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정부의 당면과제노무현 정부의 당면 과제로는 첫째, 헌법 해석을 바꾸어서라도 재벌개혁을 하겠다는 결의다. 재벌개혁이 의당 이루어져야 하고 헌법이 걸림돌이 된다면 어차피 정치개혁을 위해 헌법개정문제를 제기해 놓았으므로 경제조항도 함께 개헌하는 것이 도리다.둘째, 행정수도를 충청도로 옮긴다는 공약의 실천에 대해 국회가 반대한다면 국민투표를 통해서라도 관철하겠다고 했다. 물론 국민의 의사결정의 비중으로 본다면 국회보다 국민투표가 앞선다. 그러나 수도의 이전이라는 사안은 선거공약으로서 후보가 내놓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 실행에 이르러서는 밟아야 할 절차가 있다. 그 중 중요한 것이 국회에서 통과시켜 주어야 되는 지원법안들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여소 야대 라는 현실 인식 위에서 정치를 해 나가겠다고 말한 바 있다.그렇게 해야지, 국민투표로써 국회를 압박하는 형태를 취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수도 이 전지를 내년에 결정하고 2007년에 착공한다는 데 일정이 그렇다면 내년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 문제를 다시 한번 거르고 여당이 이기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 아닌가? 이전시기가 2010년이라면 노 대통령의 임기 이후다. 다음 정권에게 짐을 넘겨 줘야할 일이라면 지금 국민투표까지 해서 밀고 나갈 일은 아니라고 본다.셋째, 김대중 정권의 대북 지원 의혹에 대하여 노무현 대통령은 검찰수사를 종용하다가 청와대와 국회가 처리해 주도록 방침을 바꿨다. 그래서 검찰이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인 것도 안쓰럽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청와대, 국회, 검찰, 감사원, 금융감독원 등이 각기 해야 할 일이 있다. 청와대가 이 문제의 장본인임이 드러난 바, 전모를 밝히고 위법사항은 처벌받는 것이 옳다. 대통령의 유감표명이나 대국민사과로 얼버무리는 것은 안 된다.신임 대통령과 국회는 그 사이의 남북관계를 정리하여 비밀송금의 위법여부뿐만 아니라, 6?15 공동선언의 효력, 그리고 앞으로 남북관계를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정리하고 국민의 동의를 얻어 내야한다.넷째, 각 부처 보고에서 담당 공무원들이 예산관계로 인수위의 주문을 받을 수 없다고 하자 노무현 당선자가 질책을 했다고 한다. 올해 예산은 현정부의 안을 제출 받아 국회가 이미 결정을 보았다. 그러므로 새 정권의 사업이 예산상 조치되어 있지 않을 수밖에 없다. 공무원을 야단칠 것이 아니라, 국회와 협의하여 추경예산안을 짜면 된다. 예산연도에 맞추자면 선거는 4?5월에 하는 것이 옳다. 그 때부터 다음 해 예산 편성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현행대로 12월에 선거를 한다면 새 정권의 첫해는 지난 정권이 편성한 예산을 쓸 수밖에 없다.노무현 정권의 인수위는 대통령의 이미지와 일체를 이루면서 국정운영의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노 당선자는 인수위를 직접 장악하고 운영하지 않았으며 위원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내고 토론하도록 이끌어 갔다. 그의 말대로 인수위는 무엇을 결정하는 곳이 아니라 검토하는 곳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그런 가운데 다음 정권의 정치적 입장, 정책방향, 구체적 정책들의 윤곽을 다듬어 냈다.처음 인수위가 구성되었을 때 저명 인사가 거의 없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나이도 40~50대가 주축이었지만 그들은 의욕적이었다. ?점령군?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라면 현상유지에 안주하거나 기성질서와 타협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인수위원들 가운데 청와대나 정부로 자리를 옮기지 않은 사람들은 인수위가 그려낸 밑그림의 지킴이가 될 것이다.◆ 나의 생각노무현 대통령은 정말로 국민의 지지를 얻어 당선 된 국민의 대통령이다. 그래서 국민들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바라는 게 더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나라의 역대 대통령들이 선거 공약으로 내세운 것들을 단순히 선거 공약으로만 끝내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이번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의 대통령으로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는 노력과 역대 대통령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점은 칭찬할 만 하다. 