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Ⅰ. 서론1. 홉스의 생애와 그의 사상Ⅱ. 본론1. 사회계약설의 전개2. 홉스가 본 인간의 본성3. 홉스의 국가론 -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Ⅲ. 결론1. 홉스의 국가론이 갖는 현대적 의의Ⅰ. 서론그도 또 일찍 자신의 재질을 발휘한 학자였다. 15살에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가 여러 분야의 학문을 연구했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무신론자로서의 일생을 살았고, 자유로운 삶을 오래 즐긴 사람이라고 평한다. 그가 무신론자가 된 것은 어머니의 모태에 있을 때부터 사회적 혼란기에 심한 역경을 헤맸기 때문이라고 하며, 그런 과거가 홀로 부담과 의무감 없이 명문가에 기식하는 학자 및 사상가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90세가 넘을 때까지 활동을 계속하면서 정신적 향락에 머물렀다고 전해진다.)1. 홉스의 생애와 그의 사상영국의 철학자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는 영국 절대군주제 말기에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588년 4월 5일 스페인의 함대가 침공한다는 소문으로 공포에 휩싸인 맘즈베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홉스의 어머니는 이 놀라운 소문 때문에 조산을 하고 말았다고 한다. 후일에 토머스 홉스는 "나는 공포와 쌍둥이로 태어났다"고 했는데, 이것은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말이며, 그 당시의 배경은 그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는 15살 때에 옥스퍼드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는 청교도 정신을 갖게 되었고 동교에서 전통적인 스콜라 학파의 논리학과 물리학을 배우고 1608년에 학위를 받았다. 그는 졸업 후 카벤디쉬(Cavendish) 남작의 장남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그는 유럽여행 중 학자가 될 것을 결심하고, 이탈리아, 프랑스에서 많은 명사와 친교를 맺었으며 가장 영국적인 철학자라는 평을 받는 베이컨(Francis Bacon, 1556~1626)등과 교류하였다. 그는 독자적으로 철학체계를 수립하고 정치철학도 구상하게 되었다.1640년에 그는 군주의 절대적 권위를 옹호하는 정치적 저작을 집필하게 되었다. 1651년 그는 크롬웰(Cromwell Oliver,1599~1658)의 공화국정부에 충성할 것을 맹세하고 귀국해서 런던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되었고, 1679년 91세로 사망하였다. 홉스는 고전적 전통(Plato, Aristotle, Plutarch, Cicero)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경향은 과학적 기초 위에 도덕 . 정치철학을 정립하려는 의도와 시민적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려는 의도(즉, 이론적/실천적 의도)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는 후기에 이러한 전통이 진리 탐구와 평화에 기여하지 못했다고 생각함으로써 전통과 단절을 시도하였다. 수학 및 과학에 대한 연구는 전통과의 단절에서 학문적으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즉, 과학에 입각해 도덕철학과 정치철학을 확립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의 정치철학은 자연과학과 어느 정도 독립적인 성격을 갖는다.홉스의 전 생애는 영국이 겪었던 혁명의 상황 속에서 진행되었다. 영국의 근대사는 튜터 왕조가 1338년 까지 계속된 장미전쟁과 백년전쟁으로 영국의 절대주의를 성립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전쟁으로 봉건귀족들의 힘이 약해졌으며, 또한 국민들도 안정과 평화를 요구하였다. 튜터 왕조의 헨리 7세는 이를 계기로 강력한 중앙집권적 군주정치를 시작하였고, 헨리 8세는 수도원의 재산을 몰수하여 영국 전제군주 국가를 성립시켜 어느 정도 봉건 귀족의 특권을 억제하고 시민의 지위를 상승시켰다. 