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序言明朝는 이민족인 元王朝를 무너뜨리고 漢族王朝를 부활시켰다. 반면 淸朝는 이민족으로 明朝를 정복하고 성립된 王朝이다. 즉 明朝와 淸朝는 그 지배자가 민족적으로 완전히 서로 달랐다. 하지만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두 王朝가 지배하던 시기를 일련의 동시대로 보고 있다.) 明太祖 洪武帝가 완성하였던 皇帝獨裁體制는 淸朝의 康?雍?乾 時期에 절정을 맞았으며, 明朝중기 宣宗 宣德齊는 內閣大學士를 중심으로 한 內閣制度를 완성시켰고 이는 淸朝에 받아들여져 지속되었다. 또한 社會?經濟的으로도 16세기경에 출현한 手工業 發展이나 都市經濟 發展 그리고 銀經濟와 商品流通의 擴大도 明과 淸을 연속적인 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측면을 보여준다. 오히려 세계의 역사학계에서는 사회구조의 동질성을 그 근거로 하여 宋代로부터 第1次 阿片戰爭이전의 淸代 中葉까지의 900여 년간을 동시대로 보고 있다.)『中華帝國의 完成』은 본래『中國の歷史』에서 각각 明朝와 淸朝를 개설한 두 권의 책을 하나로 묶어 놓은 책이다. 譯者는 譯者後記에서 내용상 이 책의 제목을 ‘明?淸時代史’로 하여야 하나, 이 시대가 中華帝國秩序의 完結이라는 의미에서 ‘中華帝國의 完成’이라고 지었다고 밝혔다. 따라서 앞으로 이 책을 읽어 나감에 있어, 이러한 譯者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도록 하겠다.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책의 내용을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明朝와 淸朝의 關聯性을 파악하도록 하겠다.1. 中華帝國의 復活元末에는 白蓮敎를 바탕으로 한 反亂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잇따른 수재와 그에 따른 농토유실 그리고 기근과 질병이 그 원인이었다. 특히 河南行省은 元朝 治下 中國內地 가운데서 가장 백성의 생활이 불안정했기 때문에 白蓮敎徒들의 反亂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러한 反亂은 斷續的으로 일어났으며, 원조의 진압에도 불구하고 계속 나타났다. 이들 反亂集團들은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紅巾軍으로 불리고 있었다. 紅巾軍의 소란이 河南의 여러 지역에 파급되자, 여러 불평세력들이 봉기했다. 하지만 河南行省의 여러 反亂集일된 江南의 세력은 北伐을 개시하여 元朝를 멸망시키게 되었다. 그리고 朱元璋은 北伐이 진행 중이던 1368년 정월에 明의 皇帝(洪武帝)로 즉위하게 된다.明의 창업주 朱元璋을 民族解放의 旗手이자 農民軍의 領袖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地主階級的 성격을 띠고 있다. 朱元璋이 郭子興으로부터 독립하여 점차 군세를 확장시켰는데, 이 때 많은 義兵集團을 흡수하게 된다. 義兵集團은 地主들이 鄕曲의 保全 즉 체제와 질서의 유지를 목적으로 만든 紅巾軍과는 대립적인 집단이었다. 또한 地主 출신의 李善長의 투항과 紅巾軍과 저항하고 있던 馮國用, 馮國勝의 참가는 朱元璋 集團의 地主階級的 性格을 더욱 강화시킨다. 朱元璋 集團이 元朝의 주력을 피했었고, 오히려 民族主義를 슬로건으로 하고 있는 韓林兒?劉福通의 宋軍(紅巾軍)이 元軍과 격렬하게 대치하였다는 사실이 일면의 예이다.朱元璋은 元朝가 中國을 지배한 것을 天命으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역시 天命에 기초해서 明을 창업하게 된다. 전통적인 華夷思想에 의해 이민족 지배를 타도하려는 민족의식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元과 明의 교체도 이전의 왕조교체와 마찬가지로 易姓革命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明 太祖 치세 중반 경에 이르면, 中國 본토의 대부분이 明帝國의 영유로 들어오게 된다. 紅巾軍이 내걸었던 中華回復의 염원이 형식적으로 朱元璋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朱元璋이 明 太祖로서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국내의 몽고색을 일소하는 것이었다. 즉위 다음달에 詔勅을 내려 근 백년간 행해온 몽고의 풍습?언어?습관 일체를 금지시켰다. 하지만 건국 초 元朝의 관제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과, 文官보다 武官을 우대하였다는 측면에서 그가 元朝에 攘夷的 적개심을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다.漢朝의 유방과 더불어 朱元璋은 역대 王朝의 創業主 중에서 가장 미천한 신분 출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朱元璋은 그의 세력을 키울 때부터 地主階級의 도움을 받았으며, 이후 政策에 있어서도 地主 中心의 政策을 펴게 된다. 朱元璋에 의해 宋代 이후 유일한 漢族 淸朝에 까지 이어져 준수되었다. 太祖가 목표로 한 바는 강력한 中央集權體制의 確立이었다. 中央集權體制의 確立은 皇帝 獨裁權 强化로 이어졌다.太祖는 中書省과 그 장관인 丞相을 폐지하고 행정기관인 六部를 皇帝의 直屬으로 두었다. 또한 皇帝直屬官廳인 承宣布政使司, 都指揮使司, 梯形按察使司를 설치하여 지방행정을 분담케 했다. 軍事的인 측면에서도 大都督府를 설치하여 前?中?後?左?右의 五軍都督府로 개편하였으며, 각 都督府를 皇帝에 直屬시켰다. 이렇게 中央?地方의 行政機關은 물론 軍事組織까지도 직접 統轄하게 된 皇帝는 절대적인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여러 제도를 쇄신하면서 이룬 獨裁의 强化는 결코 평온한 가운데 실현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胡惟庸의 獄, 藍玉의 獄으로 일컫는 建國功臣들의 숙청, 錦衣衛라는 스파이 사용 등 음산한 공포정치를 통해서 가능했던 것이었다.明朝는 仁宗과 宣宗時代를 기점으로 해서 守成의 時代에 들어서게 된다. 皇帝가 모든 일을 親裁한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聖祖時代에 皇帝의 顧問役이나 秘書로서 內閣大學士가 설치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內閣大學士의 官位는 낮았으며, 단지 皇帝에게 奏請된 문서에 대해 皇帝가 결재해야 할 내용을 미리 준비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宣宗과 英宗時代에 이르면 內閣大學士가 宰相으로서의 권위를 가지게 된다. 內閣大學士의 권위상승은 皇帝權의 약화에서 발생된 것이 아니라, 楊士奇?楊榮?楊溥 등의 유력 신료가 內閣大學士를 겸직하면서 나타난 것이었다. 이러한 內閣大學士의 권위상승은 明朝가 文을 숭상하고 武를 천하게 여기는 中國 傳統的 王朝로서 본래의 체제로 복귀했음을 의미하며, 大臣이 支配體制의 一蹴으로 등장하였음을 말한다.3. 社會?經濟的 變化원래 中國에서는 옛날부터 銅錢이 통화로서 사용되어 왔다. 하지만 불편함을 이유로 銅錢은 점차 金銀과 ?의 사용이 일반화 되게 된다. 明帝國은 元朝 때에 이미 사용된 적이 있는 銅錢과 紙幣 兩本位를 실행하였고 銀의 사용을 禁하였다. 하지만 明 政府의 禁令에도 불銀經濟의 보급과 침투로 인해 각지에서 農民의 反抗運動이 시작되었고, 里甲制 또한 제도 자체가 갖고 있는 모순 때문에 해체되기 시작했다. 