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일 라이더를 보고- 성역할 편견과 여성의 자기 배반국제대학 동아시아학과20021668 이성미뉴질랜드의 한 병원에서 쌍둥이 남매가 태어난다. 그러나 남자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산모와 함께 숨을 거두고 여자아기의 탄생을 지켜보는 시선은 싸늘하기만 하다. 젊은 아버지는 슬픔에 흐느끼지만 마오리족의 후예이자 지도자 가문의 대를 이을 장남을 원했던 할아버지 코로는 “실망할 것 없다. 다음에 또 낳으면 되지”라며 손녀는 안중에도 관심이 없다.부족의 명예나 지도자의 의무에 관심이 없던 아버지는, 딸에게 고래를 타고 바다에서 왔다는 부족의 선조 '파이키아'라는 이름을 붙여준 채 고향을 떠나 외국을 떠돈다.고집이 세고 엄격한 코로는 손녀 파이를 남몰래 아끼지만 마을의 남자아이들과 지도자 훈련을 받고 싶어 하는 파이를 “불경스럽다”며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하다. 그러나 파이는 지도자의 자리에서 여자를 내치는 부족의 전통을 거스르며 어깨 너머로 훈련을 따라 배우고 차츰 스스로의 능력을 깨우쳐 간다.사실, 처음 포스터만 보고는 어렸을 때 보았던 ‘프리윌리’라는 영화가 가장 먼저 생각났었다. 바다와 고래, 그리고 소년(소녀로 결코 보지 않았다)의 등장은 포스터만 보고도 대략 줄거리와 의의까지 연상시킬 정도였다.그러나 수천 년 전부터 내려오는 뉴질랜드 마오리족의 설화를 바탕으로 한 ‘웨일 라이더’는 그간 보았던 자연친화적인 영화들과는 사뭇 달랐다. 물줄기를 뿜어내는 고래를 타고 왔다는 부족의 선조, 그리고 현재의 위기를 구할 지도자(당연 남자) 역시 고래를 타고 온다고 믿는 그들 사이에서 파이는 마을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갖고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라는 이유로 배제당하는 또 다른 ‘우리’였기 때문이다.마을의 소년들이 지도자가 되는 관문을 모두 통과하지 못하자 할아버지는 몸져눕게 되고, 이 때 해변에 한 무리의 고래 떼가 몰려와 죽어간다. (마을의 재난이 무사하기를 비는 파이(지도자)의 노래에 고래들이 응답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고래들을 바다로 돌려보내려 아무리 노력해도 돌아가지 않던 고래들은 파이가 등에 올라타자 마치 지도자의 음성을 듣기라도 한 듯 바다로 움직여 갔다. 파이가 고래 등을 타고 가는 광경을 목격한 할아버지는 그제야 자신의 무지와 편협을 깨닫는다. 여자라고 해서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것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할아버지와의 화해, 그리고 지도자가 되어 카누를 타고 자랑스럽게 바다로 나아가는 모습을 끝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모든 관습과 차별, 억압을 뚫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한 여자, 파이키아.그녀는 더 이상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가지고 태우러 오기만을 기다리는 여자아이가 아닌 것이다."제 이름은 '파이키아' 입니다. '파이'라고도 하죠. 제가 사는 곳은 뉴질랜드의 작은 해변 마을인데, 수 천년 전 고래의 등을 타고 이 땅에 최초로 오신 분이 저희 선조입니다. 그분의 이름도 '파이키아' 였으며 전 그의 마지막 자손입니다. 허나 저는 할아버지가 기대한 지도자는 될 수 없습니다. 전 사내아이가 아니니까요..."주인공(파이)의 훌륭한 연기가 돋보였던 웅변 장면에서도 알 수 있듯 웨일라이더는 단지 ‘여자’이기 때문에 여자들이 사회로부터 받는 차별과 억압을 그려내고 있다.그러나 우리가 본 것은 분명 마오리족의 전통 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느 땅, 어느 시대에서든 인간의 역사에서 여자는 한번도 지도자나 주인공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이 땅의 여성, 즉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마오리족에게는 남자만이 지도자가 될 수 있는 불문율이 있었다면, 우리나라 여성들은 몇 백 년 동안이나 유교사회의 가부장제도 속에서 남편과 아들을 위해 자신의 것을 버리며 살기를 강요받았기 때문이다.나는 가끔 같은 여자이면서 딸이 아닌 아들을 더욱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의 어머니에게서 ‘자기배반’을 느낀다. 여성 스스로 자신의 여성성을 부정하고, 타자의 여성성을 억압하는 것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에서 필연적으로 왜곡을 낳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시어머니의 며느리 시집살이는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여성은 남성과 달리 '생명을 잉태하고 탄생시키는' 능력을 특별하게 부여받았다.하지만 그 능력만이 여성의 능력의 전부는 아니다. 어떻게 보면 여성이 한동안(?) 지도자가 되지 못했던(!) (역할이 크게 드러나지 않았던) 이유는 남성들의 힘에 눌려서가 아니라 여성 스스로가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식하고 인정하여 드러내는 법을 몰라서(혹은 않아서)였기 때문이었을 승산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그 많던 여성 위인은 다 어디로 갔을까?담당교수 : 안미수과 목 명 : 여성학조 명 : 프락시스조 원 : 이성미, (적어 넣으세요)서론 - 여성 위인에 대한 편견여성이 사회 모든 부문의 주인공으로 나서고 있다.