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완득이몇 해 전 소설 ‘완득이’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청소년 상담사로 일하는 동료의 추천으로 읽은 그 책은 참 유쾌하게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최근 소설 ‘완득이’가 영화 ‘완득이’로 제작되어 개봉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를 관람하기 위해 극장으로 향했습니다. 편지로만 알고 지낸 친구를 실제로 만나는 느낌이랄까? 주인공 완득이와 똥주를 만나러 가는 발길은 가볍기만 합니다.영화 ‘완득이’는 소설 ‘완득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가 품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유쾌하게 담아 내고 있습니다. 입시로 점철된 학교교육, 이제 더 이상 소수가 아닌 다문화 가정,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를 대하는 우리 사회,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 경제적 빈곤 등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완득이를 중심으로 다양하게 펼쳐집니다. 백색광으로만 알던 빛이 편광기를 통해 다양한 색을 스펙트럼으로 드러내듯이 영화 완득이는 우리가 평소 의식하지 않고 넘겨왔던 다양한 사회 문제들을 우리 앞에 드러냅니다.주인공 완득이는 다양한 사회 문제의 연결고리입니다. 완득이의 독백처럼 완득이는 가출을 하기에 최적(?)의 환경을 지니고 있습니다. 장애인인 아버지는 사람들에게 늘 무시를 당하며 철저하게 사회적 약자로 살아갑니다. 가정형편도 어려워서 옥탑방에서 가정지원으로 받은 햇반과 라면으로 식사를 때우며 살아갑니다. 학교에서는 맨 뒷자리에 앉아 수업에 관심이 없고 졸기 일쑤니 곁에 친구도 없습니다. 완득이는 짝꿍도 없이 혼자 앉아 있지요. 어디 그뿐인가요. 돌아가신 줄로만 알았던 어머니가 알고 보니 필리핀에서 온 외국인이라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난감한 출생의 비밀까지! 만약 이 중에 하나라도 내가 처한 상황이었다면 가출을 감행하더라 남았을 것 같습니다. 어린 나이에 버거운 짐을 안고 있어서 그런지 완득이는 학교에서 말수가 적고 주변의 일에 무관심하여 의욕이 없습니다.하지만 아버지를 모욕하거나, ‘병신’이라고 부르는 이에겐 거침없이 주먹이 나가고, 술에 취한 아버지를 업어서 집에 모셔오는 효자입니다. 무단조퇴를 하거나 아버지를 놀리는 친구를 때려주는 일탈행동은 하지만 자신이 처한 환경에 좌절하거나 분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무덤덤합니다. 17년 만에 알게 된 어머니가 필리핀 사람이라는 다소 웃지도 울지도 못할 난감한 상황에서도 이를 회피하지 않습니다. 어머니를 아버지와 만나게 하기 위해 강원도까지 찾아가고 어머니의 낡은 신발을 보고 새 신발을 무뚝뚝하게 사드립니다. 둘 사이가 관계를 궁금히 여긴 가게 주인의 질문에 먼저 ‘제 어머니세요.’라고 말합니다.담임 똥주를 저주하기 위해 찾은 교회에서 전도사 핫산을 통해 우연히 접하게 된 킥복싱은 완득이를 매료시킵니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완득이는 킥복싱을 연습합니다. 그리고 다른 킥복싱 도장 선수와 연습 시합을 갖지만 관객들의 기대와 달리 보기 좋게 KO패를 당합니다. 하지만 완득이는 웃을 뿐입니다.영화의 전개가 이쯤되면 왜 완득이가 슬픈 가정 환경에서도 비뚤게 자라거나 환경을 탓하지 않는지 짐작이 됩니다. 그건 바로 완득이에겐 하고 싶은 일이 있고,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 있으며,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삶의 행복을 찾은 것입니다. 그토록 연습했던 킥복싱 경기에서 KO패 당했지만 웃을 수 있는 이유도 비록 경기에서는 졌지만 계속 킥복싱을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고 싶은 사람(정윤하)이 있고 지켜주고 싶은 사람(부모님)이 있으며 하고 싶은 일(킥복싱)이 생겼다는 것, 바로 ‘~하고 싶은 마음’이 완득이가 비뚤어지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자신이 사랑하고 싶은 사람과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 자신이 지켜주고 싶은 사람과 자신을 지켜주는 사람,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이 일치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행복한 일입니다.완득이가 처한 상황에서 완득이의 행동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고요? 오히려 우리는 현실적인 문제 속에 살면서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비현실적인 생각만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이쯤에서 영화 전개의 또 다른 축인 담임 ‘똥주’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얌마! 도완득!”을 입에 달고 사는 담임, 일명 ‘똥주’는 일상적인 우리 시선으로 보기엔 문제 교사입니다. 수업시간에 강의는 않고 이상한 이야기만 늘어 놓질 않나, 종종 자습을 시키고 본인은 교탁에 엎드려 자다가 교실에 들어온 다음 수업시간 선생님에게 핀잔을 듣기도 합니다. 무단 조퇴한 완득이를 체벌하기도 하고 완득이에게 가정지원으로 나온 햇반을 내놓으라고 옥상에서 소리지르기도 합니다. 관심 없다는 완득이의 거부에도 끝까지 어머니와의 만남을 성사시키려고 들고 창피하게도 친구들 앞에서 완득이의 가정환경(아버지의 직업, 가정지원)을 들먹입니다. 그래서 완득이는 교회에 가서 매일 밤 빕니다. “하느님, 제발 똥주 좀 죽여주세요. 네?”하지만 그런 똥주의 모습이 그리 밉지 않습니다. 비록 후줄근한 겉모습이지만 마음은 누구보다 정의로우며 ‘얌마, 도완득’을 연신 뱉어내며 툴툴대지만 실은 완득이의 성장을 진정으로 위하고 있음이 느껴집니다. 