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팅 반란Falling of advertisement and rising of PR학번 :이름 :1. 요약 및 정리1) 서문광고보다는 PR. 현재 대다수의 대기업들은 광고에 더 이상 돈을 쓰지 않는다. 대신 PR에 더 투자를 하는 편인데, 하지만 PR에 대한 인식은 아직 부족한 편이다. 광고는 큰 비용이 들지만 PR은 그렇지 않다. 이제는 먼저 PR에 신경 쓰고 나아가 광고를 하는 순서로 홍보의 패러다임이 전환되고 있다.2) 광고의 몰락과연 광고는 정직한가. 과대, 과장 광고에 대한 회의와 불신이 커져가고 있다. 그리고 광고의 벽지화에 따라 광고의 홍수 속에서 소비자는 광고의 전달 내용을 배제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광고는 본래의 기능을 잃고 지나치게 창의적인 면만을 부각시켜 예술이 되었다. 창의적인 광고는 광고상을 받고 화제가치가 올라가지만 광고상이 브랜드의 매출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브랜드의 인지도는 신뢰할 수 있는 언론매체의 전달, 제3정보원의 정보 등 PR에 의해 좌우된다. 광고는 신뢰성도 보장하지 못한다. 광고를 한다는 자체가 신뢰를 회복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소비자의 인식 속에 광고는 거짓말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고 있다. PR이 그 대안이다.3) PR의 부상우리는 언론매체와 입소문 등을 광고보다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광고는 이미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또한 광고업체는 자사홍보를 PR에 의존한다. 이는 광고보다는 PR이 더 효과적임을 증명한다. 새로운 브랜드의 경우, 광고보다는 언론매체의 관심이 더 주목을 끈다. 혁신적인 상품이거나 ‘최초의’, ’최고의’ 등의 수식어를 쓸 수 있는 브랜드일 경우 그렇다. 광고는 퍼블리시티를 통해 브랜드를 구축/유지하는데 이용해야 하며 일시적인 유행이 아닌 지속적인 관심을 위해서는 창의적인 PR의 전략이 필요하다. 새로운 브랜드에 PR의 잠재요소가 없다면 독특한 사업모델이나 인내가 필요하다. 기존의 브랜드를 재구축할 경우 단순히 이름을 바꾸는 것보다 잠재고객의 마인드 속에서 브랜드의 포지션을 이동시킬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퍼블리시티가 모두 유용한 것은 아니다. 브랜드의 강점을 부각할 수 있는 적절한 PR이 필요하며 따라서 PR은 창의적인 작업이며 금전적으로 환산할 수 없다. 언론에 오르내리기에 있어 주목끌기, 보호하기 등의 전략을 세워야 하며 언론매체에 기사거리를 제공하는 등의 역학관계를 잘 세워야 한다. 반면 라인확장은 언론의 관심을 끌 수 없고 기존의 브랜드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PR에 있어 브랜드이름의 어감이 중요하며 네이밍 자체로서 퍼블리시티를 이끌어 낼 수 있다.4) 새로운 광고 마케팅광고는 기존의 브랜드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으며 포지션을 바꿀 수 없다. 창의성보다는 진실이 중요하다. "맞아 나도 예전에 뭔가 느끼고 있었는 이런 점을 상기시켜주다니."하는 공감을 이끌어 내야 한다. PR로서 이미 구축된 브랜드는 광고로 브랜드를 보호해야하고 새로운 브랜드는 포지션을 만들기 위해 광고보다는 PR에 힘써야 한다. 하지만 브랜드의 구축은 소비자에게 신뢰를 주는 과정이므로 오랜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5) 광고와 PR의 공존경영자는 광고가 이미 브랜드 홍보에 낡은 수단임을 깨달아야 하며 창의성보다는 진실이 중요함을 알아야 한다. 광고인은 기존의 도제식 시스템과 광고업계의 관행보다는 PR의 새로운 가능을 알고 PR을 적극 도입해야한다. PR인은 경영인과 광고주에게 PR위주 마케팅의 효과를 증명하고 PR을 포지셔닝하기 위해 광고를 재포지셔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6) 광고 vs PRPR은 자연스럽게 도움을 주며 선형적이다. 완만한 발전의 단계를 보이고 언어적이다. 잠재고객의 마음 속에 특정한 포지셔닝을 꾀하며 광고에 비해 오래간다. 저비용으로 큰 효과를 볼 수 있으며 그 전략에 있어 광고보다 창의적이며 소비자에게 신뢰를 쌓는다.2. 내가 생각하는 PR은?PR은 편가르기마케팅 반란을 읽고 떠오른 PR의 정의는 ‘편가르기’이다. 소비자에게 우리 브랜드를 알리고 브랜드를 좋아하게 만든다. 결국 우리 브랜드의 상품을 사게 만들고 광고주에게 큰 매출을 안겨준다. 