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 및 출석 확인*교과서 및 학습지 확인* 새로운 대단원에 대한 개괄적 설명* PPT로 학습목표 제시* 초기 붕당 정치가 건전하고 합리적인 정치 운영 방식임을 설명 및 발문* 학습지의 빈칸을 같이 채운다*붕당정치의 변화와 비변사가 국가 최고 권력 기관이 된 것을 설명.발문.*사료제시(곽우록)* 학습지의 빈칸을 같이 채움 *예송과 환국을 거치며 붕당정치가 변질되어 가는 과정을 설명. *붕당정치 변질의 결과인 서인 전제화 현상의 영향을 설명.* 학습지의 빈칸을 같이 채움
▶인사를 하고, 교과서와 학습지를 소지를 점검한다.▶ 동북공정 관련 동영상을 보고 우리 역사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고구려 역사에 대해 알아야 함을 상기시키고 학습동기를 유발한다.▶뉴스 동영상 마지막 장면을 보고 주의집중을 겸하여 반 전체가 “고구려 화이팅!”을 외치도록 한다.▶ppt를 통해 학습목표를제시하고 다 같이 읽도록 한다.▶전시학습의 확인 차 연맹왕국과 이번 차시에 배울 중앙집권 국가의 특징을 비교한다.-연맹왕국 : 여러 부족이 연합한 연맹체로 왕이 있으나 왕권이 미약하고 각 부족장들이 부족을 독자적으로 통치하였다.
Ⅰ. 단원명 ․ 대단원 : Ⅵ. 조선 사회의 변동 ․ 중단원 : 1. 붕당 정치와 탕평책 ․ 소단원 : 탕평책을 실시한 목적은 무엇인가? 학 습 목 표탕평론이 대두하게 된 배경을 설명할 수 있다.탕평책을 실시하여 왕권을 강화시킨 영.정조의 업적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규장각이 정조 시대 문예 부흥과 개혁정치의 중심이었음을 말할 수 있다. 영조의 개혁정치-탕평책목표: 붕당 대립의 완화, 왕권강화내용: 온건하고 타협적인 인물 등용. -노론 강경파 축출, -소론과 남인의 온건파를 고루 등용붕당 갈등 극복의 의지를 강력히 밝힘 -> 성균관에 탕평비를 건립이조 전랑직의 자천권 폐지. ->이조전랑을 둘러싼 갈등 약화.
국립중앙 박물관 방문기처음 예술사과제로 국립중앙 박물관 방문기를 받았을 땐 기분이 아이러니 했다. 한번쯤 국립중앙 박물관에 가고 싶었기 때문에 친한 학교 친구들과 갈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과 역시 과제는 싫어…….라는 생각의 대립 때문이었던 것 같다.곧 있으면 추계 답사에 축제에 추석연휴, 그리곤 중간고사 시간이 왠지 빡빡할 듯싶어서 평소에 친하게 지내고 같이 수업을 듣는 후배들과 같이 서둘러 국립중앙 박물관 방문길에 올랐다.수업이 없는 토요일, 조금 서둘러서 조용한 분위기에서 감상하고자 9시에 학교서 만나기로 했으나 언제나 지각생이 있기 마련 한 후배의 지각으로 10시쯤에 출발하게 되었다. 12시쯤 도착한 우리는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듯이 우선 식당으로 가서 배를 채우곤 본격적인 박물관 관람을 시작했다.처음 입장권을 사고 입구를 봤을 때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으나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복도 저 끝에 있는 거대한 탑과 밝은 조명 깔끔한 실내 인테리어에 작게 탄성이 나왔다.처음으로 들어간 곳은 고고학 관으로 투명한 유리판에 고고학 관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방문의 시작기념으로 한 장 찍었다.처음 본 것은 빗살무늬 토기로 여기저기 갈라진 흔적이 있으나 거의 완벽하게 복원이 되어있었다. 예전 같으면 빗살무늬 토기구나 하고 지나칠 만도 하건만 얼마 전 수업시간에 들은 것들이 몇 가지 생각나서 살펴보았다. 과거 빗살무늬 토기등은 물레를 돌려 성형하는 현재의 도자기 만드는 방법과 달리 둥글게 말은 진흙을 층층이 감아서 만들기 때문에 그 두께가 일정하지 않고 울퉁불퉁하다고 들었었는데 들은 그대로 일정하지가 않고 울퉁불퉁했다. 빗살무늬 토기 옆에는 요령식 동검이 있었는데 거의 발굴되지 않는 다는 청동으로 만든 손잡이가 있었다. 검을 자세히 보니 한눈에 봐도 조립식 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상태가 너무 좋은 걸로 봐서 발굴한 것이 아니라 전시용으로 만든 것 같았다.그 옆으로는 구?신석기 시대 도구로써 석기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 나와 있었다. 