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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_9_23_서양문화_오리엔탈리즘_핵심정리
    ① 작가의 소개: Edward W. Said1935년 영국이 위임통치하고 있던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 당시 나치독일의 박해를 피해서 유태인들의 대거입국으로 혼란해졌다. 그의 가족은 당시 이러한 혼란을 피해서 1948년 이집트로 이주하여 그는 카이로에 있는 빅토리아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950년대 말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 대학과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했고 하버드에서 학위를 받았다. 그의 처녀작은 로서 많은 해양소설을 쓴 영국의 콘래드에 대한 연구소였다.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문학평론가의 한 사람으로서 컬럼비아 대학의 영문학 비영문학 교수이며, 하버드대학의 비교문학 객원교수, 스탠포드 대학의 행동과학 고등연구소에서 평론에 관한 가우스 Gauss 강의를 했으며, 으로 컬럼비아 대학에서 매년 시상하는 리오넬 트릴링상을 탄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지식인의 표상’ ‘문화와 제국주의’ 등이 있다.② 저자의 의도와 목표그가 쓴 저술들은 문학 비평과 사회 비평, 주로 팔레스타인 문제에 집중되어 왔다. 사이드는 주로 영국문학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영문학자이며 동시에 영국의 식민지지배로부터 결국 자신의 조국인 팔레스타인이 오늘의 지경에 이른 것을 비판하는 애국적인 논객이다. 그의 두 가지 입장은 각각 다른 계열의 책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으나, 그 하나의 종합을 바로 이 책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곧 식민종주국의 문학을 연구하면서 그는 당연히 그 속의 참된 근본을 탐구했다. 문학의 탐구에서 시작한 사이드는 그것이 권력의 소산이라는 명제아래 모든 문화의 탐구로 나아간다. 그의 역사의식은 너무나도 현실적이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서구의 방대한 지성사를 구성하면서 그의 관심은 너무나도 현재적이면서도 오늘날의 낡은 사회경제사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사이드는 제국주의를 거부했으며 잘못 알려진 문화인식에 대해 부정하였다. 사이드는 사실상 그렇게 신기한 것이 아닌 이 세상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 의문으로 느껴본 것을 좀더 명확히 밝히는 것에 지나지 않 근접관계에 그 기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19C 초엽부터 제2차대전까지는 영국과 프랑스가 동양과 오리엔탈리즘을 지배했다. 제2차대전 이후에는 미국이 동양을 지배하게 되었고, 과거의 프랑스 및 영국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동양에 대하여 접근하고 있다. 이러한 역학은 모두 서양의 동양에 대한 문영의 우월성을 시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역사적 실체는 말할 필요도 없고, 지리적 실체이자 문화적 실체이기도 한 ‘동양’과 ‘서양’ 이라고 하는 장소, 지역 또는 지리적 구분은 인간의 기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서양 그 자체가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동양도 또한 사상, 형상, 어휘의 역사와 전통을 갖춘 하나의 관념이다. 오리엔탈리즘은 그것이 의거해야 할 전략으로서, 이러한 융통성이 있는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을 언제나 지속시켜왔다. 그로 인해 서양인은 동양과 있을 수 있는 모든 관련 속에서 언제나 상대에 대한 우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아더 제임즈 밸푸어는 ‘동양인’ 이라고 하는 말의 선택 그 자체가 이미 정해진 규범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경우에도 영국인의 우월성과 이집트인의 열등성을 부정한 적이 없었다. 밸푸어의 에 상응한 것이 크로머의 이다. 지배자는 종속적 종족의 요구를 어느 정도까지 ‘진지한 고려’에 포함시켜야 하는가? 그 답은 이집트 민족주의를 전면적으로 적대시한 크로머의 태도에 나타나 있다.밸푸어는 동양인에 관한 명제에 객관적인 보편성이 갖추어져 있다고 주장했으나, 크로머는 인도에서 이어 25년간 이집트에서 지배했거나 취급해야 했던 특수한 대상으로 동양인에 관해 이야기 했다. 크로머는 본국의 군국주의와 상업적 이기심, 식민지의 ‘자유주의제도’가 억제되어 있는 한 대영제국이 해체되지는 않는다고 했다.19C와 20C에는 오리엔탈리즘의 관념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유럽에는 과거의 유럽인으로부터 물려받은 동양관계의 문헌이 존재했다. 에 의해 오리엔탈리즘에 하나의 무대를 제공했다. 이집트를 선두로 하여 이슬람 나라는, 서양의 동양에 관한한 지역과 아직 알지 못하고 방문화하지도 않았고 정복되지도 않은 지역으로 재구분되었다. 세련과 복잡함이 정도를 높여가는 것은 결국 서양의 무지이며, 양과 정확함이 증대된 서양의 실질적 지식의 어떤 부분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동양이란 그것에 모든 동양의 나라들이 포함되는 무대이다. 이 무대 위에 등장인물이 나타나 연기할 때 동양은 친숙한 유럽세계를 넘어 무제한으로 확대돈 넓은 공간이 아닌 하나의 폐쇄된 영역 곧 유럽에 부속된 연극무대로서 외관을 나타낸다.오리엔탈리즘의 극장에서 연극적 형태와 학술적 이미지가 어떻게 일체가 되어 나타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보기가 발데레미 데르브로의 이다. 