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 VS 김춘추연개소문과 김춘추라는 인물은 학창시절 때 국사를 배우면서 익히 들어온 인물들이다. 연개소문은 당나라를 침입을 용감하게 물리치지만 성격이 불같고 왕까지 죽이는 등 독재자의 이미지로 배우고, 김춘추는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하며 김유신과 함께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는 인물로 배웠던 것 같다. 시험에 자세한 것까지는 나오지 않기에 깊이 있게 배우지 않았다. 나 또한 그저 많은 선조들 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뿐 그 사람에 대한 자세한 평가를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업을 통해 연개소문과 김춘추의 평가에 대한 여러 견해를 많이 알 수 있었다. 비록 조작미숙으로 인해 사이버 캠퍼스에 올라와 있는 동영상을 볼 수 없었지만 수업만을 통해서라도 연개소문과 김춘추에 대한 더 넓은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연개소문은 현대 시대의 박정희 대통령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오늘날 박정희에 대한 평가도 제각각이다. 새마을운동을 통해 먹고 살 수 있게 해주었지만 독재를 하며 민주주의의 후퇴를 가져왔다. 연개소문도 강인한 카리스마로 당나라의 침입을 잘 막아내며 나라의 영웅이지만, 귀족들을 물리치며 독재자로 통하고 있다. 이러함은 어쩌면 승자의 입장에서 쓰인 역사가 아닐까 싶다. 연개소문이 죽고 난 후 고구려는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였고, 그들은 연개소문을 깎아내리면서 고구려의 멸망을 당연시하게 역사의 조작이 이루어진 것은 아닐까 싶다. 물론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지는 않겠지만 일국의 영웅을 단순히 독재자로 만든 것이라 생각된다.김춘추는 기회주의자가 아닐까 싶다. 물론 신라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최상의 선택을 한 영웅 중의 영웅일 것이다. 김춘추의 외교적 능력에 의하여 백제의 지역까지 차지하고 당나라와 함께 고구려를 멸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로 인하여 그 이후의 역사는 한반도에 국한되게 되었다. 물론 고구려 멸망 후 발해가 건국되었지만 오늘날 우리가 북한과 교류가 거의 없는 것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게다가 당나라와 같은 강대국과의 동맹을 위해 당의 연호를 사용하는 등 자주성을 버린 것은 아닌가 싶다. 물론 큰 것을 얻기 위해 작은 것을 희생해야 하지만 그것이 진정 신라를 위한 길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는 오늘날 우리나라와 미국과의 FTA를 통해 강대국과의 관계를 알 수 있는데 정말 우리에게 이익이 없다면 과감히 물리쳐야 할 것이다.
남자 이야기目 次아 동 기 ( 兒 童 期 )31청 년 기 ( 靑 年 期 )32장 년 기 ( 壯 年 期 )33중 년 기 ( 中 年 期 )34노 년 기 ( 老 年 期 )35아 동 기 ( 兒 童 期 )甲 : 윗집 정씨 네 아들을 얻었다고 하더군. 乙 : 농장지경이 있어 바쁘겠구먼. 甲 : 농장지경이라니 무슨 말인가? 乙 : 이 사람 그것도 모르나. 아들 얻었다고. 甲 : 쉬운 말 놔두고 그리 어려운 말 하나? 乙 : 그래도 상식으로 알고 있게나.아 동 기 ( 兒 童 期 )아들을 낳은 경사 옛날 중국에서 아들을 낳으면 규옥으로 된 구슬의 덕을 본받으라는 의미, 무늬 구슬을 장난감으로 준 것에서 유래함 반의어 농와지경(弄瓦之慶) 딸을 낳은 경사반쪽 홀 장璋갈 지之경사 경慶희롱할 농弄청 년 기 ( 靑 年 期 )甲 : 아랫집 김씨 네 막내가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더군. 乙 : 집안 사정이 어려우니 더더욱 열심히 하겠지. 甲 : 애가 형창설안을 하니 정말 대단하지. 乙 : 이 사람 그런 말도 할 줄 아는가. 甲 : 자네 때문에 나도 공부 좀 하고 있네. 乙 : 허허허.청 년 기 ( 靑 年 期 )가난한 사람이 반딧불과 눈빛으로 글을 읽어가며 고생 속에서 공부함을 일컫는 말 차윤이 비단 주머니에 수십 마리의 반디를 잡아 넣고서 그 빛으로 밤을 새우며 글을 읽고, 손강이 눈빛으로 글을 읽었다는 데서 나온 말 유의어 수불석권(手不釋卷) :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공부함螢개똥벌레 형窓창 창雪눈 설案책상 안장 년 기 ( 壯 年 期 )甲 : 윗동네 박씨 네 춘부장께서 엊그제 생신인데 생일잔치를 했다고 하더군. 乙 : 풍수지탄 하지 말고 살아계실 적에 열심히 모셔야지. 甲 : 그러게나 말일세, 나도 부모님 살아계실 적에 잘 해드렸어야 했는데. 乙 : 나도 그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가슴 아프네.장 년 기 ( 壯 年 期 )부모가 살아계실 때 효도를 다하라. 나무는 조용히 있고 싶어도 바람이 멎지 않으니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 효도를 하려고 해도 부모가 살아계시지 않는다. (樹欲靜而風不止)나무 수樹갈 지之탄식할 탄嘆바람 풍風중 년 기 ( 中 年 期 )甲 : 윗집 이씨 네 큰 아들이 죽었다며. 