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산 허균-시대의 반항아 허균Ⅰ. 서론㉠글을 쓰면서㉡허균의 연구 동향㉢허균의 평가Ⅱ. 허균의 개인, 사상적 배경㉠시대배경㉡생애㉢허균의 가계도㉣허균의 교우관계㉤사상적 배경㉥허균의 문학관Ⅲ. 작품 분석㉠시문집, 시화집, 시선집㉡ 전(傳)의 소설화 경향㉢홍길동전Ⅲ. 결론Ⅰ. 서론㉠글을 쓰면서당대 명문가요, 앞길이 탄탄대로일 수 있었던 그는 거침없는 말과 행동으로 보수적인 지배층들의 눈 밖에 났다. 허균은 시대의 반항아요, 탁월한 문인이었다. 그의 자유분방한 생활과 예리한 감수성, 그리고 진보적인 기질은 어느 누구보다도 예속의 속박을 벗어나 자유스러운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한 기질 아래서 많은 시와 논설, 시평, 소설, 전 등을 그의 진보적이고 개성적인 사상을 듬뿍 담고 있다. 그 중에서도 홍길동전은 그의 작품 중에서 아마도 가장 그를 잘 나타내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논(論)으로써 허균의 사상을 확인하고, 그러한 사상이 어떻게 홍길동전과 전(傳)에 담겨져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허균”의 연구 동향허균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 연구가 방대하여 내가 그 경향을 명백하게 파악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이 글을 쓰기 위하여 살펴본 연구물들을 토대로 허균에 관한 연구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밝히도록 하겠다.우선 『홍길동전』에 관한 연구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허균하면 『홍길동전』을 떠올릴 것이다. 『홍길동전』은 최초의 국문소설이자, 허균의 문제작으로 널리 알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연구 경향을 확인하자면, 많은 연구물들이 허균의 호민론과 인재론을 비롯하여 적서차별에 관한 생각, 그 밖의 사상이 『홍길동전』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살펴보고 있다. 또한 끊임없이 시비가 얽히는 것으로 『홍길동전』의 작자에 관한 문제이다.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는 사실은 택당 이식의 『택당집 별집』의 기록에 근거할 뿐, 그 밖의 어느 문헌에도 자세한 사실은 나오지 않는다. 이에 과연 이 소설 작품을 허균이 지었느냐 하는 문제사상이 지배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서오경을 일고 실천하는 것이 실천도덕의 마지막 목표였고 가장 높은 이상이었으며, 삼강오륜으로 인격과 사회질서를 재는 잣대로 삼았다. 이리하여 유교가 윤리를 강조하면서 사회질서와 국가통치의 중요한 방법으로 내세운 것이 바로 ‘복종’의 개념이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민중은 임금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나이 어린 사람은 나이 많은 사람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했다. 이 유교의 실천윤리가 조선조에 깊숙이 파고들어 일반 민중을 교화하는 바탕이 되었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고려조 말기에 불교가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폐단이 생겼다.첫째는 권위주의 또는 교조주의이다. 공자의 이론과 주자학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게 단속하여 학문의 경향을 폐쇄적으로 이끌어갔다. 그리하여 불교와 도교는 말할 것도 없고 성리학만을 앞세웠다. 다른 학문을 엿보고 다른 신앙을 좇으면 이단이나 사문난적으로 몰아 벼슬을 빼앗거나 죽이기까지도 했다. 그 때문에 불교는 산 속으로 쫓겨 가고, 도교는 신선사상으로만 흐르고, 고유한 사상은 민간신앙으로 흘러간다.둘째는 차별적인 인간관계로 신분계층이 엄격하여 구분된다. 평민은 능력이 있거나 없거나 결코 양반이 될 수 없었고,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하는 것만이 미덕이었다. 또 서얼금고라는 가혹한 제도를 낳기도 하였다.셋째는 보편성이 부족한 윤리로 가족주의와 파벌의식이 부추겨졌다는 것이다. 가족주의는 문벌 중심으로 버져 사사로운 정이나 비합리적인 생각을 기러주었고, 파벌의식은 사색당파라는 건전하지 못한 정치 토론장을 만들기도 했고 때로는 집권의 수단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또 지역 사이의 감정을 심화시키기도 하였다.2. 당론과 당쟁조선 중기 사회는 당쟁의 치열함에 의해 사회는 혼란스럽고 인재 등용은 지방색을 나타내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곧 엄격한 신분제도를 내세워 그들 자신의 권력에 대한 방책을 두텁게 쌓아갔다.이 같은 당쟁은 왕조 지배하에 나타나는 권력투쟁임엔 틀림없으나 그것이 양반들을 중심한 특정한 집단의 이익에만 국한되었다는돌출적이고 경박한 행동에서 비롯되었는데, 특히 외직에 나가서는 거의 1년을 지탱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그는 귀양살이를 계속하게 된다. 그러나 유배는 그에게 자신의 생애를 돌이켜보는 계기가 되었고, 이 시기에 그는 문학활동을 집중적으로 하거나 자신의 글을 정리하였다. 그는 『성수시화』에서 이렇게 말한다.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리던 사람이라 해도 귀양살이를 하면서 어렵고 험난한 체험을 하게 되면 비로소 삶의 진실을 근거로 하여 이루어지는 기묘한 문학을 할 수 있다.고난의 체험을 통한 문학...그것이 바로 허균의 문학이 아니었나싶다. 한편 종사관으로 활약했다는 것은 그만큼 글재주가 뛰어났음을 의미하는데, 특히 그의 시적 감식안은 당대 최고의 수준이었다. 숱한 탄핵과 파직에도 불구하고 그가 계속하여 벼슬살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박학다식에 문학적 재능이 출중했고 그것을 당대 사회에서 두루 인정받았던 데 말미암는다고 할 수 있다.아무튼 ‘자서제질사돈방’ 사건은 그에게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별 탈 없이 넘어갔지만 세력이 없던 자기만 유배당했기 때문이다. 