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 론처음 과제를 받고서는 상당히 고민을 많이 했다. 내 자신에 대한 모습을 대상으로 하여 분석을 하려고 했지만 긴 시간을 생각해 보아도 자신의 모습을 본인이 객관적으로 관찰,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이 힘들고 정확치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 중에 특이한 행동패턴을 보이는 사람을 분석 대상으로 삼아보기로 했다.사실 내 주변에는 동성애자 친구가 한명 있다.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에 대해 청소년기에 이미 깨달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가 동성애자라는 것을 아는 주변인물은 나를 포함해 두명 뿐이다. 그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알리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최근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이 많이 사라졌다고 해도 실제 자기 주변에 있는 인물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외모가 아주 수려해 여성들에게 호감도 많이 받는다. 하지만 그에게 이성간의 연애는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행인들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한다. 연애를 못하는 그 친구가 안돼 보이지만 그는 또한 동성애자의 집단에 섞이는 것도 내키지 않아 하기 때문에 결국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왜 어떤 사람들에게는 동성애적인 경향이 발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은가를 한마디로 이야기할 수는 없다. 아마도 이는 동성에 대한 관심이 서로 다른 시대에 다른 상황 하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런 관심은 개인의 어린 시절부터 선천적으로 타고나기도 하며 성인기에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그러한 경향이 수년 동안 잠복 상태로 휴지(休止)되어 있다가 나중에 나타나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이러한 동성애적 경향이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는지도 모른다.이렇듯이 동성애적 행동과 성격을 하나의 이론으로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단지 동성애적 증후군의 행동이나 성격 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적, 문화적인 요인 등을 통합하여 해석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Ⅱ.게 해결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 성 상대자의 선호를 결정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앞에서 서술했듯이 아동기 초기에는 양성애적인 성향이 나타나는데, 이때에는 개인의 성에 상관없이 누구와 접촉을 하여도 애호적으로 반응한다. 그러나 4세경의 남자아이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차이를 인지하기 시작한다. 근친상간적인 소망이 생긴 소년은 어머니의 사랑의 대상자인 아버지와 위치를 바꾸고 싶어 한다. 곧 이러한 성적인 소망에 대한 만족은 방해를 받는다. 만약 그가 아버지와 경쟁적인 입장에 놓일 때 그의 아버지가 자신을 거세할 것이라는 불안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한 갈등은 어머니 편에서 유혹적인 행동이 생기면 커지기 마련인데, 특히 부모간의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못한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관찰 대상자의 경우 과거 유치원 시절부터 어머니가 자기 아들이 또래의 여자아이들에게 접근하는 것을 방해하고, 그에 따라 남아다운 기질이 표출되는 것을 좌절시키면서 자신에게만 밀착하도록 만드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 아이의 이성에 대한 공포가 이때부터 생기기 시작한 것은 아닌가 추측된다. 현재는 사회 속에서 어울리면서 꾸준한 마인드컨트롤로 이성에 대한 공포 같은 것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라졌다.또한 아버지가 어머니와 아들에게 소원한 존재였기 때문에 그는 아들이 동일시할 수 있는 훌륭한 본보기가 되지 못해 동성애적 성향이 짙어졌다. 소년은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억압시키지 못한 데서, 또한 아버지와 동일시하지 못한 데서 갈등이 생긴다. 그는 나중에 여성들과의 모든 성적인 접촉을 회피하려고 노력하는데, 이는 남근기의 고착 갈등으로부터의 도피를 뜻한다. 즉, 풀지 못했던 어머니에 대한 근친상간적인 감정이 성장하고 있는 젊은이의 무의식 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그 소년은 자기의 남근이 여성의 질 내로 들어가면 해를 입게 될 것이라는 환상을 갖게 된다. 어머니와의 기본적인 동일시에서 그는 상징적으로 그의 남근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몸과 남근으로 잃어버린 자기가 강하면 동성애자가 될 확률이 높다"고 말해 왔는데, 얼마 전까지는 이러한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으나 비버(Bieber,1962)는 자신이 연구했던 남성동성애자 106명 중 73%가 어머니들로부터 유혹적인 행동을 받아 전통적인 남성의 행동을 발달시키는 데 방해가 되었음을 밝혀내었다.또한 106명 모두가 아버지와 정상적인 관계를 갖지 못했는데, 전형적으로 아버지들은 약하고 무관심하며 적대적이었다고 한다. 비버는 이러한 양상이 아이를 동성애자로 만드는 데 영향력이 크다고 주장하였으며, 이처럼 강한 어머니와 약한 아버지와의 동성애 발달간의 함수 관계를 다시 고찰하고 있다.펠드먼(Feldman)과 메쿠로크(MacCulloch)는 학습이론에 생리학적인 요소를 가미시키는 합명이론을 만들었다. 그들은 임신한 쥐의 자궁에 호르몬을 투입하였더니 쥐의 성적인 활동이 극적으로 변화되었다는 점을 착안하여, 인간 태아의 두뇌에는 남성호르몬이나 여성호르몬의 수준에 아주 민감한 영역들이 있다고 가정한다. 다시 말하면, 출생 전의 태아의 두뇌에서의 호르몬 육성이 출생 후의 남성적인 또는 여성적인 행동발달을 미리 결정한다는 것이다.또한 그들은 동성애자들을 1차적 동성애자와 2차적 동성애자로 구분하였는데, 1차적 동성애자들은 이성애의 내력이 전혀 없는 경우를 지칭한다. (Feldman & MacCulloch, 1971). 그들의 이론에 의하면, 남자아이가 태어나기 이전에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어떤 여성호르몬의 영향을 받았다면 아동기 때 그는 여자와 같은 행동을 할 것이다. 특히 부모로부터 여성적인 행동을 격려 받는다면 더욱 그렇다. 따라서 여성호르몬에 의해 형성된 소질이 그를 불가피하게 동성애자로 만들지는 않는다고 해도 그가 그러한 방향으로 기울어질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가 나중에 쉽게 동성애적인 애착을 형성시키는 쪽으로 조건 형성된다면 그는 1차적 동성애자로 불리게 된다. 