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스니프, 스커리 라는 생쥐 두 마리와 헴, 허라는 꼬마인간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매일 아침 맛있는 치즈를 찾기 위해 미로속을 뛰어다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치즈를 찾는 방법에는 큰 차이가 있다. 스니프과 스커리는 간단하기는 하지만 비능률적인 시도와 실패를 거듭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들은 치즈가 없으면 방향을 바꾸어 다른 길로 갔고 잘 발달된 후각으로 치즈를 찾으면 그 곳을 향하여 앞으로만 달려갔다. 때론 길을 잃기도 하고 방향을 잘못잡기도 하지만 이들은 꼭 이렇게 치즈를 향해갔다. 그러나 헴과 허는 달랐다. 이들은 생각하고 과거의 경험을 살리는 능력에 의존했다. 그들역시 자신의 소신과 감정으로 인해 혼란에 빠지기도 하지만 결국은 치즈를 찾는다.그리고 어느 날, 그들 모두는 좋아하는 치즈를 치즈창고 C에서 찾게 된다. 여기서 생쥐와 인간의 차이점이 드러난다. 언제든지 생쥐들은 치즈를 찾을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했다. 편안한 생활에 젖어들게 되는 것이다. 편안하게 젖어든 생활 속에서 치즈가 사라졌다. 생쥐들은 즉각 다른 치즈를 찾아 떠났다. 하지만 인간들은 그렇지 못했다. 현실을 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피하고 싶어했고 믿어싶어하지 않았다. 그들은 창고를 떠나지 못하고 사태를 분석하고만 있었다. 그 사이 생쥐들은 다른 창고를 찾아 즐거워하고 있었다.때때로 인간들은 타성에 젖어 현실을 망각하는 경우가 있다. 지금의 꼬마인간들이 그렇다.허는 이제 이곳에서 벗어나 다른 치즈창고를 찾으려 하는데 헴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배가 고픔에도 불구하고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결국 허 만이 미로속으로 다시 뛰어들고 헴은 그 자리에 남아있게 된다.두려움을 떨치고 미로속으로 뛰어든 허는 힘들고 괴로웠지만 스니프와 스커리가 있는 커다란 치즈창고를 찾게된다.그리고 허는 치즈창고를 찾으며 미로를 헤매는 동안 깨닫는다.큰 변화는 하루아침에 찾아오는게 아니라 작은 변화속에서 생기는 것이라는걸...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고 두려움을 극복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그래서 변화속에서 적절히 대응하기위해 몇가지 방법을 적어보았다.첫째, 자신의 주변을 간단하고 융통성 있게 유지하며 신속하게 행동하라.둘째, 사태를 지나치게 분석하지 말고 두려움으로 자신을 혼동시키지 말라.셋째, 작은 변화에 주의를 기울여서 큰 변화가 올 때 잘 대처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이 글을 읽으면서 나 또한 얼마나 편안하게만 살려고 했는지 느끼게 되었다.
81년 MTV의 첫 출범이후, 뮤직비디오라는 음악매체는 음악을 즐기는 수용자에게 있어서아주 필수적인 음악 산업으로, 오늘날까지도 발전에 발전을 거듭나고 있다. 귀로만 들리는 멜로디를 넘어선 시각적인 효과는 음악을 접하는 대중에 있어서 신선한 충격이 아닐수가 없었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만이 아닌 화면이 주는 다채로운 영상. MTV의 등장은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나 음악을 하는 사람들에게 필수적으로 음악을 만드는 데 필요한 구성요소를 제공해주었다. 특히 사람들은 음악를 들으면 그 이미지를 뮤직비디오에서 찾으려는 연상작용을 통하여 그 음악의 음악성을 판단하기까지 일으게 되었다. 하지만 눈에 보여지는 것들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효과만 가져다 준 것만은 아니었다. 이때부터 음악은 전파를 타고 세계 여러곳을 타고 각 국 안방에 전파되었고, 더불어 상업성 역시 음악과 함께 녹아들어 그 순수성을 오염시켰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MTV의 첫 방송곡은 음악 VIDEO KILLED THE RADIO STARS 였다.뮤직비디오가 순수음악의 본질을 해친다는 비판적인 시각이 많았었지만, 오늘날 뮤직비디오는 그런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질적으로 많은 발전을 해오고, 더불어 음악의 발전에도 영향을 가져왔다. 처음 뮤직비디오에서는 단지 가수가 노래하는 영상으로만 이루어졌지만,