그러나 조금씩 노무현 대통령도 우리에게 실망스런 모습을 비추긴 하나 아직 임기 초기이니 만큼 조금 더 지켜볼 필요가 있는 듯 하다.이러한 노무현 정부의 당면 과제로 정치?경제?사회면에 걸쳐 다양하게 나누어져 있다. IMF의 후유증은 대량실업문제를 일으켰고, 국가의 금리 인하로 국민들의 저축률도 낳고, 대기업의 잇단 부도경영으로 인해 국가경제 전체가 흔들리고 있으니, 뭐니뭐니해도 경제문제에 노무현 정부에게 바라는 기대가 클 듯하다.먼저 국민경제의 안정과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아닌 공통적인 분배의 문제가 시급하다. 우리 나라의 경우 많이 버는 사람이 오히려 세금을 적게 내려하고, 저소득의 국민이 꼬박꼬박 세금을 내어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연일 뉴스에서는 탈세혐의로 구속되는 기업들의 간부나 고위층 인사들을 볼 때면 이 나라의 국민으로 부끄럽고 답답하다. 따라서 노무현 정부는 이러한 크고 작은 불만을 없애기 위한 경제문제, 특히 분배문제에 있어서 강경한 정책이 필요하다.
* 5?16 군사쿠데타5?16 군사쿠데타는 당시의 정치?사회적 문제와 군 내부의 문제라는 두 가지 배경을 갖는다. 정치권은 집권당인 민주당이 신?구파간의 갈등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다양한 사회세력들은 각각의 정치적 요구를 주장하여 정국은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특히 혁신계 정치세력의 부상과 학생세력의 진출은 민족자주화운동, 통일촉진운동으로 전개되어 반공분단국가의 근본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한편, 6?25 전쟁 이후 한국사회에서의 사회적 지위 신장과 더불어 권력에 대한 욕구가 충만 되어있던 군부 내에서는 육사 8기생을 중심으로 고급 장성의 부정부패와 승진의 적체현상을 공격하는?하극상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소장 박정희와 중령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8기생들은 1960년 9월 쿠데타를 모의하였다.1961년 5월 16일 새벽, 제2군 부사령관인 소장 박정희와 8기생 주도세력은 장교 250여 명 및 사병 3,500여 명과 함께 한강을 건너 서울의 주요기관을 점령하였다.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여 전권을 장악하면서 군사혁명의 성공과 6개항의?혁명공약?을 발표하였다.그 6개항이란 ①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 ②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할 것, ③ 모든 부패와 구 악을 일소하고 청렴한 기풍을 진작시킬 것, ④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의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 ⑤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할 것, ⑥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복귀한다는 것이었다.군사정변은 초기에 미8군사령관 C.B. 매그루더, 야전군사령관 이한림 등의 반대로 잠시 난관에 부딪히지만, 미국 정부의 신속한 지지표명, 장면 내각의 총사퇴, 대통령 윤보선의 묵인 등에 의하여 성공하였다. 군사혁명위원회는?국가재건최고회의?로 재편하여 3년간의 군정통치에 착수하였다.군정기간 중 군사혁명세력은?특수범죄처벌법?,?정치활동정화법?등 법적 조치를 통하여 정치적 반대세력과 군부 내의 반대파까지 제거하였다. 또한 핵심권력기구로서?중앙정보부?를 설치하고?민주공화당?을 조직한 후 대통령제 복귀와 기본권 제한, 국회에 대한 견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을 시행하였다.군사정부는 혁명 공약에서 2년 후 정권을 민정에 넘긴다고 약속하고, 1962년 12월 대통령 중심제와 단원제를 중심으로 한 헌법을 새로 제정하였다. 1963년 1월부터는 정치인들의 활동이 재개되었고, 이해 10월에 새 헌법에 따른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때 쿠데타의 주역인 박정희는 원대 복귀와 대통령 출마의 결정을 놓고 오락가락하다, 결국 원래의 약속을 저버리고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15만 표 차이로 대통령이 되었다. 이리하여 1963년 12월 16일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세력들에 의해 구성된 제 3 공화국이 탄생한 것이다.반공분단국가의 위기상황에서 권력을 지향한 군부세력이 불법적으로 합법적인 정부를 정복하여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다. 