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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존 웨슬리의 생애
    과목: 교수:?과: 이름: 학번: 1진정한 그리스도인 존 웨슬리의 생애웨슬리의 아버지인 새뮤얼과 수잔나는 비국교도 가정에서 자랐다. 새뮤얼과 마찬가지로 수잔나도 역시 스스로에게 "개인적인 헌신을 위해 사용한 시간만큼만 휴식을"허락할 만큼 경건하고 규칙적이었다. 웨슬리 가족은 18세기 평균으로 보아도 대가족이었는데, 19명의 아이들이 있었고 존은 15번째였다. 하지만 당시의 열악한 의료 환경으로 인해 9명이 유아기에 죽었다. 새뮤얼은 이와 같은 처지에 있었고, 적은 수입은 가정을 부양하기에 종종 힘겨운 것이었다. 자주 빚을 지게 되었고 실제로 채무자 감옥에 감금되기도 했다. 하지만 수잔나는 남편이 출타할 때 가정에서 자신의 가장 지도력을 훈련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많이 갖게 되었다. 규칙주의자로서 수잔나는 규칙과 원칙에 따라 아이들을 돌봤다. 존 웨슬리는 자신의 어머니의 교육 훈련이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하면서 후에 그녀가 가정에서 시행했던 중요한 규칙들을 모아달라고 부탁하였다.1709년 2월 9일 목사관이 모두 불타버린 사건이 있었을 때 존 웨슬리는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화재를 통해 존 웨슬리는 하나님의 보살피는 섭리뿐만 아니라 주님이 아마도 특별한 계획, 그의 인생을 통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았다. 웨슬리는 학창시절 내내 종교 일반의 일들과 특별히 초자연적인 일들에 대한 예리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1720년 7월에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처치에 입학하게 되었다. 활달하고 적극적이며, 예리한 재치를 가진 웨슬리는 경이함과 여유로움으로 친구 몇을 사귀었다. 생동하는 젊음을 확실히 즐기는 한 청년이었고, 신중함과 시간에 신경 쓰는 성숙한 웨슬리의 특징은 후에 나타난다.1725년 웨슬리의 성결에 대한 이해는 15세기 공동생활 형제단이었던 토마스 아 켐피스의 신앙 고전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음으로 더욱 증폭되었다. 이 고전은 웨슬리의 삶과 사고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여기서 웨슬리는 처음으로 내적 종교의 본질과 넓이, 즉 의도의 되었다. 이 모든 것과 그 이상을 목사 안수를 준비하는 동안 배웠다.1725년 7월 29일, 그의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믿음에 대해 명백히 제한적이고 제대로 발전되지 않은 견해를 보인다. 그것은 "믿음이란 이성적인 근거에 대한 동의"라고 말한 부분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기독교의 동의는 모든 가치를 중심으로 하나님에 향하는 신뢰와 연합되고 있어야 한다. 믿음이란 예를 들어, 히브리서에 기록된 것처럼 영적인 감각 즉 하나님의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장치가 포함되어야 하는데, 웨슬리가 이 세 가지 믿음의 본질적인 요소들(동의, 신뢰, 영적인 감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725년 이후 수년의 시간이 필요했다.1729년(아니면 1730년) 웨슬리는 윌리엄 로의 『기독자의 완전』을 읽었다. 켐피스와 테일러의 저작들이 웨슬리에게 의도의 순수성과 하나님의 대한 전적인 헌신의 중요성을 보인 반면, 윌리엄 로는 웨슬리에게 하나님의 법의 높이, 넓이, 그리고 깊이를 소개했다. 그 해 5월 찰스의 소개로 경건활동 모임을 참석하게 되었는데 이 후에 옥스퍼드 메소디즘이라 불리는 그 맹아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메소디스트라는 이 작은 모임은 기도, 성경읽기, 중요한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성찬 참여 등 경건의 일에 중점을 두었으며 금식을 강조했다. 1732년 초기 옥스퍼드 메소디스트의 하나였던 윌리엄 모간의 죽음과 함께 문제는 전면에 부각되는데 웨슬리가 이 사건을 변호하며 리처드 모간 1세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 속에 아주 잘 발전된 종교에 대한 이해를 정리했다. 여기서 웨슬리는 경건의 일과 자비의 일들을 폭넓게 하는 규칙과 훈련들 속에서 메스디스트들의 마음과 삶의 거룩한 사랑을 의미하는 성결에 항상 관심을 갖고 있음을 드러내었다.1735년 10월 14일 존 웨슬리는 막 목사안수를 받은 동생 찰스와 조지아로 떠나기 위에 시몬즈 호에 승선했다. 이 배에서 폭풍의 위험 앞에서의 모라비안들은 용기와 침착성은 웨슬리에게 큰 인상을 남겼고, 웨슬리는 자연의 힘과 영혼의 상태, 그리고 세상적인 스러운 현실로 끝을 맺었다.1738년 2월 7일 웨슬리는 모라비안 선교사인 피터 뵐러를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후에 웨슬리는 이 만남의 중요성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날이라는 표현으로 기록했다. 뵐러나 웨슬리는 구원받은 정확한 시간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인간은 유한하므로, 그 순간을 알든 그렇지 않든 은혜를 깨닫는 것은 큰 시간의 틀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것은 뵐러와 웨슬리가 공유하는 신학적 유산일 것이다. 1738년 5월 24일 올더스게이트 거리 모임을 통해 구속의 열매를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에 대한 살아있는 믿음은 두 가지 필수불가결한 열매 즉, 죄를 극복하는 능력과 죄사함을 통한 영원한 평화와 닿아있다고 깨달았다. 모라비안과의 친분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그러나 모든 것이 다 좋았던 것은 아니다. 올더스게이트 체험 이후에 웨슬리가 갖게 된 신학적, 영적 불쾌감은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 때문이었다. 