뗀석기의 경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청동기 시기라 하여 청동기만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간석기가 널리 사용되었고 청동기는 무기나 의기로 많이 사용되었다. 무기와 같이 널리 쓰이는 것들은 전부 간석기로 만들어져있었다. 전부터 가지고 있던 의문중 하나가 돌로 사람을 때려 살인을 한다면 이해하겠으나 돌을 칼의 형태로 만들어 찌르는 방식이 가능할까 의문을 가졌었는데 직접 돌칼을 보니 의문이 풀렸다. 그만큼 돌칼은 충분히 살상이 가능할 정도로 얇고 뾰족하게 잘 가공되어져 있었다.그리고 전에 수업 때 화면으로만 보았던 여러 의기들과 검파형 동기, 견갑형 동기 등을 직접 보니 신기하였다. 견갑형 동기는 고개를 숙여 아래쪽을 보았는데 정말로 몸에 장착할 때 끈을 넣어 사용했을 법한 고리가 4개 달려있었다.청동기시대 민무늬토기의 경우 형태는 전보다 다채로워 졌으나 겉 장식은 거의 없어진 듯 볼 수가 없었다. 고대엔 새가 봄철 씨를 주거나 죽은 이의 영혼을 인도하는 조령신앙이 발달했다고 한다. 그다음에 본 것은 박물관에서 본 것 중 가장 감명 깊었던 것 중 하나인 사신도였다. 전시실 한 칸에 사방에 사신도가 각기 그려져 있었는데 참 감명 깊었다. 입구 오른쪽에는 청룡이 그려져 있었는데 청룡을 보다가 문득 이상해서 좌우로 이동하면서 봤는데 청룡의 눈이 마치 나를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만약 이 그림을 무덤 안에서 어두운 가운데 봤다면 아마 상당히 놀랐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아래의 갈색이 땅을 위의 푸른색이 하늘을 그 가운데 청룡이 있어 마치 구름 속을 유유히 날아다니고 있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입구 정면으로 주작과 현무가 있었는데 주작은 그림 아래에 산 그림이 주작이 날고 있는 느낌을 주려 한 것 같지만 청룡과 달리 왠지 경직된 느낌이었다. 그리고 뭐랄까 오만함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한 느낌도 받았다. 다른 사신도와 달리 암수가 한 쌍을 이루고 있는데 내가 봤을 땐 어느 쪽이 암컷이고 수컷인지 도저히 분간이 되질 않았다. 그 옆으로 현무가 있었는데 수컷인 그린 그림.사방의 별자리를 상징적인 동물상으로 나타낸 것으로 동쪽에는 청룡을, 서쪽에는 백호를, 남쪽에는 봉황과 비슷하게 생긴 주작을, 북쪽에는 뱀이 거북을 감고 있는 현무를 그렸다. 중국에서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에 천문오행사상(天文五行思想)을 배경으로 대두되었으며, 한대(漢代)와 남북조시대를 통해 풍수지리설과 신선사상 등의 조류와 결부되어 유행했다. 주로 무덤과 석관·석비(石碑)·화상석(畵像石)·와전(瓦塼)·동경(銅鏡) 등에 사방의 수호와 벽사(邪)를 목적으로 장식했다. 우리나라에는 한대의 한사군(漢四郡) 문화를 통해 전래되었으며, 고구려에서 무덤의 수호신으로 적극 수용되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사신도는 도상과 화법의 변화에 따라 크게 3기로 나뉘어 발전했다. 약수리(藥水里)고분과 삼실총(三室塚) 등의 초기(4세기~5세기 전반) 사신도들은 묘주초상의 상단이나 하단에 부속물로 작게 표현되었는데, 몸체의 부피감이 없고 비례가 맞지 않는 등 초보적인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채색은 먹선의 윤곽에 선명도가 떨어지는 갈색이 주조를 이루었다. 무용총과 고산리(高山里) 1호분 등의 중기(5세기 중엽~6세기 중엽) 사신도들은 초기와 같이 종속적인 부속물로 작게 다루어졌으나, 동물 몸체의 비례와 구도에서 보다 사실적인 모습과 함께 생기있고 율동적인 도상으로 표현되었다. 묘사법에서도 필선에 굵고 가늘기의 차이가 있고, 세부묘사에 관심을 두는 등 보다 진전된 화법을 보여준다. 후기(6세기 후반~7세기 전반)에 이르러 고구려 사신도는 도교적 색채의 대두와 더불어 강서대묘(江西大墓), 강서중묘, 통구사신총(通溝四神塚), 진파리(眞坡里) 1호분, 통구 4호분, 통구 5호분 등에서 가장 발전된 형태를 보인다. 