여성이 야당 대표로 활동하고, 차기 대권 주자로도 거론될 만큼 현대의 여성은 더 이상 남성의 보조역에 머물지 않고 있다.의료계, 법조계 등 대표적인 전문가 집단에서 새로 배출되는 인력의 절반 가까이가 여성인 시대가 됐다. 또한 이미 여성의 소비 주도권이 70%를 넘어섰으며, 기업도 남성이 아니라 이제는 여성의 시각에서 물건을 만들어야 하는 실정이 되었다.여성들이 사회 여러 분야에서 우먼파워를 발휘하며 무섭게 성장해 나가는 것이 이제 국회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증거도 볼 수 있는데, 16대 국회에서는 서울, 대구, 광주 등에서 지역구 여성 국회의원이 탄생했고 비례대표로 많은 여성들이 국회로 진출했으며, 17대 총선은 국회 여성의원 비율을 헌정사상 처음으로 두 자리 숫자인 13%로 끌어올려 여성 정계 진출사에서 분수령을 이뤘다.사회적, 문화적으로도 경제력 있고 능력 있으며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과 능력을 마음껏 펼치면서 원하는 것을 이루고 살아가는 현대 여성.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이러한 여성상을 기억하기 어려우며, 자라나는 우리의 아이들 역시 지고지순한 여성위인만을 배우고 있다.초등학생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가장 많이 손꼽히는 신사임당은 여전히 ‘현모양처’의 모습으로 대를 이어 학습되고 있으며, 나이팅게일의 ‘천사’와 같은 마음씨는 거의 모든 여학생들의 미래이자 남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다.사실 ‘위인’이란 어찌 생각하면 이상적(?)이며 획일적인 인간 모델이라 할 수 있다.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온갖 역경을 딛고 성공하지만 결코 개인의 부와 명예를 바라지 않으며 사회에 큰 공헌을 남기는 것이 모든 위인전의 공통된 스토리이기 때문이다.완전무결한 인간이기를 주입시키는 ‘위인’에 대한 논쟁은 다음으로 미루더라도 여성위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같은 위인들 도미니카 공화국905부탄804리투아니아918△ 각국 화폐에 등장한 세계의 여성들. 위부터 영국, 노르웨이, 체코, 일본 화폐의 모습.미국의 1달러화에 그려진 수잔 앤소니는 미국의 유명한 여성인권 운동가.여성의 앞길을 가로막았던 유교문화예1) 속담ㅇ여자와 소인은 가까이 하지 마라.ㅇ여자가 말 많으면 과부가 된다.ㅇ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ㅇ여자가 너무 알면 팔자가 세다.ㅇ여자와 북어는 사흘 걸러 때려야 한다.ㅇ여편네 아니 걸린 살인 없다.ㅇ여자는 사흘 안 때리면 여우가 된다.ㅇ여자 열 모이면 쇠도 녹인다.ㅇ여편네 셋이 모이면 접시구멍 뚫는다.ㅇ여자 말띠와 범띠는 팔자가 세다.ㅇ장작불과 계집은 쑤석거리면 탈난다ㅇ여자는 제 고을 장날을 몰라야 팔자가 좋다ㅇ여자 셋에 나무 접시가 드논다ㅇ여인은 돌면 버리고 기구는 빌리면 깨진다ㅇ소더러 한 말은 안 나도 처더러 한 말은 난다ㅇ계집 입 싼 것ㅇ여편네 벌이는 쥐벌이여성위인에 대한 진실1. 신사임당 - “나를 율곡의 어머니라 부르지 마라”)우리나라에서 자식 교육은 어머니의 책임인 것처럼 되어왔다. 아버지는 생계를 책임지고 어머니는 자식의 대학 입학을 책임지는 구도이다. 이런 형편으로 인해 신사임당은 율곡 같은 잘난 아들을 둔 덕에 유명해진 여성으로 기억된다. 그녀의 그림과 글씨는 그저 부가적 덕목인 것 것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사임당을 논할 때는 현모양처라는 개념이 앞서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막상 실상을 보면 사임당은 자녀들에게 공부를 강요하지도 않았으며 남편에게 특별히 어진 것도 아니었다. 또 시댁이 아니라 친정과의 유대가 강하였다. 그러면서 그림, 글씨, 문학 등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확보해 나갔던 여성이다.신사임당을 어머니의 기호로 만들려고 시도했던 시기는 송시열 무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한국적 전통으로 명명하면서 현모양처로 고정시킨 것은 박정희 때의 일이라고 한다. 박정릐는 충, 효, 열을 한국적 전통으로 강조하였고, 이를 위해 이순신과 신사임당을 선택하고 현충사와 오 김유신을 능력만으로 평가하고 합당한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멸망시킨 왕국의 왕족을 가장 충직한 신하로 삼을 수 있었다. 자신의 카리스마로 그를 충분히 견제하고 조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뛰어난 외교 전략으로 나라를 지키다.선덕여왕 재위 때 신라는 문화적 전성기를 맞이한다. 웅대한 건축물과 아름다운 조각들이 이 시기에 속출한다. 정치적 안정이 문화적으로 꽃핀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 신라의 국외 사정은 매우 어려웠다.원래 삼국 중 영토가 가장 작고 국력이 약했던 신라는 고구려의 남하 정책과 백제의 중흥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국가의 존립이 문제되던 시기였다. 이때 선덕여왕은 과감하게 견제와 긴장 속에서 안정을 추구하는 외교술을 펼친다. 김춘추를 일본과 당나라로 파견하여 고구려와 백제 배후에 동맹관계를 결성해 쉽사리 신라를 침범할 수 없는 외교적 방어선을 형성한 것이다. 이러한 적절한 외교를 통해 국외적으로도 안정을 되찾은 신라는 부지런히 국력을 키워 마침내 삼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3. 