이것은 경쟁사를 따돌리는 것이며 동시에 제로섬의 영역에서 편을 가르고 더 많은 편을 확보하는 게임이다. 광고가 떠오를 수도 있는데 PR은 소비자에게 조용하고 시나브로 다가간다. 즉, 화려하고 창의적인 비주얼을 내세우는 광고보다는 다소 딱딱해 보이는 언론매체나 그 형태조차 짐작할 수 없는 제3의 정보원을 통해 소비자에게 다가간다. 하지만 그 가운데는 진실과 신뢰하는 키워드가 존재하며 재미는 있지만 ‘믿을 수 없는’ 광고보다는 내게 필요하고 진실된 브랜드를 PR을 통해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광고주와 광고인은 소비자를 내 편으로 끌어들임에 있어서 어떤 방법을 취해야 할까. PR은 광고의 부족한 면을 채워줄 수 있는 중요한 도구라고 생각한다.PR은 신뢰PR은 신뢰와 진실을 바탕으로 한다. 진실이 결여된 생각되는 언론매체의 퍼블리시티나 제3자의 정보는 의미가 없다. 진실된 브랜드는 소비자를 존중한다. Kevin Roberts가 “Respect is love in plain clothes.“ 라고 말했듯이. 진정 소비자를 생각하고 소비자를 위한 브랜드만이 사랑을 받고 PR을 통해 가치를 알릴 수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많이, 크게 퍼블리시티에 노출된다고 해서 신뢰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신뢰를 쌓으면 위에서 말한 편가르기에서 더 우위를 점할 수 있다. 다른 브랜드에 충성하던 소비자를 우리 브랜드로 끌어 올 수 있다. 즉, 우리 편으로 만들기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소비자는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소비자와 여론의 예측하기 어렵다. 하지만 브랜드는 명확하고 전략적인 PR로 소비자를 지켜내야 하며 신뢰야말로 진정한 PR의 가치다.사회를 바꾸는 PR그럼 사람들을 내 편으로 만들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단순히 브랜드를 알리고 해당 브랜드의 상품을 파는 것? 하지만 PR은 브랜드의 영역 에서 뿐만 아니라 국정에서 각종 정치, 사회, 경제, 환경의 단체에서 즉, 이 사회를 이루고 있는 모든 이슈에서 작용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이슈에 대한 찬반과 해결이 사회를 이끌어 가는 원동력인데 이런 이슈의 뒷면에 PR이 작용한다. PR은 사회적인 문제의 해결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떤 이슈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상대를 설득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주로 사용되는 방법이 PR인 것이다. PR을 통해 더 나은 방향으로 사회가 나아가려면 올바르고 더 적합한 의견을 공유하고 행해야 하는데 의견공유의 도구가 바로 PR이다.브랜드가 삶을 대체하고 삶이 브랜드를 대체하는 시대 에서 PR은 중요한 개인적, 사회적 요소가 되었다. PR은 광고의 미래상이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새로운 가치이다.3. 앞으로의 방향커뮤니케이션 테크놀러지의 발전지난 10년 동안이 인터넷, 모바일 등의 테크놀러지에서의 발전이었다면, 향후 10년은 이미 다져진 플랫폼을 이용하여 PR을 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마인드와 접근방식, 즉, 패러다임이 바뀔 것이다. 인터넷과 모바일 기술이 날로 발전하고 그 이용자도 급증하여 충분한 플랫폼이 만들어 졌다. 따라서 그런 새로운 창구를 통한 PR이 중요한 부분으로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퍼스널 미디어의 등장과 성공으로 개인의 퍼스널 오피니언이 중요한 작용을 할 것이다. 예를 들어 국내의 블로거인구가 늘어나고 충분한 수입은 물론 개인의 블로그가 많은 퍼블리시티를 창출해 낸다는 점을 미루어 보았을 때, 현재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는 기업의 홍보형 블로그를 넘어서 앞서 말한 개인블로거들의 오피니언의 정리화 연구, 콘트롤 방안의 마련이 필요할 것이다.쌍방향 커뮤니케이션PR은 광고에 비해 쌍방향성이 더 크지만 미래에는 이 인터렉티티비티가 더욱 강조될 것이다. 