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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상문] 언더그라운드 감상문
    신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신다.. 신이 벌을 내리실 거다...형제를 죽이는 것보다 더 잔인한 전쟁은 없다.이 말은 에미르 쿠스투리차가 2차 세계 대전에서부터 공산당의 집권, 그리고 보스니아 내전까지 유고의 민족이 겪은 비극적인 사연을 그린 라는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것이다. 그냥 듣기에는 너무도 당연한 이 말을, 이 말이 나오게된 배경을 자세히 살펴보고 이를 다시 듣는다면 이 영화를 통해서 느끼고 생각했던 모든 감정들을 정리해 주는 듯한 말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영화의 주인공은 대략 세 명 정도이다. 먼저 약간은 바보스럽고 저돌적으로 묘사되는 블래키이다. -이 사람을 보면서 풍차를 향해 질주하는 돈키호테가 떠올랐다. 이것은 전쟁이 일어나는 아비규환의 상황에서도 식사는 끝마쳐야 했고, 폭격에 전등이 떨어지면 감전의 위험따위는 상관없이 전기줄을 이빨로 물어뜯어야 했던 그의 모습으로 잘 뒷받침된다. 또 다른 주인공은 여배우 나탈리아다. 그녀는 몸이 불편한 그녀의 동생 때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블래키에서 프란츠로, 다시 불래키에게서 마르코로 그녀의 사랑을 움직인다. 나머지 한 명의 주인공은 당시의 사람들은 영웅으로 불렀을지도 모르는 마르코이다. 마르코는 절친한 그의 친구인 블래키에게서 나탈리아를 빼앗고, 그를 속여 지하 공장 속에서 세상과 단절된 채로 20여 년을 살게 하면서, 여기서 얻어지는 수입으로 부유하고 풍족한 삶을 산다.이러한 세 명의 주인공과 2차 세계 대전에서부터 보스니아 내전까지라는 시간적·역사적인 배경, 그리고 유고슬라비아의 베오그라드 도시라는 공간적 배경으로 감독은 라는 독특한 영화를 만들어 냈다.영화를 보면서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실제 영상 장면에 영화의 인물들을 컴퓨터로 합성한 장면이었다. 이를 보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김소영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말하자면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접합에서 새로운 영화적 현실감을 구성하고 있다. 상당수의 사람들을 감동케도 하고 격분시키기도 했던 에서 가장 오해(혹은 이해)를 불러일으키는 부분이 바로 역사적 사실과 영화적 현실을 뒤섞어 이제는 사라진 유고의 과거와 현재에 개입하는 방식인 듯하다. {) http://my.netian.com/%7Evincenty/review.htm#4이는 허구성을 내포하고 있는 영화에 컴퓨터 그래픽으로서 실제적인 영상을 영화의 한 장면으로 보여줌으로서, 이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마치 영화를 진실로 믿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장치로 하여금 거짓과 진실의 경계가 모호하게 된다. 이러한 부분은 이 영화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이러한 부분로서 또 다른 것을 살펴보면, 다음의 것이 있다. 마르코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블래키와 그의 정부 나탈리아의 강제결혼식에서 나탈리아와 키스를 하려다 블래키에게 들킨다. 이로 인해 마르코는 블래키를 등에 태우고 말처럼 기는 모습을 나타낸다.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사이로 보였지만, 이것을 보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마르코는 독일군에게 붙잡힌 블래키를 구해주기도 한다. 무엇이 진실일까? 절친한 사이일까? 아닐까?이러한 거짓과 진실의 경계 와해라는 연장선상에서 영화를 바라보면, 다음의 것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마르코는 독일군에게서 구해준 블래키를 비롯한 자신의 동생 외의 수십 명의 사람들을 지하실로 몰아넣고 침략자 독일을 물리치는 데 사용될 군수 물자를 만들라고 종용한다. 자신은 그 물자를 자국의 저항군에게 전달하는 책임을 맡겠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지하공장의 사람들은 대독일 전쟁이 끝난지도 모른 채 외부와는 철저히 격리되어 20여 년을 지하실에서 자신의 조국을 위해, 하지만 실제로는 마르코 개인의 부를 위해 일하게 된다. 이는 마치 2차 세계 대전 이후 공산 치하 동구권 나라들이 두터운 철의 장막으로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했던 것과 비슷하다.이러한 상황 하에서 지하에 오랫동안 갇혀 있었던 사람들에겐 어떤 것이 진실일까? 그들에게는 침략자 독일을 물리치기 위해 군수물자를 만들고 있는 것이 진실로 받아들여질까, 아니면 20여 년이 흐른 당시의 민족 간의 반목을 진실로 받아들일까? 우리가 보기에는 후자가 진실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 직접 놓인 이반을 보라. 자신의 원숭이 소니 때문에 지하세계에서 밖으로 나온 이반은 당시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사실을 알았지만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에게는 어떤 것이 진실일까?한편, 우리는 여기에서 동물들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 이 영화는 영화의 거의 모든 장면에서 동물들을 보여주고 있고, 그들의 역할은 크다고 할 수 있다. 먼저, 20여 년의 격리된 지하세계가 지상과 연결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침팬지의 실수로 지하세계에서 대포가 발사되어 지상세계와 연결통로가 생기는데 있다. 이를 계기로 독일군과의 전쟁에 직접 참여하고 싶은 블래키와 그의 아들은 전쟁이 끝난지도 모른채 지상세계로 올라오고, 이들과 함께 이반의 원숭이 소니가 지상으로 올라오게 됨에 따라 이반도 이를 쫓아 지상으로 올라와 지하의 세계가 거짓임을 알게 된다. 침팬지의 실수로 인해 비로소 지상세계와 지하세계의 연결이 이루어 진 것이다.또한, 감독은 영화의 거의 첫 부분에서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폭격이 개시되고 이로서 무너지는 동물원 속의 혼란스러움과 쓰러져 죽는 동물들을 보여줌으로써, 인간들이 폭격으로 인해 죽는 것보다 더한 전쟁의 잔인성을 부각시켰다고 생각한다. 이는 인간들 사이의 불협화음으로 인한 전쟁으로 아무런 죄도 없는 동물들의 희생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는 영화 속의 거짓과 진실의 경계 와해라는 측면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http://my.dreamwiz.com/nonbeing/cinema/520/528.htm솔직히 이 표현은 다른 평론가(평론가 이세룡)의 글을 보고 따온 표현이다. 