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신 도야론과 지식의 형식 >독어독문학과00000000000정신 도야론과 지식의 형식을 읽고 난 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둘 다 전통적인 교육내용을 중시하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정신 도야론은 어떤 교과에 담겨있는 구체적인 교육내용보다는 그 내용을 배움으로써 얻게 될 정신 능력을 중시하기 때문에 가장 기초라고 볼 수 있는 전통적인 교육을 중시하고, 지식의 형식론에서는 전통적인 교육내용이 가지고 있는 ‘내재적 가치’를 내세움으로써 실용적인 목적만이 아닌 그 자체의 가치를 설명함으로써 전통적인 교육을 중시한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내 생각으로 이야기하자면 정신 도야론은 요즘 열린 교육, 8차 교육과정, NEIS제도 등 현실적인 문제로 바뀐 교육과정이 아닌 한문이나 자판사용법 같은 기초적이고 전통적인 교육과정을 지지하는 입장이고, 지식의 형식론은 실제 생활에 사용되어야만 교육이라는 입장이 아닌 전통적인 교육내용 그 자체에 깃든 정신을 가치있는 것으로 중요시 하는 입장인 것 같다. 그야말로 전통적인 경험을 토대로 한 지식의 형식을 알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물론 이런 주장에도 비판적인 요소가 존재한다. 정신 도야론의 가장 두드러지는 문제점은 전통적인 교육이 새롭게 변화하고 있는 첨단 사업의 요구에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인데 이 때문에 이 교육과정은 실패할 확률이 높다. 지식의 형식론에서도 학교에서 교육하는 특정교과만 중시하는 문제가 발생하고, 경험을 토대로 체계화했다는 부분에 있어서 증거가 불충분하다.나는 이들 교육방식에 대해 이쪽도 저쪽도 치우치지 않은 중간상태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교육이라는 것은 일단 기초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하므로 전통적인 교육과정도 포함하되, 현재 살고 있는 사회에도 적합해야 하므로 적당히 새로운 시대에 부합하는 교육내용도 포함해야 할 것이다. 어렵지만 이것이 가장 정확한 정답이 아닐까...마지막으로, 에서는 이 부분을 이야기하려고 한 것 같다. 시간이 지나고 시대가 변화하면, 생활 속의 문화나 사람들의 생활방식은 모두 다양하게 변화한다.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아주 유용하게 쓰이던 것이 지금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하찮은 물건이 되어 있을 수도 있고, 예전에는 없던 물건이 지금은 모두 하나씩 가지고 있을 정도로 보편화되어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까 실제 필요한 지식이나 기술은 그때그때 시대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데, 그때마다의 내용을 학교에서 모두 바꿔가며 교육시킬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육이란 어떤 영원한 진리이므로, 진정한 교육의 본질은 시간을 초월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 같다. 따라서 교육의 목적은 기본원리에 대해 보다 철저한 기초지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 교육과정 및 교육평가 >독어독문학과00000000000개인적인 내 생각은 경험 중심의 진보주의 교육관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이 진보주의 교육관은 교과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과도 연관되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아무리 학생들의 머리 속에 많은 양의 교과 내용을 집어넣어도 학생들이 수용할 수 없다면 아무 소용없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또한 나는 유목적적인 활동을 강조하는 프로젝트 학습법에도 동의한다. 세상에서 해야 하는 모든 일들은 목적의식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우리가 꿈꾸고 있는 교사라는 직업도 교사가 되려고 하는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으면 훨씬 더 능률적인 방법으로 학습하게 될테고 일하는 데 있어서 만족도도 높을 것이다. 단지 활동적인 면을 강조하다 보니 주로 단조롭고 저급한 교육을 하게 된다는 점에서 거센 비판을 받고 교육의 현장에서 빨리 사라졌다는 것이 문제이다.