완전하진 않지만 담임 똥주에게서 ‘오래된 미래’의 선생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 정말 한 소년의 운명같은 이야기20022036 국어교육과 황상현15세 소년의 시각으로 본 나치 수용소의 이야기가 담담하게 그려진 200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인 자전적 소설같은 이야기는 전체적인 주제를 재고해보면 로베르토 베니니의 영화 와 같은 맥락을 띠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살만하고, 살아볼 가치가 있고, 아름답고 희망을 잃지 말자는 다분히 상투적인 주제로 초반부에 지루했음을 고백한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이라고해서 어느 정도 각오는 했었지만 거의 굴곡없는 이야기 진행에다 말투도 다분히 우회적이라 315쪽이라는 얇지 않은 책 두께는 잘 넘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일은 따분하게 오후 햇살이 대지를 졸음속으로 몰고가는 여름 날에 빨리 오지않는 시외버스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인내심을 지니고 읽어야 함을,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은 독자들에게 밝히고 싶다. 제목이 이라고해서 초반부부터 스펙타클한 역동감이 대형 화면을 대각선으로 가로 지르는 배경으로 읽힐 것이라 상상한다면 도중에 책장을 덮고야 말일이다. 마침내 시간이 다 되어 시외버스는 저 멀리 아련한 풍경으로부터 햇살을 가르고 내 앞으로 달려오고야 말았다. 끝부분으로 갈수록 빨려 들어가는 감동적인 사유를 요구하게 되는 바, 그 무시무시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의 참혹한 현장이 이렇게 한가했나 하는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된다. 전쟁의 역사와 개인의 역사를 함께 고리로 연결해서 엮은 이 이야기의 주제는 국어 교과서에서 지겹도록 만난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자연에 순응하면서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의연함"이다. 문득, 러시아의 푸쉬킨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어쩌고...."하던 싯귀가 떠오른다. "이제 내가 가게 될 길 위에 피할 수 없는 덫처럼 행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아우슈비츠의 굴뚝에서조차도 잠시 쉬는 시간에 행복과 비슷한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난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면 다음엔 강제 수용소의 행복에 대해서 말할 것이다. 사람들이 묻는다면. 그리고 내가 그것을 잊지 않고 있다면."(292쪽) 책의 말미에 이야기의 주제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아우슈비츠의 시커멓고 귀신 그림자같은 굴뚝에도 행복이 있었다는 그런 이야기. 여기까지만 나의 서평을 줄이게 된다면 2002년 이 책을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라는 반열에 올려 놓은 여러 유수한 심사위원들에게 죄를 짓는 일일 것이다.그런데 이 책의 관점자는 열다섯살 짜리 소년이다. 만약에 저자가 그 당시에 이 글을 썼더라면 이렇게 담담하게 글을 쓸 수 있었을까하는 의심이 든다. 사회에 대한 경험이나 안목이 생긴 나이에 회고의 자세로 돌아보며 현재시점에서의 관찰자적 자세로 과거의 일을 회상한. 그리하여 주인공은 열 다섯살에 멈추어있지만 주인공의 시각을 대변하는 건 현재의 50이 훨씬 넘은 저자다. 시간적 배경이 달리 한 이야기속에서 주인공 소년은 일 년 동안의 경험으로 그 모든 감정을 말할 수 있었을까 싶다. 그래서 난 이 책이 노벨 문학상을 받을만한 작품이었는가 하는데 약간의 회의가 들었다. 가스실과 굶주림과 질병과 강제동원으로 대변되는 수용소의 참상을 너무 당연하고 담담하게 그려놓은 것은 우리가 이미 그곳에 대한 선입견으로 그런 잔혹함을 표현해 주기를 기대하고 그것에 분개하기를 기대하는 심리 때문이 아니었을까. 고미카와 준뻬이의 이라는 책을 보면 일본 사람이 본 일본군의 얘기가 잘 표현되어 있다. 일본군이 아시아인들을 괴롭히는 실상이나 그 속에 가려진 여러가지 진실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써 놓은 작품이다. 일제탄압이라는 억울한 역사를 가진 우리는 늘 피해자의 입장에서 일본을 가해자의 자리에만 놓고 보려는 고집이 강하다. 일본에 대한 알러지가 강하다보니 우리의 시각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이 좀체로 변하지 않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열 다섯살짜리 소년이 독일인은 가해자, 유대인은 피해자다 하는 적극적인 방식을 설명하지 않았다고 하는 느낌을 받는다면 이 책은 단순히 열다섯 살 소년의 눈으로 보고 체험한 이야기로 국한시켜야 한다. 이러한 느낌은 일반적이고 객관적인 설득력을 잃을 수 있다. 그래서 책의 말미쯤 가서 나는 이 책을 읽는 자세를 고쳤다.만약에 이 글이 다른 아류작들처럼 치열하게 그려냈다면 오히려 식상했을지도 모른다.. 이유도 모르고 아우슈비츠, 부헨발쯔로, 짜이쯔로 끌려가는 기차 안에서의 지루함이나, 다쳤을 때 치료받는 병원에서 혼자 있는 무료함, 그야말로 시간과의 싸움이 가장 큰 일이었다는 표현은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이 책이 그동안의 다른 작품들처럼 잔혹상을 고발하고 그것에 분노하는 내용이었다면 또 한번의 유대인 학살에 관한 식상한 소재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노벨문학상의 영광을 안겨 주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의 운명을 수용해 내는 작가의 태도가 만들어 내는 매력이 바로 담담함이었다. 1945년 4월 부다페스트로 귀환하면서 그는 말한다. "만일 운명이 존재한다면 자유란 불가능하다. ........... 만일 자유가 존재한다면 운명은 없다. 이 말은 '나 자신이 곧 운명'이라는 뜻이다."(289쪽) 소년은 고향에 돌아와서 이웃에 살던 노인이 자신들까지 포함해 유대인 모두가 피해자라고 했을 때, '우리만 피해자가 아니라 그들도 피해자'라는 말을 해서 두 노인을 화나게 만든다. 이것이 작가가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이다. 전쟁의 피해자 위치에서 상대방의 가해자를 동질의 상처를 지닌 피해자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문제는 그만의 관점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에게 인류가 저지른 과오를 다시 한 번 깨우쳐 주고자 '우리 모두 는 결국 같았다'는....
