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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축과 경제사이의 관계성 읽기
    건축과 경제 사이의 관계성 읽기- 소비 공간을 통해 본 건축과 경제사이의 관계건축은 사회가 요구하는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문화적 기능을 수용한다. 즉 건축이란 필연적으로 사회적 요구를 수용하며 사회 환경의 일부를 구성하게 된다. 이렇게 다양한 사회적 요구를 수용하는 것들 중, 나는 다른 것들 보다 경제적인 요구, 즉 건축과 경제와의 관계에 주목하여 서술하려 한다. 경제와 가장 관련 된 행위는 소비라고 생각하고, 그 것은 인간생활에 있어서 가장 일상적인 범주에 속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가장 기본적인 욕구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소비 행위는 인간의 다른 기본적 활동과 함께 지속되어 왔으며, 이런 행위를 성립 또는 만족시키기 위한 물리적 장치로서의 소비 공간 역시 인류의 역사와 함께 발전해 왔다. 특히 근대사회의 등장과 함께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발전함에 따라 과거에 비해 훨씬 다양한 형태의 소비 공간이 양산되어 왔다. 오늘날에는 단순히 상품을 사고 파는 기능을 넘어서 복합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소비 공간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현대사회에서 소비란 행위는 생활의 일부이며, 정체성의 표현수단이기 까지 하다. 그리고 다양한 사회문화적 의미를 창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경제체제의 변화에 따른 건축공간의 변화,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건축만이 아니라 다른 사회문화적 상황에 까지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좀 더 생각해 보려고 한다.소비 공간은 건축, 상품, 인간으로서 구성되어지며, 이들 간의 상호작용으로 소비 공간은 형성되어 진다. 이런 소비 공간은 본질적으로 상품판매라는 목적과 과정이 존재하며, 이런 공간들은 과거에서부터 현대까지 가로와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특성 중 하나였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가로와의 관계가 중요한 소비 공간의 변화 과정 속에서 아케이드의 탄생은 건축적, 경제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최초로 유리지붕이 덮힌 파리의 오클레앙 갤러리(Galerie de Ocleans, 1828-30)은 문화적, 산업적 발전의 시기에 존재한 한 사회의 특수한 필요와 욕망에 반응하기 위한 새로운 발명품이었고, 이 욕망이란 상품에 대한 생산과 소비의 충족이었다. 그리고 아케이드 후에 나타는 소비공간은 어느 누구나 알고 있는 백화점이다. 최초의 백화점은 파이의 봉 마르세(Bon Marche, 1852)였다. 이것은 판매라는 행위보다는 구매라는 행위가 소비 공간에서 좀 더 중요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자유롭게 떠도는 욕망을 자극하여 의도치 않은 구매까지 조장하게 되는 소비 공간을 만들어 내게 된다. 이러한 백화점은 19세기 소비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되며,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근대사회의 소비욕구와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표본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후 1950년대 후반부터 북미지역을 중심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쇼핑몰은 백화점과는 또 다른 형태의 소비 공간을 만들어 낸다. 이런 쇼핑몰은 백화점 2~3개 정도의 규모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쇼핑몰은 기존의 아케이드와 비슷한 형태를 가지고는 있으나 아케이드가 도시공간의 활성화에 기여했던 것과는 달리 쇼핑몰은 사람이 사는 기존의 도시와는 완전히 격리되어 존재하였고, 이것은 하나의 인공의 도시와도 같았다. 이것은 도시외곽에 위치하였으므로 자동차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고, 주차장이라는 공간이 필연적으로 필요하게 되면서 주차장에 둘러싸인 마치 인공의 섬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의미에서 쇼핑몰은 가로에서부터 완전히 벗어난 새로운 형태의 소비 공간이며, 이것은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생활방식과 소비문화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기존의 아케이드, 백화점, 쇼핑몰과는 또 다른 소비 공간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과거에는 없었던 대형 할인점, 편의점, 의류상가 등이 나타나고 있으며 심지어는 방송매체나 인터넷을 이용한, 즉 사이버 공간을 이용한 판매 형태가 등장하고 있다. 이로 인해 백화점이나 쇼핑몰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해오던 소비 공간들이 대치되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이렇게 새로운 형태를 가진 소비 공간들은 또 다른 소비 방식으로 인해 새로운 형태의 소비문화를 유도할 것이다.이런 소비 공간들의 발전과 변화는 당연히 소비를 하는 행위를 편리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소비 문화역시 변화하게 만들었고, 이것은 사회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게 된다. 과거의 계급사회에서는 계급이라는 것이 그 어떤 것들 보다 우세한 역할을 차지하게 되었지만, 비계급사회가 되고 소비 문화라는 것의 비중이 커짐에 따라 사회적인 계층에 대한 인식이 경제적 능력에 따라 바뀌는 사회가 되어버렸고, 이는 그대로 소비 공간의 형태와 구조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런 변화는 일반적으로 누구에게나 열려있어야 하는 소비 공간이 전략적으로 특정 소비층을 위한 공간 형태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리고 이런 특정 소비층의 소비 행태는 이제는 소비 공간의 구성을 만들어 내는데 있어서 가장 큰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소비 공간들은 시대의 변화에 민감한 특정 소비층들의 소비 욕구에 맞춰서 빠르고 다양한 변화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맞이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종종 백화점을 방문하였을 때 리모델링을 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고, 리모델링 후에 기존의 소비 공간과는 다른 큰 변화를 가지게 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아마 계속적으로 소비 공간들은 새로운 형태의 소비문화와 행태를 만들어 낼 것이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소비 공간들은 다른 공간들, 예를 들어 사무 공간, 주거 공간들에 비해 더 자주 변화할 것이며, 그것들이 변화하는 행태는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끊임 없이 반영할 것이고,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또한 제공할 것이다.