그 뒤 허균은 체세를 완전히 바꾸어 당시 대북파의 영수로 권력을 휘두르던 이이첨에게 아부하며 가까이 지내게 된다. 게다가 2년 뒤 서자 출신의 박응서, 서양갑, 심우영 등의 칠서지옥(七庶之獄·)이 일어나자 신변의 위험을 느껴 더욱 이이첨과 가까이 지냈다. 이 옥사는 박응서 등이 주동이 되어 혁명을 일으키려다가 사전에 발각된 것인데, 그들과 평소에 어울리던 허균은 여기서 용케 빠져나올 수 있었다.허균이 44세 되던 해, 당쟁의 회오리에 휩쓸리던 허균에게 그나마 믿음을 주고 의지가 되었던 큰 형 허성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이제야말로 혼자 남게 되었다. 이이첨과 친하게 지내면서 그는 이이첨이 주선한 벼슬 호조참의의 신분으로 천추사로 중국을 다녀왔고(46세), 다시 이듬해에는 동지겸진주사인 민형남의 부사가 되어 중국에 갔다. 중국을 왕래하면서 그는 명나라의 학자들과 사귀는 동시에 『태평 존경과 안타까운 심정으로 대했다. 허균은 이달을 통해서 서자의 아픔을 일찍부터 느낄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손곡선생이 서자로서의 울분을 여러 가지로 토했고 난설헌과 함께 시를 배우면서 그 분의 사상을 많이 배웠던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조선시대가 갖고 있었던 서얼금고에 의해서 인재를 버리고 인재가 제대로 등용이 못되는 그런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허균은 이 불우한 스승을 위해 특별히 『손곡산인전』을 짓기도 하였다.?권필권필은 그 시대에 뛰어난 글재주를 날리던 기개있는 선비로서 광해군을 욕한 죄로 귀양을 가던 중에 말술을 단숨에 마시고 쓰러져 죽었던 사람이다. 허균은 『전오자시』에서 권필을 이렇게 읊었다.석주는 천하의 높은 선비로,그의 재주는 진실로 뛰어났다.포부 펴는 것을 즐기지 않고궁벽진 골에서 굶어 지내기를 달게 여겼네.또한 허균이 권필에게 보내는 편지도 척독의 형식으로 『성소부부고』에 남아있다.형이 강화도에 계실 때에는, 1년에 두어 차례 서울에 오시면 곧 저희 집에 머무르면서 술을 마시고 시를 주고받았는데, 이는 인간 세상에 매우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오시고는 열흘도 한가롭게 어울린 적이 없어서 ...중략...때마침 우유술을 밎어서 젖빛처럼 하얀 술이 술동이에 뚝뚝 떨어지니, 얼른 오셔서 맛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바람 잘 드는 마루를 하마 쓸어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사명대사, 서산대사허균에게 불교의 오묘함을 깨닫게 한 사명당은 수시로 허균에게 깊은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허균이 서문을 쓴 사명당의 문집에는 허균의 경박함을 우려하는 시가 수록되어 있다. 사명당은 항상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말해서 주위로부터 비난받는 허균을, 형처럼 나무래며 충고하는 시를 지어줬던 것이다.남의 잘잘못을 말하지 말지니한갓 이로움 없을 뿐 아니라 재앙까지 불러온다네만약 입 지키기를 병나게 하듯 한다면이것이 화로 몸 편하게 하는 으뜸의 방법이다.뿐만 아니라 사명당의 스승 서산대사도 문집의 서문을 허균에게 부탁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 못하게 하고 있어 아무리 재주가 있어도 초야에 묻혀 썩힐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이는 고금 천하에 유례가 없는 일인바, 그러면서도 세상에 인재가 없다고 한탄들 하고 있으니 잘못이라고 나무랐다. 결론적으로 허균은, 하는ㄹ이 낸 인재를 인간이 버린다면 이것이야말로 역천이라고 규정지음으로써, 당대의 통념을 통렬히 비판하였다. 이것이 『유재론』의 요지이다.『유재론』에서 주장하는 바는 주자주의적 사회관과는 배치된다. 하층 백성 가운데에도 고귀한 인재가 얼마든지 있으며 그들을 발탁해서 등용하자는 얘기는 상하층의 구분을 허물자는 얘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가문과 과거시험이라는 장치를 통해 상하층간의 지배관계를 공고히 유지하던 지배체제에 도전하는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선학들은 그의 글을 두고 ‘박복한 글’이라고 칭한 경우도 있다. 이는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찌르고 들어가 반론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글이란 부드러우면서도 문제의 핵심을 지적하고 그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최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허균의 논설에서는 그렇지 않다. 무섭게 공격하고 뒤로 물러설 수 있는 여지도 주지 않는다. 오직 작자의 의도를 간결하면서도 더 이상 표현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하는 데 있다. 그러한 그의 생각을 표현하는 방법은 그의 운명을 가늠할 수 있으리란 생각을 가지게 한다. 왜냐하면 글의 내용이 많은 ‘적’을 낳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누가 자기를 소인배라고 하는데 기뻐할 사람이 있겠는가? 특히 유재?호민론 등에서 보여준 허균의 생각은 통치자와 기득권자에게는 엄청난 도전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권력을 직접 행사하는 사람과 그것을 관찰하는 사람 사이에는 너무나 큰 틈새가 있다. ‘개혁’ 또한 비판자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희망적이고 매력적인 단어지만 권력의 핵심에서 보면 그보다 더 어렵고 무서운 단어는 없을 것이다.?이단사상허균은 기존의 성리학적 예교에 얽매이지 않고, 당시에 이단시되던 여러 방면의 사상과 지식에 폭넓게 관심을 갖고 수용하는 열린 시각의 소유자였다.