나는 항상 지식은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므로 모든 교육은 전통적인 교육방식을 기본에 두고 거기에 현 사회에 맞는 교육방법을 도입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문제는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므로 굳이 따라야 할 교육방법을 선택하라면 학습자에 중점을 두고 학생 개인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는 경험 자체라고 보는 경험중심의 교육과정이 좋지 않을까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듀이의 교육관을 살펴보면, 듀이 교육이론의 핵심 개념도 경험이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열 번 듣는 것보다 한번 해보는 것이 낫다.” 마치 옛말의 진리가 이 교육관에 바로 적용된 것 같다. 경험의 가치는 해보는 것과 당하는 것이 결합된 것에 어떤 사고가 개입되는 가에 따라 결정되는데 듀이는 어떠한 문제가 생겨서 그 문제가 해결되면 경험은 종결단계에 이른다고 보고 이 때를 가리켜 ‘하나의 경험’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 하나하나의 경험은 고난과 역경을 이겨 온 소중한 노력의 결과이고 경험을 더하면 더할수록 계속적인 성장을 가능하게 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 제일 큰 동의를 얻었다.그리고 경험이란 것은 개개인마다 다 다른 것이고 지적수준도 다 다르므로 실생활의 관련여부에 따라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는데 나는 여기서 삶의 지향점을 ‘구체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으로’ 잡아야 발전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교육관의 단계에 예를 들면, 강낭콩이 어떻게 자라는 걸까라는 궁금증을 느꼈을 때 씨를 사다 땅에 뿌리는 것이 실제적 조작단계, 하루에 얼마나 자라고 물은 어떻게 줘야하고 무엇부터 자라는지 이런 것을 알아보는 것이 지적인 문제에로 관심의 전환단계, 그리고 이 사고 자체에 흥미를 느끼는 것이 마지막 단계이다. 이런 듀이의 교육관에서도 앞에 프로젝트 학습법과 같이 구체적인 활동을 강조하기 때문에 고등사고를 기르는 데에 ‘부적합하다’ 라는 비판을 받게 되는데 이는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보완하는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듀이는 아동의 경험을 계속적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주기 위해서는 교과를 진보적인 것으로 조직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지식이 조직되는 중심을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것에서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것으로 점차 바꾸어가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 독일의 통일과정~* >★분단원인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은 오더 강과 나이세 강을 경계로 그 동쪽 지역이 폴란드로 소속되어 국토가 중세 후기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패전국 독일의 서부 지역은 미국, 영국, 프랑스가 분할 점령했고 동부지역은 소련이 점령했는데 분할점령은 얄타회담과 포츠담회담에서 미국, 소련, 영국의 대표들이 합의한 것에 따랐다. 얄타에서는 독일의 주권박탈을 결정하고 점령군에 프랑스를 포함시켰으며, 포츠담에서는 오더 강과 나이세 강을 동쪽 경계로 정하고 폴란드, 헝가리, 체코에서 독일인을 추방하기로 했다.서방 전승 3개국과 소련은 처음부터 생각이 달랐다. 소련은 독일문제 처리에서 배상 문제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서방 3개국은 독일 경제의 복구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서방 점령지구에서는 민주화에 역점을 두어 경제를 재건시켜 제1차 세계대전 이후와 같은 군국주의의 재등장을 미연에 방지하는 방향으로 점령정책이 추진되었다. 전쟁 배상금이 면제되었으며 마셜 플랜을 통한 경제적 지원으로 ‘라인 강의 기적’으로 지칭되는 경제부흥에 이르도록 신속한 복구가 이루어졌다. 소련점령지구에서는 탈나치스화, 군수산업 해체와 더불어 사회주의 입국에 최우선이 두어짐으로써 국토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이 지역은 경제재건, 소련에 대한 전쟁배상금 지불, 국민의 의식교육 등의 부담을 안고 출발하였다. 각 점령군이 자국의 체제를 강화하고 동서 양진영이 냉전체제로 치달으면서 독일의 서쪽과 동쪽 사이의 간극도 그만큼 커져서 분단의 징후가 뚜렷해졌고, 점차 독일은 동서 냉전 진영의 맞대결장이 되어갔다. 이러한 의견대립 속에 양진영이 화폐개혁을 단행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독일이 두 개의 경제권으로 분할되면서 독일의 분단은 점차 현실이 되었다.★분단과정- 서독(독일연방공화국)의 탄생서방 3개국은 서독 지역만을 위한 헌법제정과 정부 수립을 서둘렀으나 서독의 정치가들은 처음에는 그러한 조치가 분단을 고착화할 것을 우려해 반대하였다. 