    사회과학| 2008.10.01| 3페이지| 1,000원| 조회(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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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숭례문 복원에 대한 합리적 방향
    2008년 제1학기동양건축사 과제숭례문 복원의 합리적 방향숭례문이 불타 없어졌다. 2008년 2월 10일이었다. 나는 그 날 친구들과 스키장을 가는 길이었다. 버스 라디오에서 들리는 뉴스에서는 금방 진화될 것처럼 했기에 나는 아무런 걱정도 안한채 잠을 청했다. 숙소에 도착한 후 TV에서 나오는 끔찍한 모습을 접했다. 숭례문이 없어졌다. 우리나라 국보 1호인 우리나라의 얼굴이 없어진 것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우리들은 그것에 대해서 얘기를 시작했다. 밤새 술과 함께 우리는 숭례문이 없어진 것에 대해서 얘기를 했다기 보다, 우리나라의 근본적인 문제점에 대해서 얘기를 시작했다. 확실한 시스템의 부재라던지, 공무원들의 일처리에 대한 문제등 다양한 것들에 대해서 얘기를 했다.몇일 뒤 명동에 갈 일이 있어서 겸사 겸사 숭례문에 가봤다. 사람들의 발길을 많았었다. 꽃을 두고간 사람들, 그 앞에서 일인시위를 하는 사람들, 그 후에 뉴스에서 보이는 모습은 천에 가려져서 공개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제 복원을 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숭례문의 모습을 100% 그대로 복원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 100% 복원을 하는 것만이 가장 합리적인 것인가에 대해서 의문이 생긴다. 가끔 명동이나 서울역에 갈 때마다 보게 되는 숭례문에서 나는 그냥 도시와 아무런 관계도 맺지 못하고 그저 박재처럼 가운데 서있는 모습이 과연 문화재를 지키는 것인가, 외부로 공개되어 있다면 그 주위와 숭례문과 관계를 맺으며 숭례문의 가치를 더 키울 수 는 없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번 레포트에 많은 주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숭례문 복원의 합리적 방향이라는 주제를 정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이다. 얼마전에 도코모모 공모전에서 당인리 화력발전소의 재개발에 대한 것이 주제였다. 당인리 발전소 역시 근대 산업문화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숭례문의 복원을 하는 것을 이것과 같이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 있기에 주제 선정에 있어서그다지 고민을 안하고 이것을 정하게 되었다. 이제부를 취해야 한다. 그리하여 문화재에 상주 인력을 배치하여 즉각적인 초동조치 (발생시 5~10분) 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문화재청과 소방방재청, 지자체와의 확실한 진화체계 구축도한 필요하다. 숭례문이 불타고 있는 와중에 문화재청과 소방방재청 그리고 지자체와의 의견이 하나로 일치 되지 못하여 소방관이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몇 분간 멍하니 불에 타는 숭례문을 바라만 봐야 했던 안타까운 모습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다. 초기에 진화만 했더라면 일부분만 타 없어졌을 것이다. 불길이 났을 때 초반 1~2분 사이에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을 수있기에 우리는 확실한 초기 진화를 위해 진화체계 구축이 필요하다.넷째로는 문화재의 재난관리 교육과 훈련을 해야만 한다. 문화재에 대해서 전국민이 가지는 인식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꼭 보존되어야 할 것임을 인지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방차원에서 홍보나 캠페인등을 벌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일반 시민들도 문화재에 대한 보존적 가치를 인지하고 있어 화가 나서 방화를 하더라도 문화재에는 하지 않는 의식구조의 전환이 필요하다.2. ICOMOS와 관련하여 숭례문의 합리적 복원방법.숭례문의 우리나라의 국보 1호이다. 숭례문은 태조 7년, 1398년에 창건하여 세종 30년 1448년과 성종 10년 1479년에 다시 손질하여 고쳤고, 한국전쟁 중 부분적으로 파손되었는데 그것을 61년과 63년 전면적으로 해체하여 수리하였고, 마지막으로는 97년이 마지막이었다. 62년에 국보 1호로 지정이 되었다. 그리고 95년 중구청 관리하에 유지 보수 되었다.이런 숭례문은 2008년 2월 10일 20시 50분경 고의적 방화로 인해서 불이 났으면, 2월 11일 2시 5분경 정부는 완전하게 화재가 진압되었음을 알렸다. 하지만 화재 진압 후 구조물이 자신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해 무너짐으로서 지금의 처참한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화재는 2번에 걸쳐서 이루어졌는데 1차 화재는 2층 문루부분에 시너로 인해 마루와 기둥부분으로 화재가 번졌다. 이것이 불길을 일찍 잡지 하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그대로 복원 시킬 것이가 하는 의문점이 생긴다. 분명 숭례문의 모습 자체에 변형을 주어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그 주변 환경을 예전과 같이 그대로 나둘 것인가 하는 문제에 조금 더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예전의 숭례문은 모습은 바쁜 서울 시내에 너무나 외롭게 그저 서 있었다. 그것이 과연 올바른 보존 방법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ICOMOS에 의하면 증축에 있어서 건물의 중요한 부분, 전통적 환경, 구성의 균형과 주변과의 관계를 깨뜨리지 않을 때에만 허용한다는 글귀가분명히 존재 한다. 이것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예전에 외롭게 서 있는 숭례문의 모습으로 굳이 복원할 필요가 없다. 주변과 균형과 관계를 생각해서 그 곳에 어떤 장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쉽게 생각하면 그 주변에 공원을 만들어서 사람들의 접근을 보다 쉽게 하여 사람들이 숭례문을 경험하는데 좀 더 거리를 가깝게 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ICOMOS를 읽어보면 우리는 분명 그것에 대해 진지한 생각을 안해봤을 거란 생각이 든다.