그 한 가지는 모라비안들이 웨슬리로 하여금 칭의와 그와 함께 오는 신생이 죄의 권세뿐만 아니라, 죄의 존재 자체를 없앤다고 믿도록 만들었다. 웨슬리가 칭의를 받은 사람은 죄책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이고, 중생한 이는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이며, 성화된 사람은 죄 자체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이라고 타당한 구분을 짓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조지 휫필드의 영향으로 1739년 4월 2일 오후 4시 그의 표현에 따르면 보다 더 비천해지기로 마음먹고, 도로상에서, 그 마을의 붙은 공터의 약간 튀어나온 부분이 서서 구원의 복음을 약 3000명의 사람들에게 선포했다. 이 옥외 설교의 시작으로 그의 교구는 정말로 경계가 없어졌다. 복음을 가능한 넓게 전파한다는 목적에서, 웨슬리는 때때로 교회 예전과 의식을 옆으로 밀쳐놓고, 거룩한 담 밖에서 설교를 했을 뿐 아니라 성공회 교회의 교구를 무시하면서 많은 성직자들의 우려와 근심을 만들었다. 하지만 일반소명과 특별 소명을 구분하면서 웨슬리는 그의 새로운 방법, 혁신적인되지 않는 긴장의 요소가 있었다.1739년 처음으로 메소디스트들의 연합회를 구성해서 모았고 1742년 초 메소디스트 속회라고 알려진 형태가 시작되었다. 속회는 메소디스트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신도회의 규칙을 따라 살고 있는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의 하나가 되었다. 또한 신도회와 속회를 통해 가난한 이들의 물질적, 영적 필요를 제공했다. 웨슬리는 1739년 칼빈주의자들을 당황하게 한 "값없이 주시는 은혜"라는 설교를 출판하는 당돌함이 있었고, 1740년 페터레인 소사이어티 앞에서 글을 읽고 탈퇴하여 모라비안들에게 당황함을 준 결단력도 있었으며, 1744년 세인트 메리에서 성공회 교회의 비난을 무릎쓰며 "성서적 기독교"를 설교하는 명백히 순수함과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 새뮤얼이나 어머니 수자난처럼, 존 웨슬리도 매우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 즉 타당한 믿음, "성서적 기독교"를 위해서는 고통이나 비판이나 비난이나 공개적인 배척을 넉넉히 감당할 정도로 매우 원칙적인 사람이었다.복음 전도자에 대한 시련과 좌절을 직면해서 웨슬리는 몇몇 복음주의적 성공회 교직자들과 우정을 통해 위로를 얻었는데, 그들과의 우정은 매우 중요했고 그들은 웨슬리에게 조언, 도움, 충고 등을 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웨슬리는 가까운 친구일수록 그들의 영적인 상태에 관한 중요한 문제를 토론하기 원했는데, 대개 매우 솔직하고 직선적인 방법을 택했다. 민감하고, 친절하고, 인간 가슴속에 기질과 성품을 깊이 아는 사람으로서 웨슬리는 자연히 여인들과도 중요한 관계를 가졌다. 웨슬리에게 있어 모든 인간의 사랑은 그 최고의 목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향해야 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목회의 과업을, 소피아 합키와의 결혼 가능성에 대한 열망과 대립시켰던 것이다. 1750년대 웨슬리는 교육적인 목회의 정의에 반대하는 기능적인 목회의 정의를 성공회 교역자들과의 모임들과 여러 연결망을 따라 계속 발전시켰다. 하지만 1758년 국교회로부터 분리하는 것에 반대하는 12가지 이유를 출판하며 존 생의 성결하게 하는 은혜로부터 나온다. 사실 웨슬리에게 있어 칭의와 중생이 이론적으로 구분된다고 하더라도(전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for us하시는 일이고, 후자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in us에서 하시는 일) 신자에게 있어서 이 일이 동시에 일어난다. 이 기간 동안 웨슬리는 칭위가 계속적인 죄와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죄와 연관되어 있다고 명확히 가르친다. 그러므로 견실히 찾는 모든 이들은, 그가 칭의를 받았든, 받지 않았든, 언젠가 구원의 길로 가기 위해 계속 나아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증진시켜야 한다. 이 고귀한 목적을 위하여 웨슬리는 그의 노력을 다했던 것이고, 이 높은 목표를 향해 봉사했던 것이다.영국 전역을 여행한 웨슬리는 산업혁명의 불행한 결과들을 알고 있었고,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웨슬리는 몇 가지 조취를 취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메소디스트 소사이어티를 극빈자를 돕는 기구로 효과적으로 활용하였다. 그는 목회를 통해 가난과 부에 관한 문제들을 계속 반영했지만 1770년대가 되어서야 그는 가난의 근본적인 구조적인 원인을 심각하게 제기하기 시작했다. 웨슬리는 가장 큰 경제적 악은 "주류, 세금, 그리고 사치"등 끊임없이 그가 염려했던 세 가지라 생각했다.영국 복음주의 부흥운동에 대한 웨슬리의 기여는 성공회를 경쟁적인 존재로 보는 것임을 강조하며 웨슬리와 연회는 적어도 교리의 측면에서 메소디스트가 국교회로부터 벗어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차이가 있다면 옥외 설교, 즉흥기도, 평신자 설교자들의 임명, 신도회의 설립, 그리고 연회의 소집과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요소들을 유지했는데 이것은 단순한 필요성, 영혼 구원의 명령 때문에 시작한 것이다. 메소디즘이 국교회를 떠날 마음이 없다고 웨슬리가 여러 번 확인했을 지라도, 그는 그 가능성을 준비할 만큼 실제적이었다. 말년의 웨실리는 미국과 영국에서 건설 중인 메소디즘의 토대에 관심 있었을 뿐만 아니라, 메소디스트 했다.
    독후감/창작| 2010.06.12| 5페이지| 1,500원| 조회(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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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사랑은 배워야 할 감정입니다.