연합국 측과 서독의 정치가들은 협상 끝에 헌법 대신 임시법의 성격을 지니는 기본법의 제정과 임시적인 정부구성에 합의하였다. 기본법에 따라 연방의회가 독일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국민의 직접 선거로 구성되는 연방의회는 법을 제정하고 연방수상을 선출하고 정부를 감독하게 되었다. 연방공화국의 수반은 대통령이었으나 대통령의 권한은 바이마르 공화국에 비해 크게 축소되었다. 마침내 1949년 8월에 치러진 선거에서 테오도르 호이스가 초대대통령으로, 기민당의 아데나워가 수상으로 선출되면서 ‘독일연방공화국(Bundesrepublik Deutschland:BRD)’ 정부가 본격적으로 출범하였다.아데나워 수상은 확고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된 독일을 재건시켜 나갔다. 경제장관에 임명된 에어하르트는 시장경제원리와 사회보장제도를 결합한 ‘사회적 시장경제’를 추구하였는데 폐허상황에서 출발한 독일경제는 ‘라인 강의 기적’으로 불릴만큼 급속도로 재건되었다. 경제적 번영과 더불어 사회보장제도도 점차 확대되었다.- 동독(독일민주공화국)의 수립서독지역에서 기본법이 만들어지고 있을 즈음 동독에서도 또 하나의 독일 국가의 수립이 추진되었다. 빌헬름 피크와 발터 울브리히트를 중심으로 한 공산당은 그로테볼이 이끄는 사민당의 일부세력을 통합하여 독일 사회주의 통합당을 결성하였다. 1949년 연방공화국의 출범이 확실해지자 동독에서는 인민의회 선거가 실시되었다. 단일 후보자에 대한 찬반 투표로 진행된 이 선거에서 사회주의통합당은 제1당을 차지하였다. 1949년 10월 7일 인민의회는 ‘독일민주공화국(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DDR)’을 선포하였다. 피크가 동독의 초대 국가 수반이 되었고 그로테볼은 정부 수반이 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한은 사회주의통합당의 실력자 울브리히트가 행사하였다. 동독은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경제 성장을 꾀했지만 과도한 배상금 지불, 서독으로 넘어가는 주민의 증가에 따른 노동력의 부족, 노동자의 사기 저하 등으로 인해 계획대로 성장하지 못했다. 결국 노동자와 농민이 폭동을 일으키게 되었고 소련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그 후에 배상의무를 면제해주었고 이러한 조치에 힘입어 동독의 경제도 점차 성장하게 되었다.★베를린장벽경제 여건의 개선에도 불구하고 1960년 한 해 동안에만 20만 명, 1961년까지 동베를린 인구수에 맞먹는 165만 명 이상의 동독인이 서독으로 탈출하였다. 이러한 노동력 유출이 계속되면서, 또 전반적으로 냉전이 심화되어 마침내 소련의 흐루시초프 당서기장은 서방 연합군에게 서베를린에서 철수하라는 최후통첩을 발하기에 이르렀고, 이 위기는 베를린 장벽의 구축이라는 현상유지 정책으로 진정되었다.1961년 8월 13일 일요일 동독 정부가 느닷없이 베를린 전역에 일제히 장벽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 장벽은 동독 당국이 동독 영토 안에 있는 서베를린에 담장을 둘러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자국민을 감금한 것이었다. 서베를린은 지정된 육로와 항로를 통하여 서독과 연결되고 있지만, 동독인은 그때까지 통행이 비교적 자유로웠던 동.서 베를린간의 왕래가 불가능해짐으로써 자국을 떠날 수 없게 된 것이다.베를린 장벽은 분단과 냉전의 상징물이 되었지만 동독 정부는 이조치를 통해 주민의 탈출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데 성공하였다. 숙련된 노동자의 탈출이 중지되고 어느 정도 사회가 안정됨으로써 이에 힘입어 동독의 경제는 크게 성장하였다.★독일의 통일1972년 브란트의 동방정책으로 인해 동.서독 간에 기본조약이 체결되었다. 양국은 상호주권의 존중, 현 국경의 존중, 국민 상호 교류에 합의하였다. 우선 상설대표부가 설치되고 왕래가 시작되었으며. 이후 양 독일의 관계는 서독은 명분을, 동독은 실리를 취하며 점진적으로 교류를 확대하고 장벽을 낮추어 가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동독은 동구권의 가장 선진적인 공업국으로서 생산성과 생활수준에서 사회주의 블록에서는 최고 수준을 유지했지만 서독과의 무리한 경쟁으로 과도한 경제개발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무리하게 도입된 차관이 지불 한계선을 넘음으로써 동독은 서독의 경제협력에 의존하게 되었고 8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 의존도는 높아져 갔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유재산 제도와 경쟁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주의 체제내의 문제로 동독의 생산성은 각 부문에서, 심지어 농업부문에서조차 서독의 3분의 1 정도에 머물렀다. 동독 국민들의 심중에서는 텔레비전으로 접하는 풍요로운 서방세계에 대한 동경이 여행자유화에 대한 욕구와 맞물려 고조되고 있었다. 