이후 국가 주도의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하나, 군사문화의 사회확산, 군의 탈법적 정치개입의 선례를 남겼으며, 민주적 정권교체의 지연, 산업화의 지역?계층간 불균형 등의 부정적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나의 생각5?16 군사쿠데타는 이승만 대통령이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을 거치면서 장기집권의 욕심을 버리고 대통령직을 물러나고 장면 내각이 들어섰으나 민주당의 분당으로 안정된 기반을 갖추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정국의 불안이 계속되었고, 각종 시위 사태가 계속되어 사회 불안이 고조되었다. 이에,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일부 군인들은 1961년 5월 16일에 군사 정변을 일으켜 민주당 정권을 무너뜨리고 군정을 실시한 것을 말한다.5?16 군사쿠데타가 발발한 것은 당시 군부의 정치 지향적 성향과 폭발할 듯 팽배했던 사회적 불만이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군은 질과 양에서 커다란 발전을 이루어 단적으로 전쟁 이전에 10만 명이었던 병력이 전쟁 직후 70만 명으로 늘어났다.이에 따른 진급적체에 대한 불만과 정치권의 부패 현상에 대한 적개심이 군부의 봉기를 촉발시킨 것이다. 또한 한국군의 정치 지향성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내재된 것이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 의해 다시 고용된 일본군 출신들은 초창기 군부를 장악했고, 정권의 정치적 도구로 충실히 복무했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성장한 군부는 이미 4?19 혁명 이전부터 정치참여의 의지를 노출시켰으며 본격적인 쿠데타의 길을 걸은 것이었다.군사 정변을 일으킨 군부는 즉각 헌정을 중단시켰으며, 군부 세력이 중심이 되어 국가 재건 최고 회의를 구성하고 군정을 실시하였다. 군사 정부는 혁명 공약에서 반공을 국시로 천명하고 경제 재건과 사회안정을 내걸었으며, 정치활동 정화법을 제정하여 구 정치인들의 정치 활동을 전면적으로 금지시켰다. 이어서 군사정부는 새로운 정당으로 민주 공화당을 창당하고, 그들을 지지하는 정치세력을 여기에 결집시켰다.
* 한국민족주의의 특징단순화의 위험이 있지만 최근 미국 학계와 강단의 한국 민족주의 인식이 드러내는 특징을 몇 가지 살펴보면, 첫째, 미국에서 한국 근 현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한국 민족주의는 근대에 들어서 ?발명?되었다고 단언한다. 과거 서구의 민족주의 이론가들이 민족의 존재를 당연한 전제로 하여 국민국가와 민족주의의 성립을 논하였다면 최근에는 민족이 민족주의의 전파와 확산에 의해 구성된 ?상상의 공동체?였다는 논의가 활발하다. 이러한 주장은 서구에서 민족주의가 제국주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반동적인 역할을 했던 역사적 경험에 대한 비판의식, 서구 근대사회의 근대적 프로젝트들이 인간 해방을 지향하였지만 동시에 억압의 제도화를 가져왔고, 또 소수자에 대한 차별의 기제였다는 비판의식이 크게 작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민족주의는 계급의식 만큼이나 허위의식일 수 있고, 또 사회 내적으로 억압의 기능을 하였다는 것이다.이러한 인식은 서구의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부분적인 합리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근대적 민족주의 성립 이전 서구와 한국의 정치, 사회, 경제적 조건의 차이, 한국은 이미 서구와 일본의 반동적 민족주의(제국주의, 식민주의)에 의해 민족적 차별과 억압을 받고 있던 조건에서 근대적 민족주의를 형성하였다는 점, 따라서 이 시기 한국에서는 민족주의가 억압의 논리가 아니라 해방의 논리로 작용했다는 점, 한국에서 전근대 민족의 존재 등 서구와 한국의 역사적 경험의 차이를 무시하고 있다.둘째, 한국의 근대 민족주의를 ?발명?한 사람은 신채호인데, 그의 민족주의는 혈연을 중요한 결합원리로 하였고, 정신적?복고적 성격이 강한 특징을 띤다. 일반적으로 민족주의는 왕조에 대한 충성심이 근대적 형태로 전화되거나, 미국처럼 헌법에 대한 충성심을 결집시키는 형태를 띠는데, 한국은 왕조 또는 국가가 사라지는 시점에서 민족주의가 형성되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민족주의 역사인식의 복고적 관념적 성격에 대해서는 신채호 당대부터 비판이 많았다. 예를 들어 백남운은 1920년대에 맑시스트적인 세계관과 방법론에 입각해 식민사학을 비판하는 한편 민족주의 사학에 대해서도 그 비과학성을 비판하였다. 