대조적으로 그들이 가정한 2차적 동성애자는 사춘기 때에 인습적인 이성애를 발달시킨다.관찰 대상자의 경우 그는 한 원인이 아님이 밝혀졌다. 즉 파커(Paker, 1964)는 수많은 일란성 쌍생아 가운데 단지 한 명만이 동성애자였음을 지적하였다. 또한 동성애자들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95% 정도는 원래 태어날 때부터 동성애자가 아니었음을 밝히는 보고들도 있다. (Grdon & Snyder, 1986).동성애자들이 표현하는 감정이나 행동들은 변화에 대한 저항이 아주 강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가 성과 관련된 호르몬의 불균형에 의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사실상 남성 동성애자들의 소변에는 테스토스테론이 이성애 남성들의 것에서 보다 적게 함유되어 있음을 밝혀냈다.(Loraine등, Master & Johnson. 1970). 로레인 등은 여성 동성애자들에서는 이성애 여성들보다 테스토스테론의 수준이 역시 높고 이스트로겐의 수준이 낮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이성애 남성들보다 동성애 남성들의 혈액에서는 테스토스테론의 수준이 낮고, 정액의 양도 적으며, 정액의 질적인 면에서도 이상적(異常的)인 형체가 많았음이 밝혀졌다.(Kolodny 등, 1971). 그러나 브로디 등은 이와 반대로 오히려 동성애 집단에서 테스토스테론의 수준이 높음을 발견하였다.즉, 동성애자들과 이성애자들과의 호르몬 수준의 비교는 방법론상으로 믿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하며, 대부분의 연구에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고 지적되었다. 또한 안드로겐과 성의 선호도에는 분명한 인과관계가 없다고 보고되었다.(Meyer-Bahlberg, 1977).한마디로 말하여, 인간에게서의 호르몬 수준이 동성애를 결정한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ⅳ) 사회문화적인 원인동성애에 대한 원인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일부 사회과학자들은 연구의 초점을 동성애자들의 생활양식에 맞추고 있다. 즉, 그들이 어디에서 살아가며 어떻게 성적인 상대를 구하느냐가 하나의 문제이다. 동성애자들은 이성애자들에게 자기들의 성적인 기호를 폭로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정교한 신호체계를 발달시켰다. 그들이 사회적으로도 성적으로도 상대를 고르는 데 사용하는 방법들은 여사용하지는 않는데, 일반적으로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사람들의 안면표정이나 행동의 변화를 더 정확하게 감지하는 경향이 있다.그러나 전반적으로 동성애자들의 사회생활은 주어진 사회의 규준에 의하여 많은 제약을 받는다. 사회적인 규제가 관대한 문화권에서는 동호인의 신문이나 잡지 또는 일반 신문의 광고를 통해서 상대방을 찾으며, 그들과 성행동을 추구한다. 보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미국에서는 대학 내에서도 남성이나 여성 동성애자들의 모임이 공인되고 있는 것이다.현대의 거의 모든 사회에서는 동성과의 신체적인 접촉을 이상(異常)한 행동으로 취급하므로 이를 피하려 한다. 그러나 어떤 문화권에서는 남성들의 동성애적인 행위를 격려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아프리카의 시완(Siwans)족의 남성들은 여성과 결혼하였을지라도 다른 남성들과 동성애적인 항문성교를 가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 사람을 별난 사람으로 여긴다. 또한 여성들끼리 서로의 위에 올라 음핵을 애무하거나 서로의 질 속에 바나나, 사탕 고구마 또는 인조 남근 등을 넣고 자위 행위하는 것을 정상으로 여기는 사회도 있다.(Nass등, 1984)우리의 문화권에서는 동성애적인 기호를 지닌 사람들의 비율이 다른 사회에 비해 그리 많지 않다. 실제 비율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커밍아웃하는 동성애자의 수는 다른 서방권 국가에 비해 턱없이 낮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도 동성애적인 성행위가 성년 의식에서 거행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평안도와 함경도 지방에서는 "바구리"라고 불리는 성인식의 풍습이 있었는데, 바구리라는 말은 어린아이가 선임자들에게 동성애적인 성행위를 당하는 것을 뜻하는 속말이다. 요즈음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한 행동을 편차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남성들이 동성애적인 경험을 하지 않으면 편차된 사람이라고 오명을 가지는 문화권을 살펴보자.수마트라섬의 북서부에서 파푸아뉴기니를 걸친 태평양의 멜라네시아(Melanesia) 문화권에서의 여러 종족들 간에는 동성애 생활이 사회적으로 제도화되어 있다
프로이트와 융의 인격구조 이론 비교분석1. 프로이트의 인격구조 이론프로이트는 정신 내부는 본능 충동들과 그것을 방어하고 조절하는 힘, 그리고 금지 명령 사이의 역학적 관계 활동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 힘들을 각각 원초아(Id), 자아(Ego), 초자아(Super ego)라고 한다. 원초아는 외부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외부 세계와 충돌을 일으키고 이러한 자극들로부터 유기체를 방어하기 위해 자아가 분화된다. 또한 자아로부터 초자아가 분화하게 된다. 자아와 초자아는 결국 원초아로부터 발생한 것이며, 자신의 활동 에너지를 원초아로부터 계속 공급 받음으로써 결국 원초아를 만족시키는 역할을 한다. 원초아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요구에 대한 자아와 초자아의 대응 방식과 대응 과정에 대한 세세한 역학 관계에 정신 문제의 핵심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이 세 부분의 영역이 잘 통합됨으로써 개체가 외부환경에 대해서도 만족스럽고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비정상적인 정신상태, 곧 노이로제 증세를 나타내는 자아를 분석, 해석함으로써 정상적인 정신상태의 회복을 성취할 수 있다고 보았다.(1) 원초아 (Id)원초아(Id)는 ‘그것(it)'을 의미하는 라틴어로, ’본능욕동‘을 지칭한다. 퍼스널리티의 가장 원시적인 체계라고 할 수 있으며, 후에 자아와 초자아로 분화되며 인격을 형성하는 정신에너지의 원천이다. 선천적인 본능적 충동의 덩어리로서 정신 에너지의 근본이 되는 완전 무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쾌락원칙과 해탈원칙을 지향하며 자기중심적이고 반사회적이며 파괴적인 특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괴롭히는 모든 억압을 싫어하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일생동안 한번 생성되면 좀처럼 변하지 않아 보수적이기도 하다. 원초아의 에너지는 상당 부분 자아와 초자아에 이전하여 그 목적을 우회적으로 성취하기도 한다.(2)자아 (Ego)쾌락원칙을 추구하는 원초아와 복잡한 가치 체계들로 엮인 외부 세계 간에는 필연적으로 대립과 부조화체를 보존하기 위해서 새로운 정신 조직이 생성되어 분화되기 시작하는데 이를 자아라고 지칭한다. 