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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후감] 칼의 노래를 읽고 평가D별로예요
    ?도서명: 칼의 노래?작가: 김훈?줄거리:당대의 사건들 속에 이순신이라는 개인을 살아움직이는 존재로 표현한 책. 이순신 자신의 1인칭 서술로 일관된 시점을 통해 전투 전후의 심사, 혈육의 죽음, 여인과의 통정, 정치와 권력의 무의미와 그것의 폭력성, 한 나라의 생사를 책임진 무장으로서의 고뇌, 죽음에 대한 사유, 문(文)과 무(武)의 멀고 가까움, 꼼꼼한 전투 준비와 전투 와중의 급박한 상황, 풍경과 무기, 밥과 몸에 대한 사유들이 채색된다.우리가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순신은 우선 칼의 삼엄함과 무(武)의 단순성이 최고도로 발현된 개념적 인간이다.얼핏 "아름다운 한국어의 밭" 김훈의 문체는 이순신의 이미지와 필사적으로 대결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극도로 통제되고 절제된 이순신의 생의 국면을 끌고가는 김훈의 문체는 실존적 사유는 물론 집중력에 있어서도 전범을 찾을 수 없는 정도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감상:나는 개인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소설은 좋아하지 않는다. 중ㆍ고등학교때 역사에 대해 너무 시달려서인지 꺼리게 된다. 하지만 이 소설은 베스트셀러이기 이전에 이순신장군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였고 근처에 있는 현충사를 너무 좋아하기에 선택하였다.이 소설은 우선 소재면에서 굉장히 독특하다. 이미 고인이 돼버린 장군의 내면세계를 저자는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잡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 듯 느껴진다. 역사적인물의 시점에서가 아닌 한 남자로서의 내면의 심리묘사가 더욱 더 읽는데 흥미를 주었다. 과거의 실존인물을 그것도 초등학생도 알고 있는 위인을 끌어내는 것이 작가로써는 많은 부담이 됐을법하기도 한데 이순신의 내면을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 본 것처럼 소설은 잘 풀어나가고 있다.때론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듯한 착각이 들기도 할 정도로, 때론 보이는 죽음과 보이지 않는 죽음의 중간에서 고립되어 있는 이순신의 내적 변화와 심경을 작가 특유의 긴장감 감도는 문체로 기탄없이 풀어나간 문장들에 놀라움을 느낀다.
    독후감/창작| 2004.09.30| 1페이지| 1,000원| 조회(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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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위인] 신사임당의 생애와 작품세계
    1. 들어가면서시·글씨·그림에 능하였던 조선시대 중기의 대표적인 여류 예술가이며 본관은 평산(平山), 호는 사임당이며, 1504년 10월 29일 강릉 북평촌(오죽헌) 외가댁에서 신명화공의 둘째 딸로 태어나 외조부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으며, 예술가인 동시에 높은 덕과 인격을 쌓은 어진 부인으로, 또 훌륭한 어머니로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의 모범상인 신인선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2. 신사임당의 이름의 유래신사임당은 성이 신씨이고 이름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신사임당에서 사임당은 이름이 아니고 일종이 호라고도 볼 수 있는데 신사임당의 거처 이름이 사임당이라서 사임당에 거처하는 신씨라고 하여 사임당 신씨, 신사임당 이렇게 불렀다. 이 사임당의 뜻은 태임을 본받는다는 의미로써 중국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을 본받으려는 마음에서 스스로 지은 것으로써 눈으로 좋지 못한 것을 보지 않고, 귀로 음탕한 소리를 듣지 않고, 입으로 못된 말을 하지 않고자 한다.이와 같은 태교로 자식 율곡 선생을 길렀으며 자신의 삶을 스스로 꾸려 나가려는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3. 신사임당의 생애① 출생과 성장1504(연산군 10)∼1551(명종 6). 시· 글씨· 그림에 능하였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여류 예술가. 본관은 평산(平山). 아버지는 명화(命和)이며, 어머니는 용인이씨(龍仁李氏)로 사온(思溫)의 딸이다. 외가인 강릉 북평촌(北坪村)에서 태어나 자랐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인 이이(李珥)의 어머니이다.아버지 명화는 사임당이 13세 때인 1516년(중종 11)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다. 기묘명현 (己卯名賢)의 한 사람이었으나 1519년의 기묘사화의 참화는 면하였다.외할아버지 사온이 어머니를 아들잡이로 여겨 출가 후에도 계속 친정에 머물러 살도록 하였으므로, 사임당도 외가에서 생활하면서 어머니에게 여범(女範)과 더불어 학문을 배워 부덕(婦德)과 교양을 갖춘 현부로 자라났다.