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왕별희’를 통해서 본 중국의 문화대혁명영화 패왕별희는 주인공들의 일생을 회고 형식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해 놓은 영화로서 경극과 관련하여 중국의 현대사를 담은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1924년 군벌시대의 북경, 1937년 중일전쟁 발발시기, 1945년 장개석 정부의 북경 수복을 필두로 한 국민당의 성립시기, 1949년 중국 공산당 해방시기, 1966년 문화혁명 시기 등의 중국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이같이 거대한 역사적 흐름이 한 개인의 삶을 어떻게 바꿔놓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준다.1. 영화의 줄거리이 영화는 극의 주인공인 데이(도즈)와 샬로(시토)가 다시 경극 무대에 오르게 된 장면부터 시작되어 회고 형식으로 접어드는 액자형 구성을 가진 영화이다. 주인공 도즈는 창녀의 아들로 태어난 손가락이 여섯 개인 육손인데 그의 엄마는 더 이상 홍등가에서 그를 키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경극학교에 맡기러 간다. 경극단은 처음에는 그가 육손이라 하여 거부하였지만 그의 엄마가 무정하게도 아들의 손가락 하나를 잘라내어 다시 데려오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도즈는 경극배우가 되기 위한 모진 훈련을 받게 되어 도중에 도망도 가지만 결국 우연히 본 패왕별희 경극에 반하여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훗날 함께 호흡을 맞추게 되는 친구 시토의 도움으로 연극연습에 몰입한다. 여성스러운 얼굴과 말투로 도즈는 주로 여인역을, 시토는 주로 남자역을 맡는데 처음 가진 패왕별희 공연에서 성공을 거둔 후 도즈는 후원자 장내관에게 동성애의 대상이 되어 충격을 받고 성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갓난 아이를 줍게 된다(이 아이가 훗날 데이를 배신하는 서이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경극배우로 장성한 데이와 샬로. 중일전쟁이라는 시기적 특성상 야유도 받았지만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 때 데이는 자신이 남자임을 잊어버릴 정도로 우희역에 빠져드는데 이로 인해 그는 샬로가 사랑하는 술집여자 쥬산을 질투하게 된다. 허나 결국 샬로는 쥬산과 결혼까지 하게 되고 데이는 이에 대한 복수심으로 새로운 후원자인 원대인에게 자신을 넘긴다. 그리고 일본 고급장교가 객석에 관객으로 있던 공연 날 일본군과의 사소한 시비로 샬로가 잡혀가게 되고 그를 구하기 위해 데이는 일본군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 허나 이에 실망한 샬로가 그를 등지고 둘은 함께 공연하기를 중단한다. 그러나 사부의 꾸짖음으로 다시 한자리에 서게 되고 1945년 일제가 패망하여 일본군이 물러간 후 국민당이 들어설 무렵 가진 공연에서 데이는 중국 군인들에게 손전등으로 얼굴이 비춰지는 모욕을 당한다. 이에 공연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일본군인 앞에서 샬로를 구하기 위해 공연한 경극이 빌미가 되어 간첩죄로 수감되게 된다. 이후 가석방된 데이는 순수한 예술보다 혁명의 이념을 앞세우는 세상에서 결국 아편중독에 빠져 경극배우 생활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1949년 중국 공산 정권이 들어섰을 때 경극대부 원대인이 처단되고 아편을 끊은 데이는 전통적 경극을 고수하다 장성한 서와 대립하게 된다. 서는 그의 우희역을 빼앗아 그를 배신하고 이에 데이는 경극배우 생활을 청산하게 된다. 그러다 1966년 문화혁명의 시기, 데이와 샬로는 정지된 듯한 몸짓과 앵앵거리는 목소리를 내는 구시대의 산물인 경극을 공연하였다 하여 반혁명분자로 몰리게 되고 홍위병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심문을 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서로가 서로를 모함하는 자아비판을 하게 되고 샬로의 배신으로 쥬산은 자살한다. 그 후 세월이 흘러 1977년 데이와 샬로는 다시 한 무대에 선다. 관객하나 없는 텅빈 공연장 안에서의 연습공연 도중 데이는 실제 패왕과 우희가 이루어 질 수 없었던 것처럼 자신도 이루어 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쥬산이 문화혁명의 불길 속에서 건져 주었던 보검으로 자살을 한다.2. 영화속의 역사 - 문화혁명기 이전우선 우리가 영화속에서 처음 접하게 되는 역사는 군벌시대의 북경이다. 영화속에서는 이 시대에 경극이 최고의 주가를 올리게 되는데 이는 즉 군벌시대에 예술이 얼마나 번창했는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황제체제를 부활시키려는 노력이 실패한 뒤 농촌을 어지럽힌 10년간(1916-1927)의 군벌시대는 국가권력이 가장 쇠약한 시기였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인 측면에서 상당한 성취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허나 영화 속 이 시기에는 약간의 모순이 존재한다. 경극이 그렇게 번창했음에도 관사부는 자신들이나 홍등가 여인들이나 천한 것은 마찬가지라는 말을 하고, 경극배우들은 공연이 끝난 뒤에 고위 관리에게 몸을 바치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즉 실제 경극의 인기와는 다르게 당시 경극배우의 지위가 얼마나 하찮았는가를 표현해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두 번째로 등장하는 시대적 배경은 중일전쟁 시기이다. 이 시기는 데이와 샬로가 장성하여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경극배우로 자리매김 하는 부분으로 중일전쟁으로 일본군을 몰아내자는 학생시위가 전개되는 시대이다. 당시 일본군 앞에서 노래하게 되는 데이가 나오는 장면으로 미루어 보아 이 시대에는, 혹은 더 이전부터 예술이 정치권력과 끊임없이 갈등을 빚었던 시기라 생각한다. 이는 샬로가 연극무대 뒤에서 일본인에게 무대의상을 빼앗기고 조롱을 당하는 모습에서 확연히 알 수 가 있다.세 번째로 등장하는 시기는 장개석을 필두로 한 국민당 정권의 성립시기이다. 이 시기에 경극은 웃음거리가 되고 데이는 국민당에 대하여 반하는 행동을 했다하여 간첩죄로 고발되지만 국민당 장교가 경극을 보고 싶어 한다는 이유로 풀려나게 된다. 이는 권력에 휘둘리는 예술을 표현해내기 위한 감독의 절묘한 연출이라고 생각된다. 예술의 흥망에 웃고 우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흥망에 웃고 우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데이와 샬로가 중국군인들 앞에서 공연할 때 그들의 매너 없는 자세에 일본군인도 이러진 않았다는 장면에서 실제 이 시기의 경극은 중일전쟁 시기보다 훨씬 더 예술로서의 자립성을 잃어버린 것으로 생각된다.네 번째 시기인 중국 공산당 해방시기,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는 시기는 구사회와 신사회의갈등이 뚜렷이 묘사되는 부분이다. 