    윌터 트로비쉬사랑은 배워야 할 감정입니다한국기독교학생회 출판부(IVP)1. 저자의 의도우리 시대는 성에 관한 책, 편람, 잡지, 광고 등 각종 문헌의 홍수 속에 파묻혀 있다. 이런 조류에 압도당할수록 우리는 과식한 느낌이나 피로감, 심지어는 혐오감마저 갖게 된다. 그러니 진실한 감정을 경험하고 이를 표현하려는 갈망은 여전히 커지고 있다. 천박한 성적 모험으로 인해 실망한 많은 사람들은 성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필요로 하고 있는 듯 하다. 즉 육체적 차원은 단지 사랑의 표현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며, 사랑에 대한 깊고도 내적인 이해를 기반으로 영속적인 관계를 세워 나가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점에서 독자를 돕고자 한다.2. 내용 요약사랑이란 배워야 하는 감정이다. 그것은 긴장이요, 성취이다. 그것은 깊은 동경이요, 적대감이다. 그것은 즐거움이요, 아픔이다.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한쪽이 없으면 다른 하나도 없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행복은 사랑의 한 부분일 뿐이다. 이것을 명심하고 배워야 한다. 고통 역시 사랑의 한 부분이다. 이것이 사랑의 신비요, 아름다움이며 동시에 사랑의 멍에이다. 사랑은 배워야 하는 감정이다. 그리고 사랑은 특별한 유의 감정, 우리가 모두 배워야 할 어떤 것이다.만일 이 특별한 유형의 감정을 배우지 못하게 되면, 또한 이성 관계에서 로맨스가 없다면 사랑은 섹스와 같은 것이 되고 만다. 이러한 태도가 초래하는 결과는 끔찍하다. 여자는 훌륭한 설비를 갖춘 인큐베이터 자궁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남자의 욕구에 굴복하는 자기 의지가 없는 열등한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성적 억제가 거의 없고 로맨스도 거의 없는, 즉 사랑의 중간 과정이 없는 문화에서는 결국 여자는 하나의 물건에 불과하고 물질이나 객체로 전락되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 모두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랑의 중간 과정 속에 곱게 여울진 아름다움을 깨달을 수 있도록, 예비 단계의 기쁨을 인식할 수 있도록 우리는 배워야 한다. 이 중간 과정의 편안함이란, 그리움 속에 묻혀 있 이라는 말을 공허한 단어로 만들어 버리려는 데 그 깊은 뿌리를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슬픔을 감내한 후에 보람을 안게 될 것이다. 고통은 그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제거해야 할 불순물이 아니다. 만일 견디어 내고 받아들인다면 고통은 풍요와 심오함과 성장과 성취가 솟아나는 샘, 곧 행복의 샘이 될 수 있다. 만일 온전한 희생이 무엇인지 배운다면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고통을 감내한 보상을 얻게 될 것이다. 상대방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 곧 포기하는 기술이야말로 무엇보다 배워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기술이다. 고통은 미성숙한 사랑을 성숙한 사랑으로 인도해 준다. 유치하고 전혀 배우지 못한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이다. 그것은 어린 아이의 사랑, 곧 끊임없이 주장하고 바라기만 하며, 그것도 당장 해 달라고 요구하는 사랑과 같다. 그런 사랑은 긴장을 견디지 못할 뿐 아니라,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라도 참지 못한다. 그것은 요구하고 소비하고 지배하려는 사랑에 불과하다. 결혼을 위한 준비로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고통과 아픔을 감내한 끝에 보람을 얻게 되리라는 것을 아는 것보다 나은 것은 없다고 말하고 싶다. 결혼한 남녀의 사랑은 양보하고 포기하는 것을 배운 사랑이기 때문이다. 결혼 생활을 하면서는 더 이상 ‘당신 것’, ‘내 것’ 이라고 구분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 것’ 으로 연합해서 부른다. ‘우리’라 말할 때 거기엔 언제나 희생과 포기가 깊게 자리 잡고 있다.포기와 단념의 기술, 이는 독신자에게도 행복의 비결이 된다. 자기 자아를 포기하는 것은 결혼할 사람들에게 중요한 만큼 독신으로 있는 이에게도 중요하다. 결혼을 했든지 안 했든지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과제는 동일하다. 성취되지 않은 욕망이 쌓여 있더라도 성취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독신자들에게도 사랑은 역시 배워야 할 감정이다. 결혼하지 않는 사람들은 실제로 사랑을 포기해야 할 필요가 없으나 그들도 결혼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포기할 줄 아는 사랑을 배워야만 한다. 결혼하고 싶은 욕구는심지어는 남자들 중에도 ‘노처녀’ 가 있다. ‘노처녀’의 반대는 처녀이다. 처녀성은 부정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엄청나게 긍정적인 것이다. 그것은 여성에게 있는 가장 깊은 본성의 요구에 부합하면 충만한 사랑을 위한 준비가 되는 것이다. 섹스는 처녀를 노처녀로 낙후시켜 버릴지 모른다. 그러나 처녀성은 처녀를 성숙한 여성으로 이끌어 준다. 칼은 에블린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성숙시킨 가장 큰 요소는 그녀의 처녀성이라고 생각했다. 댐이 물의 힘을 전기로 전환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적인 욕구의 억제는 성의 힘을 사랑으로 전환시킨 셈이다. 정숙함, 그것을 통해 그녀는 그이 관심을 육체에서부터 영혼으로 기울게 했으며, 의지와 이성의 영역에 사는 데 익숙해 있던 그에게 그 자신의 영혼을 발견하도록 도왔다. 정숙함이 없는 매력은 그를 유혹하여 자신의 욕망을 가능한 가장 싼 값으로 지불하도록 이끌었을 것이다. 섹스를 거부하는 것은 그것을 허용하는 것보다 그녀의 사랑을 더 강하게 증명했다. 분명, 사랑은 섹스에 의해 상처받을 수 있다. 나아가 섹스는 사랑을 죽이기까지 하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기에 충분하다. 그러므로 사랑은 보호받아야 한다. 성숙한 사랑의 궁극적인 목표는 공개적이고 법적으로 결혼의 관문을 통과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약속이다.이런 점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성경 말씀이 있다. 그것은 창세기 2:25이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더라” 성경은 이 말씀을 ‘안다’는 단어로 설명하고 있다. ‘아담은 그 아내 하와를 알았다.’ 이러한 방식으로 안다는 것은 결혼 이외에는 가능하지 않다. 