하지만, 이는 내가 영화를 봤을 때의 느낌을 어떻게 설명할지 모랐던 찰나에 내가 느낀 생각을 표현해 주는 표현이라 여겨 인용했다그리고 이제 이것은 다시 이 글의 처음 부분과 연결될 것이다. 마치 언더그라운드의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감독이 현실의 세계와 사후의 세계를 물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연결했듯이, 이 글의 처음에 제시된 마르코가 한 말은 거짓과 진실의 경계 와해라는 측면과 연결될 것이다.처음에 제시된 마르코가 한 말은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전개된 것이다. 지상 세계와 격리된 채 지하에서 20여 년을 살아온 마르코의 동생 이반은 원숭이에 의해 지상으로 나오게 됨으로서 자신의 형이 그동안 자신과 지하세계의 사람들에게 속인 거짓말을 알게 된다. 형에 대한 배신감으로 둘러 쌓인 이반은 때마침 형인 마르코를 만나게 되고, 형을 지팡이로 마구 때리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르코가 동생에게 한 말이 이것인 것이다.신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신다.. 신이 벌을 내리실 거다...형제를 죽이는 것보다 더 잔인한 전쟁은 없다.마르코 자기 자신은 20여 년이나 절친한 친구와 동생, 그리고 그 이외의 사람들을 속였으면서, 이를 알고 자신을 질타하는 동생에게 그가 할 수 있는 소리란 신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신다. 신이 벌을 내리실 것이다 라는 말이다. 신이 누가 무엇을 하는 것을 보고 어떻게 벌을 내린다는 말인가?이 장면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고,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결국 내린 결론이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다의적인 표현이다 라는 것이다. 즉, 먼저 이는 형인 자신을 때리는 이반에게 형을 때려서는 안 된다는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자신이 지금까지 벌였던 행위에 대한 반성으로 자신이 신에게 벌을 받을 것이라는 의미로 말한 것일 수도 있겠다. 이와 같은 연장선상에서 형제를 죽이는 것보다 더 잔인한 전쟁은 없다. 라는 말은 형을 때려서 죽게 만들지 말라는 표현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독후감/창작| 2003.11.04| 5페이지| 1,000원| 조회(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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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 ] IMF가 가정생활에 미친 영향
    IMF! 불청객의 선물(-_-;;)0042002고은지0042022김지현0042032박미선0042044변혜성0042068이원주0042075임지선0042096최서윤0042102황은숙♧목차♧I. 들어가며Ⅱ. IMF 관리 경제체제 무엇인가?1. IMF(국제통화기금)란2. IMF 구제금융이란 무엇인가3. IMF의 구제금융 지원 배경Ⅲ. 본론1. IMF 원인2. IMF 체제 하에서의 경제상황3. 경제위기로 인한 가정내의 변화1) 가정 경제적인 면2) 결혼과 생활3)가족내의 변화Ⅳ. 나가며Ⅰ. 들어가며1997년 11월의 한국의 외환위기는 한국경제의 근간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은 사건이었다. 한국에서 발생한 경제위기는 경기침체, 경상수지 적자 등 실물경제의 악화뿐만 아니라 동남아 외환위기, 국제 금융자본의 신흥시장 이탈 등 대외적인 환경요인, 그리고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 부족과 국민의 거품 소비 등 총체적인 요인의 결정체였다. 그리고 한국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IMF를 선택했고 한국 국민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IMF식 처방을 수용하게 되었다. IMF 체제와 함께 불어닥친 경제 위기는 곧바로 우리의 가정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뉴스나 신문에서는 연일 크고 작은 기업들의 부도사태가 터져 나오고 각 기업의 구조조정과 인원감축으로 인해 우리의 아버지들은 길거리로, 공원으로 내몰려 졌다. 그로 인해 많은 가정이 해체되고 피해를 입었으며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을 수 없어 나날이 한숨지었다. 그리고 하루하루 올라가는 환율과 물가상승은 우리 어머니들의 주름살을 하나둘 더 늘게 했으며 무엇인지 조차 잘 모르는 어린아이들조차 IMF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 정도로 심각한 혼란기였다.5년이 지난 지금, 한국인들에게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했던 IMF라는 말은 이제 서서히 잊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IMF 체제가 우리 사회 전반에 큰 변화를 초래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외환위기는 금융불안으로 이어졌고 이것은 실물경제로 그 영향이 파급되었으며, 실업 등을 통해 개인생활에도 다.」Ⅲ. 본론1. IMF 원인1) 고비용·저효율의 경제구조) 변형윤 외(2001), IMF 체제와 한국산업경제. 광주과학기술원, p. 490년대 들어 한국경제에서 기업들이 외향적인 양적 확대를 지속해 왔으나 질적으로는 고비용·저효율의 경제구조가 고착화되었다. 즉, 고지가, 고임금, 고금리, 고물류비, 고규제의 소위 '5고'로 대표되는 경제의 저효율성과 정치의 경제발목잡기로 인해 제조업 기반이 급속히 위축되고 수익성은 극도로 나빠졌다. 이로 인해 외국인 투자유입은 침체 일로를 걷게 되2)기업의 혁신노력 지연과 수익성의 저하힌국의 기업은 신기술개발이나 시장개척 등 기업의 자생적인 성장노력에 의하기보다는 정치권과 결탁한 외적 성장에 치중하거나 국제적 경쟁을 통한 핵심역량의 개발 및 강화에 소홀하였다. 또한 기업의 본원적인 활동이라 할 수 있는 생산과 판매를 통한 수익성의 확보보다는 부동산투기, 인사합병을 통한 기업확장에 치중함으로써 기업혁신노력을 미루었다.적절하지 못한 시장전략과 경기의 부조로 수익성이 급속히 떨어져 실제 국내대기업의 평균수익율은 95년 0.1%∼0.2%'에 불과하였고 96년에는 되로 -0.1%에 이르렀다. 기업은 기본적으로 수익을 실현함으로써 생존·성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인데, 국내 기업들은 이러한 기반을 쌓지 않고 자력갱생의 길보다는 정경유착이나 외형성장을 통한 차입경영에 명맥을 걸었던 것이다.) 서종규(1998), IMF 관리체제의 전개과정과 주요 내용에 대한 고찰, 생산성논집 12호 2집, p. 420.