이슬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넓혔고 그다지 아카데믹하지 않은 독자층을 전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리엔탈리즘의 표상이 갖는 교육적 성격도 연극의 다른 부분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사실 오리엔탈리즘의 태도 일반도 참으로 반경험적인 것이다. 폐쇄된 시스템이 갖는 자기 충족적이고 자기보강적인 성격을 공유하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적인 것이라고 인정되는 문제, 대상, 특질, 지역을 다룬 경우의 하나의 습관에 불과하고,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누구이든 간에 자신이 말하고 생각하는 대상을 어떤 단어나 문장으로 지시하고 명명하며 고정시킨다.마슐레는 “동양은 그 꿈의 매혹에 의해, 그 명암화법의 마술에 의해 광명의 신들에게 죽음을 초래했고 저항할 수 없는 것이 되어 전진한다.”라고 말했다. 유럽인은 인도적 동양을 마치 영주와 같은 거만함을 가지고 다루었다. 그들은 이슬람에 대하여 품어온 위험의 감각은 전혀 갖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거만함과 정확한 실증적 지식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었다. ‘동양 르네상스’에 의해 종래의 상당히 좁았던 제한이 확대되기까지, 이슬람은 동양적인 것을 모두 주워 담는 잡동사니 주머니였다.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오리엔탈리즘으로 포섭함으로써, 처음으로 그 성립이 가능하고 내용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실패한 것은, 동양에 대한 전면적인 투사의 풍요성까지때문이다. 오리엔탈리즘은 언제나 특수한 인간적인 세부로부터 출발해 일반적인 초인간적인 것으로 상승했다. 정치와 오리엔탈리즘 사이의 긴밀한 관계, 또는 오리엔탈리즘에서 비롯된 동양의 여러 관념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개연성의 높이는, 중요한 것이나 미묘한 진리이다. 현대 오리엔탈리스트들의 자세는 언론이나 대중의 마음속에 범람되어 있다. 오리엔탈리즘의 한계란 다른 문화, 민족 또는 지리적 구분 속의 인간존재를 무시하고, 뽑아버리고, 박탁하는 결과로서 나타난다. 이들에게는 텍스트로부터 예견될 수 없었던 일이 생겨나면, 외부로부터 선동이니 동양의 잘못된 우둔함의 결과라고 무시했다.아시아에 의한 유럽의 소생은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낭만주의적 관념이다. 프리드리히 슐레겔과 노발리스는 그들의 동국인에 대하여, 유럽인 일반에 대하여, 인도를 연구할 것을 장려했다. 서양문화의 물질주의와 기계론을 타파할 수 있는 인도의 문화와 종교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부바르와 뻬뀌세’를 위한 플로벨의 초고로부터 이끌어 낸 에피소드는 압축된 형태로 오리엔탈리즘의 특수한 근대적 구조의 틀을 보여 준다. 18C가 되자, 복음주의의 단계를 암시하는 새롭고 밀접하게 연관된 요소가 출현하고, 플로벨은 재창조하게 된다. 제1의 요소로서 동양은 이슬람의 여러 지역을 넘어 멀리까지 공개되었다. 제2의 요소로서 이질적인 것에 대해 전보다 지적인 태도를 취할 것을 조장한 사람들은 유럽의 경험과 오래된 여러 문명과의 비교가 유효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 역사가들이기도 하다. 이들은 동양을 확고하게 적이라고 판단했으나, 이에 대해 18C 역사가들은 때로는 초연한 태도에 의해, 때로는 동양의 문헌자료를 직접 취급하려고 하는 시도에 의해 동양의 특수성에 직면했다. 대상이 공감적 동일화에 의해 초월하려는 경향도 존재했는데 근대 오리엔탈리즘의 길을 준비하는 제3의 요소이다. 제4의 요소는, 자연과 인간을 유형으로 분류하는 모든 충동이었다.실베스트트 드 사시의 일생에서의 테마는 영웅적인 노력을 거듭하는 것, 그리고 교 인간의 다양성에 유래하는 있을 수 있을 모든 차이에 대해 지극히 광범한 레테르로 인간을 궁극적이고 집합적인 추상개념으로 환원시킨다. 지식을 서양에 순화시켰는데, 이러한 것들이 일체가 되어 동양에 관한 위조물과 환영을 형성하고, 동양을 서양을 위해 실체적으로 재생산한다.동양을 여행하고 동양에 거주하는 유럽인은 모두 동양의 불온한 영향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했다. 프랑스인 순례자는 동양에서 심각한 상실감을 맛보아야 했다. 그들은 프랑스가 영국과 같은 통치자로서는 존재하지 않는 장소에 왔다. 그들의 동양이란, 추억, 연상을 북돋우는 폐허, 망각의 늪에 빠진 여러 가지 비밀, 숨겨진 교신으로 이루어진 동양이고, 하나의 거의 대예술가적인 것이라고 해야 할 존재양식이었다. 19C 프랑스 순례자들은, 과학적인 현실보다 엑조틱하고 매력적인 현실을 탐구했다. 동양 속에서 자신들의 사적인 신화나 강박관념 또는 욕구에 공감하는 장소를 발견했다.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이 어떻게 서술되고 특징지워지는가에 관하여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여 왔다. 동양에 관한 지식의 체계에서, 동양이란 하나의 ‘토포스’ 곧 인용구의 집합이고 특징점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순례가 결국은 모사의 한 형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끝난다.오리엔탈리즘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동양을 취급하는 서양인들이 언제나 대립적인 인식이었다. 동양 대 서양이라는 경계개념, 열등과 우월, 행해진 작업의 정도, 동양에 특유한 것으로 인정된 특징 등이 동서양을 나누고 상상과 지리상의 구분이 그어지고 몇 세기에 걸쳐 존속되어온 것을 증명한다. 오리엔탈리즘 속에 나타나는 동양은 서양의 학문, 서양인의 의식, 근대에 와서 서양의 제국지배영역 속에 동양을 집어넣는 일련의 총체적 힘의 조합에 의해 틀이 잡힌 표상의 체계이다. ‘잠재적인’ 오리엔탈리즘인 무의식적인 확신과, ‘명백한’ 오리엔탈리즘인 동양의 사회, 언어, 문학, 역사, 사회학 등에 관해 표명된 여러 견해가 있다. 역설적이게도 19C를 통해 동서양의 거리는 계다.