경극과 현대극의 대립, 구사회를 대표하는 데이와 신사회를 대표하는 서와의 갈등은 시대의 급격한 변화가 가져오는 세대 차이를 잘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기 세대간의 갈등, 이념간의 갈등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3. 영화속의 역사 - 문화혁명기영화는 문화혁명기에 이르러 클라이막스를 맞이한다. 문화혁명의 공식 명칭은 ‘프롤레타리아 문화 대혁명’으로서 1966년부터 시작되어 76년에 마무리되었는데, 중공이 내세운 목표는 말 그대로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사회를 건설하려는 데 있었다. 이 때는 신사회에서는 구사회의 모든 것을 뒤엎는다는 의미로 경극은 타도되어야만 할 구식 예술로 간주되어 공개적인 처형을 당하기에 이른다. 인민공화국의 성립은 국가 체제 자체가 그렇듯이 경극분야에서도 사회주의 체제에 맞는 형태로 바뀌어야 했기 때문에 국가 체제에 따라 인민을 위한 경극이어야 했다. 그런 체제에 비하면 전통 경극이야말로 반혁명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으므로 혁명적인 배우와 소재로 대체해야 한다는 정책에서 볼 때, 데이와 같은 배우와 종래의 ‘패왕별희’는 폐기되어야 했다. 이에 데이 외 많은 경극 배우들이 공개적인 자아비판대에 무릎을 꿇게 된다. 샬로와 데이를 비롯한 경극 단원과 쥬산, 서는 모두 불길을 사이에 두고 촬영되었다. 이러한 촬영은 문화혁명이 인물들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듯하다. 서는 자신을 키워주고 보살펴 주었던 데이를 배신했고, 예전에 함께했던 동료 경극배우들은 데이와 샬로를 배신하고, 샬로는 데이를 배신하고, 데이는 샬로를 배신하며, 샬로는 자신의 아내인 쥬산마저도 배신한다. 즉 인물들의 신의, 사랑과 우정이 모두 사라지고 서로 배신하며 비굴하게 책임을 전가하는 추악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인물들의 모습이 이지러뜨림을 나타내고 있다. 즉 불길이 상을 이지러뜨리듯이 문화혁명은 사람들로 하여금 제 모습을 잃고 추악한 모습으로 바뀌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이렇게 문화혁명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은 감독 자신이 문화혁명시기에 쓰라린 나날들을 보낸 것과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16세때 문화혁명을 겪은 그는 스스로 홍위병에 가입하여 문화대혁명의 선봉에 서기도 했고 아버지를 자아비판 하게 하는 패륜도 저지른다. 여기에 이 영화의 초점을 맞추면 공개재판때의 타오르는 불길과 데이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패륜에 대한 사죄와 문화혁명 당시 잃었던 인간존엄성의 복구를 지향하는 것일 수도 있다.
(교육과정 및 교육평가)7차 교육과정에서의 수준별 교육과정 이해20022164 역사교육과 정정선〈목차〉1. 서론 2. 수준별 교육과정의 의미3. 수준별 교육과정의 등장배경 4. 수준별 교육과정의 유형 및 특징5. 수준별 교육과정의 운영 6. 결론1. 서론7차 교육과정의 중심개념은 `수준별 운영'과 `학생선택 중심의 운영'이다. 교과서와 교사의 강의에 의존하던 학습방식을 학생 스스로 탐구·활동하며 학습하는 학생 중심의 교육과정으로 바꾸게 되어 있는 것이다. 특히, 수준별 교육과정은 개개인의 학습 능력 차이를 고려하여 학업 성취 능력에 따라 학습할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다양하게 운영함으로써 학습 효과를 극대화시키려는 교육과정이다.지금부터 우리 교육개혁의 큰 흐름 중 하나로 간주되는 수준별 교육과정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2. 수준별 교육의 의미수준별 교육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하여 사람마다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일치된 의견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이론적이든 실제적이든 간에 수준별 교육 관련 논의가 더 진전되기 위해서 그리고 수준별 교육과 관련된 개념들 간의 혼란을 막기 위하여 수준별 교육과 관련하여 자주 등장하는 몇 가지 개념들의 관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개별화 수업, 수준별 수업, 수준별 교육과정 간의 관계를 명료화하고자 한다.1) 수준별 수업과 개별화 수업수준별 교육 또는 수준별 수업은 오늘날 교육의 중요한 원리 중의 하나이다. 교육이 학생 개개인의 잠재 능력을 최대한 실현 시켜주기 위한 인류의 존엄한 과업이라고 한다면, 교육은 응당 학생 개개인의 현재의 상태를 그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즉 학생 개개인의 수준, 즉 학생의 눈높이에 맞춘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수업의 개별화는 항상 교육의 이상으로 간주되어 왔다. 최근 들어 컴퓨터 공학과 통신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컴퓨터를 이용한 개별화 프로그램이 많이 개발되었고, 실제 학교현장에서도 이를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학교 체제 속에서 모든 교과목 교과정은 그 의미가 다른 용어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국가나 지역 또는 학교 수준의 교육과정이 수준별로 편성되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교사의 개인적인 노력에 의해 교실에서 수준별 수업을 실시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럴 경우, 수준별 수업을 위해 교육과정적인 외부지원이 거의 없기 때문에 교수-학습 자료 개발에서부터 평가에 이르기까지 교사가 모든 문제를 혼자서 개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부담을 떠안게 된다.이 점을 좀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제6차 교육과정기에 실시했던 수준별 수업 상황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자. 6차 교육과정은 수준별로 편성된 교육과정이 아니다. 학년별로 전국의 모든 학생들에게 동일한 내용을 가르치도록 편성되어 있는 일제식 또는 획일적 교육과정이다. 이처럼 6차 교육과정이 수준별로 편성되어 있지 않고 일제식으로 편성되어 있지만 6차 교육과정에서도 교사의 노력 여하에 따라 수준별 수업을 실시하는 것은 가능했다. 다만 교육과정상의 제도적 지원체제가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수준별 수업을 실시하기에는 실제적인 어려움이 많았다.3. 수준별 교육과정의 등장배경1) 교육 외적 배경20세기의 전환기에서 우리사회는 정보기술의 혁신으로 인하여 커다란 변화에 직면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산업사회를 탈피하여 정보기술사회, 지식정보 기반사회로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무엇을, 어떻게, 왜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의 방법은 그 사회가 요구하는 지식관과 학습관의 변화에 따라 바뀌게 마련이다. 