하지만 백남운도 일제 말기 이후, 특히 해방 이후에는 민족주의에 대해 다른 평가를 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1920년대 이후 근대적 주체로서 민중적 실체에 대한 자각이 보여주듯 한국 민족주의의 담당자, 민족의 역사적 실체에 대한 탐구와 민족해방운동 과정에서 민족통일전선 사상의 발전 등 민족주의의 자기 발전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셋째, 미국 학계는 ?한국의 민족주의가 식민지 시기에는 반제민족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일정한 역할을 하였지만, 해방 이후에는 남과 북의 정권적 정통성을 설명하는 체제이데올로기로 전락하였고, 해방 이후 남과 북의 역사학계는 민족주의적 귄위에 의지하여 역사를 서술함으로써 비판의식과 다양성을 상실해 갔다?고 평가한다. 해방 이후 남과 북의 ?민족주의적? 역사 서술이 일제 식민지기의 민족 해방의 논리와 사상을 어떻게 계승, 발전시켰는가는 그 자체 분석을 요하는 과제이다.미국 학계의 한국 민족주의 이해방식에 대해서는 엄밀한 학문적 분석과 비판이 필요하지만 더 시급한 것은 한국현대사에서 한국 민족주의의 현실적 위상에 대한 이해이다.◆ 나의 생각돌이켜보건대, 우리 나라는 건국이래 40여 년이 넘도록 우리 민족은 실로 시련과 격동의 연속 속에서 살아 왔다. 그러나 그 격렬한 변화와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우리 민족은 좌절하지 않았고 오히려 국가건설의 이념을 뚜렷이 하여 왔으며, 민족사회의 발전의지를 더욱 굳혀왔다. 빠른 변화 속에 휩쓸리지도 표류하지 않고 오히려 그 변화를 해치고 스스로의 미래를 개척하고 주도해 나가려는 노력들이 합쳐졌다. 이러한 노력들이 합쳐져야 새로운 역사의 장이 펼쳐진다 하겠다.오늘날 우리는 또 하나의 중요한 격동의 시기를 맞고 있다. 이 시점이야말로 과연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 있으며, 이제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를 냉철히 생각해야 할 중요한 고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지금까지 겪어 온 격동과 변화 및 새 역사 창조를 위한 노력들의 진정한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여 그 바탕 위에 우리가 장차 지향하여야 할 새로운 발전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은 오늘날을 사는 우리 모두의 사명이 아닐 수 없다.알고 보면, 우리 민족이 지금의 번영을 향한 총체적인 사회변화의 단계에 도달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번영과 완숙의 결실을 바랄 수 있다는 그 자체가 곧 지난날에 긴 성장을 위한 오랜 노력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고 있다.
* 4?19 혁명1960년 4월 19일에 절정을 이룬 한국 학생의 일련의 반부정?반정부 항쟁으로 정부수립 이후, 허다한 정치파동을 야기 시키면서 영구집권을 꾀했던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정권의 12년간에 걸친 장기집권을 종식시키고, 제2공화국의 출범을 보게 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이는 비합헌적인 방법으로 헌정체제의 변혁과 정권교체를 결과하였기 때문에 초기에는 일반적으로 혁명으로 규정하여 이를 4월 혁명, 4?19 혁명, 4?19 학생혁명, 또는 4?19 민주혁명 등으로 불리었으나 5?16 군사정변 이후 이를 의거로 규정하여 일반화되었다가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혁명으로 환원되었다.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서 이승만이 이끄는 자유당은 대대적인 부정 선거를 자행하였다. 이에 격분한 학생과 시민들이 부정 선거를 규탄하면서 독재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4?19 혁명을 일으켰다.4?19 혁명은 3?15 선거 당일에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학생과 시민들의 마산의거에서 비롯되었다. 이 때, 경찰이 시위 군중에 발포함으로써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는데, 자유당 정권은 오히려 이 시위에 배후에 공산주의 세력이 개입되어 있다고 발표하여 시민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그 뒤에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게 되자, 국민의 분노는 더욱 고조되었다.드디어 4월 19일에는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여기에는 일반 시민들도 가세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시위 군중을 해산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였지만, 시위는 연일 계속되었다.