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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론식 수업에 대한 나의 생각
    토론식수업에 대한 나의 생각200300193 신혜영21세기는 흔히 말하는 정보화 시대이다. 이러한 사회의 큰 흐름은 필연적으로 전통적인 권위주의와 성인 중심의 교육관에서 벗어나 학생의 개성과 흥미, 욕구, 적성, 자발성 등을 존중하여 계발시키도록 요구하고 있다.현재 우리의 대학 현실에서는 교사 중심의 강의식수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넘쳐나는 지식과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교사가 학생들에게 모든 지식을 넣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한 수동적으로 교사가 학생들에게 지식을 넣어준다고 해도 그 지식은 학생들에게 어떠한 의미도 주지 못한다.그런 의미에서 ‘로스트 라이언스’를 통해본 토론 수업은 내게 신선함과 다소 충격을 주었다. 21세기에 가장 요구된다는 민주적 태도와 가치관의 확립, 문제 해결능력, 의사 표현력,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 창의력, 협동성, 비판적 분석력등과 같은 고등정신능력은 기존의 교사중심의 강의식 수업에서는 결코 길러질 수 없는 것 같다. 이에 보다 효과적인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대표적인 방법이 바로 토론식 수업인 것 같다.물론 이미 많은 사람들이 토론식 수업이 좋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왜 토론식 수업을 하기가 어려운 것인가에 대해 영화를 보고 곰곰이 생각해 봤다. 대학 4년 동안 토론식 수업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토론 활동을 통해서 수업을 전개할 때 얻을 수 있는 교육적 가치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학생들이 적극적인 토론 활동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주된 이유는 학생들이 발표 자체에 큰 두려움을 갖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바로 기본적인 토론 훈련이 몸에 배어 있지 못한 탓이다. 토론 활동에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자기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상대방의 의도를 잘 파악할 수 있으려면 먼저 토론의 기본 활동을 몸에 익혀야 할 것 같다. 토론 활동에 소극적인 이이들을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시키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사용하고, 모둠의 응집력을 높이기 위해 단계별 모둠 토론 활동을 실시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합리적인 학습자를 길러내기 위해서는 우선 토론문화에 익숙해지도록 해야 한다. 토론이라는 것을 어렵게 느끼고 두려워하지 않도록 토론을 일상화시키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나의 생각이 남과 다를 수 있고, 때로는 나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으며 따라서 옳은 생각을 주의 깊게 듣고 내 의견을 고칠 줄도 알게끔 해야 한다. 그것은 결코 패배가 아니며 내 의견을 당당하게 말하는 것만큼 똑같이 용기 있는 행동임을 인식시켜야 한다. 당연히 아이들은 교사와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고, 교사는 더 이상 절대적인 권위자로서의 모습을 가져서는 안 된다.
    교육학| 2007.12.15| 1페이지| 1,000원| 조회(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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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어학]아버지의 뒷모습 주자청
