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기 전만 해도 신문을 읽을 때 별 문제점 없이 신문기사의 사실 그대로 받아들였다. 신문을 읽기 보다는 보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신문을 믿고 신뢰했다. 신문의 수용자들은 신문에 대해서 비판의식 없이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흔히 사실관계에 대한 다툼에 있어서 ‘신문에 났어.’ 라고 말하면 사실 확인은 종료되는 것처럼 우리 사회에서 신문이 미치는 영향은 크다. 특히 ‘조, 중, 동’ 이라고 불리는 부자신문, 거대 언론의 영향력은 신문시장의 70%이상을 차지하기 때문에 여론을 형성의 힘이 크다. 대학교 2학년 때 신문정보학 이라는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보수언론과 진보언론을 신문 기사를 비교하는 수업이었다. 당시(2003년) 이라크 전쟁이 이슈였기 때문에 이라크 전쟁기사가 대부분이었는데 파병에 대한 논조도 흔히 말하는 보수언론과 진보언론은 차이를 보였다. 당시 보수언론은 한 미 우호적인 관계를 생각해서 파병해야한다는 식으로 여론을 형성했고 진보신문은 명분 없는 전쟁이라며 파병철회를 요구하는 사설과 기사를 심도 있게 다루었다. 이때 신문기사를 스크랩하면서 나름대로 신문읽기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스스로 비판의식을 가지면서 신문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한겨레신문 손석춘 논설위원의 ‘신문 읽기의 혁명’ 이 책은 신문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독자에게 신문의 평면이 아닌 입체를 볼 수 있는 ‘편집적 안목’으로 신문을 읽기를 원한다. 이 책을 읽기 전 까지만 해도 나는 신문 편집은 단순히 신문을 읽기 편한 형태로 정리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편집은 내가 생각하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신문 지면이 만들어 지는 과정을 살펴보면, 취재기자가 사건을 취재하고 정치, 사회, 경제, 국제, 문화 등으로 나뉘어 있는 가 부 담당 취재부장들에게 원고가 수정되어 진다. 취재부장을 지난 원고는 편집기자들에게 옮겨진다. 사실 나는 편집기자라는 것이 따로 있는 지도 몰랐다. 나는 기사의 편집 역시 취재기자가 담당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편집기자는 기사의 위치나 비중 표제들을 결정한다. 편집 기자를 거친 기사는 편집부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쳐서 지면에 실리게 된다. 취재기자는 단순히 사건과 사실을 보도하지만 편집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기사의 크기나 표제 글씨의 크기, 제목의 선정성 등을 동원하여 신문사의 성격과 논지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신문을 펼쳐들면 1면부터 보게 되는데 1면기사 표제의 내용에 제일 큰 관심을 가지게 되어있다. 각 신문사는 자신의 성향을 1면에 머리기사에 드러내고 한 신문을 오래 보게 되면 신문의 보도대로 현실을 인식하는데 있어서 문제가 있다.저자는 신문은 평면이 아니라 입체적이어서 각 지면에 담겨 있는 현실은 서로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고 한다. 신문의 각 지면마다 반영된 우리의 사회적 삶 또한 총체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종합편집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실제 신문 시장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신문과 정치권력과의 관계에 대해서 쓴 부분이 흥미로웠는데 나폴레옹 시대의 ‘모니퇴르’는 정치권력 앞에 신문 편집이 굴절된 예로 나와 있는데 표제를 변화 내용을 보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정치권력과 신문과의 관계는 남의 나라, 옛날 얘기만은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 전두환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그가 정권을 잡았을 때와 죄인으로 심판을 받을 때의 기사의 정도가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또한 전두환 정권 때는 ‘보도지침’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했었고 보도지침에 의해서 신문의 편집 방향이 결정되었다.내가 이 책에서 가장 관심을 가지고 읽은 부분은 사설에 관한 것이다. 내가 언론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 학생이기도 하지만 신문을 읽을 때 사설 면을 제일 관심 있게 보기 때문이다. 사설은 신문사의 소위 데스크라고 말하는 직책 있는 사람들이 그 날의 사건에 대해 해설한다. 기사는 자신의 주장을 담거나 생각을 표현할 수 없지만 사설만은 설명문이 아닌 논설문이기 때문이다. 내가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을 읽을 때 가장 쉽게 신문의 논지를 파악 할 수 있었던 부분도 사설 면이다. 특히 조선일보 사설을 읽다보면 ‘이건 좀 심하다.’ 싶을 정도의 반(反)정부 적인 성격의 사설이 많았다. 책을 읽고 나서 사설에 나타난 신문사의 이권 지향적인 내용을 통해 대중의 공신력을 가진 신문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예를 들면 PCS통신 사업자 선정에 관한 사설이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이 당시 극과극의 사설 내용을 다루고 있다. 