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U[피부와 생활건강] 나의 삶을 기록하는 피부거울을 볼 때마다 더 진해진 것 같은 잡티와 넓어진 듯 보이는 모공 그리고 이어지는 한숨, 나도 한때는 피부미인이었는데…. 언제 이렇게 주름살이 생긴 거야? 하며 굵게 자리 잡은 세월의 흔적을 발견할 때 마다 우울해 지곤 한다. 이렇게 여자는 거울 앞에서 나이가 드는가 보다.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피부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으며, 특별히 관리하지 않아도 피부트러블이 잘 생기지 않았으며, 주변인들에게 부러움을 살 정도로 맑고 투명한 피부를 자랑하고 다녔다. 그러나 피부라는 건 예뻐해주고 보살펴주지 않으면 금세 토라져 버리는 변덕쟁이라서 피부가 좋다는 이유로 아무런 보살핌 없이 방치한 상태로 몇 해가 지나다 보니 금세 주름도 생긴 것 같고 잡티와 모공들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사실 난 메이크업을 잘 안한다. 메이크업뿐만이 아니라 화학성분의 작용인 화장품에 대한 것 자체를 꺼렸다. 화장품을 바르면 끈적끈적한 느낌도 싫었고, 그냥 자연의 상태로 두는 것이 피부를 최적의 상태로 유지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그러나 어느 한가롭던 저녁, 충격적인 장면을 대면하고는 들고 있던 리모콘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어느 교양프로에서 피부트러블이 많은 여성 두 명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이 둘은 붉은 여드름에 지성피부로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 중 한명은 화장수에서부터 썬 크림, 엣센스, 영양크림, 여드름을 가리기 위한 짙은 화장까지 빼놓지 않고 하는 여성이었고 다른 한명은 나와 같이 최대한 피부에 손대지 않는 자연그대로의 상태를 유지하고자 간단하게 화장수로만 피부를 정돈하기만 하였다.그렇게 30년을 넘게 산 여성들의 피부를 의학적으로 정밀 분석하고 그 결과를 살펴본 결과, 나의 예상과는 정 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여러 가지 종류의 화장품구입에 월급의 절반을 쏟아 붓던 그 여성이 승리(?)한 것이다.결과적으로 많은 화장품을 겹겹이 바른 여성은 화장품이 피부 보호막 역할을 하여 외부 자극으로부터 피부의 손상을 줄일 수 있었고, 얼굴에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상태에서는 자외선과 같은 해로운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바로 받게 되어 피부는 쉽게 지치고 노화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화장품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 좋다는 것은 아니다. 아예 사용하지 않는 것 보다는 낫다는 것이다.즉 난 지난 20여 년간 난 내 피부에게 몹쓸 짓을 해왔던 것이다. 그동안 피부에게 소홀히 대했던 결과, 탱탱했던 피부가 쭈글쭈글 해졌으니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게 지금까지 피부는 그 일을 잊지 않고 차곡차곡 기록해오고 있었던 것이다.그 날 이후부터는 기초부터 신경 써서 바르기 시작했고 외출 시에 자외선에서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선 크림은 빼먹지 않았으며, 메이크업도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여전히 화학약품이 첨가되어있는 화장품에 대한 거부감은 여전했다.그러다가 점차 참살이(웰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참살이를 추구하는 방식도 다양해지면서 먹는 것에서부터 나아가 피부를 위한 천연재료의 화장품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었다. 요즘은 재료도 쉽게 구할 수 있고, 천연재료로 만든 화장품은 집에서도 손쉽게 만들어 쓸 수 있어서, 화학성분에 거부감이 있었던 나에게 안성맞춤이라 생각하고 직접 재료를 사서 내 피부에 맞는 화장품을 만들어 쓰고 있다. 내손으로 만들어서 안심할 수 있으며 효과도 좋았다. 또 자연스레 천연화장품을 만들면서 피부에도 신경을 쓰게 되어 가능한 피부에 해로운 음식이나 습관들을 개선하고자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점점 피부의 칙칙함이 해소되어 생기 있는 예전의 피부로 조금씩 돌아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나아가 친구들에게도 내가 손수 만든 천연 엣센스는 호평을 받고 있어서 뿌듯한 기분이 든다. 지금은 여자친구들뿐만 아니라 남자친구들도 자기 피부가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나에게 처방을 받으러 오곤 한다. 그 사내 녀석들을 보면서 피부에 관한 관심은 비단 여성 뿐 만아니라 남성들에게도 중요한 문제로 여기어 지고 있다는 걸 실감하곤 한다. 하긴 남성용 컬러로션이 히트를 친 것이나 생일선물로 남성용 팩 세트를 선물했더니 입이 찢어질 듯 좋아 했던 남자친구를 보면 남성들까지도 피부를 깨끗하게 보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사실 피부가 윤택하고 깨끗하면 건강해 보이고 인상도 밝아 보일뿐만 아니라 대인관계에서 자신감을 가지는 등 좋은 이미지로도 연결되어 또 다른 경쟁력으로 작용 한다. 칙칙한 피부와 넓은 모공은 이제 자기 자신을 제대로 관리하고 있지 않다고 평가되어 지는 시대이다. 또한 피부는 외모의 한 부분만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다. 사소한 피부트러블도 그 사람의 생활패턴을 반영하는 것이고 자신감 상실, 대인관계 기피 등 정신의 한 영역까지도 어둡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제 피부 관리는 연예인과 같은 특별한 계층만의 필요가 아닌 남녀노소, 나이를 구분하지 않고 필요한 현대생활의 일부분인 것이다. 부지런하고 적극적인 나의 생활태도에 따라 세월의 흐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언제나 밝고 환하게 빛나는 피부가 현실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다.