    背影我與父親不相見已二年余了,我最不能忘記的是他的背影。那年冬天,祖母死了,父親的差使也交?了,正是禍不單行的日子,我從北京到徐州,打算?着父親奔喪回家。到徐州見着父親,看見滿院狼藉的東西,又想起祖母,不禁??地流下眼淚。父親說,?事已如此,不必難過,好在天無絶人之路!?回家變賣典質,父親還了虧空;又借錢辦了喪事。這些日子,家中光景?是慘淡,一半爲了喪事,一半爲了父親賦閑。喪事完畢,父親要到南京謀事,我也要回北京念書,我們便同行。到南京時,有朋友約去游?,勾留了一日;第二日上午便須渡江到浦口,下午上車北去。父親因爲事忙,本已說定不送我,叫旅館里一?熟識的茶房陪我同去。他再三囑咐茶房,甚是仔細。但他終于不放心,?茶房不妥帖;頗躊躇了一會。其實我那年已二十歲,北京已來往過兩三次,是沒有甚?要緊的了。他躊躇了一會,終于決定還是自己送我去。我兩三回勸他不必去;他只說,?不要緊,他們去不好!?我們過了江,進了車站。我買票,他忙着照看行李。行李太多了,得向脚夫行些小費,才可過去。他便又忙着和他們講价錢。我那時眞是聰明過分,總覺他說話不大漂亮,非自己揷嘴不可。但他終于講定了价錢;就送我上車。他給我揀定了?車門的一張椅子;我將他給我做的紫毛大衣鋪好坐位。他囑我路上小心,夜里警醒些,不要受?。又囑托茶房好好照應我。我心里暗笑他的迂;他們只認得錢,托他們直是白托!而且我這樣大年紀的人,難道還不能料理自己???,我現在想想,那時眞是太聰明了!我說道,???,?走?。?他望車外看了看,說,?我買??橘子去。?就在此地,不要走動。?我看那邊月台的柵欄外有??賣東西的等着顧客。走到那邊月台,須穿過鐵道,須跳下去又爬上去。父親是一??子,走過去自然要費事些。我本來要去的,他不肯,只好讓他去。我看見他戴着黑布小帽,穿着黑布大馬?,深靑布棉袍,??地走到鐵道邊,慢慢探身下去,尙不大難。可是他穿過鐵道,要爬上那邊月台,就不容易了。他用兩手攀着上面,兩脚再向上縮;他肥?的身子向左微傾,顯出努力的樣子。這時我看見他的背影,我的淚?快地流下來了。我?緊拭干了淚,?他看見,也?別人看見。我再向外看時,他已抱了朱紅的橘子望回走了。過鐵道時,他先將橘子散放在地上,自己慢慢爬下,再抱起橘子走。到這邊時,我?緊去?他。他和我走到車上,將橘子一股腦兒放在我的皮大衣上。于是撲撲衣上的泥土,心里?輕松似的,過一會說,?我走了;到那邊來信!?我望着他走出去。他走了?步,回過頭看見我,說,?進去?,里邊沒人。?等他的背影混入來來往往的人里,再?不着了,我便進來坐下,我的眼淚又來了。近?年來,父親和我都是東奔西走,家中光景是一日不如一日。他少年出外謀生,獨力支持,做了許多大事。那知老境却如此頹唐!他觸目傷懷,自然情不能自已。情郁于中,自然要發之于外;家庭?屑便往往觸他之怒。他待我漸漸不同往日。但最近兩年的不見,他終于忘却我的不好,只是?記着我,?記着我的兒子。我北來后,他寫了一信給我,信中說道,?我身體平安,惟膀子疼痛利害,擧箸提筆,諸多不便,大約大去之期不遠矣。?我讀到此處,在晶瑩的淚光中,又看見那肥?的,靑布棉袍,黑布馬?的背影。?!我不知何時再能與他相見!1925年10月在北京。(原載1925年11月22日《文學周報》第200期)뒷 모 습주 자 청나와 아버지가 보지 못한 지가 이미 2년 여 남짓 되었는데, 내가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아버지의 뒷모습이다. 그 해 겨울,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아버지의 실직으로, 바로 설상가상의 날들이었으며, 나는 북경에서 소주로 가 아버지와 함께 ‘분상’을 위해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소주에 도착해 아버지를 뵙고 있자니, 집안 가득히 난잡하게 어질러진 물건들이 보여, 또다시 할머니 생각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렀다. 아버지는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그렇게 괴로워하지 말거라. 다행히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구나.”하고 말씀하셨다.아버지는 집에 돌아가 재산을 팔고 저당을 잡혀 돈을 만들어 빚을 갚으셨다. 또 돈을 빌려 상을 치르셨다. 이 시절 집안 상황은 반은 상으로, 반은 아버지가 실직하신 것으로 인해 매우 참담했다. 상이 끝나고, 아버지는 남경으로 일자리를 찾아 가셔야 했고, 나도 학업을 위해 북경으로 되돌아가야 했기에, 우리는 동행했다.남경에 도착해서 친구랑 돌아다니며 놀기로 약속하여, 하루를 더 머물렀다. 이튿날 오전에 바로 강을 건너 포구에 가서, 오후에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가야만 했다. 아버지는 일이 바쁘셔서 본인께서는 이미 배웅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고, 여관의 잘 아는 한 심부름꾼에게 나를 데리고 가게 하셨다. 아버지는 심부름꾼에게 매우 꼼꼼하게 신신당부를 하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심부름꾼이 잘하지 못할까 염려하시어 끝내 마음을 놓지 못하셨고, 잠시 동안 상당히 주저하셨다. 