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내가 진짜 시간만 있다면...”,“요즘 시간이 너무 없어.”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가장 바쁠 사람 중에, 자기의 본래의 일을 완전히 완수한 위에 또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남은 위해 일하거나 자기의 여가를 즐기고 있는 사람을 보는 적이 있다.이 비밀은 어디에 있을까? 그들에게 시간이 더 많이 주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1일의 시간은 일정해 있어 마음대로 늘일 수 없는 것이다. 즉, 시간처럼 우리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것도 없다.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권력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모두 하루 24시간을 똑같이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에 대한 의미는 사람마다 각자의 환경과 목표를 따라 천차만별로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같은 3분간이라도 링 위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싸우는 권투선수의 3분과 호숫가에서 유유히 낚시를 하는 낚시꾼의 3분은 다른 것이다. 그리고 또 같은 기차를 타고 부산을 가더라도 기차를 운전하는 기관사의 시간 감각과 객차 기차를 타고 가는 여행객의 시간 감각은 크게 다른 것이다.우리는 시간에 대한 의미를 어디에 두고,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성공하기도 실패하기도 한다. 그런데, 시간이라는 것은 지체없이 지나가 버린다.아무도 시간을 커다란 탱크 속에 저장해 둘 수는 없다. 그것은 찾아내고 긁어모아, 1초라도 그것을 아끼어 모을 필요가 있다. 크게 시간을 절약해서 하려던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 대신 단 20분 혹은 10분이라는 작은 시간의 절약에 주의를 집중하여야 한다.미국 성공 운동의 개척자인 레챠펜 박사는 그의 저서 「Time Shifting」에서 우리는 하루 24시간을 25시간으로 늘릴 수는 없지만 시간을 창조하여 쓸 수는 있다고 밝혔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의 순간순간에 몰두하고 골몰해야 한다고 하였다. 공연히 지난 과거와 아직 돌아오지도 않은 미래에 얽매여 현재를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것은 시간의 낭비라고 하였다.시간 창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리듬을 알고, 주변 사람의 리듬과 사회의 리듬을 알고, 우주의 리듬을 파악한 후 이들에게 자신의 리듬을 맞추고 조화해 나가는 것이라고 하였다.그 밖에도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말들을 찾아보면 아래와 같은 많은 격언들을 발견할 수 있다.*인생 90년에 70만시간을 소모하는데 그 중에 (1) 생리적 시간을 27만 시간, (2) 일은 4만시간(1일 6시간. 주5일. 년40주. 35년), 그리고 (3) 여가시간을 39만시간으로 쓴다고 한다. 현대인에게 주어지는 주체못할 이 여가시간을 어떻게 쓰는가는 원시시대에 원시인들의 천재재앙보다 더 가공스런 것이 이 바로 여가선용의 여부다.*인생을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시간을 남용하지 말라. 왜냐하면 인생이란 시간으로 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벤자민 프랭클린)*`시간은 돈이다'라는 속담을 흔히 사용한다. 시간은 돈보다 훨씬 더 값진 것이다. --시간은 인생이다.(이스라엘 데이비드슨)*만일 우리가 인생을 즐기기를 원한다면, 내일이나 다음 해, 혹은 죽은 후의 어느 때가 아니라 지금이 바로 그때다. 다음 해의 더 좋은 인생을 맞이하기 위한 최선의 준비는 이 해에 완벽한, 조화있는, 즐거운 인생을 이어가는 것이다. 현재 풍성한 인생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은 미래에도 풍성한 인생을 즐길 수 없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을 가장 경이로운 날로 만들어야 한다.(토마스 드라이어)*평범한 사람들은 그들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그러나 비범한 사람들은 그들의 시간을 사용하려고 노력한다.(쇼펜하우어)*한때 브루클린에 있던 수백명의 숙녀들은 나의 강의를 듣고 싶어했다. 그들은 시간이 없어서 시인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여자들이었다. 그들에게 강의를 하러갔을 때, 그들은 나를 향해서 물었다. "어떻게 시간을 활용하여 시인이 되셨습니까?" 나는 그들에게 비밀을 지키겠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도둑처럼 시간을 좀 훔쳤습니다. 용감한 사람처럼 나는 시간을 좀 휘어잡았습니다.그리고 나는 식사 시간도 좀 줄여가며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라고.(로버트 프로스트)*우리에게 있어서 시간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윌리암 펜)*우리의 하루는 옷가방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크기가 똑같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다른 이들 보다 그들의 옷가방 속에다 더 많이 옷을 집어넣을 수 있다.(엔델)*새벽은 당신 인생의 시작이요, 석양은 당신 인생의 끝인 것처럼 살아라. 그러면 당신은 당신에게 생기는 새 힘과 새 지식은 남들에 대한 당신의 선행에 근거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존 러스킨)*지나간 시간, 그것은 다시 얻을 수 없다. 지금이라는 시간, 그것을 잘 사용하라. 