스피노자의 윤리사상1. 데카르트를 비판한 스피노자스피노자는 근대 철학을 통틀어서 가장 독특한 철학을 세웠다. 그는 데카르트의 영향 아래 철학을 연구했고,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나름의 근본적인 비판을 수행했다. 데카르트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 철학자는 많지만 그중에서 그 비판의 근본성에서 가장 두드러진 게 바로 데카르트와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스피노자였다. 스피노자의 문제의식은 명시적으로 데카르트의 철학이 갖는 중요한 전제와 관련되어 있다. 이는 이 두 사람의 철학자 사이의 상호관계를 보여 주기도 하는 것이다. 일단 여기서는 데카르트의 중요한 전제에 대한 스피노자의 비판을 보면서 시작하기로 한다. 데카르트의 설정을 통해서 스피노자의 이해를 구체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2.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데카르트에 대한 스피노자의 비판은 크게 세 측면에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첫째는 ‘존재론’이라고 불리는 것과 관련된 비판이다.데카르트는 신에게서 사고, 행동의 중심인 주체를 떼어 내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주체는 불가피하게 대상 세계와도 분리되게 된다. 그런데 데카르트가 ‘주체’라고 할 때, 그것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것이고, 자연의 다른 생물과는 다르게 사고하는 힘이 있고 그걸 이용해 자연 세계를 지배하는 힘을 갖고 있음을 뜻한다. 반면 ‘대상’인 자연 세계는 조용히 주체의 처분만 기다리는 정적이고 수동적인 게 된다. 이제 신을 대신해서 ‘주체’라는 이름표를 단 인간이 세계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데카르트에게 있어 자연은 이 주체가 정복하고 지배하며 이용해야 할 세계가 된다. 자연에 대한 과학적 지식은 여기에 필요한 정보를 준다. 이런 점에서 데카르트를 ‘반자연주의’라고 말할 수도 있다. 현대에 들어서 문제시 되고 있는 환경오염에 대한 문제의 원인이 데카르트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스피노자는 바로 이러한 데카르트의 견해에 자신의 경계를 그었다. 그가 보기에 자연은 단지 수동적인, 그래서 지배되어야 하는 대상만은 아니었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적세번째로 윤리학에 관한 비판이다.데카르트나 스피노자에게 ‘윤리학’이란 말은 지금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범위가 넓다.단지 도덕에 대한 사고만이 아니라 육체적 정신적 존재로서 인간에 대한 이론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보기엔 인간에게는 자연적인 요소가 남아 있는데―육체―이 때문에 인간은 결코 이성적이지만은 않게 된다.따라서 데카르트는 인간의 이러한 성격을 이성으로 억제하고 통제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게 바로 데카르트의 도덕론의 원칙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데카르트의 윤리학은 계몽주의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이런 데카르트의 특징 역시 스피노자로선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는 감정이나 욕망, 정념 등을 이성으로 억제하고 억압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옳은 것도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스피노자는 인간은 자연과 다른 어떠한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3. 스피노자와 자연주의(스피노자가 바라본 자연)자연의 존재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스피노자의 철학은 ‘실체(substantia)’와 ‘양태(modus)’라는 두 개념으로 요약된다.)실체와 양태에 대해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우리가 TV나 동물전시회를 통해 흔히 볼수 있는 카멜레온을 떠올려보자. 카멜레온은 자신이 처한 주변 상황에 따라 자신의 몸색깔을 여러 가지로 변화시킨다. 붉은색, 푸른색, 노란색으로 변화시킨다. 하지만 여러 가지 색으로 변화시켰다고 해서 붉은 카멜레온, 푸른 카멜레온, 노란 카멜레온이 되는 것은 아니다. 카멜레온은 원래의 색(쉽게 생각해 초록이라고 하자)을 가지고 있고 이를 주변 상황에 맞추어 변화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카멜레온의 실체는 초록 카멜레온이라고 할 수 있다. 카멜레온이 색을 바꾸는 것은 그의 임무(먹이를 잡든,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든)를 위해서이다. 이러한 카멜레온의 임무는 변화의 원인이며, 변화에 의존하지 않는 요인이다.(먹이를 잡기 위해서 바꾸는 것이지 바꾸기 위해서 먹이를 잡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무한히 다른 ‘범신론’이라고 한다.)다른 한편 자연은 변화하는 각각의 개체들로 이루어진다. 예컨대 태어나고 늙어 가는 인간에서 흐르는 물과 변화하는 계절에 이르기까지 극히 다양하고 가변적인 것들의 집합이 바로 자연이다. 이처럼 변화하는 개체들 각각을 양태라고 한 셈인데, 이런 뜻에서 ‘자연은 양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실체는 양태로 ‘표현’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다시 말해 양태는 실체가 변용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푸른색이든, 붉은 색이든 초록의 카멜레온을 상정하지 않고는 상상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개체들은 이처럼 양태로서 존재한다. 즉 변용 된 모습인 양태로 말이다. 이래서 “개체의 본질은 양태다”라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그리고 이 양태들, 이 개체들 전체를 싸안고 있으며, 그것들 전체를 만들어 내는 원인이 바로 실체인 것이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보기엔 실체란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이 된다.) 스피노자에게 실체는 자기 원인이라고, 즉 그 자체의 원인에 의해 존재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실체는 자연 안에 있는 “무언가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 힘(원동력)”을 가리킬 따름이다. 