    인문/어학| 2010.03.20| 8페이지| 1,000원| 조회(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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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_3_14[국어교육학]국어교육학의 개념_핵심정리
    제 1 장 국어교육사의 전제1. 국어교육사의 시발점우리나라는 단일민족으로 독자적인 말과 글을 가지고 문화를 발전시켜 왔지만 한문화권 아래에 놓인 나머지 한자를 익혀 국어교육의 연륜이 다른 나라에 비해 짧은 편이다. 하지만 우리 국어교육사가 일천한 연륜을 지녔다 하더라도, 비교적 큰 굴절을 겪으며 발전에 필요한 체험들을 잘 겪어온 셈이다. 우선 국어교육을 통시적으로 고찰하는데 있어서 어디서 시발점을 잡느냐 하는 점이 문제시되는데 국어는 우리 모국어인 한국어와 조선 초에 만든 한글을 중심으로 쓰여진 것으로 한정하면 결국 대한 제국 말 개화 이행기를 시초로 잡을 수 밖에 없다. 또한 외세의 침략으로 굴절을 겪은 일제강점기를 분기점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2. 국어교육사의 시대구분국어교육과정사를 따라 출발기(1985~1910), 수난기(~1945), 소생기(~1955), 발전기(~현재)로 4대 구분으로 나누나 광복 후 현대에 이르는 흐름을 균형 있게 현장에서 운영, 전개되는 전체 모습을 고루 살피는데 부족하다. 그러므로 광복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서 광복 이전은 다시 개화 이행기와 일제침략기로, 광복 이후는 교수요목기와 교육과정 개정시기별로 나눈다.제 2장 광복 이전의 국어교육1. 광복 이전의 국어교육의 위상개화 이행기는 대개 1895년부터 1910년까지 잡는다. 이 무렵 신식학교가 세워졌는데 특기할 일은 처음부터 교재뿐 아니라 교수용어도 우리 글과 말로 쓰였다는 점이다. 모국어와 우리 한글의 소중함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 만큼 국어 시간수가 40% 이상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1905년부터 식민지교육을 위한 일본의 정책으로 점진적으로 발전해 오던 국어교육의 싹이 자라지 못하게 되었다. ‘사립학교령’, ‘학회령’ 등 통제의 마각을 드러내어 일본어 과목이 필수과목으로 자리잡았다.일제침략기부터는 우리말은 겨우 ‘조선어과’로 명맥만 잇다가 그나마도 1938년 경부터는 내선일체의 미명아래 폐과되어 암흑기라 할 만하다. 하지만 소수의 애국지사들을 통해 1933년 한글 맞춤법통일안 중시하는 교과서가 만들어졌고, 정부주도기에는 국정교과서를 만들어 한글전용의 언문일치를 지향하였으며 민간 차원에서는 더욱 두드러져 독립기상과 의욕이 왕성하게 표현되었다. 그러다가 을사조약이후 통감부는 검열을 통해 독립의지의 서술을 봉쇄하고 일어로 발간하려고까지 하였다. 언문일치는 다시 국한혼용체로 되돌아갔다. 다만 좀더 다듬어진 구어체와 문장부호 사용이 시도되었지만 학년위계에 따른 곤란도가 고려되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독립정신, 계몽 등의 교훈 일변도의 모습에 선진국가 교재의 모방, 번안이 태반이었다.일제치하에 들어와서는 더 악화되어 ‘조선어과’, ‘언문’으로 비하되었으며 ‘조선어급한문독본’은 국한혼용문에 국문을 한문에 종속시켰으며 한글표기도 제멋대로였다. 또한 일본적인 소재의 ‘국어’(당시 일본어 독본)를 주요교과로 삼고 ‘조선어독본’은 실용적인 측면만 고려하여 비천한 교재로 무성의하게 구성하였다. ‘한글맞춤법 통일안’도 무시하고 결국 ‘조선어과’를 폐지시키면서 교재는 무용지물이 되었다.4. 광복 이전의 국어교수 기술개화 이행기에는 우리말과 글의 존중의식이 교육현장에 팽배해 있었다. 현장에서 실현하는 구체적 방법의 언급은 찾기 어렵지만 국한혼용의 언문일치 문장교육을 지향하였지만 학생중심의 교수?학습방법은 구현하지 못했다.일체 침략기에는 ‘조선어과’로 천시됨과 더불어 실생활에 편리한 정도로만 제한하였다. 지도방법은 ‘일어과’에 준하여 좀더 치밀한 운영 방안을 보이나 실제는 엉성하게 취급되었다. 모국어교육에 비중을 두는 점과 치밀한 운영방안을 영향받았으나, 중앙통제적 편성, 운영은 지금까지 부정적인 모습으로 남아있다.제 3장 광복 이후의 국어교육1. 광복 이후의 국어교육의 위상교수요목기에는 한글부터 깨치도록 한글 보급운동에 총력을 기울이고 국어과교육을 교육 제반의 도구교과이자 주체 교과로 인식하였다. 높은 위상은 우리말과 글을 되찾아 다듬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한글전용법’이 공포되고 ‘한글파동’ 속에서도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지켜내었지만 6.25전쟁통합적으로 지도하길 권장하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1차 교육과정은 진보주의 사조에 영향을 받아 생활과 경험을 중요시한다. 체제가 ‘국어교육의 목표→영역→학년 지도목표→학습지도 방법’으로 되어 있다. 2차 교육과정은 다를 바 없으나 교육과정의 구성을 ‘개정의 요점, 일반목표, 학년목표, 지도내용, 지도상의 유의점’으로 나누었고 국어교육의 궁극목표를 인간형성을 향한 가치목표로 높였다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또 한글전용 실시로 한자교육을 폐지하고 학교문법통일안을 확정하였다. 3차 교육과정에서는 경험주의 사조에 본질주의 사조를 감안한 것이다. 또 국어교육의 이념과 목표를 모색하고 정립하고자 한 노력이 드러난다. 학문중심의 교육과정으로써 체제는 ‘목표, 내용, 방법’의 3분법으로 되어 있다. 4차 교육과정은 문학교육 및 언어지식 교육을 독립시켜 국어과 내용을 언어기능, 문학, 언어지식의 3대 영역으로 명시하여 가치관 교육을 출이고 내면화하였다. 