生存을 위한 農民層의 離農現像도 나타났다. 里甲制의 제도적 모순의 심화와 병행하여 地主制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商業과 貨幣經濟의 침투는 地主制 출현에 박차를 가했다. 農村은 심각하게 疲弊했으며, 農民들은 무거운 부역부담을 지고 있었고, 막대한 小作料를 지불해야만 했다. 더구나 銀을 중심으로 한 貨幣經濟가 農村의 생활상태에 변화를 요구하고 농기구와 비료는 물론 일용잡화까지 貨幣로 사지 않으면 안 되었던 시기였다. 따라서 지방의 農家의 대부분은 副業 즉 棉花栽培와 綿紡職業, 養蠶과 製絲?絹織業을 겸하여 經營하여야만 했다.江南地方을 중심으로 農民에 의해 상품생산으로 綿業과 絹業이 발전하였다. 상품생산은 市場의 성립과 商業資本의 활동을 전제로 성립하였으며, 상품생산의 거점으로서 都市가 발달하게 된다. 원래 江南地方에서는 運河의 근방을 중심으로 일종의 都市가 성립하고 있었다. 하지만 明代에 이르러서는 農村에서의 綿業과 絹業의 전개에 힘입어 都市가 한층 더 급속히 이루어지게 된다. 이 과정의 일환으로 이전의 정치적 중심지로서의 消費都市가 아닌 대규모의 生産都市가 발전하게 된다. 綿布로 번영한 松江, 生絲와 絹織物로 발전한 湖州?嘉興?杭州, 鹽業의 중심지인 楊洲 등이 그 예이다.都市의 발달과 生産活動의 발흥과 함께 庶民 또는 市民이라고 일컬을만한 사람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明代의 文化가 中國의 르네상스라 불릴 만큼 발달하게 된다. 庶民層의 대부분은 商人이었다. 商人들은 生産都市를 거점으로 하여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陽明學의 영향을 받아 通俗小說이 유행했으며, 戱曲에서도 많은 걸작이 나왔다. 文化의 질은 이전보다 떨어졌지만, 그 양은 확대되었다. 즉, 明代의 문화는 民衆性과 庶民性의 지향인 것이다. 이러한 庶民性의 지향으로 實用的인 學文이 발달하게 되고, 實用主義의 확산은 많은 百科全書의 출판으로 나타났다.4. 明?淸官僚集團 사이의 내분의 격화를 들 수 있다. 宦官 魏忠賢으로 대표되는 ?黨勢力(反東林派)은 恐怖政治를 통하여 東林波로 대표되는 紳士層을 압박하였다. 魏忠賢은 東廠을 지배하여 警察權을 장악하고 각종 구실을 붙여 東林黨에 탄압을 가하였다. 書院은 파괴되고 講學은 금지되었으며, 이에 반대하는 자는 左遷이나 免職 심하면 죽음에 이르기도 하였다. 魏忠賢 死後 東林黨이 정권의 자리를 획득하지만, 魏忠賢의 탄압으로 유력한 지도자를 모두 잃은 東林黨은 현실의 정사를 처리할 능력이 부족하였다.人心은 모두 明朝를 떠나 국내 각지에는 굶주린 農民들이 蜂起했으며, 遼東방면에서는 女眞人들이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하여 국경을 위협하고 나왔다. 당시 女眞人들은 분열되어있던 각 부족들을 누르하치가 통일하여 後金이라는 王朝를 세우고 있었다. 後金은 강력한 精銳軍인 八旗를 중심으로 호시탐탐 明을 노리고 있었다.한편 明은 내부의 혼란이 극에 달하게 된다. 파멸적인 財政을 재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으며, 東林과 反東林의 黨爭도 계속되었다. 오히려 內外의 騷亂을 진정시키기 위해 增稅를 敢行해야했으며, 增稅에 대한 반발을 막기 위해서 다시 增稅를 敢行해야했다. 앞서 설명했듯이 내부의 혼란은 農民蜂起의 형태로 나타났다. 農民蜂起 中 明에게 가장 심각한 타격을 준 것이 李自成의 亂이었다. 당시 李自成 軍團은 農民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백만이라는 大勢力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李嚴과 牛金星 등의 지식인층을 포섭하여 農民軍의 首領에서 政治的 指導者로 탈바꿈하게 된다. 明은 강력한 李自成 軍團을 막아낼 힘이 더 이상 없었으며, 결국 1644년 3월 19일에 歷史의 幕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李自成 軍團도 淸으로 이름을 달리한 女眞人들에 의해 곧 瓦解되고, 中國에은 女眞人들에 의해 세워진 淸이라는 새로운 王朝가 탄생하게 된다.5. 中華帝國의 完成淸朝는 明朝를 위해 李自成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吳三桂의 안내를 받아 北京에 無血入城하게 된다. 이후 淸朝는 李自成 軍團을 패퇴시키고 신속하게 江南地方
0. 머리말최근 수년간 대중적인 인문학서적의 출간이 붐을 이루고 있다. 그동안 상아탑에만 머물고 있었던 인문학이 이제야 비로소 대중들에게 다가간 것이다. 어려운 문체와 용어들은 대중들로 하여금 인문학 서적과 가까워 질수 없게끔 하였다. 하지만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비롯하여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등은 충분한 고증과 정확한 사료분석 그리고 쉬운 문체로 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특히 전공을 하지 않은 비전문가가 개인적인 연구만으로 책을 썼다는 사실은 대중들로 하여금 더 쉽게 책으로 다가갈 수 있게 하였다. 그렇지만 유행에 편승할 뿐, 고증과 사료분석이 제대로 되지 않은 많은 책들이 비전문가에 의해 양산되었고, 이런 책들이 대중의 눈과 생각을 어지럽히는 것도 사실이다.‘중국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라는 제목의 이 책은 일단 전공자가 썼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아무리 전공자가 썼다고 하더라도, 충분한 자료수집과 사료의 분석이 없다면, 책을 읽는 이유조차도 애매해질 것이다.저자는 지금까지의 역사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소홀히해왔던 부분, 즉 일반인들의 삶의 모습을 좀 더 구체적으로 그려보고, 그 속에서 시대상을 발견하려는 의도로 이 책을 썼다고 하였다. 따라서 앞으로 이 책을 읽어나감에 있어, 저자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고, 나아가 저자의 의도가 대중적 역사서의 요건을 얼마나 충족하고 있는지 분석하도록 하겠다.1. 식생활중국인의 주식을 이야기 할 때, ‘開門七件事’ 라고 한다. 문을 열면 필요한 일곱 가지의 물건이라는 뜻이다. 그 일곱 가지는 각각 땔감, 쌀, 기름, 소금, 장, 식초, 차를 말한다. 저자는 이 중에서 곡물과 소금, 그리고 차를 중국 사람을 얘기하는데 사용한다. 그리고 주식은 아니지만 중국 사람을 이야기 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술도 함께 얘기한다.농경민족인 중국인은 곡물을 주식으로 생활해왔다. 漢書에는 ‘王者以食爲天 民者以食爲天’ 라는 구절이 나온다. 통치와 백성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음이 같은 의미임을 설명하는 말이다. 그리고 화폐가 발달하기 전에 곡물이 교환수단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즉 곡물의 작황이 중국인 모두에게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기근이 들면 국가 재정의 위기가 올 뿐만 아니라, 민심이 흉흉해져서 폭동과 반란이 일어나기 때문이다.소금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지만, 인체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물질이다. 