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남긴 욕망의 끝, 신이 자비를 베풀다.인간은 끊임없이 욕망을 생각하고, 그것을 이루려고 많은 것들을 희생시킨다. 그것에 희생 된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끊임없이 꿈틀대는 욕망을 신은 얼마나 눈감아주고 있는 것일까. 지금까지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인간의 이기심이 불러일으킨 희생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 수 있다. 인간이 세상을 뒤집어도, 지구를 반대로 돌게 하더라도 신은 그렇게 보고만 있을 것인가.주인공인 아시타카는 자연과 공존하며 살아가는 마을에서 자라왔다. 그가 자라온 마을은 자연을 숭배하며, 검이라고 불리 우는 것들을 두려워하며 숭배하는 곳이었다. 그는 서쪽에서 일어나는 싸움을 보고 그것을 막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인간의 욕망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모든 일은 저질러져 버렸고, 많은 희생들이 치러졌다. 지금까지 많은 독재자들이 일으킨 전쟁처럼 말이다.인간이 자연에게 베푸는 것이 무엇이 있던가. 에보시의 마을도 마찬가지였다. 에보시가 과연 좋은 지도자였을까. 그는 분명히 인간이 바라고 원하는 지도자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버려진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와 살게 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을 주지 않고 공정하게 대하였다. 하지만 인간만을 위한 지도자가 좋은 지도자라고 할 수 있을까?그녀는 너무 무분별하게 숲을 헤치고 있었다. 자신의 마을을 건설하기 위해서 그녀는 신이라 불리 우는 멧돼지를 죽이고 말았다. 그녀가 저주를 불러일으켰다. 숲을 파헤치고, 뒤집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을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더 많은 숲을 원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을 이외에는 별로 안중에 없었다. 그녀의 눈에 인간의 행복 이외에 다른 것들은 모두 쓸모없는 것으로 보인 것일까. 그들도 생명이 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 것일까.그녀는 또한 마을을 위협하는 인간에 대해서도 잔인했다. 그녀의 마을로 쳐들어오는 사무라이들과 말이 안 통하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그들의 죽음으로서 해결해야 했을까. 인간은 결국 나중에 인간간의 싸움으로 많은 것들을 잃는 것을 왜 모르고 있는 것일까. 전쟁은 어디에서든 환영받지 못한다.산은 어떨까. 에보시가 나쁘다고 말한다면, 산도 좋은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산은 숲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인간을 공격하고 에보시를 죽이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신이 되지 못한다. 무분별한 숲의 파괴가 아니라고 해도, 그녀는 조그마한 숲의 상처에도 인간을 공격할 것이다. 그녀는 자연의 눈으로만 숲을 바라보고 있다. 모든 것을 자비롭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절대신인 사슴신 뿐이었다. 인간과 자연이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 사슴신뿐이었다. 나중에는 머리가 잘린 그의 죽음의 모습에 그가 정말로 절대신인지 의구심이 들었지만.