(1) 七五三(しちごさん)일본의七五三(しちごさん)이란, 아이가 아무 탈 없이 건강하게 자라기를 기원하는 의식으로 11월 15일을 중심으로 여자아이는 세살과 일곱살에, 남자아이는 세살과 다섯살에 전국의 신사(神社)를 중심으로 행하여진다.七五三이란 명칭은 어린이의 나이가 3살 · 5살 · 7살이 되는 해에 행사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3, 5, 7이라는 숫자를 읽어서 붙여진 것이다. 또 그 나이 또한 홀수만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홀수를 중요시 여기는 중국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七五三은 아주 자연발생적인 풍습이기 때문에 언제 누가 정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략 무로마치(室町)시대에 무가나 귀족들 사이에서 시작되어 에도시대 무가사회에 들어서면서부터 민간으로까지 정착된 것으로 보고 있다.현대에서는 11월 15일을 전후로 해서 행해지는데, 이날이 七五三의 날로 정해진 것은 에도시대부터 정착되어 내려온 것으로 에도 시대 15일이 鬼宿日로써 길일로 여겨졌으며, 일설에서는 3+5+7=15 이므로 15일이 재수가 좋은( ?起がいい)날이라는 설이 있다.또 이 날이 에도시대의 제5대 쇼군 도쿠가와 츠나요시(德川綱吉)의 아들인 도쿠마츠(德松)의 탄생 축하 행사가 이 날 거행되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으며, 시모츠키(霜月)의 축제날에 맞추어, 가족들의 생업에 관련이 깊은 신들을 모시는 날이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七五三은 어린이들이 무사히 성장할 수 있도록 수호해 준 조상신에게 감사하며 축하하고, 앞으로의 행운과 건강을 기원하는 애정 어린 행사이다.(2) 七五三의 유래남녀 3살의 ?おき, 남자 5살의袴着、여자 7살의?解き등의 이 세 가지 ?祝い가 하나가 되어 에도 시대에 이르러 민간으로 보급이 되고, 조금씩 형식이 변화되면서 서민들 사이에 정착되게 된 것이다.1) 3살의 お祝い : の儀옛날 남녀 모두의 행사로 머리를 3살 되는 해까지는 짧은 단발머리로 하다가, 3살이 되는 해부터는 머리를 길러서 묶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현대만큼 의료시설이나 영양학이 발달되어 있지 않았던 유아사망률이 높았던 시대, 유아의 두발을 짧게 잘라두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머리를 자른다는 것에 유아의 건강과 관련된 주술적인 의미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 머리를 길러 묶기 시작하는 것은 성인식(元服)때 관을 쓰기위해 대비하는 것이라는 가설도 있다. 현재의 の儀는 실제로 이와 같이 지켜지지는 않지만, 명칭만은 그대로 남아 있으며 주로 여자 아이의 행사로 바뀌었다.2) 5살의 お祝い :の儀하카마기란 무사들이 의례를 행할 때 입는 바지인 '하카마(袴 : 일본 옷의 겉에 입는 주름잡힌 바지)'를 입힌다는 뜻이다.헤이안(平安) 시대, 귀족 사회에서 행하여진 통과의례가 기원이 되었다. 에도(江戶)시대에는 무사나 서민에게까지 영향을 미쳤고 특히 5살된 남자 어린이에게 '하카마'를 입히고 남자로써 사회에서 인정받도록 하기 위한 축하 행사로 사내답게 씩씩하게 자라기를 빌었다.3) 7살의 お祝い : の儀유년기 최후의 축하로써 기모노를 입혀 신사 참배를 하는 것이 그 시작이다. 이때부터 끈이 달린 어린이용 기모노를 입지 않고 오비를 묶는 것을 허용하였다. 에도(江戶) 중기 이후 5살이 남자 아이의 축제가 되고 나서 7살은 여자 아이의 축제로써 정착하게 되었다.7살이 되는 해의 축하 행사는 남녀 어린이가 유년기에 하는 마지막 축하 행사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일본에서는 '일곱 살까지는 신의 어린이(七までは神の子)'라 하여 유년기의 성장 과정은 신의 재량에 맡긴다고 했다. 7살은 유년기를 벗어나서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가는 소년 소녀기로 들어가는 변환기라 하여 중요시했다. 7살이 되기 전에 죽은 어린이는 장례도 치르지 않으며, 7살이 넘어야 비로소 가문의 한 식구로 여기기 시작했다. 따라서 7살이 되는 해에는 신사에 찾아가서 조상신들에게 어린이의 성장을 고함으로써, 신과 사회로부터도 '一人前', 즉 한 사람의 개체로서 완전한 자격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오늘날 7살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나이 이기도 하다. 그러한 점에서 생각해 보면 7살이라는 나이는 형식적인 의미뿐만이 아니라 아이에게 있어 심신의 성장의 측면에서도 커다란 전기 일 것이다.4) 관서지방에서는 이 시치고산 행사에 대신하는 것으로 十三?り(しゅうさんまいり)가 있는데 호공장보살(지혜와 복덕을 갖추고 있는 것이 마치 허공과 같이 광대무변한 보살)이 한없는 자비와 지혜를 준다고 하여 13살된 남녀아이가 이를 참배하게 한 행사이다. 현재는 음력 4월13일이나 이를 전후한 일요일에 참배하는 일이 많다.(3) 참배방법?정식으로는 여자아이는 오미야마이리 때 입은 축하복을 조금 고쳐서 만든 기모노를 입히 고, 남자아이는 그 위에 가문이 새겨진 하오리와 하카마를 입힌다?부모도 정장을 하고 아이와 함께 氏神에게 참배한다.?희망하는 사람은 간누시(神主)에게 初?料를 내고 노리토)와 액막이 행사를 한다.?참배가 끝나면 아이에게 「千?飴)」를 사준다.?기념사진, 비디오 등을 찍거나 한다.?친척과 이웃들에게 팥밥을 돌리며 인사하거나 함께 모여서 연회를 열어 식사대접 한다.(4) 행사의 의미1)어린이의 성장 기원어린이 사망률이 높았던 시대에 무사히 성장한 것에 대한 감사와 氏神에게 가호를 기원하는 마음이 강하다.2)우지가미(氏神)에 대한 신앙일본에는 그 지역의 신사에 모셔진 신과 지역민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개념이 존재하고 있다. 