게다가 인간이 화식을 한 이후, 음식의 맛을 내는 소금은 더욱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지금이야 쉽게 소금을 얻을 수 있지만, 예전에는 소금은 금만큼이나 귀했다. 그리고 국가의 재정수입의 많은 부분을 소금이 차지했다. 그리고 유목민족과 교류와 전쟁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한편, 차는 물이 좋지 않은 중국에 있어 필수적인 품목이다. 풍류를 즐기는 사대부의 문화와 더불어 차문화는 발전하였다. 또한 영국과의 아편전쟁도 차에 원인을 둘 수 있다.이러한 음식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음식도 문화이기 때문에, 자연히 여러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저자는 이에 자연환경과 사상을 꼽는다. 책의 순서에서는 식생활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요건을 먼저 제시함으로서 식생활에 대한 논의를 더욱 분명히 한다. 중국의 광대함은 다양한 식문화 발달의 원인이 되었다. 東辣西酸南甛北鹹이라는 말이 이를 증명한다. 각 지방의 기후에 따라 재배 가능한 농작물이 다르고, 사람들의 성격이 다르다. 그리고 중국을 지배한 사상들이 식문화에 영향을 미친다. 중국인의 사고와 논리의 근저에 있는 陰陽五行思想은 음식을 효과적으로 섭취하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유교사상은 음식의 섭취에 있어 절제해야 함을 제시한다. 살생을 금하는 불교사상은 다양한 채식을 발전시켰다.음식은 우리에게 있어 생존과도 결부된 중요한 요소이다. 이런 음식은 문화를 형성하며, 지속적으로 계승되고 변형된다. 음식을 통해 그 나라의 문화에 접근하는 방식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역사적인 고찰과 더불어 음식문화를 그 나라의 문화에 접목하는 것은 보다 의미 있고, 수용하기 쉬운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2. 의생활인간이 옷을 처음 입은 이유는 추위와 비바람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하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인간이 생존본능으로 음식문화를 발달시킨 것이 아니듯이, 의복문화에도 다양한 함의가 내재한다. 인간의 모든 활동이 역사학의 대상이 될 수 없듯이, 저자는 의복에 숨겨있는 다양한 사회적 의미를 파악하려고 한다. 즉, 의생활이 생산력과 과학기술의 발전 수준, 사회제도, 종교, 사회계층, 정치권력과 어떻게 연관을 맺어왔는지 역사적으로 고찰하려고 하는 것이다.음식문화처럼 의복도 자연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지금이야 모피가 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도 모피코트를 팔지만, 자급자족했던 시절에는 자연조건에 걸맞은 의복이 주류를 이루었다. 서민들은 칡옷과 갓옷을 입었다. 주위에서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을 의복으로 삼은 것이다. 반면 지배층이나 부자들은 비단옷을 입었다. 이처럼 의복은 신분과 지위의 상징이 되기도 하였다. 黃袍는 황제만 입을 수 있었으며, 신분에 따라서 의복의 색상이 제한되기도 하였다. 상업을 천시하던 그 때에는 상인에게 비단옷을 입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의복도 사상의 영향을 받는다. 특히 예절과 형식을 중요시하는 유교사상은 의복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신분에 따른 의복의 차별은 유교사상에서 기인한 것이다. 옷뿐만 아니라 모자와 두건 그리고 패에도 영향을 미쳤다. 문무백관들은 관등에 따른 의복을 입어야했으며, 여러 가지 의례에서도 의례에 맞는 의복을 입어야 했다. 그냥 입으면 되는 옷이 아니었다. 王莽이 세운 新은 의복이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으며, 漢武帝 때 武安候 田恬이라는 사람은 의복 때문에 작위와 봉토를 삭탈 당했다. 의복에 관념이 담긴 것이다.지금도 유행이 있는 것처럼, 과거에도 유행이 존재했다. 사람들은 시대 별로 다양한 유행을 발전시켰다. 유행은 사회의 분위기에 편승한다. 유목민족이 강세였을 때는 胡腹이 유행하기도 했으며, 한족이 강세였을 때는 민족성을 되살리려는 의복이 유행하였다. 그밖에도 다양한 화장법과 부속물들이 유행하였다. 그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전족이었다. 여성억압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알려진 전족은 중국사에 널리 분포한다.이처럼 의복은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의미를 하나하나 풀어헤치는 것이 쉽지 않았을 터이다. 식생활과 같이 의복 또한 문화를 형성한다. 그리고 그 문화를 설명하는 데는 역사보다도 좋은 도구는 없을 것이다.3. 주택과 기거지금이야 다 똑같은 콘크리트 건물이지만, 예전의 집은 자연환경과 생활방식과 최대한 조화를 이루었다. 또한 일상의 공간인 주택은 사람의 이상향에 맞추어 건축되었고, 이 또한 문화인지라 사회적 규범과 제도의 영향을 받았다. 음식과 의복이 사람의 개인의 영역이라면, 주택은 공적 영역이다. 주택과 도시는 인간이 무리지어 살아가는 모습을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마찬가지로 주택에도 자연환경과 사상의 모습이 배어있다. 드넓은 중국은 다양한 건축문화를 꽃피웠다. 황토고원 지대의 주민들은 窯洞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동굴 집을 만들었다. 압축과 건조에 단단해지는 황토의 특성을 이용해서 만든 것이다. 이곳은 사람이 살기에 늘 적당한 온도를 유지한다. 에스키모들의 이글루처럼 자연환경에 적응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폐쇄적인 客家들에게는 土樓라는 폐쇄적 원통형의 가옥이, 변방지역에는 한족에 동화되지 않은 많은 소수민족들이 나름대로 독특한 주거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風水地理思想은 많은 중국인들의 주택관념에 내재하고 있다. 방위와 인간의 길흉화복의 관계를 이론적으로 정리하였다. 또한 중앙을 중심으로 한 건물의 배치는 황제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의 반영이다.중국에는 수많은 왕조가 존재하였다. 왕조는 사라지고 없지만, 왕조의 흔적이 남은 都城들은 중국 곳곳에 산재해 있다. 都城은 역사의 흐름을 대변한다. 문명의 발상지 黃河에서부터 북경에 이르는 각 도성들은 각 나라의 이념과 사상을 보여준다.한편 도시의 발달은 서민 문화를 꽃피운다. 당대의 폐쇄적인 坊制는 송으로 오면서 허물어진다. 그리고 도시가 정치?군사적인 기능에서 벗어나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성내에는 시장, 다방, 술집, 공연장들이 즐비했다. 이는 서민들의 지위가 높아졌음을 대변하는 것이다.이처럼 중국인은 사상과 자연환경을 토대로 다양한 건축물을 만들었다. 건축물은 그들의 공동체적인 바램과 생각을 나타낸다. 저자는 이를 다양한 자료의 제시를 통해 설명하려 한다. 특히 淸明上河圖는 문자에 갇혀버릴지도 모르는 설명들을 一目瞭然하게 정리한다. 