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이 글의 제목에서 나오는 ‘원초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근본적이라든가 근원적이라는 의미 이상으로, 시간상 ‘처음’이라는 뜻도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교육의 원초적 세력’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 원초적 세력은 바로 그것이 현재의 교육사태로부터 시간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현재의 교육사태에는 잘 드러나지 않고 또 현재의 교육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가리어져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현재 교육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도대체 교육이라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모종의 근본적인 세력이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그 근본적인 세력이 무엇인가에 관하여 여러 가지 설명을 시도하겠지만, 대체로 말하여 그들의 눈은 당장 눈앞의 교육사태에 고정되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설명은 교육의 ‘원초적 세력’을 탐색하기 위한 이 글의 논의와는 다른 방향을 취할 가능성이 있다.또한, 이 글에서의 ‘원초적’이라는 말이 시간상 ‘처음’이라는 뜻을 나타낸다고 할 때, 이 ‘처음’이라는 단어는 인류의 교육사상 처음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성장과정에 있어서의 처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이 ‘처음’이라는 단어는 종족발생적인 의미와 개체발생적인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교육의 원초적 세력이라는 것은,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인류가 교육을 처음 시작했을 때 교육을 가능하게 했던 근본적인 세력을 가리키는 것과 동시에, 한 개인에 있어서 최초의 교육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세력을 가리킨다. 만약 우리가 이런 의미에서의 교육의 원초적 세력이 무엇인가를 찾아보려고 하면 우리는 종족발생적인 면에 있어서나 개체발생적인 면에 있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멀리 거슬러 올라가서 교육의 원초적 세력을 예시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교육의 형태를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오늘날의 교육의 형태와 거리가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다시 말하여, 그 두 가지 사례가 오늘날 우리의 눈에는 가리어져 있는 교육의 원없다. 오히려 그것은 교육에 관한 모종의 필연적인 의미를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필연적인 의미는 시간상의 거리로 말미암아 교육의 형태가 거의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진 오늘날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친다고 보아야 한다.Ⅱ. 파이데라스테이아먼저, 이 ‘남성동성애’라는 용어에 관하여 간단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우리말의 ‘남성동성애’라는 용어에 관하여 간단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우리말의 ‘남성동성애’로 변역되는 희랍어 단어는 ‘파이데라스테이아’이다. 이 단어는 ‘아이’를 뜻하는 ‘파이도스’와 ‘사랑하는 사람’-‘사랑받는 사람’을 ‘애인(愛人)'이라고 하면, 이것은 ’애자(愛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을 뜻하는 ’에라스테스‘의 합성어로서,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는 ’소년(少年)을 사랑하는 것‘을 뜻한다. 이 파이데라스테이아라는 단어는 당연히 우리에게 보다 낯익은 회랍어 단어인 ’파이데이아‘를 연상시킨다. 이 단어 역시 파이도스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아이를 기르는 것‘, 즉 교육을 뜻하며, 보다 넓게는 교육을 그 핵심으로 하는 문화 전체를 뜻한다. 마루는 파이데이아와 파이데라스테이아가 모누 파이도스에서 파생되었다는 점을 살려서, ’파이데이아는 파이데라스테이아에서 그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말을 그 원래의 뜻에 따라 옮기면, ‘“아이를 기르는 것”은 “아이를 사랑하는 것”에서 그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었다’고 하는, 하등 놀라울 것도 없는 진부한 말이 되어버리지만, 그 각각의 단어가 가지고 있었던 실지의 어의에 따라 ‘교육은 남성동성애에서 그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었다.’