이는 산업의 발전과 무역진흥을 도모하여 국가건설에 주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브르주아라 부르는 계급의 대두는 점차적으로 정치적 요구를 하게 되었고, 튜터 왕조 이후의 스튜어드 왕조는 등장 초기부터 영국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을 크게 변화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절대주의적 입장을 고수하고 정치적으로 의회를 무시하고 종교적으로는 카톨릭에 가까운 영국 교회를 강조함으로써 종교적인 반발을 조장하였다. 결국 이러한 상황은 반군주 세력을 도모하게 하였다던 것이다.Ⅱ. 본론1. 사회계약설의 전개사회계약설이란 근대국가의 근본문제라고 할 수 있는 권력과 자유의 관계를 민주주의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한 근대 정치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이 권리를 잘 보장하기 위하여 서로 계약을 맺어서 공통의 법이 지배하는 정치사회-국가-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하고, 또 정치사회를 운영하기 위하여 설립한 정치기관을 어떻게 행사하면 개인의 자유와 생명의 안전을 지킬 수 있는가를 제시한 사상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17~18세기의 시민혁명기에 등장한 근대국가의 정통성과 존재이유를 설명한 정치이론이며 홉스, 로크, 루소가 대표적이다.사회계약설의 공통적인 주장은 정치사회 성립의 근거를 평등하고 이성적인 개인들 사이의 계약에서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주된 사회계약론자인 이들 셋의 이론은 구체적인 양상에서 차이를 갖는다. 루소는 인간의 본성은 선한데 사유재산 때문에 불평등이 생기므로 최대한 개인이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는 공화제를 옹호했다. 그리고 로크는 사람은 선해질 수도 있고 악해질 수도 있다는 백지설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생명, 재산, 자유 등의 자연권은 이양할 수 없다고 주장해서 입헌군주제를 옹호했다. 반면 홉스는 자연의 인간 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의한 투쟁?으로 간주하는 성악설을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저서 에서 전제군주에게 전권을 이양해야 한다고 했다.2. 홉스가 본 인간의 본성홉스에 따르면 인간존재 역시 기계적으로 끊임없이 운동하는 자연물 중의 하나일 뿐이며 인간의 본질은 세계 존재의 이해 즉, 그의 이성능력에서 찾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운동의 본능, 자기 보존의 본능 그리고 그것을 위한 ?힘의 추구?라는 의지능력에서 찾아질 수 있다.또한, 홉스는 ?인민이란 근본적으로 사리사욕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들이 합리적 이었다 하더라도 그들을 짓누르는 죽음의 공포로부터 쫓기고 있기 때문에 그들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수가 없으며 이와 같은 사실이 인민들로 하여금 서로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게 했다는 것?이다.)홉스는 정신은 미세한 물체이고, 인식은 외계의 운동이 감각기관에 주는 인상에서 생기며 실재의 모사가 아니고 주관적이라 하였다. 이는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으며, 지적인 판단이나 추리는 그 표현수단으로서 언어를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후자도 실재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고 개개의 물체만이 실재하는 것이며, 추상적?보편적 개념은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철학적 사상을 감정이나 정서에 대해서도 똑같은 원리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외적 자극에 대한 이론적 반응이 감각인 데 반하여, 실천적 반응은 쾌(快)?불쾌(不快)의 감정이라는 것이다. 선(善)이란 쾌이므로 인간이 바라는 것이고, 악(惡)이란 불쾌이므로 인간이 싫어하는 것이다. 