다른 말로 하면 자연 안의 생산적인 힘이 바로 실체인 것이다. 자연은 이 생산적인 힘으로 가득 차 있다는 뜻이 된다.따라서 자연은 그 외부에 있는 무엇에 의해 창조된 게 아니라 자연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신이 자연을 창조했다는 견해에 스피노자는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셈이다.이처럼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 가는 힘이란 뜻에서 그는 자연을 ‘능산적 자연(산출하는 자연)’이라고 한다. 능동적이고 생산적인 자연이라는 뜻이다.동시에 자연이라는 것은 하나하나의 개체들, 양태라고 부르는 것들의 집합이다.그렇다면 자연은 당연히 양태들로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데, 양태는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실체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고, 수동적인 것이다. 이런 뜻에서 그는 또 자연을 ‘소산적 자연(산출되는 자연)’이라고 한다.결국.4. 스피노자의 진리와 정의인식론적인 측면에서 보면 스피노자의 논의는 ‘실체’‘속성’이라는 개념으로 요약된다. 그는 데카르트처럼 두 개의 실체를 가정한다면 독립적인 두 개의 실체가 서로 일치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데카르트가 말하는 ‘사유’와 ‘연장’, 혹은 물질과 정신이라는 것을 실체의 속성이라고 한다. 즉 실체는 많은 속성을 갖는데, 그 중에 연장과 사유는 인간이 알고 있는 두 가지 속성이라는 것이다.잠시 여기서 사유와 연장이 실체의 속성이라는 점에 주목하자. 스피노자가 ‘신’이라고 불렀던 실체는 기독교적 관념과는 달리 정신적 존재가 아니라 사유와 연장을 모두 갖고 있는 물질적 존재이다. 따라서 신이란 영원하고 완전한 그래서 오직 말씀으로서만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공간 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즉 연장을 가지고 있는 자연 그 자체인 것이다.실체는 이 속성들을 통해서 ‘표현’된다고 한다. 즉 이 두 가지 속성 모두가 실체가 갖는 본질을 ‘표현’하기에, 그것을 통해 우리는 실체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이럼으로써 스피노자는 데카르트가 부닥쳤던 ‘일치’의 문제를 피해 간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신과 육체, 사유와 연장이 일치하는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지 하는 문제가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 “개라는 개념은 짖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은 이런 맥락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연장이라는 측면에서 본 개(현실적인 개)와 사유라는 측면에서 본 개(‘개’라는 개념)는 다르다는 것이다. 개는 짖지만 ‘개’라는 개념은 짖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양자가 다르다고 해서 서로 아무 상관없는 것이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양자는 근본에서는 서로 일치한다. 개라는 동물에 결합되어 있는 질서와 ‘개’라는 개념에 요약되어 있는 질서는 일치한다고 보는 것이다. 즉 양자 모두 동일한 실체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는 스피노자가 ‘진리’란 당연히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극히 낙관적인 생각을 갖고 있유와 연장이 실체의 속성이라는 스피노자의 주장은 데카르트적인 문제, 즉 근대 철학의 중심이 되는 문제를 애초부터 피해 간다.즉 그런 문제는 스피노자에게서는 제기되지 않는다.5.스피노자의 윤리학윤리학에서 스피노자의 기본 사상을 요약하자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육체와 영혼으로 나뉘며, 이 양자는 서로 합일적(통일적)이라는 것이다. 육체는 라틴어로 코르푸스(corpus), 영혼은 멘스(mens)라고 한다.《에티카》를 보면 육체와 정신을 모두 힘으로 정의하고 있으며, 이 ‘힘’을 가장 중요한 원리로 설정하고 있다.스피노자가 윤리학을 연구하는 기본 원리는 ‘육체는 정신과 합일적이다’라는 명제이다. 즉 육체와 정신의 결합체로서 인간에게는 양자를 합일(통일)하려는 ‘코나투스(conatus)’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이 것은 어떤 상태를 ‘지속하려는 힘’이다. 이 힘은 인간에게만이 아니라 실체의 양태인 모든 것들, 즉 모든 개체들에 다 있다.예컨대 멈춰 있던 것은 멈춘 상태에 두려고 하는 것, 운동하는 것은 계속 운동하려는 상태에 두려고 하는 것―을 코나투스라고 한다.) 즉 관성처럼 의식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어떤 힘을 가리킨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도 육체와 영혼을 일치(합일)하려는 힘이, 즉 코나투스가 있다. 예를 들자면 강의실에 있을 때의 학생과 운동복차림으로 운동장에 섰을때의 학생은 그 정신상태부터 다르다는 것이다. 이처럼 정신적 힘은 육체가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맞추어 변하며, 반대로 정신적 상태에 따라 육체가 변하기도 한다. 이처럼 육체와 정신을 합일하고 일치시키는 힘이 바로 ‘코나투스’이다.이 코나투스가 정신과 관련되면 ‘의지’라고 불리고, 육체와 정신에 동시에 관련되면 ‘욕망’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예컨대 임용고사에 꼭 붙기 위하여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의 의지는 대단한 것이다. 비록 모의고사 성적이 안나오고 졸린다 하더라도 그 의지만은 사라지지 않는다. 한편 욕망이라면 얼른 떠오르는 것은 성욕, 식욕이다. 이는 일단 육체를 어떤 상태로 지속하려는 욕구인데, 이러