지역사회 성원들은 그 지역 신사에 모셔진 신을 우지가미(氏神), 그리고 자신들을 우지가미의 자식이라는 뜻으로 우지코(氏子)라고 지칭한다. 이처럼 지역사회의 중심을 이루는 신사와 그 지역의 주민이 의사(疑似)적인 친자관계를 설정함으로써, 지역사회의 종교적?정신적인 중핵으로서의 신사를 주민과 밀착시키게 하는 기제로서 작용하고 있다.새해를 시작하는 첫날에는 신사를 참배하고 인생의 전환점에 해당되는 각 시기에 거행하는 인생의 통과의례를 신사에서 거행함으로써 신사와 끊임없이 관계를 유지한다. 탄생의례, 성장의례인 시치고산(七五三)을 비롯하여 성년식, 결혼식이 있을 때마다 일본인들은 신사를 찾아 신에게 고하고 축복을 기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인생의 통과의례를 반복적으로 거행함으로써 개인을 공동체의 성원으로서 지역사회에 통합하여 생활의 활력과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었고,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확인해 왔다고 할 수 있다.(5) 현재의 七五三자신을 자랑하는 어른들의 축제로 변질원래 시치고산은 어린이들의 성장을 축하하고 신사에 참배하는 행사였다. 그것이 에도시대 즈음부터는 상인이나 무가 등 일부 가정에서 아이를 한껏 차려 입히고 참배하게 되었는데, 현재는 일반 가정에서도 매년 많은 돈을 들여 행사를 치러준다.아이를 위해서는 돈이 아깝지 않다는 부모의 심정과 현대사회의 광고 전략에 의해 행사가 상품화되고 있는 추세인데, 옷을 따로 구입하거나, 머리를 치장하기도 하고, 옷을 입혀주는 일을 전문점에 맡긴다든지, 고가의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찍고, 친척들을 초대하는 등 50만엔 정도의 돈을 들인다. 옷만 빌린다고 해도 10만∼30만엔은 든다고 한다.세계어디서나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다르지 않겠지만 그것이 너무 과도해서 아이들을 위한 축제가 아닌 자신들의 축제가 될 경우가 문제다. 진정 아이의 행복을 바라는 것이 주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아이를 위해 수천만금을 붓고 있는 열혈 부모들은 그것이 진정 아이의 행복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 한번 돌아볼 일이다.
[동북아의 이해] 일본 자민당의 투쟁 역사와 장기 집권 비결☆목차☆Ⅰ. 서론Ⅱ. 본론1. 일본의 정당정치2. 자민당의 성격3. 자민당 장기 집권 체제 등장과 특징4. 자민당의 장기 집권요인5. 55년체제의 붕괴6. 1996년, 자민당 정권으로의 복귀7. 1996년 이후의 자민당의 성격Ⅲ. 결론8. 일당 우위 체제에 복귀한 자민당과 고이즈미자민당은 1955년 11월, 자유당과 민주당의 연합으로 형성되어 1993년 호소카와 정권이 등장하기까지 38년 동안 집권당의 위치를 유지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일본의 정치는 자민당의 일당우위체제였고, 자민당은 장기집권을 해왔던 다른 나라의 어떤 정당보다도 확고하고 안정된 정권을 유지해왔다.1990년대에 들어서는 단독정권 구성이 어려워져 한 때(1993년 8월-1996년 1월) 정권을 내준 적이 있으며, 자민당의 지지기반이 흔들리자 정권교체를 노린 야당의 재편현상도 있었으나 1996년 11월에 다시 연립내각을 구성하여 단독정권을 회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실정이다.물론, 프랑스, 이스라엘 이탈리아, 캐나다 등의 선진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장기집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민당은 거의 일관해서 우세정당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뛰어난 안정성을 보이고 있다. 또한, 전쟁의 폐허에서 현재의 일본이 있기까지 자민당 정부가 끼친 영향력은 정치, 경제 및 사회 전반에 걸쳐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근·현대 일본 정치의 중심이며 오랜 기간 동안 일본 정치를 이끌어왔던 세력이 바로 자민당이기에 자만당의 이해는 일본정치를 이해하는 가장 기본이라 생각된다. 이를 위해 자민당의 장기집권을 중심으로 하여 자민당의 역사를 살펴보고, 특히 소위 '55년 체제'라고 불리는 자민당의 장기집권 배경과 의미, 38년간의 자민당 장기집권이 막을 내리게 되는 과정과 원인, 그리고 다시 자민당이 정권에 복귀 자민당 재집권의 의미와 이를 통해 일본 정치의 흐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1.일본의 정당정치일본의 정당정치는 이미 메이지유신이래의 오도 활발하게 되었다전후 일본정치에서 정당이 수행한 역할로서는 여러 가지를 지적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수없이 발생하는 내각의 변동 가운데에서도 끊임없이 안정정권을 창출하여 정부의 전후복구와 발전전략을 지원한 것이라 하겠고 그 주역은 물론 일당우위체제 하의 자민당이며 따라서 자민당의 장기집권과 함께 그것이 가능했던 전후 일본정치의 환경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어 왔다.2.자민당의 성격자민당은 자유민주당의 약자로 1955년 11월15일 자유당과 일본 민주당이 합동으로 성립한 보수정당이다. 자민당은 평화주의, 민주주의 의회주의에 기반을 둔 정당이며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국민의 당을 표방하고 있다. 그러나 당의 정강 제 6조에 ‘현행헌법의 자주적 개정’을 명시하여 끊임없이 평화헌법을 개정하려고 하는 극우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당이기도 하다. 또한 파벌연합 정당이라고 불리고 있는 것처럼 당내파벌의 존재와 활동이 뿌리 깊은 상황이고 이러한 자민당의 시스템은 파벌 실력자에 의한 당수 교체를 통해 국민의 자민당 비판을 회피하는 의사 정권 교체의 효과를 발휘하여 장기집권 하는데 이바지 해 왔다.3. 자민당 장기 집권 체제인 ' 55년 체제' 등장과 특징1) 55년 체제의 등장일본 정치에 있어 전형적인 일본적 시스템은 “55년 체제‘라 할 수 있다. 55년 체제란1955년11월15일 보수 세력의 통합으로 합성된 자민당과 혁신 세력의 결집인 사회당과의 대결구도를 의미한다. 