의지는 외적으로 결정되며 결정론은 필연이다. 본질적으로 선한 것은 없고, 선악(善惡)?정사(正邪)는 상대적인 것이어서 국가와 법이 성립되었을 때에 그 판정의 기준이 생긴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어서 ?자연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금할 수 없고, 개인의 힘이 권리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자기 이익만을 끝까지 추구하는 자연 상태에서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있고, ?사람은 사람에 대하여 이리?이기 때문에 자기 보존의 보증마저 없다. 그러므로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 사람은 계약으로써 국가를 만들어 ?자연권(自然權)?을 제한하고, 국가를 대표하는 의지에 그것을 양도하여 복종한다는 그의 사상으로 귀결된다.3. 홉스의 국가론 -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정의의 원칙은 자연법에 존재한다. 그것은 신약이 선행하지 않은 곳에서는 어떤 권리도 양도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며, 모든 사람은 모든 것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어떤 행동도 부정의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약이 맺어지면 그때 그것을 깨뜨리는 것은 부정의이다.)인간의 본성에 대해 성악설을 주장하는 홉스는 평화를 위해서는 외부의 투쟁과 간섭으로부터 사회계약에 의한 단합된 행동이 필요하여 사회가 형성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렇듯 자연 상태(아무런 사회적 제약이 없는 상태)에서 사람은 생존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무제한으로 행사할 수 있는데 이때 저마다 자신의 생존과 이익을 우선시해서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돌려서 싸우고 결국은 각자가 생존과 이익을 위협받게 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는 게 홉스의 생각이다. 그래서 홉스는 이기심을 정말로 실현하려면 이성을 통해서 각자가 자연권의 일부를 포기하고, 서로 계약을 맺어 사람들의 의사를 대표하는 한 가지 의지에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홉스에 따르면 국가 권력의 정당성은 이로부터 나오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특히 그가 생각한 국가 권력이란 바로 전제 군주를 뜻한다. 그의 저서 (1651)에서 ?인간이 그의 권리를 양도하거나 그것을 포기하는 때는, 언제나 그 자신에게 서로 이익 되게 양도되는 어떠한 권리나 또는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희망하는 어떤 다른 이익을 해서 그렇게 하는 경우이다.?라고 함으로써 전제 군주제의 추구가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진정한 이익 추구에 그 목적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
1. 대원군의 생애1820(순조 20)~1898(광무 2). 이름은 이하응(李昰應),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이며 영조의 현손으로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의 아들이며 고종(高宗)의 아버지이다. 조선 후기의 왕족이자 정치가이다.헌종 9년(1843)에 흥선군에 봉해지고, 1846년 수릉 천장 도감의 대존관이 된 후 종친부 유사당상?도총관 등 한직을 역임하며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밑에서 불우하게 지냈다. 그동안 보신책으로 불량배와 어울려 파락호(破落戶)로서 궁도령이라는 비칭까지 불리며 안동 김씨의 감시를 피하였다. 그러면서도 철종이 후사가 없음을 기회로 조성하(趙成夏)를 포섭하고 대왕대비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趙氏)에 접근하여 둘째 아들 이명복(李命福 : 고종(高宗)의 아명)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내락 받았다.1863년에 철종이 죽고, 신정왕후 조씨에 의해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에 진봉되었으며, 이어 대왕대비의 수렴 첨정이 선포되자 정책결정권을 받아 섭정을 맡았다. 