논개30년 넘게 한국을 떠나 살아 한국말을 거의 잊어버린 친구 하나와 여행을 하다 전북 장수에 있는 논개 사당에 들렀는데, 그는 ‘기생’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며, 춘향도 기생이 아니냐고 물었다. 한반도에서 보낸 유년기 동안 ‘기생 논개’라는 관습적 표현이 머릿속에 깊이 입력된 모양이었다. 그러나 논개는 우리에게 각인된 기생과는 거리가 먼, 짧은 생애 숱한 고초를 겪었던 무척 기구한 여성이었다.논개는 선조 7년(1574) 전북 장수군 계내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서당 훈장인 주달문과 밀양 박씨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난봉꾼이던 작은아버지가 동네 늙은이에게 민며느리로 팔아먹는 바람에, 기겁을 한 논개의 어머니는 딸을 데리고 도망쳤다 잡혀와 판결을 받게 되는데, 당시 장수 부사 최경회는 사려 깊은 인물이어서 이 갈 곳조차 없는 모녀를 무죄 판결로 풀어주고 자신의 식솔처럼 거두었다고 한다. 얼마 뒤 논개의 어머니가 세상을 뜨고, 고아가 된 그는 최경회)을 일으킨 급진 개화당에게나 그녀는 핵심적인 공격 대상이었다.이들이 공격하고자 했던 왕후의 개화 정책은 곧 고종의 개화 정책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또한 유교적 충의 관점에서 고종에게 직접 대항하기보다는 왕후를 공격하는 우회로를 택했다고 볼 수 있다.물론 보수파나 급진 개혁파가 왕후를 공격한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근대화를 추진한다는 명목 아래 새 기구를 창설하면서 주요 요직을 민씨 일족이 독차지했다는 것이 그 중 하나였다. 실제로 1880년대 중앙과 지방 관직에 진출한 민씨 친족은 2백60여 명에 이르렀다.그러나 이배용 교수는 민씨 친족 세력에 대해서도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왕후가 능력보다는 충성도에 따라 친족을 가려 쓴 것은 사실이었다. 요직에 오른 일부 민씨가 전횡을 저지른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대원군을 정점으로 한 정적들의 끊임없는 위협 속에서 고종과 왕후가 개화 정책을 추진하려면 믿을 만한 왕당파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에 따라 발탁된 민씨 일파는, 왕을 압도하면서 세도 정치를 일삼은 기존 친족 세력과 달리 왕권을 보좌하는 정치적 지지 기반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 이배용 교수의 지적이다.이민원 박사(국사편찬위원회 사료연구위원)에 따르면, 왕후는 여러 차례 변란을 겪으면서 고종의 정치적 파트너이자 '일급 참모'라는 위치를 다져 갔다. 왕후에 대한 고종의 의존도는 날로 높아졌다. 특히 대외 관계에서 왕후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외국인의 방문기에 왕후에 대한 기록이 최초로 등장한 것도 이 즈음이다.1883년 서양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민 왕후를 알현한 주한 미국공사 부인 로즈 푸트는, 그녀를 '뛰어난 침착성(masterful poise)'과 '언제나 무엇인가를 탐색해 내려는 듯한 눈빛(searching eyes)'을 지닌 총명한 여인이라고 묘사했다.그로부터 10여 년 뒤 민 왕후를 만난 영국의 여행가 비숍 여사는 이렇게 썼다. '당시 왕후는 40세가 넘는 여인으로서 몸이 가늘고 미인이었다. 검고 윤이 나는 머리카락에다 피부는 진가 상사병에 걸려 죽었기 때문이라 한다. 하지만 허균은 이런 따위의 이야기를 쓰지 않았다.아무튼 그녀는 기생이 된 뒤 뭇남성을 농락했다. 그녀는 재주가 많았다. 시인 묵객들과 함께 한시와 시조를 읊으면서 음풍농월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실력이 있었고, 노래도 잘 부르고 거문고를 잘 뜯고 서화에도 능숙한 솜씨를 보였다 한다. 그러니 미모와 함께 최고의 기생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개성은 원래 부자가 많기로 소문이 난 곳이다. 처음에는 돈푼이나 있는 풍류객들이 그녀의 앞에서 놀았을 것이다. 차츰 소문이 나자 이름난 선비들과 고관대작들이 그녀의 앞에서 놀아났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사랑을 주었다는 확실한 근거가 없다. 오히려 일세의 명사들을 데리고 놀았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이런 행동은 그녀의 한에서 나왔을 것이다. 남존여비의 세상을 비웃었다기보다 낮은 신분으로 인해 번듯한 남편을 맞이할 수 없는 풍토를 한탄했을 것이다. 그녀는 치마폭에서 뭇남성을 농락하다보니 거들먹거리는 남정네들이 보잘것없이 보였다. 그리하여 선승으로 유명한 지족선사를 파계시키고 나서는 이런 짓이 부질없다고 여겼다.그녀는 송악산 아래에 서사를 열고 제자를 가르치는 서경덕을 찾아갔다. 허균은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에서 “황진랑이 평생에 서화담을 사모했다”고 썼지, 유혹했다는 글귀는 없다. 아마 그녀가 잠자리에서 서경덕을 유혹했다는 말은 세상 사람들의 흥미를 자아내려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녀는 자주 거문고와 술병을 들고 서경덕과 박연폭포 아래 넓은 바위 위에서 흥취를 돋우고 돌아갔다고 했다.허균의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늘 “지족선사는 30여년을 면벽(面壁)하면서 참선했는데 내가 흔들어 놓았다. 오직 화담선생은 여러해 동안 가까이 모셨지만 끝내 뜻을 어지럽히지 않으셨으니 참으로 성인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서경덕은 누구였던가? 그는 과거를 보아 성균관에 들고서도 모든 명리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평생동안 학문에 열중하고 찾아오는 제자를 가르쳤다.-才色으로 뭇남성 농락 ‘천출 한풀이’-었다.