그는 그가 바라던 예술을 계속 잊지 못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이미지를 실현시키고 싶어 했고, 그 이미지를 쫓아서 먹이를 찾는 하이에나처럼 이리저리로 헤매었다. 그 이미지를 실현시킬 수 있다면, 그는 처제를 희생시켜도 좋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처제를 사랑하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그 이미지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예술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그는 누구를 버려도 좋다고 생각했다. 처제의 몸을 바라보며, 꽃처럼 피어난 그녀의 몸을 상상하며 그는 발기했다. 하지만 단순히 처제와의 관계만을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햇살을 받아 피어나는 꽃들을 원했다. 예술적인 것을 찾던 그는 그가 살아가고 있던 세상을 미워하며 그는 본래의 그 무언가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도 식물이 되려고 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그녀의 몸에서 피어나는-그 화려한 꽃들의 향연-돌이킬 수 없었던 그런 예술과 음란하면서도 신비로운 관계를 원하고 있었다. 주인공이 원한 그 신비로운 관계는 아내의 등장으로 인해 욕망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 하룻밤 꿈같은 화려했던 정사는 예술적이고 아름다운 관계임에 틀림이 없었다. 분명, 그랬다. 하지만 뒤돌아서 현실을 뒤척이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처제는 인간이지 식물이 아니었다. 식물을 그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맨몸을 내놓고 햇빛을 받으려고 했고, 꽃을 몸에 그린다는 말을 흔쾌히 승낙한 그녀는 식물이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인간에 불과했다. 그녀의 모습은 식물이 덕지덕지 그려진 약간의 정신이상을 지닌 불쌍한 여인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주인공과 인연을 갖고 있었던 P도 물감 칠을 한 그의 모습을 보고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진정으로 식물을 그리고 있던 것은 처제이고, 주인공의 모습은 그 욕망을 쫒고 있는 병든 개 같은 모습이었다. 마지막에 그는 자신의 몸에 물감 칠을 해서라도 그녀와의 관계를 가지려고 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식물과, 예술과, 화려한 그녀의 몸과 관계를 갖고 싶었다. 그건 예술로 똘똘 감아버린 자신의 욕망이었을 뿐.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이라는 것이 진정한 예술을 부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한다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절제라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 포르노테라피가 과연 대중들에게 아름다운 예술로서 다가갈 수 있을까? 인간 본연의 모습을 담는다는 것이 어떻게 우리들에게 다가설 수 있을까.
원령공주(も の の け 姬)를 보 고첫 번째 자유 레포트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원령공주이다.수많은 주제가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아서 나에게는 어려웠다. 그러나 나름대로의 결론을 말하자면, ‘밝은 미래를 위한 사고의 회복‘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그것 외의 주제는 아시타카와 산의 마음의 교류나, 인간과 자연, 인간사회의 문제(차별이나 전쟁), 인간의 한없는 욕심이라 생각하고, 또한 이것들은 ’긍정적 사고‘를 뒷받침 해주는 주제들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현대사회를 상징하는 등장인물, 에보시와 지코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한다. 에보시는 현대인의 이상형으로써, 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약자를 구제하고, 사람들을 통솔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생명에 대한 경외심은 가지지 않는다. 지코는 이기적인 현대인의 상징으로서 자신, 또는 소속된 조직의 이익만을 생각하지만, 증오스러운 인간이 아니라, 밝은 인물로, 처음 보는 사이인 아시타카에게 정보를 제공하곤 한다. 어느 쪽도, 현대 일본에 살고 있었더라면, ‘잘나갈’ 인물이었을 것이다. 현대 일본이나, 한국에서 볼 수 있는 무기력함과 무관심의 분위기와는 다르다. 그러나, 그들은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생명이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밝은 미래를 위한 사고를 결여하고 있다는 문제이다. 에보시의 행동이든, 지코의 행동이든, 순조롭게 일이 진행될 때는 그들의 의지의 강함을 인정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에보시는 자연과 사회의 양면에 파괴를 가져와 버렸고, 또, 지코의 행동이 시시신의 죽음을 초래하였다. 그리하여 그 일면의 파국이 일어나니, 그들의 의지가 미래의 죽음(미래가 없어짐)을 초래해 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보시는 반쪽 팔을 잘려버려서 대항할 기력은 없었고, 지코도 또한 아시타카와 산에게 폐배한 후에는 그저 후퇴하여 웃을 뿐이었다. 