기업은 그룹화된 타겟 오디언스들에게 자사의 메시지 및 스토리를 전달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창구를 마련하여 그들과의 질 높은 쌍방향 대화를 창출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얼리어답터들의 입김이 시장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연구해보면 될 것이며, 그 영향력은 앞으로 더 커질 것으로 짐작된다. 과거의 메시지의 조종에서 이제는 대화로 변화해 가고 있다. 따라서 기업은 더욱 영민하고 전략적으로 PR을 구사 해야 한다.사회적 그룹핑기업은 자사의 타겟 소비자를 그룹핑할 때, 현재의 일차원적인 그룹핑에서 더 나아가 사회적인 영향력에 따라 새로운 그룹핑을 해야하고 그것을 마케팅에 접목시켜야 할 것이다. 온라인 영향력자 진단(Audit of online influencers)을 통해 자사 비즈니스 관련 소셜 미디어, 온라인 미디어, 전문 사이트를 리서치하고, 관련 업계 및 토픽에 대해 가장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룹을 진단하여 전문화된 타겟 마케팅을 펼쳐야한다. 포지셔닝에 있어서도 이런 주요 그룹에 대한 포지셔닝이 우선되어야 하겠다.미디어 시장 재편과 변화에 따른 새로운 환경에 적응최근 기업체 홍보팀의 모습도 많은 변화를 격고 있다. 최고의 A 그룹은 “사업환경관리팀(Business Environment Management Team)”이라는 다소 별난 이름을 지었고, B그룹 포함 상위 50대 기업 중 8개 기업이 기업대화팀(Corporate Conversation Team)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미디어 시장이 변화함에 따라 기업이 과거의 단순한 ‘홍보팀’에서 벗어서 더욱 적극적이고 전략적인 PR의 요구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협상 전문가들의 약진을 볼 때, 소비자들과의 관계에서 기업의 마케팅 환경의 긍정적인 변화를 위해 다양한 공중그룹들과의 관계 역학에 대해 연구하는 쪽으로 포커스가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복잡해진 관계 속에서 얽혀있는 문제들을 풀어나가는데 필요한 협상능력을 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면직물을 이용한 신소재” 크레비온 듀오텍스크레비온(Crabyon)키틴/키토산을 함유한 섬유1. 크레비온(Crabyon)이란?-섬유질에 키틴/키토산을 함유한 세계 유일의 혼성 섬유 키틴과 키토산이라는 자연 물질로서 최근 많은 주목을 받는 섬유로 특히 의료분야와 음식, 건강 분야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OMIKENSHI에서는 화학적 용해제를 넣지 않고 셀룰로오스 비스코스와 함께 사출함으 로서 Crabyon이라는 키틴/키토산 함유섬유를 만들어 냈다. (화학적 용제를 넣지 않음 = 친환경적 생산요소)2. 생산공정crab shell 키토산이 들어있는 갑각류Chitin 다량의 키틴CRABYONPowodered Chitin 가루로 만든 키틴Chitin/Chitosan viscose +Cellulose viscose + Pulp 키틴/키토산과 셀룰로오스 비스코스를 섞어 용제로 만들어 준다.Extruding Into Spin-bath 용제를 Spin-bath에서 사출한다.03. 크레비온의 특성오랜 박테리아 항균작용을 가진다. 세탁이나 마찰에도 변하지 않는다. 키틴/키토산의 함유율에 따라 다양한 사용이 가능하다. 1%에서 99%까지 넓은 함유율의 조절로서 필요에 따라 사용 가능하다. 모섬유나 면섬유에 쉽게 첨가 될 수 있다. 약하고 민감한 피부에 훌륭한 기능을 한다. Crabyon은 피부를 습기를 제거하며, 민감하고 약한 피부, 아기 피부에 쾌적하고 안전하다. 쉽게 변하지 않는다. 물리적 성질은 보통의 레이온섬유와 거의 흡사하다. 염색성이 우수하다. 친환경적이다. 폐기 후 뿐만아니라 그 생산 과정에서도 친환경적이다.4. 크레비온의 이용스포츠 분야 유니폼, 관절을 감싸는 밴드, 스포츠 언더웨어 웜-업 수트, 양말, 스키복, 스웨트셔츠, 신발의 안감 ☞ 주로 피부에 직접 닿으며, 땀을 흡수해야 하는 기능성 의류에 이용 언더웨어 영유아, 성인의 언더웨어 ☞ 건강을 생각해서 피부에 직접닿는 언더웨어에 Crabyon을 이용 유아복 ☞ 피부가 민감하고 약한 아기들을 위해 유아복에 전반적으로 이용 기타 교복, 체육복, 블라우스, 가디건, 인테리어소재, 담요, 이불, 수건, 식기세척수건, 마스크필터5. 크레비온 샘플듀오텍스(Duotex)고밀도, 이중직 신소재1. 듀오텍스(Duotex)란?캐주얼웨어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주요 소재인 면이 품격을 높일 수 있도록 개발한 방림의 듀오텍스(DUOTEX)는 세 번수 고밀도면서 이중직으로 개발 된 신소재이다.2. 방림의 듀오텍스방림은 문래동 본사에서 열린 신소재 전시회에서 듀오텍스를 비롯 뉴 텐셀 순면 프린트 방향가공 소재등 다양한 소재를 제안했다. 