이러한 고분에 보이는 사신도는 종래의 부속물적 위치에서 현실(玄室) 네 벽의 중심화제로 부각되었으며 사실적이고 역동적인 형태와 세련된 묘사, 다양하고 화려한 색감 등은 우리나라 고대회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발전된 고구려 후기의 사신도 양식은 공주의 송는 대형 향로로, 크게 보아 몸체와 뚜껑으로 구분이 된다. 그러나 별도로 부착한 봉황장식과 받침대를 포함해서는 네 부분으로 구성됨을 알 수 있다.3단의 외반<外反>된 연꽃잎들로 장식된 몸체는 마치 활짝 피어난 한 송이의 연꽃을 연상케 하며 받침대는 이 연꽃송이의 밑 부분을 입으로 문 채 하늘로 치솟듯 고개를 쳐들어 떠받고 있는 한 마리의 용으로 되어 있다. 몸체의 각 연잎 표면에는 가릉빈가(불사조<不死鳥>)와 물고기, 기타 여러 종류의 동물들이 하나씩 양각되어 있고, 뚜껑에 배치된 23개의 산들은 4∼5단으로 첩첩산중을 이루어 심산유곡<深山幽谷>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피리와 소, 비파, 현금, 북을 연주하고 있는 진악인물상<秦樂人物像>을 비롯하여 택견무인상과 기마무인상<騎馬武人像>, 기마수렵상(騎馬狩獵像), 코끼리를 탄 인물, 책을 보는 인물, 그리고 산양<山羊>과 호랑이, 새, 원숭이, 멧돼지 등 현세의 동물과 신수<神獸>, 서조<瑞鳥>, 폭포, 나무, 불꽃무늬 등 약 100여 가지의 문양들이 변화무쌍하게 표현되어 있는 뚜껑꼭대기에 별도로 부착된 봉황은 목과 부리로 여의주를 품고서 날개를 활짝 편 채 힘 있게 서 있는데, 길게 약간 치켜 올라간 꼬리의 부드러움은 백제적인 특징이라 하겠다. 한편 봉황의 앞가슴과 악기를 연주하는 인물상들 앞뒤에는 5개씩의 구멍이 뚫려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몸체에서 피어난 향연<香煙>이 빠져나올 수 있도록 하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경이적인 걸작이라 할 수 있는 이 향로는 중국 한대<漢代>에 유행한 박산로<博山爐>의 영향을 받은 듯 하지만 중국과는 달리 산들이 독립적·입체적이며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전체적으로 보아 창의성과 조형성이 뛰어나고 세부표현에 생동감이 넘쳐흐르는 이 향로는 제조기법 또한 뛰어나며,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종교와 사상적인 복합성까지 보이고 있어 백제시대의 공예와 미술문화, 종교와 사상, 제조기술까지도 파악케 해 주는 귀중한 작품이라 하겠다.백제금동대향로에 대해 알아보던 중에 알게 된 사이트로 있는 드리개라는 것은 고대 북방 유목민족들이 생활에 필요한 도구를 허리에 찼던 풍습에서 그 유례가 있다고 한다.통일신라관에서는 십이지신과 사천왕상과 같은 친숙한 것들이었다. 시대가 흐르면서 현재에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친숙하고 많이 보아왔던 것들을 볼 수 있었다.발해 관에서는 처음으로 책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책전에 쓰였던 목간과 짐승의 얼굴을 형상화한 기와가 인상적이었다. 부리부리한 눈과 크게 벌린 입, 그리고 커다란 송곳니가 상당히 험상궂게 보였다. 어느 동물을 형상화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기괴해 보였다.발해 관을 끝으로 고대 관을 나왔는데 나오자마자 커다란 탑이 앞에 있었다. 처음 박물관 입구에서 봤던 탑으로 경천사 십층석탑이라고 한다. 박물관 안에 있기에 복제품인줄 알았으나 실제 유물로 이렇게 커다란 탑을 어떻게 옮겨 왔는지가 신기했다. 각층마다 새겨진 여러 문양들이 인상적이었는데 탑이 너무 커 상층 문양을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큰 규모에 한번 놀라고 가까이서 봤을 때 새겨진 문양의 섬세함에 한 번 더 놀랐다. 하나 아쉬운 것은 상태가 너무 좋아서 보존상태가 아주 좋구나! 라고 생각했었으나 알고 보니 많이 훼손된 것을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다음으로 2층에 있는 미술실(예술실)로 이동했다. 