한편 사회주의 진영의 본거지에서는 흐루시초프 당서기장의 사망이후 수뇌부의 잦은 교체로 통치권이 약화되고 있었다. 1985년 고르바초프가 집권하면서 개방과 개혁을 도모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세계적으로 화해의 분위기가 조성되는 가운데 동유럽의 공산 정권들은 위기에 직면하였다. 1989년 8월19일 헝가리 정부가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개방하자 수많은 동독인들이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넘어왔다. 동독 내부에서도 동독 정부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라이프치히에서 벌어진 대규모 평화시위가 저항운동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어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989년 11월9일 저녁,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 넘어오는 통과초소들의 문이 열렸다. 동독정부는 사실상 통치권을 포기한 것이다. 시위대의 구호는 처음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에서 “우리는 한 민족이다(Wir sind ein Volk)”로 바뀌었다. 즉 동독의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점차 통일에 대한 요구로 바뀌어 간 것이다.
< 깨달음과 반성의 노트 >독어독문학과00000000000중간고사가 끝났으니 교육행정 및 교육경영이라는 수업을 들은지도 벌써 반 학기가 지났다. 그동안 수업시간에 교사평가제도나 교사를 선발하는 문제, 교육의 조직 등 여러 가지 주제를 다루었는데 저번 학기까지 들었던 교직 과목과는 조금 달랐던 것 같다. 내가 이때까지 공부해 본 과목은 교육사회, 교육심리인데 이 과목들은 실질적인 교육문제나 현상보다 그냥 교육에 대해 파고들어서 피부에 와닿는 과목은 아니었던 반면, 지금 듣고 있는 교육행정 및 교육경영은 굉장히 현실적이어서 좀 더 관심이 가게 되었다. 나는 이 과목을 들으면서 나는 과연 어떤 선생님이 될까...하는 생각을 가장 많이 해보았다. 저런 교육환경이 나에게 닥치면 나는 어떻게 대처할까...라든지 저런 평가제도가 있다면 과연 거기에 맞춰서 행동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더 흐르니 그런 환경적인 문제보다는 나는 과연 어떤 선생님이 될까...라는 기본적인 생각이 주류를 이루었다.잠깐 내 경험을 말한다면 고등학교 때, 나는 굉장히 싫어하는 선생님이 한분 계셨다. 다른 아이들은 보통 좋아하는 선생님이 있거나 싫어하는 선생님이 많은 편인데, 나는 대부분의 선생님을 좋아했지만 정말 싫어하는 선생님이 딱 한 분 계셨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수업시간에 나를 너무 놀리는 것이었다. 나는 부끄럼도 많이 타고 내성적이어서 사람들 앞에 잘 나서는 편이 아니다. 그런데 한 번은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 때 내가 지명되었고 내 가장 큰 컴플렉스인 얼굴이 빨개지는... 의학용어로 안면 홍조증이 나타났다. 그 때부터 그 수업시간만 되면 선생님은 의도적으로 내게 아는 척을 하시고 장난도 치시면서 내가 얼굴 빨개져 하는 것을 재미있어 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그게 너무너무 부끄러웠고 동시에 그 수업 시간이 너무너무 싫어졌다. 특히 그 선생님의 과목이 영어였는데 그때는 영어공부를 하기가 싫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하나의 관심표현이었던 것 같다. 대학에 와서 과 생활이나 동아리 생활을 해보니 싫어하면 놀리기는커녕 말도 걸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리어 좋아하면 장난도 걸고 싶고 짖꿋은 행동으로 말도 한번 더 걸어보고 싶은 것 같다. 하지만 그 어린 고등학교 1학년 여고생에게 그 당시 그런 부담감을 주었다면 어떤 의도에서건 그건 교사의 별로 좋지 못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앞으로 몇 년 후 나에게 교사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면 이런 교사가 되고 싶다.첫째, 나는 사람을 볼 때, 첫 인상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의 성실함을 가장 우선에 둔다. 대학생활을 하면서 가장 큰 관심사라고 할 수 있는 연애 문제에 비유하자면 나는 남자친구도 1학년이라고 수업도 잘 빠지고 시험 때 공부도 하지 않고 막 노는 아이들은 내게 고백해 와도 만나지 않았다. 생각 없는 아이라고 여겨져 마음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너무 공부만 하는 아이도 좋지 않지만 너무 지나치게 노는 아이는 미래에 대한 생각도 없고 성실하지 않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그 때문에 평소 내 이상형이 아니었지만 성실함 하나만으로 이성에게 관심을 가져본 적도 있다. 