이 체제는 외견상으로는 양대 정당체제이지만 실제는 보수 세력의 결집 체인 자민당이 압도적인 우위를 접하는 일당우위 정당체제였다. 이 시기는 미-소에 의한 동서냉전의 시대로 일-미 안보조약, 베트남문제, 한-일 국교정상화 등을 둘러싸고 여당인 자민당과 야당인 사회당간에 격심한 대립을 노정시켰으며, 재계와 노동계, 도시와 농촌간의 이해대립이 선명히 부각된 시기이다.또한 국내의 평화 헌법체제와 냉전적인 미-일 안보체제라는 모순된 구조 속에서 정치안정과 경제고도 성장을 이룩해야 했다. 이러한 이중 구조 속에서 일본의 국내할 수 있다. ‘55년 체제’가 보수와 혁신의 대립이라고는 하나 실은 자민당이 우월한 비대칭적인 관계였다. 이처럼 한 정당이 38년이라는 장기집권을 한 것은 서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일본 특유의 정치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시기에 따라, 그리고 특별한 이슈에 따라 자민당의 지지율에 있어서 변화는 있었지만 자민당은 장기간에 걸쳐 국민들로부터 지지율을 획득하였다. 반면에 사회당은 50년대 말까지는 보수당의 재군비노선에 대해 평화주의 노선을 내걸고 대결함으로써 광범위한 사회적 지지를 얻을 수 있었지만 그 뒤로 사회당의 지지율은 계속적으로 떨어졌다.‘55년 체제’는 보수와 혁신의 양대 세력간의 대립이 일본의 풀뿌리민주주의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보수와 혁신의 대립은 경제문제를 제외한 안보나 헌법개정,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반대나 자위대의 위상과 같은 평화와 이데올로기적인 문제에 주로 국한되어 있었다. 50년대에 보수합동에 의해 탄생한 자민당은 신헌법에서 상징적 존재로 규정된 천황의 지위를 통치권을 지닌 국가원수로 회복시키고, 자위대를 중심으로 국방력을 강화시키고자 개헌을 하려고 하였다. 이에 대해 평화운동세력들은 대중적인 호헌운동을 전개하였고 이 운동을 통해 1955년의 중의원선거와 1956년의 참의원선거에서 사회당을 중심으로 한 호헌세력이 1/3이상을 획득함으로써 국회에서 개헌발의가 불가능하게 되었다.그리고 1960년에는 일미안전보장조약 개정을 반대하는 대규모 시민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미군의 일본주류를 계속 허용하고 일본의 기지를 마음대로 쓸 수 있도록 하는 일미안전보장의 개정이 일본을 다시 전쟁에 휩쓸리게 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시민들의 우려를 낳았다. 안보 개정 저지를 위한 시민들의 통일행동이 전개되자, 자민당은 1960년에 단독으로 신안보 조약 승인을 강행했는데, 이를 계기로 안보조약 개정 반대운동은 강행타결에 항의하는 민주주의 수호운동으로 발전했다.이러한 안보투쟁은 전후 일본에서의 혁신운동의 절정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운동의 정책결정시스템에서 벗어나 정치가가 중심이 되는 정치로 나아가고자 노력하고 있다.4.자민당의 장기 집권요인1)외적요인미국의 일본점령과 미소를 중심으로 하는 동서냉전이라는 시대적인 상황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미국의 간접 군정과 미국의 대일 정책의 영향이 주요인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미국이 군정을 펴던 시기에 구정치인 관료를 추방하고 지방의 지주를 토지개혁을 통하여 해체함으로써 보수정치 세력을 큰 타격을 입고 있었다.그러나 세계정세가 미소간의 대립으로 치닫고 특히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은 대일 정책을 바꾸어 구정치인 재벌을 주축으로 하는 보수 세력을 다시 등장시켜 친미 안정정권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보수 세력의 우두머리로 등상한 것이 자민당의 초대 당수인 요시다 시게루였다. 그는 현실주의적인 입장을 취해 냉전체제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미국에 의한 안전 보장을 택하였으며 당시 그가 정계 체계 관계를 망라하여 구축한 파벌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정치를 주름잡고 있다. 이러한 외적인 요인으로 인하여 보수성을 지닌 자민당은 일본의 제 1당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2)내적요인일본자민당이 일당우위체제 즉 장기 집권의 내적 요인은 여러 가지로 들 수 있다. 첫째 선거제도의 유리함이다. 일본 선거제도인 총선거구제(준 비례대표제)선거제도 자체가 가져온 유리함에 정수배분의 불균형이 가져온 유리함이 더해진 결과로 자민당의 장기 집권이 유지 될 수 있었다.‘서양을 따라잡자’는 국가목표 달성 정책인 고도성장노선과 생활수준향상을 내세운 정책에 대한 국민적 합의에 성공한점을 들 수 있다.정당의 이념과 마찰부분인 헌법 9조 (전쟁포기조항) 등에 대해 고집하기보다 유연 대응하고 외교노선도 현실화하여 정통성 획득에 활용하는 등 환경변화에 적절히 적응한 점과 환경, 복지 등의 영역에서는 야당 의 정책을 도입하기도 하고 농촌뿐 아니라 도시주민의 이익에도 부응하는 포괄정당화에 노력한 점 등을 지적하는 것이 일반적 분석이다5. 55년체제의 붕괴1980년대의 보수마찰이 격화되자, 수출부문 대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재계는 미국의 무역보복을 회피하기 위해 일본의 시장개방과 규제완화를 요구하였다. 이러한 요구들은 자민당 정부의 각종 보조금과 시장보호정책에 의존해온 농민ㆍ자영업자 층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이와 같은 상황은 자민당의 딜레마를 한층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자민당은 이들 중 그 어느 쪽도 포기할 수 없는 이른바 ‘포괄정당화의 딜레마’에 빠지게 된 것이다. 