서울에서 주로 생활하는 아버지와는 16년간 떨어져 살았고, 그가 가끔 강릉에 들를 때만 남편의 동의를 얻어 시집에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렀다. 결혼 몇 달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친정에서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갔으며, 얼마 뒤에 시집의 선조 때부터의 터전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하였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다. 이따금 친정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도 하였으며, 셋째 아들 이이도 강릉에서 낳았다.38세에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아주 서울로 떠나왔으며, 수진방(壽進坊:지금의 수송동(壽松洞)과 청진동(淸進洞))에서 살다가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이해 여름 남편이 수운판관 (水運判官)이 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에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4. 신사임당의 생애 속에 담긴 일화신사임당은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고 자수와 바느질 솜씨가 뛰어났다.또한 시와 그림에도 놀라운 재능을 보여 7세 때 화가 안견의 그림을 본떠 그렸을 뿐만 아니라 산수화와 포도·풀·벌레 등을 그리는 데도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어린 시절 어느 날 꽈리나무에 메뚜기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그림을 그렸는데,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림 속의 메뚜기를 닭이 와서 쪼아 버렸다고 한다.신사임당은 글이나 그림 어느 쪽에서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그 실력이 뛰어났으나 자신의 실력을 함부로 뽐내거나 자랑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잔칫집에 초대받은 신사임당이 여러 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국을 나르던 하녀가 어느 부인의 치맛자락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그 부인의 치마가 다 젖었다." 이를 어쩌나. 빌려 입고 온 옷을 버렸으니…."그 부인은 가난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잔치에 입고 올 옷이 없어 다른 사람에게 새 옷을 빌려 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 옷을 버렸으니 걱정이 태산같았다. 이 때 신사임당이 그 부인에게 말했다." 부인, 저에게 그 치마를 잠시 벗어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수습을 해보겠습니다. "부인은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신사임당에게 옷을 벗어 주었다. 그러자 신사임당은 붓을 들고 치마에 그림고 있던 사람들 모두 놀랐다. 그림이 완성되자 신사임당은 치마를 내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 치마를 시장에 갖고 나가서 파세요. 그러면 새 치마를 살 돈이 마련될 것입니다. "과연 신사임당의 말대로 시장에 치마를 파니 새 비단 치마를 몇 벌이나 살 수 있는 돈이 마련되었다. 신사임당의 그림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림을 사려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그림은 마음을 수양하는 예술이라 생각했던 사임당은 그림을 팔아 돈을 만들지는 않았다. 다만 그 때는 그 부인의 딱한 사정을 보고 도와주려는 마음에서 그림을 그려주었던 것이다.5. 신사임당의 작품세계① 신사임당의 재능사임당을 평한 사람들 중에는 그의 온화한 천품과 예술적 자질조차도 모두 태임의 덕을 배우고 본뜬 데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이이와 같은 대정치가요 대학자를 길러낸 훌륭한 어머니로서의 위치를 평가한 때문이다.그러나 사임당은 완전한 예술인으로서의 생활 속에서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을 성숙시켰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그는 조선왕조가 요구하는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스스로 개척한 여성이라 할 수 있다.그가 교양과 학문을 갖춘 예술인으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더불어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북돋아준 좋은 환경이 있었다. 