행사에 처음 소개된 듀오텍스는 캐주얼 패션화의 추세를 반영했다. 특히 면 소재의 한계를 극복, 품격을 높일 수 있도록 개발된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면 소재의 두께감은 보온성과 중량감 패션성을 높일 수 있고, 방림 듀오텍스는 순면과 혼방제품으로 세계적인 메이커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또한 내수 캐주얼웨어 브랜드에서도 품질이 높고 패션성과 기능성 면에서 최상급이라는 평판을 얻고 있다. 듀오텍스는 기존 면이 가진 장점이면서 단점으로 지적된 얇은 것으로 인해 아웃 웨어 개발에 한계가 있었던 점을 감안 제직 상태에서 이미 이중직으로 만들어진다. 고밀도 세 번 수로 만들어진 듀오텍스는 순면제품과 면/폴리에스터 등으로 개발 안과 겉이 달리하는 제조기술관 연속가공기술로 우아한 색상과 독특한 질감을 갖고 있어 서로 다른 감각을 느낄 수 있다. 고품격 정장과 코트 등 아이템 다양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3. 듀오텍스의 특징세 번수 고밀도면서 이중직으로 개발 된 신소재 제직 상태에서 이중직으로 만들어짐 순면제품과 면/폴리에스터 등으로 개발 안과 겉이 달리하는제조기술과 연속가공기술로 우아한 색상과 독특한 질감 고품격 정장과 코트 등 아이템 다양화에 크게 기여마치며 방림방적 소재실 내부끝감사합니다!{nameOfApplication=Show}
주제 : 점과 철학(과학) 사이점과 철학 사이. 점과 철학 사이에는 과연 어떤 관계가 숨어 있을까. 얼마 전 한 글을 읽었다. 그 글의 주된 주제는 ‘이론의 가치는 무엇인가’, ‘선입견 없는 사유는 가능한가’ 였는데 이는 나로 하여금 주역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했다.주역은 하늘과 땅, 만물과 사람을 잇는 학문이라 배웠다. 그리고 주역의 가치는 삭막하고 진화론적 관점의 발전이 그 한계를 드러낸 현재의 시점에서 굉장히 필요하다고 배웠다. 하지만 이론으로서의 주역이 과연 실제에도 유용성이 있는가. 이를 다소 서양 철학적인 관점에서 파헤쳐보자. 먼저 이론과 실제에 대해 살펴보면 이론화 작업과 그 실천화 작업에 다소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론화 작업은 많은 지식의 누계로서 그 완성도를 평가할 수 있다. 다라서 굉장히 오랜 기간, 많은 사람들이 애를 써야만 할 수 있는 작업이다. 그런 이론화와 반대로 실천화, 즉 실천은 누계보다는 지금 당장의 효용성과 유용성에 그 가치를 둔다. 따라서 실천쪽에서 본다면 이론화는 굉장히 느리고 따분한 작업이며, 이론쪽에서 보자면 실천은 다소 경망스럽고 현재에 급급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이론과 실천을 이렇게 이분법적으로만 볼 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도 선뜻 이분법이 옳다고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이 둘은 분명히 다르지만 서로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탁상공론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이론화 과정에서 지나친 사유의 누계로 인해 발생한 공론이다. 공론도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주역은 그 이론에 뿌리를 두고 사람들의 실천을 염두에 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주역의 점과 철학의 사이에는 어떤 괴리가 있을지 모르나 이것은 이론과 실천의 관계처럼 방해가 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서로 상호보완적인 관계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론의 비판 기능은 그 공론의 가치를 한 차원 높여준다. 그런 비판 조차 이론화의 누계 속에 포함되는 것이리라. 점은 미신이 아니다. 이론화와 같이 과학적인 데이터와 이치를 일으켜 앞날을 예상하고 세계와 인간과의 조화를 꾀하려는 하나의 방책이며, 믿음이다.점과 철학 사이에서 선입견 없는 사유란 가능할까. 언뜻 보면 점과 철학, 그리고 선입견이라는 관념 가운데는 아무런 관련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선입견이라는 우리의 뇌 속에서 지배적인 개념을 통해 우리는 주역과 점, 과학(철학)에 대한 관계를 도출해 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항상 선입견 속에서 뭐든지 바라본다. ‘나는 점을 보건대 아무 선입견이 없다’라고 말할지라도 이미 그의 머리 속에서 ‘점’이라는 존재를 바라볼 때, 그는 이미 선입견을 세우고 바라본 것이다. 