자민당 지도부는 재계와 여론의 압력에 밀려 기성체제의 개혁을 시도하려고 하지만, 이는 이익유도정치를 통해 전통적 고객집단과 밀착되어 있는 당내 의원들의 저항에 부딪혀 근본적인 구조개혁에 이르지 못한 채 실패하고 만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민당 지도부의 정치부패 스캔들(리쿠르트사건1988년, 동경사가와큐빈사건1992년) 등 정치부패사건이 잇따라 터지자 자민당의 개혁 리더십 부재와 이익유도정치에 불만을 품은 개혁파 의원들이 탈당함에 따라 1993년 자민당 장기정권은 일시적으로 붕괴하고 만다. 게다가 1994년 6월 사회당의 무라야마(村山富市)를 수상으로 하는 자민ㆍ사회ㆍ사키가케 연립정권의 출범은 55년체제의 종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6. 1996년, 자민당 정권으로의 복귀새로운 움직임에 둔감하여 정확히 전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정권 유지를 위한 전략을 바꾸려 하지 않는 자민당과 달리, 신생당의 정치가들은 반(反)자민 세력의 결집을 목표로 한발 한발 나아가고 있었다. 일본신당의 호소카와를 수상으로, 사키가케의 다케무라를 내각관방장관으로, 뒤에서 이를 조정하는 오자와의 신생당, 일본신당, 사키가케, 사회당, 공명당,민사당, 사민련의 연립정권이 1993년 8월 6일 발족하였다. 하지만 호소카와 정권에는 개혁주의자, 정치적 기회주의자, 사회주의자, 평화주의자, 국제주의자 등 이념이 다른 정당이 섞여 있었고, 사회당과 신생당의 정책은 전혀 맞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호소카와 정권을 발족시킨 오자와 와 다케무라 두 입안자는 심하게 대립했다. 오자와는 혁명할 일본을 ‘다.
술의 양면성과 전통 술 문화 계승 방안Ⅰ서론술은 인류 역사와 함께 탄생했다. 술은 물을 빼고는 상용 음료로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아주 오래 전에 과일, 곡식이 땅에 떨어져 낙엽이 쌓이고 공기가 차단되어 자연적으로 발효가 된 액체를 우연히 맛보면서부터 이를 애용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해볼 수 있다. 또는 인류가 음식을 저장해 놓는 과정에서 당분이 많이 함유된 과실이나 벌꿀과 같은 액체에 공기 중의 효모가 들어가면서 자연적으로 발효하여 알코올을 함유하는 액체가 되었고, 이 신비한 액체에 매료되었을 것이라는 짐작도 가능하다. 여하튼, 인류는 술의 발생 비밀을 인간의 것으로 소화하여 신비의 음료를 제조하게 되었고, 이 쓴 맛을 지닌 액체 - 에틸알콜 은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의 행동에 놀라운 영향을 끼쳐오고 있다.Ⅱ.본론1. 술의 양면성술은 농경문화와 깊은 관계가 있다. 술은 신과 사람을 연계하는 매개체로써 종교 의식용으로 쓰여 왔다. 또한 관혼상제, 그 밖의 모든 인간의 의식에 술이 이용되어 하나의 보편적 문화의 일역을 맡아오고 있다.이들 의식 후에 주연이 베풀어져서 술은 여럿이 함께 마신다는 습관도 생긴 것이다. 여럿이모여 마시는 술은 사람을 기쁘게 하고 시름을 잊게 하며 마음의 문을 열어 주기에 술잔을 가운데 두면 모든 은원은 녹아내리고 사랑과 우정이 싹트며 문화와 인종의 벽도 허물어진다. 그러나 동시에 술로써 몸을 해치고 싸움이 일어나고, 나라가 망하기도 한다.한의학에서 절제된 술은 혈액 순환을 도우며, 정신적 스트레스나 긴장을 풀어주지만 무절제한 음주는 사람의 성품을 변하게 할 정도로 독성을 발휘한다고 한다. 이처럼 모순되는 양면성을 가진 것이 술이다.1) 백독의 두령 술인간은 술의 진가만큼, 그 해악에도 일직 눈을 떴다. 그리스의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만취는 자신과 가정과 사업 등 모든 일을 망쳐 버린다."고 경고했다.술 종류에 상관없이 적당한 음주는 피로감과 긴장을 해소시켜준다. 또한 매일 마시는 소량의 알코올은 혈중 콜레스테롤에 영향을 미쳐 협심증, 심근경색증과 같은 심장병을 예방한다는 연구결과가 나와 있기도 하다. 문제는 많은 한두 잔으로 그치지 못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술은 득보다 해가 될 때가 더 많다.ㆍ술이 건강상 미치는 영향술의 주성분은 에틸알코올이다. 높은 열량에 비해 영양소가 거의 없기 때문에 인체 내의 영양균형을 깨뜨리며, 간장에서 알코올이 분해 될 때, 단백질 당분 비타민의 소모가 많아지고 무기질과 비타민의 배설을 촉진 한다.에틸알코올이 몸속에서 산화되어 만들어지는 것이 알데히드이다. 알데히드는 독성이 매우 강해 살균제로 쓰이는 것인데 단백질과의 결합력이 강해 쉽게 배출되지 않으며, 신진대사에 장애를 일으킨다. 특히 타격을 받는 대표적인 장기가 간장이다. 알코올의 분해는 대부분 간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알코올을 분해하느라 지방 분해를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간에 지방이 쌓여 지방간, 알코올성 간염, 간세포의 파괴로 인한 간경변증으로 진행되는 것이다.술은 간 질환은 물론이고 암이나 뇌혈관질환을 증가시키고, 췌장질환의 원인이 되고 있다.게다가 술은 칼로리는 높지만 알코올이 체내의 필요와 농도에 관계없이 계속 산화?연소하기만 하고 저장성은 없다. 그래서 실속 없는 것이라고 해서 “空 칼로리”에너지라고 한다. 따라서 술을 마신 후 식사를 소홀히 하기 쉽고 이로 인한 영양결핍으로 신체기능에 장애를 가져오고 면역기능을 약화시킨다.술과 불임은 관계가 없는 것으로 설명한 책들이 있으나, 술은 성기능은 물론 정자의 생산을 억제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여성보다 남성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데 남성에게 있어서 과음은 정자 수를 감소시키고 남성호르몬의 분비를 저하시켜서 성기능은 물론 임신율의 감소를 가져올 수 있다.여성에 있어서도 과음은 무배란과 무월경이 나타날 수 있다. 특히 임신중 음주는 태아의 뇌세포생성에 쓰여질 효소가 알코올 분해에 사용됨으로써 아이의 구조적 문제에 악영향을 준다.술은 신경계통에도 나쁜 영향을 끼치는데 감각과 운동기능이 둔해져서 주의력이나 판단력이 떨어지고, 자제력, 집중력도 상실되어 정상적인 행동을 할 수 없게 된다.따라서 음주 후에 차를 운전하면 돌일킬 수 없는 대형사고를 일으킬 확률이 매우 높다.ㆍ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술이 사람을 마신다.’는 말이 있다. 