인간자원개발론-인간자원개발(유승우) 정리과목 : 인간자원개발론교수 : 이희수 교수님학과 : 교육학과학번 : 20031657이름 : 이 슬 기제 1 부 인간자원개발의 이론적 기초제1장 인간자원개발이란? 인간자원개발(Human Resource Development ; HRD) = ①인간 + ②자원 + ③개발? 다음과 같은 질문 중요일차적 질문 : ㉠ 인간이란 무엇인가?㉡ 자원이란 무엇인가?㉢ 개발이란 무엇인가?이차적 질문 : ㉣ 인간을 자원이라 볼 수 있는가?㉤ 어떻게 자원을 개발할 수 있는가?㉥ 어떻게 인간을 개발할 수 있는가?삼차적 질문 : ㉦ 자원으로서의 인간을 어떻게 개발할 수 있는가?교육학의 인간관 : 인간은 교육적인 동물HRD의 인간관 : 인간은 일하는 동물☞인간자원개발은 조직에서 그 구성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려는 노력과 조직 구성원의 자기개발을 통합하려는 노력1. 용어와 개념인간자원개발을 지칭하는 용어 :인적자원개발, 인력개발, 인재개발, 산업교육, 기업교육, 사내교육훈련(1) 직업교육과 산업교육직업교육 : “…농업, 공업, 상업, 수산, 임업, 가정 등의 생산적 직업에 종사하려는 청소년에게 베풀어지는 교육을 가리키며, 실업교육이나 산업교육과 같은 뜻으로 해석되고 있다.”(교육학대사전 906쪽)산업교육 : “산업교육이라 함은 기술계 각급학교, 실업계 각급학교, 또는 실업계 학과 및 과정을 설치한 인문계의 고등학교나 대학이 농 ? 공 ? 수산업 기타 산업에 종사하기 위하여 필요한 지식, 기술을 습득시킬 목적으로 행하는 교육을 말한다.”(교육학대사전 487쪽)⇒직업교육과 산업교육 모두 학교교육의 한 형태로 이해※ 산업교육은 요즘에 다르게 정의: 산업체 내에서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활동(2) 인간자원개발과 산업교육 → 미국과 우리의 사회적 맥락에서 이해인간자원개발 :-인간의 ‘쓰임새’에 초점-고용주가 고용인들에게, 조직이 비고용인들에게 그 조직의 목적에 따라 직무수행의 증진이나 성장을 위해 정해진 기간 내에 제공하는 조직적인 학습활동(Nadler&Na 이론이 HRD의 발전과정을 명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발달의 초기는 기능론이, 중간과정에는 진화론이 다른 관점들에 비해 더 설득력있다고 판단된다.2. 시기별 특징1) Gilley & Eggland의 설명Gilley & Eggland(1989) :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인간의 학습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활용되어 왔던 여덟 가지 환경(개인, 가족, 지역사회, 교회, 학교, 대학, 직장, 매체)을 중심으로 시대의 변화에 따라 각각의 활용도 분석산업화 이전의 사회 - 가족, 지역사회, 교회가 인간의 학습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산업화의 과정 - 잘 훈련된 인재에 대한 요구가 늘어남에 따라 중요한 학습의 환경이 학교 가 됨정보화 사회의 발전 - 학습환경을 학교에 고정하지 않고 매체를 활용한 개별학습과 직장에서의 학습의 형태로 변화Mayo에 의해 수행된 Hawthorne 연구 :-모든 조직에 비공식 집단이 있으며, 이 집단이 조직의 효과성과 효율성에 영향을 미침-종업원에게 주는 관심의 양과 질이 생산에 영향을 미침1950년대의 인간관계 운동 : HRD를 위한 초석으로서의 역할Herzberg, Rogere, Maslow, Drucker, Likert, McGregor, Argyris : 행동과학을 적용하는데 막대한 영향을 미침-경영자들이 비공식 집단의 힘을 인정-물적자원, 재정적 자원만큼이나 인간자원의 중요성을 인식산업사회 : 과거에 가족, 지역사회, 교회중심의 학습체제도 학교 중심의 교육으로 전환매체를 활용하는 학습 등장정보화사회: 가족이나 지역사회의 역할 감소개인, 직장, 매체의 영향력 증가학교 밖에서의 의도적 교육기회 확대, 산업교육이 대안으로서 중요한 역할2) Pace, Smith와 Mills의 설명18세기까지 : '숙련'이 종업원에게 필요한 자질로 인식19세기 : '능률'이 강조. 공장학교나 기업체, 학교, 정부, 전문가협회를 중심으로 어떻게 하면 종업원의 작업능률을 높일 수 있는가에 대하여 고심20세기 초 : 종업원의 만족을 높이는 것에 관심의 초점. 흥분되고 도전해 볼 만한 일을 발견할 수 있는 환경 허락ㅁ. 자신의 일과 삶에 중요한 요구들을 지닌 한 인간으로 취급될 수 있도록 함.6) 개인개발과 조직개발-조직의 효과성을 향상시키는 것은 구성원들의 업무수행능력이나 기능의 숙달, 태도 개선을 통하여 가능-인간자원개발 담당자가 조직 구성원 개개인의 차원과 조직 전체의 차원 사이를 연결해 주어야 함.제 2 부 인간자원개발의 모형1 단계2 단계3 단계4 단계5 단계6 단계분석목표설정설계자료개발시행평가제2부 인간자원개발의 모형부분에서는 AT&T에서 개발한 T&D 이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제4장 분석1 단계2 단계3 단계4 단계5 단계6 단계분석목표설정설계자료개발시행평가●요구분석 :일반요구분석 : 과업수행상의 불일치가 있을 때 그 원인을 탐색하여 해결책을 제안훈련요구분석 : 작업과정의 주요요소 및 필요한 자질 파악, 훈련에 포함될 기술, 지식 찾기●비용분석 :비용-이익 분석 : 비용-이익의 재화적 가치를 비교해서 HRD 개입의 필요성 여부를 판단비용-효과분석 : 가능한 모든 대안들의 비용과 이익을 따져 보아서 가장 효과적인 형태 결정1. 요구분석1) 요구의 개념Knowles : 교육적 욕구는 원하는 상태와 현재상태의 차이라고 정의하고, 이러한 결핍에서 오는 것 뿐만 아니라 필요와 의무에 기초2) 요구분석의 모델(1) 개인 자아실현모델-무작위 흥미모델 : 일반인의 대다수가 가지고 있는 흥미나 필요의 발견을 위한 것-선택적 흥미모델 : 조직의 잘 알려진 부분의 개인의 요구에 대한 모델(2)개인 평가모델협조적 참여 : 학습자들이 교육요구를 명확히 할 때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음비협조적 참여 : 학습자 자신의 사정기법을 통해서 교육요구 사정(3) 시스템 불일치모델시스템 불일치모델 : 주어진 상황에서 현재상태와 바람직한 상태의 차이를 구체화문제-요구 접근방법 :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그것을 치유하는 프로그램 개발목적-식별 접근방법 : 조직의 목적으로부터 신뢰성있게 추출된 목표는 바람직한 학습의 결과 없다. 내용타당도에 중요성을 두는 이유는, 수행할 직무의 내용과 인간자원개발이 개입을 통해 다루려고 하는 내용과 그 결과의 성취여부를 재는 평가에서 다루어야 할 내용이 모두 일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용타당도가 높은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사람이 실제 업무를 수행할 때에도 더 생산적이었다는 결과를 보고한 예는 많이 있다.2) 측정평가의 유형과 활용규준참조 : 어느 개인의 점수를 규준집단의 득점분포와 비교하여 해석준거참조 : 명세화된 행동준거와 비교해서 행동→ 목표설정 단계에서의 평가는 당연히 설정된 목표에 도달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준거참조 평가이어야 할 것준거참조 측정은 학습자가 가진 기능(skill)이나 지식을 일정한 준거나 기준과 비교해보는 일련의 질문이나 연습 등의 활동, 즉 준거검사를 통해 수행된다. 