미래는 제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지금이라는 시간만이 당신을 위한 것이다!(고대의 해시계 위에 새겨진 말)*분실공고 : 일출과 일몰 사이에, 두 시간을 잃었다. 그것은 각기 분이라 불리는 60개의 다이아몬드로 구성된 것이다. 그것에 대한 현상금은 제시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히 잃은 것이기 때문이다. (호레이스 만)*이런 사람 행복하다. 오직 이런 사람만 행복하다. 오늘이 자기의 것이라고 외치는 사람말이다. 자신만만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말이다. "내일, 나는 그것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오늘을 신나게 살았기 때문이다."(호레이스)*인생이란 나이가 아니라 행동이며, 호흡이 아니라 생각이요, 존재가 아니라 느낌이다. 우리는 심장의 맥박으로 시간을 헤아려야 한다.(필립 제임스 베일리)*우리에게 날마다 주어지는 시간은 기적이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면 확인해 보라! 당신의 지갑 속에는 아직까지 누구도 사용하지 아니한 24시간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것은 당신의 가장 귀중한 당신의 재산이다.(아놀드 베네트)*우리에게 생기는 모든 모순은 우리가 오늘을 내일에 대한 다리요, 영원에 대한 도약대임을 모르기 때문에 생긴다.(프란조 로젠즈버그)*어떤 가치있는 행동을 하지 아니한 날, 그 날은 잃은 날이다.(자콥 보바트)*내일의 모든 꽃은 오늘의 씨앗에 근거한 것이다.(중국 속담)또 러시아의 세계적인 대문호 톨스토이는 노년에 쓴 「세 가지 의문」이란 저서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어느 때이며,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이며, 또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가장 중요한 때는 현재이며, 가장 중요한 사람은 내가 지금 대하고 있는 사람이며, 또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대하고 있는 사람에게 선을 베푸는 일이라고 말하였다. 이처럼 인간의 흐름 가운데 가장 중요한 때는 과거도 아니요, 미래도 아니요, 바로 현재의 순간인 것이다. 이 순간이 새로운 기회이면 위대한 창조의 순간으로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훈민정음 창제 과정과 음이론0. 훈민정음창제 과정0) 창제의 주체흔히 한글은 세종의 명을 받은 집현전 학자들이 창제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세종이 직접 만들었다는 주장도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이것을 '세종친제설'이라고 한다. 사실 당시의 기록인 "세종실록","훈민정음 해례본"의 '정인지 서문'에 보면 한결같이 세종이 친히 한글을 만들었다고 나와 있다. 당시에는 신하가 한일도 왕의 업적으로 돌리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이렇게 기록했을 거라고 반론도 가능하다. 어쨋든 기록에 세종의 한글 창제를 도운 것으로 나오는 사람은 성삼문, 신숙주 같은 집현전 학자들이 아니라 세종의 아들은 문종과 세조 정도였다. 세종은 한글과 관련하여 공개적으로 추진한 '운회'번역사업에 집현전의 하급 관리들을 동원했는데 이때 세자와 수양대군, 안평대군에게 이 일을 감독하도록 했다.1) 창제의 시기‘세종실록’에 의하면, 그 창제는 세종 25년(1443년) 계해 12월이요, 그 반포는 그보다 3년 뒤인 28년(1446년) 병인 9월이다. 하지만 `훈민정음'의 창제와 반포의 때를 적되 구체적인 날짜는 밝히지 아니하고 있다. 그 창제의 날은 꼭 적기 어렵다 하더라도, 그 반포의 날은 분명한 것이었을 텐데, 이를 밝혀 적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아직도 쓸모없는 논쟁들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연구에 따르면 그 해의 9월이 작은 달이었으므로, 위에 적은 `훈민정음' 반포의 기사는 음 9월 29일로 미루어 볼 수 있다. 그래서 조선어 연구회(1908년 창립, 1931년에 조선어 학회로, 1949년에 다시 한글 학회로 개칭함)에서는 음 9월 29일(양력 10월 29일)로써, `훈민정음' 반포 기념일, 곧 한글날(처음에는 `가갸날')로 정하고 이를 해마다 기념하게 되었는데, 이는 한글 반포 제8주갑인 병인년(1926)에의 일이다.그러다가 1940년에 발견된 `훈민정음' 원본의 정인지 해례 서문 끝에 "정통 십일년(1446년) 상한, 자헌대부 예조판서 집현전 대제학 지춘추관사 세자 우빈객 신 정인지 절하며 머리를 조아려 삼가 씀“이란 말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정통 11년은 세종 28년 병인에 해당하고, `상한'은 곧 `상순'이므로, 늦어도 10일에는 반포된 것으로 생각되므로 9월 10일로써 그 반포일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를 양력으로 환산하면, 10월 9일이 되니, 1940년에 조선어 학회(한글 학회)에서 한글날을 10월 9일로 고쳐 정하였다.2) 창제의 과정조선의 넷째 임금인 세종(1397-1450)은 워낙 슬기롭고 능한 임금이라, 나라 안팎을 지키고 백성을 위하는 일을 많이 하면서, 무엇보다도 교육에 각별한 정성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종 임금은 즉위한 뒤 4년(1422)부터 책을 출판하는 데에 기초가 되는 활자의 글씨체 개량을 직접 지휘할 만큼 글에 대한 관심과 재능이 많은 분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정성과 뛰어난 자질은 세종 25년(1443) 음력 12월에 몸소 훈민정음 곧 한글을 만들어냄으로써 유감 없이 빛을 발하였다. 세종 임금은 왕립 연구소라 할 집현전에 모아 기른 인재들 가운데 일부인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강희안, 이개, 이선로, 성삼문 등을 궁중의 언문청 또는 정음청에 따로 모아 보좌를 받으면서 한글 만들기를 주도했다. 