생후 6~8개월부터 발생하기 시작하여 2~3세에 형성되며, 원초아와 외부 세계의 관계를 조화롭게 만들어 개체를 적절히 유지시키는 기능을 한다. 원초아의 본능욕동들을 외부 세계의 요구에 따라 분출을 허용하거나 적절히 변형시키고, 여건이 좋지 않을 경우 억압한다. 즉, 자아는 자신이나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원초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성격의 조정자이며 집행자라고 할 수 있다.(3)초자아(Super ego)초자아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윤리적, 도덕적, 이상적인 면을 뜻하며,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 성격구조 중 마지막으로 발달되는 체계를 말한다. 부모가 주는 보상이나 처벌과 같은 부모의 양육태도에 따라 아동은 옳고 그름을, 선과 악을, 도덕과 비도덕을 분별할 수 있게 된다. 가정뿐 아니라 사회화의 과정을 거치며, 사회가 요구하는 적절한 사회규범을 터득하며 인간은 초자아를 형성하게 된다. 초자아는 양심이며 아버지의 성격을 보존한다고도 할 수 있는데 자아에게 당연히 어떤 것을 행하여야만 한다는 명령을 내릴 뿐만 아니라 자아가 그 명령을 온전히 따르지 못할 경우 혹독한 죄책감으로써 자아를 강하게 억누르며 지배하기도 한다. 원초적 공격성에 대항하는 심리적인 힘이며, 자아만으로 통제하기 어려운 인간의 공격성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 초자아는 삶의 목표, 양심, 금지 명령, 죄책감 등의 정신 현상을 유발하는 가장 ‘인간적’이고 문화적인 정신 활동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프로이트는 초자아는 양심(conscience)와 자아이상(ego ideal)의 두 하위체계로 나누었다. 양심은 아동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부모로부터 처벌을 통해 생기는 자신에 대한 비판적 평가나 도덕적 억압, 죄책감등을 말하며, 자아이상은 아동이 긍정적인 일을 했을 때 부모의 보상을 통해 발달하는 자존심과 긍지 등을 뜻한다.2. 융의 인격구조 이론(1) 정신(psyche)융은 전체로서의 인격을 정신이라고 물리적 환경에 대해 자신을 조절하고 적응하도록 지침 역할을 하며,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하나의 전체로 태어난다. 따라서 타고난 전체성을 가능한 한 최대한 분화시키고, 일관성과 조화가 이루어지도록 발전시키며, 제각각 흩어져 제멋대로 움직이거나 갈등 구조를 만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융은 인간이 정신을 강화하여 분열에 저항할 수 있도록 하면 정신의 전체성을 유지하여 정상적인 정신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보았다.(2) 의식의식은 각 개인이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정신의 유일한 부분이다. 유아의 의식적 주의는 융이 사고, 감정, 감각, 직관이라고 부르는 네 가지의 정신 기능을 통해 성장하는데 이 네 가지 기능들 중 어떤 기능을 우선적으로 사용하는가에 따라 인격이 각각 다른 방향으로 형성되기 시작한다. 여기에 의식을 외부와 객관세계로 향하게 하는 외향성과 내부 및 주관적인 세계로 향하게 하는 내향성이 결합하여 개인의 의식이 타인과 구분되어 개별화된다고 보았다.① 자아자아란 의식의 개성화 과정을 통하여 생겨나며 자각하고 있는 감각, 사고, 감정, 직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를 나로서 자각하게 하는 정신기능의 중심이며, 외적실재인 세계, 집단정신 및 내적실재인 무의식과 관계를 맺는 의식의 중심이다. 자아는 의식에 대한 수문장으로서의 역할을 하는데 날마다 하는 많은 경험과 그로부터 유입되는 많은 정보들은 자아에 의해 선별되는 것만 선택적으로 자각되는 것이다. 또한 자아는 정신 재료들을 취사선택함으로써 개인 인격의 일관성과 지속성이 유지될 수 있도록 한다.(3) 개인 무의식(personal unconscious)자아에 의해 인식되지 못한 경험들이 저장되는 곳을 개인 무의식이라고 한다. 개인 무의식은 의식적인 개성화나 기능에 비판적인 모든 정신 활동과 내용을 받아들이는 저장소라고 할 수 있다. 의식적 경험이었으나 개체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어 억압되거나 방치되는 갈등과 생각 등이 이곳에 저장되며, 그 중요성이 의식적인 정도라고 판단되어 지지 않거나, 가에 정신이 사로잡혀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콤플렉스는 전체 인격에서 분리된 작은 인격과 같이 작용하며 독립적이고, 그 자체로 추진력을 지니고 생각과 행동을 조절하는 강한 힘을 갖고 있다. 융은 초기에는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콤플렉스의 기원을 아동기 초기의 정신적 충격 때문이라고 믿었으나, 환자들을 치료할수록 콤플렉스는 아동기 초기의 체험보다 인간 본성의 훨씬 깊은 곳으로부터 생긴다고 여기게 되었다. 융이 생각한 인간 본성의 무엇인가는 후에 집단 무의식이라고 명명된다.(3) 집단 무의식집단 무의식 또한 정신의 일부이지만 그 존재가 개인적인 경험에 의존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개인 무의식과 구별될 수 있다. 자아에 속하지 않으며 자아와 아직 연관되지 않고 있는 모든 심리적 경향과 내용을 일컬으며, 집단 무의식의 내용은 일생에서 한 번도 의식된 적이 없었던 것들로 융이 일반적으로 ‘원시적 이미지’라고 부르는 잠재적 이미지의 저장고이다. 원시적 이미지란 맨 처음 정신이 발달하게 되었던 단계에서 과거의 선조들로부터 물려받는 이미지를 지칭한다. 이러한 종족적 이미지들은 선조들이 갖고 있던 이미지와 상이할 수도 있고, 개인은 의식적으로 자각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집단 무의식은 사회가 존속되면서 경험했던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외부환경에 대처하고 반응하도록 하는 기질이나 잠재적 가능성으로 전달된다.①원형(archetype)집단 무의식의 내용물들을 원형이라고 한다. 융은 “인생의 전형적인 장면들만큼이나 많은 원형들이 있다. 이러한 경험들의 무한한 반복은 우리의 정신적인 소인 속에 그것들을 새겨놓는다. 그것은 내용이 있는 이미지의 형태가 아니며, ‘내용이 없는 형태’로서만 존재하다가 특정 유형의 지각과 행동 가능성을 나타낼 뿐이다”)라고 했다. 모든 사람은 동일한 기본적 원형의 보편적인 이미지들을 물려받으며 이러한 원형들은 우리의 인격과 행동을 형상화하는데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페르소나페르소나란 말은 극중에서 받아들여 살아가는 타협적인 모습으로, 사회생활과 공동생활의 기반이 되기도 한다. 페르소나는 개인이 집단생활을 영유하며 쓰는 가면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정신의 외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페르소나는 제거되거나 동화될 대상이 아니며 자아와 구별할 필요가 있다. 페르소나에의 동일시와 페르소나의 무의식화 사이에서 자아가 페르소나를 통해 외부세계와 균형잡힌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 아니마와 아니무스아니마 원형은 남성 정신의 여성적 측면이고 아니무스 원형을 여성 정신의 남성적 측면을 뜻한다. 