즉, 무엇을 왜 학습해야 하며, 어떻게 가르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가에 대한 기준도 사회 ? 문화적 요구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사회구조적 변화는 교육환경의 변화를 의미하며, 교육의 목적, 내용, 방법의 변화를 초래하는 강력한 영향세력으로 작용하게 된다.가르치고 배우는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노력이 시작된 코메니우스 이래 오늘날까지 가르치고 배우는 방법에 대한 다양한 이론과 모형이 개발되었는데, 요지는 전통적인 서적 중심의 주입식 방법에서 탈피하여 가능한 한 학습자 수만큼 다하겠다.그 결과 학습능력이 상이한 학생들을 동일한 교육과정으로 일제식, 획일적 교육을 시킴으로써 우수학생은 학습의욕을 상실케 하고 지진학생들은 학습으로부터 소외되고, 심지어는 학교를 거부하는 아이들이 나타나게 되는 심각한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우리 사회의 이러한 관료주의적이고 중앙집권적인 경직된 교육구조와 획일적인 교육과정과 교수 ? 학습 방법으로부터 파생되는 교육의 위기적 상황은 마침내 다양성과 창의성이 강조되는 20세기 시대적 전환기에서 이에 적합한 교육과정의 필요성을 국가적 수준에서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교육개혁위원회는 수준별 교육과정 도입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학생의 능력과 적성을 고려하지 못하는 획일적인 교육과정 운영의 부작용을 완화하기 위하여 수준별 교육과정을 편성?운영하여 개인의 적성과 능력에 맞는 교육이 가능하도록 한다”(교육개혁위원회 1995).수준별 교육과정이 제7차 교육과정 개정의 핵심적인 내용으로 된 것은 이러한 사회 ? 문화적 흐름에 따른 시대적 요청이자 교육적 요청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수준별 교육과정이 나오게 된 배경은 지금까지의 획일적인 교육내용과 방법으로는 기술정보화 사회에서 요구하는 21세기형의 창의적인 능력의 인간을 길러내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회적, 교육적 필요성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4. 수준별 교육과정의 유형 및 특징수준별 교육과정의 유형은 교과의 성격이나 학교급(학년)의 특징에 따라 단계형, 심화?보충형, 그리고 과목 선택형 수준별 교육과정으로 구분한다.1) 단계형 수준별 교육과정단계형 수준별 교육과정은 교과의 내용 요소간의 위계가 비교적 분명하고 교수-학습의 과정에서 학습자의 개인차가 클 것으로 예상되는 교과(수학, 중등영어)에서 난이도나 논리적 위계를 기준으로 조직한 교육과정으로 교육 내용을 단계별로 편성?운영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영어의 경우(초등학교는 심화?보충형 수준별 교육과정을 적용함)는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4단계로 것으로서, 수준별로 심화 또는 보충 학습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개별화된 학습을 가능하게 하는 교육 과정이다. 교과서 내용이 다양한 종류, 영역으로 구성되며 학습 구성원의 수준 차가 비교적 적은 국어, 사회, 과학, 초등학교 3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영어 교과에 적용될 수 있다. 심화보충형 수준별 교육과정은 모든 학생들로 하여금 기본 과정을 이수하도록 한 다음, 학생들의 성취 수준에 따라 심화 또는 보충 내용을 학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운영한다. 수준은 기본과정을 중심으로 상위 과정인 심화 과정과 하위 과정인 보충 과정으로 구분된다.수준별 교육과정단 계 형심화 보충형과목 선택형국민공통기본교육기간(초1-고1)중 수학과,중등 영어교과에 적용국민공통기본교육기간(초1-고1)중 국어,초3-고1의 사회와과학, 초등 영어(3-6)고등학교 2~3학년의전 교과목에 적용?학습 내용을 난이도에 따라 단계로구분?능력에 알맞은 속도 로 단계적으로 학습?학습내용을 기본학습내용, 심화학습내용, 보충학습내용으로 구분?능력에 따라 학습의양과 폭을 다르게 함?능력 수준과 관심의개인차를 반영하는 과목 개설?능력과 진로에 따라학생들이 과목을선택 수준별 교육과정의 유형3) 과목 선택형 수준별 교육과정학생들의 능력 수준과 관심의 차이를 반영하는 다양한 교과목을 개설하고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의 적성, 진로, 소질에 따른 과목 선택의 폭을 넓혀 주고 전문성 심화를 위하여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며 고등학교 2~3학년 전 교과목에 도입한다.이 교육과정 아래에서의 수업 운영은 근본적으로 무학년제 수업을 원칙으로 한다. 학년에 관계없이 자신의 수준에 맞는 과목을 선택하여 학습할 수 있다. 수준이나 영역에 따라 세분화 시켜 교과목을 개설하며 과목 구분은 일반 선택 과목과 심화 선택 과목으로 나누어져 있다.5. 수준별 교육과정의 운영방안수준별 교육과정은 어떻게 운영될 수 있는가? 국가 교육과정 문서에서는 수준별 교육과정의 운영과 관련하여 이렇다할 만한 지침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수준별 교육과정 운영에에 일임하며 단위 학교에서는 학년, 학교의 상황에 따라 해당 단계 학습 목표의 일정한 성취 기준을 고려하여 진급 자격 기준을 결정하여야 한다. 또한 진급 기준에 미달한 학생들에 대한 재이수나, 다음 단계로의 진급을 희망하여 특별 보충 과정의 이수를 전제로 한 조건부 진급의 허용여부 등은 단위 학교에서 결정할 일이다.한 단계가 끝나고 상위 단계로의 진급 또는 재이수를 결정하기 위한 진급 평가를 실시하여야 하는데 이 때 일정한 이해 수준을 도달하지 못한 학생들이 다음학기에 차상급 단계로의 진급을 원할 경우, 학교는 자율적인 결정에 의하여 방학중에 ‘특별 보충 과정’을 설치, 운영함으로써 결손 학습에 대한 보충 기회를 제공하여 다음 단계로의 원만한 진입을 할 수 있게 해야한다.③ 교과별 운영 방안가. 수학수학의 경우, 1학년에서 10학년까지 20단계로 편성되어 있다. 수학과 교육과정은 단계형으로 운영한다는 말은 학생들이 한 단계의 내용을 일정 수준 이상 이해한 다음에야 다음 단계로 진급할 수 있도록 운영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초등학교 저학년 과정에서는 이런 방식의 운영이 가져올 득보다는 실이 더 많을 것이다. 따라서 초등학교 저학년(1-3)에서는 단계별 교과서를 학기별 교과서로 간주하여 이전처럼 운영하고 4학년부터 단계형으로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또한 담임제 운영상 학급내에서 분단 학습에 의한 단계 구분으로 학습 수준차를 해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나. 영어영어는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4단계로 교육과정이 편성 ? 운영되며 각 단계별로 학기를 단위로 하는 2개의 하위 단계 설정한다. 초등학교 3~6학년의 경우에는 선행 학습 결손으로 인한 학습 결손이 있다고 보기 어려우며, 초등학교 영어과 교육 목표인 구어 언어를 중심으로 한 영어에 대한 흥미와 자신감을 가지게 하기 위하여 심화 보충형 수준별 교육과정 적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2) 심화보충형 수준별 교육과정① 기본 운영심화 보충형 수준별 교육과정을 운영한다는 말은 학생들에게 기본 내용을 된다.