만일 그것이 결혼 전에 시도된다면, 사랑은 상처투성이가 되어 마침내 소멸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기에 사랑은 배워야 할 뿐 아니라 보호받아야만 하는 것 이다. 그리고 사랑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에 귀 기울이는 것만으로는 사랑을 보호할 수 없다. 만일 사람들 스스로 사랑의 기준을 세우려 든다면, 우리는 사단의 손아귀에 떨어지고다. 계명은 짐이 아니라 우리를 돕는 것이며, 무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하게 하는 것이다. 사랑은 분명 하나님의 뜻에 의해 보호받지 않을 때 손상되고 만다. 섹스는 사랑을 손상시킨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것을 결혼 안에 국한시킴으로 사랑을 보호하신다.자위행위는 완전한 성교가 아니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훨씬 덜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따돌릴 수 있는가 하고 묻고 싶다. 또한 그런 방식은 이상적인 해결책으로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은 헛다리를 짚은 것이고 막다른 골목길에 불과하다. 당신은 이 고통을 당신 영혼 속에 계속 지니고 살아갈 필요는 없다. 새로운 출발의 가능성을 찾으라.만일 당신이 출발의 걸음을 내딛기 원한다면 두 가지 충고를 하겠다. 첫째로, 당신 혼자서는 거의 이겨낼 수 없다. 그러니 경험 많은 영적 카운셀러의 도움을 받으라. 둘째로, 어중간한 상태에서 단념하지 말길 바란다. 이 새 출발을 완전한 것으로 만들라. 빛 가운데 남김없이 드러내 놓아야 한다. 성의 영역에서 실패하고 좌절했던 이유는 다른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타협과 불순종으로 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예수님은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 6:37)고 말씀하신다. 이제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그 분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마지막’까지 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왜냐하면 사랑은 그 분이 우리 각 사람에게 베푸신 은혜에 의해서 배워야 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3.저자에게 질문과 해답하나. 노처녀란 누구를 말하는가?!노처녀란 누구를 말하는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말한다.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자신에게 ‘그렇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다. 우리 주이엔 십대의 ‘노처녀’도 있고 ‘노처녀’도 있고 심지어는 남자들 중에도 ‘노처녀’ 가 있다. ‘노처녀’의 반대는 처녀이다. 처녀성은 부정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엄청나게 긍정적인 것이다. 그것은 여성에게 있는 가장 깊은 본성의 요구에 부합하면 충만한 사런 고민을 교회나 성당을 충실히 다니는 친구들이 더 심각하게 하는데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성적 공상이나 자위행위를 한답니다. 이런 행동은 자연스럽고 건강한 행동이랍니다. 왜냐면 인간은 성적인 느낌이나 충동, 욕구를 갖는 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이런 것 모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이랍니다. 이 글을 쓴 친구가 성적공상과 자위행위에 대해 좀더 편안하게 생각했으면 해요. 성적인 욕구와 공상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이것을 행동으로 옮기는데 있어서는 고려해야 될 점들이 많지요. 그런 욕구들을 자신이 상황에 따라 조절가능한지, 공상만 할뿐 폭력적이거나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것들은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지, 자위행위를 하되 자신의 일상생활에 방해되지 않게 조절가능한지가 더 중요하다고 봐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욕구를 조절할 수 있는 힘 즉 자유의지도 주셨으니까요. 성적공상과 자위행위에 대해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느낀다면 충분히 자신의 행동을 적절하게 조절할 수 있을 거라고 봐요.한 상담의 예이다. 하지만 정말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에 지나쳐야할 문제일까?!자위행위는 완전한 성교가 아니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훨씬 덜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따돌릴 수 있는가 하고 묻고 싶다. 또한 그런 방식은 이상적인 해결책으로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은 헛다리를 짚은 것이고 막다른 골목길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지만 선악과를 따먹지 않길 바라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렇게 말씀하실 것 이다.셋 다시 출발의 걸음을 내딛기 원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좋을까?!첫째로, 당신 혼자서는 거의 이겨낼 수 없다. 그러니 경험 많은 영적 카운셀러의 도움을 받으라. 둘째로, 어중간한 상태에서 단념하지 말길 바란다. 이 새 출발을 완전한 것으로 만들라. 빛 가운데 남김없이 드러내 놓아야 한다. 성의 영역에서 실패하고 좌절했던 이유는 다른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타협과 불순종으로 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독후감/창작| 2006.02.14| 5페이지| 1,500원| 조회(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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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 사형제도 폐지론