乙 : 나도 들었네. 사람 구하다 죽었다던데. 甲 : 그 집안 사람들은 유방백세이구먼. 乙 : 그게 무슨 말인가. 甲 : 그 집안이 충무공 이순신 후손 아닌가. 乙 : 나도 그 얘기 들었네. 甲 : 선조께서는 나라를 구하고, 아들은 사람을 구하다 죽었으니 어찌 안 그렇겠나. 乙 : 듣고 보니 그렇네. 의인으로 기억되겠지.중 년 기 ( 中 年 期 )꽃다운 이름을 영원히 남김. 좋은 의미에서 유명함 유의어 유명청사(遺名靑史) :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김 반의어 유취만년(遺臭萬年) : 좋지 않은 냄새를 영원히 남긴 것과 같이 악명을 떨침流흐를 류芳꽃다울 방百일백 백世대 세노 년 기 ( 老 年 期 )甲 : 우리도 이제 인생의 끝을 달리네. 乙 : 그러게. 혈기왕성한 때도 있었지. 甲 : 남가일몽이라고 했던가. 乙 : 그러게 말일세. 甲 : 이제 모든 것이 다 부질없구먼. 乙 : 이 사람 왜 약한 소리는 하는가. 甲 : 매일 아침마다 눈을 뜨면 젊었던 그 때로 되돌아 갔으면 한다네. 乙 : 나도 그렇게 아침에 눈을 뜨네. 죽을 때가 다 되었다는 것인지. 참으로 인생이란 것이 허무하네.노 년 기 ( 老 年 期 )한 때의 부귀영화나 권세가 꿈과 같이 헛됨.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 유의어 일장춘몽(一場春夢) 한바탕의 봄꿈, 덧없는 부귀영화 한단지몽(邯鄲之夢) 인생의 덧없음가지 가柯한 일一꿈 몽夢남녘 남南남자 이야기를 마치며…남자로 태어나면, 어려서는 농장지경(弄璋之慶)으로 사랑을 받고, 청년이 되면 형창설안(螢窓雪案)일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고, 장성해서는 풍수지탄(風樹之嘆)하지 않도록 부모님께 효도하고, 유방백세(流芳百世) 할 수 있도록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남가일몽(南柯一夢)을 느끼며 마지막을 준비하겠지.{nameOfApplication=Show}
누구나 어렸을 때 학교에서 존경하는 인물에 대하여 말해보거나 글로 써보라고 한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세종대왕이나 장영실, 이황, 이이 등을 뽑는다. 그리고 항상 빠지지 않는 사람 중의 하나로 이순신 장군을 뽑았다. 나 역시 누가 나에게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언제나 이순신 장군이었다. 그리고 대학생이 된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이 빌 게이츠, 링컨, 뉴턴 등을 뽑지만 난 아직도 존경하는 인물로 이순신 장군을 뽑게 된다. 내가 이순신장군에 대한 엄청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지는 않지만 어렸을 때부터 귀에 박히도록 이순신 장군을 들으니 자연스레 지금까지도 존경하는 인물로 이순신 장군을 뽑게 된다. 부모님의 고향이 경남 통영이라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명절이면 어김없이 그 곳을 간다. 게다가 외갓집은 이순신 장군을 모시는 사당들 중의 하나인 충렬사 근처이기에 더더욱 그 분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남자 아이들이 그러하듯이 싸워서 이기는 것에 대한 관심이 많다. 누가 누구랑 싸운다고 하면 어김없이 싸움구경을 가고, 역사공부를 하더라도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많이 배우고 알게 된다. 그러한 가운데 누구나 한번쯤은 이순신 장군의 임진왜란 당시의 전쟁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장군에 대한 막연한 꿈을 갖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군대를 다녀오면서 정말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에서 그러한 위인이 나옴을 알 수 있게 된다. 아무튼 이러한 이유들로 인하여 아직까지도 나는 그 분을 가장 존경하고 좋아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에 책을 고를 때도 구국의 영웅인 이순신 장군에 대한 내용이 있는 인간 이순신 평전을 고르게 되었다.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분의 인간적인 면은 어떠할지에 대한 내용이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이다.“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1번대 18,700명이 전선 7백여 척을 필두로 부산항 침략을 시작으로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친 신립 장군을 치고 5월 3일 서울에 무혈 입성했다. 부산에 발을 들여 놓은 지 20일 만이었다.”) 이 정도로 조선은 평화로운 생활 속에서 전쟁에 대한 아무런 준비도 없었기에 별로 대항하지도 못하고 일본의 침략을 허용하였다. 이순신은 경상우수사인 원균의 연합작전요청으로 경상도에서 첫 대결인 옥포해전을 펼쳐 멋지게 승리하였다. 하지만 원균과 이순신은 이때에 올린 장계로 인하여 불화가 싹트기 시작하고 뒷날 이순신 파직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이순신을 영웅으로 추앙받으면서 반대로 원균은 역으로 그 공적을 낮추기도 한다. 