그리고 사진자료들은 상상의 영역으로 가서는 안 되는 설명을 실제의 영역으로 이끌어 준다. 사실자료와 사료분석은 이해를 한층 도와준다. 대중서가 가지는 요건을 모두 충족함을 느끼게 되는 부분이다.4. 교통과 통신인간이 생존을 위해 필요한 요건을 꼽으라면 의?식?주를 꼽는다. 저자는 여기에 교통과 통신이라는 또 하나의 요소를 덧붙인다.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일국가를 염원했던, 중국인의 생각을 담아보려는 요량이다.거대한 영토의 중국에 교통과 통신 시설이 발달하지 않았다면, 그 넓은 영토는 통합될 수 없었을 것이다. 다양한 교통로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 運河이다. 運河는 남북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였으며, 인간이 만든 토목이었다. 남과 북의 다른 자연환경만으로도 運河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다. 運河를 통한 세량의 운송은 각 왕조를 지탱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였으며, 지역간의 경제적인 교류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運河는 인공물이다. 즉, 사람의 노동력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사람의 노동력이라 함은 백성의 노동을 말한다. 隋의 양제는 운하건설을 위해 200여만 명의 인원을 동원하였고, 노동의 고통에 견디지 못한 백성들의 반란은 隋의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
0. 들어가며)1662년부터 1722년 까지 61년 동안 대륙을 호령했던 강희제(康熙帝)는 역대 중국의 황제 중 가장 오랫동안 즉위한 황제이다. 그는 1673년부터 1684년 동안 지속되었던 삼번(三藩)의 난을 평정하여 청조 지배의 기초를 확립했으며, 1684년에는 타이완(臺灣)을 20년 동안 장악하던 정성공(鄭成功) 일당을 토벌하였다. 이어서 헤이룽장(黑龍江) 방면의 러시아를 몰아내었으며, 1689년 중국 역사상 최초의 대외 조약인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스타노보이산맥의 서쪽 지역을 회복했다. 1690년에는 외몽고까지 침입해온 준가르(準喝爾)의 갈단(喝爾丹)을 토벌하고, 세 번의 친정으로 갈단을 자살하게 만듦으로서 외몽고를 판도 안에 집어넣었다. 또한 1718년에는 갈단을 계승한 체왕 아라푸탄(策妄 阿拉布坦)이 티베트에 들어가 세력을 떨치게 되자 티베트에 원정하여 그 지배권을 빼앗고, 중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다. 특히 삼번의 난의 평정이후에는 이에 소비되던 막대한 비용이 필요 없게 되어 국가 재정은 여유가 생겨 안정을 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50년간의 면세 총액이 1억 냥(兩)을 넘었으며, 1712년에는 인두세를 정액화(盛世滋生丁)하는 등 내정 상으로 안정된 시대를 이루었다. 청의 입관(入關) 이후 강희제는 청(淸)의 기틀을 닦았고, 중국 역사상 최대의 황금기인 강희제(康熙帝)-옹정제(雍正帝)-건륭제(乾隆帝)를 잇는 청의 전성기의 근간을 이루었다.위와 같은 강희제의 모습에서 인간적인 모습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강희제의 업적 때문이 아니라, (비록 용렬(庸劣)한 황제일지라도) 황제라는 이름 그 자체가 갖는 권위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만큼은 강희제의 인간으로서의 즉, 한 사람의 아버지로서, 그리고 지도자로서의 면모가 눈에 띄게 들어난다. 비록 필자 스스로가 강희제 자신의 독특한 인간적인 면모를 이 책을 통해 보여 주는 것이 부적절하며, 주제 넘는 일이라고 하지만 말이다. 앞으로 이 책을 읽어 나감에 있어 필자의 의도에 맞추어, 강희제의 태도나 가치관이 스며 있는 그의 진짜 목소리를 찾아볼 것이다. 즉, 산더미 같은 조서(詔書)나 주접(奏摺), 상유(上諭) 등에 묻혀있는 황제이자 인간이었던 강희제의 단편적인 목소리를 찾아내려고 노력할 것이다.1. 사냥과 원정강희제에게 있어 사냥은 단순한 유흥(遊興)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사냥은 기본적으로 운동을 위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그에게 있어 사냥은 전쟁훈련이며, 훈련과 조직에 대한 시험이기도 했다. 이처럼 강희제는 매사에 치밀했다. 갈단 원정을 떠날 때, 그는 예상할 수 있는 모든 것(전장의 지형, 기후, 적의 행동 등)을 준비했고, 병기와 말 하나하나에 이름표를 붙이기도 한다.그는 실용적인 사고를 보이기도 한다. 강희제는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라고 보았다. 그는 경험을 통한 축적으로 천문과 지리를 통달하였다. 이는 갈단 원정에서 진가를 들어낸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 전쟁에서 꼭 필요한 것은 굽힐 줄 모르는 의지와 치밀한 계획이었다. 병법서의 지침은 그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또한 격식도 이동중이라면 간소화되었다. 황제가 앞에 있더라도 말에서 내리지 않아도 되고, 간소한 음식도 용인이 되었다.그러는 가운데에서도 강희제는 인간적인 면모를 잊지 않는다. 백성의 생명에 위해를 주는 사냥 법을 금지하였으며, 굶어 죽은 갈단의 부하들의 시체를 장사지내주기도 한다. 또한 행군 중에 약탈을 금하고, 마을 주민과 부녀자를 폭행하거나 강간하지 못하게 했다.즉 강희제는 자랑스러운 만주족의 용사(勇士)이자, 일국의 황제(皇帝)였던 것이다.2. 다스림그는 권력(權力)을 사용함에 있어 정확하고 신중했다. 특히 권력이 사람의 목숨과 관련된 형벌에 있어서는 그는 신중했다. 강희제 스스로가 이르길 통치자는 항상 처형하기 전에 신중히 검토하고, 범죄자들에게 삶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개과천선(改過遷善)하리라는 희망을 가져야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강희제는 사형자(死刑者)들의 목록을 검토함으로서 많은 사람을 살려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사형이 가지는 효과를 누구보다도 잘 이용한 것이 강희제였다.삼번(三藩)의 난은 그에게 있어 뼈아픈 고통이었다. 그에게 있어 승리자의 칭호 같은 것은 한낮 허상에 지나지 않음이었다. 삼번의 난 기간 내내 강희제는 침체되어있었으며, 기력이 소진되거나 병이 나기도 했었다. 그는 삼번의 난을 평정하면서 백성들이 겪은 고통에 대해 내내 크게 자책하였다. 강희제는 지방관들에게 그가 진실로 백성들의 생계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그의 긍휼(矜恤)이 백성들에게 미치는 것을 방해하는 속임수나 사실을 은폐하는 행위는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고 경고했다. 