안동 김씨의 주류를 숙청하는 한편 당색(黨色)을 초월하여 남?북인 각파와 신분?계급을 초월한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부패관리를 적발?파직시키고 47개의 서원을 제외한 모든 서원을 철폐하였다. 또한 《육전조례(六典條例)》?《대전회통(大典會通)》 등을 간행하고 중앙집권적인 정치기강을 수립했다. 또한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와 삼군부를 두었으며, 의복제도의 개량?세제개혁?사창 실시 등을 행하였다. 그러나 왕실의 위엄을 상징하기 위하여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부족한 재정을 위한 원납전을 강징하여 백성의 생활고를 가중시켰다.고종 3년(1866) 제너럴셔먼호사건?병인양요?1871년 신미양요 등이 일어났으며 천주교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가하고, 척화비를 세우는 등 쇄국정치를 단행하였다. 그의 섭정에 불만을 품은 민비(閔妃)의 조종으로 1873년 동부수지 최익현(崔益鉉)의 탄핵을 받았으며 그 해에 고종이 친정(親政)을 선포하자 운현궁을 떠나 양주 직곡에 은퇴하였다.그 후 재집권을 노리던 중 1882년 과 왕권강화책대원군은 먼저 다년간의 족벌(族閥)정치 폐단을 없애려고 문벌(門閥)과 당색(黨色)을 타파하여 탐관오리를 숙청하고 내정의 일대혁신을 표방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종래 관료의 지위를 거의 독점하다시피했던 노론계(老論系) 인물들을 누르는 반면, 재능과 역량과 신망이 있는 타색타파(他色他派)의 인물들이 인재본위(人材本位)라는 공평성하에서 속속 등용되었다. 이러한 시책에 따라 이제까지 고려왕씨의 계통이었기 때문에 능참봉(陵參奉)밖에 못했던 왕씨(王氏)들이 기용되었는가 하면, 오랫동안 정계에서 소외되었던 남인(南人)들도 많이 등용되었고, 극단의 사례이긴 하나 서민(庶民) 출신인 이장렴(李章濂)을 호담(豪膽)하다 하여 금위대장(禁衛大將)으로 임명하는 일까지 생겼다. 이러한 인재등용책은 대원군의 권위와 권력을 높이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지만 그 반면 구정치(舊政治) 판도의 속성에 따른 맹렬한 반대도 있었다. 그러나 단마쾌도식(斷麻快刀式)으로 내외정책을 자기소신껏 실천하려 하였던 대원군은 아예 이러한 움직임을 등한시한 채 심지어는 당시 성장하고 있었던 보부상(褓負商)을 중심으로 한 상인세력과 지방토호(地方土豪) 및 하급이족층(吏族層) 세력등과도 융합관계를 형성함에 의하여 왕조체제의 유지와 자기의 권력적 지반을 더욱 공고히 하려고 매우 다양하며 탄력성 있는 노력을 하였다. 여하튼 이와같은 그의 정치적 수완(手腕)이 모두 인재등용이라는 명목하에서 집행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제까지 빈번하였던 민중의 반정부운동인 민란을 대단히 중요시하고 이것을 완화시키고자 그들에 대한 각종의 봉건적 착취제도 전반을 쇄신하는 한편, 양반관료의 횡포와 억압을 저지하도록 함에 의하여 그들에게 새로운 활기를 불러 일으켜 주려고 하였다. 즉 대원군은 종래 평민에게만 부과했던 군포(軍布)를 호포(戶布)로 개칭하여 양반이나 상민(常民)의 구별없이 고루 징수하게 했는가 하면, 환곡(還穀)제도를 사창(社倉)제도로 고치어 창고내의 실재량을 조사한 다음 사복(私腹)을 채운 자를 엄벌에 처하는은 채택하여 과감히 실천하고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용서없이 탄압?배제하려 하였다. 그 주요한 것을 들어보면 앞서도 언급한 바 있는 안동김씨 세력의 제거에 의한 왕권강화의 추진과 더불어 서원(書院)을 중심으로 한 지방양반세력에 대한 억압이었다. 즉, 그는 지방양반지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재지적(在地的) 거점이었던 650여개에 달하는 서원을 정리하여 47개로 줄였다. 서원과 사우(祠宇)는 외관상 지방양반 및 유생들이 산림의 한적한 장소에 설치하여 유학을 강의함과 함께 그 장소와 연고가 있는 유현(儒賢)과 선열(先烈)을 제사하는 양반계층들의 일상생활에서 활용하는 도장(道場)과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나, 본질적으로는 양반지배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봉건세력의 재생산기관임과 동시에 보급기관이었다. 