어느 한 사람에 대한 평가가 모두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버지니아 공대 총기사건을 일으킨 조승희 씨에 대한 이야기도 미친 악으로 표현되면서도 그의 희생에 대해 애도를 표현하기도 한다. 현 시점에 있는 사람도 이런데 당시 사람들이라고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지 한 사람을 높이기 위해 다른 한 사람이 희생된 경우의 대표적인 예로 뽑히기도 한다. 하지만 “접전하는 곳마다 화살이나 탄환에 맞은 왜인들을 찾아내 머리 베는 것을 맡아 했습니다.”)라는 이순신의 원균에 대해 쓴 장계는 둘의 관계가 상반관계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한산도 해전의 승리로 조선과 일본의 입장은 뒤바뀌게 되었다. 또한 명군의 구원병으로 인하여 조선은 다시금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내륙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관군과 합세하여 적과 대항하였고, 이순신을 비롯한 조선의 수군은 일본군의 후방을 공략하였다. “적시에는 적이 분명하지만, 평화 시에는 보다 음험한 적과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내부의 취약성이다.”)라는 말처럼 이순신은 훌륭한 전공을 세웠지만, 대소신료들의 정치싸움에 의해 파직당하고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누구나 어디에서건 너무 잘하면 이런 화를 당하는 것일까. 이순신은 그저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것뿐인데, 다른 사람들의 입에 올라 시기를 받아 화를 당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백의종군해서도 나라를 위한 걱정으로 복귀할 때까지 열심히 했다고 한다. 비록 아직 전시이기는 하였지만, 장군으로 있던 자가 사병으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 동안 자신이 생활하던 것보다 훨씬 처참한 생활을 했음에도 또한 같이 지내는 사람들도 장군이었던 자가 왔다고 하니 얼마나 업신여겼을 것인가. 게다가 어머니의 부고까지 들었지만 시묘살이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불효한 그 심정을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불효한다고 하면 세간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는데, 당시 유교를 신봉하는 조선시대에는 효와 충이 가장 큰 인간의 도리인데, 자식으로서 효를 다하지 못했으니 그 상실감 또한 더 크지 않았을까 싶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에게 빛이 있었으니 원균의 패함이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명량해전의 승리로 일본군의 서해안 진격 구상은 좌절되었고, 조선 수군은 칠천량해전 후 잃었던 남해안 제해권을 다시 장악하게 되었다.”) 하지만 곧 “아들 면의 죽음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어야 했다.”) 아버지가 된 자로서 아들을 먼저 보내야 함을 그를 더더욱 힘들게 되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모든 것을 다 걸어 일본군과의 전쟁에 더 혈안을 두어 마지막까지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최선을 다한다고 하겠지만,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이 없어진 때만큼 모든 것을 다 한 가지의 일에 몰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기회를 준 선조에 대한 충성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끔 한다. 아무튼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지금 한창 싸움이 급하니 조심하라.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숨을 거두었다. 이렇게 이순신은 죽는 그 순간까지 조선 수군의 승리를 기원했으며, 조선의 안위를 걱정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마지막은 살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을 친다고 하는데 이순신은 살려고 몸부림치지 않고 그렇게 명언을 남겼기 때문에 우리 가슴에 더 오래 남는 것이 아닐까.