    사형제도 폐지론사형제도 폐지에 관한 신학적 근거첫째, 이 세상의 어떠한 제도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대행자로 간주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국가나 사법제도가 인간의 생명권 위에 군림하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주신 생명권의 찬탈자가 되는 것이다.둘째, 기독교 신앙의 전통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과 화해의 복음 위에 기초한다.모든 인간은 그들이 어떠한 죄를 범했는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의 대상이다. 인간의 죄가 주홍빛 같을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그 죄를 눈과 같이 희게 하겠다는 성경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의 능력은 인간 편의 공로와 죄의 질과 양과는 상관없이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다양한 제도를 운용하고 있으나 한 생명에게서 하나님의 은총의 길을 가로막는 권위는 신학적으로 결코 용인될 수 없다.셋째, 사형제도는 우상화된 권력의 잔재이다.범죄자를 향한 위협으로서의 사형제도는 범죄자만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향한 제도?심리적인 위협으로 기능한다. 전근대적이거나 후진적인 사회일수록 사형제도는 권력과 사회 기득권층의 이익을 지키는 기능을 한다. 사형제도는 범죄자를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형벌을 동원하여 생명을 빼앗고 죽음에로 추방하는 사회적 제의이다. 권력을 가진 자, 많은 것을 소유한 이는 이러한 죽음의 제의를 통해 자신의 삶이 보호받을 수 있다는 심리적 안위를 얻는다. 다른 이를 위협하고 제거함으로 사회적 안녕과 평화를 얻는다면 그것은 인간을 향한 집단적인 폭력이며 그 절차가 아무리 정당하다 해도 궁극적 목적은 한 편을 죽임으로써 다른 가치를 얻을 수 있다는 무서운 비인간적인 논리를 담고 있는 것이다.사형제도 존치론사형제도 존치에 관한 신학적 근거하나님께서는 살인자를 반드시 사형에 처할 것을 명하셨다. 그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갖는 존엄성 때문이다.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라’(창 9:6). 그리고 인간의 이 존엄성을 인식시키기 위해 이성이 없는 짐승이 사람을 죽였을 때에라도 그 짐승 죽이도록 하셨다‘’(창 9:5) ‘’(출 21:8).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인간 생명의 높은 가치는 성경이 모든 고대의 법전들과는 달리 절도나 강도 같은 타인의 재산에 대한 어떠한 범죄에 대해서도 사형을 규정하고 있지 않는 데에서도 잘 나타난다. 하나님의 형상인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사람은 생명의 신성함과 가치 때문에 다른 아무것으로도 보상할 수 없고 자신의 생명으로밖에 그 대가를 치를 수 없다는 것이 살인자에 대한 사형 명령의 이유이다.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것을 명하심으로 인간 정부로 하여금 그의 사법권을 대신 행사하도록 지정하셨다. 그러므로 사형은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정부의 형벌권 행사이다. 그래서 바울은 정부가 칼(사형을 포함한 형벌권)을 가진 것은 하나님의 사자로서 악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의 보응을 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부에 복종하라고 명하고 있다. ‘’(롬 13:1-4)존치론자들이 주장하는 폐지론자들의 오류
    인문/어학| 2005.05.24| 2페이지| 1,000원| 조회(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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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디어와 인간
    나는 ‘정보화’라는 단어에 그리 익숙하지 않다. 그에 따라 요즘 새롭게 마구 등장하고 있는 정보화에 대한 용어라든지 최첨단 현대식 기기 들을 아직도 많이 알지 못한다. 단지 내가 살아가는 흐름에 맞추어서 그다지 삶에 지장이 되지 않을 정도로만 하나씩 배워나가고 있을 뿐이다. 컴퓨터의 사용도 불과 얼마 전에서야 시작했고, 인터넷이란 도구의 형태만 대충 짐작하고 있을 뿐이지 크게 사용할 줄은 모른다. 이처럼 나에겐 정보화라는 단어는 정말 친해지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와서 ‘정보 사회의 이해’라는 수업을 듣고서 정보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갖게되었다. 그리고 정보 사회, 매스컴에 관한 책을 읽음으로써 보다 많이 정보화에 가까워 질 수 있었다.‘미디어와 인간’ 이라는 제목은 내가 읽은 책의 이름이다. 이 책은 인간 커뮤니케이션과 미디어에 대해서 자세히 잘 설명해주고 있다. 다른 책들과는 달리 각각 부분적으로 잘 나누어져있고 이해하기 쉽게 하나하나 설명이 잘 되어있다. 모두 8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장마다 세분하게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다.먼저 제 1장에서는 인간커뮤니케이션과 미디어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인간커뮤니케이션은 미디어를 통해서 이루어져 왔다. 즉 사람과 사람사이에 미디어가 존재함으로써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고 이렇게 인간커뮤니케이션의 발전은 미디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초기 원시 시대 인류는 손과 몸짓, 그리고 얼굴 표정으로써 커뮤니케이션 구실을 했는데 이때 손, 몸짓, 얼굴 표정은 커뮤니케이션 미디어 구실을 한다. 그 후 인간이 언어를 발명한 뒤부터는 언어가 주요한 커뮤니케이션 구실을 해 왔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 발명이후 미디어는 급속히 발달했다. 인쇄기의 발명은 책, 신문, 잡지와 같은 미디어를 만들어 냈으며, 텔레비전과 같은 미디어를 만들어 냈다. 이 같은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은 인간커뮤니케이션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인간 커뮤니케이션의 공간적 범위가 확대되고 또 시간적으로도 커뮤니케이션이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였다. 즉 원시시대 인류가 의존했던 대인커뮤니케이션을 매스커뮤니케이션으로 대체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대인커뮤니케이션이 인간의 커뮤니케이션 기관의 5관을 모두 사용한 반면에 매스커뮤니케이션은 시각, 또는 청각에만 의존하는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밖에 없어 커뮤니케이션 왜곡 현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리하여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은 직선의 문화, 즉 이성에 입각한 커뮤니케이션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그렇지만 현대 사회에 들어서서 이러한 직선의 문화는 다시 원의 문화, 즉 감성적 커뮤니케이션으로 회복되고 있다. 