(현대세계의 이해 - 기말보고서)EU(유럽연합)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20022164 역사교육과 정정선들어가며2004년 5월 1일 유럽연합은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등 10개국을 추가 가입시켰다. 1951년 파리 조약에 따라 프랑스, 독일 등 6개국이 연합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가 탄생한 이래 1995년 15개 회원국으로 늘었다가 이번에 25개국으로 확대된 EU가 등장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EU는 인구 4억 5천 5백만명, GDP 8조 8천억 유로(10조 4천억달러, 1유로=1.18 달러)의 경제통합체로 커진다. 이로써 양차 대전 이후 유럽의 갈등을 극복하고 이 지역의 평화적 기틀을 마련하려던 유럽인의 노력은 또다른 전기를 마련하였다.모든 지역적 통합의 모델이 되고 있는 이러한 유럽의 통합은 어느 한 순간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적 시간 속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또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유럽의 변화와, 앞으로 더욱 심화될 유럽의 통합 모두 이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앞으로 새로운 국제질서 형성을 주도할 유럽의 현재와 미래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유럽 통합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 할 것이다.이 글에서는 이러한 유럽연합의 역사와 2004년 확대된 EU의 현황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한다.Ⅰ. 유럽연합의 역사1. 전후 유럽 통합의 태동(1945~1957)1) 전후 상황양차 세계대전 중의 레지스탕스 활동은 전후 초기 유럽 각국이 유럽 통합에 대한 공동입장을 확인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40년대 유럽 통합에 대한 열망은 높아져 갔다. 전후 통합을 향한 유럽의 열망은 보통 두 가지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첫째, 자신의 무력함을 깨달은 유럽의 자각이다. 전후 유럽은 더 이상 세계무대의 주역이 아니었으며 그 자리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슈퍼파워에 의해 대체되었다. 두 강대국과 달리 유럽은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분할된 힘없는 소국들의 집단일 뿐이었다. 둘째,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쟁, 사회복지, 교통, 에너지 등 타 경제 분야는 회원국들의 민감한 주권 문제로 별다른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특히 농업 분야는 EEC 재정 대부분을 잠식하는 ‘괴물’로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EC 집행위원회는 보다 강경한 자세로 프랑스 정부의 공동농업정책(CAP) 계획에 대항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소위 ‘빈의자 위기’를 야기하기에 이른다.2)프랑스의 공동농업정책(CAP)과 빈의자 위기(empty chair crisis)EEC는 프랑스의 주권 수호 경향에 대한 일종의 위협이기도 하였으나, 드골 정권이 경제개혁을 추진하는데 중요한 기회를 제공했다. 드골 정권의 경제개혁의 핵심은 프랑스 농업 부문의 현대화였다. 프랑스는 공동농업정책(CAP)을 통해 이를 해결하려 했는데 CAP의 기본 원리는 크게 프랑스 농산품의 EEC 지역 판매와 고가의 고정 농산물 가격제, EEC 외 지역으로 수출되는 농산물에 대한 보조금 지원 등이다. EEC 출범 초기 각국은 프랑스의 CAP 제안을 지지하였다. 실제로 CAP는 EEC내부의 단결을 강화하고 관세동맹과 공동대외관세(CET)등의 진보된 통합을 불러 오는 견인차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그러나 CAP는 EEC 재정에 부담을 주었고, 1965년 ECC 집행위는 CAP에 대한 회원국들의 자금 조달을 중단하는 제안을 하였다. 프랑스는 즉각 반발하였으나, 집행위는 더 나아가 집행위와 유럽의회의 권한을 강화하는 시스템의 제안을 유럽 의회에 직접 제출하였다. 프랑스는 일체의 EEC회담 참여를 거부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빈의자 위기이다. 빈의자 위기는 공동체의 초국가적 성격을 없애려 했던 프랑스와, 다른 5개국간의 대립의 결과이기도 하였으며, 복합적 대립의 해결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 내부 여론에 밀려 드골 정권은 회담에 재참여하게 되고, 6개국은 룩셈부르크합의라 불리는 타협을 하게 된다. 이 타협의 결과로 EEC의 역할은 조금 줄어들었으나, 프랑스의 파업으로 6개월간 마비상태에 있었던 공동체의 업무들이 빠르게 재개될 수 있게 된다.3)영국과 유하였고, 상업분야에서 뿐만이 아니라 여타 분야에서도 긴밀한 협력이 가능하다는 해석의 여지를 남겨놓았다.3)유로 슬럼프1971년 미국의 금리 인화와 달러화 환율 급락으로 발생한 외환 위기는 유럽 경제 전체를 장기간의 침체로 몰아넣었고, 각국의 상황 차이는 위기에 대한 공동 대응을 더욱 어렵게 하였다. 그 결과, 1969년 헤이그 회담에서 합의된 경제통화동맹(EMU)계획은 EC 회원국 간의 경제 및 통화정책상의 협력 필요성 증대에도 상당 기간 방치되었다. EMU는 진정한 경제공동체를 이루고, 재정정책이나 단일화폐 등의 초국가적 결정을 내리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가장 기본적인 정책이었다. EC회원국들은 EMU를 1980년까지 완성하겠다는 선언문을 발표하였으나, 지속되는 환율 불안과 회원국들의 상이한 통화 정책은 이 데드라인을 비현실적으로 만들었다. 이후 1973년 내내 급격한 물가상승과 실업률 증가, 무역수지 악화가 계속되었고 중동 사태로 인한 석유 파동이 추가되었다. 중동 전쟁 이후 열린 코펜하겐 회담에서 석유 파동으로 인한 회원국들은 석유 파동으로 인한 피해 해결 방안을 논의하였으나, 중동 일부 국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영국과 프랑스는 공동 에너지 정책을 무산시키는 데 몰두하는 등 전체적으로 극도로 분열된 양상을 노출하였다.이처럼 1973년까지 EC 내 강대국들 간의 불열은 심화되었으나, 이 상황은 74년 프랑스와 영국, 독일의 정권 교체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특히 프랑스의 지스카르 대통령과 독일의 슈미트 총리는 개인적으로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심각한 경제위기 속에서 EC를 지킬 새로운 중심으로 주목받게 된다. 