그때 집현전의 신하인 최만리가 대표가 되어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송처검, 조근 들과 함께 다음과 같은 줄거리로 새 글자 만들기를 반대하는 상소(1444)를 했지만 세종 임금은 이에 대해서 세세히 답변하지는 않고, 설총이 백성의 글자 생활을 돕기 위해 이두를 만든 것과 마찬가지로 한글도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을 탐해서가 아니라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만드는 중대한 나랏일임을 밝혔다. 세종 임금은 당신 나름으로 신중하게 다듬기를 계속하고 신하들과 함께 몇 가지 문헌을 한글로 만드는 실용의 시험을 거쳐 세 해가 지나서야 [훈민정음(1446)]을 반포했다.3) 창제의 동기와 목적훈민정음의 문화적 창조의 동기와 목적에 관하여는 '훈민정음'에서 세종대왕이 몸소 언급하고 있다.『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잘 통하지 아니한다.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것을 가엽게 생각하여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쉬이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훈민정음 서문 풀이-(0) 우리나라에는 독특한 배달말이 있으니, 이 말을 적어 내기에 알맞은 글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에 알려진 모든 다른 나라가 각각 제 나라 말에 알맞은 글자가 있는데, 우리나라만은 글자가 없어, 남의 나라의 글자, 한문을 빌려 쓰니, 이는 안타까운 일이다.(1) 남의 글자 한문은 우리말과 서로 통하지 않는 글자일 뿐더러, 본디 어렵기 짝이 없는 글자이기 때문에, 우리 겨레에게는 이중으로 어려워, 백성들이 다 배워 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세종대왕은 하늘이 내린 성인이로되, 한학에 정통하는 데는 많은 노력과 세월을 허비하였을 것이니, 시간과 경제의 여유가 없는 일반 대중이야 얼마나 그것이 어려운 일인가 함을 아프게 느낀 것으로 보인다.(2) 일반 서민이 글자를 깨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그 뜻을 펴지 못한다 함이다. 곧 아랫사람의 뜻이 위에 사무치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에게 억울한 일이 많아 정치가 명랑하지 못하니, 어진 정치의 이상에 위반함이라고 생각함이다. 정인지의 발문에서도 이를 "죄를 다스리는 이는 그 곡절의 통하기 어려움을 괴로워하고 있다........ 이로서 송사를 들으면 그 속사정을 알 수 있다“이라고 하였다.(3) 이 새 글은 상하 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쉽게 익혀서 일상생활에 편리하게 쓰도록 하고자 하는 것이라 하였다. 곧 민중 문화의 보급과 생활의 향상을 꾀함에 그 목적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4) 창제의 원리훈민정음 제자 원리는 훈민정음해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무엇보다도 해례본의 제자해에서는 한글의 각 글자들을 어떠한 원리에 근거하여 제자하였는가 하는 이른바 제자원리를 밝히고 있는데, 여기에 의하면 그 첫 원리는 상형의 원리다. 어떤 모양을 본떴다는 것인데 자음(초성)은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떴음을 나타내고 있다. 즉 ‘ㅁ, ㅅ, ㅇ’은 각각 그 글자를 발음할 때 관여하는 발음기관인 입의 네모진 모양, 이의 뾰족한 모양, 목구멍의 둥근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고, ‘ㄱ’과 ‘ㄴ’은 이들 글자를 소리낼 때의 혀의 모양, 다시 말하면 ‘ㄱ’은 설근이 목구멍을 막는 모양, ‘ㄴ’은 혀가 윗잇몸에 닿는 모양을 본떴다고 하였다. 가획의 원리다. 자음 글자에서 상형의 원리에 의거하여 만든 것은 앞의 다섯 자뿐이며 나머지는 이것을 기본자로 하여 획을 하나씩 더해 가는 방식을 취하였다.ㄱ → ㅋ ㄴ → ㄷ → ㅌ(ㄷ → ㄹ) ㅁ → ㅂ → ㅍㅅ → ㅈ → ㅊ(ㅅ → ㅿ) ㅇ → ㆆ → ㅎ(ㅇ → ㆁ)이처럼 획을 더하여 글자를 만든 근거는 획이 더 있는 글자들의 소리가 더 거센 소리들이라는 점이라고 하였다. 다만 ‘ㄹ’과 ‘ㅿ’은 그러한 근거 없이 획을 더한 예외적인 글자라고 하였다. 그리고 ‘ㆁ’은 아음인데도 ‘ㄱ’과 관련시켜 글자를 만들지 않고 후음인 ‘ㅇ’에 꼭지를 달아 만들어 또 하나의 예외적인 글자가 되었는데 이는 ‘ㅇ’과 ‘ㆁ’이 음성적으로 유사한 데에 근거한 것이라 하였다.한편 모음 글자들의 창제 원리는 자음자와 마찬가지로 기본 세 자를 상형의 원리로 정하였다. ‘ㆍ’는 하늘의 둥근 모양, ‘ㅡ’는 땅의 평평한 모양, ‘ㅣ’는 사람의 서 있는 모양을 본떠서 만든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상형의 원리라는 점에서는 같되 자음 글자에서처럼 발음기관을 본뜬 것이 아니라 천지인 삼재의 모양을 본뜬 것이 특이하다. 그리고 나머지 글자는 ‘ㆍ’와 나머지 글자를 결합시켜 만들었다. ‘ㆍ’이 하나있는 모음을 단모음 두 개 있는 모음을 이중모음이라 하겠다. 이들도 넓게 보면 가획의 원리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으나 그것이 만일 가획이라면 기본자의 하나를 가획의 획으로 삼았다는 점이 자음 글자의 경우와 다르다.훈민정음 28자 이외에도 더 많은 자음과 모음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성조를 표시하는 사성점, 즉 방점을 만들어 놓기도 하였다. 분절음소가 아닌 운소를 정서법에 직접 표기하기 위하여 마련하는 일은 보기 드문 일이어서 훈민정음의 방점은 매우 독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체사상의 한계1. 주체사상(主體思想)의 등장북한의 통치이념은 주체사상이며 김일성주의이다. 그러나 북한정권이 처음부터 주체사상을 공식적인지도념으로 채택한 것은 아니었다. 