그는 훌륭한 정치는 백성들로 하여금 편히 쉬게 하는 것이며 정치를 잘 한다는 것은 백성을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인구가 확실히 증가하고 있지만 그것에 비례하여 토지면적은 늘어나지 않으므로 인구증가에 맞추어 정(丁)에 대한 세금을 증대시키는 조치는 타당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세금징수를 위한 정의 수를 고정시키고 이보다 증가한 인구를 성세자생정(盛世滋生丁)으로 등록시켜 이들에게 인두세(人頭稅)를 부과하지 않았던 것이다.강희제는 황제로서의 책임감(責任感)을 가지고 정사(政事)에 임했다. 그는 지방의 사정에 정통하려고 노력했으며, 직접 순행을 하거나, 주접(奏摺)을 통해서 정보를 얻었다. 신하들은 그에게 상주문(上奏文)을 올려야 했다. 그는 상주문을 처리해야했다. 평상시에는 하루에 쉰 건 정도의 상주문을 처리하였고, 우싼구이(吳三桂)의 난이 발생했을 때는 하루에 500건의 업무를 처리했다. 그 때는 직접 그가 붓을 잡거나 서류를 작성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정을 넘어서야 겨우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신하에게 알맞은 자리를 찾아 임명하였고, 이것이 잘못되었을 때는 바로 시정하였다.비록 우리의 삶은 운명이 좌우하지만 그 운명이란 우리의 마음에서부터 생기는 것이고 행복은 인간 스스로가 창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최선을 다한 다음에는 천명에 맡겼다(盡人事待天命). 그는 이것을 농부가 들판에서 열심히 일하고 나서 좋은 날씨를 기대하는 마음과 같다고 했다.강희제는 다스림에 있어 무엇보다도 백성의 모습을 보려고 노력하였다. 그가 발달시킨 주접제도는 지방관의 감시도구가 아닌 백성의 모습을 보려는 거울이었다. 성제자생정(盛世滋生丁)은 이러한 애민정신(愛民情神)에서 나온 발로(發露) 인 것이다. 또한 황제로서의 근면성도 보여주었다. 제왕으로서의 면모를 모두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3. 사고(思考)강희제에게 있어 공부와 경험은 모두 중요한 요소였다. 그는 특히 공부에만 매몰되어 경험에 무지한 이들을 조롱하였다. 책상이나 서가에 올려놓고 가끔씩 쳐다보는 골동품 같은 지식을 경계했던 것이다. 그는 남순(南巡) 중에 공자(孔子)의 생가에 찾아 가기도 하였으며, 그가 타는 황선(皇船)의 건조도 직접 감독하기도 하였다.또한 강희제는 항상 개방적인 사고를 가졌다. 앎에 대해서는 신분을 가리지 않았다. 그는 서양선교사들로부터 새로운 것은 항상 받아들였다. 제례식(祭禮式) 논쟁)에 있어 로마 교황청(敎皇廳)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을 때도 그는 서양의 수학학문이 높은 경지에 있음을 이유로 서양선교사를 감싸기도 한다.그는 역사 편찬에 있어서도 개방적인 자세를 취한다. 물론 문자(文字)의 옥(獄)이 잔존해 있어, 다이밍즈(戴名世)는 남산집(南山集)에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였다는 이유로 일족(一族)이 모두 사형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선왕조에 대한 비판만이 아니라, 장점을 보려고 하였던 강희제의 노력은 그 당시로서는 파격이었을 것이다.이렇게 다양한 방면에서 강희제는 자신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킨다. 실제로 그는 다양한 학문에 정통했다. 그는 학문함에 있어 항상 실증적인 자세를 추구하였으며, 개방적으로 모든 것을 아울러 배우려고 하였다. 아마도 이러한 강희제의 강한 지적 호기심과, 개방성에서부터 중국 최대의 유서(類書)인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의 편찬과 《강희자전(康熙字典)》의 출판이 비롯되었음은 자명한 것이다.4. 장수(長壽)앞선 1~3장에서 열정적인 강희제의 모습이 보였다면 후술(後述)될 4~6장에서는 한없이 나약해 보이는 한 인간의 모습이 보인다. 점차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나약해지는 강희제의 모습이 들어나게 된다.그는 황제의 처지에 대한 한탄을 한다.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정신이 가물가물해진다고 한다. 이럴 때 관료들은 늙고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는 점을 이용하여 은퇴(隱退)할 수 있으나 황제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되뇐다. 이것은 아마도 황태자 인렁의 문제로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참을성이 없어져 여름을 쉬 견디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과, 체왕 아라푸탄(策妄 阿拉布坦)의 반란을 쉽게 진압할 수 없음을 그의 나이에 빗대어 한탄(恨歎)하기도 한다.이러한 강희제의 모습에서 인간의 모습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신(神)과 범주를 같이하는 황제도 늙고 병들게 되면, 이렇게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5. 황자들산술적으로 강희제는 서른여섯의 아들과 스무 명의 딸을 두었다. 물론 그중 스물여덟의 아이들이 태어난 지 얼마 못되어 죽었지만, 아들(황자)만 스무 명과 딸(공주) 여덟 명이 남았다.강희제는 자신의 아이(皇子)들에게 늘 검소함을 일깨우려고 했다. 그리고 학문과 무예에 있어 근면한 모습을 보이기를 요구했다. 특히 그는 둘째 아들인 인렁을 총애했다. 글읽기를 몸소 가르치고, 한림원의 뛰어난 학자들로 하여금 도덕을 가르치게 하였다. 게다가 강희제가 갈단정벌을 하기 위해 원정(遠征)을 떠났을 때, 강희제를 대신하여 정사(政事)를 돌보기도 하였다.
0. 序言마크엘빈의 ?中國歷史의 發展形態?에서 엘빈은 과학과 기술상에서 선진국이었던 中國이 14세기 이후 경제가 서서히 쇠퇴한 이유를 분석하였고, 그 주된 이유를 과학과 기술의 침체로 보았다. 이후 中國 社會와 經濟는 오직 양적 성장만이 있었고 질적 발달은 정지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한마디로 中國 社會는 發展이 없는 成長을 지속해왔다는 것이다.그렇다면 中國 社會는 지극히 정체적인 사회였을까?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이 책을 끝까지 읽어봐야 알 수 있는 것일 테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西歐人들이 아시아 세계를 바라볼 때 西歐的 價値를 매개로 사용하는 것이 옳은지의 여부이다.이 책의 著者도 마크 엘빈과 같은 西歐人이다. 譯者 序文에 따르면, 이 책은 기존의 개설서처럼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저자 자신의 뚜렷한 관점에 의거하여 각 주제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저자 스스로로 서문에 “중국은 너무 크고, 생활이 너무 다양해서 아주 다양하고 모순된 해석이 가능하다.”는 林語堂의 경고나 “풍습은 10리마다 바뀐다.”는 중국 농민의 속담을 마음속에 담아둘 것을 조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서구인의 편협한 가치관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 것일까?