그의 재능은 7세에 안견 (安堅)의 그림을 스스로 사숙(私淑)하였던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또, 그녀는 통찰력과 판단력이 뛰어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녀 예술가로서 대성할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감회가 일어나 눈물을 지었다든지 또는 강릉의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운 것 등은 그녀의 섬세한 감정이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② 신사임당의 그림신사임당의 그림은 풀벌레?포도?화조?화초어죽(花草魚竹)?매화?난초?산수 등이 주된 화제(畵題)이다.사임당의 그림에 후세의 시인?학자들이 발문을 붙였는데 한결같이 절찬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림에 대한 여러 기록이 음에 간다고 한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경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느냐"라고 했다. 이처럼 여성으로서 덕행을 쌓는 동시에 예술에까지 능했다는 것은 배우고 익힌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천재적인 재능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사임당의 그림을 종류별로 나누어 보면, 초충도 그림 22점? 포도 3점?화조(花鳥) 2점?화초어죽(魚竹) 4점?매화14점?자수초충도 8점 등이다.a. 초충도신사임당의 〈초충도〉는 비슷한 구도의 초충이 그려진 여덟 폭의 병풍인데, 현재는 열 폭으로 꾸며져 있다. 그림이 아닌 나머지 두 면에는 {G:신경}과 {G:오세창}의 발문(跋文)이 적혀 있다. 각 폭마다 화면의 중앙에 두 세 가지의 식물을 그린 다음에, 그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각종 풀벌레를 적당히 배치하여 좌우 균형과 변화를 꾀하였다. 이 〈초충도〉는 형태가 단순하고 간결하여 규방(閨房)의 여성들이 필수적으로 하던 자수(刺繡)를 위한 밑그림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여러 가지 청초한 식물과 풀벌레를 실물에 가깝게 정확하게 묘사하면서도, 섬세하고 선명한 필선으로 묘사하여 여성 특유의 청초하고 산뜻한 분위기가 돋보인다.b. 포도도'포도'는 신사임당(1504-1551)의 회화작품으로 종이에 먹으로 그린 것이다. 탐스러운 열매가 주렁진 포도나무의 한 부분을 그린 것으로서 화가의 세밀한 관찰력과 뛰어난 회화적 표현력을 잘 보여 주는 대표작의 하나이다. 여성다운 필치에 먹빛도 매우 밝아서 그가 그린 포도 그림들 중에서도 제일 잘된 작품이다. 햇가지와 묵은 가지, 잘 익은 알과 아직 선 알 등이 갈라 보이고 포도알들과 잎사귀, 굵은 가지와 감김손 등이 모두 실물을 보는 것이 같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 그림을 이윽히 보고 있노라면 어느 결에 입 안에는 달면서도 새콤한 침이 고이게 된다. 신사임당의 재치 있는 포도 그리기 솜씨를 전하여 주는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한 잔치집에 간 그는 심부름하던 한 여인이 빌려 입고 온 치마를 어지럽혀 이슬 맺힌 잎사귀 등을 단숨에 그려 나가는데 신기하게도 얼룩이들이 그 그림 뒤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어지러웠던 치마가 순식간에 훌륭한 꽃치마로 변하였으며, 그 값이 당장에 몇 곱절로 올라서 그것을 팔아 새 치마를 사서 돌려 주고도 많은 돈이 남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기발한 재능과 함께 뜨거운 인간성과 강한 의협심을 전하여 주는 이야기이다.c. 초서 병풍(草書 屛風)이 병풍은 당시(唐詩) 오언절구(五言絶句)를 초서로 쓴 것으로 강릉시 두산동 최돈길가(家)에서 대대로 전승되어 오던 것을 1971년에 강릉시가 양수하여 율곡 기념관에 보관하고 있다.이 병풍이 최씨 문중에 있게 된 것은 사임당의 이종 손녀(권처균의 딸로 최대해의 처)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것이라 한다.영조 때 이 글씨가 이웃 고을 사람에게 넘어간 것을 당시 부사 이형규가 되찾아 주고 병풍으로 꾸며 보관하게 하였다.고종 6년(1869)에 최씨 집에서 불이나 온 집안이 불길에 휩싸였을 때, 당시 안주인(김씨)이 80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불길 속에서 제일 먼저 이 병풍을 끌어 내고 숨졌다 한다. 그 후 부사 윤종의가 이러한 일이 다시 있을까 염려하여 판각(板刻)을 만들었으며 이는 현재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③ 신사임당의 글씨글씨로는 초서 여섯폭과 해서 한폭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몇 조각의 글씨에서 그녀의 고상한 정신과 기백을 볼 수 있다.1868년(고종 5) 강릉부사로 간 윤종의(尹宗儀)는 사임당의 글씨를 영원히 후세에 남기고자 그 글씨를 판각하여 오죽헌에 보관하면서 발문을 적었는데, 그는 거기서 사임당의 글씨를 “정성들여 그은 획이 그윽하고 고상하고 정결하고 고요하여 부인께서 더욱더 저 태임의 덕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고 격찬하였다.그녀의 글씨는 그야말로 말발굽과 누에 머리〔馬蹄蠶頭〕 라는 체법에 의한 본격적인 글씨인 것이다.그러므로 그의 절묘한 예술적 재능에 관하여 명종 때의 사람 어숙권(魚叔權)은 《패관잡기》에서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의 다음.