들어가며학교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문법 교육을 머리 속으로 되뇌어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루함’을 연상하게 된다. 단어의 형성을 배우면서 단어의 종류에는 파생어와 합성어로 나뉘고, 파생어는 ‘어근’과 ‘접사’의 결합, 합성어는 ‘어근’과 ‘어근’의 결합이며, 그에 대한 예로 이런저런 것들이 있다는 형태의 수업이 얼른 머리 속으로 스쳐 지나갈 것이다. 단어의 개념을 왜 알아야 하는지, 단어의 형성법으로 파생어와 합성어가 있다는 사실을 왜 알아야 하는지는 알지도 못하는 채로 국어 교사는 학생들에게 열심히 단어 형성의 예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합성어에 밤낮, 산나물 등이 있고 파생어에 지붕, 풋사과 등이 있다는 사실은 전혀 학생들에게 흥밋거리가 되어 주지 못한다. 학생은 자신의 필요와는 상관도 없는 지식을 억지로 받아들이면서 심한 지루함과 괴로움을 함께 경험하게 된다.왜 문법을 학교 현장에서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 그 질문에 대한 충분한 설명 없이 문법 교육은 순수하게 당위적인 차원에서 이어져 내려왔다. 왜 배워야 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고민이 없었기 때문에 문법 교육은 지금까지의 국어학 연구 성과를 그대로 교육 과정에 맞게 체계화 시킨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문법 교과서는 지금까지 연구 된 문법의 체계를 학생에게 가르치기에 알맞은 크기로 정리한 책이 되어 버렸다. 교과서에 따른 문법 교육에서 가르쳐야 할 국어학 개념과 체계는 방대했고, 어려웠다. 개념을 설명하는 예문들이 개념의 이해에 도움은 되었지만 그것의 교육적 효과가 어느 정도 빛을 발하는지는 의문이다. 형태소에 대한 개념을 배우고 형태소 분석의 예를 짤막하게 배운다 해도, 생활 속에서 신문 사설의 문단 하나를 형태소로 완벽하게 분석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 분석을 잘 해낸다 해도 형태소의 개념을 알고 분석을 잘 하면 무엇에 좋을까? 궁금증이 여기에 이르면 다시 왜 문법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되돌아오게 된다.문법 교육은 필요하기나 한 걸까? 이러한 질문에 대답할 수문법 교육에 제기되는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고 그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 - 즉, 문법 교육의 필요성이 정립된다면, ‘국어 지식’ 영역은 국어 교육의 테두리 안에 다시 당당하게 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부터 학교 문법이 왜 필요한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그 이야기는 문법 교육에 제기되는 문제점을 알아보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문법 교육의 필요성과 앞으로의 문법 교육의 향방에 대한 논의가 될 것이다.문법 교육에 제기되는 문제점교육을 고민하는 학자들의 고민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문법 교육이 왜 필요한지 그 의문을 속 시원히 풀어줄 대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학교 문법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 위한 학자들의 노력은 지금도 진행 중에 있다. 문법 교육이 안고 있는 많은 문제점들 때문에 문법 교육 무용론의 주장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문법 교육이 안고 있는 문제는 무엇일까?먼저, 문법은 취학 전에 습득되는 것인데 굳이 학교에서 문법을 가르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어떤 문장이 비문인지 아닌지는 굳이 문법 교육을 받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사람은 직관적으로 그 여부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학교에서 문법을 가르칠 필요가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둘째, 문법은 실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데, 현대 생활에서 문법을 배울 필요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는 교육 내용의 실용성과 관계가 되는 부분이다.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언어 사용 능력이기 때문에 국어 교과에서 이를 가르칠 필요가 있다는 당위는 인정이 된다. 그러나 문법을 아는 것이 과연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데에 어떠한 유용함을 제공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셋째, 문법 교육은 재미가 없다는 문제점이 있다. 이는 앞에서도 다룬 내용이다. ‘문학’은 가르치거나 배우기에 흥미로운 내용이 될 수 있으나 문법은 가르치는 내용이나 방법이 너무나 재미가 없고 현실의 필요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자신의 필요에표가 되고 있기 때문에 약간 다르게 언어 사용 기능의 신장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문법 교육이 국어 사용 능력의 신장에는 기여하고 있는가? 기여 하고 있다면 어떻게 기여를 하고 있는가? 이에 대한 명시적인 해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이러한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에 국어 교육에서 문법 교육의 입지는 점차 좁아지고 있다. 고등 학교에서 심화 선택 과목으로서의 문법을 선택한 학교가 전국에서 손에 꼽을 정도라면 현재 문법 교육의 입지와 그 실태를 구구절절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문법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풍부한 논의와 교육적 정당성에 기반 한 교육의 방향 설정이 선행되어야 학교 문법은 존립과 더불어 발전이 가능할 것이다.문법 교육의 필요성문법 교육에 제기된 문제점은 문법 교육에 대한 기존의 시각에 문제가 있었음을 반증한다. 한, 이는 문법 교육의 관점에 대한 재정립을 요구하는 것이다. 관점에 대한 재정립을 통해 문법 교육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게 된다. 그 동안 정체성을 찾으려는 국어학자들의 노력이 있어왔다.그러한 노력 중에서 한글을 바로 알고 바르게 쓰는 것이 문법 교육의 중요한 축이 된다는 논의는 국어 교육에서 문법 교육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는 중요한 논리가 되었다. 