이러한 준거검사에서 각 문항 또는 항목은 최종 수행목표나 구성목표에 직접적인 관련성이 있어야 한다. 실제로 HRD 개입의 목표를 달성했는지 그 여부를 판단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 검사는 개입의 전략을 결정하는 데에도 필요하며, 어떤 식으로 과업 평가의 계획을 세우느냐가 실제로 HRD 개입활동의 성격을 결정하므로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제6장 설계1 단계2 단계3 단계4 단계5 단계6 단계분석목표설정설계자료개발시행평가설계에서 수행되는 몇 가지 활동과정을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1. 목표의 계열화 : 학습자들이 최대한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어떻게 학습목표들을 조직하고 순서있게 계열화할 것인지를 결정2. 과정개요의 개발 : 순서가 결정되면 각각의 목표에 대하여 그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다루어야 할 과정의 개요를 개발3. 전략의 설계 : 어떤 강화 방책을 쓸 것이며 학습의 결과를 어떻게 검사할 것인지에 대한 수업전략을 세워야 함.4. 점검(audit) : 완성된 수업계획은 소요되는 재정, 시간, 자원상의 제한점이 무엇인지를 고려하여 평가, 수정5. 차시계획의 개발 : 강의식과 점심식사, 휴식 등과 같은 물리적 고려사항을 참고하여 차시계획 개발1. 상적인 상황 : 어떤 프로그램이든지 그것을 실행하는 데 적합한 매체를 선정하는 데 어떤 측면에서의 어려움도 없다.? 현실적인 문제점 :첫째. 요구자가 내용과 방법이나 매체의 종류를 제한해서 요청둘째. 이미 보유하고 잇는 장비나 시설을 이용해야 할 경우? HRD과정에서 매체는 학습과정을 돕기 위한 수단으로 다음과 같은 역할ㄱ. 학습과정 전반에 걸쳐 기여ㄴ. (과도기적) 전환의 소품 역할ㄷ. 변화를 제공ㄹ. 학습경험의 제공ㅁ. 현재 전달되는 정보를 강조ㅂ. 숨은 메시지의 운반체 역할ㅅ. 메시지를 용도에 맞게 재단? 매체의 활용이 효과적이기 위해서는?ㄱ. 청중을 파악-프로그램을 준비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매체를 준비할 때도 '누가' 또 '어떻게' 그 메시지를 받을 것인가를 고려ㄴ. 매체는 그 자체가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다.2. 매체 및 자료의 종류시각청각시청각오버헤드환등기사진영사기인쇄물실물 모형 및 전시물녹음테이프환등기사진영사기영화비디오테이프비디오디스크컴퓨터3. 매체 활용의 제한점특정한 부분에서 멈추어 부연 설명을 하는 일은 어떤 매체이든지 비교적 쉽다. 그러나 학습자들의 질문에 응답하기 위하여 이미 지나간 어떤 부분으로 되돌아가고자 할 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매체 중에는 특정 부분에 표시를 하여 기억하게 한다든지, 카운터를 부착하여 활용하도록 되어 있는 것도 있다.4. 매체 및 자료의 선택과 개발매체나 자료 선택시 고려할 점-훈련이 던제 필요한가?-그 매체를 활용하는 것이 필수적인가?-개발비용은 어떤가?-청중의 크기-청중의 배치-선택된 매체에 대한 선례가 잇는가?-그 과정이 회사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그 과정이 얼마나 지속될 것이라 예상하는가?-숨겨진 협의사항이 있는가?-선발, 승진 등에 활용될 훈련과정인가?-대상집단의 구성은 어떤가?시청각매체를 활용할 때 고려해야 할 사항ㄱ. 시청과 청각의 자극을 활용-일반적으로 시각매체가 주요 메시지를 전달하고 청각은 그것을 돕는 역할ㄴ. 불필요한 중복 피하기ㄷ. 학습자에게 괴로움을 주지 말아야 함-색깔, 문서화
프레이리의를 읽고중앙대학교 교육학과 20031657 이슬기교육실습 금 78 교시 이용관 선생님시골 작은 마을에 우물이 하나 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이 우물의 물을 이용한다. 하지만 이 우물은 애초부터 잘못 지어졌다. 마을을 관리하는 기관에서 물을 요구하는 마을 사람들의 아우성에 못 이겨 그들의 난리를 잠재우기 위해 대충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는 마을 사람들도 우물에 만족하며 아무런 불만 없이 이용한다. 그렇지만 부실하게 만든 우물이 제대로 유지되기 만무하다. 물은 마시기에 너무 탁한 것이었다. 하지만 마을 사람 대부분이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이미 더러운 물에 익숙해져있기 때문이다. 이때 마침 마을의 한 젊은이는 이 물이 먹기에 부적합한 것을 발견한다. 젊은이는 고민한다.‘이 사실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릴까? 만약 그렇게 해서 마을 기관에 우물을 제대로 보수해달라고 요구하면, 그 권위적인 사람들이 나의 요구를 들어줄까? 이런 일에 나서는 나를 눈엣가시처럼 여기지 않을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프레이리의 『교사론』을 읽고 잠깐 위와 같은 이야기를 생각해보았다. 젊은이는 마을 사람들이 더 이상 우물의 물을 먹으면 건강까지 위협받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젊은이는 자신이 기꺼이 나서서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면서 고쳐달라고 요구를 할지 그렇지 않을지 고민하고 있다. 젊은이가 우물의 물이 더럽다는 것을 알게 된 그의 감별 능력은 칭찬할만하지만 그는 또 다른 벽에 다다르게 된 것이다. 내가 이러한 이야기를 생각한 것은 단순히 마을의 우물을 둘러싼 문제를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우리 학교, 학생, 그리고 교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점점 탁해지는 우물은 학교를, 물이 더럽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마을 사람들은 학생을, 그리고 젊은이는 교사를 빗대어 내 나름대로 위와 같은 이야기를 던져본 것이다. 