사실 나는 그 해에 이미 스무 살이었고, 북경에는 이미 두세 차례 왕래해 봤기에 그리 심각할 것은 없었다. 아버지는 잠시 동안 매우 주저하시더니, 결국 그래도 당신께서 직접 나를 배웅하시는 게 좋겠다고 결정하셨다. 내가 두세 번 아버지께 그러시지 않아도 된다고 설득해 보았지만 아버지는 “괜찮다, 그들이 가는 게 내키지가 않는구나.”라고 말씀하실 뿐이었다.우리는 강을 건너 역에 들어갔다. 내가 표를 샀고, 아버지는 바삐 짐을 지키셨다. 짐이 너무 많아 짐꾼에게 팁을 조금 주어야만 건너갈 수가 있었다. 아버지는 곧 또 그들과 급히 흥정을 하셨는데, 나는 그 때 정말이지 너무 똑똑했다. 줄곧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것이 그다지 유창하지가 않아 스스로 말참견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듯이 느꼈다. 하지만 아버지는 결국 흥정을 하셨고 곧 내가 기차에 오르는 것을 배웅하셨다. 아버지는 나를 위해 문 쪽의 자리 하나를 골라 주셨고 나는 아버지가 내게 해주신 자주색 모피코트를 자리에 깔았다. 아버지는 내게 가는 길에 조심하라고, 밤에는 조금 더 경계하고,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당부하셨다. 그리고 또 다시 승무원에게 나를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어수룩함을 마음속으로 은근히 비웃었다 그들은 단지 돈만을 알 뿐, 그들에게 부탁을 하는 것은 그야말로 쓸데없이 부탁을 하는 것이다. 게다가 나만큼 나이를 먹은 사람이, 그러면 자기 자신 하나도 돌보지 못한 단 말인가? 아, 내가 지금 생각을 해 보아도, 그 때 나는 정말로 너무나도 똑똑했다 !나는 “아버지, 이제 가세요.”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기차 바깥쪽을 한 번 보시고는 “내가 귤을 몇 개 사러 갔다 오마. 너는 여기에 있거라. 움직이면 안 된다.”하고 말씀하셨다. 나는 저쪽 플랫폼 울타리 밖에서 몇몇 상인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쪽의 플랫폼에 걸어가서, 철로를 건너야 하고, 뛰어 내려갔다가 또 다시 기어 올라가야 했다. 아버지는 뚱뚱하시기에, 걸어가는 것이 자연히 힘이 드실 것이었다. 원래 내가 가려던 것을 아버지가 그리 하려 하시지 않으셨기에, 아버지가 가시게 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작고 검은 천모자를 쓰시고, 크고 검은 마고자와 진한 청색 두루마기를 입으신 채, 뒤뚱뒤뚱 거리면서 철로 변으로 걸어가신 것을 보았다. 천천히 몸을 앞으로 내밀어 내려가시는 것까지는 아직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철로를 건너 가셔서는 그쪽의 울타리를 기어 올라가시는 것이 곧 쉽지가 않았다. 아버지는 두 손으로 위쪽을 잡고 기어오르시고, 두 발을 다시 위쪽을 향해 움츠리셨다. 아버지는 뚱뚱한 몸을 왼쪽을 향해 조금 기울이시면서 부단히 노력하시는 모습을 보이셨다. 이 때 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았고, 내 눈물이 매우 빠르게 흘러 내렸다. 나는 아버지나 다른 사람들이 볼까 재빨리 눈물을 닦아냈다. 내가 다시 밖을 보았을 때, 아버지는 이미 주홍색의 귤을 안고서 되돌아오는 곳을 향하셨다. 철로를 건너실 때에 아버지는 먼저 귤을 땅에 내려놓으시고는, 당신 자신이 천천히 기어 내려오시고는 또다시 귤을 안고 걸으셨다. 이쪽에 도착하셨을 때, 나는 재빨리 가서 잡아드렸다. 아버지와 나는 기차로 걸어와서, 귤을 모두 내 모피코트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하여 옷 위의 진흙을 털어내고, 마음이 매우 가벼운 듯 했다. 잠시 뒤에 “아버지 가마. 도착하거든 편지 하거라!”하고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가 걸어 나가시는 것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몇 걸음 가시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나를 보시고는, “들어가거라, 안에 사람이 없지 않느냐.”하셨다. 아버지의 뒷모습이 오고가는 사람들 속으로 섞여 들어 다시 찾을 수 없게 되어서야, 나는 곧 들어와 앉았고, 눈물은 또 흘렀다.