중종 38년(1543)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周世鵬)이 고려시대의 성리학자 안유(安裕)의 고향인 풍기군 죽계(竹溪, 현 영주군 순흥면)에 백운동(白雲洞)서원(지금의 소수서원(紹修書院))을 창설한 이후 그 수는 급속도로 증가하여 대원군의 집정초기에 이르자 전국에 분포된 사액(賜額)과 비사액(非賜額)서원을 합치면 무려 650여개에 달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지방의 양반?유생들은 서원을 서로가 경쟁적으로 설립하여 이것을 그들의 선사숭배(先師崇拜)와 문벌경쟁(門閥競爭)의 장소로 전화시켰다. 그 때문에 서원은 광대한 농장과 많은 노비를 소유함과 동시에 양반유생의 무위도식과 군역을 기피하는 특권적 전당(殿堂)으로 되었는가 하면 민중을 수탈하는 근거지로 되어 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유학론의 중심지로서 당파를 결성하여 정담(政談)을 좋아했고, 그 지방의 여론을 좌우하는 등 은연히 정치에 대한 시론(時論)을 지배하기까지 하였다. 일례를 들면 노론의 송시열을 배향하는 청주목(淸州牧)의 화양(華陽)서원이 발하는 흑패(黑牌, 書簡)는 정부의 명령보다도 더 위력이 있었다고 한다.이와 같은 봉건세력의 지방할거적 존재는 대원군의 정권전제주의정책(正權專制主義政策)의 실행에 있어 큰 종 면세의 특권을 박탈하였다. 그러다가 고종 8년 3월에는 드디어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을 전국에 반포하여 저명한 사액서원(賜額書院) 47개만을 남기고 그밖의 것은 모두 폐쇄시키고 말았던 것이다.그러나 이와 같은 조치만으로써는 그들의 물질적 기반을 완전히 박탈할 수가 없었으므로 서원의 여세는 정부에 대한 반항을 계속하게 되고, 드디어는 그것이 대원군 하야의 한 원인이 되었다.대원군은 외척의 배제 및 서원정리와 병행하여 국가재정의 충실에도 노력하였다. 종래에는 서민만 부담하던 군포를 호포로 개칭하여 양반계급에까지 고루 징수케 하였고 간이배(奸吏輩)의 부정을 막기 위하여 문란된 환곡제도를 사창제도로 개혁하였다. 또한 그는 법전을 편찬케 하여 허물어진 정치기강을 바로 잡음으로써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완벽히 하려 하였다. 또한 그는 종래 군사와 행정의 양권을 맡아 온 비변사(備邊司)를 '삼군부(三軍府)'로 개편하여 군정의 체계를 갱신하게 하고 만주로부터 군마(軍馬)를 구입하여 상무(尙武)의 풍(風)을 고무(鼓舞)하는 등 군제개혁(軍制改革)의 다양성을 보였다. 즉, 그는 북방으로부터의 침략군을 방어하기 위하여 무산(茂山)?후창(厚昌) 등의 국경지세에는 둔전(屯田)을 개척하여 제정(帝政)러시아의 남하에 대비케 하였고, 또한 동래성(東萊城)을 수리하여 일본의 침략에 대비케 하는 등 호국(護國)을 위한 거족적(擧族的)인 총력안보체제를 확립하려 하였다.대원군의 이와 같은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지표로 한 외래세력 배격론하(排擊論下)에 추진된 왕권강화책은 어느 정도까지는 민중을 이끌면서 회유하고 기만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분히 낡은 봉건체제의 유지와 전제왕권 확립을 위한 정치적요소에 따르는 일종의 합리적 수단으로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개혁'은 점차 외관상의 것으로 끌려가는 경향이었고 또한 그러한 '개혁'과 병행해서 이루어진 대원군의 모든 정책도 종국적으로는 민중에게 오히려 억압을 주고 수탈과 착취를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어 역사의 발전법칙과는 전혀 게 하였으며, 또한 가톨릭교의 유행과 서양 상품의 범람은, 정통적인 유교사회의체제를 지키고 양화(洋禍)를 막으려는 움직임을 낳게 하였다. 더욱이 서양 함선인 이양선(異樣船)의 잦은 출몰과 그들의 통상(通商) 요구는 조선의 위정자들에게 위기의식을 가져다 주었다.1832년, 1845년 영국의 통상 요구, 1846년 프랑스의 통상요구, 1864년 이후 러시아의 통상 요구가 잇달자 당시의 집권자인 흥선대원군은 서양과의 교역을 엄금하고 문호를 닫아 버렸으며, 가톨릭교 탄압을 단행하였다. 당시 흥선대원군은 러시아의 강경한 통상 요구가 있자 프랑스 선교사의 힘을 빌어 이를 막아 보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또한 서양 선교사들이 잠입하여 교세를 확장시켜 나가자, 흥선대원군은 이들을 서양 열강의 앞잡이로 인식하였으며, 당시 청나라의 가톨릭교 탄압을보고 그도 가톨릭교를 철저히 탄압하였다. 