신자유주의와 공교육우리는 흔히 ‘무한경쟁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표현을 자주 쓰고, 또 접하고 있다.언제부터,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학교에서 교장선생님을 비롯한(심지어 대학 교수들은 더 좋아하더라) 선생님들의 훈화 말씀에 ‘무한경쟁의 시대’, ‘세계화’란 표현은 가장 핵심적인 내용으로 늘 등장됐으며 우리는 그저 당연스럽게 받아들였을 뿐이었다.그도 그럴 것이 석차로 반장, 부반장을 뽑고 부모의 경제력이 학원과 과외, 학습지를 하나라도 더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했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로 성공하려면 무조건 서울의 명문대를 가야한다는 것이 진리처럼 떠받들어졌으니 그 어린 나이에도 ‘무한경쟁’이란 말에 거부감을 느낄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비록 스트레스는 되었으나 말이다.)하지만 이러한 신자유주의는 익히 들었던 아담스미스(A,Smith)의 ‘보이지 않는 손’ 이론, 즉 자유주의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모든 경제활동에 대한 국가간섭 철폐를 주장한 자유주의 이후의 새로운 의미의 자유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의 핵심적 특징은 ‘자유경쟁’이며 이 자유경쟁은 극대의 효율성과 이윤의 극대화를 초래시켜 자본가 중심의 최적정책 사상기조라고 할 수 있다.자유경쟁이 시장에서 전개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공기업의 민영화는 공기업에 대한 보호조치를 철폐하여 자유경쟁원리를 도입하는 동시에 이 기업에 대한 외국자본 참여를 촉진시키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공기업의 민영화 대상은 제조업을 비롯하여 은행, 기간산업, 철도, 유로도로, 전력회사, 전매회사, 통신공사, 학교, 병원 등까지 포함된다.신자유주의는 1970년대부터 미국에서 각광을 받아왔는데, 그 이유는 미국경제가 효율성의 저하, 국제경쟁력의 약화 등으로 위기에 부딪쳤기 때문에 이를 활성화시키기 위함이었다.그래서 신자유주의는 완전고용이 자본주의 발전에 절대로 필요하며, 이는 국가와 중앙은행의 개입을 통해 달성될 수 있다는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즈(J.M.Keynes)의 주장과는 배치된다. 케인즈의 이론은 1930년대 세계대공황이 엄습했을 때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에 크게 반영되어 많은 미국 국민들의 생활수준 향상에 기여했지만, 국제수지의 만성적 역조, 달러 위기, 경제활동의 위축, 정부재정의 적자의 누적 등 자본의 위기가 ‘또다시’ 대두되었던 것이다.이렇듯 신자유주의는 경제에 있어서 정부의 역할을 강조한 케인주주의를 부정하고, 모든 거을 철저하게 시장에 맡기자는 기조 밑에서 출현하게 되었으며, 미국을 위시한 세력가들에 의해서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또한 IMF, 세계은행 등 국제경제기구나 기관은 신자유주의를 열렬히 신봉하고 있다.그러나 신자유주의 채택으로 경제 호황을 이룩한 나라는 극소수에 불과하다.멕시코는 이 신자유주의 채택으로 말미암아 NAFTA에 가입하던 첫해에 1000개사의 국영기업이 민영화되었고 20,000개사의 종소기업이 도산했으며, 근로자의 임금은 40~50%나 떨어졌고, 생활비는 80%까지 껑충 뛰어올랐기 때문이다.미국에 있어서도 신자유주의는 모든 이민노동자들을 비롯하여 노동권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사회복지사업을 축소시킴으로써 복지 프로그램 그 자체의 존속마저 위협하고 있다.그러나 나는 대학생의 입장에서 신자유주의 문제를 이야기하고자 한다.이미 신자유주의는 세계 곳곳을 휩쓸고 있기 때문에, 그 병폐 역시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들고, 특히 한 나라, 한 민족의 미래가 달린 교육에 불어닥친 신자유주의의 문제는 너무나도 심각하고, 중요하기에 그것에 논의의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것이다.나는 6차 교육과정 세대다. 그러나 우리는 쉽게 ‘(저주받은)이해찬 세대’ 세대라고 더 많이 부른다. ‘한 가지만 잘 하면 대학 갈 수 있다’는 감언이설과 수능보다 내신의 비중이 더 강화된다는 정책을 믿었던 순진함이 문제였다. 결국 우리는 자신의 재능을 채 발견하기도 전에 예전의 선배들처럼 야간자율학습과 보충학습으로 긴 밤을 지새우고 수능을 쳐 어렵사리 대학 문턱을 밟았다. ‘단군 이래 최저 학력’ 에, ‘바보 02학번’이라는 오명을 달고 말이다.우리를 향해 걱정과 조롱을 쏟아내던 사람들이 많았지만 우리는 단 한번도 그것이 우리의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 잘못이 있다면 순진하게 그 말을 믿었던 것뿐이다.그리고 대학에 오니, 그런 우리 말고도 교육부장관으로부터 상처받은 사람들은 비단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선배들은 대학등록금 인상률이 왜 물가인상률보다 높은지, 신입생의 등록금과 재학생의 등록금이 왜 차이가 나는지, 왜 성격이 비슷하지도 않는 학과를 묶어서 통폐합하려고 하는지 등등을 연일 학교본부 앞에서 묻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래서 알았다. 그냥 그런 줄만 알았던 이 나라 교육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는 것을.