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하는 짓이 없는 만능 재주꾼 도깨비는 다른 나라에는 없다. 유일하게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귀신 또는 요정이다. 그래서 도깨비는 우리 전설 속의 시조 치우천왕의 모습을 형상화했다고도 이야기한다. 치우천왕은 단군 이전에 존재했다는 전설 속의 시조이다. 이렇게 도깨비를 전설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시조에 비교하는 것을 보면 도깨비랑 한국인은 닮은 구석이 많은가 보다. 이 글에서 도깨비를 ‘날면서도 내려앉는 도깨비’라고 묘사하는 구절이 있다. 그동안 우리 한국인의 모습이 이렇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앞에서 지금까지 우리 한국인은 날면서도 내려 앉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그동안 한국이라는 사회가 참으로 많은 시련을 겪어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들은 하나 겪기도 힘든 일을 그것도 짧은 시간 동안에 여러 차례 경험했다. 대표적으로 일제 36년, 한국 전쟁 등이 있다. 특히 일제 36년은 한국인에게 가장 치욕적인 시간이었다. 한국인의 정신이 완전히 무시당한 채 긍지와 자부심을 잃고 살아가야 했다. 게다가 일제 36년에서 해방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동족끼리 서로 총을 겨누는 비극적인 사건도 있었다. 이것이 바로 한국 전쟁이다. 그래서 도깨비는 지금까지 날개를 달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우리 사회는 한국인이라는 만능 재주를 가진 도깨비들의 노력으로 현재의 눈부신 성장을 일궈 냈다. 한국인들이 지금까지 걸어온 과정들을 보면 감탄 그 자체다. 한국인의 국민 평균 아이큐는 세계 최고이고, 손재주가 많아 복잡한 일도 쉽게 습득하며, 국민성은 근면 성실하기까지 하다. 결국 도깨비는 한국인의 이러한 모습을 쏙 빼닮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이렇게 똑똑하고 재주 많은 한국인들의 모습을 보면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히 잘 살아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아직 우리 사회는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볼 때 선진국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다시 말해 도깨비처럼 만능의 재주는 가졌지만 정작 비상할 수 있는 능력이 빠진 것이다.이제 도깨비에게 날개를 달아 주어야 한다. 그렇게 많은 재주를 가지고도 날지 못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한국 사회의 눈부신 성장이 있기는 하였지만 우리는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멀리 높게 비상해야 한다. 또 작가가 말하는 것처럼 장애고 멍에이던 역사는 이제 끝장이 나야 한다. 패배주의 역사에 얽매여 높게 비상 하려는 우리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된다. 과거에 억울하고 힘들었던 사정은 피하고 숨기기보다 사회 전면에 드러내서 적극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한다. 구속이던 사회나 제도는 날려 버려야 한다. 여성을 억압해 불평등을 야기시키는 유교적 관념의 사회는 부분적으로 타파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장애를 딛고 하늘로 날아 올라야 한다. 한국인들은 뻗어 나아가 세계 속에서 그 위상을 떨쳐야 한다.그동안 도깨비는 우리 고난의 역사 속에서 비상 할 수 없었다. 도깨비는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쓰라린 역사 속에서 비상 할 수 없었던 한국인들을 형상화 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날지 못한 도깨비의 한을 풀어줘야 한다. 작가가 이 작품에서 말하는 것처럼 스스로 다스릴 수만 있으면 욕구는 무한 팽창해야 한다. 또 의지는 장애를 딛고 하늘이 되어야 한다. 이제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장애고 멍에이던 역사에서 벗어나 멀리 그리고 높이 세계 속으로 비상해야 할 과제가 남겨져 있다.
우리는 주변에서 북망산 간다 또는 북망산천에 붇혔다 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북망산은 무덤이 많은 곳으로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글의 제목만 보아도 이 글이 죽음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는 것은 금방 짐작 할 수 있다. 이 글의 제목을 직접적으로 북망이라고 한 작가의 생각과 그가 말하고 싶어하는 죽음의 세계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또 내게 죽음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이 글의 초반에 이상스런 행색을 한 남자가 등장한다. 그는 아버지의 묘소를 이장해 어머니의 유해와 합장하기 위해 이 곳에 왔다. 