빛을 통해 동공으로 들어온 데이터를 뇌가 판단하고자 할 때 우리는 항상 선입견이라는 일종의 필터를 거칠 수 밖에 없다. 하물며 손에 잡히지 않으며 개념으로서만 존재하는 ‘점’과 같은 단어, 단어의 존재는 그 필터의 영향을 더 받을 수 밖에 없다. 선입견은 역사적인 것이다. 어떤 사회에 어떤 개인이 그러한 선입견을 갖게 된 데에는 역사적인 관점에서의 고찰이 필요하다. 역사적인 개념이 없어 선입견이 존재 하지 않느다면 우리의 눈에 보이는 ‘책’, ‘밥’이라는 개념 뿐만아니라 ‘점’, ‘철학’, ‘생각’등의 무형물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어떤 상처의 순간이나 충격의 순간에 뇌를 사용하며 자신의 데이터를 알게 모르게 꾸준히 가꾸어 나가므로 그 선입견은 인간의 머리 속에서 자라고 사회 속에서 자라는 것이다. ‘점’이라는 개념 역시 인간이 상처와 충격을 받고 사회가 상처와 충격의 순간에 발휘한 사유가 모여 만들어진 일종의 역사적인 산물이며 철학적인 산물이다. 따라서 철학이라는 반석 위에 점이 있으며, 점 또한 그 자체로서 철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점이 있으므로 사람들은 과거의 데이터를 통해 미래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점의 철학적인 면을 이용하여 상처와 충격의 순간을 쉽게 모면할 수 있고, 자기위안이라는 일종의 방패도 쉽게 만들어 낼 수 있다. 따라서 철학은 과학과 사회 위에서 자라고 그 철학 위에 점이 자라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역사적인 산물을 과연 미신이라고 쉽게 치부해 버릴 수 있는가.참고서적 – 한국의 교양을 읽는다 (휴머니스트, 김용석 등 공저)
영화의 기법과 사상의 분석- 미쟝센과 이데올로기, 그리고 정신분석학을 중점적으로 -수 록 작 품?어둠속의 댄서??물랑루즈??트루먼쇼??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목 차1. ?물랑루즈?와 ?어둠 속의 댄서?(1) 미장센의 측면에서 바라본 두 영화의 차이점(2) 의 미쟝센 고찰(3) 이데올로기(Ideology)의 개념 구분(4)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분석해본「물랑루즈」(5) 의 이데올로기적 고찰2. ?트루먼 쇼?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1) ?트루먼 쇼?의 정신분석학적 분석(2) ‘JUNG의 이론’을 통해 본 ?트루먼 쇼?의 분석(3) ‘FREUD이론’을 통해 본 ?트루먼 쇼?(4) 융의 분석심리학을 적용해 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5) 융의 분석심리학 개념p1p1p3p5p5p6p11p12p12p14p15p191. ?물랑루즈?와 ?어둠 속의 댄서?(1) 미장센의 측면에서 바라본 두 영화의 차이점물랑루즈와 어둠 속의 댄서라는 두 영화는 동일하게 뮤지컬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표현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면에서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우선 배경 면에서 보면, 물랑루즈의 경우는 원색을 위주로 한 화려함으로 뮤지컬 영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영화 전반에 걸쳐서 붉은 색과 화려한 조명이 사용되며 쇼 장면에서는 배경화면을 넓게 잡아 많은 배우들을 보여줌으로써 경쾌함을 한층 높여준다. 영화 초반에 나오는 물랑루즈에서의 쇼 장면에서 잘 나타난다. 또한 특이할만한 점은 비현실적인 배경도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자주인공과 남자주인공이 코끼리방 위에서 만나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에서 두드러지는데, 파리의 전경이 마치 모형처럼 작아지고 에펠탑에 남자주인공이 메달린다든가, 달이 노래하는 장면은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반면 어둠속의 댄서는 우선 극도로 사실적인 배경이 어둠속의 댄서가 뮤지컬 영화임을 의심하게 만든다. 물랑루즈처럼 화려하다거나 경쾌하다는 표현은 감히 쓸 수 없을 정도로 어둡고 조용함으로 일관된다. 몇 차례 나오는 노래장면 역시 화려그의 이웃 빌과 그의 아내가 산다. 