(단위 : 억원, 96년말 기준) 자료: 은행감독원그룹명부채자기자본부채비율(%)삼 성현 대대 우LG한 진기 아쌍 용SK한 화대 림금 호두 산진 로롯 데삼 미370,436433,193263,832287,656117,877118,909127,014180,40397,18845,86561,17955,94038,95250,98625,933138,12898,64478,22438,02821,16822,71031,05846,86312,48912,06812 의해서 실업률이 크게 증가했다. 대졸 신규채용은 축소되고 재취업을 위한 교육이 활발해졌다. 환율의 불안은 물가불안으로 연결되었다. 공공요금과 적자부문에 대한 요금인상, 대중교통요금 인상이 이어졌다. 실업대란과 임금인상 억제로 소득이 감소되고 세금부담 증가와 高物價로 명목소득이 축소되었다. 외국여행, 유학등이 위축되었다.③ 금융시장·기업조직부실금융에 대한 구조조정이 일어남에 따라서, 양호한 금융기관에서 부실한 금융기관을 인수하거나 합병하는 M&A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부실금융기관의 부도가 확산됐으며, 이는 예금자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대출금리 18~20%로 고금리 시대가 되었으며, 대출이 어려워졌다. 자금회전율이 떨어져 시중 자금난이 가중되었다.기업 조직에서는 조직을 대폭 감축하여 슬림화했으며 정리해고와 명예퇴직등의 인원의 대규모 정리가 추진도었다. 불요불급한 투자를 축소 또는 종결했으며 신규사업 및 대외투자를 연기했다. 또한 수익성 위주의 투자가 이루어졌다.3. 경제위기로 인한 가정내의 변화1) 가정 경제적인 면①IMF 관리체제하의 가족경제지표 현황IMF라는 사회적 환경으로 인한 실업의 확대와 소득의 감소로 이어지는 경제적 환경의 변화는 가정생활에 경제적 위기로서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곽인숙, 「경제적 위기가 가정생활에 미찬 영향: IMF관리체제 전후 비교」『한국가정관리학학회』제 17권 1호 (1999년 3월)그리고 이에 대한 가정의 일차적인 반응은 소비 지출을 줄이는 것이었다. 사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가계소비지출이 크게 위축되어 97년 4/4분기 처음 감소세를 보인 이후 98년 1/4분기 8.8%, 2/4분기 13.2%, 3/4분기에는 16.8%로 감소폭이 더욱 커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http://soc.korea.ac.kr/data/k6.hwp지출비목IMF이전IMF이후증감률식료품비주식외식3.082.362.881.59-0.20-0.77주거비집세주택수리관리비1.341.221.301.10-0.04-0.12피복비내의/양말겉옷세탁비2.462.772원200~300만원300만원이상잔체 평균IMF이전60,600원95,840원168,600원222,600원170,700원'98.256.330원71.150원82.660원99.760원76.130원'99.759.797원79.315원93.334원108.486원83.069원) 한국소비자보호원, 『IMF체제 전후의 소비의식 및 행태 보고서』(한국소비자보호원,1999.9)④ IMF식 신종 화폐 -할인쿠폰과 마일리지 제도경제 불황이 심해지면서 쿠폰은 하나둘씩 만들어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쿠폰을 사용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쿠폰북이 있다. 이것은 1997년 "쿠폰클럽"에서 처음 선을 보였고, 서울을 비롯한 부산, 대구, 대전, 광주 등 지방 주요 도시에서도 발행되고 있다. 이는 일반인들에게는 할인이나 무료 혜택을 가져다 주면서 가맹점에게는 광고나 매출액의 증가라는 효과를 가져다 주어 일석이조의 효과를 주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IMF충격, 그 이후』(삼성경제 연구소,1998).쿠폰 뿐아니라 마일지지 제도를 이용하는 사람도 많이 늘어났다. 마일지지 제도는 처음 항공사가 실시하였지만, 현재는 소규모 점포에서도 실시하는 등 일반화되어 있다. 이는 IMF이전에는 고객마일리지 카드를 발급받고도 이용하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던 것에 비해, IMF이후 소비자들이 이를 적극 이용하는 실태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일리지 이용에 관한 실태는 다음의 두 신문기사가 잘 반영하여 주고 있다.아직도 현금주고 물건 사세요?◎환불·멀티기능 등 알짜 신용카드 수두룩이용액에 따라 포인트가 적립돼 일정액을 현금으로 돌려받는 환불카드나 멀티카드가 IMF시대에 알뜰소비의 수단으로 떠오르고 있다. 「IMF형 카드」로 통하는 이러한 카드를 잘 이용하면 생필품 구입에서부터 여행 외식산업 등 모든 소비분야에서 할인 혜택을 볼 수 있어 실속파 소비자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고 있다.[한국일보] 1998-08-27 (경제) 기획.연재 26면 1437자마일리지제도 대형 슈퍼 효자 노릇 발생하고 시간에 쫓기다 보니 형식적인 통과의례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셀 수 없이 많지만 결국은 혼주와 신랑­신부의 의식문제로 귀결된다. 개선내용을 보면 당장은 초라해 보일지 모르나 궁극적으로 모두에게 좋은 방법이다. 우선 결혼식을 사회적인 행사보다는 가족­친지를 중심으로 한 사적인 행사로 바꿀 필요가 있다. 신랑­신부측 각 50∼1백명이내의 하객을 초청해 형식적인 축하보다는 가족과 친지의 진정한 축복속에서 출발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 비용절약과 함께 가족간의 유대를 다지는 뜻깊은 행사가 될 수 있다.과다혼수의 핵심인 예단은 범위를 당사자 부모로 한정하고 일상적으로 요긴하게 쓰이는 물품을 선물한다. 예식장소도 문제. 외국의 경우처럼 자택을 활용하거나 종교기관,공공기관 등 무료­실비예식장을 적극 활용한다. 평일이나 야간예식도 고려해볼 만하다. 살림은 필수적인 살림살이만 구입하고 혼인전 살림이나 중고제품을 쓴다. 결혼선배들도 「살면서 하나씩 구입하는 행복」에 대해 이야기해준다.민감한 문제중 하나가 바로 축의금이다. 친분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업무상 관계라면 고민이 되기 마련. 정부기관의 경우 장관급 5만원,실국장 3만원,과장급 2만원,사무관이하 1만원의 기준에 맞춰 거품을 뺀 축의금을 내야 결혼식규모도 그만큼 작아지고 실속을 찾게 된다. 사진촬영이나 절값주는 행사로 퇴색한 폐백도 간소하게 가족­친지끼리 인사를 나누는 행사로 바꿀 필요가 있다. [세계일보] 1998-11-09 (생활/여성) 기획.연재 17면 1639자⇒ IMF 체제 이후 가장 먼저 빼내야 할 혼례 거품 항목으로 84.8%가 '예물. 예단'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외에 약혼식, 피로연, 야외촬영, 함들이 순으로 혼례거품 항목으로 인식하였는데 이들 항목은 IMF초기에도 높은 비율로 나타났다. 상대적으로 신혼여행, 살림마련 등은 혼례 거품이 적은 항목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이들 항목은 IMF 이후 해외 신혼 여행 및 사치스런 혼례 자제 분위기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② 시집살이가 좋다?) 『다.