역사 유적지에 관련한 규정을 보면 ‘ 기념물의 완결성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기념물이 품위 있게 나타내지기 위해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라고 기술되어 있다. 방화가 이루어지기 이전의 숭례문이 과연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가? 라는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던져 본다면 대답은 ‘아니오’ 일 것이다.우리나라, 대한민국의 문화재청은 분명 ICOMOS에 대해서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ICOMOS의 내용을 몰랐던 시절에는 숭례문을 보고 ‘아. 국보1니깐 주변을 건들면 안되겠지?’ 라는 생각으로 지금의 외로운 모습을 그저 바라보았지만, 지금의 생각은 아니다. ICOMOS의 내용을 보면 분명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문화재는 보존되어야 한다. 하지만 단순히 박재처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가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하지만 이런 변화를 가하는데에 있어서 분명 전문가들의 의견들이 모아져야 할 것이다. 건축가부터 시작해서, 사학자들, 허용하였다. 그리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들, 렘 콜하스라던지, 카즈요 세지마등 다양한 건축가들이 참여하여 기억속에 잊혀져 가고 있던 광산건물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그곳에 디자인학교라든지, 박물관등 문화재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 내고 있다. 독일의 졸페어 라인 광산을 재생한 사례에서 보면 당시의 건축적 가치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미래 지향적인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는 국제적으로 유일한 프로젝트로서 문화재 보존을 전제로 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재생을 함에 있어서 역사적인 요소들은 그대로 보존, 유지하면서 새로운 프로그램을 기존공간에 담는 방식으로 리모델링 하였다. 즉 문화재를 훼손하는 일은 없었다는 말이다. 숭례문이 산업, 기술 문화재는 분명 아니다. 하지만 문화재로 인정된 시설물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그것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현재가 원하는 형태로 리모델링하는 것이 바람직한 보존 방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부분이다.둘째로는 베트남의 예를 들 수 있다.베트남은 수도의 종교시설물들을 리모델링 하기 시작했다. 종교시설물과 관련해서 그 주변경관은 1985년 국가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었다. 중심적인 변형을 준 곳은 호이안 거리라는 곳인데, 과거의 모습과는 다르게 발전해 감에 따라 기존에 존재하였던 종교 시설물들을 현재 발전해나가는 모습에 관계해서 그것들도 적당한 변화를 취한 것이다. 그리하여 형태와 용도를 유지하기도, 용도자체를 바꾸기도, 때로는 형태와 용도를 모두 없애기도 하면서 지금의 가로와 적당한 관계를 맺어가면서 변화시켰다. 그리하여 기존의 형태를 완벽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는 건물도 있는 하면, 완전히 바뀐 사례들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숭례문에 그대로 접목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노이의 경우에는 건물들도 많았었고, 그것 모두가 문화재가 아니고 거리 경관이라는 것이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니 말이다. 숭례문은 우리나라의 상징물 중하나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완벽히 없앨 수는 없다. 분명 숭례문은은 다른 건물들에게 뭍혀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다.우리가 이것을 바탕으로 바람직한 복원방향을 몇 가지 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독일의 경우에서는 숭례문의 복원은 100% 그대로 하나, 그 주변을 예전과 같이 약간의 잔디만 까는 등의 소극적인 모습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베트남의 경우, 숭례문만이 아니라 그 주변의 경관을 같이 바꿔주면서 숭례문뿐만 아니라 주변의 경관을 같이 키우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에서 곧 진행되어질 만석거의 원형 보전 모습이 나중에 숭례문 복원의 롤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만석거가 원형이 보전되는데 있어서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 질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수원시나 정부에서는 분명히 외국의 사례들을 참고할 것이다. 그리고 주변의 컨텍스트부터 역사적 가치등 다양한 부분에 걸쳐서 수많은 회의를 할 것이다. 분명 만석거는 지금의 모습보다 나은 형태로 복원되어야 할 것이다. 숭례문 역시 어떠한 방식이든 불 타 없어지기 전의 모습보다는 나은 방향으로 복원되어야 할 것이다.4. 숭례문 복원과 함께 이루어져야 할 장소성 구현 방법.현대 도시의 맥락성에서 역사 문화 환경은 한 두 개의 오브제로서의 건물이나 역사 유물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 담겨 있는 도시민의 삶, 그리고 도시 조직으로서의 형태와 그 속에서의 장소성으로 종합되어 이루어 질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지속적으로 축척되어온 문화, 전통, 그리고 사회적 상황 등과 관계를 맺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관성을 가지고 그리하여 건축 공간은 컨텍스트를 형성한다.도시 속 건축의 장소성 개념이 20세기 중반에 나타나 근대 또는 고대 건축에서 잊혀 졌던 환경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구축하는 개념이 되고 있다. 역사적 장소성을 구현하는 방식은 지역성에 근거한 컨텍스트와 시간적인 맥락에 의해 구분될 수 있다. 요즘처럼 이러저러한 문화재들의 복원사업이 활성화 되고 있는 시점에서 과연 복원으로 진정한 역사적 장소성의 구현이 될 이다.