    인문/어학| 2007.07.04| 3페이지| 1,000원| 조회(1,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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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을기 평가D별로예요
    감상문수업시간을 통하여 魯迅의 를 원문으로 읽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몇 년 전 번역되어 있는 魯迅 책에서 를 읽었었는데 단편소설이다 보니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원문으로 읽어보니 더욱 기억에 남고 그 당시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魯迅은 1918년 문혁을 계기로 광인일기를 발표하면서 중국의 가족제도와 예교의 폐해를 폭로하였다. 그 다음으로 1년 뒤인 1919년에 쓴 본격적인 문학작품이라고 불리는 단편소설이 바로 이다. 시대적으로 혼란한 시기를 거쳤고 자신의 어린 시절 역시 그리 순탄치만은 않은 탓인지 魯迅의 작품들은 어두운 느낌을 주며 계몽적이며 풍자적이다. 역시 그러하다. 하지만 어두운 느낌의 소설 속에서도 은근히 희망이라는 메시지는 주는 것 같다.주인공인 孔乙己는 몰락한 봉건적 지식인으로서 과거제도의 희생양이며 그를 통하여 전통 유교를 비판하고 양반의 위선과 식인적인 봉건적 외형을 풍자하고 있다.소설에서 孔乙己는 비록 양반이 입는 장삼을 입고 있지만 다 헤지고 몇 년간 빨지도 않은 것 같으며 창백한 얼굴에는 상처투성이 라고 묘사하고 있다. 또한 孔乙己는 봉건 교육에 오랫동안 빠져들어 있어 먹고 마시기만을 좋아하며 게으른 인물이다. 글 좀 아는 孔乙己이지만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직업도 없으며 날이 갈수록 생활이 쪼들리다가 비렁뱅이 신세가 되고 만다. 하지만 그는 글을 아는 자신은 덕이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글을 모르는 사람은 저속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다행히도 붓글씨를 잘 쓴 덕에 남의 부탁으로 책을 베껴주면서 겨우 입에 풀칠을 할 수 있었지만 결국에는 남의 책을 훔치는 못된 습관까지 있게 된다. 사람들이 도둑놈이라고 놀릴 때면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구지식인들의 몰락과 나태한 근성을 지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孔乙己는 알아듣기 힘든 문자를 쓴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상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孔乙己 자신 역시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이 소설 덕에 아주 유명해진 주점에서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다. 주점에서 孔乙己는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어 비웃음을 사는 몰락한 지식인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술집의 주인은 자신의 이익만을 따지는 상인으로 묘사되어 孔乙己가 남의 책을 훔치다 맞은 이야기를 듣고는 단순한 흥밋거리로 그의 일을 궁금해 하다가 장부를 계산할 때면 孔乙己가 외상값이 있다는 말만 되풀이 한다. 孔乙己에서 주점이란 여러 사람들에 들렸다 가는 중국 봉건사회의 사람과 사람관계의 특징이 잘 반영되는 곳이다.孔乙己는 결국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지면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면서 죽음을 암시한다. 비록 봉건적 사상이라는 테두리 속에 갇혀 사는 孔乙己이지만 말동무하나 없이 자신의 슬픔과 아픔을 혼자 달래야만 한다. 작가는 이러한 주인공과 주변인물을 통해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 또한 아쉬워했을 것 이다. 차분하고 냉정한 시각으로 소설을 썼지만 그 속에서 孔乙己에 대한 연민을 느낄 수 있었다.주자청(朱自淸)은 1898에 중국 장쑤성 둥하이현에서 태어났으나, 조부와 부친이 모두 揚州에 거주하여 스스로를 ‘揚州人’이라고 하였다. 중국현대 수필가 및 시인으로서 학자원명 자화(自貨)이고, 호는 추실(秋實)이며, 자는 패현(佩弦)이다. 필명에는 여첩(余捷), 백향(柏香), 지백(知白)등이 있다. 1916년 북경대학 예과에 입학, 이듬해 철학과에 들어갔다. 1919년「5.4」운동후 소년중앙학회, 신조사에 가입했고, 따라서 이 시기부터 신시를 창작하기 시작했다.1920년(22세) 베이징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절강/항주 제1사범, 강소/양주 제6사범, 상해중국공학(上海中國公學), 절강상우춘휘중학 등에서 교사로 재직하는 한편, 재학시부터 시작한 시작(詩作)에 전심하여 잡지 《신조(新潮)》 등에 기고하였다. 1922년 유평백(兪平伯)등과 함께 중국신문학사상 첫 시문학간행물인〈시(詩)〉월간을 꾸렸다. 이듬해 유명한 장시「훼멸」을 소설 월보에 발표하였으며, 그 동안 문학연구회에 참가하기도 했다.다음해 시집 《종적(昞跡)》을 출판, 현실 긍정의 입장에 선 그 작풍의 신선미로 말미암아 시단에 올랐다. 1925년 칭화대학교 교수로 취임할 무렵부터 산문(散文)으로 바꾸어, 그때부터는 주로 수필창작과 고전문학연구에 정진하였는바, 그의 수필 명편들인「노젓는 소리, 등불 그림속의 진회하」,「록」,「봄(春)」,「하당월색」등은 이 시기에 쓴 것들이다.그의 수필은 평이한 서술방식으로 실감있고, 현장감 나게 표달하며 필치가 간결하고도 소박하며 친절하게 감명을 불러일으킨다. 한때 문단에서는 주자청의 수필을 두고「미문(美文)」,「백화미술문의 모범」이라고 했다. 1928년 《배영(背影)》으로 위다푸[郁達夫]와 쌍벽을 이루는 산문작가로 일컬어졌다.1931~1932년 유럽에 외유하였고, 귀국 후에는 동 대학 중국문학계 주임으로 있었다. 중일전쟁 중에는 쿤밍[昆明]시난연합[西南聯合] 국문학계 주임으로 있었고, 이 사이에 시*소설 등의 비평, 고전문학 연구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34년〈문학계간(文學季刊)〉과〈태백(太白)〉지의 편집을 맡았다.그후 1935년 《중국신문학대계*신집≫ 편집하는 등, 시의 비평가로 이름을 떨쳤는데, 1937년 항일전쟁이 일어나자 학교의 피난으로 호남의 장사 등지로 전전하다가 운남의 곤명에 정착하여 서남연합대학(청화대학,북경대학,남개대학의 합병)의 중국문학계주임을 담당했다.1938년 중화전국문예계항적협회(中華全國文藝界抗敵協會)이사로 있었고 1945년 항일전쟁승리후 민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46년 운남 곤명에서 발생한 이공박(李公朴),문일다(聞一多)암살사건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으며 민주운동에 더욱 견정히 참여하게끔 도움을 주었다.