슈미트는 영국의 EC 가입의 재협상을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훌륭히 중재하는 활약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프랑스와 독일의 우호 관계는 어디까지나 EC의 ‘위기관리’수준이었지 ‘부흥’을 가져올 정도로 막대한 기여를 한 것은 아니며, 도리어 양국간의 지나친 친밀도가 타 회원국의 소외를 초래하기도 하였다.4. 유럽공동체(EC)의 성장기(19과 EMU 출범을 앞당길 가능성이 높았다. 회원국 대다수가 이사회의 의사결정방식을 만장일치제에서 다수결제로 바꾸지 않는 한 단일시장계획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고 궁극적으로 공동 통화 정책 없이는 단일시장계획이 유명무실해질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단일시장의 완성과 정책결정과정의 개혁, 그리고 향후의 통화 정책 계획이 들로아 집행위의 단일시장계획의 간략한 밑그림이었다. 단일시장 건설을 위한 집행위의 눈부신 활약은 ‘빈 의자 위기’이후 10년 동안 침체에 빠져 있던 집행위를 EC의 중심부로 되돌려 놓는 데 성공했다.4)단일유럽조약(SEA)1980년대부터 가열된 단일시장 건설 노력에 부응하여 유럽 정상들은 밀라노 정상회담에서 집행위원회의 백서를 적극 환영하였다. 그러나 당시 EC의 활동을 제약하던 절차상의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 한 백서의 제안들은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높았고, 따라서 각국 정상들은 EC의 제도적 개혁을 앞당기는 데 의견을 모았다. 밀라노 정상회담의 최우선 논제 중 하나였던 EC의 제도 개혁은 집행위의 백서 뿐 아니라 제임스 도지 아일랜드 외무장관이 이끌던 제도개혁을 위한 임시위원회의 보고서, 즉 ‘도지 보고서’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다뤄졌다. 도지 보고서는 추후 로마조약 개정을 위한 협상에서 각국 정부들이 취할 접근방식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띠었다. 도지 보고서는 보다 심도 있는 통합을 위해 필요한 최우선 목표를 제시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동질적인 내부 경제권 확립과 이사회의 만장일치제 축소, EP의 입법권 강화, 집행위의 행정권 강화 등이 주요 최우선 과제들이었다.각국의 의견 수렴 끝에, 1986년 마침내 단일유럽조약(SEA)이 체결되어 1987년 7월 시행에 들어갔다. SEA는 2/3 다수결 방식을 도입하였고, EP의 권한 강화 문제에 있어서는 새로운 정책에 대한 이사회와 EP 간의 자물활동을 의무화하고 궁극적으로 EP의 입법권을 강화하는 취지의 ‘협력 절차’를 구축과정은 덴마크와 영국, 독일 3국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순탄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1992년 덴마크 국민들은 국민투표에서 근소한 차로 TEU 인준을 부결시킨다. TEU의 시행을 위해서는 전 회원국들의 의회 인준을 필요로 했으므로 이 결과는 TEU 전체를 좌초시킬 수 있는 심각한 위험신호로 받아들여졌다. EMU에 대한 우려와 자국 통화 정책 포기로 인한 정체성 문제, EU 내부에서 차지하는 자국의 위치, 집행위의 세력 강화 등 EU와 TEU를 둘러싼 전형적인 우려가 덴마크 국민투표 부결을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 들로아 집행위원장은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관료주의를 타파하고 EU 기관들의 투명성을 제고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첫 번째 단계로 들로아는 EU 기구들의 보조성(subsidiarity) 원칙을 강조했다. 즉 EU는 EU 국민들의 이익에 부합되는 정책을 회원국 정부보다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분야와 시점에만 활동을 개시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집행위는 주요 정책 분야에 대한 노력을 배가하는 대신 각국 정부의 고유 분야로부터는 의식적으로 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한편 이사회는 덴마크 유권자들의 우려를 확실히 없애기 위해 TEU 인준 후 ‘옵트 아웃(Opt-out: 자국의 이익에 맞지 않는 정책은 실행하지 않을 수 있다는 예외조항)’ 가능성을 열어 놓기로 했다. 이러한 다방면의 노력으로 덴마크는 1993년 2차 국민투표로 TEU 인준을 가결시켰다. 영국과 독일은 각각 정치 및 의회 내 절차, 법률상의 문제로 EMU 인준에 곤욕을 치루지만 이들을 포함한 전 회원국이 1993년 10월 전까지 인준을 마무리한다는 목표를 달성했다. 그 결과 TEU는 1993년 11월 1일부터 로마조약을 대신하는 EU의 가장 중요한 제도적 장치로서 완벽한 시행에 들어가게 되었다.6. 유럽연합(EU)의 발전(1993~1999)1)제 4차 EU 확대1995년 1월 1일 오스트리아와 핀란드, 스웨덴 등 과거 유럽자유무역협력지대(EFTA) 회원국들이 EU에 가입함으로써 EU의 총했다.
孫文의 三民主義들어가며1842년 阿片戰爭 이후 중국사의 변혁과정은 질적인 면에 있어서 그 본질적인 양상이 매우 두드러졌으며 양적인 면에 있어서도 복잡하고 다양했던 시기의 연속이었다. 수 천년 역사를 자랑했고 그 전통을 고수해가던 中華思想이 무너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사회 내부에 혼란이 야기되어 청조를 무능력 상태로 끌고 갔던 것이다.이것은 결국 洪秀全이 이끄는 太平天國運動에서 중국 농민의 저항으로 표출되었으며 이에 청조 주도세력인 한인 관료들을 중심으로 한 洋務運動이 전개되어 서양 근대 문물을 수용하였으나 淸日戰爭에서의 패배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變法運動이라는 새로운 제도와 법의 개혁으로 새로이 근대화를 꾀하였으나 이러한 시도마저 사실은 당시 중국의 시대상황에 부응하지 못했다.중국인들은 보다 본질적인 변화와 폭넒은 정치참여를 요구하게 되었고 이것이 1911년 辛亥革命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같은 개혁운동의 발전과 실패의 과정속에서 손문의 혁명사상이 대두되었고 그중에서 가장 잘 집약된 이론으로 삼민주의를 들 수 있다.여기서는 삼민주의의 발전과정과 삼민주의의 기본요소인 민족, 민권, 민생주의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1. 三民主義의 發展過程① 初期의 三民主義손문이 삼민주의를 처음으로 제창한 것은 1905년 中國革命 同盟會가 결성되었을 때부터 였는데 삼민주의에 대한 최초의 강연은 파리와 브뤼셀 그리고 영국에 살고 있는 華僑들을 상대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같은 해 가을에는 일본 동경에서 결성된 동맹회의 발단식에서 4차례에 걸친 삼민주의에 대한 강연이 있었고 삼민주의는 사실상 동맹회의 지도정신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형성기에 있어서의 삼민주의는 무엇보다도 혁명동맹회의 강령에 지나지 않았으며 학설로서의 체계는 정립하지 못한 상태였다. 처음의 삼민주의는 그 전체성에 대해서만 언급되었으며 거기에 특징과 강도가 있기는 하였지만 사상적 체계나 또는 학설의 차원에서 지극히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신해혁명 이전의 그의 民族主義는 무엇보 있다. 