셀마의 집과 빌의 집은 큰 대조를 이룬다. 셀마의 집은 매우 작고 답답한 모양을 하고 있지만 빌의 집은 그에 비해 매우 훌륭하다. 이는 후에 이어지는 빌이 셀마의 돈을 훔치고 셀마가 빌을 살해하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두 가족의 상태를 비교해볼 수 있는 연출이다.④ 셀마의 일터에서의 노래와 춤셀마는 금속을 프레스에 넣어 가공하는 공장에서 일한다. 공장의 환경은 매우 좋지 않고, 눈이 잘 안 보이는 셀마에게 기계는 너무도 위험한 존재로 그려지다. 그 공장의 대부분은 여성 근로자이며, 모두 셀마와 다를 바 없는 형편에 있는 사람들이다. 영화의 초반 분주하고 정신없는 공장에서 셀마는 눈이 보이지 않으며 갑자기 환상을 느낀다. 마치 뮤지컬 나 를 연상시키는 리듬의 진행과 셀마의 노래를 보여준다. 이 부분에서 뮤지컬 영화의 진정한 연출력을 보여주게 되는데 공장의 기계들은 각각 반복적인 리듬을 가지고 소리를 낸다. 이러한 기계들의 소리를 감독은 잘 조합해 하나의 리듬루프를 만들어 내고 거기에 셀마의 노래를 곁들여 멋진 무대를 연출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공장 근로자들의 멋진 무용도 함께해 감동을 배가시키고 있다. (영화 시작 41분~)⑤ 실명한 셀마를 표현셀마는 눈이 점점 나빠지다가 결국에는 실명을 맞게 된다. 감독은 실명한 셀마를 표현함에 있어 대사 등의 장치로 단순히 “눈이 보이지 않는다”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항상 혼자이고 자신에 대해 내색을 하지 않는 셀마의 성격을 반영해 셀마의 실명을 다음과 같이 그려내고 있다. 일터에서 돌아온 셀마는 물 컵에 물을 따른다. 셀마의 손가락 하나는 물컵속에 들어가 있다. 셀마는 눈이 보이지 않으므로 물을 양을 그렇게 조정하려는 것이다. 이는 어찌보면 세세한 연출이지만 이렇게 주인공의 성격까지 반영한 연출은 충분히 감동을 줄 만 하다.그리고 금발의 친구와 함께 뮤지컬 영화를 보는 장면에서도 작지만 멋진 연출이 등장한다. 실명한 셀마는 영화를 볼 수 없기에 그의 친구는 셀마의 손바닥에 머니' 스타일의 최루성 멜로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이 영화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은 '가족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이라는 단순한 도덕적 우화'이다. 나 역시 이 영화가 가족중심적인 전제 위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가족은 사회에 의해 부서지는 가족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가족 단위와 사회와의 관계를 단단하게 엮어내지 못한, 지나치게 단순한 구조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가족지상주의를 주장하는 이데올로기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보고 싶지는 않다.셀마의 신체적 운명은 충분히 설정될 수 있는 것이며 오히려 셀마의 비극성은 그녀의 고백을 선의로 받아들이면서도 '돈 중심의 세상'에 사는 탓에 그녀의 돈을 강탈하는 빌의 비극성에 의해 정당성을 얻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들의 눈수술을 위한 그녀의 맹목적 집착은 신파적 설정과 닮았다. 하지만 영화 어디에도 나쁜 사람은 없다. 그녀는 가난할 뿐이고, 그녀를 해고한 사람도 부득이했으며, 그녀는 본의 아니게 빌을 죽이게 되고, 그녀를 사형에 처하는 사람들 또한 동정적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을 깊이 고려한다면 셀마의 운명은 억지로 꾸민 것이 아니며, 셀마뿐만 아니라 그녀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인식 또한 분명히 드러나 있는 것이다.마지막, 경계선 문제. 는 할리우드에서도 나올 수 있는 영화이긴 하지만 쉽사리 나올 그런 영화는 아니다. 결정적인 차이는 엔딩 부분이다. 할리우드 영화라면 엔딩은 비극적 결말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은 경험을 통한 추론일 뿐이며 할리우드 영화와 비할리우드 영화의 경계선이 불분명해지는 것 또한 현실이다. 출연자의 선정 또한 유럽 차원에서는 비스타로 구성된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뮤지컬 형식의 스펙터클의 등장 여부로만 그 경계선이 옅어졌다고 하는 것은 지엽적인 판단이라고 본다.②영화 외적인 면의 이데올로기무엇보다 는 90년대 세계 영화계에서 가장 큰 이슈 중 하나였던 ‘도그마 95?