    독후감/창작| 2007.07.04| 3페이지| 1,000원| 조회(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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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어학]5.4문학
    1. 서론2. 5?4 운동1) 5?4운동의 시대적 배경2) 사상사적 배경3) 5?4운동의 내적요인3. 5?4 운동 시기의 문학1) 문학혁명운동2) 5?4 문학혁명 발생 조건3) 5?4 문학혁명 발전과정4) 문학혁명운동의 반대론5) 5?4 문학혁명의 성과 및 한계6) 문학혁명의 심화4. 결론1. 서론지난 100여 년간은 중국 역사에 있어 가장 숨가쁜 순간이면서 동시에 커다란 영향을 발휘했던 사건으로 1911년 10월 10일의 신해혁명, 1949년 10월 1일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과 함께 1919년 5월 4일의 5?4운동을 들 수 있을 것이다.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이 점유하고 있던 山東지역의 이권을 종전과 함께 일본이 차지하려는데 대한 저항운동으로서의 배일운동이 친일 매국노의 타도와 파리강화조약 조인거부를 구체적 투쟁목표로 5월 4일 이래 약 2개월간 전개된 5?4애국운동은 마침내 그들의 목적을 완수함으로써 중국의 사회사조에 거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5?4운동은 중국 현대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이었으며 처음에는 결코 큰 규모로 시작된 운동은 아니었지만 얼마지 않아 중국의 각계각층이 참가한 거대한 민족운동으로 전환하였다. 이는 중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방면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고 학생?지식인층의 주도하에 상공업자와 노동자 등이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일본제국주의 침탈 및 외세와 결탁한 군벌정권에 항거한 反제국?반군벌투쟁이라 할 수 있다. 이 운동의 물결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대중의 의식을 성장시킴으로써 중국사회에 문화적 변동을 선도하였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당시의 당면과제인 매국관료의 파면과 파리강화조약의 조인거부를 실현시켰다.중국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큰 사건이었던 5?4운동은 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성공적으로 이룩하였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하겠다. 학생들은 5?4운동 전기간에 걸쳐 운동의 추진 그리고 주동세력이었으며 상인과 노동자 등 중국 전 계층을 계몽하여 운동에 참가하게 만든 주역이었다. 특히 북경대학생들이 이 운동을 주도함으로써 5?였다. 원세개 사후의 북경의 중화민국 정부는 安?軍閥과 直?派軍閥의 대립 속에서 권력 투쟁이 전개되고 있었으며 광주에는 護法軍政府가 성립되어 실질적으로 남북이 대립되어 있는 상황에서 北京政府는 그 존재가 국제적으로 승인 받고 있었지만 정부의 행정적 지배권이 전 중국에 미치질 못하였다. 그 와중에서 북경정부는 재정유지를 위한 세금의 수입이 부족한 상황에서 그 부족분을 차관으로 메울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한 차관공여에 대한 재정지배는 열강에 있어서 군사적 우월성과 함께 중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중요수단이었다. 또한 여러 群小軍閥들에게 있어서 그들 정권과 이를 뒷받침하는 군사력 유지를 위해선 막대한 차관을 도입했고 이에 대한 대가로 탄광 등의 막대한 이권을 넘긴 것이다. 이처럼 일본제국주의와 북경군벌정권의 결탁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 성립된 것이라 볼 수 있다.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1914년,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뒤 독일의 조자치인 靑島를 비롯한 산동성 전역에서 군사행동을 전개하였으며 이어 원세개 정부에 이른바 ?21개 조항?