    인문/어학| 2004.09.30| 6페이지| 1,000원| 조회(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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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극기의 의미] 태극기의 의미
    *태극기1.태극기의 유래맨처음 국기 이름은 '조선국기'우리나라의 국기가 맨 처음 만들어졌던 조선왕조 시대 때에는 나라의 이름인 '조선'과 함께 '조선국기'라 불렀다. 당시 조선왕조를 나타내는 국가의 명칭이 '조선'이었기 대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1882년 최초의 국기가 만들어지고나서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나기전까지 27여년 동안은 '조선국기'로 불리어져왔었다.'조선국기'가 '태극기'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바로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을 하던 때부터였다. 18세기 말엽 조선왕조는 관리들의 당파 싸움과 부정부패로 말미암아 나라 꼴이 허약해기기 시작하였다. 이런 기회를 노려오던 일본은 마침내 1910년 조선왕조를 송두리채 빼앗아갔다. 이에 격분한 애국자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으로 일본에 맞섰다. 1919년 3월 1일 정오에 맞춰 서울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 낭독과 함께 전국적으로 대한독립 만세 운동를 펼치기로 하였다. 이날 참여한 모든 국민들은 누구를 가리지 않고 손에 손에 '기'를 들고 나오기로 하고, '기' 제작을 하였는데, 그때만해도 '조선국기'로 부르던 국기 이름을 일본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태극기'로 부르자고 약속을 하면서부터 새롭게 퍼지기 시작했다.이런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일본 경찰은 탑골공원이며 종로거리이며 동대문 성벽까지 가득 메운 인파들이 그렇게도 많은 태극기를 어디서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하여 매우 당혹한 나머지 태극기를 든 사람이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팔뚝을 자르는 등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일본으로부터 독립을 하기 위해 우리나라 애국지사들은 중국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만들고, 국기를 바라보며 독립 의지를 불태웠다. 해방되기 3년전인 1942년 3월 1일에는 한국 임시정부수립 23주년 3.1절 선언문을 발표하였는데, 거기에 국기 이름을 '태극기'로 정하고 그 존엄성을 명문화 하였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다.「태극기가 국제적으로 사용된 것은 실로 1882년의 일이며, 그로부터 태극기는 한국의 독립주권을 표시하였다. 그러므로 3.1대혁명 발동에 있어서도 여전히 태극기를 썼으며, 그 깃발은 혁명군중의 선혈에 물든 채 적의 총검 위에 꽂혀졌다. 이처럼 태극기는 3.1대혁명의 발동을 위해서도 없을 수 없는 큰 힘이었으니, 한국 주권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는 역사의 빛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또한 태극기에는 부숴질 수 없는 존엄과 인상이 아로새겨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인 살고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한 폭의 태극기를 걸어 놓고 자신이 조국을 잊지 않고 있으며,나라를 되찾겟다는 민족적 신조를 간직하고 있다는 결심을 표시하여 왔다.」2.태극기의 뜻1.창조 : 우주의 근본인 태극이 음과 양 두 가지의 힘으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듯이, 우리민족의 창조성을 나타내고 있다.2.발전 :우리민족이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주적인 발전을 한다는 뜻이다.3.자유의정신 :태극의 이론은 만물이 자연의 원칙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서로 마주보는 관계에 있는 것은 우리의 평등사상을 말해 주는 것이다.4.평등의 정신 :태극과 4괘가 전체적으로 음과 양이 균등할 뿐만 아니라, 서로 마주 보는 관계에 있는 것은 우리의 평등사상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5.