이번 과제를 기회 삼아 주위에서 흔히 볼수 없는 Big Band"의 연주를 듣기위해 눈발이 조금씩 나리는 대학로를 지나 천년동안도 로 친한 친구녀석과 함께 발걸음을 향했다. Big Band'라는 말을 들으면 수업시간에 교수님께서 보여주신 VTR에서 언뜻 스쳐지나 갔던 짧은 파마머리의 흑인들이 반짝이 의상을 입고, 일제히 트럼펫을 관을 뽑아 대는 모습이 머리 속에 떠올라 재즈바에 들어가기 전부터 내 입가에는 묘한 웃음이 맴돌았다. 역시 눈 내리는 주말 저녁 이어서인지 천년동안도 는 친한 친구들과 아니면 연인과 함께 재즈를 즐기러 온 사람들의 유쾌한 이야기 소리로 가득차 있었다. 창밖에는 여전히 눈발이 흩날려서인지 은은히 새어나오는 램프 불빛이 더욱 운치있게 느껴졌다. (그런 분위기이다 보니 같이간 친구녀석도 그날따라 더 멋져보였다^^;)한 8시를 10분쯤 넘어서자 연주자들이 하나둘씩 자신의 위치에 악기와 함께 나란히 등장했다. 트럼펫 연주자 3명, 트럼본 연주자 3명, 색소폰 연주자 5명, 그리고 피아니스트, 베이스, 드러머... 모두 무대위로 올라서자 Quartet"에서 4명이 연주 할 때, 여유로움까지 느껴지던 무대가 10명이 훨씬 넘는 덩치 좋은 남정네들이 들어가자 앉아 있기도 빠듯해 보였다. Big Band 의 규모와 인원수에 놀라면서도 어깨를 부딪히며 앉아있는 그네들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연주자들이 준비가 끝나자 신관웅 Big Band 는 드디어 첫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초반부의 두세 곡은 우리에게 익숙한 캐롤로 이어나갔다. 연말이어서 그런지 재즈풍의 연주가 좋았던지, 사뭇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신나는 Santa Clause's comin' to Town", 내리는 눈송이와 어울리는 Silver Bell"이 트럼펫과 트럼본의 힘찬 Bross음색으로 홀 안의 사람들 사이로 울려 퍼졌다. 확실히 Quartet" 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Big Band 만의 솔직한 맛 과 째지는 듯한 경쾌함 이 물씬 풍겨왔다. 이제까지 다른 재즈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우장한 음량도 음량이었지만 일시에 움직이는 연주자들의 움직임도 꽤나 멋져보였다.계속 이어지는 부드러운 곡들을 따라 Big Band 스타일에 익숙해질 무렵, 익숙하지만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멜로디가 무대 오른편에 있던 트럼펫 나팔관으로부터 퍼져 나왔다. 바로 척맨지오 의 Feel So Good"(!)이었다. 재즈바에 있던 사람들 역시 이 노래가 반가웠던지, 오래된 친구를 만나듯, 박수와 환호를 연주자들에게 보내 주었다. Big Band 가 들려주는 Feel So Good"은 내가 언제나 바래왔던 음색 그대로 멋진 라이브 연주를 보여주었다. 관객들도 어느 틈에 신나서 하나 둘 씩 어깨를 들썩이거나, 발을 구르며 흥겨운 재즈 리듬을 타기 시작했고, 멋들어진 애드립이 나올 때마다 신나는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그럴 때마다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고, 신관웅씨는 그 큰 덩치로 피아노에서 벌떡 일어나 다음 애드립 연주자를 한 팔로 힘차게 쭉(!) 뻗어 가르켰다. 그러면 그 연주자는 느낌을 이어받아 평소보다 10배는 더 신나게 연주를 해 재끼는 듯 했다. 처음에 조금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지, 다소 원활한 연주를 보여주지 못 했던 프럼펫 연주자도 이제야 날아 오르는 새가 궤도에 오르듯 자신의 본래 연주를 해내 보였다.이 곡을 들으면서 나는 작지만 놀라운 이 광경을 보고 묘한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재즈바에 우연히 모여서 단지 음악하나로 너, 나 ,연주자 할 것 없이 같은 리듬에 같이 흥겨워 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나 또한 자연스럽게 그 분위기에 빠져 강이 흐르듯 함께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기분 좋은 색다른 감정을 느꼈다.아마 이렇게 모두다 즐길 수 있었던 것은 연주자 한명 한명의 그만이 쌓아 올린 음악적 내공 덕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이따금씩 한가지 분야에서 오랜 세월 동안 경륜을 쌓아 단순한 일일이지라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해내고, 심지어 남들이 경탄할 일도 그것의 연장선에서 내것으로 만들어 손쉽게 이루어 버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내공 이 쌓였다고 말해주 싶은 적이 있다. 천천히 Big Band 의 멤버들을 둘러보면, 다들 중년은 이미 지난 듯 보이는 사내들이었다. 그들이 수 천번 무대에 서면서 그들의 때묻은 악기와 그들의 굳은 살 박힌 손에 쌓여진 익숙함 과 풍류 가 재즈바 안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의 흐름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Bebop과 같은 이해하기 어려운 연주자만의 재즈가 아니라, 약간은 쉽고, 단순한 듯 보이는 Big Band 와 다함께 하는 재즈가 진짜 재즈를 듣는 즐거움이 아닌가 한다.