이것은 컴퓨터를 이용한 통신상의 대화 같은 교통 통신 관련 기술이 고도로 발전하면서 가능해졌다. 자신의 메시지를 문자뿐만 아니라 음영과 동영상을 통해서 전달하고 또한 이에 상대방은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이성적 커뮤니케이션의 많은 역기능을 보완하게되어 복수감각을 이용한 균형 잡힌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지고 있는 것이다.제 2장은 멀티미디어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먼저 멀티미디어를 이야기하기 전에 뉴미디어와 올드미디어를 구분 짓고 있다. 수업 시간에 배운 바로는 올드미디어는 컴퓨터나 통신 기술과 연관이 적은 미디어로서 일 방향성 정보를 제공하는 미디어, 예로 신문, TV, 라디오, 영화 등을 나타내는 말이었고, 뉴미디어는 기존의 올드미디어에 컴퓨터 통신 기술을 결합시킴으로써 과거와는 상이한 형태의 미디어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특별히 개념을 이야기하지 않고 상대적인 개념으로 나타냈다. 예를 들어 신문, 잡지와 같은 미디어들이 주류를 이루었던 인쇄미디어 시대에 있어서 정보를 전파로 전달하는 라디오와 같은 미디어가 등장했을 때는 라디오가 뉴미디어였고, 라디오가 대중 미디어로 보편화되었을 때는 텔레비전은 뉴미디어였다고 말을 하고 있다. 또한 케이블과 ISDN이 등장한 지금에 있어서 다시 텔레비전과 라디오는 방송 미디어로서 올드미디어이다. 이렇게 뉴미디어는 끊임없이 개량되어 발전되고 있는 포괄적인 개념이며, 미디어의 발전 시기에 따라서 올드미디어와 구분되는 점에서 상대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결국 현재 우리가 뉴미디어라고 일컫는 미디어들은 일종의 멀티미디어인 셈이다. 멀티미디어란 다양한 미디어가 하나로 통합된 새로운 형태의 미디어로서 정의된다. 즉, 멀티미디어는 두 가지 이상의 미디어가 융합되어서 컴퓨터를 중심으로 문자, 음성, 영상 등을 통일적으로 처리하는 미디어다. 그러나 이 같은 정의는 피상적인 정의로서 멀티미디어가 지니고 있는 인간커뮤니케이션의 본질과 관련해서 지니고 있는 의미를 갖고 있지는 않다. 기술발전의 방향이 인간의 본질과 무관하지 않듯이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발전 방향도 인간커뮤니케이션의 본질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 특히 오늘날 멀티미디어의 등장이 인간커뮤니케이션의 본질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인간은 복합적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동물이다. 복합적 커뮤니케이션이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오관이 동시에 사용되고, 감각기관과 두뇌가 결합하여서 이루어지고, 쌍방형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복합적 커뮤니케이션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커뮤니케이션의 형태이다. 멀티미디어가 복합적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술적 지원이 필요한데, 그것은 디지털 기술과 대용량 정보 전달기술의 지원이다.세 번째 장에서는 미디어의 발달사를 보여준다. 최근 들어 커뮤니케이션 학은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엄청난 발전으로 큰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흔히 18세기를 ‘산업발전’의 시기, 19세기를 ‘자본주의 발전’의 시기라고 규정하면서 20세기를 ‘교통통신 혁명’의 시기라고 말한다. 산업발전과 자본주의 발전이 사회학과 경제학의 학문적 배경이 되었다면 교통통신의 혁명은 커뮤니케이션 학의 학문적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교통통신의 혁명 중에서 커뮤니케이션 기술은 21세기를 목적에 둔 현 시점에서 전혀 멈출 줄 모르고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발명 특허되는 기술의 절반정도가 커뮤니케이션 관련 기술임은 이를 웅변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의 발달사를 통해서 잘 나타내고 있다.제 4장은 미디어와 인간커뮤니케이션의 역사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텔레비전, 라디오, 영화, 신문, 책, 오디오나 비디오, 카세트 등이 없는 일상생활을 상상할 수 없다. 즉 미디어에 둘러싸이고 미디어를 통해서 현실을 경험하는 부분과 영역들이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따라서 미디어는 인간의 현실경험과 인식에 영향을 미치며 사회와 문화의 형식과 내용을 변화시킨다. 매스미디어의 등장이 대중사회와 대중문화에 미친 영향을 실제로 경험하고 있는 지금의 현상을 보더라도 명확하다. 미디어란 커뮤니케이션의 역사를 설명해주는 요소이고, 인류와 역사를 커뮤니케이션 형태 변화의 역사를 통해 추적할 수도 있다. 커뮤니케이션 형태를 살펴보는 것은 커뮤니케이션 기술변화만을 조사하는 것과는 다르다. 커뮤니케이션 적으로 인류역사를 연구할 수 있다는 것은 기술뿐만 아니라 많은 다양한 것을 고려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러 학자들은 커뮤니케이션 역사를 세 단계로 구분하는데, 이 세 단계는 구두커뮤니케이션이 지배적이던 초기시기와 인쇄시기, 그리고 전자 미디어의 시기이다. 각각의 시기마다 커뮤니케이션 행위가 달리 나타났다. 구두커뮤니케이션 시기에는 말하기와 듣기가 중심적인 행위였고, 인쇄시기에는 필자와 독자를 필요로 했다. 또 전자미디어는 조직적인 생산과 수용자를 필요로 했다. 물론 이러한 발전이 어느 한 형태가 다른 형태를 대처했다는 것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현재의 산업사회에서 우리는 이 세 가지 형태의 미디어를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제 5장에서는 커뮤니케이션 기술과 미디어이론의 제 관점을 다루고 있다.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발전은 미디어의 존재양식을 변화시키고, 미디어의 존재 양식 변화는 궁극적으로 인간커뮤니케이션의 변화를 수반한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서 멀티미디어와 같은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은 라디오와 텔레비전과 같은 전자 미디어가 실현한 매스커뮤니케이션을 대신하여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을 만들고 있다. 이런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변화는 컴퓨터와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결합에 의해서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이는 마치 인간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두뇌와 오감의 결합에 해당된다. 