특기할 만한 일은 1,2,3학년 수업시수를 한 시간 늘려 도구교과의 의의를 보강하고 1,2학년을 ‘바른생활’로 통합하였다는 점이다. 5차 교육과정기부터는 인지심리학과 화용론의 영향으로 언어현상과 사고현상의 관계와 의사소통 과정을 중시하였다. ‘기능주심 국어교육관으로 국어교육과정 목표를 언어사용 기능신장으로 일원화하였다. 교육과정은 말?듣?읽?쓰?언어?문학으로 구성하고 지식전수보다 언어와 사고를 상호 연결짓는 활동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학습내용이 되도록 강조하였다. 6차 교육과정은 5차 교육과정을 보완하였는데, 차이점으로 ①일반적 성격을 규정하는 내용을 강조하여 서두에 내세웠고, ②’내용체계‘항을 신설하였으며, ③학년별 목표진술 대신 ’학년별 내용‘을 목표로 삼았다. 또한 ④내용을 진술함에 있어 인지?기능?정의적 요소로 나누어 체계화를 꾀하였으며, ⑤’지도 및 평가상의 유의점‘을 ’지도‘와 ’평가‘로 나누어 상세 진술하였다.3. 광복 이후의 국어교재교수요목기에는 『한글첫걸음』,『초등국어교본』(상,중,하), 『중등국어교본』, 교사 맞춤법 위주의 교육을 하였다. 자모식 문자지도법을, 후에 의미중심의 시각어휘식 지도법을 선택하였다. 1,2차 교육과정기는 언어경험을 토대로 한 교수?학습기술을 계발하여야 했으나 전통적 교과중심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3,4차 교육과정기에서는 본질주의 교육사조의 영향아래 학문중심의 교육과정답게 발견과 탐구학습이 중시되었다. 4차의 속독지도는 독해력신장의 결과라는 인식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5차 과정에서는 학습자 주체의 언어경험을 중시하게 된다. 기능중심으로 언어사용 기능체득을 위해 ‘직접교수법’의 효율성에 대한 인식을 하기에 이른다. 6차 과정은 서구의 ‘열린 교실’, ‘총제적 언어교육 운동’이 들어왔으며 80년대 중반부터는 초등 국어교육이 하나의 학문으로서 정립하고 발전해갈 제도적 장치가 잡아가기 시작했다.5. 7차 국어과 교육과정의 특성‘21세기 세계화?정보화 시대를 주도할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한국인 육성’이란 이념으로 초?중등의 학교급간 대신 국민공통 기간을 설정하고 수준별 교육과정을 편성하였다. 공통기간엔 ‘심화?보충형’으로, 고등2~3학년에는 과목선택형으로 구성하였다. ①학습자 중시 입장에서 학습자 개개인에게 의미 있는 학습경험을 주려고 하였다. ②필수 학습요소를 정선하고 구조화하여 학습량을 최적화하려고 하고 있다. ③학습자의 비판적 이해와 창의적 표현을 중시한다. ④‘학년별 내용’의 제시를 개선하여 내용을 목표형태로 제시하고 활동을 수준별로 나눠서 구체 제시하고 있다. ⑤바른 교육은 학습의 개별화, 인격화, 자기주도적 학습을 통해 구현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방법’과 ‘평가’ 항목도 좀더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하는 것으로 개선하고 있다.국어를 통한 사고력 신장을 추구하는 것으로 도구교과적인 위상을 강화해가고 있으며, 교육주체인 학습자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지향해왔음을 살펴볼 수 있다제 2 장 국어교육학의 정의1. 교과교육의 정의과 목적학교교육과정의 편제는 교과, 특별활동 그리고 학교 재량시간으로 편성되어 있는데 학교 교육의 대부분이 교과교육과정이므로 교과교 개념 인식으로 교육대학의 교수진과 교과과정이 국어학이나 국문학 전공으로 되어 있어 국어의 하위개념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대부분의 교과교육은 지도내용과 지도방법의 두 가지가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교과교육이라는 하나의 현상을 이루나, 국어교육은 온전히 통합된 모습을 보이지 못하여 그 결과 지식교육은 획일화된 주입식으로 기능교육은 획일화된 연습으로 치우쳐 흐르게 되었다. 셋째, 교육내용은 강조하면서 내용을 배우는 대상은 학생의 인식이 부족하여 교수-학습의 이론을 학생중심의 '학습'에서 찾으려 하지 않았다. 넷째, 전통적으로 국어교육에서는 언어기능영역, 문법영역, 문학영역을 매우 중요시하여 왔지만 상호 이질적인 이 세 영역의 연관성을 찾으려는 노력을 크게 기울이지 않았다. 이런 장애요인과 인식을 극복하고 국어교육의 학문적 이론화를 구축해야 할 필요가 있다. 국어교육 현상의 이론화를 통해 학문적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는데 그 결과 첫째, 국어국문학, 교육학 등에 하위개념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둘째, 정체성 확립을 통해 국어교육 현상을 국어교육적 안목으로 새롭게 연구할 수 있게 된다. 셋째, 국어교육 현장을 견인하는 힘을 마련할 수 있다.3. 국어교육 관련 학문의 최근동향국어교육은 국어학, 국문학, 교육학 등의 인접학문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데 이 세 분야에서 일어나는 최근의 변화를 살펴 국어교육학의 정체성 확립에 도움을 얻고자 한다.1) 교육과정 이론의 변화- 경험중심, 생활중심이던 것이 소련의 인공위성 발사 후에 학문중심 지식중심의 교육과정 이론으로 바뀌었다가 학문중심 교육과정에서의 지식을 보는 관점이 비판되면서 인간중심의 교육과정이론이 등장하였다.2) 언어학에서의 변화- 언어는 크게 언어를 객관적 대상으로 보는 것과 언어를 의사소통의 도구로 보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는데 국어교육에서는 언어를 후자인 의사소통을 위한 매개적 도구로 본다. 그리하여 이질적이라고 생각했던 '표현-이해','언어','문학'의 세 영역을 서로 상관 짓는 중요한 교두보역할을 하게.