조선일보는「사업 능력 평가서 우열 판가름」, 중앙일보는「심사 기준 오락가락 신뢰성 흠집」이라는 사설을 기재했다. 두 신문의 정반대 편집과 사설 방향은 신문사의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시 엘지텔레콤은 조선일보가 개입된 통신사업자였고, 중앙일보는 탈락한 에버넷과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조선일보는 세무조사 결과 탈세한 혐의가 드러난 사주 방상훈 사장이 구속되자「신문사 발행인 구속되다」라는 사설을 통해 격렬히 비판한다. 무지한 사람들이 보면 신문에서 신문탄압이라고 하면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 역시 아무것도 몰랐을 때는 언론탄압이라고 하면 그런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사회에 거대 언론사의 구조를 보면 내용에 있어서 가치중립적이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더욱이 내가 놀란 것은 사설도 밤사이에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사설은 뉴스기사와는 달리 속보성을 다투지 않기에 거의 바꾸지 않는 게 일반적인데 2002년 12월 19일 16대 대통령선거가 있던 날 아침 사설을 전격 교체했다. 당시 조선일보가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고 있었지만 밤사이에 사설까지 바꾸는 것은 편파보도라는 비난을 들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대통령 선거 날 표심을 잡으려는 여론몰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서도 그동안 내가 모르고 지나쳤던 많은 기사 속에서 편집의 의도와 방향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무지했던 내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어렸을 때부터 나의 장래 희망은 기자였다. 그런데 요즘은 미래에 대한 방향을 잃었다. 무시무시한 언론고시를 통과할 자신도 없지만 내가 세상을 알게 되면서 신문의 이면을 알게 되면서 기자라는 직업에 대해 회의가 든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없음을 알았다. 사주나 신문사의 구조 속에서 충실한 사람이 그 조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음을 알았다. 얼마 전 한 설문조사에서 신문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느냐? 라는 질문이 있는 설문지를 받은 적이 있다. 나는 40% 항목에 동그라미를 쳤다. 내 스스로도 신문을 신뢰하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신문기자가 꿈꿀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우울해졌다. 주변에서 ‘조, 중, 동’ 신문에 관해 비판을 하고 있고, 이 책 역시 은연중에 비판하고 있다. 나는 한겨레신문을 오랜 기간 구독했었고 지금은 조선일보를 구독하고 있다. 내 생각은 그렇다. 무슨 신문이든지 골고루 보면서 나름대로 가치 판단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음식도 한 가지 음식만 먹으면 질리듯이 신문도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내 나름대로는 진보적인 성향에 가깝다고 해서 적어도 나는 조선일보를 거부한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조선일보를 보지 않으니깐 조선일보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비판만 하고 있었다. 구독하게 되면서 기사의 문제점을 내 스스로 조금씩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신문에 대해 가치판단을 하면서 조금씩 능동적 독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고...‘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이 책을 내가 처음 알게 된 것은 3년 전이다. 2살터울인 오빠가 보고 있었다. 그때 제목만 힐끔 본 정도라고 해야 할까? 3년이 지난 지금 나는 과제를 하기 위해 다시 책을 들었다. 학교 오가는 길에 지하철에 읽으면서 한 일주일은 들고 다녔지만 서간문이라서 전체적인 스토리가 없어서 인지는 몰라도 읽어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어보면서 나는 마음속에서 찡한 무언가를 느끼게 되었다.이 책은 신영복씨 개인이야기이며 편지이다. 작가가 20년 동안 감옥에 살면서 가족들에게 쓴 편지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책에서는 작가가 왜 20년을 감옥에 살았는지 나와 있지 않았다. 책 내용의 주를 이루는 것은 가족애, 사색을 통한 좋은 글들, 저자가 읽은 책등에 관한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을까 하는 마음에 인터넷을 찾아보았다. 인터넷을 찾아보고 나서야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88년 8월 15일 특사로 석방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사실 나는 그 시대에 살고 있지 않아서 또 내가 우리나라 현대사에 관한 지식이 없어서 이념이니 사상이니 하는 것은 잘 모른다. 