노인은 그에게 아버지와 어머니의 애절한 사연이 얽혀있는 까막골 이야기를 한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남에게 죽임을 당한 후 어머니는 그곳을 떠나야 했고 남겨진 그를 데리고 홀로 힘든 삶을 살아왔다. 노인은 그에게 죽은 자는 언제나 젊고 살아 당한 고초가 더 하지 라는 말을 한다. 여기서 죽은 자는 아버지이고 살아서 고초를 겪은 사람은 어머니이다. 어머니에게 아버지 없이 홀로 그를 데리고 살아가야 했던 삶은 그 자체가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북망은 어찌보면 편히 쉴 수 있는 안식처로 보였을 것이다. 또 삶이 힘겨울수록 북망에 이르는 길은 더욱 멀게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멀리 가서 도달한 북망도 결국은 외롭고 쓸쓸한 곳이다. 그래서 작가는 제목에서 북망을 멀고도 고적한 곳이라고 표현한 듯 싶다.이번에는 이 글을 외재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싶다. 이 글이 쓰여질 당시는 1970년대 산업화의 물결이 거세게 일던 시기이다. 주위에 높다란 산은 하나도 없고 온통 벌겋게 드러나 황토의 낮은 야산만이 굽이굽이 연이어져 길 저쪽 너머까지 계속되어 있었다. 낙엽송이며 회나무며 솔도 많았건만 산 꼴이 심란허이 라는 구절들로 미루어 알 수 있다. 또 노인이 세상에 별바별 일들이 많이 일어나 생각이 뒤숭숭하다 라는 말로 미루어 당시 사람들의 심리적 공황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당하거나 고향을 상실해 여기저기 떠도는 사람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들에게 삶은 끝없는 고난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죽음이 갖는 의미는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랐을 것이다. 삶 자체가 너무 괴롭기 때문에 이 글의 어머니처럼 북망이 오히려 휴식처나 안식처로 느껴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또 죽음에 이르는 길을 삶의 여정으로 본다면 그 길은 무척 멀고 험난했기 때문에 북망에 이르는 길은 더욱 멀다고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북망은 멀고도 고적한 곳이기에 쓸쓸히 남겨지는 것은 필연적 운명이다.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 합장을 마친 뒤 노인이 그에게 자네아나? 한이란 건 색깔이 있다면 똑 저 모양일 걸세 라고 말하는 구절이 있다. 한이란 못내 분하고 억울하게 여겨져 마음에 맺힌 것이라는 뜻으로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표적 정서가 되었다. 이 글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애절했던 삶과 죽음이 한으로 그려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 글시 쓰여질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고려하면 민중들의 고단한 삶이 이렇게 한으로 형상화 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200203297 경제학과 2학년 최민선[ 제목 ] 한국사회의 정체론에 대한 입장1. 서론한국은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근대화 과정을 겪었다. 36년 간의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은 일종의 큰 시련이었다. 1950년대의 과도기가 지나고, 1960년대 들어서면서 4.19 혁명을 계기로 근대화에 대한 자각을 가지고 본격적인 근대화가 착수되었지만, 경제발전에 역점을 둔 근대화 과정 속에서 한국 경제사에 대한 연구는 미비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한국경제사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연구기간이 짧다. 또 학문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왜곡 굴절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지만 전반적인 체계는 아직 잡히지 않은 상태이고 여러 가지 쟁점들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이 같은 상황에서 한국의 경제사에 대한 연구는 일본의 관변학자들에 의해서 비롯되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 보고서에서 다루고자 하는 ‘정체론’이다. 정체론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한국사회는 스스로 역사를 발전시킬 수 없는 정체된 사회이고 따라서 근대사회로 발전할 수 있는 주체적 역량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일본에 의해서 타율적으로 근대사회로 이행할 수 밖에 없었다.” 식민사관, 정체성 이론, 타율성 이론으로 대표되는 정체론의 이 같은 주장은 우리 민족의 주체적, 내재적 발전 논리를 부정하고 침략을 정당화 시키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근거였다고 말할 수 있다.2. 본론한국의 정체론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인접국과의 비교는 필수적이므로 당시 중국과 일본의 상황을 살펴보고자 한다.