무궁한발전 :태극 도형의 청, 홍,의 음양 곡선은 끝없는 계속을 뜻하는 것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가 무궁하게 발전한다는 것을 뜻한다.이렇듯 태극기의 도형이 담고 있는 뜻은 창조, 발전, 자유, 평등, 무궁의 뜻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태극기의 바탕인 흰색은 깨끗하고 맑은 백의 민족의 모습을 상징하는 동시에 모든 것을 포용하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인문/어학| 2003.06.12| 3페이지| 1,000원| 조회(2,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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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문화] 단오제
    *단오제란?음력 5월 5일인 단오날에 지내는 향토신제(鄕土神祭).‘단오굿’이라고도 하며, 대표적인 단오제는 중요무형문화제 제13호로 지정된 ‘강릉단오제’이다. 《동국세시기》등을 보면 “안변 풍속에 상음신사(霜陰神詞)에 선위대왕(宣威大王)과 부인이 있다고 전하는데, 매년 단오에 선위대왕 부부를 모셔다가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또 경북 군위에서는 “단오에 서악(西岳)의 김유신 사당에서 신을 맞이하여 고을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어, 옛날에는 여러 지방에서 단오제를 지냈음을 알 수 있다.최근까지 전승되고 있는 단오제로는 대관령 국사선황(大關嶺國師城隍)과 대관령 여성황을 대관령 산꼭대기에서 맞아 시내 성황당에서 모시는 강릉 단오굿과 문호장(文戶長)이라는 신령한 인물에게 올리는 경남 창녕군 영산 지방의 ‘문호장굿놀이’가 있다.이 중 강릉단오제는 《홍길동전》의 작가 허균이 35세 때인 1603년(선조 36)에 강릉에 가서 단오제를 구경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이미 단오제가 거행되어 온 것을 알 수 있다. 최근에 강릉 단오제는 강릉시의 거시적인 민속미술행사가 되어, 음력 5월 2일부터 5월 7일까지 대관령 국사성황에게 풍습과 풍어를 기원하고 줄다리기·씨름 등 각종 놀이 행사를 한다.강릉단오제의 역사는 강릉문화의 시작과 그 명맥을 같이해왔다. 백두대간과 동해에 둘러싸인 지형적인 요인으로 문화 축적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 문화의 축적과 결집은 강릉 단오제로 형상화 되었다.강릉단오제는 부족국가였던 동예(東濊)때부터 오월제(五月祭)의 성격으로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강릉단오제에 대한문헌의 기록은 고려 때부터 나타난다. '강릉지'에 '대관령의승사(僧祠)'가 기록으로 남아 있어 산신제의 존재가 확인된다. 조선 초기 남효온의 기록에서는 음주가무를 곁들인 3일간의 산신제가 확인된다. 또한 조선 광해군 때의 허균(許筠)의 시문집인《성소부부고》에도 기록되어 있어 이미 이 시기에 강릉단오제의 대대적인 축제의 성격을 잘 표현하고 있다. 산신을 모셔와 기원제를 올리는 강릉단오제의 구체적인 기록은 조선중기 허균의 기록에서이다. '임영지'에 나타나 있는 단오제의 기록은 현재의 강릉단오제와 가장 유사하다. 강릉단오제는 설화적인 요소, 불교적인 요소, 유교적인 요소에 민중의 신앙적인 요소까지 포함된 '적층(積層)문화'로 발전되어 왔다.이러한 단오제 행사의 내용은 크게 셋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유교적 제사와 무당굿으로 이어지는 종교의례이고, 두번째는 탈놀이, 농악놀이, 그네, 씨름, 활쏘기 등의 민속놀이, 마지막으로 수십만의 구경꾼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거대한 난장이 그것이다. 이 셋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축제마당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과거의 역사와 단절되지 않으면서 늘 새로운 문화를 수용하여 왕성한 생명력을 갖추었다. 다양하고도 포괄적인 문화적 수용력으로 인하여 강릉단오제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하는 해방공간으로서 기능을 수행해왔다. 이러한 고유성과 객관성이 인정되어 1967년 1월16일에는 강릉단오제가 중요무형문화제 제13호로 지정되었으며 제례, 굿, 관노가면극 3부분의 예능보유자가 인정되었다. 2000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선정목록에 등록되어 이제는 명실공히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비산 농악과 날뫼북춤의 유래1.