    교육학| 2010.03.19| 8페이지| 1,000원| 조회(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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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일의 정의와 의의_정치외교 박사과정
    序. 통일의 정의와 의의Ⅰ. 통일의 정의통일의 정의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규정한다. 그러나 대체로 통일을 "우리 민족이 서로 적대적인 상이한 체제를 지닌 두 개의 국가 속에서 살고 있는 현재의 상태를 극복하고, 하나의 국가 속에서 민족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살아가는 상태"라고 규정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통일은 분단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역사의 길을 걷고 있는 남북한이 현재의 조건과 상황을 고려하여 다시 하나의 사회로 만들어 가는 창조 작업을 의미한다.통일은 남북한에 소속된 국민과 영토 및 여타 자산들을 하나의 독립적 국가주권 하에 귀결시키는 정치적 통합 작업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런 정치적 통합의 안정적 유지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게 있는데 그것은 바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및 심리적 통합작업입니다. 광의적 시각에서 통일은 지리적으로 국토가 하나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대립되었던 제도를 하나로 만드는 것이고, 경제적으로 서로 다른 체제를 하나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며, 이질화된 문화를 하나로 다시 탄생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남북의 주민이 심리적으로 "우리는 같은 국민"이라고 느끼게 되는 상태가 바로 통일이다. 이렇듯 통일은 모든 방면에서 남북의 주민이 동질적인 삶의 양식과 정신문명을 공유하는 것이다. 남북한 지역 간에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의 균형적 일체성이 확보되고 분단의 상황에서 파생된 남북한 주민들 사이에 심리적 이질감이 해소되는 다면적 통합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통일은 궁극적으로 우리 민족구성원 전체가 하나의 정치공동체 하에서 평화롭고 조화롭게 삶을 영위하기 위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문화적 및 사회 심리적 제 요건을 구비하는 장시간의 작업으로 볼 수 있다.Ⅱ. 통일의 의의통일의 의의를 보면 먼저 분단의 상황을 극복하는 민족사적 과업으로서의 통일이 있다. 한반도의 분단은 우리 민족의 자주적 역량 결여와 주변 강대국들 간의 이익 대립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산출한 역사적 결과거치면서 상당한 수정을 가져왔다. 1954년 4월 26일 한국전에 참전 내지 관련있는 국가의 외상들이 한국의 평화적 통일을 실현하고자 제네바에서 모임을 가졌다. 한국은 6.25전쟁 후 폐허화된 국토의 재건이 시급했고 게다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안이 가시지 않아 통일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거나 제기할 상황이 되지 못했다. 그에따라 우리 정부의 통일에 대한 입장은 우방국의 동조조차 얻지 못하고 6월 15일 15개국 본회의는 마침내 결렬되었다.한편, 1956년 11월 10일, 진보당이 조봉암이 주도한 창당대회에서 채택한 통일방안은 이승만 정권기에 있어서 가장 구체적인 방안인 동시에, 정당이 내놓은 최초의 평화통일 방안이었다. 이 당은 발기 취지문에서 “우리가 당면한 민주수호와 조국통일의 양대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혁신적 신당을 조직하고자 이제 분연히 일어섰다.”고 선언하고, 강령에서는 “민주우방과 제휴하여 민주세력이 결정적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조국 통일의 실현”을 다짐했다. 그리하여 당정책으로서 ‘대한민국의 주권하에 유엔을 통해서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이라는 4원칠을 내세우고, 그 방안으로서 ‘유엔 동의하에 남북 대표로 구성되는 전한국위원회와 이를 감독 감시하기 위해 인도, 스위스, 폴란,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표로 구성되는 국제감시위원회에 의한 남북총선거’안을 발표하였다.(3) 장면 정부기배경 : 4.19의 민권 승리는 화발한 통일 논의를 일으켰고 이에 따라 통일방안도 한층 다양하게 제시되었다. 1960년 7.29 총선을 앞두고 각당은 통일정책을 각각 제시하였는데, 자유당의 북진통일론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보수, 혁신을 막론하고 모든 정당이 평화통일론을 주장하게 되었다. 특히 혁신계는 남북교류론을 주장하고 중립화 통일론까지 나오게 되었다.통일방안 : 민주당-7.29 총선에서 내세운 통일방안은①유엔 감시하에서 남북을 통한 완전한 자유선거로써 평화적 민주통일을 달성한다.②통일 전 남북문화 경제 교류 문제는 대한민국에 대한 공산 파괴 공작이 진정하게 정지되리라적으로 달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도 북한을 능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과정 : -이를 계기로 남북한 간에는 분단후 첫 공식적인 대화가 시작되었다. 71년 8월 12일에는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남북 적십자회담을 제의하여 8월 20일 첫 대면을 하였다. 또한 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면서 정치 부문에서의 대화도 시작되었는데, 통일의 3대 원칙으로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 선언되었다. 이로써 한국정부는 공식적으로 이승만 정권 이래의 ‘유엔 감시하의 자유총선거’라는 통일 원칙을 약하시킨 셈이 되었다.7.4 공동성명에 기초를 두고 ‘남북조절위원회’가 탄생되면서 남북한간의 통일을 위한 정치 대화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점진적 단계적으로 회담의 폭을 넓히면서 문제를 해결하자는 한국측의 주장과 모든 부문을 동시에 해결하자는 북한측의 주장이 엇갈렸다. 이렇게 민족의 희망을 불러 일으키던 남북대화의 분위기는 ‘김대중 납치 사건’을 계기로 73년 8월 28일 북한의 김영주의‘정치회담 중단’선언으로 깨어졌는데, 그것은 대화의 계속이 북한측의 체제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해를 끼친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이 무렵 한국정부는 1973년 6월 23일 ‘평화통일 외교정책 선언’을 하였다. 이는 종래 한국 정부의 외교 정책의 기본 원칙이었던 ‘할쉬타인 원칙’에서 탈피함을 의미하였는데, 그 중 통일과 관련된 부분은 ①내정 불간섭에 의한 공존론, ②대화에 의한 평화통일론, ③UN 동시가입 등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바로 그 날 ‘조국통일 5대 강령’을 발표하여 한국 정부의 ‘6.23선언’을 거부하였다.1974년 8월 15일에 박정희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평화통일 3개 기본 원칙’을 발표하였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첫째,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켜야한다. 이를 위하여 남북은 상호불가침협정을 체결하여야 한다.둘째, 남북간에 상호 개방하고 신뢰를 회복하여야 한다. 