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직을 사임하였으며, 자유당 정권도 무너지게 되었다.4?19 혁명은 학생과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민주 혁명으로서 우리민족의 민주 역량을 전세계에 보여 주었다. 이를 계기로 우리 나라의 민주주의는 새롭게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또한 4?19 혁명은 처음부터 정권탈취를 목적으로 한 투쟁이나, 어떤 정치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체제변혁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어떤 정치적 주도세력이 개입된 것도 아니며, 조직적 투쟁 계획이나 목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정의감에 불타는 청년학생들이 불의에 항거한 의분이 집단행동을 취하는 과정에서 사태가 변전하고 발전되어 나타난 하나의 결과적 현상이었다. 4?19혁명은 한국의 정치 발전사에 하나의 획기적인 전기를 기록한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는 일대사건이었다.이러한 국민적 각성이 결국 5?16 군사정변을 초래한 결과가 되었지만, 4?19 혁명이 5?16 군사정변의 한 원인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4?19 혁명의 역사적 의의가 감소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4?19 혁명에서 촉구되고 추구된 민주이념과 사회정의의 실현은 한국이 앞으로 지향해야 할 최고가치임을 확인할 수 있게 했다는 점만으로도 4?19혁명은 한국 헌정발전사에 있어 영원불멸의 가치와 의의를 지닌다고 할 것이다.◆ 나의 생각4?19 혁명은 국민의 분노가 극에 치달은 혁명으로 한국현대사에 있어서 순수한 학생민주혁명으로 주도되어 위대한 시민혁명으로 발전해 갔다. 이는 학생에 의하여 제기된 뒤 기성정치가가 마무리 짓는 형식으로 발전되어 갔다. 따라서 4?19 혁명은 우리 나라의 민주정치가 전근대적 요소에서 근대적으로 세련되어지고 성숙되는 계기가 되었고, 한국 국민의 민주의식의 발전을 의미하며 민주주의 서구식이 아닌 우리 식으로 만들기 위한 불가피한 진통과 자기투쟁을 의미한 것이라 볼 수 있다.국민은 해방과 더불어 도입되기 시작한 서구민주주의가 그 제도와 운영절차를 그대로 모방하거나 이식만 하면 그대로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건국 이후 직접 국정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는 제도의 이식이나 운영절차의 모방만으로 자기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과 투쟁을 통해서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한 국민적 각성에 따른 투쟁이 바로 4?19 혁명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하여 4?19 혁명을 한국 민주투쟁사의 첫 걸음으로 보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또 4?19혁명은 공권력의 횡포에 대한 국민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원리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또한 국민의 지지와 신망을 받지 못하는 정권은 결코 존립할 수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20C 후반 전세계적으로 일기 시작한 이른바 학생의 파워의 우리 식의 표현의 하나로 볼 수 있다. 학생들은 1919년 3?1 독립운동과 1926년 6?10만세사건, 그리고 1929년 광주학생사건을 통해서 강한 저항의식과 열렬한 애족애국심을 발휘한 빛나는 전통을 지니고 있다. 4?19 혁명은 그러한 전통적 저항의식이나 애국심의 발로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 3?15 부정선거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정?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이 부정과 폭력으로써 재집권을 시도하다가 4?19 혁명과 이승만 정권의 붕괴를 야기한 사건이다. 자유당정권은 독재정치?정경유착?무력통일정책 등에 의해 집권 내내 국민의 능동적 지지를 얻지 못한 정권이었다. 단지 불법적인 헌법개정과 부정한 선거방식 등으로 국민의 위장된 동의에 근거하고 있었다. 자유당정권은 이미 1952년 발췌개헌, 1954년 사사오입개헌 등으로 1인 장기집권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자유당조직, 경찰 및 관료조직, 반공단체 등을 동원한 이른바?준봉선거?