이것이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로서,남종삼(南鍾三)을 비롯한 신도 8,000여 명이 학살되고, 포교활동을 하던 프랑스인 신부 12명 중 9명이 처형당한 사건이다. 이때 나머지 3명의 신부 가운데 한 사람인 신부리델이 베이징으로 탈출하여 프랑스 공사(公使) H.D.벨로네에게 이 사실을 전함으로써 서양세계에 널리 알려졌다.2) 서양열강의 공세H.D.벨로네공사는 중국 톈진[天津]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극동함대사령관 P.G.로즈에게, 프랑스인 신부 살해에 대한 문책과 문호개방을 위하여 출동할 것을 명령하였다. 제독 로즈는 군함 7척을 이끌고 강화도(江華島)를 공격하였으나 강화도 수비병의 완강한 저항으로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이것이 곧 1866년의 병인양요(丙寅洋擾)이다.그후에는 미국에 의해 문호개방이 시도되었다. 미국의 상선(商船) 제너럴셔먼호(號)가 대동강을 거슬러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다가 평양의 군민(軍民)에 의해 불타버린 사건에 대한 문책으로, 미국은 아시아함대사령관 J.로저스에게군함 5척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하였다. 그후 1871년에 일어난 신미양요(辛未洋擾)에서도 강화도 수비병다.
보편화된 인터넷을 통해 유권자와 가장 친화적인 수단으로 떠오르고 있는 현재 각 주요정당에서도 인터넷 활용이 아주 활발하게 진행되어지고 있다. 각종 행정업무나 설문, 사이버 투표 등이 간간이 이루어지고 있고, 이제는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홍보전략으로써 부각되어지고 있다. 실제로 인터넷을 통한 선거 유세가 이루어지고 있고, 실시간 방영되는 인터넷TV, 그리고 각 지역, 후보의 로고송도 인터넷을 통해 언제든지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후보자들의 토론 및 정당의 정책 등을 언제든지 인터넷 하나로 집에서 유권자가 원하는 시간에 접할 수 있도록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정당의 인터넷 활용이 돋보이고 있는 추세이다.그 중 사이버 상의 정당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정당 홈페이지는 그 당의 전체적인 당의나 슬로건, 당이 지향하는 바, 당의 이미지가 가장 잘 나타나있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열린 우리당의 홈페이지는 바탕색에서부터 노란색 일색인데 반해, 한나라당의 홈페이지는 처음 대하게 되는 대문이 전체적인 분위기가 파란색의 깔끔한 이미지였다. ‘파란나라 희망나라 NEW한나라’ 라는 타이틀로 파란색이 갖는 희망적이고 깔끔한, 청렴을 상징하는 색깔로 활용하고 있는 점이 돋보였다. 또 빡빡한 글자들로 마치 신문사 등의 홈페이지를 연상시키는 타당들과 달리 색색깔의 배너와 이미지 중심의 코너 소개, 역시 다른 당의 홈페이지에 비해 많은 여백 등은 기존의 한나라당에 대해 다소 딱딱하고 남성적인 느낌을 갖고 있던 네티즌들이 젊고, 여유 있고, 유연한 이미지를 갖고 돌아가기에 충분해 보인다. 이는 정보화사회의 이미지 공략을 위주로한 정치를 단적으로 보여준다.이런 한나라당의 노력은 비단 시각적인 면에서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지난 2002 대선에서 인터넷을 모범적으로 활용한 노대통령에 한번 패배한 전적이 있는 지라 그런 실수를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기울이는 노력들이 상당했다.국민의 여론을 수렴하는 것이 정당인 만큼 국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공간이 가장 활발히 이루어져야한다. 그리고 사이버 공간의 국민이 바로 네티즌이다. 그래서 ‘네티즌 세상’이라는 코너를 따로 만들어 세부 게시판으로 ‘e-게시판, 뉴한나라CJ(cyber jockey), 정책제안, 한나라 웹진, 열린자료실, 젊은 해밀(사이버당원)’, 또 ‘네티즌 이슈’ 라는 게시판을 만들어 많이 보는 기사들을 올리는‘ 등등 네티즌들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다양한 장치를 구성하고 있었다.