를 완전히 배신했다. 폰 트리에 자신이 주동했으며 "순수의 서약"이라고 자랑스럽게 뮤지컬)은 사실 셀마의 것이 아니다. 뮤지컬은 그녀에게 평범한 문화상품이 아니라, 현실을 못 보게 될수록 간절히 환상할 수밖에 없는, 살아보지 못했지만 진정 자기 것이어야 할 생의 한 경지인 것이다. 이는 뮤지컬의 포장된 행복에 안주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정말로 내면의 소리를 경청하는 과정이 무엇인지를 뮤지컬을 통해서도 보여준다는 점에서 셀마의 환상은 아름답다. "나는 그 모두를 보았네"라고 노래하는 장님 셀마의 그 소박함은 역설적으로 극한적 고통과 그 고통의 긍정이 수놓는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셀마는 뮤지컬의 한계를 오버하면서, 미국적인 것을 통해 미국적인 것 너머를, 인간 내면의 어둠을 밝히는 댄서가 된다.이 초월적 극단성으로 인해 셀마는 자신이 품은 아메리칸 드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죽인 아메리카에 끝내 원한을 품지 않는다(니체식으로 말해 그녀는 원한의 인간이 아닌 긍정의 인간이다). 어쩌면 셀마의 아들은 미국에 살아야 할, 미국이 살려야 할, 미국적인 것의 유년, 그 순수를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셀마는 아들이 눈이 멀게 될, 즉 미국이 대변한다고 자부하는 보편적 인권이 어둠에 잠길 위험을 막고자 자신을 던진다. 부조리한 제도를 수락하는 셀마의 자발적 죽음은 끝까지 뮤지컬의 환상 속에만 행복을 가두는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용서이자, 무고한 이민 노동자를 살인자로 몰아가는 미국의 죄에 대한 용서인 셈이다. 미국은 셀마의 죄를 처단함으로써 자신의 죄를 사함 받는다. (그러나 그렇게 용서받는 아메리칸 드림은 얼마나 씁쓸한가. 이 아이러니가 아메리칸 드림의 리얼리티다.)이런 점에서 어둠 속의 댄서는 체제와 반체제 혹은 체제의 변방이 빚어낸 상처들을 핥고 품어, 상처 자체로 영혼을 구원하는 초월성을 잘 보여준다. 감독은 노동자를 바라보는 지식인의 산물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기대지 않는다. 셀마를 십자가에 매다는 현대판 마녀재판은 노동의 소외나 장애에 의한 소외뿐 아니라, 그 모든 사회적 소외 이면의, 잃어버린 황금 심장을 조명하는 영혼의 소외를 되새기게 하는 것 수 있다.④ 원형우선 트루먼 쇼에서는 대표적 원형 중 페르조나(Persona), 그림자(Shadow)를 찾을 수 있다. 페르조나(Persona)는 사회적 요구에 대한 반응으로서 밖으로 내놓는 얼굴이라 할 수 있다. 즉 사회를 살아가는 가면이라고 쉽게 볼 수 있는데 트루먼의 가면은 외향성이라 볼 수 있다. 크리스토퍼가 창조한 낙원과 같은 세상에 살아가는 트루먼에게 아버지를 죽인 물을 제외한 대부분의 세상에 능동적으로 살아간다. 그것은 사회적 요구를 제작자 크리스토퍼의 의도라 할 수 있다. 트루먼의 생을 계속 방영하기 위해 트루먼이 살기 좋은 낙원을 만들어 두고 그런 환경을 통해 트루먼의 성격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림자(Shadow)를 알아보자. 그림자란 양면성을 지닌다. 즉 사회적으로 어둡고 부정적 측면, 반대로 창조적 긍정적 측면을 말한다. 트루먼 쇼에서도 이 그림자를 쉽게 찾을 수 있다. 트루먼은 탐험가가 되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신(크리스토퍼)에 의해 시헤이븐 섬에만 살아야 한다. 따라서 트루먼의 꿈은 사회적(이 영화에서 사회적이란 TV방영에 맞게 트루먼이 살아주는 것)으로 보았을 때 부정적 측면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사회적으로 보아 부정적인 측면인 트루먼의 꿈(세트를 벗어나 살아가는 촬영에 방해가 되는)을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소재로서 억제한다. 하지만 인간 트루먼의 입장으로 보았을 때에는 긍정적인 것이 된다. 탐험가란 꿈이 결국 자아정체성을 알아낼 수 있게끔 작용한 것이다.⑤ 정신에너지(libido)의 원리융은 전체적 성격을 정신이라 불렀으며 정신에너지인 리비도를 통해 지각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소망하는 심리적 활동이 수행된다고 보았다. 여기선 융이 제안했던 정신에너지가 기능하는 원리 중 대립원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⑥ 대립원리대립원리는 신체에너지 내에 반대되는 힘이 대립 혹은 양극성으로 존재하며 갈등을 야기하며 이러한 갈등이 정신에너지를 생성하는데 필요하다고 융은 말한다. 따라서 양극성의 갈등이 모든 행동의 에너지를 창조하며 갈등이 커.