북한의 주체사상은 초기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발전적 계승을 목표로 하여 출범하였으나, 궁극적으로는 독자적으로 북한의 혁명전통과 주체사상을 강조하는 형태로 변화·발전되어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북한에서 주체·주체성 확립 문제가 공식적으로 처음 제기된 것은 1955년 12월 28일의 일이었다.1) 이 날 조선노동당 선전선동원대회에 참석한 김일성은 “사상사업에서 교조주의(敎條主義)와 형식주의(形式主義)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데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그 뒤 10여년 동안 김일성의 정치적 필요성에 따라 주체라는 용어가 북한의 정치무대의 전면에 등장했다가 사라지곤 했다.당시 북한의 주체노선은 체계화된 정치 이데올로기의 형태를 갖춘 것이 아니었다. 북한 당국이 사상사업에서 “주체를 바로 잡자”라거나 “주체를 확립”해야 한다는 표현에서 벗어나 ‘주체사상’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것은 1960년대 초반이었다. 소위 주체사상의 4대원칙이 정식화된 것도 1955년 김일성이 최초로 주체 확립을 주장하고 나선 이후 1960년대 중반까지 서서히 진행된 일이었다. 김일성은 1965년 4월 반둥회의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인도네시아를 방문하여 알리 아르함 사회과학원에서 연설하면서“사상에서의 주체, 정치에서의 자주, 경제에서의 자립, 국방에서의 자위”라는 주체사상의 4대원칙을 천명했었다. 그러나 사실상 북한 내부에서는 1955년 사상에서의 주체를 강조한 것을 필두로 1956년에는 경제에서의 자립, 1962년에는국방에서의 자위를 주장했고 1966년에 이르러서야 외교에서의 자주를 언급하는 등 상당히 긴 시간에 걸쳐 주체사상의 체계화가 진행되었다.1967년 10월 26일 북한 최고인민회의는「공화국 정부의 10대정강」을 발표하면서 주체사상이 북한정권의 정책지도 이념이라는 점을 선포하였다. 그 후 1970년 조선(創造性)이란 집단의 목적의식과 맞도록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고, 의식성(意識性)이란 개인의 목적, 발전방향 등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갖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따. 주체사상에서는 나아가서 이러한 속성을 가진 사람들이 역사발전의 주인이 되어야 전체는 바른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그런데 인민대중이 어떻게 하면 바른 집단적 속성을 가질 수 있는가? 주체사상에서는 이는 바른 지도를 받을 때 만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지도는 당만이 가능하고, 당이 바른 지도를 할 수 있는 까닭은 '혁명의 최고 영도자'인 수령의 뜻을 따르기 때문이다. 결국 한마디로 수령의 뜻을 따르는 당이 지도할 때 인민대중은 역사의 주인이 된다는 이야기이며, 이것이 '수령론'이다. 수령은 유기체인 사회의 뇌에 해당하기 때문에 수령의 지시대로 움직을 때만 사회는 건강하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주체사상의 핵심이다.3. 주체사상의 지도원리(指導原理) : 4대자주노선(自主路線)(1) 사상(思想)에서의 주체김일성이 '주체'에 관해서 공식적으로 언급한 것은 1955년 12월 28일 '당선전선동 일꾼들 앞에서' 행한 '사상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하여'라는 연설에서 였다. 이 당시 북한의 내부사정은 매우 복잡했다. 한국전쟁에서의 실패와 1953년 소련수상 스탈린의 사망은 김일성의 입지와 그를 전폭지원하던 세력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런 시기를 틈타서 북한내의 연안파, 소련파 그리고 잔재하던 남로당파들에게 김일성에 도전할 기회를 제공한 것이었다. 외적으로도 김일성의 통치이데올로기의 기반이 되어 온 마르크스·레닌·스탈린 주의가 흐루시초프에 의해 격하운동을 당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일성은 자신의 세력에 대항하는 자들에 대해 대응하는 방법으로 '주체'를 내세우게 된 것이다.이 내용을 살펴보면, 중국에서 온 연안파는 중국식으로 또 소련에서 온 사람들은 소련식으로 조선의 혁명을 하자고 하는데 이런 태도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잘 이해하지 못하였기 포착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4) 국방에서의 자위(自衛)김일성의 군사노선에 있어서의 자위노선은 그의 주체사상을 군사면에서 적용한 경우이다. 김일성은 왜래 침략자들과의 전쟁에서 외부의 지원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조적 역할'을 하는데 지나지 않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제 나라의 주체적 역량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김일성은 1962년 12월 당중앙위원회 제4기 5차 전원회의 석상에서 4대군사노선, 한국전쟁의 패인, 62년 10월의 쿠바미사일 위기 등과 관련하여 북한의 방위체제를 전면 재검토하고, 그로부터 '국방에서의 자위' 노선을 채택하고 독자적인 군사전략을 수립하게 되었다. 이는 '남조선 해방', '남조선 혁명'의 지원역량으로서의 군사력 강화였으며, 이를 위해 가능한 한의 인적·물적 자원이 동원되었다. 또한 이른바 4대군사노선으로서 '전군의 간부화', '전인민의 무장화', '전군의 현대화', '전국의 요새화' 작업을 통하여 북한 전체사회를 철통같이 군사화 내지 편제화 하여 혁명의 미명아래 북한정권을 세계 제일의 호전적인 정권으로 구축해 놓았다.4. 