그리고, 그것이 교육부장관 몇 사람의 무능력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 나라 정책의 기본이 세계화니 무한경쟁이니 하며 떠들어대던 신자유주의 때문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신자유주의에 부딪친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뭐니 뭐니 해도 교육재정의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김영삼 대통령부터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까지 교육재정 GDP 대비 6%확보를 공약으로 내걸고 있지만 그것을 지키는 대통령은 아무도 없었으며, 공교육에 대한 학부모 부담은 매년 증가해 세계 최고치에 달하는 실정이다.민주노동당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교육인적자원부의 ‘2004∼2005년 시·도별 중·고 학교운영지원비 징수액’과 ‘2003∼2004년 전국 초·중·고 수익자부담경비 납부현황’을 분석한 결과 우리나라 학부모들이 지난해에 부담한 입학금과 등록금 등 공교육비가 국내총생산(GDP)의 2.2%에 달하는 16조8000억여 원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이 비용 산출에는 입학금 및 수업료, 학교운영지원비(대학 이상은 기성회비) 및 학교급식비, 특기적성활동비 등 수익자부담경비 등이 포함되며, 정부여당의 공약대로 교육예산을 GDP 대비 6%로 확대했다면 당장 초·중·고 무상교육은 물론 대학 등록금도 대폭 줄일 수 있다는 분석도 가능한 것이다.
요약1. 식민사관식민사관은 제국주의 성립과정을 뒷바침하는 논리인 근대화론, 사회진화론에서 비롯되었다. 사회진화론은 다아윈의 진화론을 바탕으로 제국주의 시대의 약육강식의 세계질서를 합리화하는 이론이었고 근대화론은 문명의 이름 아래 아시아에 대한 지도나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리였다. 이러한 제국주의의 논리에 맞추어 우리 역사와 사회를 해석하려는 내용은 모두 식민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 식민사관으로는 크게 나누어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으로 파악될 수 있다.일선동조론의 발생과 내용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부터 침략주의 정객들에 의해서 정한론(征韓論)이 일어났으며 침략주의 어용사학자들에 의해서는 일선동조론·만선사관(滿鮮史觀)·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남조선경영설(南朝鮮經營說) 등이 만들어졌다. 그중 일선동조론은 한국고대사에 대한 연구를 통해 조선과 일본은 같은 민족이라는 결론을 이끌어 내어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지배를 합리화한 이론이다. 이 이론은 도쿄제국대학 교수들에 의해 저술되고 이후 일본사 교육의 중요한 저본(底本)이 된 〈국사안 國史眼〉(1901)에서 고대의 한일관계가 동조론의 입장에서 서술됨으로써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후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것을 합리화하는 사론으로서 강조되었다.조선과 일본이 같은 조상으로부터 피를 나눈 근친관계에 있고 태고 이래 조선이 일본의 지배하에 있어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가부장적 지배가 가능한 것이라면, 조선은 이제 일본에 대해 외국·외민족은 될 수 없으므로 일본에 흡수되지 않으면 안 된다며 일제의 조선 강점을 합리화했다.일선동조론의 기능일선동조론은 3·1운동 이후 일제의 문화정치 밑에서 강조된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구호를 통해 정책적으로 한층 심화되었으며, 만주사변 이후 한국민에게 강요된 창씨개명(創氏改名) 등의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과 민족말살정책도 그 연원은 여기에 귀착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일제의 침략이 만주와 중국대륙까지 뻗치게 되자 확대·발전하여 만주·몽골의 제민족도 포함시켜 그곳에 대한 침략마저가의 기틀을 이룩한 것은 645년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을 거쳐 8세기초 율령(律令)이 제정된 다이카[大和] 정권 때였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그 수세기 전에 조선으로 대규모 병력이 출병해서 남선일대를 정복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전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고고학적 유적과 유물을 보더라도 남한 내에서 일본식 유물이 거의 발굴되지 않는 반면, 일본 내에서는 삼한과 삼국계 유적과 유물이 다량 발굴됨으로써 식민사학자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한국인들이 일본열도의 일부를 지배했거나 최소한 그들에게 선진문화를 전파했음이 밝혀졌다.한편 타율성론과 관련되어 이를 보다 강조하는 것이 조선의 반도적 성격론과 사대주의론이다. 그 대표적 일본의 관학자인 미지나[三品彰英]는 1940년에 쓴 〈조선사개설 朝鮮史槪說〉에서 한국이 대륙의 중심부에 가까운 반도라는 지리적 특성을 갖고 있어 한국사는 동양사 본류에 부속된 주변으로서 정치적·문화적으로 항상 1개 내지 그 이상의 세력 항쟁에 시달리고, 때로는 하나의 압도적 세력에 의해 지배될 수밖에 없었다고 하면서 한국사의 성격을 부수성(附隨性)·주변성·다린성(多隣性)으로 규정지었다. 