한나라당의 인터넷 활용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당대표인 박근혜 의원에 대한 스타만들기를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포토뉴스 게시판에는 [‘4대국민분열법 바로알기, 네티즌 운동'선포식에 참석한 박대표, 논의하는 두 대표(24일 최고?중진 연석회의 ), 식품안전 강조하는 박근혜대표, - 교육강국2010 - 교육선진화 비전 공개토론회 기조연설하는 박근혜 대표] 등 과하다 싶을 정도로 박근혜 의원 사진으로 도배 되어있다.또 ‘네티즌 이슈’ 라는 게시판은 많이 보는 기사들을 올리는 곳인데 이 곳 역시 박근혜 의원의 기사가 상당수 올라와 있다. 물론 당을 대표하는 얼굴로써 박근혜 의원 개인에 대한 선전을 비난할 수는 없겠지만, 박정희라는 박근혜 의원의 배경으로 연설 때마다, 혹은 TV 토론회마다 아버지를 거론하는 것은 박정희 향수를 자극하여 자신을 동일화시키려는 의도라는 의혹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박근혜 의원을 내세워 유일한 여성 대표가 이끄는 당, 여성적이고 유연하며 젊은 당이라는 이미지를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그리고 젊은 해밀의 홈페이지에서 박근혜 의원의 개인 홈페이지인 싸이월드 미니홈피 배너도 볼 수 있었다. 미니홈피는 정책 제안 등의 정치적 공간이 아니라 단순히 박근혜 의원 개인에 대한 공간으로 연예인에 열광하는 팬들과 같은 박근혜 의원의 일촌들이 박근혜 의원에 열광하고 있다. 이는 의원의 정치적 성향이나 정책에 대해 지지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것인 단순히 박근혜 스타 만들기일 따름이다.특히 한나라당에서는 홈페이지 관리에 있어 특별하게 자원봉사자를 쓰는 것은 아니지만 웹 상에서의 자원 봉사자는 현재 모집하고 있다. 이들의 역할은 홈페이지에 당에 대한 유리한 글을 지속적으로 올려주면서 홈페이지 운영에 도움을 주는 정도이다. 웹 상의 자원봉사자를 지원하는 방법은 우선 한나라당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HOME > 서포테인먼트 > 자원봉사자클럽 순으로 클릭하여 자원봉사자 클럽 가입신청을 하면 된다. 이는 ‘한나라당 여론조작팀 가동(한나라당 10만알바 총출동)’ 과 같은 기사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각 포털 게시판과 수많은 인기 카페, 그리고 뉴스 댓글 등에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글을 올려 과거 10만 대군과 같이 사이버 공간에서 활약하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이렇게 박사모와 자원봉사자들을 십분 활용,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지난 대선 때 활약하였던 것만큼의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폴 케네디의 강대국의 흥망- 들어가면서역사가 있어온 이래 우리는 수많은 강대국들의 흥망을 경험하며 살아왔다. 동전의 양면처럼 국가의 흥망은 늘 함께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예언이 아니라 우리의 과거 역사가 설명해 주고 있다. 이런 강대국들 사이의 흥망에 대해 폴 케네디의 저서는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이 책은 1500년부터 2000년까지의 다섯 세기에 걸친 강대국들의 흥망성쇠를 규명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 기존의 연구가 정교하지만, 군사, 경제, 외교 같은 해당 분야의 단선적인 입장에서 이 주제를 다룬 반면, 『강대국의 흥망』은 종합적인 국력의 배분, 특히 군사력과 경제성장에 대한 투자의 균형을 중심으로, 기술발전, 정치적 변동, 지정학적요인 등을 고려한 분석을 제시한다.- 강대국의 흥망..처음 이 책의 표지를 보고 받은 인상은 ‘열강의 지구 나눠먹기??’ 였다. 