주체사상 내용의 변화과정주체사상을 분석·이해하려면 주체사상이 하나가 아니라 복수의 명제로 구성된 사상체계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1955년 김일성이 사상사업에서 주체를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후 지금까지 다양한 이론과 사상체계가 북한당국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한 결과 나타난 산물이 오늘의 주체사상이다.주체사상의 내용은 시대별로 상당한 변화를 보인다. 1950년대 사상사업에서 주체를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후 김일성은 기회있을 때마다 주체를 확립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하는 점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설명했다. 또한 당시 노동신문도 주체란 공산주의의 지도이념인 맑스-레닌주의나 소련·중국의 선진적 경험을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배우고 따르되 북한의 현실에 맞게 소화해서 적용해야 한다는 의미라는 점을 특별히 강조했었다.1965년에는 주체사상이 '남조선 위정자들의 주체위업은 대를 이어 지속해 나가야 하며 주체혈통을 고수하는 것이야말로 사회주의의 완성을 달성하는 지름길이라는 내용이었다. 또한 김일성과 달리 김정일이 '주체적인 혁명리론'을 밝혀주는 역할을 했다는 것을 노동신문을 통해 역설하였다. 김일성이 주체사상을 '창시'한 반면 김정일은 탁월한 '이론화'를 이끌어 가는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주장은 김정일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실제로 김정일은 1980년 제6차 당 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비서국 비서·군사위원회 위원을 겸직하는 인물로 선출되어 정치 전면에 나선 이후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였다.1980년대 말엽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동구권에 이어 소련마저 붕괴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북한당국은 1990년대 들어 주체사상의 차별성·우월성을 부각시키면서 '우리식 사회주의'라는 구호를 들고 나온다. 다시 말해 주체사상으로 대표되는 '우리식 사회주의'가 이미 붕괴해 버린 다른 나라의 사회주의와 어떻게 다른지 명확하게 차별화할 필요가 있었다.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북한당국은 주체사상을 참다운 사회주의·우리식 사회주의로 규정하고, 참답지 않은 다른 나라의 사회주의와 차별화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다.최근 들어 북한당국은 소위 '붉은기 사상'을 정식화했다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으나, 북한당국이 설명하는 붉은기 사상의 내용은 '영도자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과 수령 결사옹위 정신'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경제상황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지도자 김정일을 위해 끊임없이 희생해야 한다고 주민들을 설득하는 북한 당국의 구태의연한 논리였을 뿐이다.1990년대 들어 북한 당국이 우리식 사회주의·붉은기 사상 등으로 주체사상의 내용과 폭을 확대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이유는 북한 사회가 총체적 변혁을 시도해야 할 때라는 의식이 주민들 사이에 팽배해 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즉 북한당국은 체제유지가 위협을 받게 될 가능성 때문에 끊임없이 주체사상의 기치를 내세워 주민들의 인내심과 노동력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더욱해서는 '수령의 유일적 혁명사상에 대한 올바른 학습과 그에 따른 무조건적 실천'이 우선시되기 때문이다. 물론 주체사상과 수령론은 대중의 창발성과 주체성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으나 이는 부차적일 뿐이다. 나아가 당내의 최고지도자에 대해서 초월적인 존재로서 절대권력을 부여함으로써 수령의 무오류성을 전제하고 있다.여기에 그치지 않고 북한은 '혁명전통을 계승·발전시킨다는 것은 본질에 있어서 주체의 혁명위업을 계승·완성하여 나간다'는 입장에서 혁명전통의 순결성을 고수해야 하며 혁명전통을 전면적으로 계승·발전시켜나가야 한다는 후계자론을 전개한다. 그러나 후계자승계문제의 경우, '혁명을 최후까지 철저하게 완료한다는 문제'(혁명계승론)와 '혁명의 최고지도자를 부자간의 개인적인 세습제로 한다는 것'(혈통계승론)은 성격이 전혀 다르다고 볼 수 있다.결국 주체사상은 '인민대중의 자주성과 주체성 그리고 창조성'을 보장한다는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수령론과 후계자론 등을 통해서 수령과 후계자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강요하고, 동시에 봉건적인 권력승계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제공하는 반민주적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실현이라는 측면 역시 노동당의 독재와 수령과 후계자라는 개인독재의 형태로 그 특성이 변질되면서, 사상적 측면에서의 계급성의 상실은 물론 실천과정에서 변질된 형태의 수령(개인)과 당독재를 실현시키는 원천이 되고 있다.수령체계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의 관계를 보더라도 당, 국가기관, 노동조합 등의 각종 조직이나 기관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를 이루는 것은 수령의 유일적 영도를 보장하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수령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의 조직이나 기관을 창설하고 발전시키며, 그 기능과 역할을 규정하고 활동의 방향을 제시하기 때문이었다.즉 수령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의 모든 조직과 기관을 스스로의 지도사상하에 '한몸처럼' 움직이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에서 최고뇌수이고 심장이며 당과 계급, 대중을 하나로 결속시키는 유일한 중심'이었다. 그 결과 당의 존재도 수령 없다.