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권 말기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정치조작도 거듭된 실정에 의해 국민의 지지를 거의 상실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1960년 선거에 승리하는 데 역부족이었다. 더욱이 자유당정권은 당시 84세인 이승만 대통령의 유고 시, 그 계승권이 있는 부통령에 자유당의 제2인자인 이기붕을 무조건 당선시켜야 할 상황이었다.3월 15일 선거에서 대통령 이승만은 12년 간 지속된 장기집권체제를 연장하고, 승계권을 가진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하여 대규모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전국적으로 유령유권자 조작, 4할 사전투표, 입후보 등록의 폭력적 방해, 관권 총동원에 의한 유권자 협박, 야당인사의 살상, 투표권 강탈, 3~5인조 공개투표, 야당참관인 축출, 부정개표 등이 자행되었다.자유당은 내무부장관 최인규의 지휘 아래 1년여에 걸쳐 치밀하게 부정 선거를 준비했다. 전국 경찰의 주요 간부는 모두 맹목적 충성 인물로 교체되었고, 야당의원들에 대해 집요한 분열 공작이 펼쳐졌으며, 정치깡패 등을 동원해 야당의 선거운동을 방해했다. 일반공무원은 물론 교육 공무원들까지 부정선거 운동에 투입되어, 자유당에 투표할 것을 설득 권유하는 담임교사의 가정방문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던 중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이 신병치료 차 미국으로 건너가자, 1960년 5월중에 실시하기로 되어있는 정?부통령 선거를 2개월 앞당겨 3월 15일 실시한다고 공고하였다. 조병옥 후보는 미국 육군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후 선거가 한달 남은 2월 15일 심장마비를 일으켜 서거하였다. 이에 대통령은 이승만 단일 후보로 당선이 확실해졌고, 부통령에 이기붕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부정선거 계획은 더욱 구체화되었다.선거 결과는 예상 대로였다. 어떤 지역에서는 개표를 하니 무더기 투표, 사전투표 등으로 자유당 표가 전체 유권자 수보다 더 많이 나왔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선관위는 당황하여 개표를 중단했고, 이승만과 이기붕에 대한 지지율을 낮춰서 발표하는 소동까지 빚었다. 3?15 선거가 부정과 폭력으로 자행되는 것을 지켜보고 많은 국민이 분노에 떨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용기 있게 떨치고 일어선 것은 마산의 시민, 학생들이었다. 마산의 시민, 학생들은 3월 15일 오후 평화적으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강제 해산시키려는 경찰과 투석전을 벌인 끝에 경찰의 무차별 발포와 체포?구금으로 다수의 희생자가를 내게 되자 격분하여 남성파출소를 비롯한 경찰관서와 변절한 국회의원 및 경찰서장 자택을 습격, 이 과정에서 7명이 사망하고 8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시민들의 분노가 가라앉지 않고 있는 4월 11일 행방불명되었던 16살의 마산상고 생 김주열의 시체가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신포동 앞 바다에 떠오르자 마침내 온 시민이 궐기하여 경찰의 만행과 부정선거를 규탄함으로써 4월 혁명의 불길을 당겼다.◆ 나의 생각3?15 부정선거는 이승만의 장기집권의 욕심에서 비롯된 사건이다. 초대대통령으로 나름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그를 존경할 만한 업적을 남겼으나 정치인의 권력의 욕망으로 결국은 초대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하와이로 망명해 고국에서도 눈을 감지 못하는 비극을 맞이하였다. 당시 우리 나라 국민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의 틀이 잡히지 않았었다. 무지한 국민을 이용해 권력의 단맛을 느끼고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경제적으로 어려움과 혼란이 가중되는데도 불구하고 장기집권을 위해 반공을 내세워 국민들 통치 지배하였고, 정치적 혼돈과 부정부패로 국민들을 실망시켰으며, 많은 좌절감을 안겨줬다.한국전쟁 이후 빈사상태에 빠진 한국 경제는 서민들의 생존 유지마저 미국의 구호물자에 의존하고 있었다. 지속적으로 수입된 미국의 잉여농산물은 곡물의 가격을 터무니없이 하락시켜 농촌 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었고, 대부분의 농가에서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해 힘들어했다. 그리하여 많은 농민들이 생계유지를 위해 도시로 빠져 나오지만, 공장의 일자리도 이농민들을 수용하기에는 현저히 부족하여 실업률이 높았었다. 또한 소수 특권층 중심의 경제권 독점으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