    사회과학| 2002.12.25| 29페이지| 1,000원| 조회(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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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사기] 한국민속박물관 답사기
    한국민속박물관제목: 조선시대를 중심으로본 우리의 주거문화과목명: 한국 민중 생활사담당교수: 고승희 교수님소속대학: 사범대학학과: 사회생활학과학번: 0042102이름: 황은숙제출일: 2000년 11월 29일2000년 11월 9일 나는 친구들과 함께 경복궁 안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에 갔다. 우리들이 박물관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를 반기면 야외전시관에 서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장승과 솟대였다. 장승과 솟대는 예부터 마을 어귀에서 있으면서 마을을 지켜주며 마을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반겨주는 구실을 하던 것으로, 이것으로 인하여 처음부터 친근한 마음을 가지고 박물관에 들어설 수 있었다.국립민속박물관은 크게 종합전시, 기획전시, 옥외전시 등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이중에서 내가 본 것은 종합전시와 옥외전시였다. 종합전시관은 상설전시관으로 제1전시관 ,제2전시관, 제3전시관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제1전시관은 한민족생활사실로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생활사측면을 역사적으로 배치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선사시대의 각종 생활도구와 청동기시대의 생활상, 그리고 고구려의 생활문화 및 백제의 제사유적과 신라의왕경도, 가야의 야철 공방, 고려의 인쇄 청자문화, 마지막으로 조선의 한글창제와 과학기술 등, 정신세계와 관련된 자료들을 복원, 전시하고 있었다. 제2전시관은 생산민속과 생활문물 등 물질문화와 관련된 생업자료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우리들은 우리조상들의 농경문화와 수렵과 어로, 그리고 수공예 및 의식주 생활 등을 엿볼 수 있었다. 특히, 이 부분은 수업시간에 배운 부분이 대부분이어서 이해가 쉬웠고 더 많은 흥미가 가는 곳이기도 하였다. 제3전시관은 출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일생을 체계적으로 전시한 곳으로, 앞으로 우리들이 수업시간에 배울 부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눈을 더 크게 뜨고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그리고 인생의례 사이사이에는 놀이 모습과 악기, 문방구류, 화폐, 민화 그리고 주막과 굿청 교통수단 등이 모형으로 전시되고 있었다.이중에서 나는 주생고, 자연을 파헤쳐 그곳에 높은 건물을 지은 것이 서양인이라면, 자연한가운데에 소박하게 지은 것은 우리 선조들의 집이다. 이러한 집 은 순수 우리말이며 이에 대한 한자어는 주택으로 주(主)와 집 택(宅)의 합성어라고 한다. 이는 주거와는 구별된다. 즉, 주택이 건물 자체만을 뜻한다면 주거는 집에서 이루어지는 생활전체를 포함하는 것이다.우리의 전통적인 주거 형태는 사회제도(신분계급)와 각 지역의 기후 및 생활양식 등에 의하여 변화. 발전되어 왔다. 기후 및 생활양식에 의해서는 홑집, 겹집, 그리고 양통집으로 구분되는데 홑집은 퇴칸을 제외한 평면이 한 줄로 늘어선 집을 말하며 주로 따뜻한 지방에 분포한다고 한다. 그리고 겹집은 중앙에 대청을 두고 양쪽에 구들을 배치한 집으로 주로 추운 지방에 분포한다고 한다고 하지만 특이하게도 우리들은 이를 제주도의 살림집에서도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양통집은 겹집과 비슷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기둥을 정확히 세 줄로 배치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요인인 사회신분계급에 의해서는 서민주택, 중류주택, 상류주택 등으로 나뉘고 그 크기나 재료 등은 계급간에 엄격히 제한하였다고 한다. 그 자세한 내용은 잠시 후에 살펴보기로 한다.위에서 간략하게 정리한 것들은 대부분 조선시대의 주택으로 이것은 하루아침에 성립된 것이 아니다. 오랜 옛날부터 꾸준히 변화, 발전되어 온 것들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한국주거문화의 변천사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겠다.구석기시대의 사람들은 주로 동굴이나 바위 밑 따위에 보금자리를 잡았다. 이후에, 사람들이 노동을 통해서 집이란 것을 짓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시대로 들어서면서부터이다. 하지만, 이는 대부분 깊숙한 움집이나 반 움집의 형태로 매우 불편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당시에는 획기적이었던 것이었겠지만..그러다가 청동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농사활동이 활발해지고 정착생활도 자리잡게 되면서 두 칸 짜리 집을 짓기도 하고, 벽을 돌로 쌓기도 했다. 이러다 철기시대가 들어서면서부터는 살림집이 움집에서 점차 지상 건물로 년에 시작된 이른바 새마을운동 으로 큰 변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그 내용은 한국민중생활사 라는 과목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다루지 않기로 했다.) 이렇게 우리조상들은 살면서 불편했던 점들은 고쳐나가면서 우리의 주거문화를 발전시켜왔다. 더욱이 우리의 옛집들을 현대에 들어 분석해 본 결과 그렇게 과학적일 수 없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예를 들어 흙벽 같은 경우 그것은 우리의 기후에도 딱 맞고 건강에도 좋다고 한다.앞부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전통적인 주거형태를 구분하는 요인으로는 사회신분계급이 있다. 