즉 남성은 무의식중에 여성적 속성을, 여성은 무의식중에 남성적 특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남녀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은 심리학적 의미에서 이성의 기질을 갖고 있는데 이러한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외적인 페르소나에 대응하여 무의식적 인격으로 정신의 내면의 영역에 포함된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어우러져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이성에게 적절히 반응하고 이성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남녀의 여러 특징을 획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자그림자는 의식의 바로 아래에 있는 무의식의 내용으로 인간의 기본적인 동물적 본성을 많이 내포하고 있으며 가장 강력하고, 잠재적으로 가장 위험한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무의식의 측면에 있는 자아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다. 자아로부터 배척되어 무의식에 억압된 성격측면이기 때문에 자아가 위기나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때에 그 기회를 이용해 자아에 저항한다. 자아의식이 한쪽 면을 지나치게 추구할 때, 그림자는 그것의 극단으로 치닫는 성질을 갖고 있다. 자신의 성을 대표하고 동성인 사람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자기집단 무의식 속의 중심원형으로 의식과 무의식을 통틀어 언제나 사람으로 하여금 전체가 되게 해주는 구심점이다. 모든 의식과 무의식이 하나로 통합된 전체 정신 그 자체이며 원형과 콤플렉스 및 의식 속의 원형들을 조화시키고, 인격을 통일하고 불변성의 감각을 준다. 모든 인격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기실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자기 원형은 무의식적인 것을 의다.
중국의 음식문화1. 중국인들의 음식문화중국의 음식문화는 5천년 역사 속 하나의 국가가 설립되고 왕조가 구축되면서 새로운 풍습과 음식문화를 형성하였다. 수 천년의 전통을 이어오며 중화민족 문화의 한 부분으로 형성되어 온 중국의 음식문화 안에는 중화인의 사상, 도덕관념, 민족심리, 생활방식, 신앙과 예절이 어우러져 있다. 중국에서는 衣食住대신 食衣住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쓰일 정도로 식생활 향상에 가장 먼저 신경을 쓴다. 요리는 각 나라마다의 기후, 지리적 특성, 민족성 등에 따라 각양각색의 특징을 가지고 발전하게 된다. 특히 중국요리는 광활한 면적에서 지역마다 특징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자연조건에 맞게 다채로운 형태와 독특한 맛을 가진 독특한 요리를 발전시킴으로써 음식의 종류와 맛의 다양함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게 되었다.예로부터 중국인의 음식섭취 목적은 단순히 맛있는 음식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과 장수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특성은 의식동원(醫食同源)이라는 용어로 설명할 수 있는데 즉, 의약과 음식은 본래 그 뿌리가 하나라는 의미로 중국에서는 음식으로 몸을 보신하고 병을 예방하여 치료하고 장수한다는 인식이 보편화되었다. 곰, 자라, 고양이, 쥐, 벌레에 이르기까지 독특한 재료를 사용하는 중국요리는 불로장생의 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발전해왔다. 중국의 음식철학을 음양오행에 입각하여 간단히 살펴보면 짠맛(咸)이 많으면 심장이 상하고, 단맛(?)이 많으면 신장이 상하고 매운 맛(辣)이 많으면 간장을 상하게 하고, 쓴맛(苦)이 많으면 폐가 상하고, 신맛(酸)이 많으면 비장이 상한다고 했다.모든 문화의 흐름이 그러했듯이 요리에 있어서도 한국 요리의 조리기술 발달과정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이 중국요리라고 볼 수 있다. 중국의 요리는 4대 문명 발상지의 중심에 있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유구한 역사 속에 지역별로 독특한 특징을 갖고 발전하였다. 중국요리를 크게 분류하면, 장강(長江)이남의 영향을 받아서 발전한 ‘남방요리’와 장강 이북의 황하유역과 산(上海)·쓰촨(四川)·베이징(北京)요리와 함께 중국 4대 요리 가운데 하나이다. 난차이(南菜)라고도 한다.광둥지방은 아열대지역에 속하며 16세기 이후부터 외국선교사와 상인들의 교류가 빈번했던 곳으로 외국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아 요리에도 서양요리법이 결합된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크게 광저우요리와 차오저우(潮州) 요리, 푸저우(福州) 요리로 나뉘는데, 기본은 차오저우 요리이다. 광저우 요리는 라는 말을 들을 만큼 요리가 발달해 왔다.쇠고기, 서양 채소, 토마토 케첩, 우스터소스, 굴소스 등 서양 요리에 들어가는 재료와 조미료를 쓰며 해산물과 생선을 재료로 하는 요리가 많다. 자연의 맛을 살리기 위해 신선한 재료를 센불에서 살짝 익히고 간을 조금만 해서 맛이 싱거우며 기름도 적게 쓴다. 맛이 신선하고 담백하며 쫄깃함을 그대로 살려 천연의 맛을 느낄 수 있다. 대표적인 요리는 상어지느러미찜, 구운 돼지고기, 어린 통돼지구이, 광둥식 탕수육, 딤섬이며, 뱀, 개구리, 살쾡이, 물방개등도 요리의 재료로 사용하고 있다.광동요리는 광쩌우, 초우쩌우, 뚱쟝 등 세 지방의 특색을 지닌 요리이다. 꽝쩌우 요리는 최고의 재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상큼하고 담백한 맛을 즐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맛볼 수도 있다. 해물요리와 단 맛의 음식으로 유명한 이 곳 요리는 맛이 정갈하고 국과 요리 모두 나름대로의 특색을 지니고 있다.광동요리의 역사는 아주 깊다. 한위(漢魏), 남북조(南北朝)시대에 이미 문헌에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청말민초(淸末民初)에 이르러서는 국외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다양하고 신선한 재료를 사용하고, 그 조리방법도 불에 굽고 엷게 튀기거나 볶고하는등 다양하며 맛 또한 담백하고 신선한 맛이 특징이다. 대표적인 요리로는 燒乳猪(샤오루쥬), 蛇羹(셔껑), 東江鹽鷄(똥지앙이엔지), 紅燒大群翅(홍샤오따췬츠), 白云猪手(빠이윈쥬쇼우), 淸湯魚 (칭탕위뚜), 油泡蝦仁(요파오시아런), 冬瓜燕窩(똥꾸아이엔우) 등이 있다. 그 밖에도 모양이 좋고 참신한 것이 특징이 짧은시간에 익히는 방법)과 건편(재료를 볶아서 말리는 방법), 乾燒(깐샤오 : 조림), (파오 : 데치기), 회(전골)등이 있다. "맛"을 중시하며, 맛의 종류 또한 다양하고 복잡하다. 魚香(위샹:생선요리에 쓰이는 양념), 紅油 (홍요:붉은 고추기름), 怪味(꾸아이웨이 : 이상한 맛), 麻辣(마라 :산초의 매운맛)등의 독특하면서도 다양한 맛의 변화로 이루어 졌다. 대표적인 요리로는 宮保鷄丁(꿍바오지띵), 樟茶鴨子(쨩차야쯔), 麻婆豆腐(마포또우푸), 毛火 (마오뚜후오꾸아), 開水白菜(카이쉐이바이차이)등이 있으며, 음식맛이 소박하고 참신하며 사천지방 특유의 맛이 강하다.