고 하는 말로 옮기면, 이 말에 대해서는 모종의 특별한 설명이 필요하게 된다.그 기원을 마루에 의하면 호메로스 시대(기원전 10세기 경) 무사들의 막사생활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희랍의 동성애는 오늘날의 학교교육과 조금이라도 유사한 형식적 교육이 생기면서 차차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니라, 교육의 밑바닥으로 숨어 버렸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질문을 희랍의 동성애에 관하여 한다면, 애자가 가지고 있는 정신적 자질 때문에 그와 육체적 관계를 맺게 되는가, 아니면 그와 육체적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애자의 정신적 자질을 본뜨게 되는가 하는 질문이 될 것이다. 적어도 고대 희랍인들에게는 이 질문이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그들에게 있어서 파이데이아는 바로 파이데라스테이아이며, 파이데라스테이아 없는 파이데이아, 즉 육체적 관계없는 교육은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Ⅲ. 태교보통의 경우에 ‘교육’이라든가 ‘가르친다’는 말은 각각 별도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두 개체 사이에 관계에서 성립한다. 태교는 우선 교육의 이 정상적인 조건에서 이탈되어 있다. 한 개체의 뱃속을 ‘별도의 공간’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몰라도, 그럴 수 없는 이상, 그 개체와 한 몸으로 연결되어 있는 또 하나의 개체를 ‘교육’한다든가 그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친다’든가 하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이것이 교육의 한 형태로서의 태교에 관하여 제기될 수 있는 최초의 의문이다. 태교라는 것이 과연 효력을 가지는가, 태교의 효력을 입증하는 과학적 근거가 무엇인가 등의 질문이 현대인에게 일차적인 관심사가 되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에 앞서서 태교를 과연 교육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는가 하는 개념적 질문이 우선적으로 제기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역사적 증거- 태교라는 용어가 기원전 2세기경의 고서 [대대예기]에서 처음 언급그러나 태교가 교육이라는 용어의 정상적인 어법에 어긋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만약에 태교가 그 어법에 어긋난다면, 희랍의 파이데라스테이아도 마찬가지로 그 어법에 어긋난다고 말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면 교육의 정상적인 어법에 어긋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교육 - 즉, 원초적 형태가 아닌, 오늘날의 형태로서의 교육 -이 갖춰야 할 여러 가지 개념적 조건 중에서 한 두 가지가 빠져 있다는 뜻이다. 만약 ‘각각 “별도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개체 교육의 형태로 보는 데에는 당시의 크세노폰이나 현대의 마루와 같은 사람들의 동찰이 필요했지만, 태교는 애당초 ‘교육’이라는 명백한 명분하에서 시행되었다. 어쨌든 파이데라스테이아와 태교가 모두 교육의 ‘원초적 형태’인 만큼, 거기에 이런 저런 개념적 조건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당연히 예상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파이데라스테이아와 태교는 교육의 원초적 세력이라는 관점에서 하나의 연속선을 이루고 있다. 이 두가지 중에서 태교는 파이데라스테이아보다 그 원초적 세력을 훨씬 더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고, 파이데라스테이아의 교육적 세력은 태교의 경우에 비추어서 비로소 올바르게 파악된다. 개체가 일단 모체에서 떨어져 나와서 별도의 공간을 차지하고 나면 그에게로 향한 교육적 영향력이 어쩔 수 없이 제한된다는 것은 우리가 늘 경험하는 일이다. 그는 이미 문자 그래도 하나의 ‘개인(個人)’으로서 독자적인 욕망과 의지를 가지고 있다. 교육학에서 아무리 강력한 교육방안을 고안하고 시행하더라도, 그는 ,만약하려고만 하면, 그 영향력에 저항하고 거기서 빠져 나갈 수 있는 온갖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이것은 모든 정상적인 교육이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교육의 본질적 제약이다. 태교는 이 본질적 제약에서 벗어나 있다.만약에 태교에 효과가 있다면, 다시 말하여, 만약 모체가 태아에게 어쩐 종류의 것이든지, ‘교육학’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태아는 도저히 그 영향력에 저항하거나 그 영향력으로부터 도피 할 수 없다.‘모체가 태아에게 교육적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할 때의 ‘교육적' 이라는 말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때까지 태교의 ’타당성‘을 입증해주는 근거로서는 예컨대 모체의 전반적인 건강생태나 영양상태, 그리고 특정한 약물 복용이 태아의 심신의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는 식의, 의학적 또는 정신의학적 연구 결과가 주로 원용되어 왔다. 