한국사의 이런 반도적 성격은 대외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외교관계, 정치면·사회면·문화면에서도 나타나 사대주의라는 성격이 한국사 전개의 기본원리로서 형성되었다고 했다. 즉 주변세력의 변동이 국내의 정치·사회 변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한국사회와 문화의 변화도 종주국을 모방한 것에 불과하며 나아가 이 사대주의적 성격은 한국인의 의식구조·행동양식 등 일상의 모든 것을 규정하는 주의로 굳어져 민족성으로까지 발전했다고 강변했다. 타율성론에 서서 한국사의 자주성을 일단 부정하게 되면 비주체적 역사를 가진 한민족이 언제나 외세의 지배를 받는 것은 불가피한 것으로 인식되어져서 마침내 중국·만주·몽골의 침략적 지배보다는 일본의 온정깊은 지배를 받는 것이 한국의 재출발과 반도사적인 성격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논리도 가능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타율성론은 일제하는 근대적 개혁과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의 독립 및 그것을 위한 민족의식의 강한 발현이 동시에 필요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의 역사학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근대 역사학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후기 민족주의 역사학은 박은식, 신채호의 한국사 전통을 계승한 정인보, 안재홍, 문일평 등에 주도되었다. 이들은 특히 신채호의 역사 인식에 깊은 영향을 받아 조선정신, 민족정신의 회복을 역사연구의 제일 실천적 목표로 삼았으며 나아가 이를 정신사관으로까지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정인보의 '얼의 사관', 안재홍의 '민족정기', 문일평의 '조선심'의 주창이 그것이었다. 다른 한편 이들은 신채호가 발견하였던 사회발전의 논리와 발전의 주체로서의 민중의 의의에 대해서도 주목하였다. 예컨데 문일평은 민중세계의 역사적 역할을 주목하여 민중의 투쟁이 역사발전의 주요한 계기임을 인식하였고 이를 위한 실천적 노력으로서 민족사의 대중화 작업을 추구하였다.이러한 실천적 현실인식과 학적 배경으로부터 민족주의역사학이 주 연구대상으로 삼은 것은 고대사분야와 실학이었다. 이들을 특히 고대사연구를 통해 식민주의역사학의 한국사 왜곡으 폭로하고 이 시기 일부 한국인학자들의 일제에의 학문적 추종, 그 식민지화를 비판하고자 하였다. 신채호의 주장을 발전시킨 정인보의 ≪오천년간 조선의 얼≫, 안재홍의 ≪조선상고사감≫ 등은 그 대표적 업적이었다. 그러나 후기 민족주의역사학은 여러 측면에서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민족부르조아지의 역사관인 관념론적 문화사관에 머물러 있었고 계급과 민족분제의 차별성을 인식하지 못하여 이를 정충시키거나 계급을 민족개념에 종속시켜 과학적인 사회발전의 논리나 민중개념을 확립할 수 없었으며 소박한 민중주의에 입각해서 민족정신의 회복을 주장하였다.3. 위정 척사 운동① 성격 : 正學과 正道를 지키고 사학과 이단을 배격(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배격) 이항로, 기정진, 유인석, 최익현 등 주도② 전개○ 1860년대 : 통상반대운동, 척화 주전론, 이항로, 기정진 → 대원군의 쇄국 각 도의 환상미(還上米-정부에 상환해야 할 쌀)는 영구히 면제한다.7. 규장각을 폐지한다.8. 시급히 순사를 설치하고 경찰제도를 정비한다.9. 혜상공국(惠商公局-일종의 봉건적 특권상인인 보부상과 관속 상인을 관할하는 관청)을 폐지한다.10. 죄인을 다시 조사하여 죄 없는 자는 석방한다.11. 4영(四營)을 합쳐서 하나로 만들고 영 중에서 장정을 뽑아 근위대를 설치한다.12. 모든 국가 재정을 호조에서 관장하고 기타 모든 재정 관청을 폐지한다.13. 대신과 참찬은 매일 정부 청사 내의 의정부에서 회합하고 정령을 의정포고한다.14. 정부 6조(六曹) 외에 불필요한 관청과 관리는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이 이를 심의 처리한다.(갑오농민운동의 폐정개혁 12개조)1. 동학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씻고 서정에 협력한다.2. 탐관오리는 그 죄상을 조사하여 엄징한다.3. 횡포한 부호는 엄징한다.4.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는 징벌한다.5. 노비문서를 소각한다.6. 7종의 천민 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평량립을 없앤다.7. 청상 과부의 개가를 허용한다.8. 무명의 잡세는 일체 폐지한다.9. 관리 채용에는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10. 왜와 통하는 자는 엄징한다.11. 공사채는 물론하고 기왕의 것을 무효로 한다.12.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한다.④실패 원인 및 의의(갑신정변)갑신정변의 실패 원인 중 가장 직접적인 것은 청의 무력 간섭이다.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화, 특히 청에 대한 예속의 청산을 내건 개화파 정부는 청의 입장에서 볼 때 위협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임오군란 이후 주둔하고 있던 병력을 동원해 무력으로 개입하였고, 이는 갑신정변을 좌절시켰다.두번째로 지적될 수 있는 갑신정변의 실패 원인은 민중과의 연대를 이루지 못했다는 점이다. 