‘음식은 중국이 최고요, 맛은 중국 사천이 최고다’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사천요리는 우수한 요리기술과 제작법으로 현재 중국 내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인기가 높은 요리문화로 꼽힌다. 사천요리는 중국 4대 요리체계 중 하나로 “한가지 요리에 백가지 맛‘으로 전해지며 사천지역 특유의 맵고 얼얼한 맛으로 수천년간 많은 사랑을 받아 왔다.옛날부터 중국의 곡창지대로 유명한 사천분지는 해산물을 제외한 사계절 산물이 모두 풍성해, 야생동식물이나 채소류, 민물고기를 주재료로 한 요리가 많다. 더위와 추위가 심해 향신료를 많이 쓴 요리가 발달한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매운 요리와 마늘。파。고추를 사용하는 요리가 많다. 또한 오지이기 때문에 소금절이, 건조물 등 저장식품의 사용이 잦다. 마파두부가 대표적인 사천요리이다.(3) 강소요리강소요리는 물고기와 쌀의 고향으로 불리우는 강소지방의 독특한 요리이다. 강소요리의 특징은 맛의 사계절이 분명하고 물고기와 새우를 잘 이용하며 삶는 것, 덮개 덮고 약한 불로 삶는 것, 전분즙과 함께 볶는 것, 찌는 것, 굽는 것, 볶는 것 등 요리 기술을 다양하게 사용한다. 국 요리법을 중시하는데 맑은 죽은 밑바닥이 보이고 진한 죽은 색깔이 유백색이다. 또한 원래의 특색과 원 맛을 살리기에 신경을 쓴다.요리마다 각자의 맛을 나타내며 맛이 진하지만 기름진 감이 없고, 연하지만 옅지 않으며 유래는 청나라 때 양주지방에서 다 익은 국수를 가마에서 국이 담겨 있는 사발로 떠 옮기는 것을"過橋"라고 부른데서 온 것이다. 또 다른요리, 獅子斗는 사람마다 즐기는 楊洲 요리이다. 완자가 크고 표면이 부숭부숭하기에 사자머리라고 불리웠다.江蘇料理에는 또 徐海料理도 포함된다. 徐洲, 連云港 일대의 지방요리를 가리키는데 주요한 특징은 신선하고 짜며, 5가지 맛이 겸비된 것이다. 이름난 요리로는 覇王別姬를 들 수 있다.이와같이 江蘇는 각지의 풍경이 아름다울뿐만 아니라 각지마다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이름난 음식점들 있어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면서 다양하고 맛있는 음식들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4) 산동요리산동요리는 魯菜라고도 하는데 산동요리의 시발점은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이며, 남북조(南北朝)에 와서 발전하기 시작하여, 宋대 이후부터는 중국 북부지역의 대표적인 요리로, 원(元), 명(明), 청(淸) 삼대 왕조를 거치는 동안 군중에 의해 인정 받아 한 유파를 이루기에 이른다. 또한 明,淸대에 이르러서는 황궁식탁의 주요 요리로 자리 잡았다. 산동요리는 크게 나누어 해산물을 재료로 하는 연해안 지역의 교동요리와 탕을 주로 하는 제남요리등 2가지가 있다. 특징은 맛깔이 선명 화려하며, 담백하고 부드러운 색으로 중국인의 구미에 맞다.현대의 산동요리는 제남(濟南)과 교동(膠東)지역의 요리에서 변형되었다. 향기가 좋고 신선하며 독특한 맛이 있고, 탕에 특별한 신경을 써서 별미를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제남(濟南)의 요리는특히 爆(끓는 물에 살짝 데침), 燒(기름으로 튀기거나 볶은 다음에 다시 국물을 붓고 볶음), 炸(튀김), 炒(기름에 볶음)가 뛰어나다.제남요리(濟南料理)의 특징으로는1) 원료 선택범위가 넓고 품종이 많다.2) 향기롭고 연하며 맛이 또한 순수하다.3) 가정요리가 많아 모양을 따지지 않고 큰 접시, 큰 사발을 사용한다.4) 맑은 국, 우유 국이 기묘하기로 이름있다.5) 조리 기법이 전면적이고 파로 맛을 잘 돋군다는 점이다. 제남요리 가운데서 유명한 요리 로서 요리의 조리법을 받아들여 부단한 발전을 꾀하면서 산간지대인 안휘 현지의 특산을 가지고 만들던 요리로부터 해물을 가지고 만드는 여러 가지 요리로 발전했다.안휘요리의 특색은 기름지고 색상을 중히 여기고 불의 강약에 포인트를 둔 것이라고 사람들은 평가한다.? 기름지다는 것은 여러 가지 기름을 사용하고 기름사용의 시간과 방법을 중시한다는 말이고 불의 강약에 포인트를 둔다는 것은 여러 음식재료에 따라 불의 강약을 조절하는 것을 말한다. 색을 중히 여긴다는 것은 요리의 색과 모양을 중히 여긴다는 것이다.? 때문에 안휘요리는 모양이 꽃과 같고 소세지와 설탕, 파 등 조미료를 겸해 독특한 모양과 특이한 향을 자랑한다.안휘요리의 또 다른 특징은 원래 맛을 살리는 것이다. 요리의 핵은 당연히 맛이다. 안휘요리는 자연적이고 과학적인 조리법으로 음식의 원래 맛을 살려 백가지 요리가 백가지 맛을 내게 하고 있다. 안휘요리의 조리법으로는 볶고 튀기고 삶는 것 등을 중심으로 하고 조미료 사용에서도 파와 생강으로는 이상한 맛을 없애고 국물의 맛을 요리의 ㅁ사으로 국물맛을 돕고 토간장으로 색을 조절한다.안휘요리는 식보를 중시해 음식에 의한 건강을 중히 여기지만 요리에 중약재를 넣는 약보와는 전혀 다르다. 안휘요리는 닭이나 오리, 비둘기, 자라 등을 통채로 익혀 그 원래 맛을 살리면서 식보의 역할도 하게 한다.? 대표적인 안휘요리는 좋은 음식재료를 쓸 뿐만 아니라 엄격한 조리법을 사용하고 과학적으로 영양분을 배합하는 것을 제일가는 특징으로 한다.?菜(wan cai)요리는 安徽(an hui)요리로 다르게는 徽菜(hui cai)라고 부르며 중국8대요리 계열의 하나이다. 安徽(an hui)의 풍미는 주로 ?南(wan nan), 沿江(yan jiang), 沿淮(yan huai)3곳의 요리로 조성되었으며 그 중 ?南(wan nan)요리가 대표다. ?南(wan nan)요리의 원산은 微州(wei zhou)부로 즉 현재 세계적인 관광지인 황산 근처의 ?(she)현의 일대이다. 沿江(yan jiang)요리다.
중국의 고대사를 언급할 때에 중요한 책이 하나있 다. 그것은 중국역사에 있 어서 가장 권위 있는 역사 서로 알려진 사마천의 이다. 사마천은 漢나라 사람으로, 태사령이란 벼슬 직에 있으면서 사료조사와 전승을 채집하여 라 는 역사서를 만들었다. 현 대에 와서도 고대왕조를 짐 작 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 가 되고 있다.의 첫 부분에는 중국에 왕조가 탄생하기까지의 내용이 적혀있다. 사마천은 다소 신화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는 삼황오제 중에서 오제를 사기의 첫 부분에 두고 본기(本紀)에서는 하, 은(상), 주 각 왕조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삼황을 신화의 시기로 보고 오제를 언급한 뒤, 본격적으로 하 왕조부터를 중국의 역사시대로 규정한 것이다. 실제, 하 왕조나 은 왕조부터를 역사시대로 규정한 것 또한 학계의 지지를 받지 못했으나, 얼마 전 은나라의 수도 은허(殷墟)의 발견으로 은나라의 실존이 인정받고 하 왕조에 대한 신빙성이 짙어졌다.그것을 증명하듯 롱산문화(龍山文化)후기의 성벽 등이 허난(河南)과 샨시(山西)에서 발견되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허난 중부에 위치한 이리두(二里頭)유적이다. 그 곳에서 사방 100m의 커다란 건축의 기단(基壇)과 궁전이라고 생각되는 전당도 발견되었다. 그 근처에서 발굴된 다른 유적의 지하에서는 대량의 청동기가 출토되어, 은 왕조초기에 이미 청동기가 사용 되고 있었음이 증명되었다.이렇듯 신석기 시대와 은대 사이에 이리두(二里頭)문화라 불리는 시대가 확인 되었다. 하 왕조는 중국에서 실재한 왕조로 인정받고 있으나 고증적인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고고학계에서는 아직 역사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그러면 은 왕조 이전에는 과연 어떠한 문명이 존재했던 것 일까?1918년에 공룡 화석을 조사 중이던 스웨덴의 지질학자 J.G.