이를 위하여 남북대화를 성실히 진행시켜야 하며, 다각적인 협력과 교화해협력→남북연합→1민족1국가의 통일 국가 완성(3단계과정)※민족사회건설 우선(민족통일→국가통일)연방국가의 점차적 완성※국가체제 조립 우선(국가 통일→민족통일)과 도 체 제남북연합없음통 일 국 가실 현 절 차통일헌법에 의한 민주적 남북한 총선거연석회의 방식에 의한 정치 협상통일국가의형 태1민족 1국가 1체제 1정부의 통일국가1민족 1국가 2체제 2정부의 연방국가통 일 의미 래 상자유 ? 복지 ? 인간존엄성이 보장되는 선진 민주국가없음통 일 주 체민족 구성원 모두프롤레타리아 계급1980년 초남북 총리회담의 최초 제기 그러나 실무대표 접촉의 무산1988년 12월 28일한국의 강영훈 총리가 북한의 연형묵 정무원 총리에게 ‘남북 고위급 회담’ 제의1990년 9월 4일서울에서 제1차 회담 성사(이 시기를 제3차 남북화기라 할 수 있음)1992년 12월제5차 회담에서 드디어 구체적인 합의서 교환2)남북대화의 진전1.남북화해는 남과 북이 ‘공존관계’를 확립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함→ 남북관계는 냉전단계에서 ‘적대적 공존’의 단계를 거쳐 ‘중립적 공존’의 단계로 진입하려 한다는 것을 뜻한다.2.남북한은 불가침, 분쟁이 평화적 해결, 휴전선을 침략 경계선으로 하고 충돌 예방을 위한 직통 전화 개설 및 군사공동위원회의 구성 등에 합의→ 종래에 남북이 각각 불가침협정으로 담고자 했던 대부분의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3.남북간의 교류협력의 내용은 교류(인적 ? 물적), 공동 개발, 합작 투자, 개방, 도로의 연결 등 사회 ? 경제적 통합→북한이 종래 강하게 기피했던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의 교류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7) 김대중 정권기-햇볕 정책햇볕정책이란 남북한간의 긴장관계를 완화하고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유도하기 위해 김대중 정부가 추진하는 대북한 정책이다. 지난날의 정권은 북한과 대결하면서 여러 가지 강경정책을 써왔지만 북한을 변화시킬 수 없었다. 오랜 동안 북한은 과도한 군비지출과 경제위기에 몰려 있었고, 김일성 주석의 사망과 식량 위기에 2월 8일에 제기된 북한 정부 성명, 1959년 9월 9일 북한 정권 수립 10주년을 기념해서 행한 김일성의 보고 및 1959년 최고인민회의 제2기 6차 회의에서 행한 부수상 남일의 평화통일안 등 파상공세적인 통일방략을 제시하여 통일정책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③ 남조선혁명론(1960~1970)북한은 1960년대에 들어와 한국의 정세와 관련하여 ‘민주기지론’을 견지하면서 평화통일 제안과 ‘남조선혁명’이라는 이중전략을 구사해 왔는데, ‘남조선혁명’의 실천 수단으로 제기된 것이 1960년 8월 14일 8?15해방 15주년 기념연설에서 제기한 ‘남북연방제’라고 할 수 있다. 김일성은 이 연설에서 “어떠한 외국의 간섭도 없이 민주주의적 기초 위에서 자유로운 남북총선거를 실시하는 것이 평화적 조국통일의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방편”이라고 하면서 “만일 그래도 남조선 당국이 아직은 자유로운 남북총선거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과도적인 대책으로서 남북 조선의 련방제를 제의한다”고 했다. 그러나 1961년 한국의 5?16 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의 반공노선이 강화되자 북한도 이와 병행해서 민족해방투쟁노선으로 전환하게 된다. 1961년 제4차 당대회 보고에서 김일성은 당의 궁극목표로서 “사회주의혁명을 통한 조선의 통일”을 , 혁명과업으로서 북한의 “사회주의 건설”과, 남한의 “반제 반봉건 민주혁명”을 제시하였다. 1964년 2월의 당중앙위 제4기 제8차 전원회의에서는 ‘3대 혁명 역량강화’와 3단계 혁명론 (남한혁명→공산화정권→정부간 통합)이 채택되었다. 1962년 12월의 당중앙위 제4기 5차회의에서는 4대 군사노선을 채택하였고 이의 시험을 위하여 69년대말의 대남 도발(청와대기습미수사건, 푸에블로호 납북사건,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 등)이 자행되었다.④ 대화와 대결 병행정책(1970~1980)이 시기는 남북이 모두 대화?대결 양면기였다고 할 수 있다. 60년대 이후 주변 정세는 화해의 시기로 가고 있었다. 닉스 독트린이 발표 되면서 미군의 아시아 철수가 시작되고, 미
    사회과학| 2010.03.13| 19페이지| 1,000원| 조회(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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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학_부시맨 감상문
    Report-영화 ‘부시맨’ 감상문영화 ‘부시맨’은 1980년 9월, 아프리카 칼리하리에 원시 생활을 영위하는 부시맨이라는 부족 사회의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부락 위를 날던 조종사의 의미 없이 던진 빈 병 하나로 부시맨들은 이 병이 신이 내려준 사악한 물건이라고 생각하고 소유와 분쟁을 일으키는 병을 신에게 돌려주기 위하여 여행을 떠난다. 이로 인하여 부시맨은 문명인들과 만나며 현대 문명인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부시맨에게 없는 것을 보며 어찌 보면 우리가 있다라고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들이 우리 스스로 만들어 놓은 허상 속에서 얽매여서 스스로를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먼저 부시맨들은 소유의 개념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지기 위한 욕심이 없고 이 세상은 신이 내려주는 좋은 것만 있다고 생각한다. 내 것이 없기 때문에 현대 사회가 겪고 있는 병폐 중에 하나인 못 가진 자의 열등감이 없으며 가진 자의 횡포도 없다. 그러나 빈 병의 출연은 그들에게 공동의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소유욕이 싹트기 시작했고 부시맨들은 그 병을 신이 실수해서 내린 사악한 물건이라고 생각하고 돌려주기 위한 여행을 시작한다. 이런 소유에 관한 개념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사회에서는 죄의 대한 개념이 없다. 바꿔말하면 소유에 관한 개념도 사람이 만들어 놓은 문명사회의 허상에 불과할 뿐이지 내 것이라는 소유는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다. 또 그들은 요일이 없다. 우리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하고 토요일 일요일은 쉰다. 그 일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스스로 만든 규칙 아래 얽매여 그 규칙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만약 스스로 만든 규칙 아래 얽매이는 것이 행복하다면 그 규칙이 어느 정도 의미를 갖을 수는 있겠지만, 생각건대 그리 행복한 것 같지 않다. 이 영화를 보면서 문명사회에서 편리하게 살아가는 우리보다 환경적으로는 훨씬 낙후되었다고 생각되는 부시맨들의 일상이 더 행복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 스스로 있다고 생각하고 만들어 놓은 법과 제도들이 우리를 결코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없다는 것을 볼 때에 법과 제도, 나아가서는 문명이 얼마나 값어치가 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문명 자체를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길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거의 많은 부분에서 있다고 여기는 것들이 실제로는 환경에 따라 혹은 조건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것이고 이러한 것들 속에서 얽매여 살아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는 분명 어느 정도 이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통하여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나 자신의 사고 속에서 확고히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법과 제도 또는 사회의 교육을 통하여 유입되는 지식 또는 생각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인간의 사회가 만들어 놓은 허상이라는 것을 분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쓸데없는 고민이나 걱정에 휩쓸려 괴로움을 겪는 일이 점차적으로 줄어들 것이다.