우리의 전통사회는 신분제 사회였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항상 특권계급들은 그렇지 않은 계급들과 자신들을 엄격히 구분하려 했으니 말이다.먼저, 상류주택이라 함은 사회적 지위와 재력을 고루 갖추었던 조선시대 상류층의 솟을대문이 있는 주택을 말한다. 이들 상류주택의 공간은 크게 안채와 사랑채. 부속채. 행랑채 등으로 이루어진 주생활 공간과 신상(神上)등의 위패(位牌)를 모신 사당공간으로 나누어진다고 한다. 또한, 상류주택은 경제적 여유가 있었던 사람들이 살았던 집이므로 주택의 장식에도 섬세하게 신경을 써서 대개의 경우 상류주택은 주택의 기능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예술적인 가치도 높은 집들이라고 한다.이에 비해, 중 하류층의 일반서민들이 살았던 집은 민가 라고 부른다. 흔히들 민가라 하면 초가지붕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초가지붕은 겨울에는 열을 뺏기지 않고, 여름에는 강렬한 태양열을 차단해 주며 또한 구하기 쉬운 재료로 만들어질 뿐 더러,비도 잘 스며들지 않아서 지붕으로서는 안성맞춤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초가지붕은 가장 널리 서민주택의 지붕으로 사용돼온 것이다. 하지만, 모든 민가들이 초가지붕을 한 것은 아니다. 각 지방의 지형적. 기후적 특색에 따라 그 지방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즉, 평야지대에는 초가지붕이 많고, 평평하고 얇은 돌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곳에는 청석집이 많으며다. 시대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 있다면 변하지 않는 것도 있는 것일까?지금까지는 집의 전체적인 특징 및 변천사에 대해 알아봤다면 이제부터는 집안 구조물의 특징들을 세세히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지금부터 살펴볼 구조물에는 민중 생활사에서는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것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후기로 들어서면서부터는 민중들의 생활이 나아지고, 또 부농들도 생기면서 일반백성들 중에서도 경제적으로 풍요로워 고급스런 집에서 사는 경우도 많았으므로 이를 민중생활사의 일부분으로 생각하고 살펴보기로 하겠다.우선, 안채와 그의 일부분인 안방에 대해서 살펴보면, 안채는 집안의 주인마님을 비롯한 여성들의 공간으로서 그의 일부분인 안방은 내외법에 따라 직계존비속 이외의 남자들은 출입이 금지되었던 곳이다. 또한 안채도 대문으로부터 가장 안쪽인 북쪽에 위치하였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이 여성들의 사회생활을 꺼려하여 남편이나 친척이외의 다른 남자들은 만나지 못하도록 하는 등 여성들의 외부 출입을 제한하였던 당시 사회상을 반영한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당대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겠지.. 이렇듯 모든 문화에는 그 시대의 관습이 배어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안방은 안주인의 일상 거처실인 만큼 여성의 가사노동 -바느질, 다듬이질-위주의 공간을 구성하였다. 그리하여 가구류도 주로 의복과 침구류 등을 보관할 수 있는 수납용 가구들- 반닫이 또는 고리짝-이 놓였다. 하지만, 여기서는 출산. 임종 등 집안의 중요한 행사가 이루어지는 실내공간 중에서도 상징적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안채와 안방이 여성들을 위한 공간이었다면, 사랑방과 사랑채는 남성들을 위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본래 사랑방은 안채와 뒤로 연결되어 있으나 외관상으로는 내외의 구분을 뚜렷이 하였다. 이런 사랑채의 기능은 다양하다. 우선 외부로부터 손님이 오실 경우 사랑방은 숙식을 대접하는 장소가 되고 또한 집안의 어른들이 어린 자녀에게 학문과 교양은 교육하는 장는 **건넌방이 사랑방의 역할을 대신 하였다.건넌방과 안방이 함께 있는 경우에는 주로 대청이 그 사이에 위치하여 방으로 출입하는 전실(前室)의 기능을 하였다. 대청은 또한 여름에는 시원한 거실로 쓰였으며, 집안의 큰일이 있을 때에는 행사를 치르는 공간으로도 쓰였다. 대청의 바닥은 나무로 만들었으며,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장으로 그 사이는 회반죽으로 메웠다.*누마루...대개 사랑방에 이어서 건축되며 마루 주변을 따라 난간에 설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는 높여져 있어 전망하기 좋기 때문에 여름을 한가롭고 시원하게 보낼 수 있는 장소이다.**건넌방...건넌방은 사랑방과 비슷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사랑방은 안방이 있는 건물과 떨어져 존재하고 건넌방은 안방과 같은 건물에 있다는 것이다.앞에서 설명한 안채 및 안방이 주로 여성들의 공간이라면 여성들만의 공간은 부엌이다. 지금의 부엌은 다른 공간들과는 확실히 구분되어 부엌으로서의 기능을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었던 것은 아니다. 선사시대의 부엌은 집 가운데에 구덩이를 파고 거기서 불을 떼어 난방과 조리의 기능을 하였다. 청동기와 초기철기시대가 오면서 집의 평면은 원형에서 네모 내지 긴 네모꼴로 바뀌고 부엌은 벽쪽으로 비켜났다. 그리고 삼국시대에 들어오면서 부엌은 거의 완전한 모양새를 갖추어 부잣집에서는 부엌을 독채로서 갖기도 하였다.한편, 부엌의 기능도 사랑방처럼 다양하다. 우선 가장 기본적으로 부엌은 아궁이에 불을 떼어 조리와 남방의 기능이 한꺼번에 이루어졌고, 며느리나 하녀들이 밥을 먹을 수 있는 공간이 되기도 하였으며 또한 음식이나 여러 생활용품들을 저장. 보관하는 곳간의 역할도 하였다. 그리고 며느리가 고된 시집살이의 한을 풀 수 있었던 곳도 바로 부엌이었다. 이렇게 부엌은 여성에게 가사일을 강요하기도(?) 했지만 여성들의 한을 풀어주기도 했으니 참 아이러니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부엌의 아궁이에서 불을 떼고 나오는 연기는 굴뚝을 통해 나간다. 우리의 굴뚝은 서양의 그것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한다. 즉을까?