그러나 몸과 마음에 의학적인 이상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의학적 관심사일 뿐, 교육학적 관심사는 아니다. 히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첫 번째, 현재의 형편으로 보면, 태교의 효과를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유일한 방법은 ‘과학적인’ 방법밖에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두 번째, 태교가 철학의 한 가지 항구적 과제인 ‘몸과 마음의 관계’라는 문제의 특수한 측면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그러나 예컨대, ‘기(氣)’라는 가설적 개념으로 인간을 파악할 때에는 사정이 이와 다르다. 氣는 현대 과학의 방법으로는 규명되지 않지만, 그와 동시에 그것은 심신의 관계문제를 해명하는 중요한 관건이 될 수 있다. 가령 우리가 사악한 마음을 품을 때, 우리 몸에는 사기가 흐른다. 이 사기는 정확하게 육체적 현상이라고도 할 수 없고 정확하게 정신적 현상이라고도 할 수 없으면서 사람 전체를 특정 짓는다. 비록 과학적 분석에 의하여 드러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사악한 마음을 품을 때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오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주관적 경험에 의하여 드물지 않게 확인된다.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태교의 타당성을, 과학적인 방법으로건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건 간에, 확립하는 것은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이때까지 이 글에서 태교에 관하여 말한 것은 하나의 교육 형태로서의 태교에 가정되어 있는 발상 그 자체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이 글의 관심은 태교와 파이데라스테이아라는 교육의 두 가지 원초적 형태의 병렬관계로부터 교육의 원초적 세력을 추론해 내는 데에 있었다. 양자의 병렬관계는 앞의 고찰에서 이미 명백히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교육은, 그 원초적 형태에 있어서는, 육체적 연결에 힘입어 정신에 영향을 미치려는 노력이라는 것이다.Ⅳ. 교육학적 시사태교와 파이데라스테이아에 관하여 알아보고 거기서 교육의 원초적 세력이라고 할 만한 것을 분석해내는 것은 그것을 통하여 오늘날의 제도화된 교육을 더 잘 이해하게 되리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파이데라스테이아는 제도화된 교육의 출현과 더불어 점차 사라졌다. 비유컨대 이것은 개체발생에서 태아와 모체를 연
18. “나는 그것을 안다”는 종종 이런 뜻이다: 나는 나의 진술에 대해 올바른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언어놀이를 알고 있다면, 그는 내가 그것을 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가 언어놀이를 알고 있다면, 그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어떤 것을 알 수 있는지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책의 초반부의 내용이다. 언어놀이가 뭔지에 대한 말은 언급이 되어있지않다. 나중에 후반부로 가면, 설명이 나오겠지만, 이책의 가장 큰 골자는 그의 지식관이란 생각이 들었다. 앎과 그 앎의 확실성을 얻는 과정을 나타낸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19. “나는 여기에 손이 있다는 것을 안다”란 진술은 그러니까 이렇게 계속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나의 손이니까.” 그 경우 이성적인 사람은 내가 그것을 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관념주의자도 역시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오히려, 실천적인 의심은 배제되어 있고, 그에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의심 뒤에는 여전히 또 하나의 의심이 존재한다고 말할 것이다.--이것이 환상이라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 보여야 한다.? 이렇게 간단하게 끝난다면 그가 아닐것이다.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안다”라는 말을 얼마나 조심스럽게 사용하고 있는지 읽어본 사람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그가 “안다”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한다.21. 무어의 견해는 실제로는. “나는 ···· 안다”라는 진술이 오류일 수 없다는 점에서 ‘안다’라는 개념은 ‘믿다’, ‘추측하다’, ‘의심하다’, ‘확신하고 있다.’