영화 부시맨을 보고 느낀 점은 단순한 문화적 상대주의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문화가 다르다고 어떤 문화를 비난할 수도 없고 비난해서도 안 된다는 문화적 상대주의를 인정하지만, 사실상 문화 역시 사람이 만들어 놓은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단지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사람은 이 세상의 존재 하지 않는 것을 사회 안에서 살아가기 위하여 만들어 놓고 서로 있다고 약속하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부시맨들은 미에 대한 기준도 다르다. 세계관도 다르며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도 다르다. 이 영화 속에서 배워야할 지혜는 우리의 사회 속에서 있다고 생각한 모든 것을 대상으로 과연 그것이 있을까? 존재할까? 라는 진지한 고찰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것인데 우리 스스로 있다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열등감에 빠진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일까? 부시맨의 영화를 살펴보면 정부와 반정부 조직과의 전투의 내용이 있다. 그들은 각각 자신의 신념을 위하여 사람들을 위협하고 죽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의 신념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일까? 오히려 자신을 괴로움의 바다 속으로 깊이 인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스스로 괴로움에 휩싸여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닐까? 우리의 삶이 행복한 꿈을 꾸는 것이라면 우리가 만들어 놓은 인식의 개념들과 사회적 법과 제도들이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행복한 꿈을 꾸기 보다는 악몽을 꾸는 것을 볼 때에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들이 얼마나 값어치 있는 것인가? 어찌보면 스스로 자학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독후감/창작| 2010.03.13| 3페이지| 1,000원| 조회(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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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학_노자와 장자의 사상
    Report:노자와 장자Ⅰ. 노자1. 노자의 생애BC 6세기경에 활동한 중국 제자백가 가운데 하나인 도가(道家)의 창시자이다. 성(姓)은 이(李), 이름은 이(耳), 자는 백양(伯陽),또는 담(聃). 노군(老君) 또는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 신성화되었다. 도교경전인 〈도덕경 道德經〉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현대 학자들은 〈도덕경〉이 한 사람의 손에 의해 저술되었을 가능성은 받아들이지 않으나, 도교가 불교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통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노자는 유가에서는 철학자로, 일부 평민들 사이에서는 성인 또는 신으로, 당(唐:618~907)에서는 황실의 조상으로 숭배되었다.노자는 그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신원이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생애에 대한 주된 정보원은 사마천(司馬遷)이 쓴 〈사기〉의 노자전(老子傳)이다. 그러나 BC 100년경에 〈사기〉를 저술한 이 역사가도 노자에 대한 확실한 정보는 제공하지 못했다. 〈사기〉에 따르면, 노자는 초(楚)나라 고현(古縣) 여향(術鄕) 곡인리(曲仁里:지금의 허난 성[河南省] 루이 현[鹿邑縣]) 사람으로 주(周:BC 1111경~255) 수장실(守藏室)의 사관(史官)이었다. 사관은 오늘날 '역사가'를 의미하지만, 고대 중국에서는 천문(天文)·점성(占星)·성전(聖典)을 전담하는 학자였다. 사마천은 노자의 벼슬에 대해 언급하고 난 뒤, 늙은 노자와 젊은 공자(孔子:BC 551~479)와의 유명한 만남에 대해 말했다. 이 만남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많은 논의가 있어왔다. 이 만남은 다른 문헌에서도 언급되어 있으나, 일관성이 없고 모순되는 점이 많아 단지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노자와 공자가 만났을 때 노자는 공자의 오만과 야망을 질책했고, 공자는 그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아 그를 구름과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용에 비유했다고 한다.노자가 서쪽으로 간 사실과 〈도덕경〉을 저술한 점을 언급한 뒤에 사마천은 가끔 노자와 동일시되는 다른 인물들에 대해 말했다. "초(楚)에 노래자(老萊子 없이 저절로 교화되게 하고, 맑고 고요하게 있으면서 저절로 바르게 되는 것을 가르쳤다. 실제로 중국 역사상 속세를 떠난 은자는 늘 있어왔다. 〈도덕경〉의 저자(또는 저자들)는 생애의 흔적을 남기지 않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노자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인가 하는 의문은 많은 학자들이 제기해온 것이지만, 그같은 의문은 별 의미가 없다. 현존하는 〈도덕경〉은 1명의 저작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 내용 가운데는 공자 시대의 것도 있지만 다른 내용은 훨씬 후대의 것임이 분명하므로, 이 책은 전체적으로 보아 BC 300년경에 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2. 노자의 사상노자 사상의 핵심은 도덕경이다. 도덕경은 약5000자, 81장으로 되어있으며, 상편의 37장의 내용 ‘도경’(道經)과 하편의 44장의 내용 ‘덕경’(德經)으로 이루어져 있다.1) 노자사상의 핵심- 도(道), 덕(德), 무위(無爲)'도덕경'이라는 책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노자사상의 핵심은 도(道)와 덕(德)이다. 노자가 보기에는 사회와 자연을 통틀어서 지배하는 진리(道)가 있는데, 그것이 도다. 그러나 초기의 도교사상을 기록한 문헌에 도와 덕을 강조하는 발언이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사실은 언뜻 납득이 되지 않을지도 모르나, 이들 고대문헌에서는 도와 덕 같은 관념들이 본래 도에 내포된 의미들 (공허, 태일, 무위) 을 뜻하는 다른 낱말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도덕경에서 어머니, 암컷 그리고 신비스러운 자궁 등의 관념은 공허라는 관념과 밀접하게 이어져 있다. 