    인문/어학| 2008.08.28| 11페이지| 2,000원| 조회(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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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사상사
    서 명: 중국사상사저 자: 갈조광역 자: 심규호출판사: 일빛출판일: 2007년 8월 6일사상사에 대한 고찰.이 책은 원래 복단대학의 출판사에서 출판한 ‘중국사상사’의 제 1권 ‘7세기 이전의 중국적지식, 사상과 신앙세계‘ 와 제 2권 ’7세기에서 19세기의 중국적 지식, 사상과 신앙‘ 의 앞부분 에 있던 ‘ 사상사의 서술방법’ 과 ‘속 사상사의 서술방법’ 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던 내용이다. 그 후 재판을 출판하게 되면서 이 2권의 책을 ‘중국사상사 도론 - 사상사의 서술방법’ 이라는 제목을 가진 1권의 책으로 바꾼 것이다.이 책은 기존의 중국 사상사의 연구에 대한 방법을 비판, 바꾸고자 하였던 노력이 보인다.프랑스의 아날학파처럼 엘리트 사상가와 그 엘리트 사상가의 경전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의 지식과 사상 그리고 신앙세계도 사상사에 포함시키고 이 모든 것을 통해 중국사상의역사에 대해 새로 서술했다.이 책에서는 총 8장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고, 8장의 내용은 기존의 중국 사상사에 대한기본 연구 패러다임이 바뀔 필요가 있으며, 그것이 어떠한 방향으로 바뀌어야 하는지에대해서 서술해 나가고 있다.책의 내용에서 말하길 중국의 유가 사상에 대해서 보통 이야기를 하면 우리는 흔히 공자부터 이야기를 하지만, 공자가 나오기에는 그 전에 어떠한 기반이 갖추어 졌기 때문에공자라는 유명한 사람이 나온 것이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신과 같은 존재가 아니다 라고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때의 일반인들의 생각과 사상외의 다른 학문 - 의학, 침술학 등전문분야에서부터 민간신앙까지 - 도 분명히 공자의 생각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 터인데그것이 무시 된 채 그저 우리는 유가 사상을 얘기하면 공자 이야기만 하는 것이 옳지않다고 서술된 점이 건축사를 공부해 왔던 우리로서는 어느 정도 공감이 가는 내용이다.8개의 장으로 구성된 중국사상사 모두 사상사에 대해서 서술하는 방법을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지만, 그 중 나는 제4장 ‘연속성:사로, 장절 및 그 밖의 문제’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기존의 사상사의 방법으로는 마치 여행가이드가 가이드를 해주는 것처럼 사상사를 접한 사람은 모두 같은 생각을 갖게 되고, 같은 지식을 갖게 된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교과서와 같이 사상의 연속성이라는 근본적인 성격을 무시한 채 장절로 구분을 지으면서그저 유명한 사람들의 나열로 인해서 사상사의 흐름은 끊기고 이렇게 장절을 구분하는 구조가 우리들에게 너무나 익숙해져 그것이 사상사에 대한 기억으로 남는것을 우려하고 있다.그리고 이런 사상의 연속성이 공자가 했던 말“미지생 언지사(未知生 焉知死:삶에 대해서도아직 다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던지, 그의 제자가 했던 말에 남아 있음을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사상사는 연속되면서 현실에 반응하면서 역사의 기억을 소생시키고역사의 기억은 칩거하고 있던 지식과 사상의 자원을 다시 불러들인다. 이것이 바로 이해의소재가 되어 새로운 지식과 사상을 해석하게 되는 것인 동시에 전통의 자원과 하나로 연결되어가면서 시간을 가지고 과거와 현재의 사상에 대한 해석이 서서히 융합된다는 과거와현재의 사상 모두 소중하며 그것이 융합되어 이뤄낼 수 있는 효과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이는 유명한 역사학자 E.H Cahr 가 주장했던 “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의 끊임없는대화“ 라고 했던 그의 생각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 된다. 이렇게 제4장에서는 기존의 방식을 비판하며 새로운 시선으로 중국사상사의 서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서술하고 있다.그리고 마지막 장에서 우리는 하나의 사실을 또 알 수 있다. 그것은 포스트 모던 역사학이 중국 사상사에 미친 영향이다. 우리는 보통 역사라고 하며 과거의 사실에 대해서 기록하는것으로 대부분 알고 있다. 하지만 포스트 모던 역사학자인 화이트(Hayden White)는 우리의역사는 “특별히 서술된 담론을 빌어 이루어진 것이며 과거와 모종의 관계” 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역사는 그저 텍스트가 아니라 하나의 문학이며, 즉 서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포스트 모던 역사학에서는 이런 서술에서 사상의 역사가 있다 라고 말한다. 