‘중국의 시험지옥 - 과거’를 읽고교수님께서 선정해 주신 11종류의 책 중에서 가장 눈에 띄고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 하나 있었다. 바로 ‘중국의 시험지옥 - 과거’라는 책이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 생활 속에서 시험의 위력은 상당히 크게 작용한다. 얼마 전에 있었던 수능 때도 전국이 난리법석이었다. 외국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 중의 하나라고 하는데, 우리는 매년 11월에 치르고 있다. 시험장은 고뇌하는 학생들이 가득하고 시험장 밖에서는 어머니들께서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드리는 풍경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또한 그 전에 있었던 서울 공무원 공채 시험에서는 전국에서 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로 올라오는 응시자들에 의하여 KTX 열차의 좌석이 만원이 되어 차량이 모자라기까지 하였다는 내용의 방송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전국 4학년 대학생뿐만 아니라 모든 취업 준비생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조금 더 좋은 기업에 취업하기 위하여 각 기업에서 치르는 시험에 대비하여 공부를 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나라는 시험에 대해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고 시험을 치르기 위하여 준비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내가 알기로는 지금의 이런 시험의 모태는 조선시대에 치러졌던 과거제도이다. 과거제도는 고려시대 광종 때 중국으로부터 들어왔는데, 과거가 처음 시작한 중국의 실정은 어떠할까. 우리와 같이 시험에 대한 압박감 등에 의하여 세상을 버리는 사람들도 간혹 있었겠지. 그러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하여 나는 이 책을 쉽게 선택하고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의 저자인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일본의 입학시험 지옥을 직접 겪어보지는 못하였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 대학 진학 경쟁이 치열해짐을 듣고 중국에서 있었던 과거제도의 재출현인가 하고 생각하며 중국의 과거제도에 대하여 하나의 제대로 된 종합된 책이 없음을 느끼고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 책이 현재 우리나라의 시험지옥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당시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중국의 정치사상에 의하면 천자는 하늘에서 위임을 받아 천하의 백성을 통치해야 하는 의무를 지고 있다고 한다. 한 사람이 여러 명을 통치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집에서는 가장인 아버지가 집안을 이끌어 나간다. 그리고 집안의 아버지는 마을의 가장 어르신이 마을을 대표하고, 마을과 마을 사이는 그 지방의 관료가 지방의 관료는 다시 고위관료, 고위관료는 천자의 통치를 받게 된다. 이렇게 백성과 천자 사이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사이에서 통치를 하고 통치를 받아간다. 이 중간의 사람들을 아무나 받아들여서는 백성과 천자 사이의 의견을 조율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수많은 백성 가운데 관리의 자질을 갖은 현명한 사람을 등용해야 되는데 그 수단으로서 당시에 과거 제도가 생겨나게 되었다. 더욱이 과거제도가 성립된 시점이 지금으로부터 약 1400년 전인 587년 수 문제 때라고 한다. 그 당시 유럽은 게르만 민족의 이동으로 인하여 대혼란이 겨우 수습될 무렵이었다고 하니 중국의 과거제도가 실로 타문화에 비하여 진보한 부분 중의 하나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과거제도는 우리가 종래에 알고 있던 단순한 유교 이념으로부터 파생된 것이 아니라 실제 중국의 정치의 필요에 의하여 생겨났다. 당시 중국은 귀족의 세력이 무척이나 강하여 중앙의 지방에 대한 영향력이 미비하였다고 한다. 아무래도 토착세력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니까. 우리나라에서 과거제도를 받아들였던 고려 광종 때도 이와 비슷하여 정치적인 이유로 과거제도를 들인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고려 광종은 고려의 네 번째 왕으로서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중앙정권을 형성하였지만 통일의 과정에서 귀족의 힘을 빌렸기에 귀족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태조가 죽은 후에 수많은 반란이 일어났고,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을 때에 광종이 중앙집권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하여 과거제도를 들인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아무튼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과거제도의 시초는 비슷한 정치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과거제도의 목표는 천자가 귀족 세력에 맞서 창안된 것으로서 송나라 시대가 되면 강력한 귀족의 시대는 없어지고 과거제도의 전성시대에 들어서게 된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역사시간에 배웠던 문치주의 정치가 실현된다. 