물론 동성도 마찬가지다. 암튼 내 교육의 최우선 요건은 성실함이므로 학생들에게 성실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데에 모든 목표를 둘 것이다.둘째, 늘 준비된 교사이고 싶다. 아무리 쉬운 내용이든 수업 전에 꼭 준비하고, 참고 자료도 많이 준비해서 학생들에게 수업이란 것이 지루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그리고 하나라도 더 알려주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첫째 요건으로 들었듯이 내가 성실함을 보인다면 아이들도 조금은 더 따라오기 쉽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셋째, 내게 차별이란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 수업을 듣는 학생이라면 모두 똑같은 자격의 학생인데 인간적으로 어떤 편애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정말 예의 없이 행동하거나 기본적인 부분까지도 무시하고 학교를 다녀 내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학생이라면 어느 정도 노력을 기울여보고 포기하는 경우는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지금 내 열성으로는 그런 학생까지도 다 내가 이끌어 갈 수 있을 것 같다. 적어도 나라는 교사는 공부 잘하는 아이들 위주로만 수업을 진행한다거나, 나에게 잘 보이려 여우같은 행동을 하는 학생만 챙기는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넷째, 나는 매는 들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성적이고 남들보다 여린 편이어서 아이들을 때리지는 못할 것 같다. 사실 대학 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내 성격을 이용하는 선배나 동기, 후배들을 간혹 만나기도 했다. 나를 만만하게만 보는 경우가 그것인데 이런 것은 일시적인 것 같다. 처음에는 잘 모르고 그렇게 행동하다가도, 시간이 좀 더 흘러 나를 완전히 파악하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따라서 학생들에게도 따로 매란 것이 필요 없이 다독거리고 타이름으로써, 도리어 아이들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는 것으로써 그걸 매로 삼으면 된다.다섯째, 나는 학생들에게 존댓말을 쓸 것이다. 개인적으로 대화할 때는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겠지만 수업 시간이나 단체로 말을 할 때는 말을 높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아이들을 존중해주는 언어가 선생님을 존중하게 해주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거리감이 들게 하는 것 보다 선생님과 동일한 언어를 쓰기 때문에 더 부담스럽지 않고, 더 편하게 대할 수 있을 것 같다.여섯째, 아이들을 부를 때는 꼭 이름을 부를 것이다. 교사가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 아, 저 선생님이 나를 기억하시는구나, 혹은 관심을 가져주시는구나’ 라고 생각해 선생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애쓴다. 사실 학생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해서 부른다는 것은, 특히 담임선생님이 아닌 교사에게는 자연스럽게 기억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외워야 하기 때문에 힘든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사소한 것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어 신경쓰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5번, 10번, 43번 이런 식으로 번호를 부르고 심한 경우는 학생들의 특징을 가지고 놀리는 식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런 경우는 당사자가 아닌 경우에는 즐겁고 재미있는 상황이지만 지적받은 학생은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앞에서 말한 내 경험이 바로 이것이다. 어떨 때는 이런 가벼운 말들이 큰 상처가 되기도 했다. 교사의 말 한마디가 학생에게는 큰 힘이 될 수도 있고, 평생에 잊지 못할 상처로 남을 수 있는지를 생각한다면, 그들의 신체적인 특징, 대부분 콤플렉스가 되는 그러한 것들로 학생의 이름을 대신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은 서로 신뢰감을 쌓는 것이며, 교육으로 나아가는 첫 단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교사를 할 수 있는 기회만 주어진다면 앞에서 말한 대로, 이 열성 그대로, 꼭 멋진 교사가 되고 싶다. 내 장점이자 콤플렉스인 내성적인 성격을 충분히 살려 어떤 고민도 다 들어줄 수 있는 그런 교사가 되고 싶다. 그래서 졸업 후에도 가끔 생각하고 그리워해서 찾아오기도 하는 그런 학생이 있는 교사가 되고 싶다.