    인문/어학| 2002.12.10| 6페이지| 1,000원| 조회(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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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미행정] 한미행전협정
    1.1.1 머리말한국사 과제물로 인물과 사건 등 역사와 관련된 것을 주제로 선정하여 제출하게 되었을 때 과연 어떤 것을 주제로 할 지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읽게된 한겨레21이라는 시사주간지에서 베트남전쟁의 참전이 잘못된 한미행정협정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는 기사를 읽게 되었다. 과연 베트남전쟁의 참전과 한미행정협정이 무슨 관련성이 있을까라는 호기심에서 조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최근에 매향리 사건이나 주한미군의 오폐수 무단방류로 인해 반미감정이 고조되는 한편 한미행정협정의 조속한 개정이 요구되고 있는 현실에서 최초로 해외파병을 하게 된 베트남전쟁을 통해 한미행정협정에 대해 조사해 보고 앞으로의 개선방안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2.1.1 베트남전쟁의 발단1964년 8월 4일 오전, 미국 대통령 존슨은 북베트남 통킹만 밖 공해상을 순찰중이던 미 구축함 매독스호가 북베트남 어뢰정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미국 항공모함 탑재기가 반격을 가했다 고 발표했다.다음날 미 공군은 북베트남 어뢰정 기지와 석유 저장소 4개소를 폭격하고 선박 25척을 격침시켰다. 존슨은 즉각 의회에 전쟁권 부여 를 요청하여 거의 만장일치로 가결시켰다. 이로써 공식적인 미-베트남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후에 이 사실은 뉴욕타임즈 가 월남전에 대한 미 국방성의 기밀문서를 폭로함으로써 완벽한 허위 조작된 것임이 밝혀졌다. 미군은 이미 1964년 2월 1일, 34알파작전 이라는 군사작전을 이미 수립해놓고 북베트남에 대한 철도, 교량 파괴, 연안시설 포격, 공습, 요인 납치 등 은밀한 공격을 진행시켰다. 그리고 7월 30일 밤, 해군 기습부대를 파견하여 통킹만에 있는 두 개의 섬을 공격한 후 8월 3일에 이르기까지 해군 구축함을 접근하여 연안을 포격하거나 비행기로 북베트남 영토를 폭격하였다. 북베트남 외무성은 이같은 사실을 즉각 비난했지만 미군은 이를 허위조작 이라고 역공했다. 따라서 8월 2일 밤 미국 구축함대가 통킹만에 접근했을 때 북베트남군은 이를 미 해군의 본토 상륙이나 공격작 알았던 이 전쟁이 미군의 지원을 받는 월남정부와 군의 부정부패로 인한 국민들의 불신과 당시 남베트남에 수립된 정부에 대한 국제사회의 냉대로 인해 장기전으로 치닫게 되었다.특히 1963년 가을, 사이공 거리에서 수천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티치 광 둑이라는 승력가 가부좌를 한 채 분신자결한 일은 미국 시민들을 전율케 했다. 자기 나라 군대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베트남에 가 있거니 생각하던 미국 시민들은, 비로소 미군이 무슨 짓을 하기에 저토록 처절한 저항를 불러일으키는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해방전선의 승리에 큰 기여를 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백인 대학생들의 참여하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이끄는 흑인 민권운동이 거세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들은 흑백인 간의 모든 법률적 관습적 차별의 철폐와 아울러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복지정책의 확대를 요구했다. 케네디가 빈곤의 추방을 선언하고 대대적인 사회복지 예산의 편성을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귀중한 예산이 베트남인의 자주적이고 정당한 요구와 염원을 말살하는 데로 흘러 가버리고, 영문도 모른 채 숱한 흑인들이 베트남의 정글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고 흑인 민권운동은 양심적 지식인들이 벌이고 있던 반전(反戰) 평화운동과 손잡았다.그러면서 수많은 반전시위가 일어나게 되었다. 심지어 미국의 많은 청년들의 징병기피현상에 이어 전선의 병사들마저 이탈하기 시작하였다.더욱이 미군의 잔혹한 전쟁행위에 대한 국제적 비난 때문에 미국은 외교적으로도 점차 고립되고 있었다.더 이상 병사들을 징병하기 힘들어지자 미국은 우방국으로부터의 협력을 구하였다.그러나 남베트남에 수립되엇던 바오다이 정권과 역대 군사정권이 과연 보호받을 만한 가치가 있을 만큼 민주주의를 실시하는 독립주권국가인지조차 의심스러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으로 참가했던 서방국가들은 개입을 거절하였다. 따라서 더 이상 단독으로 개입할 수 없었던 미국은 한국과 같은 매우 예속적인 나라들만에 병력 파견을 요청할 수 밖에 없었다.2.1.1 한국의 베 이면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당시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고 있던 한국은 양국이 군사위협을 당할 경우 자동 개입한다는 조항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군사협정상 미국에 예속되어 있던 터라 미국의 요청을 거부할 수 없었다.더구나 당시에는 미국과 맺었던 불평등한 조약인 대전협정, 마이어협정에 대한 협상과정 중이었다. 당시 한국의 파병이 절실한 미국은 협상 체결에 대한 다른 조건으로 한국군의 월남파병을 제시한 것이다.이리하여 건국이래 최초의 해외파병이 결정되었고 최초의 한국군의 월남파병은 1964년 9월 제1이동 외과병원 병력130명과 태권도 교관 10명의 파견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브라운 주미대사와 베트남 정부의 지원 요청을 받고, 1965년 1월 26일 국회의 동의를 얻어 1965년 2월 비둘기부대로 명명된 2,000여 명의 후방 군사원조 지원단의 파병으로 본격화되었다. 전투부대의 파병은 1965년 7월 2일 결정되어, 10월 9일 해병 청룡부대가, 10월 22일 육군 맹호부대가 베트남에 상륙하여 미국으로부터 전술 책임지역을 인수받았다. 이외도 군수지원 부대인 십자성부대, 군수물자수송을 담당한 백구부대 등이 파병되었다. 1966년 미국의 전투부대 추가파병 요청에 의해 국회의 논의를 거쳐 4월 16일 해산진부대가, 8월 15일 백마부대가 베트남에 상륙하였다. 이로써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하여 월남파병 국군은 4만 8천 여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1968년 5월부터 미국과 월맹사이에 휴전협정이 시작되었고 미국의 베트남 전쟁의 베트남화 계획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들의 군대가 1971년부터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1971년 11월 6일 한국과 베트남 정부는 베트남 주재 한국군을 단계적으로 철수하는데 합의하고 12월 청룡부대 1만 명이 철수를 필두로 1973년 3월까지 철수를 끝마쳤다. 한국군 파병은 8년 동안 총34만명이 참전해 총 5천여명의 전사자를 내었다.2.2.1 한미행정협정이란?그렇다면 한미행정협정이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한미행있어야만 효력을 발생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에 비해 약식조약은 국회의 비준 없이 행정부간의 서명만으로 발효되는 간단한 형식의 조약으로 미국에서 가장 많이 쓰이고 있다. 따라서, 한미행정협정 은 미국측의 입장에서 보면 타당한 용어지만, 한국의 입장에서는 국회의 비준절차를 거친 정식조약이기 때문에 한미행정협정 이 아니라 한미주둔군지위협정 이라 명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볼 수 있다.2.2.2 한미행정협정의 의의한미행정협정은 주한미군의 법적인 지위를 규정한 협정이다. 일반적으로 국제법상 외국군대는 주둔하는 나라의 법률질서에 따라야만 한다. 다만 외국군대는 주둔하는 나라에서 수행하는 특수한 임무의 효율적 수행을 위해 쌍방 법률의 범위 내에서 일정한 편의와 배려를 제공하게 되는데, 이것은 해당국가와 미군간에 행정협정(SOFA)의 체결로 보장된다. 