이렇게 진위와허위로 구성된 역사 서술이 바로 역사를 새롭게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진위와 허위로 구성된 역사를 하나하나 벗겨내면서 읽다 보면 그 안에 담긴 심정, 의도, 기준등을 알아가게 되고, 그러한 연속된 과정이 과거의 사상인 역사라고 포스트 모던 역사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과거의 사상을 밝혀 나가는 과정이 기존의 방식보다 오히려현재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벗겨내는 과정을 통해 역사와 과거의 구별을 확정 짓게 되는것이다. 상상을 통한 허위로 당시의 배경을 알고, 그 배경에서부터 사상을 환원시키며, 그환원시킨 사상으로 의의를 부연해내며, 그것을 통해 사상을 자원으로 만드는 과정, 즉사상사 연구자의 체험, 상상, 기억들이 사상을 만들어 내고, 그 사상이 다시 재구성된다는
    독후감/창작| 2008.08.28| 3페이지| 1,000원| 조회(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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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그리스어 demokratia에서 근거한 democray, 인민에 의한 지배란 뜻이다.그렇다면 민주주의의 시작은 어디인가? 바람직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지금 대한민국은 민주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아 가는 과정이 아닌가 싶다.광우병 사태로 인해 거리로 나온 시민들, 국민들의 의견을 무시한 현 정부의 모습,누가 봐도 어떤 것이 민주주의 인지는 알수 있지 않을까 싶다.이런 시국에 민주주의의 시작인 아테네의 민주공화정에 대해서 알아 가는 것은E.H.Carr 가 말한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끝없는 대화가 아닐까 싶다.지금부터 아테네의 민주공화정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에 대해서 서술하고자 한다.아테네는 그리스의 도시국가중 하나였다. 지형상의 이유로 통일국가를 형성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그리스를 지배한 아테네, 이 아테네는 페르시아와의 3번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델로스동맹을 결성하며 그리스와 에게해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리고 군주정, 참주정을 거쳐 민주정으로 발전하였고, 페리클레스 시대에 민주주의를 꽃피우게 된다.아테네의 민주정치는 그리스 세계를 고찰하는 일에서 빼놓을수 없는 정말 중요한 요소이다.상업경제와 함께 아테네를 진취적, 개방적 사회로 만든것이 바로 민주정치이다.이런 진취적 개방적 사회로 만든 민주정치가 성립된 배경에는 평민의 지위가 강화된 것을들수 있다. 평민의 지위가 강화된 배경에는 2가지가 있는데 첫째로는 상공업의 발달을 들 수있다. 상공업의 발달은 기원전 7세기경 화폐의 도입으로 인해 상공업이 번성함에 따라평민들중 부유한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어 이들은 힘들이 강화된 것이 첫째이고 둘째로는식민지 건설을 위한 전쟁중 전술의 변화가 있겠다. 기존의 기병출신의 전술에서 중무장 보병의 전술로 변하게 되면서 많은 평민들이 전쟁에 참여, 국방의 방어에 큰 공헌을 하면서그들의 책임이 강화된 것이 두 번째이다.이런 배경을 삼아 아테네는 귀족들의 힘이 약해지며, 반면 힘이 강해진 평민들은 자신들의역할에 상응하는 정치적 요구를 하게 되면서 귀족들과 대립하게 된다. 그러면서 드라콘은기존의 귀족에게 유리한 법을 바꾸게 되고, 평민들의 발언권 강화라는 것이 최초로 입법에반영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유리한 법으로 인해 시민들의 불만은 여전했다. 그리하여기원전 594년경 솔론은 시민을 재산소유에 따라 계층을 구분하고, 정치적 지위를 차등적으로한정시키게 된다. 즉 부유한 평민에게는 귀족과 동등한 참정권을 인정해 주자 라는 것이다.최초로 평민들이 정치에 참여 하게 된 것이다. 바로 참정정치의 시작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모든 평민들에게 기회가 제공된 것이 아니고 일부의 시민들에게만 인정되었던 것이라 사회각층의 모든 불평불만을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그리하여 560년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집권하게 되고 그는 자신의 개인권력을 강화하기 위해귀족들을 견제하고, 귀족들에게 재산을 몰수하여 평민들에게 분배하기 시작하였다. 그가한 정치는 독재에 가까웠기에 민주정의 발전이라는 맥락속에서 긍정적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없다. 하지만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정은 귀족정에서 민주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서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켜 결과적으로 민주정의 발전에는 도움을 주기는 하였다. 