라는 개념들과 유사하다는 것으로 된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라면, 발언으로부터 주장의 참이 추론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안다고 믿었다”란 형식은 간과된다.-- 그러나 이런 형식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오류는 주장에서도 논리적으로 불가능해야 한다. 그리고 언어놀이는 알고 있는 사람은 이 점을 통찰해야 한다; 믿을 만한 사람이 자기는 그것을 안다고 하는 단언은 그때 그에게 아 증거(증명)이 없다면, 우리는 그것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하는 것 같다. 내가 믿는 다고 하는그 것 자체도 의심을 하고 무엇 때문에 내가 믿고 있는지를 생각해봐야한다. 이런 말을 하고 있는거 같다.138. 예컨대, 우리는 그것들 중의 어느 것에도 탐구를 통하여 도달하지 않는다.예컨대 지구의 형태와 나이에 관해서는 역사적인 탐구에 탐구가 거듭되어 왔지만, 지구가 지난 100년동안 존재해 왔는지에 관해서는 그렇지 않다. 물론,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부모와 조부모로부터 이 시기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정보를 얻는다. 그러나 그들이 오류를 범할 수는 없는가?-- “헛소리! 도대체 어떻게 이 모든 사람들이 오류를 범하고 있단 말인가?” 하고 우리들은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논증인가? 그것은 단순히 어떤 관념에 대한 거부가 아닌가? 그리고 가령 개녕 규정이 아닌가? 왜냐하면 여기서 내가 가능한 오류에 관해 말한다면, 이는 우리의 삶에서 “오류”와 “진리”가 하는 역할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일고 생각난 것은 ‘반대를 위한 반대’가 떠올랐다. 우리는 이 지구가 얼마나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는지 안다. 우리 아버지들의 아버지, 그 이상으로 이 지구는 오래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적인 방법으로 이 지구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우리는 안다. 하지만, 그 방법이 아닌 예전에는 어떻게 알았을까?? 분명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내가 여기서 태어났고, 내가 태어난 곳이 지구이고, 그 전부터 있었데...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이전부터...” “너 그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어?? 증거대봐” 어떠한 대답을 했을때, 계속 딴지를 걸고, 'A는 이렇기 때문에 아닌거 아니야??‘ ’아니야, 그건 말이안돼.‘ 이렇게 취급해버리면 얘기가 더 이상 진전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거부를 위한 거부, 반대를 위한 반대가 되어버린다. 여기서 자칫 잘못 오류를 지적한다고 했는데, 이것이 반대가 되었든, 거부가 된다면, 이 것은 오류를 지적하려는 원뜻에 완전히 없다.(여기서 “할 수 없다”는 논리적으로 쓰이고 있다. 그리고 그 명제는 사람이 이런 상황들 속에서는 어떤 거짓된 것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만일 무어가 자기에게는 확실하다고 언명한 저 명제들의 반대를 진술한다면, 우리는 그와 견해를 달리할 뿐 아니라 그를 정신 나간 사람으로 간주하게 될것이다.156. 사람이 오류를 범하기 위해서는, 그는 이미 인류와 일치되게 판단해야만 한다.?여기서 말하는 ‘어떤 상황’이라는 것은 156번에 보면 ‘인류’라고 나오고, 내가 생각하기에는 ‘내가 지금 속한 이 문화, 내 환경’ 이라고 생각을 하고 이해했다. 우리가 속된 말로 이런 표현을 쓴다. “저사람 4차원이야.” 나 자신을 일반인이라고 했을때, 그런 사람은 일반인을 기준으로 (책에 나온 표현처럼) 미쳤다고 생각할 수 있다.여기서 지금 오류의 문제를 들었지만, 오류를 오류라고 확인하기 위한 절차, 사고 절차 모든 것을 말하는게 아닐까 생각했다. 이러한 모든 사고 과정이 모든이가 알 수 있는 범위안에서 이루어져야, 흔히 우리가 하는 말로 ‘말이 된다고 할 수 있는것이다.174. 나는 충분한 확실성을 가지고 행위한다. 그러나 이 확실성은 나 자신의 것이다.175. “나는 그것을 안다”고 나는 다른 사람에게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정당화 가 존재한다. 그러나 나의 믿음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당화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기준에서 누구나 확실성을 가질수 있다. 그러나 그 확실성은 객관적이진 못한다. 내가 남에가 ‘안다’라고 말하는 과정에서 그 명제 자체는 논리적일 수 있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말을 하기까지의 이유들도 있을 것이다. 왜? 그 과정은 나만이 알고 있는 과정이니까.. 여기까지는 정당화가 존재하지만, 그 이후부터가 문제라는 것이다. 나의 믿음. 이 추상적인 문제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렇게 말을 하는건 어떠냐는 것이다.?176. 상당수의 경우에 우리들은 “나는 그것을 안다” 대신 “사정은 이러하다; 그것을 신뢰하라”고 말할 수 있기 인데, 옳고 그른게 존재할까? 