 국토와 인구를 가지고 있는 중국이기에 엄청나게 많은 농업생산량으로 모든 국민이 풍요를 누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이는 권력의 힘에 비해 지나치게 큰 영토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중앙 정부의 권력이 막강하고 합리적인 농업 정책을 실시한다면 보다 효율적인 생산활동을 할 수 있었겠지만, 통일 기간은 짧았고 전쟁으로 인하여 인력의 부족현상이 있었으며 나 몰락한 귀족세력 등을 강제 이주시키는 정책이 합리적이며 효율적이라고는 할 수는 없다. 게다가 분열 시기에는 농업이 안정적으로 성장하기가 힘든 상황이 많이 있다. 이는 중국 분열의 폐단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중국은 아주 오래전부터 실크로드나 발달된 항해술을 통하여 서구 등과의 교류가 있어왔다. 실제로 중국의 서쪽은 인도나 유럽과도 맞닿아 있으므로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중국 황하 유역은 문명의 발상지이고 중국은 서양에 비해 일찍부터 인쇄술이나 화약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높은 문화적 발전이 있었다. 그런데 중국은 자신들의 발달된 문명의 전수는 있었지만 그에 비해 서구 문물의 도입은 등외시 했던 것 같다. 이것이 중화사상이 가진 가장 중요한 폐단 중의 하나이다. 서양은 중국에서 받아들인 문물을 활용하고 발전했으나 중국은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소극적일 뿐만 아니라 오랑캐의 것이라 하여 무시하지 않았나 한다. 외국 사신이나 상인들에게 중국의 힘을 과시하는 데에만 신경쓰고 정작 국제 정세의 흐름이나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그 결과 청말에 서구 열강의 침략을 당하게 되고 종이 호랑이로 전락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만약 중국이 진작부터 문호를 개방하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국력을 키웠다면 지금의 세계 정세는 어떻게 되었을까. 어쩌면 중국이 미국 이상으로 큰 영향력을 가진 강대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할수도 있을 것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중국의 사상은 우리 나라에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고 결국 우리 나라도 같은 결과를 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19세기 이전까지의 중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고 문화적으로 앞서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은 전체 평균으로 따지면 후진국 수준에 불과하지만 중국 전체를 합하면 그 힘은 막강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경제 개방화를 촉진하면서 그 경제성장은 놀라울 정도라고 한다. 앞으로 많은 시간을 두고 경제 발전이 이루어진다면 앞으로의 중국은 과
    경영/경제| 2001.05.16| 6페이지| 1,000원| 조회(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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