『花의 血』에 나타난이해조의 개화의식과 『심청전』 모티브- 차 례 -1. 이해조 소설 연구사 검토2. 이해조의 작가 의식3. 『화의혈』에 나타난 개화의식4. 『화의혈』에 나타난 『심청전』 모티브5. 결 론1. 이해조 소설 연구사 검토당대의 시대적 요구를 추상적인 담론의 차원에서 보여 주던 이인직과 달리 이해조는 일상의 미세한 삶 속에서 그것의 구현 양상을 소설로 형상화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전대소설의 서사 구조를 채용하면서도 새로운 시대 정신을 담아 내고자 했던 그의 노력은 대중들의 관심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를 예리하게 관찰한 후 이를 ‘재미’속에서 소설 형식으로 육화시키고자 했던 그의 소설관과 상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해조는 소설을 창작함에 있어서 ‘재미’와 ‘영향’을 소설의 본래적인 기능으로 설정하는 소설관에 바탕하여 독특한 소설 세계를 구축한 것으로 보이며, 그에 따라 이인직의 신소설 텍스트에 비해 서사 표면에 드러난 이념 지향성의 강도는 덜할 수도 있으나, 소설적 흥미를 통해 ‘교화-감화-경세’의 목적을 작품 속에 구현한 점은 이해조만의 창작 방법이라고 평가되어 진다.) 그의 소설에 관한 시대구분은 보통 19010년을 기점으로 구분되어지는데 이전은 애국계몽기이고 그 나중은 식민지 시대로 구분한다. 즉 1910년 이전에는 개화사상을 제시하고 계몽의식을 드러내고 있고, 후기에서는 친일적 성향을 지니며 오락성을 강화했다고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본고의 『화의혈』이라는 작품은 시대구분에서 후기로 분류되며 『춘향전』과 같이 기생이 정조를 지켜 나가는 수절 이야기와 『장화홍련전』과 같이 언니의 원한을 동생이 풀어 주는 해원 이야기가 결합되어 있다고 보는 의견이 지배적인데, 본고에서는 이 두 고소설의 모티브 외에도 『화의혈』에 나타난 『심청전』이라는 고소설의 모티브적 성격과 개화의식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2. 이해조의 작가 의식『花의 血』은 1911년 4월 6일부터 6월 21일까지 66회에 걸쳐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던 이해조의 신소설로, 신문 연재요성 등을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신소설 작가들이 가지고 있었던 소설관의 일단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는데 여기에 그의 소설관이 집약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무릇 소설은 체제가 여러 가지라 한 가지 전례를 들어 말할 수 없으니 혹 정치를 언론한 자도 있고, 혹 정탐을 기록한 자도 있고, 혹 사회를 비평한 자도 있고, 혹 가정을 경계한 자도 있으며, 기타 윤리, 과학, 교제 등, 인성의 천사만사 중 관계 아니 되는 자이 없나니, 상쾌하고 악착하고 슬프고 즐겁고 위태하고 우스운 것이 모두 다 좋은 재료가 되어 기자의 붓끝을 따라 재미가 진지한 소설이 되나, 그러나 그 재료가 매양 옛 사람의 지나간 자취나 가탁(假託)이 험질없는 것이 열이면 팔구는 돼되, 근일에 저술한 , , 등, 수삼 종 소설은 모두 현금에 잇는 사람의 실지 사적이라, 독자 제군의 신기히 여기는 고평을 이미 많이 얻었거니와, 이제 또 그와 같은 현금 사람의 실적으로 ,화의 혈.이라 하는 소설을 새로 저술할 새, 허언낭설은 한구절도 기록지 아니하고 정녕히 있는 일동 일정은 일호 차작 없이 편집하노니, 기자의 재주가 민첩지 못하므로 문장의 광채는 황홀치 못할지언정 사실은 적확하여 눈으로 그 사람을 보고 귀로 그 사정을 듣는 듯 하여 선악간 족히 밝은 거울이 될 만할까 하노라.)이와 같이 이해조는 소설의 소재의 다양성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으니 즉 소설은 정치, 사회, 가정, 윤리, 과학 등의 문제나 인간의 생활전반을 소재로 할 수 있으나 과거의 형질 없는 사실보다 현실적 사실에서의 취재를 주장하고, 허언낭설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데에는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하나는 사실적인 소재를 내세움으로써 독자들의 신기성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고대소설이 지니고 있는 비현실적인 속성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다.) 한편, 「기자왈」에서는기자왈 소설이라 하는 것은 매양 빙공착영(憑空捉影)으로 인정에 맞도록 편집하여 풍한 사람과 방불한 사실’이 있어야만 ‘풍속교정’과 ‘사회경성’이라는 소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사실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가 『자유종』을 통해서 “춘향전은 음탕 교과서요 심천전은 처량 교과서요 홍길동전은 허황 교과서라”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도 이러한 소설관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이다.) 또한 위의 글은 허구론과 교화론과 흥미론에 입각한 소설관임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소설의 더 큰 적극적 기능에 미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최소한도 국성 배영과 민지 계도의 적극적 기능을 인식하였다면, 그의 소설 태반이 다루고 있는 가정사를 중심으로 한 구소설적 형태로 퇴행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3. 