당시 개화파는 조선의 자본주의적 발전의 미약성, 수구파 정권의 탄압, 외세의 방해로 인해 그 성장을 제약받고 있었다. 이에 반해 민중들은 병인양요, 신미양요, 강화도 조약 반대 운동, 임오군란 등에서 보듯이, 반봉는 그 신분적 제한성 때문에 농민군과 연합할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외세에 굴복하여 농민군을 진압하는 길로 나아갔다.비록 실패하긴 하였으나 갑오농민운동은 19세기 민중 운동의 최고봉으로서 우리 근대사의 일대 전환점이었다. 갑오농민운동은 수십만이 직접 전투에 참여한, 또 일시 가담한 사람까지 합하면 그 숫자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대규모 투쟁이었으며, 그만큼 치열하게 전개된 반제국주의 반봉건 투쟁이었다.5. 의병운동: 의병 운동은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민중이 일으킨 전통적 구국 운동의 대표적 형태로 우리 민족의 강인한 저항 정신을 표출한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그리고 보호국 체제하에서는 국권 회복을 위한 무장 투쟁을 주도했고 식민지 체제하에서는 항일 독립 전쟁의 기반을 마련하여 항일 운동사에 큰 맥을 형성하였으며,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항하여 처절한 무장 투쟁을 전개한 점에서 세계 약소 민족의 독립 운동사에도 큰 의미를 가진다.6. 계몽 운동- 성격 : 무력 운동을 지양(止揚)하여 국권을 회복하려는 민족 실력 양성 운동→경제 자립, 민족 교육 운동에 중점- 맥락 : 개화 자강 운동 계열 계승- 교육 운동 : 교육 진흥과 향토 발전을 통한 민족 실력 양성을 목적으로 서북학회·기호 흥학괴 등의 교육 단체가 활동, 국권 회복을 위한 정치와 교육의 결합 단체- 언론 활동 : 국민 계몽·애국심 고취와 항일 여론 조성, 장지연이 [황성 신문]에 ]시일야 방성 대곡]이라는 논설 게재, [대한 매일 신보]는 국채 보상 운동 지원 등- 한계 : 일제에 의해 정치적·군사적으로 예속된 상황에서 전개의의- 민족 독립 운동의 이념 제시 : 국권 회복과 근대 국민 국가 건설- 민족 독립 운동의 전략 제시 : 독립 투쟁론 제시(국내에서의 실력 양성 운동과 국외에서의 독립군 기지 건설로 역량을 배양)- 민족 독립 운동의 기반 제공: 근대적 민족 교육을 발흥시켜 독립 운동의 인적 자원을 확보하고, 근대적 민족 산업을 진흥시켜 독립 운동의 경제적 토대를 확보7. 동북공정◆중국의습니다.
조선족과 재외동포법 문제에 대한 고찰2001년 10월 초에 중국인을 포함한 중국 동포들 60명이 한국 어선에 숨어 국내로 밀입국하려다 선상에서 26명이 집단 질식사한 사고가 발생한 적이 있었다. 놀랍게도 이들의 시체는 모두 바다에 버려졌는데, 이들은 환기구도 없는 4평 크기의 밀폐된 창고에서 몸을 제대로 움츠릴 수도 없는 상태로 갇혀서 밀입국 하다가 변을 당했다고 한다. 그들이 겪어야 했을 처절한 고통과 죽음은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다.재중교포 그들은 누구인가?그들은 대부분 일제 때 생존과 독립운동을 위해 국경을 넘어간 우리민족의 후손들이며, 한국전쟁 이후 조국이 남북으로 갈라지면서 조선족 2세, 3세들은 그들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땅에도 마음대로 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냉전구도 하에서 연변은 한국인들에게 거의 잊혀진 지역이었으며 한국 역시 연변교포들에게는 잊혀진 존재였다. 80년대 중반까지만 하여도 연변교포들의 한국에 대한 인식은 이념적 괴리, 한국전 참여, 북한의 비방전 등의 영향으로 부정적 시각 일변도였다.그러나 아시안 게임과(1986) 서울 올림픽 게임(1988)을 계기로 연변교포들은 한국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고, 한국인들도 연변에 대해 새롭게 느끼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냉전 구도의 몰락과 사회주의체제진영의 몰락은 한국과 연변을 더욱 가까이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특히 92년 한중수교에 따라 한중관계가 호전되어 한국은 잘 사는 발전 모델의 나라로 인식되어 ‘코리안 드림’을 한껏 부풀게 하였다.중국교포들은 한국에의 취업을 갈망하게 되었고 한국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의 땅으로 비치어 장사밑천을 마련하기 위해, 혼수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보따리장수들은 한국행 러시를 이루었다. 적지 않은 교포들이 큰돈을 벌어 금의환향하였는가 하면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로 혹사를 당하면서도 임금을 제대로 못 받거나 신체장애가 되는 경우도 많이 생기게 되었다.중국과 한국간의 보따리 장사는 중국의 개방과 더불어 중국교포들이 한국을 방문하면서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한약을 가지고 와서 비싸게 팔고 갈 때는 물건을 사다가 비싸게 팔아 부자가 되는 사례가 많아 조선족들은 보따리장수로서 변신이 급속하게 늘어났다. 이러한 보따리장수는 한국 상품의 중국으로의 수출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인기 있는 중국산품, 예를 들면 보신재, 한약, 한약재, 참깨, 골동품 등을 비롯하여 역 보따리 무역, 나아가 밀수까지 성행하게 되었다.중국교포들의 한국으로의 취업과 관련된 밀입국도 급속히 늘어났다.96년경 밀입국 알선료는 전년보다 20% 상승한 1인당 5만 위안(한화 500만원)으로 올랐는데 이는 현지 근로자 월평균 임금의 10년 치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중 1만원을 계약금으로 내기 위해 전답을 팔거나 빚을 내는 것이 예사이었으며 밀입국의 성공자는 영웅으로 인식되기까지 하는 풍조였다.) 