을 제기했다. 요구의 핵심은 산동에 있는 독일의 권익을 일본에 계승한다는 것이었고 1915년 5월9일 중국은 일본의 최후통첩에 굴복하여 이를 수락하였다. 이듬해 원세개가 죽은 후 실권을 장악한 단기서 정권은 일본으로부터 막대한 차관을 얻은 관계로 친일적 성격이 강해졌고 한편으론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1919년에 파리강화회의가 열리어 1917년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했던 중국도 이에 참가하였다. 하지만 중국은 패전국인 독일이 산동 내에서 차지하고 있던 식민지적 권익을 중국이 돌려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일본은 ?21개 조항? 가운데 산동 문제에 관한 것과 단기서 정권이 1918년에 일본과 교환한 산동 문제에 관한 공문을 근거로 산동 문제는 중?일간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문서상의 증거가 있었던 까닭에 영국?프랑스 둥의 연합국이 1918년의 중일협약을 지지해 주기로 일본과 密約 했으므로 4월 21일의 회의에서 결국 일본측의 를 제창했다. 이러한 사상은 사회제도에 대한 전면적 개혁을 주장하는 것이 된다. 즉 모든 인간들 각자가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사회가 되는 것만이 봉건사회에서 탈피하는 길이라고 여긴 것이다.)이처럼 서구 사상이 물밀 듯이 들어오면서 중국 유교사상에 대한 비판이 다양한 입장에서 전개되었다. ?신청년?에서는 인권설, 생물진화론, 사회주의를 근세 삼대문명이라 하면서 자유, 평등, 박애를 기치로 하여 프랑스혁명과 미국의 공화제를 인민을 주인으로 하는 자유로운 자치적 국민정치라 하였고 서구의 근대사상을 민주주의와 과학이라는 두 개의 슬로건으로 요약하여 19~20C기의 서구의 근대 과학?사상을 신속하게 소개하였다.이와 같이 서구의 신사상 도입의 중요한 이론적 기초가 되었던 것으로 진화론을 들 수 있다. 진화론은 청말 이래의 혁신운동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준 중요한 원리였다. 이는 진화론의 자연도태?약육강식 등의 설이 당시 시대상황과 부합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약자가 어떻게 강권에 투쟁하고 공리를 주장하는 저항의 이론으로서 이용되었다. 그리고 봉건제사회를 부정하는 사회혁명의 이론으로서 받아들여짐으로서 당시의 새로운 사조를 뒷받침하는 가장 유력한 원리였다. 여기에는 새로운 사상을 도입하는 주체인 지식인들의 反傳統主義라는 공통분모에 기인하였기 때문에 그 대표인 유교에 대한 반감이 상당하였다.袁世凱 당시 帝制運動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유교세력을 이용하였고 禮에 기인한 유교의 사상은 그 성격상 가정?사회적으로 민중이 독립적?정치적 판단을 할 수 없게 하였고 가부장적인 세력에 절대 복종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전통사회에서는 남녀간 사회적 교제도 허락되지 않았다. 이는 개성의 박탈과 사회에서 독립적이고 생산적 구성원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때문에 지식층과 학생들은 유교사상이 현대입헌국가에 있어서 필수적인 독립적?정치적 판단을 제약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처럼 전통적 사상?윤리에 집착하는 구세대와 보수층 그리고 서양사상의 군벌의 입지력을 강화시켜 힘을 과시하였고 지역별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면서 그 기반을 넓혀나가는 과정에서 군벌끼리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이러한 충동의 최대 피해자는 언급했다시피 민중들이었으며 그들의 생활기반을 위협하는 요소이기도 했다. 이러한 군벌의 존재는 당연히 그 지역 민중들로부터 지지를 얻을 수 없었고 이러한 환경 속에서 민중들은 새로운 변화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그리고 크고 작은 내란과 함께 재해?