표준어나 맞춤법 규정이 문법 교육의 테두리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우리말을 바르게 사용하기 위한 ‘우리말 알기’와 ‘우리말 가꾸기’를 학교 문법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논리는 이미 교육 과정에 적용이 되어 있다. 7차 교육 과정에서는 이러한 면을 더 부각되어 문법을 ‘국어 지식’이라는 용어로 체계화 시켜 놓았다. 문법 자체가 우리말에 대한 어떤 규칙성을 설명하는 체계이므로 말을 사용함에 있어서 적절한 규범을 다루는 것 역시 문법 교육에서 다루는 것이 적절하다. 이러한 논리는 문법 교육의 실용성을 신장시키는 데에 기여하였다. 이는 앞서 제기된 문제점 중 두 번 째 문제점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해결하는 실마리를 제공하였다.그러나 이 논리만으로는 문법 교육에서 다루는 내용 체계의 전체에 대한 정어야 하는 것인가? 문법 교육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 나라의 제도 교육이 추구하는 목표와 맞닿아야 하며, 국어 교육이 추구하는 목표에도 부합해야 한다. 단순히 지식 자체를 위한 학습이라면 굳이 제도 교육 속에 교육 과정으로 포함되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국어 교과는 언어, 그 중에서도 국어를 대상으로 하는 교과라는 점, 그 국어가 단순한 지식만이 존재하는 내용이 아니라 삶의 영역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언어가 그 내용이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한, 정보화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인간의 사고력과 창의성이 중시되고 있다는 점 역시 그냥 간과할 수 없는 교육의 중요한 시사점이 된다. 이러한 점에 염두 해 본다면 문법 교육은 국어 교과에서 몇 가지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먼저, 문법 교육은 실제 언어 현상 속에 녹아들어 있는 언중의 사고 방식, 문화 등을 파악하는 고차원적인 사고 활동을 담당할 수 있다. 문법은 우리말에 대한 체계이다. 언어 속에는 그 언어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사회?문화적 기호로서 언중의 의식, 사고 방식, 문화가 스며들어 있다. 한국어에는 한국어를 사용하는 우리 민족 고유의 사고 방식과 문화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문장의 구조가 주어-목적어-서술어 순으로 이루어져 있거나, 문장 성분의 생략이 빈번하다는 것 등에서 우리 민족 고유의 사고 체계가 드러나는 것이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는 말이 공감을 얻는 것이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기를 꺼리는 문화, 대화에서 상황맥락적인 요소를 중시하는 경향 등이 우리말에 은연중에 포함되어 있다. 문법 영역이 이러한 사회?문화적 기호를 읽어내는 활동을 맡기에 적절하다. 왜냐하면 문법은 우리말 자체를 그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문법 교육이 단순히 비문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과정이 아니며, 문법이 더 고차원적인 국어 능력을 다루는 데에 유용할 수 있음을 반증한다. 이와 같이 사회?문화적 기호를 문법 교육과 결부시킨다면 살아있는 언어를 다루는 생활 속의 문법 교육이 가느 상황에서든 언어를 사용한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때, 대중 앞에서 연설을 할 때에도 언어를 사용하고, 심지어 혼자 있을 때에도 머리 속에서 언어의 표상 체계로 사고한다. 문법은 언어를 그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실제 언어 생활과 맞닿아 있다. 문법을 체계화 하는 문법적 개념과 지식을 단순히 교사가 제시하고 학생이 그것을 암기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담화와 텍스트를 통해서 국어학의 개념과 지식을 추출하는 활동이 가능하다. 학습자는 언어 현상 속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는 활동을 통해 국어학의 개념과 지식을 내면화한다. 궁극적으로는 학습자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학습은 방법적인 측면에서 접근한 것으로 종래의 지루하고 따분한 수업 방식을 개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언어 현상에 대한 탐구를 통해서 국어학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문제 해결력을 신장함으로써 교육적인 효과를 기할 수 있는 것이다.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앞서 제시한 문법 교육의 두 가지 가능성을 통해서 문법 교육이 사고력 신장이라는 측면에서 국어 교육의 목표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어 교과의 다른 하위 영역인 언어 사용 영역과 문학 영역은 국어 지식 영역과 함께 단순히 언어 사용 기능의 신장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국어 사용 능력’의 신장이라는 목표 하에서 그 내용 체계가 구성되어 있다. 언어 사용 기능의 신장은 언어 사용의 하위 기능과 전략을 알고 이를 상황맥락과 상관없이 습관적으로 쓸 수 있을 정도로 능숙해지는 것을 목표로 삼지만, 언어 사용 능력은 기능과 전략을 사용 상황의 맥락을 고려하여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이 그 목표이다. 그러므로 언어 사용 능력은 다양한 상황에서 언어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사람의 심리적인 측면이 강조된다. 즉, 개인의 사고력이 중요해 지는 것이다. 언어 사용 능력의 신장은 곧 사고력의 신장이라고 할 수 있다. 문법 교육은 국어학 개념을 탐구하고 실제 생활 속에서있다.