그들은 만약, 미래가 절망적으로 보이더라도, 자신의 미래를 개척해나갔을까? 그들이 파국하기 전의 에보시나 지코였었더라면 기대도 안했을 것이다. 오히려, 살아있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밝은 미래를 위한 사고이거니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다. 현대 일본인은 지금의 물질적으로 풍부한 사회를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자신들의 손으로 미래를 개척해 나갈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들의 앞으로의 과제일 것이다.이 영화의 의미는 마지막 장면인 아시타카와 산의 헤어짐의 장면에 결집되어 있는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둘은 마음이 통하였지만, 마지막에는 서로 다르게 살아갈 것을 인정한다. 자신의 힘으로 미래를 가지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지 아시타카는‘(시시신의 목을)인간의 손으로 돌려주고 싶다’는 말을 했을 것이다. 즉, 인간이 잘못을 저지른 것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미래를 믿고 나아가겠다는 의사의 표현이 아닐까. 미래라고 하는 것은 한명 한명의 의지가 합쳐져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미 자연은 파괴되었지만, 포기하기에는 이르다고 생각한다. 죽음에 이르는 저주를 받은 아시타카가 절망에 빠지지 않았기에, 아시타카의 저주는 마지막에 풀린 것이 아닐까는 생각도 든다. 물질적인 번영 속에서 살아갈 의지를 잃어가는 일본이기에 절망 속에서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감독은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는 생각이 든다.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를 보고두 번째 자유 레포트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이다.나는 영화도 좋아하지만 만화영화에 대한 애착 또한 많기에 이 작품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자신 있게 꼽을 수 있었다.내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처음 봤던 때는 2년 전이었다. 그 당시 나는 소위 ‘재패니메이션’ 이라 불리 우며 인기를 끌던 일본만화에 빠져있었다. 때문에 웬만큼 유명세를 탄 애니메이션은 비디오 테이프나 v-cd로 가지고 있었는데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도 그것들 중 하나였다. 사실 그때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들 중 ‘나우시카’보다는 ‘이웃의 토토로’나 ‘원령 공주’를 더 좋아했다. 하지만 이제와 다시 보게 된 ‘나우시카’는 내게 그때와는 또 다른 감동으로 다가왔다. 좋은 작품은 몇 번씩 다시 볼수록 좋다는 말은 이런 경우에 생겨난 것인지, 난 몇 번을 다시 봐도 지루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것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특유의 부드러움에서 오는 매력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자신의 대표작들에서 자연친화적인 모습들을 많이 보여준다. 이렇게 자연을 주제로 한 작품들은 많이 있지만, 이 작품에서 그는 앞서 언급했듯이 그 식상할 수도 있는 주제를 그만의 부드러운 정서로 승화시킨다. 다시 말해 결말이 뻔히 보이는 스토리를 따뜻함으로 장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는 ‘원령 공주’에서 보여주는 강렬함이나 화려함은 없다. 하지만 뭔가 절실함이 느껴진다. 예컨데, 극중 바람계곡에는 바람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들과 곤충과 숲을 사랑할 줄 아는 소녀, 나우시카가 산다. 이 어린 소녀가 홀로 필사적으로 자연을 수용하고 감싸 안으려 하는 모습이 나로 하여금 절실함을 느끼게 했던 것이다. 또, 이런 절실함과 함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는 그의 작품에선 좀처럼 느낄 수 없었던 비장감까지 느껴진다. 실제로 ‘거대 산업문명이 붕괴되고 천년 후..’라는 프롤로그는 그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단적으로 나타내려 한 의도인 것 같다.나는 그러한 비장감을 충분히 느끼며 이 작품을 봤고, 나우시카라는 캐릭터를 내 나름의 눈으로 해석해 보려했다. 나우시카는 호메로스의 에서 영웅 오디세우스를 구해주는 처녀로써 용기와 품위를 함께 갖추고 있으며, 여자다운 부드러움을 지닌 여성의 이상형으로 대표되는 인물이다. 감독이 이것을 염두에 두고 ‘나우시카’라는 이름을 지은 것인지 확신할 순 없지만 아예 무관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즉, ‘나우시카’는 마을에 내려져 오던 전설을 실현시켜 인류를 구원하는 인물이란 점에서 의 처녀와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우시카가 메시아 적인 인물이라기보다는 심지가 곧고 순수한 소녀라는 느낌을 더 강하게 받았다. 그녀는 곤충과 숲을 사랑했기에 그것들의 파멸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나우시카는 그냥 순수하게 자연을 사랑했고,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칠 만큼 열정도 있는 인물이라 생각되어졌다.