그들은 밀입국에 성공하여 식당이나 공장 기숙사에 들어가 먹고 자고 월 50만원 받는 게 소원이었다. 적발되면 벌금 100만원 내고 송환되는 것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한국 내에 4만 여명의 불법체류자가 있는 것이 현실이었기에 동북 3성에만 150여 브로커가 성업 중이었다.)연변과의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한국의 혼기를 놓친 한국의 농촌총각과 한국국적 취득과 취업을 위한 연변처녀들의 짝짓기 운동, 소위 ‘연변처녀 농촌총각 짝짓기’운동도 추진되었다. 연변교포 여성 중 국제결혼에 의한 한국국적 취득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는데, 연변의 국제결혼추세는 90년에 23쌍을 시작으로 91년 47쌍, 92년 86쌍, 93년 630쌍, 94년 839쌍, 95년 1500여 쌍에 이르게 되었다. 결혼대상은 70%가 한국 남성과의 결혼이고 그중 20%는 파경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 되었다.)그러나 연변 처녀들의 한국남성과의 국제결혼은 상당부분이 취업을 위한 국적취득의 기회로 활용하는 경우로 활용되어 위장결혼 문제는 국제문제로까지 대두되었다. 위장결혼은 거의 한국인 브로커의 알선으로 이루어지며 그 과정에서 중국교포들이 사기를 당하고 매매혼이 이루어지는 등 부작용이 심각했던 것이다.현재 국내 체류 중인 외국 국적의 한민족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외국인 체류자 57만 명(10월 현재)의 상당수를 차지할 것으로 추산된다. 문제는 이 중 불법체류자가 많다는 점이다. 예컨대 불법체류자는 24만3734명인데 이 중 28.3%인 6만8931명이 중국교포들이다. 전 세계에 120 여 개국 국가에 해외교포의 수가 약 5백60만 명에 이르고, 남북한을 합한 인구의 10%에 육박하는 등 이들의 수는 날로 늘어나고 있다.그런데도 지금까지 한국의 교민정책은 이미 이주한 이상 조국에 대한 미련은 갖지 말고 빨리 현지에 적응하여 열심히 살라는 식의 기민(棄民)정책에 불과하였다. 해외교포 중 절반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는 3백만 재중, 재러 동포를 외면한 채 지구촌 한민족공동체를 지향하며 '세계화'를 한다는 것은 허구요, 역사의식과 국가경영 전략의 부재다.국민의 정부는 1999년 9월 '재외국민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재외동포법)을 역사적으로 제정 공포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재중, 재러동포는 적용대상에서 제외됐다. 과거 국적의 취득시점을 1948년 8월 15일로 못 박았기 때문이다. 1948년 8월 15일을 기점으로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으니 우리 동포가 아니라는 식이다.그러나 1948년을 기점으로 한다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의 정부는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고 있기 때문이다. 또 우리 국적법은 원천적으로 법 제정 당시 최초의 대한민국 국적 보유자에 대한 규정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최초의 대한민국 국적 소지자는 해방 당시 국내외에 거주하던 모든 동포로 봐야 마땅하다.이에 지난해 2월 국회는 1948년 정부 수립 이전에 이주한 재외동포와 그 직계비속을 재외동포에 포함시키는 내용의 재외동포법 개정안을 통과시켰지만 법이 개정된 지 1년 9개월이 지나도록 시행령과 시행규칙 등을 고치지 않고 있다.재중동포들이 재외동포법에서도 소외된 것은 중국과의 마찰, 안보상의 불안, 노동시장 교란 등을 염려한 나머지 외교통상부쪽의 반대 때문이었다. 이것은 민족적인 견지에서가 아니라 다분히 정치적인 편의에서 나온 발상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로 인하여 비운의 동포들은 잘 사는 재미, 재일동포와 못사는 자신들을 모국이 법률로 차별하는 악법이라며 끈질기게 개정을 요구하고 있지만 정부는 못 본 채 하고 있다.더욱이 지금의 재외동포법이 굴욕사대외교의 산물이라는 점은 더욱 분노스러운 일이다. 최근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이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외교부가 재외동포법 제정을 앞두고 중국과 미국 정부에 사전 승인을 받았다는 것. 법무부의 재외동포법 최초 법안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재외동포의 이중국적 문제를 해결한다는 취지에서 자유왕래, 참정권, 공직취임권 허용 등의 혁신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이 같은 법안은 외교부의 반대에 부딪쳤고 이후 외교부가 중국과 미국에 법안 관련 의견조회를 수차례 하면서 ‘외교마찰’이 현실화됐다. 이에 법무부는 법안 수정을 거칠 수밖에 없었고 중국 정부의 ‘수락’까지 받아야 하는 상황으로 비화된 것이다.)안타깝게도 이러한 재중교포들의 현실과 재외동포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민운동 진영의 움직임은 아직 활발하지 못하다. 그러나 재중교포(재외동포)들이 식민지 조국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 때문에 발생했기 때문에 그들의 출입국과 법적지위를 인정하도록 하는 재외동포법 시행령 개정 대정부 요구를 끊임없이 벌여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