하지만 이 무렵 왕안석은 과거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시험이 아닌 관리 양성을 위한 학교 제도를 들고 나오게 된다. 그 이후 명나라 시대에는 과거제와 학교를 병용하게 된다. 전국에 학교를 세워 교육을 시킨 후, 교육을 받은 이들을 대상으로 과거 시험을 치러 인재를 등용하게 된 것이다. 이는 지금의 우리와는 다른 것 같다. 현재 공무원 시험은 일정하게 학교를 나와서 시험을 치르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지만 학교를 다니는 것에 상응하는 지식이 필요하기는 할 것이다. 오히려 시험에 합격한 후에 연수를 받게 되어 있으니 당시와는 반대가 아닐까 한다.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응시 자격이 있었는데, 조상 3대 사이의 직업이 사창업이나 기생집을 경영한 종사자가 없음에 대한 보증인을 세워야 했다. 하지만 조상이 관리라 해서 다른 특전은 없어 모든 이에게 평등하게 기회를 부여하였다. 이는 우리나라의 과거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 들어왔을 때는 그렇지는 않았지만 조선 시대에는 신분의 차이가 심해 양반이 아닌 자들은 잡과를 치를 수 있었고, 천민들은 응시조차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양반의 자제에 대해서는 상당한 가산점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당시 계급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부분이 어쩌면 당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에 비하여 중국은 워낙 땅이 넓고 인구가 많기에 많은 인재에 대하여 형평성을 맞춘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비용이 많이 들기에 가난한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무리가 따른다. 그러기에 오늘날과 비슷한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생기게 된다. 어쨌든 시험에 합격하게 되면 같은 시기에 합격한 이들끼리는 동생이라 하여 나이의 적고 많음과 관계없이 동료가 되는 것이다. 군대에서의 동기나 대학교에서의 학번과 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다음 시험을 치르는 중에 부정행위가 있는 경우에 동생이 함께 처벌되니 군대나 학교에서 동기가 잘못한 경우에 함께 혼나는 것과 같은 맥락이 될 수 있을 것이다.시험장을 공원이라 하는데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벌집 같은 독방이 수천 개 모여 있는 형태라고 한다. 이곳에서 2박 3일을 지내며 소지품 검사도 하고, 이틀 간 답안지를 작성하기에 밤을 새며 답안을 작성하기도 한다. 좁은 방에서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하며 답안과 싸워야하니 사람이 미치기 일보 직전이 아닐까 싶다. 어떤 기업에서는 면접을 보기 위해 이틀간 합숙을 한다고 하는데 이는 중국의 과거시험에 비해서는 비할 바가 못 되지 않을까. 그런데 이러한 부분에서 많은 흥미로운 일들이 벌어진다. 바로 귀신들이 도와주기도 하면서 품행이 방정맞았던 이들에게는 보복을 하기 때문이다. 공원은 정부의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서 세간에서 염라대왕이 관할하는 곳이라고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까. 대부분이 고향에서 홀로 올라와 각자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며 생활하기에 떠도는 소문도 무척이나 많았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리고 이런 부분에서 권선징악이 나타나게 되는 것은 아닐지. 단순히 떠도는 소문이라도 권선징악과 같은 교훈의 이야기가 있어야 수많은 백성들의 주목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닐까. 어차피 과거에 합격한 대부분의 합격자들이 지방으로 파견되어 그 곳 주민들의 명망을 받는 관리가 되기에 그런 이야기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늘날까지 남게 된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된다. 또한 시험장 주변의 주막집들은 대부분 그 곳에서 몇 십 년 넘게 장사하였기에 소문의 진원지가 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고시촌을 형성하고 있는 노량진이나 신림동에서도 어떠한 고시생들이 어떻게 공부해서 붙었는지의 소문이 난무하니 그 때 당시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을까라고 생각된다.