하지만 살인을 저지른 것도 아닌 사람에게 그만한 죄 값을 치르게 할 수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 봐야할 문제이며 이념과 사상의 차이로 억압받았던 수 많은 사람과 그 죄명 하에 죽어갔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글을 다 읽고 나서 내가 추측하건대 옥중서간이라서 특히나 죄명이 민감한 사안이니만큼 검열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책에서는 자신이 왜 감옥에 들어오게 되었는지가 나와 있지 않은 것 같다.이유야 어떻든 내가 이 책을 읽고 온 몸이 찡할 정도로 느낀 것은 작가의 인간애이다. 작가의 글 한 구절 한 구절에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이 전해져 왔다. 청구회 추억에서는 어린 아이들과의 우정이 나와 있다. 작가는 어른이었지만 기꺼이 친구가 되어주고 선생님이 되어주었다.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내용을 읽어가면서 어느새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지어졌다. 어른과 아이와 친구가 될 수 있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 눈높이를 아이들에게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책의 거의 첫 부분에 있는 이 글만 보고서도 나는 작가가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웃의 체온에서는 온기 한 점 없는 냉방에서의 동료들의 체온을 통해 ‘겨울의 의미’와 ‘벗’의 의미에 대해 이해했다고 한다. 이 책의 표지에도 나와 있지만 여름 징역살이라는 제목의 편지에서는 여름의 징역살이가 옆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어서 겨울 징역살이 보다 더 힘들다고 표현했다. 글귀 하나하나에 안타까운 심정을 잘 표현했기에 작가의 인간애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글이었다.인간애와 더불어 책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가족애이다. 인간을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가족애 역시 두터운 것은 당연한거지만 작가는 감옥이라는 폐쇄된 공간에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것 같았다. 부모님에 걱정에 대한 염려를 하며 아버지께 쓴 편지에서 염려보다는 이해하기를 원한다. 그러면서 편지의 내용이 염려보다는 대화의 편지가 되기를 원한다. 작가의 그런 바람으로 인한 것인지는 몰라도 실제로 뒷부분에서 볼 수 있는 편지의 내용이 염려도 있지만 아버지의 책에 대한 내용이나 자식이지만 아버지께 드리는 조언의 글로 보아서 상당부분 서로가 이해하는 관계로 발전 한 것 같았다. 이해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쉬운 것 같지만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서 많은 부분은 이해보다는 걱정이 앞선다는 점에서 부모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자식, 그것도 옥중에 있었던 작가는 부모님께 쓴 편지마다 자신의 처지에 대해 불효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세월의 흐름에 대해 어머니께서 할머니가 되고 늙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지 못한 안타까움, 어머니 건강에 대한 걱정이 잘 나와 있다. 또 내가 호기심 있게 생각한 것은 형수님과 계수님과 작가의 관계이다. 책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형수님과 계수님과 편지를 통한 많은 대화를 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가족관계에 있어도 형수나 계수는 그리 편하지 않은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분 생각을 같이하고 있음을 엿 볼 수 있다. 편지 내용의 대부분은 옥바라지에 대한 감사와 집안소식, 그리고 조카들 커 카는 이야기, 그리고 서로에 대한 정신적인 교감이 잘 드러나고 있었던 것 같다.이 책은 서간문이지만 무엇보다 자기성찰이 강한 글이다. 내가 본 책 중에서 제목이 가장 잘 어울리는 몇 안 되는 책 중의 하나가 되었다. 작가는 비록 옥중에 있었지만 계절의 변화에 대한 느낌이나, 시간의 흐름, 자신이 옥중에서 경험한 것과 배운 것을 일반 사람보다 진지하고 깊이 있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쉽게 지나치는 아침의 참새소리나, 길가에 잡초를 보면서 사색 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만약 20년을 감옥에 살았더라면 이라는 생각을 잠깐 해보았는데 나는 작가처럼 사색하면서 지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니 작가처럼 지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생각했다. 감옥이라는 단절된 곳에서의 인간관계를 지속하는 것과, 작가와는 다른 세계에서 살다온 사람들 속에서 평정심을 유지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시종일관 여유를 잃지 않은 모습이다. 물론, 사람을 그 사람의 지식수준이나 됨됨이에 따라서 나눌 수는 없지만 작가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에게서 오히려 배우고 있었다. 20년의 감옥살이를 통해 인격적으로 더 성숙해져가는 것 같았다.이 책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작가는 다독을 통해 남다른 통찰력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는 고서를 많이 읽고 있음을 알 수 있었고 역사의식이 투철해 보였다. 