道家적 사유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의 하나인 공허의 문제는 도덕경 제5장과 11장에 다음과 같이 극히 상징적이고 시적인 문체로 묘사되어 있다.하늘과 땅 사이는 마치 풀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 속은 텅 비었지만 힘이 다하는 일이 없고,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힘이 더욱 솟아난다. (제5장)30개의 바큇살이 바퀴의 중심인 바퀴통에 집중한다. 바퀴통의 텅 빈 공간 속에 바퀴의 유용성이 있다. 출입구와 들창 구멍을 뚫어서 집을 도 덕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자 한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덕이 없는 것이다. 높은 덕을 지닌 사람은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아도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있다. 최상의 인애(仁愛)의 마음을 지닌 사람은 행동을 해도, 동기가 있어서 하는 법이 없다.최상의 도의심을 지닌 사람은 행동을 해도, 동기가 있어서 하는 것이다. 예의를 익히 잘 아는 사람은 행동을 해도, 그에 대한 반응이 없으면 소매를 걷어 올리고 상대방을 억지로 끌고 가려고 한다. 이런 까닭에 도가 사라지고 난 뒤에 인애의 마음이 사라지고 난 뒤에 도외심(度外心)이 생겨났고, 도외심이 사라지고 난 뒤에 예의가 나타나게 되었다. 대체로 예의란 충실과 신의가 희박해져서 생겨나는 것으로 사회적인 혼란의 첫걸음이 되는 것이다.미래를 예견하는 것은 도의 화려한 꽃이기는 하지만 어리석음의 출발이 된다. 그러므로 대장부는 도와 같은 돈후한 입장에 서지만, 예의와 같은 경박한 입장에 서지는 않고, 도라는 과실이 있는 성실한 입장에는 서지만, 지식이라는 화려한 꽃과 같은 입장에는 서지 않는다. (제38장)여기에서 노자는 덕이라는 말에 대해 두 가지 서로 다른 가치 기준을 적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곧 최상의 덕은 실제로 도 자체와 구별하기 힘든 것이고, 도가 지닌 효력이 바로 그러한 최상의 덕이라고 할 수 있다.도덕경의 사상은 추론적인 사고보다는 직관적인 인식을 우선시하고, 정적주의적인 방법을 통해서 궁극적인 실체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일종의 신비주의라고 할 수 있다(노자는 여러 곳에서 성인이 지니고 있는 우주의 신비를 꿰뚫어보는 특이한 통찰력을 지시하는 말로서 빛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우주의 신비는 "우리의 감각 능력이나 인식 능력을 초월하는, 빛으로 가득 찬 어두움"이다). 모든 신비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노자 역시 자신의 주장에 대한 어떤 합리적인 설명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그의 가르침은 의도적으로 애매모호하고 불명료하며, 흔히 한 가지 이상의 다층적인 의미로 해석되는 경우가 분화되어 있을 때만 도가 자연스럽게 구현되는 사회가 된다는 것이었다. 이상의 내용을 {도덕경}의 몇 구절을 통해 살펴보자.찬란한 五色의 빛은 사람의 시각(視覺)을 멍들게 하고, 난잡한 五音의 음악 소리는 사람의 청각(聽覺)을 혼란케 하며, 잡다한 음식의 맛은 사람의 味覺을 상하게 한다. 멋대로 말을 몰아 달리며 사냥을 하는 놀이는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만들고, 얻기 어려운 귀중한 재물(財物)은 사람을 타락시킨다. 그러므로 無爲自然의 道를 터득한 聖人이 다스릴 때에는 오직 生命의 근원(根源)인 배를 실하게 채워주는 일만을 할 뿐, 사특한 빛을 쫓는 눈을 위하는 人工的作爲를 꾸미지 않는다.聖人은 外形的 감각세계(感覺世界)를 버리고 내실적(內實的) 無爲自然을 취한다. (제12장)學文이나 智慧를 버리면 백성들의 利得이 백 배가 될 것이며; 仁義道德을 버리면 백성들이 本性의 효자(孝慈)로 되돌아갈 것이며; 기교(技巧)나 명리(名利)를 버리면 도적(盜賊)도 없게 될 것이다. 이상의 버려야 할 세 가지는 모두가 인간들이 조작해서 꾸민 가식적인 것이며, 그것으로는 백성을 잘 다스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백성들로 하여금 귀의(歸依)할 바 있게 해야한다. 즉 外面的으로나 內面的으로나 순진소박(純眞素朴)을 따라 지키고, 사심(私心)과 慾心을 적게 하는 것이다. (제19장)나라는 작고 백성은 적다. 유용한 도구들이 있지만 결코 쓰려 하지 않으며, 백성들로 하여금 죽음을 소홀히 생각지 않게 하고 멀리 떠돌지 않게 한다. 배와 수레가 있지만 타고 다닐 필요가 없고 투구와 갑옷이 있지만 쓸 일이 없으며 백성들도 문자를 버리고 다시 옛날처럼 새끼줄을 묶어 일을 기록하도록 한다. 그들로 하여금 거친 음식이 달고 거친 옷이 아름다우며 초라한 습속이 즐겁고 띠풀로 지은 집이 편안하다고 생각하도록 한다. 이웃나라가 서로 보이고 닭과 개짓는 소리가 서로 들려도 백성들은 늙어 죽도록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 (제80장))Ⅱ. 장자1. 장자의 생애BC 4세기에 활동한 중국 도가 초기의 가장 중요한 사상, 공자에 버금가는 성인으로 존경받는 유교사상가인 맹자와 같은 시대 사람이다. 열전에 의하면 장자의 가르침은 주로 노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지만 장자가 다룬 주제가 훨씬 광범위하다고 한다.장자는 자신의 문학적·철학의 천부적재능을 발휘하여 유가와 묵가(墨家 : 謙愛說을 주장한 묵자의 추종자들)의 가르침을 반박했다. 또한 유가의 가르침을 반박한 어부(漁父)·도척(盜c7501;)·거협() 등을 썼으며, 상상으로 지어낸 〈외루허 畏累虛〉·〈항상자 亢桑子〉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다. 장자는 자신의 이름을 딴 저서 〈장자〉(〈남화진경 南華眞經〉이라고도 함)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장자〉는 총 33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4세기에 읽히던 〈장자〉는 53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증거도 있다. 그 이후 수많은 판본이 나왔으며 〈장자〉에 대한 다양한 해석 때문에 본래의 내용이 불분명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장자〉 내편(內篇 : 1~7권)의 7편은 대부분 장자 자신이 지은 것이 분명하지만, 외편(外篇 : 8~22편)과 잡편(雜篇 : 23~33편)은 그 자신이 쓴 것도 일부 있는 듯하나 대부분 위작(僞作)으로 보인다. 그의 인품에 대해서는 〈장자〉의 내편과 외편에 나오는 일화들을 통해 잘 알 수 있다.)장자는 이 일화 속에서 개인의 안락함이나 대중의 존경 따위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은, 예측불허의 괴팍한 성인으로 나타나 있다. 그의 의복은 거칠고 남루했으며 신발은 떨어져나가지 않게 끈으로 발에 묶어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비천하거나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친한 친구인 혜시(惠施)가 부인의 상(喪)을 당한 장자를 조문하러 와서 보니, 장자는 돗자리에 앉아 대야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혜시가 장자에게 평생을 같이 살고 아이까지 낳은 아내의 죽음을 당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따지자, 장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아내가 죽었을 때 내가 왜 슬프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아내에게는 애당초 생명도 형체도 기(氣)도 없었다. ...이제
    사회과학| 2010.03.13| 7페이지| 1,000원| 조회(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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