두시간에 걸쳐 영화 버드 를 감상한 후, 처음엔 어떠한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특별한 능력이나 비범한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은 평범한 사람으로서 찰리 파커가 무엇 때문에 그토록 괴로워하며 왜 그렇게 약물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나의 입장에서는 버드가 어떠한 음악적 업적을 남겼는지에 앞서 한 인간으로서 버드 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 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흔히 천재, 즉 한 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어느 정도 분명한 사실이다. 모차르트 아마데우스의 삶을 보아도, 아인슈타인을 보아도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기에 그 만큼 더 고뇌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영화 속의 찰리 파커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같은 종류의 괴로움을 겪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은 연주를 위해 깊이 자신의 음악세계에 빠져들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러기 위해 마약이 마련해준 환각 상태가 절실히 요구되었을 것이다. 즉 찰리 파커에게는 째즈밖에 보이지 않았고 재즈가 자신의 전부였기에 마약과 술은 그의 음악을 완성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였을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찰리파커는 그러한 과정을 통해 재즈 분야에서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었고 세간의 인정과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하지만 그것만이 파커의 인생을 올바르게 평가했다고 말 할 수 있을까? 한 인간으로서 마약에 절어 낯선 곳에서 숨을 거두는 마지막 장면까지 지켜본 관객이 파커에 연민과 동정의 감정이 드는 것은 퍼커의 생애가 그리 행복한 것이 아니었음을 방증한다.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는 버드의 한 인간으로서의 군상은 적어도 우리가 꿈꾸는 성공, 행복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우리가 일반적으로 원하는 행복의 모습은 적어도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였을 때, 이룰 수 있다. 여기서 만족은 자기 만족은 물론 같이 살아가고 있는 다른 이로부터의 인정과 만족도 포함한다. 결국 우리는 함께 하는 다른이와 나눌 수 없는 행복을 진정한 행복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 즉 사회가 용인 할 수 있는 행복이어야 어떤 면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행복인 것이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적어도 인간으로서 지켜야 하는 사회적 윤리라는 울타리 안에 개인의 예술, 행복이 자리잡을 때, 모든 사람들이 축하 해줄 수 있는 행복을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훌륭한 예술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조금 극단적인 예이지만, 김동인의 소설 중 광염 소나타 와 광화사 라는 작품에서는 한 예술인의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광염 소나타 의 주인공 음악가는 작곡을 하기 위해 연쇄 방화를 저지르며, 그로부터 얻은 영감을 밑바탕삼아 자신의 최고의 작품을 이루어내고, 광화사 의 주인공 화가는 최고의 그림과 한여인의 목숨을 맞바꾼다. 