이는 프레이리가 『교사론』을 쓸 당시의 배경을 설명하면 좀 더 이해가 빠를 것이다.프레이리가 본 교육 현실, 특히 남미는 불합리한 체제에 둘러싸여 있었다. 권위적인 정부 아래에서의 학교 현장은 학생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불합리한 현실을, 사랑을, 희망을 제시하지 않는다. 수많은 학생들이 중도 탈락자로 전락하고 그들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안목 또한 갖추지 못하고 어른이 된다. 그렇게 무지하게 자란 사람들을 토대로 나라는 여전히 권위적인 체제,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특권층은 계속 그들의 특권을 유지하고 키워간다. 어떤 이들은 경제, 생산체제와 같은 하부구조가 변하지 않는 한, 이러한 불합리한 교육, 문화,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프레이리는 이렇게 외친다. “교육이 일어서야 한다. 제대로 된 교육은 지금과 같은 불합리한 현실을 타파할 희망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그가 외치는 희망적인 교육의 힘은 교사의 역할에서 나온다. 그대로 체제에 순종하는 무기력한 교사가 아니라, 현실의 불합리성을 인식하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 싸우는 교사의 역할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러한 교사의 곁에서 가르침을 받는 학생들이 세상을 바로 볼 줄 알고, 그들의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우리를 둘러싼 현실이 현재보다는 좀 더 나아질 것이다. 이러한 생각 아래에서 프레이리는 교사의 역할을 중시하고 그들이 변화하기를 바란다.프레이리가 생각하는 교사의 역할은 단순히 남미 국가의 특수한 현실 속에서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프레이리도 그러한 구분을 짓고 교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도 아닐 것이다. 분명 남미와 한국의 상황은 다르다. 사회적인 분위기를 비롯하여 교육현장의 모습도 각각 다르다. 다행히 프레이리가 묘사한 브라질의 모습보다는 한국의 상황이 좀 더 나은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한국의 교육 현장에서도(이 밖에 전 세계의 교육 현장에서도) 프레이리가 제시한 교사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다. 우리의 학교가 예전보다 많이 좋아진 것은 사실이다. 전두환 시절의 삼청 교육대라는 가혹한 형벌도 없어졌고, 교과과정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만으로 우리의 교육이 희망적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우리의 교육상황은 아직도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교육현장에서는 여전히 교육기회를 소외받는 학생들이 많이 존재하고, 학업성취도 격차는 커지고 있으며, 불평등도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많은 교사들이 지식을 전달하는 전달자의 역할만을 중요시하고, 학생들의 목소리는 듣지 않는다. 세상을 비판적으로, 주어진 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하지 못하는 수많은 교사들에게 가르침을 받는 학생들은 자기 앞에 주어진 길만 따라가려고 한다. 세상을 보는 근본적인 안목을 키워주지 못하는 교육 하에서는 교육도, 세상도, 자기 자신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마치 우물에 고인 탁한 물처럼, 또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마을 사람들처럼 우리의 세계도 학교도 학생도 정체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사의 역할은 여지없이 상기해보아야 한다.기꺼이 학생들을 가르치려고 하는가? 그렇다면 학생들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조금이라도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희망의 교육을 위해 기꺼이 자기 자신을 던질 다짐은 하였는가? 교사는 기꺼이 세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눈을 가져야 하고, 자신이 인식한 것을 위해 싸워야 한다. 과연 한국의 교사들은 이에 대해서 한점 부끄럼 없을까?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법, 교육에 희망이 있다는 것, 다른 이보다 출발선이 늦다고 해서 낙오자가 되리라는 법은 없는 것 등을 가르치고 있는가? 단연컨대 상당수의 교사들이 그저 안정된 직장, 정보 제공자로서 자기를 규정하고 꼭두각시처럼 교실을 지키고 있다. 혹은 어떤 교사는 교육과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위치를 위협받지 않기 위해, 자신이 나서봤자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 아래에서 알아도 모르는 척 하고 있다. 또 다른 교사는 진지하게 교사로서의 고민을 하지 않고 무작정 행동하려 하기만 한다. 실천이 없는 이론은 번지르르한 말 뿐이고, 이론 없는 실천은 과장스럽고 길을 잃기 일쑤이다. 교사는 알고 행동함으로써 프락시스(Praxis)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프레이리의 『교사론』에 나오는 이러한 생각들을 읽으면서 어떤 사람들은 너무 진보적이라고 혹은 투쟁적인 이야기 아니냐고 거부감부터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프레이리의 『교사론』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에서 일어나는 착오라고 생각한다.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자. 앞으로 내가 할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가정이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세상을 비판적으로 보는 능력을 기르도록 돕지 않는다. 