농촌경제의 붕괴로 토지가 없는 농민과 실업자의 수가 증가하였으며 궁핍해진 사람들 다수가 촌락을 떠나 직업군인이 되었고 그 밖에 匪賊이나 유민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유동인구는 5?4시대 직전의 군벌의 급성장에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또한 서양식 교육제도가 사회전반에 걸쳐 확산되면서 그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직후에 민족?민주주의 분위기가 아시아에 성행되기 시작하면서 민족자결주의와 같은 정치적 이상주의는 중국지식인층에는 커다란 호소력을 지녔다. 비록 민족자결주의가 공허한 메아리로 중국인들에게 들렸지만 이로 인하여 중국 내부의 문제점에 대한 현실성을 직시함으로서 정치적 혼돈과 후진성은 광범하고 근본적인 개혁이 낡은 국가의 소생에 불가결하다는 것을 新지식층은 확신하였다.)이러한 사상적 성장과 더불어 5?4시기에 이르게 되면 중국사회는 곧 두 개의 현대계급(무산계급?자산계급)과 두 개의 전통계급(지주계급?농민계급) 그리고 지식인 계급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러한 계급의 분화는 전통에서 현대를 향하여 전화되어 가는 動態的이고 이원적인 사회구조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와중에 일부의 상인?지주?관료와 수공업자는 때마침 현대 자산계급 및 관료 자산계급으로 전화되는 과정에 있었고 농민?수공업자 및 기타 빈민들은 현대무산계급으로 전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구조는 외부의 자극으로 뒤늦게 근대화에 뛰어든 개발도상국가의 사회변동 형태에서 주로 찾아 볼 수 있는데 중국은 이러한 현상이 더욱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형태 속에서 지주와 농히 윤리와 사상으로서의 유교만이 아니라 유교와 결부된 중국 사회와 문화의 여러 분야에도 혁신의 바람을 가져다주었다. 가족제도의 비판과 결혼의 자유, 남녀의 평등, 여성해방과 같은 문제를 자주 논의하였으며 ‘평민교육’의 필요성이 제창되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선 孔門의 학설과 도교의 妖言을 기재한 한문을 폐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임을 직시하여 유교와 舊문화의 표현수단인 古文에 대하여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이러한 바탕아래 白話運動을 위시한 문학혁명운동이 신구 대립을 명확하게 자각한 바탕 위에서의 격렬한 논쟁을 통하여 전개된 것은 위의 영향이 크다할 것이다.)1918년 1월부터는 북경대학 교수 6명이 편집하는 ?신청년?이 완전히 백화로 발간되었다. 이 해에 백화의 신시가 지식층에 의해 널리 실험되었고 새로운 번역기법에 의한 근대 유럽문학의 소개가 빈번했다. 입센, 안데르센,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의 작품들이 유럽원어의 문법?문체에 영향을 받은 한문으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신문학운동이 좀더 넓은 범위로 확대된 것은 1919년 이후의 일로 5?4운동 이후에 백화는 다수의 학생출판물에 널리 사용되었고 거의 모든 잡지?신문?문학작품들이 새 문학매체로 바뀌기 시작했다. 또한 중국 최초의 근대소설인 노신의 ?광인일기?는 구어체로 쓰여졌고 그 문학적 내용도 높고 주제가 심각하다는 점에서 중국 근대문학의 가장 큰 성과라 할 수 있다. 광인일기에서는 가족제도와 禮敎의 폐해를 폭로하려는 의도에서 쓰여졌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하여 중국의 수 천년 동안 仁義道德으로 장식한 봉건문명이란 겨우 ‘사람까지도 잡아먹었던’ 역사에 불과하다고 하였다.한편 문학혁명의 여파로 인해 교육계인사들은 학교교육에 국어와 백화문을 채택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했다. 1918년 11월 교육부는 정식으로 주음자모를 공포했다. 당시 북경에서는 채원배 등이 설립한 공덕학교가 자체적으로 국어독본을 펴냈으며 강소성에서는 교육부의 공포를 기다리지 않고 ‘각 학교의 국어교수안’을 스스로 제정하여 통과시키고 국어교재를