두 소설에서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행동은 사회적 도덕을 무시한 예술 지상주의 에 사로 자혀 절제력을 잃어 버린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행동들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소설에서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그러한 예술은 더 이상 모든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예술이 아닌 자신은 물론, 대중에게도 파멸을 부르는 예술이 되어버린다. 버드의 음악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와 유사한 면을 지니고 있다. 비록 버드의 생이 앞서 들었던 예와 같이 파괴적이이는 않지만, 영화를 통해 확인한 버드의 삶은 공인으로서 지켜야할 도리를 무시한 삶이었다. 자신의 음악을 완성하기 위해 마약이나 알코올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객관적인 사회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와 같은 행동은 그를 따르는 수많은 음악인, 대중에 여향을 줄 수도 있으며, 인간으로서 바람둥이, 약물 중독자, 알콜 중독자 정도로 밖에 평가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목 차 >1. 문제의 제기2. 지역주의의 의미3. 지역주의의 태동(1)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 사이로 보는 견해(2) 조선말기와 일제시대 사이로 보는 견해(3) 1960년대 이후로 보는 견해4. 광주항쟁이 한국지역주의에 미친 영향(1) 광주민주화 항쟁의 전개과정과 그 원인(2) 광주항쟁의 의의① 군부정권의 축출② 민주화 개방 유도③ 민주화 운동의 방향제시(3) 광주항쟁이 지역주의에 미친 영향5.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해결책한국 지역주의의 문제점한국사회에서 긴 역사적 뿌리를 내려왔던 지역주의는 1960년대 군부독재 시절이래 심화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지역주의는 사회구조 자체에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갈등의 요소보다는 60년대 이후 정치권력의 편재가 가져다준 지역격차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현재 우리나라에 있어 지역주의는 아주 심각한 문제이며, 지역주의는 정치권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일반에서도 최우선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지역주의는 지역 연고를 중심으로 한 지역 집단간의 갈등이라 볼 수 있는데, 특히 영남과 호남간의 집단적 적대감은 지역주의를 가장 잘 나타내는 사례라 하겠다. 지역주의는 1980년 광주 민주화항쟁을 통해 우리사회의 전면에 돌출되었다 볼 수 있지만, 한국사회에 있어 지역주의의 역사적 뿌리는 훨씬 오래전부터 우리 사회의 저변에 오랫동안 잠재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사회에서의 지역주의는 오랜기간 정치권력의 편재와, 경제발전의 격차, 그리고 특정지역 사람들의 우월의식과 피해의식 등이 구체적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조는 이번 발표를 통해 한국사회에 있어 고질적인 지역주의가 언제, 어떠한 이유로 등장하였으며, 1980년 광주항쟁이 지역주의에 있어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그리고 그에 대한 해결책으론 어떤 방법이 있을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하였다.1. 문제제기1) 지역주의는 언제, 어떠한 이유로 출현하였는가?2) 1980년 광주항쟁의 한국 지역주의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3) 한국의존의 토착주민들과 궁핍한 삶에 있어서 경쟁을 하게되면서 그들에게 자신들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심어주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제한된 경제자원을 두고 다른 지역 주민끼리 경쟁해야 할 경우 이주민에 대한 해당 지역민의 인식은 나빠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해준, "호남지역의 역사와 문화", 1996황폐한 식민지 상황에서 그들의 만남은 이주민에 대한 토착주민의 불신과 배타성으로 연결되었으며, 이전의 고정관념이나 역사적 사실들(예를 들어 동학농민운동, 빨치산 투쟁등)이 선택적으로 회상되면서 불신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이용되었다. 