그냥 주어진 대로 기계적으로 행동하기를 가르칠 뿐이다. 부유한 지식층 부모님을 둔 아이들은 점점 더 좋은 학력을 얻고 출세하며, 나머지 아이들은 출발선상은 물론이요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힘들다. 불평등한 상황에 놓인 학생들은 전혀 그러한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저 ‘이게 내 운명이겠거니’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점점 더 소외되는 교육 시스템이 학교를 장악하고 있다. 학교와 세상은 아이들에게 희망을 가르쳐주기보다는, 낙오자를 미리 걸러내고 있다. 아이들과 그 부모들은 이러한 현실이 사회구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기 개인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그 잘못을 찾는다. 이 현실은 타파되지 않고 오히려 심화될 뿐이다. 자, 이러한 상황을 생각해보자. 진정으로 희망을 꿈꾸고, 아이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가르쳐주려는 교사라면 이러한 것들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그의 역할일까?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면, 그러한 교사는 학생들 앞에서 학부모들 앞에서, 그리고 꼬박꼬박 나오는 봉급과 평생직장이라는 조건 앞에서 당당해질 수 있는가? 교사는 마음의 관료화를 막아야 한다. 부정적인 현실 앞에서 “예”라고 묵인하는 것이 아니라 “아니오”라고 용감하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프레이리가 하는 말은 더 이상 우리에게 동떨어진 것도 아니요, 무조건 진보적이고 투쟁적이라는 편견 아래에 배타적인 자세를 취할 필요도 없다. 프레이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교사의 기본적인 자세나 마음가짐, 태도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서양문화사 과제-?미국?에 대하여Ⅰ. ?미국?을 조사 대상으로 선택한 이유Ⅱ. 초기 이민자들의 생활Ⅲ. 미국의 역사Ⅳ. 미국인의 국민성Ⅴ. 미국의 신화적인 영웅, 그리고 전설Ⅵ. 지역적인 차이(지역적 특성)Ⅶ. 인종 간 불평등Ⅷ. 철의 미국 노동자 - 계급불평등의 일례Ⅸ. 기후적인 특성Ⅹ. 미국의 음식문화?. 다양성을 포옹하는 미국의 스포츠?. 소감과목 : 서양문화사학과 : 교육학과학번 : 20031657이름 : 이슬기Ⅰ. ?미국?을 조사 대상으로 선택한 이유‘미국’하면 생각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특히 미국하면 우리나라와 ‘닮은 꼴’, 인종?계급 간의 불평등, 무한 경쟁, 세계 최대 강국 등등이 생각난다. 어쨌든 이렇게 생각나는 것이 평등이나 공동체, 공존과는 거리가 먼 냄새가 나는 단어인 것 같긴 하다.나는 1학년 때 교육기회균등에 관한 짧은 글과 약간은 어설픈 논문을 쓰면서 유독 기회균등과 평등이라는 성격에 우호적이고 너그럽다. 그 이후로도 그와 비슷한 성격의 공부를 하면서 미국의 인종?계급 간의 불평등, 다른 나라에 행하는 억압에 대해서 반감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물론 다른 국가들도 나름대로의 치열한 경쟁이 있을테고, 불평등이 있을테고 다른 사람을 억압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겠지만, 유독 미국에 싸한 감정이 도는 것은 이 자극적인 국가를 우리나라가 닮아가는 데 있다.그렇다면 이러한 의문점이 든다. 내가 생각하는 미국(앞에서 제시했던)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아시다시피 상당수의 유럽인들(특히 영국인들)이 미국으로 흘러갔는데, 이 유럽인들의 속성을 과감하게 정의하자면 개인의 부 축적보다는 개인의 변혁, 즉 인간 정신 고양에 가치와 공존, 조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에 비해 미국은 개인의 과도한 자율성과 부의 축적이 핵심이다. 물론 내가 앞에서 제시했던 불평등이나 경쟁위주의 습성도 여기에 포함된다. 어떤 역사가 미국인들이 이렇게 흘러가도록 한 것인가? 그리고 그러한 습성은 미국 사회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이 의문점에 확실하게 답을 제시할 수 있을지는석하지 않은 영국의회가 일방적으로 표결한 내국세는 절대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인지세법의 시행을 방해하기 위하여 그들은 매사추세츠의 새뮤얼 애덤스를 중심으로 ‘자유의 아들들’이라는 과격한 단체를 조직하였다. 이 조직은 전식민지로 확대되어 데모와 폭동이 수없이 반복되었다.이러한 아메리카인들의 주장에 대하여 영국정부는 반대되는 주장을 내세웠다. 즉 식민지인들은 그들의 대표를 영국의회에 직접 보내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보낸 것과 마찬가지로 의사가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상의 대표이론’을 내세워 맞섰다. 이러한 상반되는 주장이 오가는 가운데 인지세 반대투쟁은 영국 상품에 대한 불매운동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영국의회는 자기들의 조치가 현실적으로 현명치 못했음을 깨닫고 1766년에 인지세법을 폐기하였다.인지세법이 폐기되고 나서 1년 뒤인 1767년에 영국정부는 재무장관 찰스 타운센드가 마련한 ‘타운센드법’을 제정하였다. 이 법은 영국으로부터 수입하는 유리, 종이, 잉크, 페인트, 납차 등에 대하여 관세를 부과하고, 그 세수입의 일부로 식민지 총독 및 관리들의 월급을 지불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치에 아메리카인들은 영국상품 불매운동을 벌였으나, 영국정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식민지 규제법의 강제 집행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에 아메리카는 새로운 투쟁 방법을 전개하니, 그것은 급진적인 여성 단체인 ‘자유의 딸들’의 영국 상품 불매 운동과 동시에 아메리카 상품 애용운동이다. 