그가 죽고그의 아들이 참주정을 이어받았지만 민심을 잃고 추방을 당하게 된다.참주정이 끝나자 귀족과 평민사이의 대립은 다시 시작되었고 이 과정에서 클레이스테네스가평민들의 지지을 얻어 수습, 민주정의 시대가 마침내 개막된다. 그는 민중의 지지에 대한보답으로 급격한 개혁 작업을 단행한다. 그는 아테네에 거주하는 모든 자유민에게 완전한시민권을 부여하여 시민의 수를 늘렸다. 그리고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다. 그는4개의 혈연부족을분산시켜 오늘날의 구격인 데모스를 근간으로 10개의 지연부족으로 개편하였다. 부족제 개편에따라 400인협의회 대신 500인 협의회가 설치, 각 부족을 대표하는 50인은 데모스에서 추첨으로뽑혔고 데모스의 모든일을 자치적으로 처리한 데모스의 구성원들이 아테네 의회인 민회에출석할수 있는 자격을 부유하였으며 민회의 활동도 더욱 활성화 되었다. 민회의 권환도 확대해500인회에서 상정한 법안에 대한 심의,채택권을 부여했고, 전쟁선포권, 예산편성권등을 부여했다.민주제 발전을 위한 제도적인 토대가 이룩된 셈이다. 이리하여 클레이테네스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초석을 세운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아테네는 페르시아 전쟁에서 큰 공헌을 바탕으로 그리스내에 강국으로 발전하게 되고 델로스동맹을 맺은 황금시기에 페리클레스가 등장하게 된다. 그는 배심원 수당을 처음 도입하여하층민의 재판 참여를 유도했고, 아테네인의 권력을 강화하는 제국정책을 꾸준히 추진했다.이렇게 아테네 민주정은 페리클레스 시대에 완성되었다.페리클레스가 완성한 민주정의 특징은 크게 4가지가 있다.입법, 행정, 사법등 정부 선출에서 시민 모두가 참여한 추천제, 하층시민의 정치 참여를활성화시키기 위한 수당제, 1년의 임기후 다른 시민에게 직접 참여의 기회를 주는 임기제,다수의 사법관으로 개인적 편견을 적게 만드는 다수 견제가 있다.하지만 페리클레스가 완성한 민주정도 100%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만을대상으로 한 민주정이었다.이제는 아테네 민주정과 근대 민주정치의 차이점에 대해서 알아 보자.그리고 근대 민주정치가 평등한 자격을 가진 보편적인 참정권을 바탕으로 한 국민에 의한정치라면, 아테네 민주정은 제한적 참정권에 기초한 시민 정치이다. 그리고 정치과정에서도차이가 있는데 현대는 의회와 정당을 중심으로 이루어 지지만, 아테네는 시민들의 연설 혹은토론에 의해 중요 결정이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정치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있다아테네에서는 정치란 자유로운 시민들이 서로 토론하는 공론장 자체를 의미하지만 근대는정치권력의 획득, 유지, 배분뿐만 아니라 국가와 관련한 경제 문화 사회 전반의 주요 결정을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지금까지 아테네의 민주정의 발전과정, 성립배경, 특징, 근대와의 비교까지 아테네의 민주정에대한 전반적인 내용에 대해서 짧지만 중요한 내용을 위주로 서술해 보았다. 이제는 민주주의가무엇인지에 대해서 기존에 알았던 것 보다는 좀 더 알지 않았을까 생각한다.이제 글을 마무리 지으려 한다.광우병에 의한 촛불 집회, 60만의 촛불물결, 우리는 여지까지 정치에 대해서 관심이 별로없었다. 소수에 의한 정치, 정당에 의한 그들의 알력 싸움, 부패한 정치 라는 인식이 강하게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서울에서 일어나고 있는 촛불시위는 우리를 정치에 관심을가지게 만들었고, 우리를 민주주의 정치체제하에서의 국민의 역할은 무엇인가를 일깨워 주는바람직한 것이 아닌가 싶다. 아테네의 민주정에서 부터 지금의 민주주의 까지 결론으 하나이다. 시민들에 의한 정치, 시민 모두에서 일부의 시민으로 바뀌었지만, 그 일부의 시민들도다수의 시민들에 의해서 대표가 되었기에 다수의 시민의 의견을 반영해야만 그것이 바람직한민주주의가 아닐까 싶다. 페리클레스가 이루었던 민주주의, 그가 실현시키고자 했던 이상이2008년 한국에서 보이지 않나 싶다. 마지막으로 첫 수업시간에 들었던, 그리고 역사 공부를할때 마다 항상 듣게 되는, 너무나 유명한 E.H.Carr의 명언을 마지막으로 글을 마무리 지으려한다.역사란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 없는 대화이다.
    독후감/창작| 2008.08.28| 3페이지| 1,000원| 조회(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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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스신화 - 올림포스 12신