즉 일제시대에 이루어진 동학교도와 사회주의에 대한 부정적 인식들은 호남지역과 지역적으로 중첩되면서 전라도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더욱 약화시켰던 것이다.(3) 1960년대 이후로 보는 견해흔히들 영남과 호남의 지역 간의 감정이나 갈등은 5.16 쿠데타 이후 공화당 시대를 거치면서 지역 간의 경제적 발전의 격차가 확대됨과 더불어, 제 5공화국의 탄생과 직접 관련이 있는 광주 민주화 항쟁에서 생성된 호남 주민의 피해의식이 심화되는 과정과 깊은 관련을 맺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러한 가운데 전국에서는 놀라운 경제성장과 급격한 도시화의 과정을 경험했지만 호남 주민들은 그들 자신의 지역에서는 물적 토대가 제대로 갖추어진 도시가 없어서 수도 서울로 끊임없이 이동하여 그들의 열악한 배경조건 탓으로 흔히 노점상이나 자영업자가 되어 빈민층으로 침전되어간 반면 영남권 출신 주민들은 그들 지역에서 비교적 물적 토대가 잘 갖추어진 대구나 부산과 같은 도시가 있어서 수도 서울보다는 이러한 지역들로 이동을 하였고, 5.16 쿠데타 이후 이들 지역에 대한 울산·마산·진해등 산업도시의 개발은 호남권에 비하여 여러 가지 특혜를 받으면서 이루어졌다.) 전광희, "한국사회의 인구이동과 지역갈등의 구조", 1992. 7이 견해가 현재 지역주의에 있어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관점이라 하겠으며 우리조원들 역시 조발표 준비전엔 대다수가 이러한 관점을 갖고 있었다.공화국과 제6공화국을 들어오면서부터 더욱더 두드러진 현상이 되고 있다.정치 사회적 충원에서 지역별 격차의 원인을 찾아본다면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지역간의 불균등한 사회경제적 발전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수도권과 영남지방은 산업화·도시화·교통·교육 등이 상대적으로 발전되어 있으며, 이들은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은 지역보다 더 많은 자기발전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바, 그 결과가 엘리트충원에서의 차이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체로 제3공화국까지의 입법·사법·행정 엘리트 충원에서의 격차나 재벌기업 총수의 지역별 비율의 차이가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둘째, 권위주의적 정부 지도자의 연고주의에 의해 자기 지역출신을 우대하는 편향적인 인사정책이 그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는 4, 5공화국때 영남출신 비율이 다른 지역 출신비율보다 정치 사회적 충원에 있어 급격한 신장률을 보인 것이라든지, 특히 정권담당자가 신뢰하고 의지해야 할 안보관련 핵심부처의 장에서 영남 출신의 비율이 높다는 것이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셋째, 정부의 지역별 성격에 의해 지역편중현상이 나타난다는 시각이다. 즉 6공화국 이후의 정부가 영남지역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는 영남지역 정부이기 때문에 영남지역출신을 우대한다는 것이다. 이는 노태우 정부에서 김영삼 정부로 넘어오면서 TK와 PK의 비율이 역전하는 현상이라든지, 제6공화국 이후 야당의 전국구 의원 비율에서 호남출신이 가장 높다는 것 등에서 잘 나타나고 있으며, 결국 이는 지역주의적 정당정치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전국구 의원의 호남출신 비율은 평민당(13대)의 53.3%, 민주당(14대)의 36.4%에 달하고 있다.지역감정과 갈등의 원인으로서 많이 지적되고 있는 요소중 또다른 하나는 지역간의 불균등한 사회경제적 발전, 특히 영남지방과 호남지방 간의 지역 격차 문제이다. 이러한 격차가 지난 30여년 간의 정부주도형 경제성장정책의 결과라는 점에서 기존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영남인과 그동안의 소외와 헌법개정 문제는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이슈였다. 쟁점은 개헌의 시기와 내용, 그리고 주도세력이었다. 최규하 대통령은 정부주도의 점진적 방법을 원했고, 학생과 재야세력은 대통령 중심제를 내용으로 하는 국민주도의 즉각적인 개헌을 주장하였다. 정당들은 대통령제를 선호하면서 국회가 주도하는 조속한 개헌을 원하였다.) 