타운센드 법에 대한 항의의 물결이 거세지자, 영국은 과세의 문제를 넘어 보다 확대된 의미의 자치문제를 불러 일으켰다.보스턴에서는 아메리카의 무질서 상태가 절정에 달하자 1770년에 영국군이 보스턴에 진주하였다. 보스턴에서 영국군 부대들은 시민들의 야유에 흥분하여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여 4명의 시민이 사망하였고 , 이를 이른바 ‘보스턴 학살사건’이라고 말한다.결국, 영국의 양보로 식민지인들의 흥분은 점차 가라앉았고 1773년까지 3년 가까이 그런대로 평온이 유지되었다. 정작 심각한 문제는시작되었다. 여기에서 미국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이것을 필두로 캘리포니아에서도 미국인 주민들이 일어나 미국은 어렵지 않게 캘리포니아를 정복할 수 있었다.그러나 이것은 북부의 노예제 폐지론자들의 강력한 반발을 샀다. 그들은 미 연방 안에서 남부의 노예 소유주 세력이 쇠퇴하기 시작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멕시코 전쟁을 유도했다고 생각하였다. 어쨌든 1840년대 미국의 팽창은 확실히 노예제 확대 문제와 관련이 있었다. 이로 인해 미국 지역 간의 갈등은 더욱 격화될 조짐이 피어났다.⑥ 미국의 남북전쟁미국은 대서부 진출과 동시에 산업혁명기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공업이 발달하고 원료와 상품수송을 위한 도로, 운하 건설이 가속화되었으며 늘어나는 일자리를 채우기 위해 엄청난 수의 이민자가 쏟아져 들어왔다. 이렇게 산업과 사회가 급격히 변화하자 결국 농업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적인 남부세력과 공업, 상업을 중심으로 하는 신흥부유 북부세력의 충돌이 불가피했다. 결국 이 두 지역은 미국의 주도권을 놓고 생사를 건 승부를 치러야 했는데, 이것이 바로 남북전쟁이다.미국사회가 농업중심의 남부부, 공업중심의 북부로 확연히 갈라지면서 미국의 정치도 남북으로 완전히 갈라져버렸고 남북대결의 가장 큰 쟁점으로는 ‘눈에 드러나는’ 노예제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미국정치가 나름대로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노예주가 11개, 자유주(노예제도를 인정하지 않는 주) 11개로 1대 1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819년 새로 미국의 영토가 된 미주리주가 노예주로 연방가입을 신청하면서 노예주, 자유주 간의 균형이 깨질 형편이 되었다. 미국정계는 소란스러워졌고, 남북 간 감정대립이 날카로워졌다. 이 소란은 1820년의 미주리 협정으로 미국 땅의 36도 30분을 경계로 하여 그 이남에서는 노예제도를 인정하되 그 이북에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기로 협정을 맺었다. 미주리협정으로 노예주, 자유주 간의 균형이 다시 잡혔지만 그것은 단지 임시방편이었을 뿐이었다.미주리 협정 이후 이를 위해 트루먼 행정부는 ‘페어딜 정책’과 ‘마셜 플랜’을 추진했다. 이어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국제적 협조체제의 강화와 반공태세 강화를 위한 대내외 정책을 펼쳤다.그 결과 경제?사회 그리고 외교부문에서 보다 발전된 변화가 일어났다. 그렇지만 발전과정에서 야기된 문제점 또한 적지 않았다. 도시문제, 경기후퇴, 달러화의 불안정, 그리고 자연자원의 낭비등과 같은 문제들이 새롭게 또는 반복적으로 드러났다.35대 대통령에 당선된 케네디는 ‘뉴프런티어 정책’의 실현을 통해 대내적으로는 사회정비?경기회복을 시도했고 대외적으로는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과의 경쟁에서 미국의 자존심을 지키려 하였다. 또한 존슨은 ‘위대한 사회’ 건설을 표방하면서 빈곤추방과 교육발전에 주력하였다.한편 링컨의 노예해방선언이 있은 지 100년이 지난 1950년대에 들어서도 흑인의 지위는 별로 나아진 것이 없었다. 미국사회는 1896년에 내려진 대법원 판결 이래 백인과 흑인은 철저히 분리되어 학교, 공원, 화장실은 물론 버스까지 흑인과 백인은 섞일 수가 없었다. 2차대전이 끝난 뒤 1948년 트루먼 대통령은 군대에서의 흑백차별을 공식적으로 금지하고 아이젠하워도 흑백차별을 없애는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임기 중인 1954년 학교 내 흑백차별은 위헌이라는 브라운 판례를 계기로 1950년대 흑인 민권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때 마틴 루터 킹이 지도자로 떠올라 버스 승차거부 운동을 시작하면서 흑인 민권운동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킹 목사가 비폭력, 유연한 민권운동을 펼친 데 비해 맬컴 리틀은 과격한 민권운동을 주도하였다. 그의 주장은 분명 또 하나의 인종차별 집단을 이루어 흑인사회를 둘로 나누어 미국사회는 더욱 복잡하게 변화되어가고 있었다.전후 20여 년 간의 변화?발전을 통해 미국은 문자 그대로 ‘세계강국’으로의 위상을 다져나갔다. 그러나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과의 계속된 대립과 경쟁 속에서 국제적 긴장상태는 계속되었다. 이러한 긴장상태는 닉슨시대의 닉슨-브레즈네프 선언을 계기로 완화되기 시작했다. 그렇지년기를 보내었다. 그러던 Jesse James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온 것은 남북전쟁 때였다.미주리주는 노예제도의 존속을 바라는 남부군에 속했고 이웃 캔자스주는 노예제도의 폐지를 주장하는 북부군에 속했다. 양쪽 주는 치열한, 그리고 잔인한 전투를 벌이며 들판을 피로 물들였다. 그때 전투에 관한 글들을 읽어보면 어떤 전쟁의 참상보다 더 끔찍하다. 마을을 불태우는 것은 물론이고 대량학살을 한 다음 시체에서 머리가죽을 벗겨내 말에 묶고 다녔다. 어린 Jesse James가 북부군에 원한을 품게 된 계기는, 북부군이 그의 집에 들이닥쳐 의붓아버지 쌔뮤얼을 나무에 매달고 Jesse James 자신도 붙잡아 마디가 있는 가죽끈으로 등을 채찍질한 사건이었다. 물론 이밖에도 다양한 설이 있으나 어느 자료에서나 분명한 것은 Jesse James가 남부군에 속했고 콴트릴 게릴라부대에 합류했다가 남북전쟁 후 부대가 흩어지자 갱을 조직해 은행, 열차, 마차 가리지 않고 강도 행각을 벌였다는 것이다.