술을 많이 마시면 사람의 지성이 마비되어 난폭해 지거나 취한 뒤의 일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장애 등 자신을 잃어버린다. 또 과음한 후에는 숙취와 악취로 시달리는데, 그 고통에서 빨리 헤어나기 위해 해장술을 마시는 경우가 많다. 해장술을 마시면 일시적으로 알코올 때문에 마취가 되어 숙취에서 해방된 듯하나 일시적인 현상일 뿐 이다. 이렇게 육체적 또는 감정적인 고통을 덜기위해 계속적으로 술의 힘에 의지하다보면 이것이 습관화 되어 술 없이는 지낼 수 없는 만성 알코올 중독이 된다.알코올 중독자들은 이미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상태로 가정생활은 물론 직장생활을 원만히 영위할 능력을 잃어버린다. 대인관계를 지속할 수 없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경계심과 소외감으로 심리적으로 우울해지기 쉬우며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행동을 하기도 한다.술에 대한 의존도가 심해질수록 공격적이며 난폭한 성격으로 변화를 일으켜 가정폭력, 특히 아내 학대, 어린이학대, 폭력사고, 성범죄 등의 국가적 치안과 같은 사회적 문제를 일으킨다. 이것은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통합되지 않은 인격의 일면이 상습적 범죄자와 알코올중독자 의 공통된 특징이다.술로 인한 사회적 피해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음주운전으로 인한 교통사고다. 음주운전으로 인한 부작용은 직접적으로는 본인이 교통사고로 숨지거나 불구가 될 수도 있지만, 상대방의 가정을 파괴하고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최근의 한국의 경찰청 자료(2004)에 의하면 한 해 음주운전으로 인한 교통사고 건수는 약 25,150 건에 사망이 875명이었고, 부상자 44,522 명이었다.음주운전으로 인한 물적인 피해액은 사고 한 2천200만원으로 전체 교통사고 피해액 평균보다1.2배의 사회적 비용이 더 소모 되고 있다. sbs tv2) 백약의 장 술술의 소비량이 크게 증가하면서 오히려 술의 단점만 부각 되었다. 하지만 적당한 음주는 건강에 좋다는 연구가 늘어나고 있다. 일주일 또는 한 달에 한 번 포도주를 마시는 사람은 술을 전혀 마시지 않는 사람에 비해 치매 위험이 50% 이상 낮았으며, 매일 포도주를 마시는 사람은 이러한 효과가 덜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덴마크 예방의학연구소에서 밝혔다. 이는 알코올이 대뇌로 가는 혈액순환을 더욱 원활하게 해줘 정신활동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혈액 속에는 동맥경화를 촉진하는 나쁜 콜레스테롤인 저비중리포단백질(LDL)과 오히려 동맥 경화를 방지해 주는 좋은 콜레스테롤인 고비중리포단백질(HDL)이있는데, 적당량의 술을 마시게 되면 알코올이 혈중의 고비중리포단백질의 비중을 증가시켜, 혈액의 응고를 방지하고 혈류를 부드럽게 만들어 주므로 협심증상이 생길 때 소량의 술을 마시면 2~3분 내로 완화된다고 한다.적당한 음주는 소화제 역할을 한다. 식사 전의 적당한 음주는 소화계통 내의 각종 소화액 분비를 촉친하여 위장의 소화와 섭취능력을 향상시킨다. 그러므로 소화계통의 기능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중.노년층의 적당한 음주는 소화기능의 저하를 예방할 수 있다.그러나 술의 건강에 이로운 효과는 금연, 운동 등으로 얻을 수 있는 효과보다 작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술이 건강에 긍정적인 효과를 미치기는 하지만 우리의 음주습관 때문에 이런 효과가 제대로 빛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술로써 건강을 유지하려고 하기보다 운동과 같은 다른 건강행동을 실천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술의 가장 큰 장점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적당한 음주가 사람의 정신을 유쾌하게 하고, 우울증과 긴장감을 완화시켜 안정감을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적당량이라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데 성인 남자의 경우는 하루 2~4잔(일주일 7~14잔), 여자는 1~2잔(일주일 4~8잔) 정도가 적절한 양이라고 한다. 여기서 한 잔이란 소주 50ml, 맥주 250ml, 양주 25ml 1잔을 말한다. 그러나 술은 적당량은 장점이 되지만 정도를 넘어서면 단점이 된다.3. 전통 술 문화의 계승우리나라 술 문화의 키워드는 공음(共飮), 회음(回飮)이다. 단일 민족으로 서로 신뢰하고하나 됨을 강조해왔다. 술잔을 입에 닿는 행위, 식기는 인격의 연장체로 술잔을 돌려마시는 행위는 서로 다른 인격체가 정신적으로 결속되었음을 선포하는 행위였다.혼인 때 신랑 신부가 서로 술잔을 교환하고 마시는 합근례는 이질적인 두 존재가 하나됨을 서약하는 의미이며, 신라시대 왕과 신하가 포석정에서 곡수(曲水)에 술잔을 띄워 돌려 마셨던 것도 군신일체(君臣一體)의 결속을 다짐하는 의식이었다.이렇게 일심동체를 다지는 공음은 살아 있는 사람뿐 아니라 신이나 죽고 없는 조상신에게도 마찬가지다. 제사 때 올린 음식과 술을 나누어 먹는 음복 절차가 바로 조상과 후손을 잇는 결속 행위인 것이다.숭고하고 경건한 마음을 표현하는 행위였던 전통 술문화는 현대에 이르러 ‘먹고 죽자’는 식의 향략적인 방향으로 흘러왔다. 하룻밤에 2차, 3차를 계속 하는 술집순례나, 신입생 환영식에서 억지로 술을 강요하여 만취시키는 습관이나, 폭탄주를 마시거나, 위험한 음주운전을 예사로 하는 등 우리가 고쳐야 할 잘못된 음주문화들은 너무나 많다. 이런 야만적인 행위로 전통을 잇는다고 생각해선 안 될 것이다.우리나라 전통 술문화는 철저하게 예절을 중시한다. 특히 어른을 모시고 술을 마실 때는 행동을 삼가는데 먼저 어른에게 술잔을 올리고 어른이 술잔을 주면 두 손으로 받는다. 또 어른이 마신 뒤에 비로소 잔을 비우며, 어른 앞에서 술을 마실 수 없어 돌아앉거나 상체를 뒤로 돌려 마시기도 한다. 술잔을 어른께 드리고 술을 따를 때 도포의 도련이 음식물에 닿을까봐 왼손으로 소매를 쥐고 오른 손으로 따르는 풍속이 생겼다. 이런 예법은 현대에 이르러 소매가 넓지 않은 양복을 입고 살면서도 왼손을 오른팔 아래에 대고 술을 따르는 풍습으로 남아 있다. 우리들은 술 먹는 자세를 크게 반성하여 우리 조상의 음주풍속을 되살려야 할 것이다.