물론 이 단계에서의 민권주의는 신해혁명 이후의 보다 발전된 형태에 비하면 훨씬 관념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民生主義는 동맹회 내부에서도 가장 분분한 논쟁이 야기되었을 뿐만 아니라 외부로부터 공격이 심했던 부분이었다. 손문은 『民報』창간 1주년 연설에서 ‘平均地權’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는 민생주의가 “국민의 국가를 만들뿐 아니라 사회의 국가를 동시에 만들기 위한 것이다.”고 하며 “유럽에서의 사회병리현상은 토지문제의 미해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손문의 민생주의 발상은 영국 체류 당시 독점 자본주의 단계에 진입한 영국의 자본주의 체제가 빚어내는 역기능을 고찰하고 난 후부터 였다. 결국 민생주의의 근본의도는 중국에서의 자본주의적 병폐에 대한 사전방지 조처를 통해 사회주의혁명을 회피하자는데 있었다. 당시 중국의 경제상황은 양무운동기부터 시작한 근대적 공업이 아직 성장하지는 않았지만 도시를 중심으로 지가상승의 조짐이 나타나는 정도의 단계에 진입하고 있었다.지권평등의 발상은 헨리 조지의 ‘單稅論(Theory of the Single Tax)’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전통적인 영향도 깔려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토지의 안정적 분급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여겨 왔기 때문에 土地制限策들이 시대마다 제기되곤 했다. 이러한 점들 또한 손문의 토지에 관한 발상에 영향을 미쳤음을 추측해 볼 수 있겠다.요컨대 民國革命 이전에는 삼민주의의 골격은 형성되어 왔으나 사상체계로서는 극히 미숙한 상태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1905년에서부터 1911년의 민국혁명에 이르기까지의 삼민주의는 미완성의 과정인 까닭에 불완전한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② 辛亥革命後의 三民主義신해혁명의 성과를 軍閥 袁世凱에게 빼앗긴 이후부터 중국의 혁명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고 그 운동의 진전은 삼민주의 이론의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하였다. 즉, 민족주의는 五族共和의 슬로건을 내거는 한편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民族自決主義의 이론을 도입하였다는 점이다. 손문은 신해자본 건설 등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가 조계의 회수, 關稅率 개정, 治外法權 폐지 등을 주장하면서도 기존의 조약, 권익을 유보한다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그의 민족주의 인식에 한계점을 주는 요인이지만 이는 借款에 의존하여 민생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데에 큰 원인이 있다고 보아진다.③ 三民主義의 完成손문사상은 1922년 1월 광서성에서 행한 강연「軍人精神敎育」을 계기로 성숙기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그 강연에서 삼민주의를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정의하고 있다. 즉, “제1의 주의는 동족혁명으로서 타종의 민족을 배제하고 자기의 민족을 발전시켜 완전히 독립된 민족국가를 조직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제2의 주의는 정치혁명으로서 국민이 직접 정권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며 제3의 주의는 사회혁명, 즉 경제혁명으로서 사회의 재산을 균등분배하여 자본가의 독점을 미연에 방지함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여기에는 그의 민족주의는 완전히 독립된 민족국가의 형성을 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민권주의는 이제는 만주족 지배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대외적인 민족평등을 요구하는 동시에 국권의 회수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민생주의에 대하여 그는 신해혁명전까지는 사회정책적으로만 취급하였으나 이 강연에서 어느정도 사회혁명의 과제로서도 취급하였다. 그러나 이강연에서 그는 “우리 중국의 현실에서 볼때 민생주의는 예방정책이다”고 하면서 예방상의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특히 1924년 국민당을 개편하는데 있어서 그의 유명한 耕者有其田이라는 슬로건은 농민을 구제하는 구체적인 방법이라 할 것이다.삼민주의는 국민당 개편대회에서 채택된 勞農聯合에 대한 정책중에서 새로운 발전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즉, 중국의 국민혁명은 노동자와 농민의 연합에 의해서만 추진될 수 있다는 이 사상이 민권주의와 민생주의 이론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자 농민의 운동이 촉진될 때에 비로소 민권주의는 형식상의 민주주의가 되는 것이며 실제에 있어서 그렇게 함으로써 참다운 의미의 직접민권의 주 민족은 자연의 힘에 의해 형성된 것임에 반하여 국가는 무력을 이용하여 형성된 것이라는 점이다. 즉 자연력은 王道이며, 왕도에 의해 성립된 단체가 민족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무력은 곧 覇道이며, 이 패도에 의해 성립된 단체가 곧 국가라는 것이다. 그는 홍콩의 성립과정을 그 예로 들고 있는데, 홍콩은 결코 수십만의 홍콩인이 영국인을 환영하여 성립된 것이 아니라 영국의 무력에 의한 할거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이다.민족을 형성하는 요인은 자연의 힘에 의한 것인데 그 중 가장 유력한 요인은 血統이라 한다. 조상이 어떤 혈통이든 그 혈통은 영구히 한 민족의 구성원들에게 유전된다. 이를 혈통의 힘으로 보고 있다.다음으로 민족을 형성하는 두 번째 요인은 生活이다. 생활의 영위방법이 다르면 그 결과 형성된 민족도 달라진다. 몽고 민족이 그렇게 강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생활방식이 유목생활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일상 생활습관으로 인해 원정을 다니는 데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민족을 형성하는 세 번째 중요한 요인은 言語이다. 외래 민족이 우리의 언어를 쓰게 되면 우리 민족에게 쉽게 감화되고 오랜 세월이 지나면 동화되어 우리와 동일한 민족이 된다. 만약 사람들의 혈통이 동일하고 언어마저 동일하다면 동화의 효과는 더욱 쉽게 나타나는 바, 언어는 민족을 형성하는 대단히 중요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민족을 형성하는 네 번째 요인은 宗敎이다. 인류는 동일한 신을 숭배하거나 동일한 조상을 신앙하는 자들끼리 결합하여 한 민족을 형성한다. 아라비아나 이스라엘 같은 국가들은 오래 전에 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라비아인과 유태인이 아직 존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민족을 형성하는 다섯 번째 요인은 風俗과 習慣이다. 