당시 철도와 은행의 성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철도는 신생국가 미국이 지리적 국가통합을 이루는 수단이었고 은행은 국가를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시키는 첨병이었다. 철도를 건설하면서 일부 농민들이 강제로 농토를 수용 당했고 남북전쟁에서 패배한 뒤 남부군을 지지했던 농민들은 연방정부의 달러를 사기 위해 금과 은 등을 은행에 싸게 팔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Jesse James가 연방정부와 북부 자본의 상징인 철도와 은행을 혼내주니 속이 다 후련했을 것이다. 그는 후에 같은 편에게 배신을 당해 살해당했다. 배신자에게 살해됐다고 해도 강도는 강도였던 그의 장례식에 2천명이 모였다고 한다. 그는 남부군 지지자들의 영웅이었다. 아직도 그를 두고 ‘죽었다, 안죽었다’라는 의견이 분분하고 있으며, 그는 지금도 살아서 남부 사람들의 머리 속에 면면히 뛰어다니고 있는 것이다.Jesse James이외에도 미국의 건국신화인 서부영화를 보면 지금의 정서로 신화적이고 전설적인 요소를 만드는 것을 볼 수 있다.
호타루 감상문한적한 바다, 언뜻 보기에도 정다워 보이는 두 부부가 고기잡이 배에 몸을 내맡겼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들은 평온해 보인다. 아니, 그들은 그 생활을 즐기는 듯 싶었다. 하지만 야마오카와 토모코의 가슴 속에는 과거의 슬픔이 고스란히 남아있나 보다. 천황이 죽자 다시 하나둘씩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기억들이 그들을 둘러쌌다. 그들에게 공통적으로 남겨져 있는 기억은 바로 20년 전의 태평양 전쟁의 악몽이다. 무엇이 그들에게 슬픔을 주는걸까? 무엇 때문에 그들은 마음 놓고 울지도 못하는가?20년전 야마오카와 토모코의 아픔을 그대로 같이 공유한 후지에다는 손녀와 같이 전쟁의 추억을 더듬는다. 화면에서 어지러히 보여지는 폭격장면은 마치 지구가 아닌 우주에서 일어나는 우주 전쟁 마치 화려하면서 잔인하다. 수많은 일본의 소형 비행기가 떼를 지어 미국의 큰 함대에 돌격한다. 이 소형비행기들은 돌격하여 폭발하기 전에 함대의 공격을 받으면 그대로 태평양 바다에 추락하여 영영 이별을 하고 만다. 그렇다고 돌격에 성공해도 비행기들은 “쾅”하는 엄청난 소음과 함께 터져서 그 잔해만 남는다. 이렇게 비참한 영상은 태평양 전쟁 당시의 필름으로 소름이 끼쳤다. 그들은 서로를 죽음으로 몰아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큰 함대는 그렇다쳐도 저 자그마한 소형 비행기에 타고 있는 사람은 어떤 심정으로 자신을 죽음으로 내보는 것일까? 이러한 복잡한 심정은 영상이 끝나도 그 여운이 남는다.영화에서 설정하길 후지에다는 당시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특공대였다. 그도 저 조그마한 소형 비행기에 타서 영영 돌아오지 못할 전투길을 향해야 되는 불행한 처지였던 것이다. 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직도 파악을 못했지만, 천황이 죽자 자신도 죽는다. 물론 그는 죽기 전에 전쟁 속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추억을 더듬고 죽는다. 그가 죽을 때. 그의 눈에는 빗발치는 눈발대신 벚꽃이 눈앞에서 흩날린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악몽 같던 전쟁 당시의 천황이었던 사람이 죽고, 서서히 태평양 전쟁의 기억이 역사 저 너머로 사라지기 시작하자 찾아온 평온함이었을까? 이러한 평온함과 함께 몰려드는 착잡한 심정으로 그는 40년 전에 죽은 동료들을 뒤따라 간 것일까? 영화는 후지에다가 죽고 나자, 종전보다 더 그 당시를 회상하곤 한다.지금 부부인 야마오카와 토모코는 원래 40년 전 태평양 전쟁 당시 연인이 아니었다. 토모코는 야마오카의 상사인 카네야마의 사랑하는 연인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카네야마는 일본전쟁에 참전한 한국인으로 설정되어 있다. 카네야마가 출격명령을 받고 떠나자 토모코는 밑도 끝도 없는 슬픔에 젖어든다. 그녀의 슬픔을 지켜보던 야마오카는 그녀에게 연민을 느끼고 둘은 결혼을 하게 된다. 같은 슬픔,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던 두 사람이 사랑을 하면서 부부가 된 것이다. 이들이 같은 슬픔, 같은 기억 속에 있어서일까.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둘은 아직도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고 있다.그러던 어느 날, 야마오카는 죽은 카네야마의 유품을 토모코와 함께 한국의 가족들에게 전하러 간다. 한국의 가족들은 자신의 아들이 일본전쟁에 참전했을리 없다고 부인한다. 그러나 야마오카의 말은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일본을 위해서가 간 것이 아니라고, 사랑하는 가족, 조국, 토모코를 위해서 그렇게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다.”라는 말로 한국의 가족들은 40년 동안 곁에서 떠나보내지 않았던 카네야마를 하늘로 보낸다. 야마오카가 전해준 카네야마의 유품을 건내받고 말이다.야마오카와 토모코는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했다고 느끼고 가슴 속의 잔해들을 하나씩 하나씩 지워갔다. 비로소 그들은 전쟁의 아픔을, 후회를, 고통을, 슬픔을 조금씩 조금씩 씻어가는 것 같았다. 그들은 눈물이 아닌 애잔한 미소를 띄우면서 이미 지나간 역사를 회상한다.아직도 야마오카가 했던 말이 머리를 스쳐지나간다. 「비행기를 타고 적진에 가까워져 갈수록 두려웠다. 여기에서 죽어야 한다는 것이.....」 당시에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던...그리고 오직 조국을 위해서, 국민을 위해서 돌격하려했던 그가 이제는 조금씩 솔직해져간다. 이제는 세상에 그 당시의 슬픈 사연을 털어놓으려 한다. 오래된 배를 불태우고 다시 새 생활을 시작하려한다. 40년이나 오랜 시간 동안 이제는 야마오카도 토모코도 그리고 죽은 후지에다도 그 아픈 기억을 떨쳐버릴 때가 된 것이다. 그 고통스러웠던 짐은 역사에 넘기고 그들은 평온하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도 이들의 생활은 종전보다 평온해 보이고 오랫동안 가슴 속에 담아놓았던 앙금을 떨쳐낸 듯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