    그리스 신화.올림포스의 신들개요제우스헤라포세이돈데메테르아테나아르테미스아프로디테아레스헤라이스토스디오니소스헤스티아하데스에로스올림포스 12신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일단 신화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지만 그 중에서도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제우스와 포세이돈, 디오니소스가 있었고 그 신들이 올림포스의 12신들이라는 하나의 부류로 묶여 있었기에 나는 올림포스 12신에 대해서 알아가게 되었다.올림포스 12신은 제우스, 헤라, 포세이돈, 데메테르, 아테나, 아르테미스, 아레스, 헤라이스토스, 헤르메스, 디오니소스, 헤스티아, 하데스, 에로스 이다.이들의 신들을 알기 전에 그리스 신화의 시작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이다.그리스 신화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 따르면, 최초로 ‘무한한공간’ 인 카오스(Chaos)가 생기고 뒤를 이어 대지의 여신 가이아(Gaia)와 모든 물질을 서로 결합, 생성하게 하는 정신적인 힘인 에로스(Eros)가 생겨났다. 카오스는 최초의 우주상태, 하늘과 땅의 구별이 없고 혼돈과 무질서 그 자체인 상태를 말한다. 이 카오스는 형태 없는 혼란덩어리며 한 사물에 불과했으나 그 속에는 여러 사물들의 씨가 잠자고 있었다. 카오스로부터 닉스(Nyx:밤)와 에레보스(Erebos:어둠)이 태어났다. 닉스는 밤하늘의 맑은 어두움이고 에레보스는 땅속의 칠흙같은 어두움이다. 이 둘은 서로 어울려 맑은 대기인 아이테르(Aither:창공)와 헤메라(Hemera:낮)을 낳았다. 이렇게 해서 카오스로부터 모든 천체가 운행할 우주의 드넓은 어둠과 낮과 밤의세계가 생겨났다. 이렇게 형태와 모양이 갖춰진 질서정연한 우주의 모습이 코스모스(Cosmos)이다.가이이는 모든 세계의 근원으로 우선 우라노스(천공)와 폰토스(대양)을 낳고, 우라노스(Uranus)와결혼하여 12명의 티탄(Titan)과 퀴클롭스(Kyklops), 헤라콘케이르를 낳았다. 티탄족들은 레아(Leah).오케아노스(Oceanus), 크리오스(Crius), 히페리온(Hipherion), 테이아(Th우스 – 올림포스의 최고신올림포스 산의 주신으로서 신과 인간의 아버지로 불린다. 크노소스와 레아 사이에서 태어나고크노소스에 삼켜진 그의 형제 자매들과 힘을 합쳐 아버지인 크노소스를 몰아 낸 뒤 티탄족들과의 전쟁, 기간테스와의 전쟁, 튀폰과의 전쟁을 치루면서 최후의 승자가 된다.이렇게 여럿 전쟁에서 승자가 된 제우스는 하늘과 땅을 통틀어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진 신으로군림하게 된다. 번개와 아이기스(aegis)란 방패를 무기로 사용하며 총애하는 새는 독수리 이다.우주의 지배로서의 제우스는 바람과 구름, 비, 천둥, 번개 등 모든 자연의 변화를 주관하게 된다.그는 대체로 좋은 날씨를 보내주어 인간에게 풍요와 평화를 주기도 하지만, 인간세상이 복잡해지거나 인간들이 타락해지면 홍수와 가뭄 등 자연재해를 내려 벌을 가하기도 한다.제우스는 분수에 어울리지 않는 욕심을 내어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을 용서하지 않았다.거인이나 실도 질서를 어지럽히게 되면 용서하지 않고 벌을 가했다.아폴론의 아들인 아스클레피오스(Asklepios)가 자연법칙을 거스르고 죽은 자들을 살려내는 일을하자 제우스는 번개를 내리쳐 그를 죽인다. 또 파에톤이 태양의 전차를 몰면서 하늘과 땅을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자 번개를 쳐서 파에톤을 땅으로 떨어뜨리는 벌을 가했다.제우스는 자연의 질서를 혼란케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엄정한 처벌을 내렸으며 또한 신의권력에 도전하는 오만한 인간에게는 용서가 없었다.그는 천하의 바람둥이로 묘사되는데, 수많은 여신들과 요정들을 유혹했고, 많은 자식들을 낳았다.제우스의 바람기에 애를 태우던 헤라는 그 때문에 질투의 여신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였다.제우스의 수많은 여인 중 유명한인물이 이오(Io), 칼리스토(Callisto), 에우로페(Europe)이다.위에서 잠시 언급된 그의 무기인 아이기스는 제우스와 그의 딸 아테나의 소지물의 하나로서,대장간의 신 헤파이스토스가 제우스를 위해 만들어 준 방패 모양의 것이다. 제우스의 아이기스는벼락에 맞아도 부서지지 않는데, 이것을 한번 흔들자면 데메테르가 지상세계를 떠돌아 다니다가 엘레우시스란 곳에 도착을 하게 된다. 그 곳의 왕인 켈레오스(Keleos)의 딸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딸들은 초라한 노파의 모습을 한 데메테르를 보지만 어딘지위엄어린 모습을 느껴 궁전으로 데리고 오게 된다. 데메테르는 여신이었기에 궁에 들어서자머리가 천장에 닿았고, 궁전 안은 신비한 빛으로 가득찼다. 여왕 메타네이라는 여신의 기품에눌려 자리에서 일어나 노파의 모습을 한 데메테르에게 자신의 자리를 권하게 된다.그러나 딸을 잃은 슬픔에 여신은 말없이 가만히 서 있기만 하고, 음식을 권해도 먹지 않았다.여신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하녀 이암베(Iambe)가 음담패설에 가까운 농담을 하자 여신은 자신도모르게 웃게 되고, 이때를 놓치지 않고 여왕은 술을 권했으나 슬픔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데메테르는 포도주 대신 박하향이 나는 보리차를 달라고 했다. 그 뒤 이 보리차는 엘리우시스제전의 공식 음료가 되었고, 데메테르는 궁전에 머물면서 켈레오스와 여왕의 아들인 데모폰(Demophon)을 보살피는 일을 맡았다. 여신은 켈레오스 가족이 베푼 친절에 보답하고자 데모폰을불사의 몸으로 만들어 주기도 했다. 아침이면 신의 숨결을 쐬어 주고 가슴을 불사초로 문질러주었다. 밤이면 아기를 불 위에 올려놓아 평생 늙지 않도록 해 줄 작정이었다. 