ㄱ. 근대화에 대한 일본의 대응우선 일본의 경우를 살펴보자. 당시 일본의 새 지도자들은 중앙 집권적 정부를 창출하고 분노한 사무라이들의 공격을 물리치는 문제를 걱정하면서도 일본이 서양과의 평등을 확보할 수 있는 ‘강병’을 보유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부국’으로 발전시켜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그들의 목표는 메이지 유신을 통해 구체화되기에 이른다. 메이지 시대 동안 일본 정부는 국내교학생을 파견했다. ‘바쿠후’와 일부의 ‘한’들에서는 유신 전부터 이것을 시작하였고, 신정부는 이러한 노력을 계속하여 갔다. 이리하여 54명 이상의 학생들이 1871년 이와쿠라 사절단에 동행하여 해외로 나가 정치, 사상, 경제의 개혁자 및 지도자들로서 중요한 경력들을 쌓았다. 외국인 전문가들을 영입하는 것이 서양 기술을 획득하고 그 기술을 익히는 또 다른 방법이 되었다. 구체제의 마지막 몇 년간에 외국인 전문가들이 다양한 사업에 기용되었고, 신정부도 그와 같은 인재들의 고용을 확대해 나아갔다. 결론적으로 일본의 경우에는 적어도 근대화라는 외래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웠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일본의 그 후의 급속한 산업화와 중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덜 성공적이었던 근대화와의 차이를 설명해주는 주된 원인으로 보인다.ㄴ. 근대화에 대한 중국의 대응1868년에서 1912년에 걸친 메이지 시대 일본은 같은 시대 중국의 실패를 더욱 주목하게 만든다. 사실, 중국의 경우에도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비슷한 양무운동이라는 것이 있었다. 양무운동은 봉건체제의 유지 보강을 서유럽으로부터의 근대기술 의 도입에서 이루려 한 청국 정부의 자강운동이었다. 그러나 중국의 경제적 근대화는 공업화 초기부터 어려가지 어려움에 맞닥뜨리게 되면서 지연되게 된다. 중국의 공업화가 늦은 가장 큰 원인은 정부 지도력의 불충분에 있다. 정부의 태만 때문에 개항장이 후대에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조약 체제의 억압적인 영향이 누적되었으며, 이후에 나타난 여러 해악은 처음부터 결코 피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는 중국 정부의 무능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북경 당국의 무능력은 재정과 정책의 두 가지 면에서 잘 드러난다. 북경의 낡은 재정 체제는 여전히 세금 징수 청부 형식에 의존하였다. 이는 예산편성, 회계, 중앙 정부의 계획 및 통제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보고되지 않은 세액이 북경의 기록에 실려 있는 것 보다 아마도 세 배 내지 다섯 배는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이처럼수적인 개혁 계획이 1864~1873년의 10년간 한국을 통치한 대원군이라는 섭정에 의해 정력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는 왕조 창건자의 황금 시대를 부흥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개혁을 추구함으로써 이 왕조의 국가적 명운이 걸린 위기에 대처하려 하였는데 이는 중국에서의 동치중흥과 약간 비슷하였다. 이러한 개혁은 토지세와 구제 양곡 및 병역 등 한국의 전통적 3제도의 정상적인 기능을 회복하려는 것이었으나 이 모든 제도가 이미 철저하게 부패해 있었다.1884년에는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 개화파가 개화 사상을 바탕으로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은 개화파가 위로부터 시도한 최초의 개혁운동이었다. 신정강에서 구체화된 개화파의 개혁 구상은 정치면에서 대외적으로 청나라와 종속관계를 청산하려 하였고 대내적으로 조선왕조의 전제주의 정치체제를 입헌군주제로 바꾸려 한 정치개혁이었다. 사회면에서도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평등권을 제정하여 중세적 신분제를 청산하려 하였다. 경제면에서는 개화파들이 지주전호제를 유지하는 선에서 국가재정를 강화하려고 지조법의 개혁만을 내세웠다. 그러나 상공업면에서도 자본주의적 기업의 육성 문제나 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직접적인 원인은 청군의 간섭 때문이었다. 그 밖에 정변 자체가 민중에 뿌리박지 못한 개화파의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는 점도 한 몫을 하였다. 이로 인해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났다.ㄹ. 정체론과 관련된 주된 논쟁실증경제사학자 시카타는 ‘사회발전의 속도가 매우 느리고 생산과 소비가 변화보다는 순환적 경향을 보이는 경우 정체된 사회로 본다’고 주장하면서 한국의 경우 ‘생활양식과 사고 방식이 동일하고, 생산방법과 소비생활에 있어서 발전이 없었으며, 양반이 상민을 지배 예속 시키고, 주자학이 금과 옥조로 받아들여지고 있었고, 백성이 가난 했기 때문에 정체된 사회로 볼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 사회가 정체된 원인은 물적 측면 세계자본주의와 충돌하는 과정으로 이 지역의 역사적 전개를 파악하면서 외압이완설을 제기 하였다. 