일본의 스트리트 패션1. 하라주쿠에스닉풍의 아이템이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고, 꽃이나 풀잎과 같은 자연을 모티브로 한 것이 많이 보인다. 그리고 포크로어풍의 자수나 패치웍 등의 핸드 크래프트적인 아이템도 등장하고 있다.아이템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면소재의 원피스이고, 롱과 미니 모두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꽃무늬 프린트 등의 레트로한 60년대풍의 미니 쉬프트드레스도 보인다.원피스 뿐만 아니라 면이나 마와 같은 천연소재는 아이템 전반에서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고, 베스트나 팬츠, 플레어 스커트 등을 조합한 심플한 코디네이트에 이용되고 있다.상의는 캐미솔이나 런닝 등의 노슬리브 착용이 늘어나고 있고, 그 가운데에서도 쉘탑이라 불리는 하이넥 니트가 주목받고 있다. 컬러는 지속적으로 베이스 컬러로서 인기를 끌고 있는 블랙 대신에 카키색이나 올리브 컬러의 아이템이 증가하고 있다{{{{{{{{{{{{{{{{2. 시부야에스닉 경향을 보이고 있다. 20대의 학생들 사이에서는 인도실크의 스커트가, 젊은 여성층에서는 프린트 원피스 등의 하와이풍 아이템이 주를 이루고 있다. 또한 멀티 보더의 스모크 등, 네오히피풍의 아이템을 도입한 코디도 등장하고 있다.젊은 여성, 또는 직장 여성층에서는 슬립리스와 타이트 스커트로 슬림한 내츄럴 라인 실루엣의 코디를 많이 볼 수 있다. 또한 60년대풍의 레트로적인 쉬프트 드레스풍의 원피스를 젊은 여성층을 중심으로 착용하고 있고, 홀터넥풍이나 끈으로 묶는 스트랩 등의 다양한 디테일이 보이고 있다. 또한, 바둑무늬풍의 연속무늬나 트로피칼 프린트, 스트라이프 등, 다양한 패턴도 등장하고 있다.하의로는 섹시하게 비치는 레이스로 짜여진 타이트한 롱스커트나 컬러플한 패턴이 들어간 팬츠, 컬러플한 짧은 벨바텀이 새로 선보여지고 있다. 색상은 원피스나 니트, 팬츠를 중심으로 핑크나 오렌지 등 화려한 색의 아이템이 눈에 띄고 있으나, 이번 달은 특히 노란색과 마린블루, 스카이블루, 에메랄드그린 등의 산뜻한 컬러가 원피스를 중심으로 많이 등장하고 있다.소품으로는 투명한 플라스틱의 크리스탈 목걸이나 십자가의 라인스톤 소재의 팬던트, 붙이는 눈물 등 반짝반짝 빛나는 액세서리가 인기를 끌고 있다. 또한 끈에 붙인 레이풍의 조화를 포함하여 핸드폰을 목에 걸수 있도록 하는 휴대스트랩 등 핸드폰 관련 소품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3. 긴자에스닉 감각의 아이템은 긴자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 달은 페이즐리 무늬의 스커트와 화이트 니트의 코디 등, 얌전한 감각의 코디네이트가 눈에 띄었으나, 이번 달에는 오리엔탈적인 마름모꼴이 들어간 투피스 등, 적극적으로 에스닉 감각의 아이템을 도입한 코디도 등장하고 있다. 또한 캐리어층에서 인기있는 것은, 스커트나 원피스를 중심으로 꽃무늬 패턴으로 바뀌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아이템으로는 고급스러운 수트가 보이고, 반소매나 7부소매 재킷에 타이트미니 또는 원피스를 코디시킨 스타일이 많이 보인다. 커프스나 스커트의 사이드 슬릿 등 세밀한 디테일과 여성스러운 디자인이 관심을 끌고 있다.긴자에서도 슬리브리스 원피스를 입고 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고, 보수적인 내로우 라인의 타입 뿐 아니라 하이웨이스트인 엠파이어 라인이나 퍼브 슬리브에 드로우 스트링 네크라인 등, 유행하는 디자인도 볼 수 있다. 반대로 면소재가 중심인 하라주쿠, 시부야에 비해, 드레이프 감이 있는 썸머울 소재 등 양질의 소재가 많이 나타났다는 것도 특징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