인디언의 편지에서는 서구적인 것을 보편적인 원리로 수긍하고 우리의 것은 항상 특수한 것, 우연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사고의 식민성’을 안타까워하였고, 매직펜과 붓이라는 제목의 편지에는 각각을 서양의 사고와 동양의 정신에 빗대어 표현하였다. 그리고 작자 자신은 역시 붓을 선호하다고 말하고 있다. 작가의 역사의식은 역사학자인 아버지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고서를 즐겨 읽으면서 다독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신영복씨의 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통해서 작가의 인간적인 모습과 가족애, 역사의식 등 작가의 대부분을 알 수 있었지만, 내가 감동 받은 것은 지식인으로서의 모습이다. 그 중에서 특히 감옥에 있긴 때문에 실천하지 못하는 것에 안타까움이다. 1974년 아버님께 쓴 편지에서는 작가는 결코 많은 책을 읽으려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일체의 실천이 배제된 조건하에서는 책을 읽는 시간보다 책을 덮고 읽은 바를 되새기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하였다. 피서(避書)의 계절에서는 지식은 책 속이나 서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리된 경험과 실천 속에, 그것과의 통일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했다.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작가의 마음이 잘 나타난 글이 특히 많이 볼 수 있었다.
제러미 리프킨씨에게...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의 대학생입니다. 당신이 지은 책 소유의 종말을 읽고 여러 가지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대생으로 지금 소유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습니다. 예쁜옷, 악세서리, 명품가방, 그것도 모자라 대학생이라면 사치라고 생각할 수 있는 차도 갖고 싶습니다. 소유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욕망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그것은 정말 끝이 없는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공부를 한다고 하지만 그건 그럴듯한 말에 불과하고 결국은 좋은 집과 좋은 차등을 소유하기 위해서 많은 돈을 벌고 싶어 하고 또 많은 돈을 벌기위해 좋은 직장을 구하려고 하고 그것을 위해 좋은 학교에 다니려는 것 같아요. 결국 말 그대로 잘 먹고 잘 살기위해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전쟁과도 같이 치열하게 사는 것 같은데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것을 소유하려는 것이 아닐까요? 제가 당신의 책에 흥미를 갖게 된 것도 그것 때문인데요. 소유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임이 분명한데 당신의 책 제목은 소유의 종말이잖아요. 전 과연 소유의 종말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으로 시작해서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저의 단편적인 생각과 좁은 소견으로 읽게 된 당신의 책은 내 생각이 짧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먼저 당신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소유라는 개념이 없어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러미 리프킨씨가 말하는 소유의 종말은 이 책의 원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접속의 시대라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시장은 네트워크에게 자리를 내주며 소유는 접속으로 바뀌게 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네트워크 시대로 바뀌면서 소유의 비중은 점점 줄어들게 될 것이고 소유하지 않고도 우리는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는 논리였습니다. 빌려서도 이용할 수 있고 회원제로도 이용할 수 있게 되고요. 소유의 종말이라는 책 제목의 개념 자체가 그러한 의미를 쓰였다니 동감하게 된 부분이 많습니다. 저도 인터넷이라니 정보의 바다에서 서핑하는 것을 즐기고 있거든요. 무엇이든 궁금한 것이 있으면 책보다는 인터넷이 편하고, 중독처럼 인터넷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많이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인터넷은 주인이 없다는 말이 있듯이 인터넷이 보편화 되면서 벌써부터 우리는 많은 것을 소유하지 않고도 또한 대부분은 돈을 들이지 않고 빠른 시간에 이용 할 수 있으니까요. 지금은 네트워크라는 거대한 통신망만 있으면 되는 것 같아요. 내가 원하면 필요한 자료를 쉽게 얻을 수 있고 그 자료는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원할 때 잠시 이용만 하는 것이니까요. 당신은 소유라는 개념이 약화되면서 변하게 되는 개인과 사회의 모습을 통찰적으로 잘 접근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소유의 종말 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네트워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생산과정, 장비, 상품과 서비스가 빠른 속도로 용도 폐기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소유하는 것은 불리하고 단기적으로 접속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기업들은 자본 설비를 구입하기 보다는 필요한 자본을 빌려쓰고 단기 비용이나 경상비로 처리한다고 했지요. 