김영명, 「한국 현대 정치사: 정치변동의 역학」p 347, 1992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신군부는 최규하 정부의 무력화 작업과 민주화세력을 국민으로부터 유리시키는 작업을 진행시켰다. 먼저, 내각을 자파의 인사로 증원시키고, 군 수뇌부에 이희성, 노태우, 정호용 등의 '12.12 동지들'을 임명하여 군권을 완전 장악하였다. 이후 1980년 4월 14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중앙정보부장직까지 겸직하여 실질적 최고권력자로 부상하였다. 이에 따라 최규하 대통령 이하 신현확 내각은 껍데기에 불과한 존재로 전락하였다. 이와 더불어 신군부는 언론대책반을 설치, 언론보도검열 등의 방법으로 언론을 장악하여 야당정치인과 재야인사 및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를 비방하는 보도로 신군부에 대한 신뢰를 구했다.신군부의 집권욕이 노골화되자, 그 동안 과격한 정치투쟁을 자제해 오던 대학생들이 대대적인 시위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1980년 5월 14일 서울시내 대학생 7만여 명은 비상계엄해제와 유신잔당타도, 언론자유보장, 노동3권 쟁취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가두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학생들의 시위는 일반시민들의 호응을 얻는데 실패하였다. 도시 중간계급은 군부의 정권장악도 원치 않았으나, 학생들의 시위로 인한 정국의 불안도 원치 않았던 것이다.) 김영명, 「한국 현대 정치사: 정치변동의 역학」p 350, 1992시민들의 지지 획득에 실패한 학생들은 신군부의 쿠테타 가능성을 우려하여, 5월 16일 시위를 중단하였다. 신군부는 이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를 구실로 신군부는 정치권력 장악을 위한 본격적인 행동에 착수하였다. 5월 17일 신군부는 계엄사 전군지휘관회의를 개최과는 달리 87년 표면적인 민주화를 발판으로 또다른 군부정권이 대물림 되었고, 결국 광주문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원스런 해결을 보지 못한 채 오늘까지 방치된다.우리 조원들은 조발표를 준비하면서 왜 하필 광주에서 유혈사태가 발생하였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져보았다. 당시 5월 17일 밤 당시 군이 투입된 곳은 대도시 6개지역 전부이다. 하지만 이처럼 심각한 무력진압이 시행된 곳은 광주밖에 없었다. 우리 조원들은 80년 광주에서 유혈사태가 발생한 원인에 대하여 당시 5.16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하에서 전라도가 타지역에 비해(특히 경상도)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차별을 받음으로 해서 전라도민 사이에서 소외감이 점차 커져갔으며, 결국 김대중 구속사건으로 인해 감정이 극에 달하였으며 그 결과 민주화 염원과 맞물려 광주에서 거센 항의가 일어난 것으로 결론을 내었다. 또한 신군부는 12.12 사태를 통해 정권을 장악함으로서 학생들과 재야세력을 필두로한 민주화 세력들의 강한 저항을 받았고, 이에 대한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시범케이스로서 당시 군부세력의 눈에 가시였던 김대중을 기반으로한 광주를 유혈진압의 장소로 선택했던 것으로 보았다.(2) 광주항쟁의 의의① 군부정권의 축출광주항쟁은 군부독재의 폭력성을 극명하게 드러냄으로써, 한국사회가 극복해야 할 본질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능하게 하였다. 광주항쟁의 직접적 대상은 신군부 세력이었으며, 한국전쟁 이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정치적 참극이었다. 구체적으로, 엄청난 힘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신군부는 자신들의 군부권위주의 복원 시도에 저항하는 민간인들에게 군작전 개념을 적용하여 광주항쟁을 압살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광주항쟁은 작게는 신군부 세력에게 결코 씻을 수 없는 원죄를 안겨준 사건이었으며, 크게는 군부정치의 비인간성.비윤리성을 명확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다시 말해, 광주항쟁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에 '군부 독재는 비민주적인 정치제도를 넘어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는 폭력'적 체제임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