이런 상황들은 커뮤니케이션 기술이란 결국 인간 기능의 확장이라는 관점의 타당성을 높이고, 이런 관점이 커뮤니케이션 학을 인문과학으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명분을 제공하고 있다. 새로운 미디어 기술의 사회 문화적 효과와 정치적 영향에 대한 논의는 긍정론과 부정론이 선명하게 대비되고, 낙관론과 비관론이 계속해서 갈등해왔다. 긍정적 미디어이론의 범주에는 1960년대 이후, 기술결정론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 이 니스와 맥루한 등이 있고, 그리고 전자미디어의 ‘해방적 가능성’을 옹호한 엔첸스베르거가 있다. 한편 기술이 물신적 특성을 조장하여 인간의 총체적 자유를 억압한다는 관점은 프랑크푸르트학파 이론가들의 시각이었다. 이러한 부정적 미디어론은 ‘문화 산업론’을 거쳐, 프레드릭 제임슨, 테리 이글튼 등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독후감/창작| 2005.05.24| 3페이지| 1,500원| 조회(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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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불교, 유교, 기독교가 우리나라의 문화에 끼친 영향 평가A+최고예요
    1. 불교가 우리 문화에 끼친 영향우리 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해졌다는 공식적인 기록은 고구려 소수림왕(불기 915, 서기 372)이 중국의 전진왕으로부터 불상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인도 출신인 가야국의 수로왕비 허씨가 인도로부터 불교를 직접 가져왔다는 학설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소수림왕 이전에 이미 불교가 우리 나라에 뿌리 내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삼국시대에 전래된 불교는 각 나라와 지역마다 독특한 특성을 지닌 채 발전하면서 우리의 전통 사상과 문화로 깊이 뿌리내렸다. 불교는 특유의 사상적 포괄성으로 민속 신앙을 흡수하여 우리 민족의 전통 사상과 문화로 자리잡았다. 특히 원효, 의상, 원광 같은 고승들의 정신적인 역할은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었고, 교학에 대한 독창적인 연구성과는 불교뿐만 아니라 한국 사상사의 근원이 되었다 고대 삼국은 주로 자신을 섬기는 고유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신앙은 불교가 전래되면서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자연신적 신앙이 불교화되고 모든 신과 이에 대한 신앙이 불교신앙의 범주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는 불교라는 외래종교가 기존의 고유신앙을 흡수하여 새롭게 전개된 것이다. 원시 불교가 왕실중심으로 받아들여진 까닭은 왕자계급에 유리한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다. 원시불교는 북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전해졌는데 당시의 불교사상은 '왕즉불'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불교수용에 반대의 입장을 취하던 사람들은 귀족들이다. 그 이유는 불교전래 이전 삼국사회에서는 무교신앙이 행해지고 있었다. 이는 왕이나 귀족이 모두 제사장으로서의 성격을 지녔고 성읍 국가의 기반 위에 갖추어져 왔다. 성읍국가가 연맹왕국내에 편입되면서 그 지배자들은 귀족으로 왕경에 거주하였고 연맹왕과 귀족은 상하의 종속관계로 나타나게 되었다. 반면 왕실중심으로 받아들인 초전 불교는 무교신앙을 대치하는 성격을 지닌 것이다. 초전 불교가 주로 왕실을 중심으로 전래되어 수용되었지만 왕실만의 문제로 남아있을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해 갔다.의 양상이 어느 정도로 다르게 나타났는지 분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아마도 이런 문제는 왕권중심의 귀족국가로 성립되어 가는 과정에서 체제 정비 및 왕권 확립의 정도, 토착 세력 기반의 대소 등에 의한 삼국 각국의 정치, 사회 상황의 차이를 부각시킴으로써 보다 확실해 질 수 있을 것이다. 한국 불교사에서 가장 큰 변화를 일으킨 것은 고려시대의 불교이다. 현재 한국불교의 성격이 이 때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 불교는 삼국시대에 이어 국교(國敎)의 지위를 확립하여 국가적인 지원 아래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오늘날 최고의 경전으로 받드는 고려대장경을 조판하였고 세계 최고의 인쇄술을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도선국사의 영향으로 전국 방방곡곡에 사찰과 탑이 세워졌다. 당시에는 건축술도 뛰어나 우리 나라 최고의 목조건축물로 꼽히는 봉정사 극락전과 부석사 무량수전도 이 때에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와 함께 불화(佛畵)가 발전하여 세계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고려시대 불교는 정치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국왕들은 대대로 당대의 고승(高僧)을 국사(國師)로 모셔 정신적인 지도를 받았다. 조선시대 불교는 숭유배불정책으로 인해 억압과 수난을 당했다. 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정하고 불교사상의 영향력을 의도적으로 비하하였다. 고려시대 큰 규모로 성장하였던 사찰의 토지를 몰수하고 스님들을 백정과 같은 팔천민의 하나로 신분을 낮추었으며, 서울 도성 출입을 금지시켰다. 뿐만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았던 사찰을 몇 십 개만 남기고 강제로 폐찰 하였으며, 각기 특성을 지니고 성장하던 각 종파(宗派)도 선종과 종의 양종으로 통합하는 등 불교를 탄압하였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유교질서가 한계를 드러내고 조세제도의 문란으로 백성들의 삶이 어렵게 되자 사찰도 여러 가지 시련을 겪게 되었다. 특히 개혁적인 스님들은 유교지배 아래의 조선을 혁신하고자 백성들과 함께 여러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각종 민란에 스님들의 여도 나타나게 되었다. 우리 민족문화의 모체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서기전 6세기쯤에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이후로 인도의 온갖 문화를함께 수용, 포용하며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였으며, 서역제국을 거쳐 서기 1세기쯤 중국으로 전해져 고유문화와 풍토 속에서 독특한 중국의 불교를 형성시키고 그와 같은 중국의 불교문화가 바로 이 땅으로 전래된 것이 4세기쯤의 일이었다.