일본의 이에(家)와 이에(家)제도일본어에서 가족(家族)이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부터이다. 그 이전의 시대에서는 가족의 용어대신에 이에(家)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가장 기초적인 사회제도를 지칭하는 비교문화적 개념으로서 가족(family)에 해당하는 일본의 제도체가 이에(家)인 것이다. 이에(家)라는 말은 일본인의 생활 안에서 가장 기초적이고 절실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단어이다. 시마자키 토손(島崎藤村),아리시마 타케오(有島武郞),시가 나오야(志賀直也)등 의 일본문학에서도‘이에(家)’문제를 여러 가지 각도에서 다루고 있을 정도로‘이에(家)’는 일본인의 일상 중 어디에서나 부딪히지 않을 수 없는 절실하고도 복잡한 사회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근대 일본 사회에서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무사계급 가족의 가족도덕사상‘이에(家)’를 기반으로 하여 이를 제도화 하여 메이지 민법에 의해 재편되어 가족에 관한 법제도 및 사회규범인 이에(家)제도가 성립되었다.앞으로 이에(家)의 역사적 변천과 이에제도의 성립과 특징 그리고 현재 일본사회 속 잠재되어 있는 이에(家)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1.이에(家)의 역사적 변천① 고대일본의 가족제도는 헤이안(平安)시대부터 한 사람의 남성과 한 사람의 여성이 배우자가 되어 부부의 견고한 결합이 이루어지고 가족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또한 이러한 가족형태는 남성중심의 가부장제적 성격을 갖는 특징을 보인다. 가부장제적 가족의 성립은 중앙의 귀족이나 지방의 유력한 호족 층에서 보여 지는데 이것이 곧 일본적 이에(家)의 성립배경이 된다. 부부를 중심으로 하는 가족관계 형성과 함께 귀족이나 호족 층은 자신이 갖고 있는 조정에서의 관직, 지방관아에서의 관직을 안정적으로 자신의 자손에게 계승시키려는 욕구를 보이게 된다. 이러한 욕구의 실현이 이에(家)의 성립인 것이다. 즉 이에(家)의 성립이란 가장인 남편과 처가 중심이 되어 자녀를 출산하고 그 자녀를 통해 관직과 가산을 계승시켜나가려는 의식이고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이 의식은 나타나지만 반드시 지켜지지 않고 형제가 계승하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이에(家)계승자가 되지 못하는 자녀가 본가에서 분리하여 새로운 이에(家)를 성립시키기도 하여 새로운 이에(家)의 창출이 성행했다. 때론 가장인 남성을 대신해 어머니와 처가 가장권을 발휘하기도 하여 절대적인 남성중심의 가부장제도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재산상속 형태가 딸을 포함한 자녀간의 균분 상속이 원칙으로 어머니의 권한이 존중받던 시기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14세기 이후부터는 단독상속이 확립되게 되면서 하나의 조직으로서 이에(家)가 대대로 계승되고 가업인 관직의 세습제가 확고해지게 된다. 가업과 가산이 일체화되고 안정적으로 이에(家)가 유지될 것을 기원하여 조상에 대한 제사 또한 성대히 치루어지게 된다. 가업과 가산, 조상에 대한 제사를 일괄하여 계승하는 한 사람의 남성이 이에(家)의 계승자가 되는 것이다. 그 결과 가장으로서 형제와 처자에게 강한 권한을 갖기 시작한다. 이렇게 중세후기의 이에(家)는 한 사람의 가장을 중심으로 하여 집단의 단결과 경영의 안정화를 중시하는 특징을 보인다.③ 근세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까지 일본은 군웅할거의 전국시대를 지나서 17세기에 江戶(에도)막부가 성립한다. 에도막부는 병농 분리와 엄격한 신분제 하에 강력한 지배체제를 확립시킨다. 에도막부는 강력한 지배체제의 관철을 위해 각 계층의 이에(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제도로서의 이에(家)를 확립시킨다. 남성 가장이 대표로서 강력한 국가권력의 지배단위가 되고 경제적 단위로서 확고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고대 이래의 부부중심의 가족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여성의 권리는 제약을 받고 남성에게 복종하는 존재로서 규정받게 된다. 지배계급인 무사의 이에(家)에서는 군역과 토지소유에 여성이 개입하는 것을 제약하며 여성이 가장이 될 수 없게 하고 가장과 부모에게 복종하도록 제도화시키는 것이다.농공상의 서민층에서도 이에(家)는 폭 넓게 성립되는 시기이나 일반서민층의 가족에서는 남녀노소의 구분이 없는 험 수 있다.④ 메이지유신 이후메이지유신에 따라 근대적 국민국가시스템을 이룬 메이지 정부는 일본의 절대 권력의 천황가를 종가(宗家)로 하는 만세일계(萬世一係)의 가족국가라는 이데올로기를 창작하였다.신분제가 폐지되어 1870년 평민들에게 성씨가 허용되었으며, 1872년 호적법을 제정하여 1874년 근대적 호적제(戶籍制)가 시행되면서 모든 일본인은 하나의 이에(家)에 속하도록 하여, 호주(戶主)의 권위와 권한을 강화하는 가부장제적인 이에제도(家制度)를 도입하였다.일본국민에 대한 천황가의 절대권력 인정과 천황을 중심으로 국민을 통합시켜나가기 위해서는 부계가장 즉 호주(戶主)를 중심으로 한 엄격한 위계질서의 가족제도의 필요성에 의해 이에제도가 성립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국가는 국민을 파악하고 관리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제도가 성립되어 호주는 이에의 구성원을 통솔한 권리를 가졌으며, 상속은 장남이 단독으로 상속하였다. 부부는 동일한 이에에 소속되도록 하여 결혼은 여성이 자신의 친가에서 나와 남편의 이에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였다. 