비산농악비산농악은 날뫼마을이라 불리는 현 대구광역시 서구 비산동 일대에서 자생한 농악이다. 엣날부터 날뫼마을 주민들이 신앙해오던 동제당인 천왕당 (기천왕, 중천왕, 말천왕) 에서 정월 보름에 행하던 동제인'천왕굿' 때의 '지신풀이'에 그 모태를 두고 발전해 온 것 같다.비산(飛:날비, 山:뫼산 = 날뫼)이라는 지명에서 다음과 같은 유래 전설이 있다." 아득한 옛날 달내의 냇가에서 빨래하던 여인이 서쪽 하늘의 요란한 풍악 소리를 듣고 바라보니, 하늘에서 산모양의 구름이 날아오고 있었다. 여인이 이를 보고 놀라 "동산이 떠 온다"고 비명을 질렀더니 날아오던 산이 땅에 떨어져 동산이 되었다. 날아온 산이라 하여 '날뫼'라 부르게 되었고 한자로 비산(飛山)이라 쓰게 되었다 한다."현재 대구 비산동의 지명이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 것이다.위 전설은 옛 달구벌의 산성이던 달성(현 달성공원)이 있던 산의 기원설화로 우리나라 상고의 신모(神母)신앙에 근원하는 지명 설화이다.'날뫼'라고 부르는 지명 전설의 말의 뿌리에 우리 나라의 원초적인 지모신(地母神)신앙이 깔려 있는 것만 보아도 비산 농악의 뿌리가 대단히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현재의 비산동의 '원고개'는 달성과 달천(금호강)사이의 넓은 들을 가로지르는 '서울나들'이었고 기록에는 대구의 관도로 나타나 있다.비산풍물은 정월 상원의 천왕메기와 지신풀이 뿐만 아니라 이 관도를 오고 가던 '원님'의 행차 때에도 원고개에서 놀았다고 옛어른들은 전한다.2.날뫼북춤날뫼북춤은 대구광역시 비산1동에서 자생해 온 비산풍물 속에 두드러지게 발달한 북춤만따로 떼어 독립적인 춤으로 발전되었으며 현재 날뫼북춤이란 명칭으로 전승되고 있다.날뫼북춤의 모태가 된 비산풍물은 속지명을 '날뫼'라고 하는 현 대구광역시 서구 비산동에서 자생한 풍물이다. 날뫼북춤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날뫼북춤은 비산농악에 뿌리를 두고, 두드러지게 발달한 큰북만으로 추는 북춤으로, 대구의 대표적인 민속무용이다.날뫼(현재의 비산동)의 "원고개"는 달성(達城)과 금호강 사이의 넓은 들판을 지나는 "서울 나들" 길이었다. 옛날 고을의 원이 이 길로 부임할 때, 마을 사람들이 풍악을 울리고 춤을 추면서 맞이하던 관습이 『날뫼북춤』의 기원이라고 전한다.특히, 백성의 추앙을 받던 한 목민관이 순직하매, 이곳에 무덤을 쓰고춘추로 제향하였다. 이때 외로운 원님의 혼령을 달래기 위해서 북을 울리며 춤추던 관행이 『날뫼북춤』으로 전승된 것이다.*택견택견은 오랜 세월동안 우리 기층문화의 한 갈래로 전래되어 온 맨손의 겨루기 기술로써 무사의 상예(常藝)로, 혹은 민속놀이로 성행하여 왔던 것으로 보인다.각희(脚戱), 비각술(飛脚術)이라 불리기도 하였던 택견은 근접하여 마주서서 상대를 차거나 걸어서 넘어뜨려 승부를 내는데, 공격적인 구조이면서도 경기자 서로의 안전성을 최대한 고려한 기법을 사용한다. 따라서 전문적으로 훈련을 쌓은 선수로부터 초보자에 이르기까지 정도에 알맞은 겨루기를 할 수 있다. 택견을 개방적이고 공개적이며 대중성을 가진 무희로써 비전성, 폐쇄성을 가진 무술과는 개념을 달리한다.택견은 전문기관이나 특정집단에 의해 이루어진 제도적인 전수가 아닌 까닭에 정형화된 이념이나 사상이 체계적으로 전승되어 있지 아니하다. 그러나 택견에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정체된 선인들의 지식과 체험이 용해되어 있고,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철학과 사상이 함장되어 있다. 그러므로 택견은 역사성과 규범성을 가진 우리 민족의 훌륭한 전통문화이며 민족무예, 기층문화인 것이다*웃다리 풍물굿웃다리 풍물굿은 남사당패가 웃다리, 아랫다리라고 구분하여 부른데서 유래한다. 대개 웃다리 풍물굿은 마을굿이 없고 지신밟기와 두레풍물이 있다. 특히 걸립풍물이 발달하여 연예집단인 남사당패의 본거지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걸립연예적 풍물이 경기농악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충청권도 이 영향속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채상소고를 하고 잡색으로 볼 수 있는 무동의 수가 많다.무동놀이와 채상소고놀이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무동은 어린아이를 쓰는 편이다.무동놀이 중에 깨기춤과 무동타기등은 유명하다. 타지역에 비해 북이 약하고 쇳소리가 발달하였다. 채상놀이가 풍물놀이의 중심의 위치에 있고 가락이 박진감 있게 진행된다. 충청도 풍물굿은 경기 풍물굿과 비슷하나 마을굿인 당산굿을 연행하며 호남좌도 풍물굿과 비슷한 점도 있다. 무동은 어른이 대개하며 무동들의단체춤인 나부 춤이 특이하다.