만약 인류가 거의 똑같은 풍속 습관을 오랫동안 함께 공유하게 된다면 결국은 자연스럽게 결합되어 한 민족을 형성할 것이다.손문에 의하면 민족주의는 바로 國族主義이다. 중국인이 가장 숭배하는 것은 가족주의와 종족주의이므로, 중국에는 오직 가족주의와 종족주의만 있었지 국족주의‘保, 養’이 충돌하여 상호 경쟁이 일어나게 됐고 인류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투쟁은 인류가 출현한 이래 계속되는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權’ 이란 인류가 투쟁을 위해 사용해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인류는 탄생 이래 날마다 그 투쟁 속에서 살아온 것이다. 손 문은 민권의 유래를 이러한 투쟁의 역사 안에서 분석하고 있다.민권이 유래된 첫 번째 시기는 앞서 말한 인간과 동물의 투쟁으로, 권력을 사용하지 않고 체력에 의존하였다. 두 번째 시기는 인간과 자연의 투쟁으로, 신권을 사용하였다. 세 번째 시기는 인간과 인간의 투쟁, 나라와 나라의 투쟁, 민족과 민족의 투쟁으로, 君權을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현재의 네 번째 시기에는 국내의 투쟁, 즉 인민과 군주 간의 투쟁이 되었다. 이 시대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의 투쟁, 정의와 횡포 간의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민권이 점점 발달했으므로 민권의 시대라고도 그는 부른다.그가 민권주의를 주장한 것은 인민들의 황제가 되고자 하는 생각을 떨쳐내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황제로써 군림하고자 하는 생각은 동지가 동지를 치는 것이 되며,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을 치는 것이 된다고 하였다. 그 결과 전 국민이 서로 때리고 공격하기를 일삼게 되어 인민의 재난은 끝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그에게 있어 자유는 국가의 자유를 주장하는 민족주의와 유사하며 평등은 민권주의와 같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민권주의는 인민의 정치적 지위가 모두 평등하다고 주장하며, 군권을 타파하여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평등은 천지의 만물이 모두 똑같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인류는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지 않지만, 전제가 발전하게 되면서 전제 군주가 그것을 더욱 극대화하여 그 결과 천성적인 불평등보다 더욱더 불평등하게 된 것이다. 이 전제 군주에 의해 만들어진 불평등은 ‘인위적인 불평등’이다. 이러한 인위적 불평등으로 인해 특수 계급의 사람들이 포악해지자 억압당하는 인민들은 이를 용 한다.
(문화지리학)권력과 근대성, 그리고 역사지리학20022164 역사교육과 정정선역사지리학이 지리학의 한 분야로 출현한 이후 지리학의 지성적 풍토는 많이 달라졌다. 그러는 가운데 권력(power)과 근대성(modernity)의 문제가 관심의 대상으로 지리학의 전면에 부상하였고 그 결과 안드류 클라크(Andrew Clark)와 클리포드 다비(Clifford Darby)에 의해 역사지리학이 확립된 1950-60년대의 그것과는 매우 다른 지성적 풍토가 조성되었다. 역사지리학의 확립기 당시에는 실증주의가 풍미하고 있었고 공간적 관계에 관한 법칙 발견을 지리학이 과연 얼마만큼 수행할 수 있는가가 주요 쟁점이었다. 이제 인문지리학은 광범위한 학제간의 관심사인 문화와 저술활동의 정치적 함의와 사회 근대화에 따른 권력을 역동성으 연구하는 포스트 막스적 관점 및 포스트 베버적 관점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 결과 지리학은 공간은 물론이고 문화, 과거, 권력의 공간적 배치의 변화 과정등에 민감해 지고 있으며 이와 같은 지성적 혁명 속에서 역사지리학과 인문지리학의 대부분의 분야들은 서로에게 점차 밀착되가고 있다.이 논문은 이러한 지성적 혁명과 그 함의를 네 명의 저명한 학자, 즉 프랑스 역사학자 푸코(M.Foucault), 독일의 비판 이론가 하버마스(J.Habermas), 기든스(A.Giddens)와 만(M.Mann)의 작품을 통하여 살펴본다. 이들은 사회가 근대화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권력 행사 패턴의 변화에 관해 설득력있게 제시하고 있다. 이들이 권력과 근대성에 관한 현대 지성 세계를 완전히 대표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들 네 학자의 이론은 광의의 지리적 스팩트럼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1. 푸코와 하버마스푸코는 무엇보다도 권력, 진리, 경험 사이의 상호관련성에 관심을 갖는다. 그는 사고의 저변에 깔려있는 패턴들과 그 패턴들 사이의 분접성(分接性)이 어떻게 규명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 사고의 패턴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세계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세계 그 자체의작용을 하며 그 중 하나의 담론이 특정 기간 지배적 위치를 점하지만 이는 변화한다고 하였다. 그의 생각의 대전제는 ‘진리)라는 것은 권력으로부터 떼어내어 인식할 수 없으며 발견될 수 있도록 저편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는 점이다. 푸코는 사회를 포괄적으로 다룰수 있는 이론을 제공하기보다는 변화하는 세계속에서경합담론들의 배후에 있는 권력의 행사와 그 효과를 탐구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한다.진리란 결국 한 시대를 풍미하는 것일 뿐이고 국가의 감시에, 더 나아가서는 지배구조에 깊숙이 엃혀있는 것 뿐이라는 그의 주장이 옳다면 모든 사회과학은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푸코의 영향으로 보편법칙을 추구하는 행위나 타문화에 대한 독단적인 해석을 지양하면서 학문적 자기반성이 일고 있는 경향이 있다. 푸코를 읽게 되면 저술들에 내재되어 있는 정치적, 문화적 가정들, 그러한 것들을 전달하는 저술의 권력, 내외적으로 당연시 여기는 사고체계가 우리의 삶에 대해 권력을 어떻게 행사하게 되는지 우리의 삶을 휘어잡을 수 있도록 지리를 어떻게 활용하는지에 민감해지게 된다.푸코와 마찬가지로 하버마스는 근대성의 특성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푸코와 달리 그는 근대성이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일상생활의 의사소통 관행 속에 사로잡혀 있는 순박하고 상황-지향적인 행태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주었다”고 생각한다. 근대적 세계에 들어와서 과거에 당연시 되었던 문화적 전통들은 방법론적 분석과 검증에, 즉 합리적 사고 방식에 노출될 수 있었다. 하버마스는 일련의 매우 추상적인 개념들을 사용하여 근대 사회에서 행해지는 의사소통의 맥락을 기술하려고 했다.