이곳에는 염라대왕이 있었는데 평소에 내가 생각한 염라대왕은 죽음을 관장하는 신인만큼 근엄하고 위엄이 넘치며 굉장히 무섭게 생겼을 것 같았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은 나의 생각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 듯 처음 것은 그냥 보통 평범한 옛날 왕같은 느낌이었고 두 번째 염라대왕은 익살스런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여기서 생각한 것이 어떠한 상상의 산물에 대한 생각은 어렸을 때나 그 지역이나 사회의 문화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 같다는 것이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염라대왕에 대한 이미지를 확립하는데 있어 영상 매체 등을 통해 그 이미지를 구축했는데 옛날사람들은 그러한 것 없이 자신 또는 주변사람들의 생각으로 그러한 이미지를 확립했기에 염라대왕역시 그 시대에 있었던 왕과
언론에서 말하는 한국 정치의 진보와 보수의판단 근거를 분석·비교1. 진보와 보수의 개념현재의 언론에서는 흔히 정치가나 정당의 강령, 또는 정부의 어떤 조치들을 농하면서 과격주의자, 보수주의자,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파쇼주의자, 극단주의자 등의 표지를 쓰기를 좋아한다. 특정의 사람, 사상, 운동, 단체 등의 특색을 극히 간략하게 표시하는 방법을 사용하는데 이는 현대 정치처럼 다수의 대중이 직접 간접으로 정치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의 정치적 태도와 행동의 특색을 논하기 위해서 이러한 정치적 라벨을 써서 서로의 차이를 구별하려는 경향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그렇다면 현재의 언론에서 말하는 한국 정치에서의 진보와 보수의 판단 근거를 분석·비교하기에 앞서 진보와 보수에 대한 개념을 살펴보겠다.진보와 보수에 대한 사전적 의미, 철학적 의미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진보와 보수의 일반적 개념을 설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간단히 말해서 진보는 새로운 것을 꾀하는 것이다. 반대로 보수는 새로운 것보다는 기존의 것을 고수하려는 경향을 나타낸다. 그러나 여기서 새로운 것, 기존의 것에 대한 명확한 개념 정립이 필요할 것 같다. 진보라고 해서 사회적으로, 혹은 학문 이론적으로 모든 ‘새로움’을 긍정, 지지하는 것도 아니요, 보수라고 해서 모든 ‘기존의 것’을 고수하려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것, 기존의 것은 체제와 제도, 혹은 질서와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즉 기존의 사회 질서, 체제와 제도를 부정하고 새로운 질서와 제도 혹은 그와 연관된 내용에서의 새로움을 추구하려는 경향을 진보라 할 수 있으며 기존의 사회 질서, 체제와 제도 혹은 그와 연관된 것을 고수하려는 경향을 보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진보는 개혁이나 변혁, 혁명과 상통한다고도 할 수 있으며, 보수는 현상유지, 과거회귀 등과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2. 한국 정치에서의 진보와 보수한반도는 서로 다른 이념 위에 기초한 두 개의 정체가 장기간 정치 군 정치는 좌와 우, 보수와 진보라는 양분법의 사고와 주장이 상당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현대 정치에 있어서 정치세력 사이의 대립이 이와 같이 양극적이고 상호 배타적인 성격을 지닌 국가란 흔한 경우보다 예외의 경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진보라고해서 사회주의 보수라고 해서 자본주의라는 공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그런 식으로 나눠 쓰고 있는 실정이다.하지만 진보와 보수는 그 시대의 사회적 움직임에 대한 태도로 구분한다. 현재사회의 움직임에 만족하고 지금의 상태를 유지시키길 원하는 것이 보수 현재사회의 움직임에 만족하지 못하여 변화를 원하는 것이 진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그런데 이런 원론적인 기준으로 바라보면 보수, 진보를 가르는 것은 굉장히 복잡하다. 현 우리나라의 정당을 예를 들어 열린 우리당은 진보정당이라고들 한다. 