취업 페스티벌 행사 참여 소감문아직 3학년이라 취업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막연한 생각만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처음에 이 과목을 수강하였을 때에도 너무 앞서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오늘 참여하게 된 취업 페스티벌 행사에서 난 너무나도 준비되지 않은 사람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1학년들의 참여가 생각보다 무척이나 많았다. 내가 신입생이었을 때에는 취업에 대해서는 먼 훗날의 일처럼 생각하고 놀기에 바빴는데.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가는 길이 취업이기에 어쩌면 당연히 참여해야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많은 사람들이 행사에 참여하고 있었다.첫 시간은 자기 소개서 작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국어 작문 시간에 의례 쓰는 것이 자기 소개서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대부분 자신의 일대기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히 쓰는 것이지만, 우리가 써야하는 자기 소개서는 내 자신이 상품이 되어 기업에 효과적으로 정보를 전달하여 팔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재고로 창고 안에 들어가 있는 신세가 될 테니까. 어쨌든 개인적으로 글 쓰는 솜씨가 빼어나지 않아 조금은 걱정이기만 하다. 못해도 보통 사람들이 쓰는 정도의 글을 써야 하니까. 그래도 지난 수업 시간에도 자기 소개서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이번에도 들으니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아직까지 이렇다 할 자기 소개서를 작성하지 못함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경험이야 많을수록 실전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인데. 단순히 내년에 할 일이라 하고 뒤로 미루고 있으니 나중에 뒤처질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들을 때마다 강사님들이 강조하는 사진.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인상으로 모든 것이 정해진다고 한다. 나 역시 첫인상으로 그 사람을 끝까지 보는 경향이 있다. 선입견이라는 것을 쉽게 바꿀 수 없는 일이니까. 아무튼 면접관들에게 처음으로 보이는 얼굴이 이력서의 사진이다. 그러기에 돈 조금 아끼는 것보다는 멋지고 인상 좋게 나오는 사진이 필수임을 강의를 들으면서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이력서에는 본인의 활동 사항이 중요한데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닌데 이렇다 할 외부 활동이 없음이 너무 큰 실수를 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내가 취업에 대한 준비를 너무나도 안 한 것만 같아, 강의를 들으면 들을수록 자괴감에 빠지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두 번째 시간은 모의면접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앞자리에 앉았기에 면접관들과 면접자들의 얼굴을 어느 정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면접자들의 긴장한 모습과 면접관들의 약간은 어이없어 하는 표정들을 읽을 수 있었다. 면접관들은 수없이 많은 면접 자리에서 이러한 모습을 봤을 테지만, 면접자들은 대부분 처음 갖는 자리일 것이다. 개인 면접을 하는 사람들은 혼자서 면접관들을 대하기에 준비를 어느 정도 해온 것 같은 느낌이 많이 들었다. 그에 비해 단체 면접자들은 다른 이들이 볼 때 생각할 여유를 가질 수 있다고 느꼈는지 조금은 준비가 덜 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어쨌든 면접을 잘 했던지 못 했던지 간에 그들은 미리 모의고사를 쳤기에 앞으로 있을 면접에 대해 큰 도움을 받을 것이다. 또한 그것을 바라본 우리들 역시 작게나마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나 신문에서 쉽게 읽고 지나갔던 내용들에 대해 물었을 때, 이렇다 할 자세한 설명을 할 수 없는 나를 발견하고, 작은 것이라도 제대로 기억하고 그것을 다른 이에게 설명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까지 올려야 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단순히 토익 점수만 높이려고 할 것이 아니라 영어 면접에 대한 준비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었다. 대부분 토익 점수가 높은 것에 비하여 영어 면접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며 어쩌면 내년에는 영어 면접이 취업 성공의 당락을 결정지을 것 같은 기분이다. 아직 토익도 제대로 못하는 지금 영어 면접까지 준비해야 함이 버겁기는 하지만 취업이라는 관문을 통과하기에 준비의 소홀함이란 용서할 수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