< 경험으로 쓰는 자기이력서 >0000학과 00000000 000저는( )이라고 합니다. 나이는 21살이고 사는 곳은 (............ )인데, 현재는 학 교 앞에서 자취생활을 하고 있습니다.연락처는 000-000-0000입니다.저는 아주 엄하시고 가부장적인 무뚝뚝한 아버지와 너그러우시 지만 똑부러지는 어머니 밑, 충분한 관심과 보호 속에서 자랐 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렸을 때 성격은 내성적이고 조금 심하 다 싶을 정도로 부끄럼도 많이 탔습니다. 여린 편이고 남에게 자신의 의사표현 하는 것에도 능숙하지 못했지만 누구보다도 따뜻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고,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들어주며 공감할 수 있는 일에는 가장 자신 있어 했습니다.이런 제 성격이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들과 대화도 많이 나누고 장난치면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는데, 그 때 내 입장에서 의사표현 하는 법도 배우고 활달한 성격으로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대학에 진학하니, 더 많은 발전이 있었습니다. 동아리 생활을 하면서 각 분야에 여러 선후배들과 섞여 생활하면서 같이 큰 행사도 치르고 혼나기도 하고 술도 마시면서 많이 외향적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저는 저를 흙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세상에 모든 것은 흙 위에 서 있고, 흙은 세상의 모든 것을 지탱합니다. 나무도, 사람도, 건물도... 어느 곳에 가도 남들 앞에 나선다거나 튀지는 않지만 그 바탕을 이루고 있고, 그 흙 위에 서 있는 모든 것들을 안정시켜주고 성장하고 발전을 이루는데 도움을 줍니다. 한마디로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전혀 아무 말없이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라는 뜻은 아닙니다. 1차적으로 땅 위에 있는 나무가 수분을 공급받지 못해 말라가고 있다 하더라도 흙이 그 나무에게 영양공급을 해 줘서 다시 살아날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존재에 있어 보험을 들어놓는 것이라고나 할까... 특히, 성인이 된 후 많이 변화한 저는 남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내성적인 성격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평소에는 조용한 성격이지만 말을 해야 할 자리에서는 말과 행동을 똑부러지게 해서 어떨 땐 의외로 냉정하다는 말도 듣습니다. 저는 이것이 저의 큰 장점이라고 자부합니다.저는 초등학교 때 음악가의 꿈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피아노에도 많은 관심이 있었고, 노래 부르는 것도 매우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합창단 활동을 하면서 공연도 많이 하고 대회도 자주 나갔습니다. 그러나 중학교에 진학하자 시간에 많은 제약을 받으면서 흥미를 조금씩 잃게 되었고 점차 취미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의 기억이 지금 대학시절에 와서 민중가요를 부르는 노래패 학회생활로 이어졌습니다. 저는 신디를 연주하는 담당이었는데 봉사공연도 하고 각종 무대에 오르며 대학생활의 큰 기쁨이 되어주었습니다. 이 때 교사에게 필요한 봉사정신이나 대범함, 상황 대처 능력 등을 많이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교사가 되고 싶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교사의 가장 큰 비중은 학생들과의 교류입니다. 학생들에게 어렵고 멀리 느껴지는 교사는 싫습니다. 항상 가까이서 고민을 들어줄 수 있고 필요하다면 해결책도 제시해 줄 수 있는 가까운 교사가 되고 싶습니다. 저는 대학에 와서 평소에 푹 빠져있던 농구 동아리에 가입해서 다른 학교의 농구 동아리 사람들까지 정말 다양한 인간관계를 접해보았습니다. 힘들어서 운 적도 많았고 당황한 적도 있었지만, 저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경험들이었습니다. 이 동아리는 작은 사회라고 불릴 만큼 말도 많고 어려운 곳이었는데, 동아리 생활 3년차인 저에게 이 곳 사람들은 “넌 편안하고 가깝게 느껴진다” 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부족한 면도 많겠지만 이런 성격을 학교에서 한번 살려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