『화의혈』에 나타난 개화의식1)지혜롭고 강인한 여성꽃 같은 얼굴과 달 같은 태도가 한곳도 범연한 데가 없는 일색이더라.… 선초는 짝이 없이 총명, 영리한 여자다. 한번 듣고 한번 본 것은 능통치 못하는 것이 없어 글, 글씨, 가무, 음률이 교방분대 중 제일 으뜸이 되니 … 거울같이 맑은 천성 …) 천하일색 기생 하나이 낫는데 인물은 양귀비, 서시가 명함을 못들이겠고, 재질은 반첩여, 소소매가 현신도 못하겠는데 …)위는 『화의혈』에서 여주인공인 선초의 모습을 그린 것인데 구원의 여성상 혹은 이상형의 여성으로 이해조는 얼굴은 예쁘고 자태는 고우며 마음씨 곱고 거기다가 머리가 좋고 영리한 여자를 뽑고 있다. 매사에 분별력이 있어서 경솔히 행하지 아니하고 현명하게 대처하며 또한 서적을 많이 접한 여자이니 도무지 흠이 없는 완벽한 여성을 바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다 한번 마음먹은 것을 고쳐먹는 일이 없는 여자, 여인의 지조와 정절을 지키는 여자를 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화의혈』의 선초는 비록 기생의 몸이지만 춘향이와 같은 절개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아버지를 살리는 대신 이시찰과 혼인을 맺고 일부종사 하려고 하나 이시찰의 버림을 받고 자초하는 여자이다. 이는 단순히 정절을 지키고자 하는 여성으로 볼 수 있겠지만, 다른 부분은 자기 수준 정도는 되야 결혼할 마음이 있다는 것으로써 결론적으로 자기 이상의 남성을 원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는 곧 이해조의 구시대적인 결혼방법인 부모가 짝을 맺어 줌으로써 결혼하는 것에 반대하고, 여성들 역시 자신의 의사표현에 따라 남성을 원하고 결정하여 결혼 할 수 있다는 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여 여성 역시 남성들과 같은 똑같은 위치이기 때문에 스스로 결혼에 대하여 결정하고 주도적으로 행동하여야 하는 것을 독자들에게 우회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3) 근대적인 재판양식의 제도이해조는 근대적인 재판양식을 계도함을 주장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875년 강화도조약으로 개국하여 유럽의 재판제도를 접하게 되었고,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된 후 근대적 유럽법제를 계수하기 시작하였으며 식민지 통치하에서 일본의 근대적 재판제도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근대적 재판제도에 익숙치 않은 국민을 계몽지도하기 위해서는 재판에 임하여 본인에게 유리한 판정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사전에 충분한 자료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이 시찰이 당한 일은 어느 관찰사와 공전건몰한 상관으로 재판시작이 되었는데, 아무쪼록 고생을 더하려고 그렇던지 재판할 때마다 제출할 증거와 변론을 미리 준비하였다가 급기 재판정에를 나가면 …)『화의혈』에서는 위와 같이 재판을 하기에 앞서 때마다 제출할 증거와 변론을 충분히 준비할 것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으며, 이는 곧 이해조의 개화의식이라 할 수 있다.4) 계급제도에 대한 타파와 신분의 타파『화의혈』에서의 이시찰은 부정적인 인물에서 출발하여 끝가지 부정적인 인물로 나타난다. 동학란을 평정하라는 임무를 맡고 암행어사의 직분을 부여받아 삼남지방으로 내려간 이시찰은 선치 지방수령을 포상하고 불치 지방수령은 징계한다는 본래의 목적과 달리 재물 긁어모으기에 여념이 없고 동학을 빙자하여 죄 없는 인명을 파리 죽이듯 하고, 삼년 동안 옥살이를 하고 나와서도 역시 후회는커녕 재가할 궁리만 하며 끝까지 회계할 줄을 모르는 양반이라는 것이 기정 사실이다. 물론 이 소설들이 『화의혈』이라는 소설에 중심적인 모티브가 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점이다. 기생이라는 점에서 춘향과 선초의 신분적 위치는 동일하고, 거기에 남다른 미모와 절개를 지키려는 선초의 부동한 마음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으며, 작품 내에서도 선초가 춘향을 흠모하며 따르려는 점이 직접적으로 들어나있기도 하다. 이는 『춘향전』을 소설의 모티브로 삼았다는 것을 알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작품에서 선초가 이시찰의 꾀임에 넘어가 자결하는데, 이를 복수하는 인물이 선초의 여동생인 모란이라는 점은 『장화홍련전』이 가지는 구성으로 역시 작품의 부분적 모티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외에도 다른 고소설 모티브가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이해조는 이미 많은 고소설을 가지고 작품을 개작하였는데 『심청전』역시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생각되어 진다. 왜냐하면 『춘향전』과 『장화홍련전』 이 두 고소설만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기에는 뭔가 둘을 이어주는 고리같은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춘향전』의 주요 내용은 춘향이 부정적인 인물인 변사또에 의해 고통을 받기는 하나 결국에 끝까지 수절을 지킨 춘향이의 모습과 함께 장원급제한 이도령의 출현으로 긍정적이고 행복한 결말을 맺는다. 이러한 『춘향전』의 행복한 결말은 『장화홍련전』과 내용이 이어지기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다. 언니의 복수를 하는 동생의 내용이 결합되어지기 위해서는 『춘향전』의 내용이 기존과는 달리 부정적인 결말로 끝나야 했고, 이에 작가가 끌여들인 것인 『심청전』의 부분적 플롯이라 생각된다. 『심청전』에서 보면 봉사인 아버지를 위해 심청이가 공양미 삼백석에 팔려 인당수에 빠져 죽게 된다. 이는 아버지의 위기 및 비극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는 심청이의 효심이 나타난 부분이다. 이 부분이 『화의혈』에서는 수청을 계속 거부하는 선초를 못마땅하게 여긴 이시찰이 선초의 아버지를 붙잡아 이유없이 매를 대고 나중에는 죽이려하는 것으로 아버지의 위기 및 비극이 다르게 나타났고, 이것을진다.