    인문/어학| 2007.07.04| 14페이지| 1,000원| 조회(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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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어학]당오사의 사
    《唐五代의 詞》사는 민간가요의 가사에서 비롯된 양식으로 당 중엽에 정식으로 성립하여 五代의 발전을 거쳐 송대에 전성을 이룬 가사성격을 띤 운문이다.1. 詞의 諸般名稱詩餘(시의 변형.), 長短句(구형의 자유로움.), 樂府(漢代 樂府와 같은 노래가사.), 曲子詞(시가 음악과 완전히 분리된 뒤에 노래의 가사로서 발생.), 新聲, 餘音, 別調 (새로운 악곡의 가사.) 等2. 詞의 기원詩經 起源說- ?詩經?에 자유로운 句式의 詩가 있고, 같은 노래의 가사라는 점.樂府 起源說- 漢代 樂府詩로부터 발전.絶句 起源說- 唐代 絶句를 가사로 사용.⇒위와 같이 起源說은 표면상 불일치하나 樂府도 詩이며 詩도 노래의 가사라는 점에서 그 내용은 일치.3. 詞의 발생敦煌變文의 발견으로 사의 발생원인과 시기 및 출발점의 전도시기: 晩唐, 五代 ⇒ 唐 이전의 초기형태, 中唐의 정식성립출발점: 文人詞 ⇒ 民間詞詞(民間詞)의 발생 원인: 시가 노래가사로서의 성격을 벗어나 문인들에 의해 완전히 읽는 시로 변한 반면 민간에서는 변함없이 자유로운 형식의 노래가 유행하고 있었는데 외국과의 교류로 인해 유입된 俗樂)과 胡樂) 으로 새로이 형성된 음악에 이미 정형화 되어버린 기존의 시가양식으로는 새로운 음악에 적응할 수 없어 자유로운 長短句의 민가와 결합하여 사의 형태가 나오게 됨.胡樂과 俗樂(민간가요)은 또한 사대부 문인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어 당시 근체시의 발달이 극에 이르러 빈틈없는 규율에 저항을 느낀 문인(시인)들이 민간사의 형식을 본떠 사 창작을 시도, 사의 문인과 사대부화의 발로.4. 詞의 발생시기六朝- 詞의 원형기,隋, 唐初年- 萌芽期中, 晩唐- 정식성립기, 문인사의 본격화 시기명칭길이小令(=小詞)58자 이내中調58자 - 90자長調(=晩詞)91자 이상5. 詞의 체제와 성격*시와 사의 비교를 통한 사의 성격 규정詩詞일정한 제목이 있다.詞牌 또는 詞調라 일컫는 일종의 악보를 갖고,그에 따라 자수, 구형, 압운이 결정된다.웅장하고 기개있는 풍격통속적인 언어, 직설적인 표현, 섬세하고 부드러운 풍격2,4,6,8구에 押韻하는 공식사패에 따라 每句 또는 隔句로 압운하는 등 형식이 가변적, 換韻도 가능.平仄만을 고려平仄외에도 上,去,入聲을 경우에 따라 통용할 수 없게 하였다.6. 唐?五代文人詞 (初盛唐→中晩唐→五代)*初盛唐: 문인사가 존재하였으나 작품의 眞僞문제와 민간사에 가까운 작품과 문학적 가치 미비로 사의 맹아기로 여김.煬帝 ?紀遼東?, 沈全期 ?回波樂?, 玄宗 ?好時光?, 李白 ?菩薩蠻?, ?憶秦娥?*中晩唐: 사의 정식성립시기, 문인사의 본격화中唐-白居易, 劉禹錫 等晩唐-溫庭筠, 黃甫松, 司空圖 等中唐晩唐勢詩, 詞의 병중詞에 偏重風格통가적, 민가적귀족적, 염가적素材생활적인 요소향락적인 歌, 舞, 酒, 花 女.*五代: 後蜀의 趙崇祖가 편찬한 ?花間集?인 詞選集으로 대표된다.花間集- 晩唐과 五代에 활동했던 詞 작가 18인의 작품 500首가 수록되었으며 대부분의 작품이 책머리에 수록되어 있는 溫庭筠의 감각적이고 화려한 사풍을 따르고 있으며 ?花間集?에 나오는 作家들을 “화간파”라 칭함.韋莊, 李璟, 李煜, 馮延巳 等7. 대표작가溫庭筠(812-870?)-자가 飛卿李商隱과 함께 시와 사로서 만당의 유미주의 풍조를 대표하는 花間鼻祖.濃艶하면서도 함축적인 표현구사, 여인의 모습과 고독함 등 여성적인 정서를 다룬 경우가 많다.?菩薩蠻?, ?南歌子?, ?淸平樂?, ?訴衷情? 등의 詞調를 즐겨씀.※中國 詞史에서 溫庭筠의 地位)1.溫庭筠 以前에 시인이 塡詞하였어도 모두 시를 위주로 塡詞하는 嘗試的 餘技에 不過 했다. 溫氏는 詩 人이었으나 그는 塡詞에 努力하여 詞의 성취는 멀리 詩보다 상위에 있었다. 사는 그에 이르러 정식의 文學體裁를 형성하여 韻文史上에서 詩를 벗어나서 獨立의 생명을 얻은 것이다.2.溫庭筠이전의 詞는 형성과 풍격에 있어서 詩와 相近하였으나 溫庭筠에 이르러 修辭와 意境上 비로소 詩詞分離의 作風을 형성하였다.3.溫庭筠은 詩詞分離하는 과도기의 橋梁이다. 그의 작품은 위로는 唐詩를 종결하고, 아래로는 五代, 宋詞發展의 機運을 연 것이다. 王士禎이 花草蒙拾에서 그를 일러 “花間鼻祖”라고 단정한 것이다.
    인문/어학| 2007.07.04| 3페이지| 1,000원| 조회(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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