들어가며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교육행정이 오늘날 추구해야할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는 논문이다. 기존의 패러다임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이 논문에서는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이상적으로 여겨지는 패러다임을 모색한 뒤 이 새롭고 이상적인 패러다임에 대해서 여러 하위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다.우선 이 논문의 개략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1부에서는 앞으로 변화될 미래의 모습을 거시적으로 살핀 뒤 이를 각각 보다 구체적인 양상들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2부에서는 이렇게 변화하게 될 미래사회에 부응하는 교육의 모습과 교육행정을 그 특성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본격적으로 3부에서는 앞서 2부에서 논의했던 우리의 이상적인 교육과 교육행정의 모습에 비추어 현재, 즉 기존의 교육행정의 패러다임을 다각적인 측면에서 비판하고 있다. 요지는 기존의 교육행정의 패러다임이 획일적이고 권위주의적이며 외형을 중시하여 결과만을 중요시하는 풍토가 만연하고, 비합리적인 동시에 윤리적으로 미성숙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다각적인 측면에서의 비판을 토대로 4부에서는 우리가 2부에서 논의했었던 이상적인 교육의 모습과 교육조직을 위하여 새롭게 바뀌어야할 부분들을 서술함으로써 교육행정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단순한 추상적 논의가 아니라 ‘기본적 가치를 인식’함으로써 ‘실천적 지향’을 통해 ‘의도하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3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고 있다. 이러한 내용이 논문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 논문이 집필된 이유이기도 하다.지금까지 논문의 대략적인 내용을 살펴 보았다. 이제부터 이 논문을 읽고 느끼게 된 점과 나름대로의 나의 견해,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교육행정을 나의 경험으로부터 이끌어 내어 서술해보고자 한다.들어와서현대 사회는 ‘눈 깜짝할 사이에 세상이 변했다’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순식간에 그것도 굉장한 폭과 넓이로 변화하고 있다. 연일 뉴스에 보도되는 과학?의학 기술의 발달 소식에 우리는 더욱 현대사회의 변화하는 모습을 체감하고 있다. 하지만 긍정적인는 복잡한 사회에서 외부의 환경에 탄력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학교조직... 어떻게 보면 평화로워 보이는 신성한 공간(마치 수도원이나 사찰처럼)인 듯 여겨지나 학교라는 공간이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성격을 띨 수 밖에 없는 속성을 감안한다면 외부상황에 비탄력적으로 대응하는 교육조직?행정은 문제점을 내포할 수 밖에 없다. 논문에서도 언급했듯이 기존의 교육행정의 패러다임이 권위적이고 획일적이며 윤리적으로 미성숙한 점도 바로 이러한 교육조직?행정의 비탄력적인 모습에 연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학교 현장의 교육조직의 권위적인 모습과 교육행정의 경직성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공감하는 바이다. 필자 역시 과거 적을 두었던 학교의 모습을 곰곰이 되돌이켜 생각해 보면 당시에는 지각하지 못했던 많은 문제점들이 떠오르곤 한다.중학교 매주 월요일 아침 전체 조회시간. 학생 선도부장의 터질듯한 구령에 차렷, 열중 쉬엇을 번갈아 가며 높은 단 위에 서 계시는 교장선생님께 인사를 하는 것으로 조회시간은 시작된다. 체육선생님 또는 생활지도 선생님은 학생들의 뒤에 서서 요령을 피우거나 주위가 산만한 학생들을 지적하여 벌을 세운다.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은 그렇게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계속되었다.사실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이 당시 학생들에게 교육적으로 어느 정도의 영향을 끼칠지를 지금의 관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지극히 미미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학생들 앞에서 군림하는 교장선생님의 모습이 아니라 학생들의 삶 속으로 직접 들어오신 교장선생님 모습이라면 어땠을까? 그러한 모습에서 무심결에 흘러 들은 한마디가 오히려 촌철살인이 되어 학생들의 인격적 감화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외형적인 효율성과 경직된 질서관계 강조는 그동안 교육조직?행정이 지녀왔던 가장 큰 문제인 것이다.굳게 닫혀 있는 교장실의 문과 학교 건물의 중앙 현관문으로는 학생출입이 엄격히 차단되어 있는 학교조직의 모습에서 학생들은 과연 어떠한 문화를 보고 배울 것인가? 단 한번도 학교의 주인이 되어본 경험을 갖지 못한 채 학생들은 학관은 오늘날 교육뿐 아니라 사회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다.논문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우리가 추구하는 교육행정과 조직은 조직 참여자가 그 조직 내에서 행복을 느끼고 자생적으로 교육력을 발휘하며 좋은 인간을 길러내는 데에 있다. 따라서 학교를 전문적 교육공동체화 하고 교사의 자율성을 인정하며 조직 운영을 기존의 공학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문화적으로 접근함과 동시에 지도성의 고도화를 주장한 것은 기존의 패러다임 문제점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그 대책을 다방면에서 모색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학교의 전문적 교육 공동체화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오늘날 학교의 교사들에게 기대하는 교사상은 교과의 지식을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미 교사의 지식 전달의 임무는 영상매체를 통해서(TV, 인터넷 강의 등) 상당량 분산되었다. 물론 전문적인 능력을 갖춘 교과지식의 전달자가 되어야 겠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이다. 오늘날 기대되는 교사의 모습은 스스로 교수-학습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이를 적극 해결해 나가기 위하여 문제해결적인 사고와 행동을 하는 전문가의 자질을 갖춘 교과 전문가로서의 교사이다.