개정판의 표지에는 영국,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의 국기를 가슴에 단 다섯 사람이 공중에 떠 있는 지구를 향해 손짓을 하고 있는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바로 제국주의 시절을 풍자하는 열강들이 중국 지도를 향해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나누고 있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있던 그림이었으니 지구 나눠먹기란 인상을 받은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먼저 1~2 장을 읽으면서 왜 서유럽 지역이 다른 지역을 누르고 부상하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지도상의 서유럽은 아주 작은 크기였으며 천연자원이 그다지 풍부한 것도 아니었고 이전에는 왜 이런 의문이 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저자가 “기적”으로 까지 표현한 유럽의 부상은 지리적 특성으로 인한 분산된 권력과 그에 따른 호전적 분쟁, 그리고 많은 변화는 발전을 가져왔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 과정에서 표현된 유럽의 세력 균형이란 이미 여러 수업 시간에 거쳐 학습한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세력균형에 대한 여러 유럽 국가들의 노력이란 실로 눈물겨울 만큼 필사적으로 보여졌다.하지만 무엇보다 이 책의 논지가 경제력과 군사력의 상관관계를 규명함으로써 강대국의 흥망을 좌우하는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므로 그 점을 중점적으로 논한다면 다음과 같다.폴 케네디는 최근의 미국을 비롯해 과거의 수많은 강대국들은 기술발전과 경제성장을 통해 그 지위를 획득하고 나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국력의 더 많은 부분을 점점 군사비에 돌리게 된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적절한 군사력을 유지하면서 경제 성장에 치중하는 나라만이 새로운 강대국으로 부상한다면서 경제력과 군사력 사이의 균형 맞추기에 무게를 실었다. 하지만 “한 쪽의 덜 갖고 더 가진 문제는 전쟁이 장기화함에 따라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 “명백한 것은 장기화된 강대국 전쟁(보통 동맹전쟁의 형태였다)에서 승리하는 쪽은 대체로 더욱 활기찬 생산기지를 확보하고 있거나 또는 스페인 장교들이 입버릇처럼 얘기했듯이 아직도 자금이 남아있는 쪽이다.” 라고 주장하는 등 어느 정도 경제 결정론적인 듯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이 책의 요지나 다른 여러 부분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나름대로 이 책의 문제점이랄까 혹은 폴 케네디의 한계랄까, 개인적으로 의문스러운 점을 몇 가지 나열하고자 한다. 우선 제국의 흥망성쇠를 2개항으로 국가의 재정 그리고 군사력, 군사비 지출, 이 두 가지 항으로만 설명하기는 힘들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물론 이 책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저자가 말한 대로 지정학 (geography), 군사 조직 (military organization), 국가의 기율 기강 (national morale), 동맹국가 관계 (the alliance system) 등도 그 변수에 포함되어야 한다. 실은 그 뿐만은 아니다. 한 체계의 위기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시스템을 이루는 하부체계들의 위기와 더불어, 그 참여자, 내부 참여자들의 '위기'에 대해서, 그 위기관리 능력이 왜 쇠퇴하게 되었는가도 밝혀야 한다.그리고 소련 패망 이후, 미국의 국제정치 헤게모니가 더 강화되고, 미국의 재정능력과 군사비 지출과의 관계에서, 후자가 늘어나고 있지만, 미국체제는 더 공고하게 되고 있다는 점에서, 폴 케네디의 '가설' 아니 테제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미국이 군사비 지출을 늘리고, 군비확장을 해도, 그 시스템이 유지되고 있지 않은가 ? 물론 '장기적으로 over the logner term' 이라는 단서를 폴 케네디가 달기는 했지만 말이다. 2003년 미-영 동맹의 이라크 침략- 에너지 확보 전략과 유럽-아시아(중국) 견제책-에 대해서, 분명 폴 케네디는 자기 입장을 가지고 설명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과연 조지 부시 II 는 이러한 폴 케네디의 테제 (국내 재원 조달 능력과 군사비 지출과의 긴장관계) 를 해결할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