결혼에게는 양가의 호주의 동의가 필요했으며, 호주나 법정 가독상속인은 다른 이에에 들어가는 결혼을 할 수가 없었다. 철저한 남녀 불평등주의에 입각한 메이지 헌법은 처를 법률상의 무능력자로 규정하였고, 남편은 아내의 재산을 관리하고 그 수익권도 남편에게 귀속되었으며, 자녀의 친권자는 부친이었다. 또 아내의 부정은 그 자체로서 이혼의 원인이 되었으며 간통죄로서 처벌의 대상이 된 반면, 남편의 부정은 상대방이 배우자가 있는 여성일 경우에 한해 간통죄로 처벌되었다.2. 이에제도의 특징① 혈연집단인가?한국인에게 있어 가족 혹은 친족이 혈연에 기초한 관계로 구성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가족 혹은 친족이 혈연집단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은 오히려 생소한 느낌마저 갖는다. 그러나 일본의 이에(家)의 경우는 이 질문에 간단히 긍정하는 것이 가능치 않으며, 실제 이에(家)는 가산과 가업을 운영하는 집단이고, 世代를 넘어 연속하는 것으로서 독점자본과는 다른 일본적인 특질을 보여주고 있다.또 한국인들은 주변에서 살아가는 동안‘이름’을 바꾸는 경우는 있어도 성을 바꾸는 경우는 거의 접할 수 없다. 한국에서의 성은 곧바로‘혈연관계’의 지표이고 그렇기 때문에 생리학적인 혈연관계만큼이나 절대적이고 당연한 것이어서 어떤 사회적 요인에 의해 쉽게 다른 성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반면 일본에서의 성은‘혈연관계’보다는 이에(家)의 지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사이또’라는 성을 쓰는 한 이에(家)가 있을 경우 그 이에(家)의 구성원이 되는 사람은 누구이던 간에 그 이에(家)에의 소속을 표시하는 '사이또'라는 성을 써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일본 가정에 전화가 걸려오면 누가 전화를 받던간에 거의 항상 그 집의 성을 얘기하면서 전화를 받는데("네 사이또입니다" 라고), 이는 일본에서의 성은 일종의 "이에의 브랜드"라는 점을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② 기업경영의 이에제도이에(家)가 갖는 또 다른 특징은 이에(家)의 성원들이 동일한 경제행위(가업)에 종사한다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대로 일본의 이에(家)는 기본적으로 혈연에 기초한 친족집단이며 하나의 경영공동체, 혹은 생활공동체로서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한 이에(家)의 구성원은 동일한 경영체(corporate)의 구성원이 되며 그런 의미에서 이에(家)는 사회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분할 불가능한 단위이었다. 따라서 이에를 계승한 자의 중요한 역할은 가산을 유지, 운영하며 가업을 이어가는 것이었다.소위‘몇대(代)에 걸쳐 계승되어 온 일본의 가업(家業)’그것은 단순히 도덕의 문제, 즉 계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느끼는 가업을 이어야하겠다는 도덕적 의무감과 철저한 직업의식의 문제만이 아니라 하나의 경영체로서의 이에(家)의 속성과 관련되는 경우가 많다.이에(家)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경제적인 것임과, 이에(家)에 대한 성원권이 친족관계를 통해서라기 보다는 이에(家)의 경제적 활동에 대한 기여도 여부에 의해 정해진다는 점을 들어 “엄격한 의미에는 것이었다. 일본에서는 혈연 분가와 비혈연 분가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 양자를 모두 '분가'라고 부른다는 것은 비혈연 구성원을 '이에'의 정식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렇듯 '이에'의 구성원에 비혈연자를 포함하는 일은 이에(家)의 후계자가 비혈연자로 선택될 수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본다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경우에는 비혈연자를 이에와 동족 집단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경영자원의 중요한 요소인 인재의 다양성 및 가업의 기술 계승이 용이했다.예컨대‘12대째 지속되어온 가업’이라고 할 경우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것이 반드시 한국에서처럼 자식이‘효’의 일종으로 부모의 일을 이어받고, 그의 자식이 또 부모의 일을 이어받는 식이 아니라 이에(家)라는‘경영체’가 그 경제조직의 존속을 위하여 최선의 선택과 선별과정을 거친 결과일 수가 있는 것이다.3.현대 일본 사회에서의 이에제도1945년 패전과 함께 일본이 미군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헌법개정이 이루어져 민법에 규정된 이에(家)제도가 폐지되고 신헌법은 새로운 가족규범을 제시하고 있다. 전후 일본의 민주화 실현을 기본이념으로 하는 신헌법은‘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본질적 평등’을 규정한다. 이에 입각하여 1947년 호적법과 민법이 개정되고 비로소 이에(家)제도는 폐지된다. 더불어 호주에 관한 규정과 아내의 무능력 규정이 폐지되고 결혼은 본인의 의사로 결정할 수 있게 되었으며 처와 장남 이외의 자녀에게도 상속권이 주어지게 되었으며 가족 구성원들 개개인의 존엄성과 평등, 애정과 협력이 중시되는 근대가족제도의 기반이 마련되었다.또한 일본인들의 전반적인 생활스타일이나 의식도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특히 전후의 급속한 도시화와 경제성장을 겪으며 1960년대 후반경이면 급격한 이농과 더불어 소위 샐러리맨화와 마이 홈 주의가 확산되면서 핵가족이 새로운 이상으로 자리 잡게 된다.이러한 경제구조의 변화는 종래의 가업(家業) 기반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것이었으며 결과적으로 '하나의 경영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