동양철학에세이를 읽고서약간의 반성부터 시작하고 싶다. 연세대학교가 기독교학교라면, 동국대학교가 불교학교라면 우리학교는 내가 알고 있는 한 유일한 유교학교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으며 성균관을 되살린 유학자들의 노고 한 번 생각해 본 일 없다. 하지만 고등학교 윤리시간 이후로 생각하지도 않았던 유학을 이런 계기로 만나고 보니 유학이라는 것은 정말 쉽게 넘길 무언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무관심과 무지에 대해 반성을 하게 되었다.앞서 말한 기독교나 불교를 우리는 흔히 종교라고 부른다. 하지만 유교를 생각하면 우리의 몸에 너무 농익어서 인지 종교라는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종교라는 것의 개념은 능동적으로 찾아 믿고 따르는 것인데, 유교는 그렇게 따지기엔 너무 우리와 친숙한 존재가 아닌가 싶다. 우리는 먼 통일신라부터 함께 자라왔으니 그런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렇다면 학문으로서의 ‘유학’은 어떤가. 이 책을 접하기 전에 나의 유학에 대한 생각은 간단했다. 유학이란 그저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의 도덕이나 가치규범 따위를 다루는 학문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유학은 - 꼭 성리학, 주자학까지 파고들지 않더라도 - 우주 만물에 대한 이치를 담고 있으며, 그 이치를 바르게 풀고 연구하는 학문이었다. 겉보기로는 유학은 행위규범을 제시해 준다. 예를 들어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라는 맹자의 4단은 당시를 살고 있던 사람들로 하여금 4단을 마음속에 지니고 바른 행실을 하며 살아가길 바란다. 하지만 그 내부를 파고 들어가면 4단이란 본래 마음속에 들어 있는 것으로 원래의 인간은 선하며, 외부의 환경이 인간을 악으로 몰아간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사상과 우주를 읽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개인의 행위규범일 뿐만 아니라, 한 국가의 올바른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도 이용된다. 민중에게도 마음속에 선이 있으므로 그들도 존재로서 인정받았으며, 지배계층에게도 도덕적인 실천을 강조함으로써 바른 정치를 일궈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준다. 이렇게 하나의 사상이 다용도로 쓰여진다는 것은 그만큼 유학의 만물의 이치를 꿰뚫려하고, 만물을 이해하려는 정신이 위대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런 예는 맹자의 사상뿐 아니라 제자백가라고 말할 만큼 많은 사상가들에 의해서도 보여 진다. 이러한 제자백가의 사상들은 때론 서로 융화되기도 하고, 때로는 부딪히기도 하면서 계속해서 발전해왔다. 하지만 이 모든 사상의 공통점은 그 근본이 인간에 있다는 것이다. 신을 매우 중시하고 신을 위해 순결하는 타 종교나 사상과는 달리 유학의 근본은 인간이다. 관념이라는 것, 철학이라는 것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그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상의 주체는 결국에는 인간일 수밖에 없다. 인간이 만들어낸 사상에 인간이 아닌 다른 것이 주체라면 그것은 모순이 아닐까. 유학은 바로 그런 철학의 본질을 말하고 있다. 인간 중심의, 인간 본위의 사상의 대표가 바로 유학인 것이다. 하지만 개인주의나 이기주의 따위와 착각하거나 혼용해서는 안된다. 인간중심, 인간본위라는 개념은 ‘나’를 인정하고 ‘나’를 세상에 중심에 두는 것이지만, 나아닌 어떤 타인도 그 스스로 이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있으므로, 유학을 하고 유학 사상을 따르는 모든 이는 타인과의 조화와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데 노력하게 된다. 세계 보편적으로 고대, 중세 사회에서 흔히 자행되는 봉건주의나 폭군적 왕정은 이런 유학을 본받아야 마땅하다. 물론 제자백가 시대에도 법가사상과 같은 다소 융통성이 없어 보이는 사상도 존재하지만 이 또한 인간중심의 세계관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