앤더슨이 낙양(洛陽)시의 동쪽, 황하 하안에서 우연히 토기를 발굴했는데 이 토기는 후에 채도라고 불리 게 된다. 채도(彩陶)가 출토된 유적은 은 문명 이전 단 계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토기의 출토는 수렵생활을 시대 후기에 해당한다. 이 유적에서 발굴한 토기의 파편에 붙어있던 종자는 남아시아산 수도(논에 심는 벼)의 겉겨로 밝혀졌다. 이로써 양사오인이 정착생활을 하고 곡식을 재배했음이 고증되었다. 양사오인은 정착생활을 하게 됨과 동시에 커다란 촌락을 형성해서 생활하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이 유적에서는 또한 대량의 돼지 뼈와 개 뼈가 발견되었다. 이것으로 보아 가축 또한 사육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돌과 골재의 화살촉과 사슴 뼈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사냥을 했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양사오(仰韶)인은 공공의 건축물을 중심으로 촌락을 영위하고 있었음이 판명되었다. 어떤 유적에서는 400구에 가까운 시체가 발굴되었다고 한다. 양사오 시대의 분묘는 각지에서 발견되었지만, 일부를 제외하고는 부장품에서 빈부의 차이를 찾아 볼 수 없었다. 이것은 아직 권력자가 출현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모두 여성 중심의 매장으로 부장품도 여성이 많았던 것으로 보아 양사오시대에는 모계중심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마을의 정치는 특별한 권력자가 등장하지 않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각 씨족의 장로들의 회의에 의해서 결정되었다.20세기, 중국은 앙소 문명의 발견에 이어서 황하 하류 유역이나 양쯔강의 중?하류에서 양사오 문명과는 다른 신석기 문화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산동성(山東) 리청(歷城)현 룽산(龍山)과 일조(日照)현 양성진(兩城鎭) 두 곳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로, 흑색토기가 특징이 있는 이 문화를 룽산문화(龍山文化)라 한다. 이 흑색토기를 서양학자들은 ‘계란껍질토기’라고 불렀다. 아주 얇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놀로를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룽산문화는 그 이전 시대보다 훨씬 발달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주거도 화로를 중심으로 만들었다. 거주 부분을 석회로 굳히고 벽면에도 석회를 발라서 습기를 막는 등 한층 진보된 양상이었다. 조와 보리의 생산에 이용하는 농기구도 다양해 이미 생산력의 기반이 만들어 졌으며, 이미 마, 견직물 등의 가내 수공업도 성행했다. 또한 돌로 만든 호미나 가 이익을 주는 말과 소가 중요시된 것 같다.취락지 주변의 묘지를 발굴한 결과, 매장법도 이전 시기와는 다른 특징을 보여 주었다. 빈부의 차가 생겨난 것이다. 또한 남성의 묘가 여성의 묘보다 부장품이 많은 것으로 보아 양사오 시대와는 다르게 남성 중심 사회로 변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룽산 문화 다음으로 황하유역에서 일어난 문화가 이리두(二里頭)문화 ? 이리강(二里岡)문화이다. 이리두 유적은 사방 2km의 규모이고, 중심에서 대형 궁전 두 동이 발굴되었다. 왕묘는 발견 되지 않았지만 청동 용기와 무기, 그리고 대형의 옥기가 출토된 것을 보아 왕도정치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은(殷) 문화는 고고학상 기원전 1600년까지를 전기, 기원전 1600~1500년경을 중기, 기원전 1050년경까지를 후기로 분류한다. 중기까지는 은 문화가 완성되는 시기로, 황하의 남?동쪽에 유적이 집중되어 있다. 초기부터 중기까지는 왕조라기보다 상(商)이라는 부족이 모여서 형성된 도시국가를 통합하는 단계였던 것 같다. 상의 부족은 자치권이 강해서 은의 왕도 이들에게 간섭하지 못했다. 은나라 시조인 계에서부터 13대째에 성탕(成湯)이라는 인물이 나타나 쇠퇴해가던 은의 전 왕조인 하(夏)를 공격 멸망시키고 은 왕조를 수립한다. 이때부터 은(殷)은 하나의 왕조로써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형성해 갔다.은나라 중기에 들어서자, 이제까지 부족장이라는 입장을 취해 오던 은나라는 마침내 정치권력이 강해짐에 따라 전제국가를 위해서 힘을 쏟게 된다. 중기의 중요한 유적으로 정저우(鄭州)이리강 유적과 그 주변의 유적이다. 주목받는 것은 거대한 성곽으로, 한쪽 변이 2km에 가까운 규모이다. 이것은 강력한 권력을 지닌 통치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중기의 유적인 거대한 묘 속에서는 화려한 청동제 부장품과 더불어 순장자의 뼈가 발견되었다. 순장자는 아마도 주인을 섬기는 노예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른바 노예계층의 출현을 알 수 있다.은 왕실은 왕이나 왕족이나 본래는 신을 섬기는 세습의 신관이였다.전까지 빈약하고 약한 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이전 시대의 청동기와는 달리 이리강 유적에서 발견된 이 시대의 청동기는 상당히 훌륭하다. 또한 도구만이 아니라 무기나 공구 등 다양한 품목이 청동으로 만들어졌다.청동기 기술의 비약적인 진보는 은 왕조의 세력 강화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청동기가 석기보다 우수한 점은 제작기간이 짧고 동일한 제품을 다량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창, 방패, 화살촉 등의 청동 무기와 후기에 발명된 전차가 강력한 은나라 군대를 탄생시켰다.기원전 1450년경으로 추정되는 이리강 유적과 동시대의 유적의 출토품에서 더욱 주목받는 것은 문자의 사용이다. 도자기에 새겨진 문양(陶文)은 기호에서 문자로의 변화를 확실히 보여주었다. 이후 은 후기에 사용된 “갑골문”과 같은 문자도 보인다.현재 실재했다고 평가받는 중국 최초의 은(殷)왕조를 짐작하는 열쇠가 된 것은 청조 말기에 왕의영에 의해 발견된 “갑골문자” 이다.1899년, 청 왕조 광서제때 왕의영(王懿榮)은 지병인 말라리아 에 효과가 있다는 용골(龍骨)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집에 가져 온 뼈를 우연히 보게 된 동료 유악(劉?)은 뼈의 표면에 새겨진 글자가 고대 동기(銅器)의 명문과 그 모양이 비슷한 것을 주목 하고 왕의영과 자세히 그 뼈를 조사했다. 갑골문자는 소의 견갑 골과 거북이의 등뼈와 배뼈인 귀갑과 복갑을 그 재료로 하여 고대의 주술사인 정인(貞人)이 미리 파놓은 찬과 착이라는 홈에 열을 가하여 그 쪼개진 모양으로 길흉을 점치고 그 결과를 문 자로 새겨 기록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래서 이것을 견갑골의 골(骨)자와 귀복갑의 갑(甲)자를 따서 “갑골문자”라 부르기 시작했다. 갑골문자는 은 왕조인 22대 무정시대부터 사용된 것으로 대부분의 갑골문자는 점을 내용으로 하고 있어서 ‘복사’라고도 한다.후에 갑골문자의 출처인 허난성 안양(河南城 安陽)시 북서의 소둔촌(小屯村)을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은의 수도, 은허(殷墟)를 발견하였다. 갑골문자는 왕의영의 발견 전까지 신화의 시대로럽고 화려한 청동 제품, 그리고 토기가 출토되었다. 