이에 따라 맺어진 주한미군의 지위에 관한 협정이 바로 한미행정협정이다. 그런데 한미행정협정은 미군들에 대한 편의제공 차원을 넘어 한국의 주권을 상실할 정도로 다른 나라 협정에 비하여 지나치게 불평등하다.2.2.3 한미행정협정과 한미상호방위조약1953년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는 법적인 근거가 되는 조약이며, 한미행정협정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통해 주둔하게 된 미군의 법적인 지위를 규정하고 있다. 즉,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한미행정협정의 모법(母法)이다.2.2.4 한미행정협정의 체결 및 변천과정첫 번째로 1948년 8월 24일 맺어진 대한미국 대통령과 합중국 군대 사령관간에 체결된 과도기에 시행될 잠정적 군사안녕에 관한 행정협정 을 들 수 있다.이는 주한미군의 지위에 관한 최초의 협정이다. 미군정 시대에는 한국의 주권이 없었고, 1948년 8월 15일 남(한국)에 단독정부가 세워짐에 따라 주한미군의 법적인 지위문제가 제기되자 맺어진 협정이다. 한국정부가 미군의 기지 및 시설 사용권은 물론 일체의 권리를 포기하는 내용으로 된 협정은 1949년 미군의 (일시적인)철수로 종료되었다.그러나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하게 되었다. 한국정부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협상 때부터 주한미군의 지위에 관한 새로운 협정을 체결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미국은 대전협정, 마이어협정에 보장된 특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계속 회피하였다. 그런데 1950년대에 계속하여 발생한 주한미군의 범행과 만행으로 한국민들의 여론이 크게 악화되자 비로서 미국은 협상에 응하기 시작해 1966년 7월 9일 한미행정협정이 체결되어 같은해 10월 14일 국회의 비준절차를 거쳐 1967년 2월 9일 발효되었다.그러나 이 협정은 협상과정만 13년(53년-66년)이 걸렸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 협상 체결에 대한 조건으로 한국군의 월남파병과 한일협정 체결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더구나 1967년 한미행정협정은 그 내용에 있어서 이전의 대전협정이나 별다른 차이점이 없는, 국제법에서 가장 후진적으로 평가받는 미-이디오피아 협정과 유사한 치욕적인 협정이었다.2.2.5 현행 한미행정협정과 개정 협상1967년 한미행정협정에 대한 대대적인 과장선전과 6, 70년대를 지배했던 반공 반북 이데올로기로 인해 주한미군의 수많은 범죄와 탈선행위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눈과 귀가 가리워져 왔다. 그러다가 80년대 들어서면서 광범위하게 확산되기 시작한 반미의식 의 성장에 따라 미군의 각종 범죄행위가 커다란 사회문제로 부각되면서 한미행정협정은 또다시 도마 위에 올라 88년 12월부터 개정협상이 시작돼 2년여 만인 91년 1월 4일 개정서명 후 2월 1일 발효되었다. 이때도 미국은 주한미군에 대한 한국정부의 방위분담금 지원을 관철시켰다.91년 개정은 제22조 형사관할권 중 한국의 형사재판권 자동포기조항의 삭제, 제1차적 재판권 대상범죄의 확대 등 부분적인 진전에도 불구하고, 실제 한국측의 권리행사를 제한시키는 조항을 손대지 않음으로써 기존의 협정과 거의 변함없는 불평등구조를 온전히 보존시켰다. 사실상 대국민 사기극 에 불과한 것이다.92년 윤금이씨 살해사건, 95년 충무로 지하철 난동사건 등 연쇄적인 미군범죄로 인해 한미행정협정의 전면개정을 요구하는 국
    사회과학| 2002.12.09| 7페이지| 1,000원| 조회(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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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교육] 역사학의 동향과 역사교육 평가A좋아요
    목 차Ⅰ. 들어가는 말Ⅱ. 19세기 근대역사학과 역사교육Ⅲ. 20세기 새로운 역사학의 등장과 역사교육Ⅳ. 포스트 모더니즘과 역사교육Ⅴ. 맺음말Ⅰ. 들어가는 말{) 정선영 편,『역사교육의 이해』(삼지원,2001). p41일상 생활에서 우리는 보통 과거에 있었던 일 을 가리켜 역사라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역사라는 말의 의미는 간단하지 않다. 즉, 학문이나 교과의 대상으로서의 역사는 대체로 세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일 그 자체를 가리킨다. 둘째, 역사는 남겨진 과거의 기록이나 흔적을 의미하기도 한다. 셋째, 사료를 토대로 역사가가 연구해서 얻은 결과를 역사라 하기도 한다.그러나 여기서 첫 번째 의미의 역사인 과거에 있었던 사실 그 자체는 지금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과거는 두 번째 의미의 역사인 사료를 통해서 남겨진 기록이나 흔적을 통해서이다. 그렇지만 이도 의도적이건 아니면 비의도적이건 간에 이미 그 사료를 남긴 사람에 의해서 선택되고 편집된 것이다. 여기서 역사가들이 사료비판을 통해서 역사를 인식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한편, 이는 역사를 인식하는 보통사람들에게 또 다른 시사점을 제시한다. 이는 역사가들은 그나마 사료를 직접 대하면서 역사를 스스로 인식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역사가들의 인식을 통해서 역사를 재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반인들의 역사인식은 대부분 중고등학교 때의 역사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는 즉, 역사가들이 역사를 인식하는 방식은 역사교육을 통해서 그대로 일반인들에게도 전달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역사가들이 역사를 인식하는 방식은 역사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이에 대한 인식으로 여기서는 역사가들의 역사인식 동향과 그에 따라 역사교육이 어떻게 변하는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Ⅱ. 19세기 근대 역사학과 역사교육19세기 이전의 역사학은 문학, 철학 등과 그 성격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의 역사는 사회의 상류계층이 취미될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그들은 이성과 진보라는 선험적인 개념에 입각하여 역사의 총체적 의미와 그 진행 경로를 파악하려고 시도함으로써, 역사학을 철학의 지배 하에 종속시켰기 때문이다.{) 정선영 편,『역사교육의 이해』(삼지원,2001). p55이와 반대로, 랑케에 따르면 인간사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대상을 추상화·개념화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별체를 있는 그대로 자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역사학의 방법론은 후자이다. 왜냐하면 랑케에게 있어 역사는 개체의 다양성, 개별적 생의 다채로움, 인간 사유의 자유로움을 보여주는 전시장이고 모든 시대는 신에게 직결 되어 있는바, 각 시대는 그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가치와 흐름이 있어 각각의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역사는 진보의 개념에 입각하여 역사의 진행과정을 추상적으로 도식화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그렇다면 그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자아로 상징되는 주관의 소거, 치밀한 사료비판, 자료에 입각한 엄밀한 연구 그리고 사건들간의 인과적 연관성에 대한 통찰이다. 랑케에 따르면, 사물은 스스로 말하기 때문에 역사가가 지니고 있는 정치적·종교적 신념들이 소거될 때에만 그것이 투명하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역사가는 심판자가 아니다. 