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불교문화는육로를 통해서 고구려에 전해졌고 바다를 건너서 백제 땅으로 전하여졌다. 고구려에서 받아들인 불교문화는 주로 전진을 비롯한 북방 중국의 불교문화였으며, 백제는 주로 동진을 비롯한 남쪽 중국의 불교문화를 받아들였다. 신라는 처음 고구려로부터 불교문화가 들어왔고,그 뒤에는 백제와 중국(남조, 수, 당) 등지에서도 전래되었다.우리 민족의 사상과 문화 및 민속에 영향을 미치며 한국문화 형성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한다.한국인의 삶에 있어서 인간과 세계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탐구가 철학적 체계를 확보한 것은 불교를 통해서 였으며 아울러 우주의 장엄한 질서에서 느껴진 경외감이 숭고한 예술적 표현을 획득할 수 있었다. 범속한 일상에 제례의 정연함과 놀이의 즐거움이 정착되기시작한 것도 불교와의 접촉을 통해 이루어졌다. 삼국시대에 불교문화를 받아들이기 전에는이렇다 할 고유한 민족문화를 갖고 있지 못한 편으로 자연숭배 신앙이나 그러한 문화의 형태 속에서 생활을 영위하던 당시의 우리 겨레는 외래의 종교이며 새로운 사상을 동반한 불교문화를 받아들이게 되어 민족의 고대 신앙이나 고유관습 등 종래의 문화와 잘 융화되어훌륭한 민족문화로 형성되었던 것이다. 현재 우리 문화에 남아 있는 문화의 대부분이 불교 문화 유산이고, 그것에 의하여 불교의 핵심 사상이 우리 문화권에 수용되면서 자연의 원리에순응하는 문화적 표현의 결정체를 우리는 너무나 익숙하게 그리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불교문화 유산은 불교문화의 차원을 넘어 한국인의 문화유산이라는 측면에서 불교문화유산을 잘 보존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할 일이다.단에서 비중을 같이할 정도로 발전되어 왔다. 그렇다고 기독교정신에 의해 완성되는 작품들이 만족한 시점에는 이르렀다고 는 볼 수 없다.특히 문학 가운데 소설의 경우는 아직까지도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기독교 소설이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이유는 먼저 시와 소설이 갖는 구조적 특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시는 절대적인 감정을 표현하고 소설은 구체적인 세계관을 제시한다. 여기서 한국시가 기독교적인 문학을 상당수 창조한 반면 소설이 그렇지 못한 것은 한국의 기독교가 "기독교를 감성 혹은 정서로 받아들였지만 세계관과 가치관으로 재구성 하는데에는 미흡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김병익교수는 지적하고 있다. 문학평론가 김우규는 "예수(기독교)는 일찍이 개화기 때부터 우리 문학에 찾아왔다. 그러나 거기에 예수는 거기에 없었다. 그 뒤 춘원은 박애주의니 비폭력주의니 하는 꼬리표가 달린 '복음서'의 보따리를 풀어놓았지만 거기에도 예수는 머물러 있지 않았다"며 "그는 다만 우리 문학을 기웃거려보고는 그대로 스쳐지나갔을 뿐이다. 그의 모습은 고작 무당으로, 서양의 전도인으로, 죄만 따지는 옹졸한 위인으로 때로는 근엄한 군자로 비치었을 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1892년 한글판 '성경'의 간행에 이어 1895년 '천로역정'의 번역은 한글의 발전은 물론 1890년대 전반기에 시가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개화기의 시가는 "문학성보다는 호교성, 선교성이 고려된 실용적인 것으로 한국 근대 문학사조를 바꾸기에는 미흡했다"는 지적이다. 황금찬 시인은 "초창기의 문학은 마치 소나무에 핀 장미꽃 같아서 생소하기 그지없었다"며, "그것은 문학의 형식면만이 아니고 사상면 까지도 모방적이었다"고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초창기에는 문학의 특색을 종교적인 용어에서 찾으려고 하였으며 몇마디 종교적인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이것을 기독교문학이라 지칭하게 되었다. 하나님 혹은 예수, 여호와,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 문화 종사자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서양기독교문화의 복제품이 아닌 우리의 오랜 역사 위에 개성 있고 특색 있는 독특한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이다. 두 번째로 살펴볼 분야는 기독교 연극과 연화이다. 기독교 문학이 한글의 발전과 함께 꾸준히 성장, 발전해 온 것과는 달리 기독교연극과 영화는 아직도 걸음마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나마 연극은 미약하나마 역사적인 발전을 하여 현재 몇몇 단체가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나 영화 쪽은 그야말로 빈사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초기 한국교회는 성탄절이나 감사절에 소규모 연극을 했으나 예술적 평가의 수준에 이른 것은 아니었으며 기독교 극이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한 것은 해방이후부터였다. 기독교연극이 하나의 전문적 극단으로 발돋움한 것은 해방되던 45년 극단 '예술무대'가 창립된 이후이다. 윤금성과 이보라가 최윤관 목사를 고문으로 추대한 예술무대는 창단작품으로 '에스더'를 공연한데 이어 기독교극인 '모세', '여와'등을 공연 성공을 거두었으며 계속해서 '피묻은 십자가',손양원 목사의 순교 생애를 극화한 '사랑의 원자탄'은 지방공연으로까지 이어지는등 활성화 됐다. 그러나 6.25 한국전쟁으로 기독교 연극은 침체되었으며 50년대 이후 '실험극단','산하''자유','민중국단'등이 창단되기 시작했으며 65년 창립된 극단'가교'는 한국연극사에서 가장 실험적이고 의욕적인 기독교연극 활동을 펼쳤다. 또한 이시기에는 전문적인 기독교 연극의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되면서 소극단 '탈'이 창단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까지의 기독교 연극은 성서를 소재로 한 단순한 성극이거나 기독교인들의 극적인 삶을 그 내용으로 표현하는데 그치고 있었다. 이러한 기독교 연극에 대한 반성이 제기되면서 한국에서는 새로운 예배극 형식의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80년대들어 현대극단에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공연하기 시작했으며 87년 이래 극단 '춘추'는 이다.
    인문/어학| 2005.05.24| 5페이지| 3,000원| 조회(3,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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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개 리뷰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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