분묘나 유구의 분석, 그리고 갑골문자의 해독으로 은허가 기원전 1300년경의 은 왕인 반경에서 마지막 왕인 주왕에 이르기까지 12대 250년간의 왕도였음이 입증 되었다. 또한 12대에 걸친 왕의 이름도 사마천 의 에 기록된 왕조의 기록과 일치함으로 써 그 실존을 인정받았다. 은허는 사방 5km의 넓이에 왕의 궁전을 중심을 유력한 사람들의 주거지와 청동기, 골기, 토기, 옥석기를 제작하 는 공방, 일반인들의 주거지가 있고, 그 주변에 는 왕묘와 지배자의 분묘 등이 분포하고 있다. 왕묘 주변에는 희생양으로 바쳐진 산 제물인 인골이 다수 매장되었고, 은허 교외에서는 약 9,000명의 묘도 발견되었다. 은의 왕묘에 사람 의 순장이 많은 것은 사람의 피에 인한 정화 의식을 중요시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생물중에서도 가장 고등생물인 사람의 피를 흘리는 것으로 죽은 자는 정화되고, 죽은 후의 세계에서도 편안한 생활을 보장 받는다는 신앙이 있었다. 샤머니즘에 의한 정치와 호화로운 부장품으로 장식된 왕묘가 은 시대의 특징이다.왕의 분묘에서는 정교한 청동기와 토기 등이 출토되었고, 궁전의 유구 주변에서는 복점을 행한 갑골문이 발견되었다. 발견된 갑골문의 대부분은 제사나 왕실의 중대사에 관한 내용이었다. 복점의 내용은 조상신이나 자연신에 대한 제사의 여부, 전쟁의 시작과 종결, 수렵이나 여행의 여부, 농경의 풍작, 흉작의 점괘, 질병이나 임신에 대한 다방면에 걸쳐진 것들이었다.400년 동안 고대 중국의 중원을 다스렸던 은나라도 결국 주위의 다른 세력에게 제압당하는 날을 맞이한다. 이때가 주왕이 치세하던 기원전 1050년경의 일이었다. 이 무렵에는 왕권이 확립되어 주위를 제압하고 동남쪽으로 원정을 떠나는 일이 빈번했다. 은허와 더불어 중국 고대사상 괄목할 만한 발견이라는 양쯔강 유역의 삼성퇴(三星堆) 유적 은 은 왕조 후기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출토된 청동기는 은나라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기와 동일한 동광석(銅光石)을 사용해서
도서관에서 다른 과목 리포트를 위해 자료를 찾던 도중 우연히 '꿈을 향해 뛰어라‘라는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겉표지에 있는 ’전맹(全盲)의 일반중학교 교사‘라는 문구가 특히나 나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전맹의 장애인이 일반학교에서 그것도 선생님 생활을 한다는 것이 언뜻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교육에 있어서 아이콘택트는 거의 절대적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터라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생각하면 할수록 불가능한 일처럼 생각되었다.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판서도 해야 할 것이고, 수업시간에 졸거나 다른 짓을 하는 아이들이 있는 지도 봐야 할 것이고, 자신의 수업을 아이들이 잘 이해하고 있는지, 수업 분위기는 어떤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눈의 역할은 필수적일 것 일 텐데 말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그런 일들을 잘 해낼 수 있을지 책을 읽기도 전에 걱정스런 마음이 앞섰다.그러나 내 생각과는 달리 가와이 준이치란 사람은 이런 일들을 너무나도 잘 해내고 있었다. 물론 수업시간에 졸거나 다른 짓을 하는 아이들을 골라내는 등의 면에서는 문제가 있었겠지만, 그는 그의 핸디캡을 오히려 장점으로 살려냈다. 앞이 보이지 않아 학생들의 상황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모두가 참여하여 대화하는 열린 수업으로 만들어 나갈 수밖에 없었고, 학생들의 참여와 수업에 대한 피드백으로 그 역시 나날이 발전하는 교사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그는 늘 꿈을 가지고 살고 있었고, 일반 장애인들과 달리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책을 읽어가는 내내 하나하나 드러나는 가와이 준이치의 행보에 놀라지 않을 수 없는데, 이렇게 그가 일반인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이 책에 표현되지 못한 실로 많은 노력이 있었음을 짐작 할 수 있었다. 지금의 정상인과 다름없는 생활들을 해내고 페럴림픽(장애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등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교사 준이치가 있기 까지 자신을 끊임없이 채찍질 하며 자기가 설정 했던 목표들을 하나씩 하나 읽을 때면 어느새 이 사람이 맹인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나 자신을 발견 했다. 장애인도 우리와 어울려서 평범한 삶을 누릴 수 있고, 그들의 생각 역시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맹인의 교사생활이라고 해서 대단하고 거창한 이야기인 것이 아니라 그도 한사람의 약간 몸이 불편한 개성을 가지고 있을 뿐인 일반 교육자였던 것이다.가와이 준이치는 태어나면서부터 선천성 포도막 결손증이라는 안질환으로 왼쪽 눈이 보이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그가 자라 중학교 3학년이 될 무렵 그나마 남아있던 오른쪽 시력마저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는 시즈오카 현의 마이사카라는 어촌에서 태어났는데 어렸을 때부터 수영을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수영 선수로 활약 했지만, 시력을 완전히 잃고 난 뒤 그는 수영을 포기하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앞이 보이지 않아 코스를 똑바로 헤엄쳐 나갈 수 없게 되었고, 코스대로 헤엄쳐 나가더라도 턴을 하다가 수영장 벽에 머리를 부딪쳐 피가 나는 일도 잦았던 것이다.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하며 좌절했을 것이고, 결국 수영을 포기했을 것이지만, 준이치는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을 채찍질하는 선생님의 말씀에 힘입어 수영을 끝까지 계속해 나갔고, 그는 결국 바르셀로나 패럴림픽에서 은메달 2개, 아틀란타 패럴림픽에서 금메달 2개를 따내는 쾌거를 이룩했다. 그가 만약 처음 수영에서 맛 본 좌절을 딛지 못하고 포기했다면, 그는 살아가면서 부딪혀야 했던 많은 문제들에 대해 ‘그래, 난 장애인이야’ 라는 생각으로 계속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당당히 일반학생들과 같이 와세다 대학 교육학과를 졸업하였고, 교사로도 별 문제없이 생활하고 있다.그가 처음 마이사카 중학교에 발령 받고 아이들과의 첫 대면에서 했던 일은 아이들의 자기소개를 녹음하여 목소리와 이름을 외우는 것이었다. 학생들을 구별해 낼 수 없다면, 교사 생활 자체가 불가능 할 수도 있었다. 꾸지람을 해야 할 학생을 잘못짚을 수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과제물을 하나하나 그에게 읽어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고, 학교 측에서 역시 교과서를 점자로 제작해서 그에게 따로 준다든지, 키보드를 치면 음성으로 들려주는 컴퓨터라든지 많은 면에서 그를 배려해 주었다. 