유충렬전을 읽고...국문학개론이란 수업을 통해 유충렬전이라는 국문소설에 대해 알게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유충렬전과 같은 군담소설은 홍길동전만 읽어보았지 다른 작품들은 읽어보지 못했었다. 국어국문학과를 다전공으로 하고 있는 나에게 영웅소설의 대표작 중 하나인 유충렬전을 강제로나마 읽을 수 있던 이번 기회는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되었다.유충렬전은 조선 후기에 쓰여진 국문소설이며, 군담, 영웅소설이다. 그리고, 전지적 작가 시점에 의해 쓰여졌다. 유충렬전의 대강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중국 명나라 때 유심이 부인 장씨와의 사이에 늦도록 자식이 없다가 남악형산에 치성을 드리고 신이한 태몽을 꾼 뒤 아들을 낳아 충렬이라 이름을 지었다. 유심이 간신의 모함으로 귀양을 가게 되고 장씨는 충렬과 도망치다 도적을 만나게 된다. 강물에 던져진 충렬은 물에서 구출된 후 부친의 친구인 강 승상의 사위가 되는데 역심을 알게 된 강 승상이 상소를 올렸다가 오히려 귀양을 가게 되고 그 가족 역시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충렬은 백룡사 노승 밑에서 무예를 배우며 때를 기다린다. 드디어 남만과 북적이 명나라를 치려 하자 정한담은 남만에게 항복하고 오히려 명나라를 공격한다. 정한담 일파에게 천자가 막 항복하려 할 때 충렬이 단신으로 적을 무찌르고 천자를 구해 낸다. 황실을 구한 충렬은 돌아오는 길에 부모와 장인, 아내를 찾는다. 황성으로 돌아온 충렬은 공훈으로 높은 벼슬을 받아 부귀 영화를 누리게 된다.이상이 유충렬전의 대강 줄거리이며, 동명왕 신화에서 이미 그 구조가 확립된 귀족적 영웅의 일생을 바탕으로 한 전형적 영웅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의 앞부분을 조금 읽고나서 나는 ‘아, 유충렬전 역시 홍길동전의 외전이라 불릴 정도로 내용이 비슷하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글을 다 읽고 나서 내 생각은 많이 틀렸음을 알 수 있었다. 홍길동전의 갈등은 사회의 신분제도에 대한 강한 불만과 탐관오리 즉 정권에 관한 불만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홍길동은 자신을 위한 투쟁을 전개해 나가고, 주체적으로 영광을 차지하려하며, 나중에 율도국이라는 이상적인 나라를 건설하게된다. 하지만, 유충렬전 이 작품에서는 유충렬은 자신을 위한 투쟁보다는 천자를 위한 투쟁에 비중을 더 두고 있는 종속적 영웅의 성격을 띈다. 그래서 투쟁의 결과로 얻는 영광도 천자에게 부여받는 벼슬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왜 유충렬이 주인공의 이름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으며, 영웅이라 할지라도 새로운 왕족을 세우기 보다는 현재의 왕족을 보좌하며 충렬을 다해야 한다는 작자의 의도를 파악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개의 영웅 소설들이 그렇듯이 이 작품도 천상계와 지상계라는 이원적 공간을 설정하고 주인공이 어떤 잘못으로 지상계에 추방된다는 적강 화소를 지닌다.적강 화소란 말도 솔직히 몰랐지만, 독후감을 쓰기 위해 대강의 작품특징을 알아보면서 알게 되었다. 아무튼, 이러한 성격의 소설을 적강소설이라 칭하기도 한다는데, 유충렬전 역시 이런 유형에 속하며, 작품에서 적강 화소는 작품 전체에서 복선의 구실을 한다. 유충렬은 천상에서 익성과의 반목 때문에 적강한 존재이기 때문에 지상에서 악성의 화신인 그 누군가와 대립할 것임을 추측할 수 있었는데, 역시나 정한담이라는 인물과 대립구조를 가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유충렬전의 배경은 중국 명나라이지만, 조선시대의 정황과 상당히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과 토번과 가달의 정벌을 툴러싸고, 유심과 정한담이 벌이는 대결은 주전과 주화의 대립인데, 이것은 조선시대 병자호란 때의 척화파와 주화파의 대립을 연상케 하였다. 또 호국에 황후, 황태자가 포로로 잡혀간 것은 대군과 비빈이 청나라의 포로가 된 역사적 사실의 반영이라 생각되었고, 천자가 금산성으로 피난한 것 역시 인조가 남한산성에 피난한 사실과 너무나도 대응되었다. 그러므로 충렬이 호국을 정벌하고 인질을 구함으로써 통쾌하게 설욕하는 것도 민족의 역사 의식을 작가가 반영한 것이라 생각되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이런 생각을 문득 하게 되었다. ‘그냥 배경을 중국으로 하지말고, 조선시대로 대놓고 서술하면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말이다. 하지만, 이 점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본 결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바로 아래에서 이야기 하겠지만 작품에선 왕권과 정권을 무능하고, 비굴한 성격으로 그리고 있다. 물론 지금시대에서는 당당하게 앞에서 정권의 시시잘못을 주장할 수 있겠지만, 작품이 쓰여진 시기는 조선시대이며 왕권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는 것은 역적으로 몰릴 수도 있는 중대한 사유가 되지 않았을까?라고 말이다. 결국 작가는 배경을 다른 나라로 할 수 밖에 없는 환경에 있었던 것이다. 자세히 말해보면 유충렬전에서 작가는 역경에 처한 왕권이 얼마나 무능하고 비굴한가를 보여주면서, 유충렬이 몰락한 가문을 일으키는 과정을 서술하고, 정적인 정한담을 대역 죄인으로 형상화하여 잔인한 보복을 가하는 작품 전개를 해나가는데, 여기에 작가의식이 암시되어 있는 것 같다. 즉, 몰락한 계층의 권력만회 의식이 구현된 보복 문학적인 성격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