이 책은 中國人의 삶의 모습부터 産業과 階級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부분을 10여 장에 걸쳐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本 著에서는 10장으로 나누어진 책의 내용을 편의상 유사한 내용을 통합하여 여섯 부분으로 다시 나누었다. 앞으로 이 책을 읽어나감에 있어, 著者가 가지고 있는 西歐的 價値를 얼마만큼 표출하였는지 그리고 그것이 정당한지 파악하도록 하겠다.1. 中國에서의 人口增加와 移動明代와 淸代에 경제와 사회의 제도, 그리고 삶의 방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단일 요소는 계속해서 增加하는 거대한 人口였다. 人口統計에 대한 불신에도 불구하고 人口變動의 일반적 추세는 분명하였다.모든 傳統的인 農業社會에서 그렇듯 기근과 역병이 주기적으로 人口를 조절했으나 18세기에 이르면 人口가 급격히 增加한다. 이에 대해서는 몇 가지바탕으로 했다고 할 수 있다.2. 中國人의 삶家族이라는 관념은 中國과 現代 西洋사이의 차이를 뚜렷이 보여준다. 中國에서의 子息은 가문을 잇고, 노후나 사후에 부모를 봉양하기 위한 존재로 귀하게 여겨졌다. 家族이란 제도는 매우 중요해서 中國의 사회적 가치와 사회조직을 특징짓는 말로 ‘家族主義’라는 용어까지 만들어졌다. 家族은 사회질서의 전략적 중심이었다. 즉, 中國人에게 있어 家族은 생산과 소비를 함께 하는 ‘經濟單位’이자 가족의 생전과 사후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의식을 행하는 ‘宗敎單位’였다. 나아가 구성원 중 빈궁한 자나 노령자를 돕는 ‘社會保障組織’이기도 했다.하지만 家族은 항상 붕괴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부잣집이 그러하였다. 자녀균분상속 그리고 사회적 상승과 하강이라는 법칙 때문이었다. 개개의 家族에서 보이는 분열의 경향을 극복하기 위해 ‘族’이 형성되는 경우가 있었다. 강력한 宗族은 자신들의 귀속성을 유지하고 위신을 높이고 협동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族譜를 편찬했다. 族譜를 통하여 내부서열을 정하고 宗族의 재산에서 나오는 이익을 누가 향유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었다. 宗族은 하향이동의 경향성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에 家族主義의 가치관을 지탱하는 귀중한 버팀목이 되었다.역사의 여명기에 中國은 女家長社會였다고 추정되지만 역사시대에 들어와서 女性은 사회에서 가장 멸시받고 수탈당하는 존재가 되었다. 家族主義가 요구하는 가계를 이어나가는 일은 아들의 몫이었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女子는 부모에게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女子가 어른이 되기 위한 가장 고통스런 첫 단계는 纏足을 하게 되는 때였다. 纏足을 하는 주된 이유는 성적 매력 때문이었다. 작은 발은 아름다움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멋, 사회적 지위, 교양의 상징이었다. 또한 纏足으로 女性의 행동범위를 크게 제한함으로써 12세기 신유학이 공식화한 女性의 덕목으로 보강하고 女性의 격리를 실현하는데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렇게 보면 纏足은 女性을 종속화하고 男性의 지배를 확실히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中비적처럼 생각했다. 때문에 鬼를 경멸하지만 가볍게 여길 수는 없다고 보았다. 이리하여 중국인은 정기적으로 鬼에게 祭物을 바쳤다. 祭物을 바칠 때 중국인은 세 종류의 초자연적인 존재를 명확하게 구별했다. 祖上은 家族의 소중한 일원으로서 받들었고, 神은 그 지위에 따라 祭物을 달리했으며, 鬼는 비천한 존재이므로 어떤 형태의 음식이라도 바칠 수 있었다. 이러한 民間 信仰의 대부분은 가정에서 개별적으로 행해졌다.民間信仰이 그토록 오래 이어지고 광범위하게 社會에 침투한 것을 보면 人間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킬 능력이 民間信仰에 충분히 있음을 알 수 있다. 中國의 民間信仰도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세속적 기능을 한다. 民間信仰은 家族主義의 큰 지주역할을 한다. 民間信仰의 널리 산재해 있는 성격 때문에 中國의 王朝國家도 신성불가침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국가의 의식은 민간 종교의 일부이며 이 둘은 사실상 구분이 불가능했다. 사회적 효용이란 면에서 民間信仰은 긍정적인 면이 있었다. 神들에 대한 祭祀와 行祀는 동시에 1년 중 民衆이 즐길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되었다. 民間信仰에은 뚜렷하고 독립된 도덕적 가치 체계는 없었으나, 세속의 도덕규율을 강화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淸朝 末期 지방에서 행정 및 교육의 近代化를 추진하자 民間信仰은 물질적, 경제적으로 극심한 타격을 받았다. 中華民國이 되어서도 이 방침은 계속되었다. 행정과 교육에 불어 닥친 近代化의 폭풍은 전국을 휩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부터 40년대에 걸쳐 행해진 農村조사를 보면 神들에 한 宗敎的 믿음은 庶民의 생활을 계속 지배하고 있었다.이재정의『중국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가 衣?食?住?行을 통하여 中國人의 삶을 분석하였다면, 이 책은 家族과 民間信仰을 통해 中國人의 삶의 모습을 분석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재정이 中國人의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것들을 분석의 도구로 사용했다면, 이스트만은 中國人의 삶 내면의 價値觀과 精神世界를 조명했다고 할 수 있다. 價値觀이나 精神世界를 조명한다다. 農民이 小作農이 되는 것은 단지 절박한 상황 때문만은 아니었다. 農業 經營은 소규모보다 비교적 규모가 클 때 더 효율적인 경향이 있기 때문에 먹고 살만한 自營 小作農民도 자신이 소유하는 農地에 小作地를 더해서 경영면적을 넓혔다. 어떤 경우는 地主와 小作農民을 겸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것들을 보면 地主制가 바로 착취는 아니며 또한 小作이 곧 빈곤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小作農民의 생활에 여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農民의 대다수는 小作農民이건 自作農民이건 최저생계수준을 결코 크게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19세기 후반에 이르면 도시의 증가, 값싼 교통수단, 외국의 수요 증대에 자극 받아 더욱 많은 農民이 특화된 商品作物을 생산했다. 商品作物의 특화 정도는 교통수단의 이용도, 토양조건, 도시나 시장까지의 거리에 따라 달랐다. 시장생산을 위한 작물특화에는 위험이 뒤따랐다. 영세한 農家는 시장의 불안정성에 얽매였고 商品作物을 생산하는 것은 주곡을 생산하는 것보다 자본이 많이 들었다. 商業化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농업부문에서 늘어나는 인구를 지탱해주는 중요한 支柱였다. 