그의 업무는 사건을 완전히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것이지 이를 도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그러나 역사학이 과학인 한 주관의 제거만으로 사건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엄격한 사료비판 또한 요구되는데, 이에 역사가는 자료를 철저히 고증하고 엄격한 기준에 의해서 선발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개체에 대한 연구가 단편적이고 분리된 사실들의 무의미한 집합으로 전락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역사가는 그 눈을 보편을 향해 열고 있어야 한다. 고 랑케는 말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E.H Carr. 안병직 역 『역사란 무엇인가』(청년사,1985)랑케에 따르면, 역사가가 며, 사실을 발생한 그대로 서술함으로서 인간사에 대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그는 사실의 정확성과 정밀성을 강조하며 주관의 철저한 제거를 과학적 탐구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랑케는 사실들이 인과율이라는 내적 법칙에 의해 연관되어 있음을 역설하며 이의 탐구를 통해 개별사건들의 의미를 객관적으로 서술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주장이야말로 모더니즘적 역사학의 이론적인 구조 틀로서, 그 뒤에는 철학으로부터 독립된 자율적 과학으로서의 역사학의 위상을 확립하려는 랑케의 목표가 깔려 있다.{) 정선영 편,『역사교육의 이해』(삼지원,2001).이러한 근대 역사학의 성립은 역사교육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먼저, 19세기 이전의 역사는 소수 지배층을 위한 것이었던 반면에 근대 역사학의 성립으로 역사는 단순히 연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대중에 전달하는 것도 과제로 삼게 되었다. 따라서 역사는 중고등학교의 공교육 체제가 갖추어지면서 교육과정의 주요 과목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역사적인 사실들은 각각이 고유한 의미를 가지고 있고 이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목표가 됨에 따라 역사교육의 목적이 종전의 교훈을 얻는 것으로부터 사실을 많이 아는 것 자체에 두어졌다. 그리고 역사적 사건의 인과관계가 역사서술의 중요한 원리가 되었으며, 역사학습의 주된 대상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근대역사학에서는 사료비판으로 중시함에 따라, 역사를 배우는 원천으로서 사료의 가치가 중요하게 되었다는 것도 이것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이러한 랑케를 대표로 하는 근대 사학은 여러 가지 문제점도 야기시켰다. 먼저 이들의 주요 연구대상은 정치사나 외교사, 제도사 같은 것으로서 이것은 대부분 지배층 중심의 역사서술을 이루고 있어 상대적으로 평범한 인간의 삶의 모습을 배우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들은 지나치게 공적 문헌사료 위주로 역사를 서술함으로써 역사를 연구하거나 학습하는데 다양한 자료를 활용하는데 제약을 주었다. 또한 이들의 사건사 으로 설정할 수 있다. 그 해에 로빈슨(J.H.Robinson)에 의해 '신사학'(the new history)이라는 논문이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전통적인 정치&제도사 중심의 역사에서 탈피하여 인간의 정신 활동을 역사 연구의 중심 과제로 부각시킨 사람으로 평가될 수 있다. 로빈슨은 하나의 사상이 형성되고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보급되어 일반적인 사회 의식으로 변해 가는 과정과 각 사항이 실제의 사회적 행동에 미친 영향의 방식을 해명하고자 했다. 정치, 사회 그리고 문화적 활동의 형태로 나타나는 인간의 행위는 궁극적으로 정신 세계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완전히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 그 전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지성사는 독일의 관념적인 사상사와는 구별되었다. 각 사상을 그 시대의 정치&사회 등 역사적 상황과 밀착된 것으로 파악하려 했기 때문에 그것의 연구 대상이 창조적 엘리트가 지니는 높은 수준의 사상으로부터 일반 대중의 소박한 구호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범위에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두 번째는 살펴볼 것은 프랑스의 아날학파(the annales)이다. 20세기에 나타난 역사학의 새로운 경향을 가장 잘 반영하는 학파가 있다면 바로 프랑스의 아날학파일 것이다. 흔히 프랑스어로 연보를 의미하는 아날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편협한 정치사가 아닌 전체 사회사를 추구하는 『사학 종합 평론지(Revue de synthèse historique)』가 1900년에 출간된 데서 시작되었다. 이처럼 오랜 전통을 지닌 아날학파는 2차 대전 후 페브르와 브로벨(Fernand Braudel)에 의해 하나의 학파로서의 모습을 분명히 하게 되었다.아날학파는 역사학의 연구 대상을 개인의 행위나 사상이 아니라 인간이 조직한 집단이나 사회로 보는 데서 출발한다. 또한 종래의 전통적인 역사가가 정치사나 사건사 중심으로 짧은 시간에 걸친 개인의 활동을 취급해 왔다면, 아날학파는 10년, 20년, 때로는 여러 세기에 걸친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역사를 취급한다. 즉 역사의 파의 영향과 두 번째 세계 대전, 나치즘의 독재 그리고 전쟁에서의 패배라는 역사적 체험이 그것이다. 그것을 통해 독일 역사가들은 역사주의와 정치사학과 같은 독일의 역사적 전통에 대한 심각한 반성뿐만 아니라 동시에 일정한 상황에 종속하는 존재로서의 개인의 한계성을 절실하게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제까지의 독일 역사학이 현대의 복잡한 산업 사회의 구조를 파악하는데 지나치게 무관심했음을 인정했다. 그 결과 산업화로 야기된 사회의 구조적 변화에 많은 관심이 기울여져 인구 동태나 가족 구조의 변화, 도시화, 계층 변동, 노동 조합 그리고 여성 해방 등의 문제가 중점적으로 다루어지게 되었다.이러한 연구들은 매우 다양한 성격, 자료의 활용, 연구방법을 가지고 있어 그 특징을 일괄적으로 살펴보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공통적인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첫째, 역사학의 목적을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당면 문제를 해결하며, 미래를 가르쳐주는데 기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둘째, 역사연구는 전통적인 정치사. 외교사. 군사사에 국한되어서는 안되며, 사상사를 포함한 더 넓은 영역에 걸쳐야 한다고 주장한다.셋째, 역사해석에 인류학, 사회학, 경제학들 사회과학의 방법론과 개념을 이용하며, 공적 문서외에 개인이나 교회가 가진 자료, 유물이나 유적, 전통이나 관습, 민담이나 전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자료를 활용한다.넷째, 역사학의 임무를 시대착오나 사상, 제도의 불합리성을 규명하고 현재가 가지는 의미를 찾아주는데 두고 있다.이러한 이들 역사학의 동향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먼저 역사학은 인간의 행위를 다루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너무 몰가치적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는 지나친 전문화의 결과로 역사학의 대중성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리고 사회과학자 상호간이나 사회과학자와 역사학자 사이의 교류가 미흡하다는 점도 지적되었다. 또 이와 같은 역사연구를 위해서 필요한 사회과학적 지식이 습득이 쉽지 않다는 문제도 있을뿐더러 사회과학적 방법을 도입하는 다.
    교육학| 2002.12.09| 8페이지| 1,000원| 조회(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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