    예체능| 2003.06.12| 5페이지| 1,000원| 조회(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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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간소외
    인간소외란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인간성을 박탈당하여 비인간화되는 일이며 현대사회에서 흔히 발생하는 예로 왕따 현상을 들 수 있다.인간소외가 발생하게 되는 원인은 우선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과정에서 그 뿌리가 발생하게 된다.우선 공장무인화 등에서 인간이 필요 없게 된 것과 다중, 이원화된 사회에서 인간의 위치,능력 등의 지위가 하락되고 가치가 황금만능주의 물질만능주의를 중요시하는 아노미 현상이 발생하면서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는 경향이 줄어들고 물질적 가치를 중시하는 경향이 생겨나면서 인간을 경시하게 되며 또한 가상공간의 피상적인 인간관과 물신화가 확산되면서 인간성이 상실되고 무미건조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따라서 인간소외는 곧 산업, 정보사회의 병폐라고 볼 수 있다.그러한 비인간화는 사회적 제도나 정치·경제체제 등 일반적으로 문명이라고 불리는 것의 발전과 더불어, 오히려 그것이 인간에 대하여 마이너스 작용을 하는데서부터 생긴다. 이러한 상태하에서는 인간의 활동 그 자체가 당사자인 인간에게 속하지 않는 외적·강제적인 것으로 나타나, 인간의 본질은 인간에 외재(外在)하는 것으로 되고 만다. 이것은 고도화된 사회에서의 불가피한 현상으로서, 이미 J.J.루소에 의하여 지적되었고, 또한 K.마르크스는 그 원인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유래한다고 하였으나, 오늘날에는 산업사회에서 나타나는 병리현상(病理現象) 자기외화(自己外化:Selbstent嬉- usserung)라고도 하며, 마르크스주의로 이어진다.소외 현상은 특히 현대 사회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소외 현상이 현대 사회에서 사회 전반 생활 구석구석에 퍼져들어 인간소외라는 현대 사회의 병폐로 치부되기 때문에 인간 소외는 사회의 변화에 자신이 적응하지 못할 때, 또 그 변화 가운데 자기 자신, 주체성을 잃어 버릴 때 발생하는 것으로 인간 소외는 사회적으로 윤리적으로 여러 악영향을 사람들에게 끼친다. 인간 소외가 심해지면 사람들이 삶에 의욕을 잃게 되고 자기 자신을 잃어버려 아무 의미없이, 목적없이 삶을 살게 된다. 사회적으로는 산업이 침체되고 사회 비행이 심해지고, 심하면 폭동도 일어날 수 있다.단편 소설 작품“삼포가는 길”에서 보면 '삼포'라는 가공의 지명을 설정해 산업화가 초래한 고향 상실의 아픔을 그리고 있다. 1970년대 산업화의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뿌리를 잃고 도시의 밑바닥 생활을 하며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게 된다. 이 작품에서는 상황의 황폐함과 궁핍함이 영달과 정씨 같은 떠돌이 일용노동자, 백화 같은 술집 작부의 모습으로 형상화되면서 시대적 전형성을 획득하고 있다.영화 “박하사탕”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한 인간이 변화해 가는 과정을 묘사하는데,김영호가 80년 광주에서 맞은 상처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며 다리에 박힌 총탄은 그를 불구가 되게 했고, 그 충격은 영호의 첫사랑, 우리의 이상향을 스스로 죽이게 만들었다. 결국 그 총탄은 영호를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불구가 되게 만드는 상처가 된다.
    사회과학| 2003.06.02| 4페이지| 1,000원| 조회(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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