학생들 역시 그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에 동정이나 연민보다는 그를 다른 여러 선생님 중의 한사람으로써 대해 주고는 했다.그러나 그의 교편생활에는 맹인이기 때문에 불편한 점이 많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와 팀티칭 하는 선생님이 불참한 날에는 시간을 잘못 알아 수업을 5분 일찍 끝내버리기도 하고, 다른 반의 쪽지시험 문제지를 잘못 나누어 주어 배우지 않은 내용을 다 시험 보게 한 뒤에야 그 사실을 깨닫기도 했다. 또한 같이 팀티칭 하는 선생님이 혼내기는 했지만,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학생들이 종이비행기를 날린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당황해 하기도 했으며, 야외 활동으로 모래 조형물 만들기를 하던 날, 모래구덩이를 파놓고서 아이들이 치는 장난에 2미터가 넘는 구덩이에 빠질 뻔했던 적도 있었다.그는 부담임과 함께 수영부의 보조교사도 맡게 되었는데, 어렸을 때의 경험으로 인해 수영에 대한 그의 생각은 남달랐다. 수영 시간은 겨우 1분 남짓에 불과하지만, 그 1분 동안 선수는 온 힘을 다해 물을 가르고 헤엄친다. 그리고 그 1분간의 헤엄을 통해 자신을 사람들에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과 경기를 하기 때문에 일반 수영과 달리 상대의 페이스나 전략에 신경 쓸 수 없고 오로지 자신과의 싸움만을 한다. 또한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똑바로 코스를 따라 가지 못하고 계속 수정해가며 나아가야 하는 면 등이 수영과 인생과 많은 부분이 닮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 수영 경기는 꿈을 향해 나아가는 자기표현이었다.그는 지역대회에서 승리해 현 대회로까지 진출하자는 자신이 맡은 수영부 아이들과의 약속을 위해 자신의 연습까지 포기해 가며 최선을 다했다. 자신의 기록이 빨라지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것보다 학생들이 즐거그 또한 수영장에 함께 들어가 부원들이 수영하는 바로 곁이나 뒤에서 따라서 헤엄을 치면서 가르쳤다. 학생이 물을 가르는 소리를 듣고 결점을 추측해 그들의 자세를 코치해 나아갔던 것이다. 결국 그의 제자들은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그가 안타까워했던 사실 한 가지는 보통 사람들은 장애인이 하는 스포츠를 모조리 재활 치료라고 생각해 버린다는 것이었다. 신체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정상적인 사람을 따라가기 위해서라든가, 마이너스 상태를 0으로 돌리겠다고 장애인들이 스포츠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역시 운동을 하는 것은 일반 사람들과 같이 자신을 고양시키기 위한 활동일 뿐인 것이다. 장애인이든 일반인이든 1만큼 노력하면 1만큼 돌아오는 것이 바로 운동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준이치의 수업시간은 학생과 교육자간의 협력 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문제해결적인 수업이었다. 요즘의 세태가 학생들의 흥미를 이끌어내는 수업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활발한 발언을 이끌어 내서 학생들의 상황을 파악해야만 그에게는 수업이 가능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의 수업은 자연히 대화형식의 수업이 되었고, 이런 수업은 그에게 학생들과 친밀해 질수 있는 더 많은 계기를 안겨 주었다. 그룹 활동이나 개인적으로 필기를 할 때면 학생들은 책상 사이를 천천히 돌아다니는 그에게 그룹 활동이나 필기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지 말로 알려주고, 그는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이해여부를 묻거나 질문을 유도해 냈다.그가 수업을 하면 할수록 깨달은 것은,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선생님도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 는 것이다. 교사란 아이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함께 성장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디딤돌 같은 존재이며, 자신이 그동안 하루하루 열심히 저금해 왔다고 생각했던 밑천 정도는 금방 바닥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담당 교과의 지식을 지속적으로 재충전하고, 또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도력을 갖추는 일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학생들의 시선은 참으로 엄격해서 아무리 재미있는 선생님이라도 똑바로, 알기 쉽게 가르치느 날, 학생들에게 자신이 주스 캔인 줄 알고 덥석 마신 음료가 사실을 맥주였었다는 일화를 들려주기도 했고, 또 처음 도쿄로 유학을 가게 되었을 때 직접 부딪쳐 가면서 힘들게 하나하나 지리를 익혀 마침내는 정상인들과 다름없이 시내를 활보하게 되었던 이야기도 들려준다. 또 버튼 하나로 안테나가 쭉 늘어나는 휴대폰을 보여주며, 이런 휴대폰을 우리는 아무생각 없이 멋지다고 생각하겠지만, 이것이 한손이 없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편리하겠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다.그 역시 패럴림픽이 끝나고 처음 휠체어를 타보게 되었는데 양손에 똑같은 힘을 주어 바퀴를 굴리지 않으면 똑바로 나아가지 않았고, 한쪽에만 힘을 주게 되면 그 자리에서 빙글빙글 휠체어가 돌아 버린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 다른 장애인과도 마주할 일이 많았던 그조차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 것이다. 혼자 휠체어를 밀며 언덕길을 올라가기란 정말 힘이 든다. 그러나 누군가 밀어 올려주는 것은 그리 힘들지 않다. 그의 경우에는 모르는 곳을 혼자 돌아다니는 것이 어려웠는데, 휠체어를 탄 사람이 길을 일러주는 대로 조심스럽게 휠체어를 밀었더니 휠체어를 탄 사람은 혼자서 힘들이지 않아도 되니 좋고, 그에게는 길을 몰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니 서로가 좋다는 것이었다.학생들과 휠체어 체험 행사를 하고, 눈을 가리고 맹인체험을 해보고, 또 이런 장애인에 관한 일화를 아이들에게 들려주면서 준이치는 아이들이 ‘정말 그렇겠다. 그런 부분이 힘들겠구나.’ 하고 그저 장애를 가진 사람의 고충을 함께 느껴볼 수 있고 장애자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회인으로 자라주기를 진심으로 바랬다.그는 모든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남기면서 책을 마쳤다.“꿈을 이어나가라! 꿈을 쫓아가라!”가와이 준이치는 이 말처럼 지금까지 하나하나의 꿈을 꾸준히 이어나가고, 또 새로운 꿈을 좇아 달려왔다. 만일 그런 꿈이 없었다면 현재의 그도 없었으리라. 그는 꿈을 포기하는 건 언제라도 할 수 있지만 꿈을 향해 애써보는 것은 바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