모든 것은 추상화되고 탈물질화 되는 가사현실이라는 하이퍼 세계에서 재산과 소유라는 낡아빠진 관념은 설득력을 잃어간다는 간다고 했습니다. 아웃소싱이라는 것이 새롭게 떠오른다는 말에는 정말 공감을 하기도 했지요. 아웃소싱은 쉽게 말해서 물리적 자본과 업무에 대한 내부 소유권을 포기하고 외부 하청업체의 지원과 시스템을 필요에 따라 이용하자는 것인데 이미 많은 대기업의 경우 물리적 자본의 임대와 업무의 아웃소싱으로 변화하고 있는 추세니까요. 당신은 아웃소싱에 대해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지요. 시카고에 본사를 두고 쟁쟁한 기업들의 자산을 관리해주는 부동산 커설팅업체의 마이클 실버 사장은 지금 소유한 자본을 몽땅 다시 임대하는 방안을 강구하라고 조언한다. 또한 소유는 이제 낡아 빠졌으니 굶주린 시장에 팔아넘기고 남은 돈으로 접속하라는 것이라고요. 당신은 접속을 중점으로 한 경영은 소유를 중점으로 하던 시장경제와는 달라서 새로운 시장은 네트워크가 담당한다는 것을 시종일관 주장으로 내세우고 있고요. 물론 당신이 내세우고 있는 리스나 아웃소싱의 개념을 상당부분 인정하고 있지만 극단적인 소유의 약화 개념에 대해서는 조금 반대되는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웃소싱이 널리 퍼지는 현상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기업의 규모를 늘리기 위해 노력하는 기업들이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아쉽게도 당신의 책에서는 아웃소싱 그룹인 나이키와 같은 예로 독자들을 납득시키고는 있지만 반대되는 기업에 대한 언급은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책에서 소유의 종말을 노동의 종말과 연관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분명 앞으로의 세계는 당신의 말대로 노동은 거의 줄어들 것입니다.산업은 점점 자동화 되어가고 있고 인간의 노동력은 최소로 하게 될 것이고 약간의 기계조작만이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했지요. 산업 시대에는 인간의 노동이 상품을 생산하고 기본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투입되었지만 접속의 시대에는 소프트웨어나 로봇이 농업, 제조업, 서비스 부문에서 인간의 노동을 점점 대체할 것이라고 했지요. 농장, 공장, 많은 화이트칼라 서비스 산업은 빠르게 자동화되고 단순 반복 수작업으로부터 개념적 이해를 요구하는 고도의 전문 작업에 이르기까지 점점 많은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이 21세기에는 생각하는 기계로 처리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당신은 현재 인구의 극히 일부분만을 가지고도 늘어나는 인구에게 충분한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며 2050년이 되면 성인 인구의 불과 5퍼센트만으로도 기존의 산업 영역을 차질 없이 운영하고 관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농장과 공장, 사무실을 어느 나라에서나 흔히 볼 수 있고 불과 50년 뒤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당신의 말대로라면 인간의 노동력은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당신의 말대로라면 왠지 두렵게 느껴집니다. 50년 뒤에도 만약 제가 살아있다면 그때쯤이면 나이가 많아서 저는 일을 못하고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의 노동이 없어진다는 것은 너무 극단적인 것입니다. 많은 부분 저자의 말에 동감을 하긴 하지만 인간이 땀 흘린 만큼의 대가를 얻고 일을 해서 얻을 수 있는 보람이 사라진다는 것은 지나친 생각일 것 같아요. 노동의 가치와 의미는 어떤 것보다 숭고하게 생각됩니다. 사람들이 점점 편해지기를 원하고 있긴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땀흘려 일한 대가의 소중함을 많은 사람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신의 말대로 노동대신 사람들은 문화에 더 접근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지요. 그리고 책의 대부분은 미국의 예를 들고 있었어요. 소유의 종말이라는 것 자체가 미국 사람들의 소비형태를 중심으로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사실상 선진국을 나라들을 제외하고는 아직 많은 나라는 인터넷이 보편화 되어 있지 않고 있으면 또한 전 세계의 많은 인구가 아직도 의식주와 같은 기본적인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는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당신이 말하는 소유의 종말이나 접속의 시대는 선진국을 대상으로 한 조사해서 비롯해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당신은 어렵고 때로는 원론적인 내용을 제 나이에도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면서 설명해 놓기는 했지만 어려운 용어나 아직 지식의 양이 부족한 나에게는 어렵게 느껴져서 잘못 해석한 것일지도 모르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