그에 따르면 전통적 생활 세계는 개개인의 삶에 의미를 던져주고 제한을 가하는 일련의 사물의 질서에 의해 당연시 여겨졌던 세계였다. 이같은 생활세계는 “모든 인간이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동질적인”,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개개인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것은 재생산되었다. 그것은 행위의 사전양해적 맥락이었고 이를 배경으로 하여 무의식적으로 의사는 보여질 수 있는 객체가 되었고 하나의 문화적 창조물로 인식될 수 있었다. 그것은 이름붙여지고 분석괴고 전체적 맥락에서 검증되었으며 이에 따라 합리적 사고에 기초한 개인의 의사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기존에 분석이 불가능했던 세계로부터 개인을 자유롭게 해주었고 이를 하버마스는 “생활세계의 합리성”이라고 명명하여 근대성이 성취한 위대한 업적이라 보았다.만약 생활세계의 합리화가 잠정적으로 해방적 근대성의 성취를 의미한다면 합리적인 근대성은 스스로 둘러싼 환경을 포착 할 수 없음을 하버마스는 알았다. 생활세계가 파편화되었으므로 그 전체를 식별할 수 없기에 볼 수는 있어도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생활세계의 파편화). 분석적 성향의 근대성은 서로 다른 논리들과 개별적 환경으로 이루어진 부정합적이고 파편화된 세계에 직면하고 근대성에 내재된 합리성과 해방감은 훼손되어 이것이 근대적 불안의 원천이 된다고 그는 주장했다.합리성 그 자체는 곧 잠정적인 근대성의 성취이지만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하버마스는 ‘조종 매커니즘’을 돈, 법, 자본주의의 경제제도, 정부의 관료조직 등으로 규정하였다. 이것들에 의해 생활세계는 식민화되며 의사소통은 언어나 친밀성이 아닌 체계에 보다 의존하게 된다(생활세계에 대한 체계의 침투). 근대성이 지니고 있는 문제는 막스의 관점과 같이 단순히 생산의 본질이나 제도와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 생활세계가 사라져버릴때 발생하는 의사소통의 문제인 것이다. 근대적 생활세계는 합리성에 의해 파편화되고 체계에 의해 식민화된다. 체계는 친밀한 개인적 의사소통과 심지어는 언어까지도 유린하는 경향이 있다.하버마스는 의사소통 행위 이론을 정립하고 그 이론을 통하여 근대성을 분석할 수 있는 ‘일반적 발판’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의 분석방식은 푸코의 것과 중복되나 이 두 학자는 완전히 다른 두 전제에서 출발한다. 하버마스는 근대성속에서 상대적으로 완화된 합리성을 발견한다. 그의 합리성 개념은 수수한 수준으로 자기자신과 그를 둘러싼이점은 매우 기본적인 것이다. 예를 들면 푸코에 있어서 사회과학은 권력의 도구에 불과하다. 사회과하은 근대 국가에 의해 요구되는 많은 감시망을 창출한다. 하버마스에 있어서 사회과학은 근대성의 본질적 자기모순을 합리화한 생활 세계의 구현이란 용어를 사용한다.푸코와 하버마스는 둘 다 지성풍토에 크게 공헌하였다. 푸코를 읽는 것은 훌륭한 프랑스 지성과 프랑스 고전주의 및 그 분파를 접하는 것이다. 만약 지성의 변천에 관한 그의 ‘고고학적’ 연구와 훈육, 징계, 성구분에 관한 그의 탐색이 근대성의 배경과 특성을 탐색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가 남긴 유산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거대 권력이 문화적 담론들 하에서 행사된다. 이러한 권력은 널리 퍼져 존재하며 특정한 원천에 귀속될 수 없다. 근대성의 담론은 권력의 테크놀로지에 의해 구성되며 권력의 테크놀로지는 규율사회를 창출한다. 이 같은 생각은 널리 유행을 타고 있고 우리로 하여금 권력의 다양한 모습들에 대해 민감성을 갖도록 해주었다. 그의 후기 작품에서 푸코는 권력의 공간적 배경에 관심을 두었다. 그에 있어서 권력은 군주나 국가, 수도 같은 한 지점에 고정된 것이 아니었으며 문화적 담론들과 그들의 변천, 본래부터 불안정한 네트워크, 동맹, 전략 등을 통해 분산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권력은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행사되는 것”이고 “어떤 특권이 아니라 그 전략적 위치가 갖는 전체적 효과”리고 주장하였다.근대성에 관한 하버마스의 개념화는 푸코보다는 포괄적이며 추상적이다. 그는 역사가나 지리학자가 아니라 근대성을 개념화하고자 하는 비판론자이기에 그의 주장에는 역사적, 지리적 구분이 모호하다. 그가 공헌한 바는 의사소통 행위 이론에 관해서이다. 이 이론은 막스이론을 보강한 강력한 철학이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것이 미해결 상태에 있다.2. 만과 기든스푸코가 말년에 심사숙고했던 ‘전통적 생활 세계로부터 근대적 생활세계로의 천이’라는 주제는 영국의 사회학자 미셸 만과 안소니 기든스에 의해 전승되었다. 기든스는 보다 추상적이고 만은 중요한 네트워크는 이데올로기적, 경제적, 군사적, 정치적 권력원천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만은 권력을 크게 분류했다. 권력은 집합적일 수도 있고 분산적일 수도 있다. 권력의 조직적 도달범위는 수평적으로 광대할 수도 있고 수직적으로 밀도를 지닐 수 도 있다. 권력의 조직방법은 권위적일 수도 있고 분산적일 수도 있다. 이러한 범주를 구분한 의도는 사회를 분석함에 있어서 특정한 ‘공간적 형태’를 지닌 네트워크를 통해 수행하는데 편의를 주기 위함이다. 또한 그는 권력의 공간적 조직을 강조하는데 서로 다른 형태의 권력이 서로 다른 영역을 갖기 때문이며 권력이라는 것은 그것이 작용하는 영역을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기든스의 역사적 분석은 그가 명명한 전통적 농업 국가의 계급-구분사회가 근대 민족국가의 계급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분석에 앞서서 그는 인간의 사회적 행위의 본질에 관해 이해하고자 한 개념적 틀을 마련한 바 있다. 여기서 등장한 핵심개념이 구조화(structuration)로서 이 용어가 뜻하는 것은 사회적 행위란 개인적 선택과 사회조직 이 양자(동인과 구조)에 의해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사회 구조 그 자체는 상호작용을 통해서 생산되고 재생산된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사회구조가 지니는 구조적 특질들은 그들이 순환적으로 조직하는 관행들의 ‘매체이자 동시에 그 결과다’. 동인과 사회구조의 상호 침투는 구조화이론의 요체이다. 따라서 기든스에 의하면 구조화 이론은 개인과 사회 사이에서 사회 이론의 이원설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구조화 이론을 구축하면서 기든스는 시간과 공간을 고려하는 사회이론을 추구하였다. 그는사회 이론을 특수한 역사적 지리적 맥락과 통합시키고자 하였고 “동인, 구조, 맥락성”의 이론화 작업이 사회학, 역사학, 인문지리학의 중심쟁점임을 주장하였다. 이론화 작업은 사회가 근대화됨에 따른 사회 변화 패턴을 일반화하는 것이고 그가 이해한 사회적 과정이란 맥락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회변화의 패턴을 탐색하면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