그리고 “나는...맹세한다.”라고 말을 한다면, 이것은 “나는 ....안다”라고 말을 할때 보다 더한 주관적 진리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믿는것 그 이상으로 내 모든걸 다 걸만큼의 자기 확신성이 있다는 뜻인데.....194. “확실하다” 라는 낱말로 우리는 완전한 확신, 모든 의미의 부재를 나타내며, 또 그것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설득시키려고 애쓴다. 그것은 주관적 확실성이다.그러나 언제 어떤 것이 객관적으로 확실한가?--오류가 가능하지 않을때, 그러나 그것은 어떤 종류의 가능성인가? 오류는 논리적으로 배제되어야 하지 않을까??인정한다.195. 내가 내 방에 앉아 있다고 믿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은 내가 오류를 범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와 오류 사이의 본질적 차이는 무엇인가?? 오류는 인지에서 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일단은 ‘오류’라는 단어를 쓸때 ‘행동에 오류가 있다’ 라고는 쓰지 않는다. 말에 오류가 있다. 문장에 오류가 있다. 뭐 이렇게 말을 하는 편인데, 이 경우에는 오류라고 하기 보다는 착각이라고 하는 게 맞지 않나? 싶다.196. 확실한 증거란 우리가 무조건 확실하다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에 따라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의심없이 행위하는 것이다.우리가 “오류”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의 언어놀이들에서 아주 특정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우리가 확실한 증거라고 간주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197. 그러나 어떤 것이 확실히 참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확실한 증거로 간주한다고 말하는 것은 헛소리일 것이다.? 이 문장에서 추리영화나 소설이 생각났다.‘범인은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다. 그 알리바이는 전혀 의심의 소지가 없다. 그래서 그가 범인 일 수가 없는데, 느낌상으론 그가 범인인데, 그가 범인이라는 것을 밝혀낼 방법이 현재는 없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탐정들은 거꾸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이해해봤다.341. 즉 우리가 제기하는 물음들과 우리의 의심들은, 어떤 명제들이 의심으나의 외침일 수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무엇이 따라 나오는가? 어쨌든, 내가 나의 믿음에 따라, 의심을 모르는 확신을 갖고 행위할 것이라는 것.361. 그러나 나는 또한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그렇다는 것은 신에 의해 나에게 계시되었다. 그것이 나의 발이라는 것을 신이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러니까 이 인식과 상충하는 것으로 보이는 어떤 것이 발생한다면, 나는 그것을 사기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366. “나는 안다”라고 말하는 것이 금지되고, 단지 “나는 안다고 믿는다”라고 말하는 것만이 허용된다면 어떻게 될까?367. “안다”와 같은 말을 “믿다”와 유사하게 구성하는 목적은, 그러면 “나는 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오류를 범했을때 그 진술에는 오명(汚名)이 따라 붙는다는 것이 아닐까?그 때문에 오류는 허용될 수 없는 어떤 것이 된다.?‘안다’라고 말한 이상 그 앎을 뒷받침해줄만한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안다’라는 것은 오류도 없고, 100% 진리이며, 반박이 없어야 한다.368. 어떤 사람이 자기는 어떠한 경험도 그 반대를 증명하는 것으로서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어쨌든 하나의 결단이다. 그가 그것을 위반하게 되는 일이 가능하다.392. 내가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은, 어떤 의심이 비록 가능하기는 하지만 필연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언어놀이의 가능성은 의심될 수 있는 것이 모두 의심된다는 것에 달려있지 않다.(이는 수학에서 모순의 역할과 연관이 있다.)?모든 것에 의심을 한다면, 그 과정 또한 복잡할 것이고, 의심의 가능성을 모두 열어둔다면, 결국 돌아오는 것은 허무라고 생각한다. 아까도 말을 했지만, 반대를 위한 반대, 의심을 위한 의심이 반목 되면 결국에 돌아오는 곳은 제자리가 아닐까?401. 나는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단지 논리학의 명제들만이 아니라 경험 명제의 형식으로 된 명제들이, 사고를(언어를) 다루는 모든 작업의 근본 토대에 속한다.--이 확언은 “나는....안다”라는 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