과거 학교조직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문제를 일으킨 요인을 국부적으로 제거하고나 대체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나 오늘날 학교 내부의 모습은 과거와 같지 않다. 어느 한 요인의 해결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단순성을 벗어나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문제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하지만 오히려 교사의 전문가적인 자질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교육현장의 문제점을 스스로 발견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일련의 대안과 절차를 마련하고 이를 알맞게 조치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은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전형적인 전문가의 모습이다. 단순히 학생 생활지도 측면만의 전문가적인 자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학습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학생들의 어려움을 파악하고 이에 대해 조치를 취하는 모습은 전문가다운 모습이다. 이미 교사가 전문적인 교육의 자질을 서도 교육, 특히 후학양성은 중요한 요소였다. 맹자의 ‘君子三樂’ 중에 ‘得天下英才 而敎育之’라는 구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스승에 대한 외경과 제자에 대한 의무감에 따라 교육은 자발적인 정서적 토대 위에서 이루어졌다.하지만 오늘날 교육의 모습은 이와 멀다. 복합적인 사회적 사회작용의 결과 과거 정서적 기초위에서 존립되었던 교육은 정서적 기반은 거의 허물어진 채 형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인력을 생산하는 학교의 역할이 강조되면서 교육조직?행정은 교사에게 정서적인 면에서 벗어나 경직된 관료제적인 양상을 띄게 만들었다. 오늘날 교실 붕괴의 현상이 딱 꼽아 어느 특정한 요인이라고 결론지을 수는 없으나 학교조직과 행정의 이러한 모습이 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학교조직?행정이 돌봄의 공동체를 기반으로 할 때 새로운 교육행정의 패러다임은 가능하다.교사의 자유화 문제는 심각하게, 그리고 주의깊게 다루어야 할 영역이다. 교사의 자유화란 주어진 교육과정 틀에 맞추어 위로부터의 명령하달식 교육체계에 따라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교사 스스로가 교육에 주체적으로 헌신하고, 반성하며 책임지고 보람을 느끼는 자유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하지만 이에는 많은 우려가 뒤따른다. 교사의 자유화가 곧 교사의 특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교사에게 수업의 재량권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인정된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일 수 있으나 필자가 경험해왔던 교사들의 모습 중에도 수업의 재량이라는 미명하에 매우 불성실한 수업이 존재했었다. 이러한 수업은 학습자들이 보다 먼저 파악한다. 그래서 내려지는 결론은 공교육의 불신이다. ‘현상유지’라는 전형적인 관료제의 폐단에서 벗어나지 못한 교육조직?행정은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경제원리가 교육의 영역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된 빌미를 제공하였다. 교사의 권위가 많이 추락된 오늘날 교사의 권위를 회복할 수 있는 방안은 전적으로 외부에서 주어지지 않는다. 그 대안은 바로 교사 스스로의 내부에서 찾아부여된 과도한 행정적인 업무는 교육의 질로도 직결된다. 충분한 교재 연구의 시간이 부족한 상황에서 과도한 행정 업무까지 맡게 될 경우 나타나는 부정적인 결과는 학생들, 즉 학습자들이 고스란히 짊어지게 된다.전문적 역량의 신장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교사의 전문적 역량을 육성하는데 중점을 둔다. 여기서 말하는 전문적 역량이란 좁은 의미의 개념으로써, 수업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문제점들을 파악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일련의 절차를 계획할 줄 알며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필자는 국어교육과 내에서 국어과 교육 연구라는 강의를 통해 교실 현장에서 국어 수업과 관련된 문제점을 발견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일련의 절차를 배우고 있다. 또한 다가오는 실습을 통해 그 이론적 방법들을 적용해보고 연구하는 과제를 부여받았다. 교사로써의 전문성이란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완성된다고 볼 수 있다. 교사의 정서적, 도덕적, 지적인 면만을 강조하는 것은 과거의 교사상이다. 현대는 이에 덧붙여 전문적인 역량을 갖춘 교사를 요구하고 있다.조직운영에 대해 문화적으로 접근하는 태도는 현대 문화의 흐름에도 부응한다고 본다. 과거 효율성과 외형적 결과를 중시하는 시대에서는 조직운영을 공학적으로 대했던 방식이 유효했다. 다만 이러한 방식이 오늘날 비판받는 이유는 현대 문화의 양상이 다변화로 가고 있고 교육조직내의 구성원들의 욕구가 다양화되어가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경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철학의 주류는 포스트 모더니즘이다. 권위의 해체와 다양한 소수 문화의 존중은 우리들의 삶과 사고 양식까지도 흔들어놓고 있다. 이제는 거대한 집단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이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시대는 지났다 의사 결정의 과정과 그에 대한 책임이 조직의 구성원들에게로 이양된 것이다. 따라서 교육조직?행정에 있어서도 의사결정의 과정에 참여하고 활동하는 구성원들의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일선의 교육현장에서는 과거의 행정적 모습이 자주 나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