그러나 가격이 하락하고 경제적으로 혼란한 시기에는 商品作物에 의존하게 된 農民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었다.전통시대 農村生活의 고달픔은 지역 엘리트인 紳士, 마을의 指導者, 地主에 의해 완화되었다. 그들은 農民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을 신분상의 의무로 알았다. 그러나 19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이들 전통적 지역 엘리트는 농촌지역에 거주하지 않았다. 이런 ‘사회적 침식’과정은 20세기에 가속화하였고 農民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20세기 중국에서 경제를 침체시키고 사람들을 괴롭힌 최대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1911년 辛亥革命 직후 전국을 뒤덮은 전쟁과 폭력, 정치적 불안이었다.19세기에 이미 中國의 農村 상황은 파산상태였으며 그 후 農民生活은 매우 비참했는데 빈번한 秘密結社와 農民의 反亂이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19세기 후반 民國時代 이능력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세 번째 요인은 사적인 재산이나 사업에 대한 투자가 정부의 수탈 때문에 不安定했다는 것이다. 네 번째 요소는 시장의 수요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다는 점이다. 시장 수요의 안정은 生産性의 향상에 조금밖에 자극을 주지 않았다. 手工業者에게는 勞動 生産性을 증가시키기 위한 새로운 기술을 찾거나 사용하려는 의욕이 없었다.19세기와 20세기 초에 경제적 도전과 기회에 대해 中國이 왜 그렇게 완만하게 대응하였는가에 대한 문제는 왜 中國이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산업화의 단계로 이행하지 못했는가라는 논의와 관련되어 있다. 阿片戰爭 이후 외국과의 무역에서 輸入은 일반 中國人에게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와는 반대로 輸出은 中國人에게 폭넓은 영향을 미쳤다. 輸出을 위한 생산은 이익을 가져왔기 때문이다.通商에는 당연히 運送 수단이 필요했기 때문에 외국상인은 中國의 近代的 交通網을 개척했다. 서구 열강이 鐵道에 관심을 가진 이유 중 경제적인 기대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日本에게 패하여 흔들리는 中國 帝國이 붕괴할 것이라고 예상한 열강들의 자신들이 지배로 떨어질 지역을 얻으려는 욕망이 주된 동기였다. 鐵道의 도입으로 혁명적 경제효과를 본 것 중에 하나는 石炭採掘이었다. 20세기 초에 石炭은 제조업에 광범위하게 사용되었고 산업용 에너지원으로 사용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소비재 생산에 사용되는 원자재의 주요한 공급라인이 되어 근대 산업에 기여했다. 그러나 鐵道가 지닌 경제적 효과는 주로 근대화된 부문에 한정되어서 나타났다.中國人이 서구의 産業革命에 최초로 흥미를 가진 것은 군사적인 효과 때문이었다. 이후 국력의 진정한 근원은 경제적인 富에 있다고 깨달은 후 비군사적인 산업투자가 급격히 상승했다. 대부분의 산업에서 ‘官督商辦’의 운영방식이 행해졌다. 官督商辦 企業은 관료로부터 독점적 특권을 부여받았다. 이후 ‘官商合辦’의 형태가 나타났으나 정부와 관료는 여전히 상인을 억압하고 있었다. 國民政府 時期 산업에 대한 정부의 관여가 늘어났는데 이는 경제뿐었다.
0. 序言明 ? 淸時代의 統治形態 및 社會의 全構造를 포괄적으로 파악하고 나아가서는 20세기 前半期의 現代史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중요한 자료로서, 明 ? 淸史學界에서는 1940년대 이후 紳士層에 주목해 왔다. 紳士계층은 국가로부터 받은 사회경제적 諸特權을 향유하면서, 明 ? 淸時代의 政治 ? 社會 ? 經濟 ? 文化의 모든 面에서 다양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중국 近世 ? 近代史에 있어서 紳士層의 존재와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인식은 일찍부터 있어 왔고 또 적지 않은 硏究著作이 나와 있으나, 紳士의 개념에 대한 많은 논란과 紳士層 연구에 대한 방향과 관점 상 차이가 드러났다. 지금까지 세계학계에 알려진 紳士層에 대한 연구성과)를 보면, 구미학계에서는 주로 淸代이후 紳士層의 정치적 ? 사회적 동향과 social mobility를 추구해 왔고, 일본학계에서는 明末 ? 淸初와 그 이후의 紳士層의 정치적 ? 사회경제적 존재형태를, 주로 稅 ? 役制의 개혁과 생산관계를 중심으로 연구하여 왔으나 1970년대 이후 연구의 폭을 확대시켜나가고 있다. 그러나 소위 ‘鄕紳支配’ 개념을 주로 한, 紳士의 특권적 지주로서의 성격에만 집중시킴으로써, 연구에 있어서 다양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대륙학계는 상대적으로 연구의 초보단계라 할 수 있으며, 연구방향은 일본과 유사하다.) 국내학계에서는 1965년에 이미 일본의 ‘鄕紳’ 개념이 아닌 ‘紳士’ 개념이 제창된 이후 많은 학자들에 의해 紳士 연구의 外延이 확장되고 있다.)그러나 紳士에 관한 연구가 思想的 ? 文化的 측면에서 紳士의 役割 ? 構成?統計的 分析으로 연구의 방향을 잡은 것은 그리 오래 전의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작업이 너무도 거창한 일이기 때문이다. 紳士 계층의 구조적 분석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료의 소재를 파악하는 該博한 文獻上의 知識과 多量의 資料를 분석하기 위한 정확한 分析方法, 자료의 整理 ? 解讀能力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들을 감당한다는 것은 一人의 힘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로 평가받고 있는 까닭에 그의 주요 논지와 그 흐름에 따라 서술할 것임을 더불어 밝힌다.1.『中國의 紳士』의 構造와 內容“1955년 이 책이 발간된 이래 19世紀 中國社會뿐 아니라 20世紀 中國을 연구하는 수많은 論文著書가 이 책을 援用 아니함이 없고, 심지어는 하나의 연구출발점으로까지 삼고 있다는 사실이 이 책으로 하여금 劃期的이라는 평가를 받게 하는 것이다.”는 찬사를 받고 있는 張仲禮의『중국의 紳士』는 1950년대 워싱턴대학에서 진행되던 중국사회에 관한 연구를 바탕으로 19세기 혹은 그 이전 중국사회의 上層집단에 대한 기존 연구의 문제점에 돌파구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19세기 중국사회에 대한 새로운 검토는 비단 기존 연구의 맹점을 극복하고 공백을 메우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이 연구를 통해 19세기 중국사회를 지배한 특권층인 紳士와 官職과의 關係, 經濟的인 地位(紳士地主說에 대한 否定), 社會移動에 대한 새로운 視覺을 제시하고 있다. 本書는 기존 중국사회(혹은 아시아사회) 연구의 한계와 본서의 특징을 소개하고 있는 서론 외에 1장~4장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1장은 紳士의 구성과 성격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2장은 上?下層 紳士의 규모와 19세기후반 社會混亂時期 紳士層의 量的?