그 기준은 정당정책수준에서의 잣대를 가지고 판단하는 것인데, 열린 우리당 안에서 국회의원들끼리 진보와 보수를 또 나눌 수 있다. 그리고 나눈 사람들을 또 나눌 수도 있다. 이렇듯 진보와 보수라는 개념은 판단하는 대상과 사회상황, 등에 따라 한없이 다양할 수 있다.정치문화에서는 사회의 기득권세력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입장이므로 일반적으로 보수, 노동자나 기득권세력이 아닌 자들이 기득권을 획득하려는 입장 또는, 자신들의 이익을 조금 더 향상시켜보려고 현재사회를 변화시키려 하므로 일반적으로 진보로 구분한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오래 지속되다보니 자연스럽게 기업 옹호론자들은 보수, 노동자 옹호론자들은 진보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사실상 원론 상으로 기업옹호를 했다고 보수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구분의 편의를 위해서 편의상 진보진영 보수진영으로 나눠버린 것이다. 그래서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지난 수 십 년간 정권을 유지해오던 기득권 세력이며 기업우선의 정책을 펴는 한나라당을 보수정당이라 지칭하며 , 지난 수 십 년간 기득권 세력에 편입되지 못했으며 최근 정권을 잡아본 노동자우선 정책의 열린 우리당을 진보정당이의노선이 주장하는 정책이므로 이를 추진했으니 이 부분에서는 진보적인 인물이라 평해오던 노무현 대통령이 보수적인 정책을 실행했다고 하는 것이다.3. 언론에서 말하는 진보와 보수(좌·우 파)의 예우리시대의 가장 주요한 화두는 `양극화‘다. 부유층 대 빈곤층 , 강남 대 비(非)강남 , 진보 대 보수로 이어지는 두 계층의 대립은 극단으로 치닫고 있으며, ‘사회통합’이라는 과제를 우리 사회에 던져주고 있다. 특히 보수와 진보라는 두 이념의 대림은 정치를 비롯하여 언론계, 시민사회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사회를 양분하는 잣대로 작용한다.언론에서도 메이저급 신문인 조선, 중앙, 동아는 보수지에 대한 부정적인 어감이 담긴 ‘조중동’으로 일반명사화 되었으며, 이에 대응하는 ‘한경대’는 한겨레 ,경향, 대한매일‘의 이른바 ’진보지‘를 지칭하는 말로 언론계의 양대축을 형성해왔다. 이런 이분법적 논리를 대변하듯 이 두 축은 대북정책, 언론-국가관계(박흥원·박정우,2001), 재벌관련보도(김춘식, 2005)등의 각 사안에서 논조에 확연한 차이를 보여왔다.지난 9월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동국대 ‘강정구 교수사건’은 ’북한문제‘라는 범주에 있었기에 이에 대한 보수와 진보사이의 대립도 맹렬했다. 따라서 이 사건을 보도하는 신문들도 각기 다른 목소리를 냈다.강정구 파문은 동국대 교수인 강정구씨가 6.25는 북한 체제에 의한 통일 전쟁이었다, 이를 방해한 미국과 맥아더는 우리의 역적이다. 라고 말하면서 시작되었다.이에 검찰 측에서 사상범으로 체포 구속하여 수사를 하려 했으나, 현 천정배 법무부 장관이 유례없이 수사지휘권이라는 법적 권리를 행사하여 불구속 수사를 명령했습니다.이에 검찰총장이 거부권을 행사하고 그 책임으로서 사퇴를 하면서 강정구 파문은 매우 커지게 되었다, 이를 보도하는 기사내용이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은 큰 차이를 보인다.그 보도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자.‘강정구 발언은 학문이 아니라 親北 선동이다’서울중앙지법은 26일 “6·25전쟁은 북한 지도부가 시도한 統一통일 전쟁”이라는 글6월 인천의 한 강연에서 “미국이 介入개입하지 않았더라면 (6·25)전쟁은 한 달 이내에 끝났을 것이고 사상자는 남·북한 합쳐 1만명 미만이었을 것이다. 미국의 개입으로 399만명이 더 죽게 되었다. 미국은 전쟁 위기를 몰고 온 主犯주범이며 맥아더는 그 尖兵첨병 역할을 집행한 집달리다”라고 발언했다. 강 교수는 2001년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통일 위업 이룩하자’는 만경대 방명록으로 기소돼 그 재판이 끝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親北친북 강연을 하고 다니다 추가기소됐다.이 정권 사람들은 강 교수의 이런 발언이 ‘학문과 表現표현의 자유’에 속한다고 강 교수를 辯護변호해왔다. 