이는 외압이 이완된 계기를 우연적인 것으로 파악하면서 일본과 중국의 병행발전론을 제기 하였다. 즉 중국의 양무파 정권과 명치정부는 동시에 대외적으로 서구 자본주의에 종속과 국권주의라는 양면적 대응을 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결국 조선에서 국내모순의 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찾았으며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자본주의화에 성공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같은 논리도 이 지역의 사적 전개과정에 대한 새로운 시각으로 평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을 완전히 수동적 위치로 전락시키는 잘못을 범했다. 조선에도 양무정권이나 명치정권과 동질적인 역사과정이 존재했다.가지무라는 도오야마의 이 같은 주장을 더욱 확대 시켜 중국, 일본, 조선 이 세나라의 차이를 외압으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조선의 경우 개국이 늦어지는 바람에 외압의 강도가 강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조선이 개국후 받았던 외압의 주체가 일본과 중국이었다는 점으로부터 파악할 수 있는데 당시 중국과 일본은 개항이후의 발전과정에서 원시적 축적의 단계에 있었으며, 원시적 축적단계에서의 식민지 정책은 항상 폭력적이고 군사적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중국과 일본 자체도 서구로 부터의 외압을 받고 있는 단계였기 때문에 조선은 ‘이중의 외압’을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후에 논의될 자본주의적 발전계기는 이 같은 외압으로 부정당했고 파괴되었다는 주장을 했다. 또 중국에 대해서는 중국이 개국이 빨랐던 것은 사실이나 서구의 외압은 산업자본의 단계에서 가해진 외압이였기 때문에 산업자본은 원료의 획득과 완제품의 판매시장을 고려한다는 측면에서 일본 보다는 중국이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는 주장이다. 양무정권은 이 같은 강한 외압에 대해 민족역량의 결집을 통한 대응에 실패했고 밑으로부터의 개혁운동이 동시에 발생한 상황에서 개혁을 위한 선택의 폭에서 제한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견해이다.ㅁ. 조선의 자본주의 역량 가능성조선의 농업에 대한토지 소유 관계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었다. 김용섭 교수는 16세기 중엽에 직전법이 폐지됨으로써 소유권에 입각한 지주제가 봉건경제제도의 틀을 이루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17세기부터는 농업생산력과 상품경제가 발달하면서 지주제가 해체되고 농민층의 분화가 이루어지면서 광범위한 영세빈농과 몰락농민을 창출하고 이들이 임노동층을 구성했다고 말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경영형 부농이 창출되어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내재적 계기를 형성해 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미야자와는 이앙법의 보급 등 생산력의 발전으로 집약적 경영의 경향이 나타나면서 19세기 전반까지는 소농 경영이 안정화 되어 가는 경향이라고 언급했다. 지주제 확립 이후에 소농경영이 해체되고 지주제도 해체되면서 전반적인 사회구성의 전환기를 맞았다는 주장이다. 이 밖에 19세기에 농민층의 분해라든가 사회구성의 변화라는 성급한 결론은 내릴 수 없다는 주장도 있었다. 결론적으로 개항 이전 조선후기사회는 생산력과 토지소유관계의 변화를 통해서 내재적 발전의 계기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이 같은 상황에서 개항을 맞게 되었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상품경제의 발달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었다. 강만길은 도고상업론이라는 연구를 통해 18세기 이후 공장과 소비자를 격리시키기 위해 공장의 원료를 매점하고 제품을 매점하여 판로를 봉쇄하거나 나아가 공장을 직접 고용하여 생산장을 직접 자영하는 단계에 이르는 도매가 현저하게 발달하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경강상인과 개성상인에 대한 연구를 통해 조선후기의 상업활동이 도고상업이라는 특징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사상의 자본집적 및 생산자 지배의 측면까지 해명하려고 노력하였다. 안병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상품유통의 변화가 상품생산의 구조변화로부터 주어진다고 주장하여 상업의 변화를 토지소유관계 및 경영구조에 연결시켰다. 그러나 근대적 상품화폐경제로의 변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관념론적으로 해석해 비판을 받았다. 이 같은 연구에 대해 송찬식등이 자본주의적 요소를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미화하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