이런 여신의배려로 왕자가 놀라운 속도로 자라나 여왕은 의심이 생기게 되고 밤에 몰래 엿보게 되고 불위의아이를 보고 죽이려는 생각으로 착각하고 소리를 치게 되나, 데메테르는 그렇게 상황이 몰리자자신의 정체를 밝히고는 그 동안의 노력이 허사로 된 것을 안타까워하며 여왕을 꾸짖게 된다.그리하여 왕자는 비록 불사의 몸이 되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품에서 자랐기에 영광스러운 삶을 누릴거라 말하고 자신의 신전을 지어 제사를 지내라고 하게 된다.아테나 – 지혜의 여신, 전쟁과 평화의 여신지혜의 여신이자 전쟁과 평화의 여신인 아테나는 제우스의 머리에서 완전히 무장한 모습으로태어나게 된다. 제우스는 아테라를 임신했던 메티스(Me우 호전적이었으나 아름다운 모습을 가진 청년으로, 여신인아프로디테의 사랑을 받아 그녀의 애인이 된다. 아프로디테는 아레스의 정식 아내로 알려지게 되고, 그 둘 사이에서는 걱정의 신인 데이모스, 공포의신 포보스, 하르모니아가 태어나게 되고, 불화의 신 에리스, 그리고 싸움의 여신 에니오가 따른다.아레스는 전투를 위한 전투와 그 전투에서 나오는 유혈을 좋아했고, 그 옳고 그름은 문제시하지 않았다. 전쟁터에서는 쌍둥이 아들과 싸움의 여신인 에니오를 거느리고 나타나 병사들의전투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러나 전술의 신이자 진정한 용기의 신인 아테네에게만은 이기지못했다.아테나와 아레스는 모두 전쟁의 신이다. 하지만 그들 사이의 큰 차이는 아레스는 전투의난폭한 면과 잔인한 면을 나타내는 반면, 아테나는 평화를 수호하는 전쟁으로 지적인 면이나타난다. 일리아드에서 아테나는 아레스와 항상 대립하게 되는데, 한번은 디오메데스의 창으로아레스의 복부를 찔러 부상을 입힘으로서 아레스를 싸움터에서 도망치게 한다.아레스와 관련된 신화는 많지 않다. 하지만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는 동료 신들과 부모조차도아레스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를 미치광이, 악의 화신, 파괴자, 피투성이의 살인마로묘사한다. 서사시에서 수록된 트로이 전쟁에서 신들은 보통 이해관계에 따라 개별적으로 전투에개입을 하게 되는데 아레스는 정의와 명분, 특별히 정해진 진영이 없이 잔인한 전투를 즐기며많은 살육을 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트로이의 편에 붙은 아레스에게 그리스군이고전하자 위에서도 언급했던 아테나에게 복부의 상처를 입게 되고, 아레스는 부상을 당한채큰 소리로 울며 제우스에게 돌아왔다고 한다. 그러자 제우스는 “이 변절자야, 나는 올림포스의신들 중 네가 가장 밉다. 너는 전쟁과 싸움밖에는 모르는 구나” 하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헤파이스토스 – 화산과 대장간의 신화산과 대장간의 신 헤파이스토스의 출생에는 제우스와 헤라의 아들이라는 설과 헤라 혼자낳았다는 설이 있다. 첫 번째 설에 따르면 헤파이스토스는 후에 양육되었고, 그가 성장 했을 때 헤라는 그를 미치게 하여 추방하였고, 결국 그는 지상의 여러 나라를 돌아 다니는 방랑객이 되어버린다.디오니소스는 헤라에 의해 미치게 되어 추방되기 전까지 그녀의 끈질긴 구박과 방해를 받았다.그런 구박과 방해 속에 미쳐버린 디오니소스는 추방되었고, 이집트와 시리아 지방을 방황했다.디오니소스가 소아시아의 프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을 때 제우스와 헤라의 어머니인 레아가디오니소스의 병을 치유해주었다. 그 후에 디오니소스 축제 때 행해질 종교의식을 전수해 주었고,이 제전에서 디오니소스와 신도들은 새끼 사슴의 가죽을 입어야 한다는 것도 가르쳐 준다.그의 의식에서는 자연의 생식력을 상징하는 남근상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레아에 의해 병이 치유된 그는 인도까지 여행을 계속 하면서 포도 재배법과 포도주 담그는 법을가르치면서 동시에 자신의 신앙을 전파하게 된다. 이제 그는 미치광이 소년이 아니었다. 표범위에올라타고 손에는 삿갓 모양의 손잡이가 달리고 덩굴장식이 화려한 튀르소스(Thyrsos)라는 막대기를 든 당당한 모습을 가진 신이었다. 이것과 관련하여 그의 개인적인 상징물로는 담쟁이 덩굴화관가 튀르소스, 칸타로스(손잡이가 2개 달린 큰 술잔) 이 있다. 그는 초기 미술에서는 턱수염이난 남자로 그려졌으나 그 후에는 연약한 청년의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했다.그의 곁에는 항상 그를 추종하는 한 떼의 무리, 즉 그를 길러준 니사의 요정들과 사튀로스(풍요의 정령), 세일레노스, 그리고 그를 광신적으로 믿는 마이나데스들이 뒤따랐다.후에 디오니소스는 테세우스에 버려져 낙소스섬에 있던 아르아드네를 만나게 되고, 그녀의아름다움에 반해 결혼을 한다. 디오니소스는 암펠로스(Ampelos), 스타퓔로스(Staphylos),오이노피온(Oinopion)의 세 아들을 얻게 된다.헤스티아 – 불과 화로의 신이자 가정의 수호신크노소스와 레아의 딸로 제우스의 누이이다. 아폴론과 포세이돈이 자신에게 구혼을 하며다투자 헤스티아는 영원히 처녀로 남겠다고 맹세를 하여 싸움을 가라앉혔다의 계보
    독후감/창작| 2008.08.28| 18페이지| 2,500원| 조회(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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