內容的 변화에 대해 다루고 있고, 3장은 紳士層 진입과 정부의 통제 器材로서 과거제도의 양면성을 서술했으며, 마지막으로 4장은 전기를 통해 분석한 紳士層의 통계자료로 구성되어 있다.구체적으로 張仲禮의 紳士硏究의 내용과 그 重要性을 論하기위해 우선, 紳士層의 구성과 그 성격에 대해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士’ 중 學校制의 最末端에 해당되는 生員[秀才]은 州 혹은 縣에 설치된 官學에 입적된 관학생을 의미하는데, 生員이 되기 위해서는 몇 차례의 시험에 통과해야 했다. 生員에는 附生(定員 外 生員), ?生(?學生), 增生이 있고 이들은 生員의 자격만으로는 관직에 임명될 수 없었으나, 役이 면제되는 특권을 누렸다. 또한 生員은 文生員과 武生員으로 나뉘어졌다. 下層紳 공부를 더하게 하고 하급관리에 임명하기 위하여 선발한 초급 학위소지자를 말한다. 그들 중, 시험을 통해 뽑힌 正途貢生은 歲貢生, 恩貢生, 拔貢生, 優貢生, 副貢生 등이 있었다. 擧人은 鄕試에 합격한 上層紳士로서, 그들은 하급관리에 임명될 수 있는 자격을 지니고 있었다. 進士로 진입하는 수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거인들 중 進士시험에 합격한 자들은 府 ? 州 ? 縣學의 敎官이 되는 경우도 많았으며, 會試에 합격하기 위해 국자감에 입학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학문면에서나 관리의 직무면에서나 능력이 인정되었다. 紳士層에서 최고의 학위는 進士로서 수도에서 會試와 殿試를 통과하여 官吏가 될 수 있었으며, 그들은 자동적으로 중급의 관리에 임명되고, 관직 임용에 있어서도 최우선권을 가졌다.위와 같은 紳士階層의 構成員의 성격상 차이에 따라 上層紳士/下層紳士, 正途/非正途로 구분하는 명확한 기준을 세우고, 그 통계작업을 진행하는 것이 本書의 큰 줄기 중 하나이다.《表 1》과《그림 1》에서 나타난 그의 구분법은 전통적인 ‘紳’과 ‘士’개념의 구분을 벗어나 1장 2~4절에서 詳述한 사회적 기능을 중심으로 한 것이다. 그의 구분에 따르면, 과거를 통해 紳士지위를 취득한 자는 正途집단(官吏, 進士, 擧人, 貢生, 生員)으로 불리어 돈(捐納)이나 祖?父의 官位 덕(蔭)으로 紳士資格을 얻은 非正途(官吏, 監生, 例貢生)와 교육수준, 사회적 지위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有官者, 進士, 擧人, 貢生으로 구성된 上層紳士는 일반적으로 下層紳士(例貢生, 生員, 監生)보다 사회적 역할에서 우월한 地位를 갖게 된다. 그의 이러한 구분은 각 성 출신의 5천여 紳士들의 전기를 조사하여 그 속에 내포되어 있는 각종 정보들을 항목별로 도표화한 제 4장「紳士層의 전기에 관한 통계적 분석」을 통해 설득력을 얻게 된다. 특히 上層/下層紳士로 구분한《表 33》은 일반적으로 上層紳士가 團練의 조직 등 중요한 활동에 더 많이 참가했음을 보여준다. 正途와 非正途의 구분과 그에 따른 통계작업 또한 紳士理解에 크상대적인 힘의 변화 등으로 표출된 것으로 저자는 설명한다. 제 2장 2절(부분적으로 p.131《表 4》도 포함) 「1850년 前?後의 신사규모」에서는 太平天國의 亂을 轉換點으로 하여 紳士의 구성과 지위, 정부와의 관계, 그리고 정부의 그들에 대한 통제 등에 큰 變化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이는 종래 언급되지 못했던 중요한 발견이라 할 수 있는데,《그림 4》와 기타 다수의 表를 통해 19세기 前半에는 上層紳士에 있어 정도신사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19세기 後半에는 非正途紳士가 上層紳士의 1/2 가량을 차지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傾向은 4장의《表 34》를 통해 사회혼란기에 단련활동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 주며, 사회혼란기 新興紳士의 증가는 傳統的인 紳士의 역할을 담당할 能力 혹은 意志가 없는 자가 많아지는 紳士의 質的 저하현상을 의미하기도 한다.(p.297《表 38》)또한 紳士構成에 있어 家族內에서 처음으로 진출한 新興紳士와 이미 가족내에 紳士成員이 있는 旣存紳士의 비율을 통계화해서 Social Mobility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紳士들의 경제상황에 대한 6개의 表를 통해 지주의 감소와 상업활동의 증가라는 작은 시대적 추세를 발견했으며, 이는 紳士 신분자체가 紳士들의 수입원으로 작용한다는 저자의 假說을 강화시켜주는 증거이기도 하다.本書의 또 하나의 논지는 신사의 總數에 대한 推算値 제시이다. 수많은 傳記?資料를 조사하여, 신사가 되는 平均年齡과 資格이 喪失되는 平均期間을 산출하여 33년이라는 答을 답을 얻은 뒤 그 33년간과 생원자격 응시회수 및 생원정원을 곱하여 얻어낸 신사의 총수는 19세기 前半에 약 110萬, 그 후가 145萬으로서 그들의 家族을 포함하면 550萬(19세기 前半), 700萬(19세기 後半)이다. 이는 추정된 당시 중국전체인구의 1.3%, 1.9%에 해당된다. 이는 諮議局議員의 수와도 거의 일치하는 수치이다.통계적 분석 외에도 저자는 신사의 특권과 역할에 대한 대답도 빼놓지 않았는데 이에 대한 서술은 1장 士의 善行 ? 救濟活動, 經濟開發, 商品流通構造 支配, 稅役 減免, 鄕村秩序維持, 鄕村敎化 등 紳士로서 公意識 發現에 관해 살펴보고 있다.마지막으로 紳士의 주요특징 중 하나인 科擧制에 대한 내용은 제 3장「紳士의 과거시험 생활, 청의 과거제도에 대한 비판적 분석」에서 다루졌는데, 저자는 과거제도의 兩面性과 그 限界에 傍點을 찍고 있다. 과거제도가 19세기 중국紳士 구조의 바탕이었음을 보여주며, 이는 紳士 계층이 되는 가장 중요한 관문이자 동시에 정부가 紳士들을 통제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紳士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시험에 대한 준비에 얽매이게 되어, 자신들의 사고를 관변사상으로 흐르게 만드는 科擧生活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정부가 紳士의 학문적 자질을 핵심적인 것으로 보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정부는 紳士들의 이와 같은 학문적 능력을 科擧制度를 통해 관료식으로 조장 ? 통제했으며 또한 그 틀을 만들었다. 19세기 동안의 科擧制의 쇠퇴는 전통 중국의 사회구조상의 퇴보를 암시하는 것이다.2. 評張仲禮는 淸代 史料上의 전통적 분류법 대신 紳士 각 구성원의 실제적 권한과 역할에 따라 上層紳士와 下層紳士로 구분하였다.(p.20~21) 이는 이 책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上層紳士에는 有官者, 進士, 擧人, 貢生이 포함되고 下層紳士에는 例貢生, 生員, 監生이 포함된다. 그 기준은 官位取得要件, 社會的 役割 隨行時 領導의 主 ? 客體, 特權, 禮制上의 差別을 들고 있다. 이 중 官位取得要件은 官과 非官의 차이에 따른 기준인데, 擧人과 貢生은 所定 시험을 거쳐 敎職 또는 知州 ? 知縣 등 末端官에 임명받을 수 있었다. 특히 租稅納付와 戰鬪에 있어 上層은 統制者의 입장에 있고, 下層은 小單位를 영도하여 직접 戰鬪에 임하는 事例가 많음을 4章의 통계를 통해 증명해 보임으로써 그가 주장하는 上/下 紳士間의 차이는 꽤 설득력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수업시간에서 각각 上層紳士와 下層紳士 즉 官人層과 士人層이 각각 鄕紳公義와 士人公義를 가졌었다는 내용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