그러나 법원은 “미국을 ‘원수’ ‘전쟁광’으로 표현하고 2002년 서해교전 때 북한의 NLL 침범을 ‘정당한 越船월선’으로 본 강 교수 발언은 학자 입장에서 냉철하고 합리적인 학문 논의를 이끌기 위해 話頭화두를 던진 게 아니라 煽動的선동적인 방법으로 친북적인 주장을 한 것이라고 판단된다”고 말했다. 법원은 이런 강 교수에게 유죄를 선고하면서도 그 刑형의 집행을 유예한 데 대해 “강 교수 주장을 건전한 思想사상의 경쟁시장에서 논의하고 검증한다면 그 害惡해악을 시정할 가능성이 높고 (강 교수 주장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우리 사회가 건강함과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점 등을 감안했다”고 밝혔다.지금 우리 대학사회의 문제는 강 교수처럼 학문을 假裝가장해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과 역사적 정통성을 정면으로 훼손하는 反美반미·親北친북 興行業者흥행업자들을 걸러낼 학문적 濾過여과 능력을 충분히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이번 판결이 기대한 것처럼 우리 대학사회가 강 교수 같은 사람들의 非비학문적 선동주의를 걸러낼 만한 自淨자정 능력을 키워야만 似而非사이비 학자들이 대학 안에서는 학생을 誤導오도하고 대학 밖에선 市民團體시민단체를 휘젓고 다니는 빗나간 풍토를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다.입력 : 2006.05.26 22:58 54'-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유를 지키기보다 학문적 연구를 위축시키고, 사상 표현을 제약하게 돼 실망스럽다.특히 재판부가 “사상은 자유로운 사상의 시장에서 검증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하면서도, 유엔인권위가 폐지를 권고한 국가보안법 중 인권유린의 소지가 가장 많은 7조(찬양 고무)를 적용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보안법 폐지에 극렬 반대하는 보수 야당도 이 조항만큼은 삭제에 동의한 바 있다. 그만큼 문제가 많은 조항이다. 이 조항을 적용하면 대한민국의 어느 누구도 보안법 위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재판부는 유죄 이유로 강 교수가 “국가 존립과 안전을 해칠 수 있는 선동적 표현”을 썼다거나 “국가 질서에 해악을 가할 수 있는 주장”을 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강 교수 개인의 글 한편 때문에 국가의 안전이 실질적으로 위태로워졌다고 생각할 사람이나, 그로써 장차 민족의 존립과 안전이 위협당하리라고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오히려 이렇게 생각하는 재판부가 지나치게 예외적이고 주관적인 판단을 한 것은 아닐까. 주관적이고 예외적인 판단을 유죄 근거로 삼는 건 사리에 맞지 않는다. 강 교수가 한국을 신식민지라고 규정했다거나, 미국의 참전을 불법침략이라고 주장한 것도 문제 삼았다. 그러나 이런 부분은 법이 아니라 학문적으로 옳고 그름이 가려져야 옳다.재판부는 강 교수가 ‘만경대 방명록 필화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상태에서 “더욱 자극적인 방법으로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는 내용을 반복한 것”에 자극을 받아, 사문화한 조항까지 적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재판부는 많은 학자들이 강 교수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왜 그의 사법처리엔 반대했는지, 그 이유를 잘 헤아려야 한다. 미국의 찰스 암스트롱 컬럼비아 대학교수 등 국외 중견학자 33명은 지난해 강 교수가 기소되자 이런 내용의 성명을 낸 바 있다. “논란이 예상되는 연구 결과를 표현할 자유가 없다면, 논란이 되는 견해를 밝힐 자유가 없다면, 대학의 학문 연구는 질식하고 만다. 학문의 자유는 어떤 경우에도 지켜져야 한다.”< 온라인미디어의 새로운 시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