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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일 의병 전쟁 학습 지도안(세안)
    국사과 교수-학습 지도안(항일 의병 전쟁의 전개){결재계부장교감교장{일시2005년 04월 226일대상2학년 2반출신학교한남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지도교사정 충 진지도교생양 승 철아 산 고 등 학 교Ⅰ. 단원명1. 대단원 : Ⅱ. 근대사회의 전개2. 중단원 : 3. 구국 민족 운동의 전개3. 소단원 : 항일 의병 전쟁의 전개Ⅱ단원의 개관조선은 내부에서 싹트기 시작한 근대적인 요소를 충분히 성숙시키지 못한 채, 일본의 강요에 의하여 문호를 개방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안게 되었다.1880년대에 조선 정부가 추진한 개화 정책은 보수 유생들의 위정 척사 운동, 구식 군인들의 임오군란 등의 반발에 부딪쳤으며, 급진 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은 청의 무력 개입으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1890년대의 갑오개혁으로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면에서 근대적인 제도가 마련되었다.또한, 동학 농민군은 외세의 침략과 지배층의 압제에 저항하는 반침략·반봉건 운동을, 독립협회는 민중을 기반으로 한 자주 국권·자유 민권·자강 개혁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는 시기에는 국권 회복을 위한 항일 의병 전쟁과 애국 계몽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문호 개방 후, 경제면에서는 민족 자본을 육성하려는 노력이 있었고, 사회면에서는 양반 중심의 신분 제도가 폐지되어 근대적 평등 사회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문화면에서도 서양의 근대 사상과 과학 기술이 수용되었고, 근대적 교육 운동과 국학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Ⅲ. 단원의 학습목표1. 동학 농민군이 제시한 폐정 개혁 12조를 분석하여 동학 농민 운동이 반봉건적 사회 개혁 운동, 반침 략적 항일 민족 운동임을 추론할 수 있다.2. 아관파천 후 제국주의 열강의 간섭과 이권 침탈이 심해지는 가운데 독립 협회가 조직되어 자주 독립, 자유민권, 자강 혁신의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음을 이해한다.3. 의병 투쟁의 전개 과정을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의 단계로 파악하고, 각 단계별로 봉기의 계기 와 특징에 대해 말할 수 있다.4. 애국 계몽운동은불평등 조약 체제2교과서PPT학습지1) 개화 세력의 대두2) 개화 정책의 추진과 반발31교과서PPT2. 개화 운동과 근대적 개혁의 추진3) 개화당의 근대화 운동2교과서PPT{Ⅱ근대 사회의 전개2. 개화 운동과 근대적 새혁의 추진4)근대적 개혁의 추진33교과서PPT1. 동학 농민 운동의 전개41교과서PPT학습지3. 구국 민족 운동의 전개2. 독립 협회의 활동과 대한제국2교과서PPT3교과서PPT학습지3. 항일 의병 전쟁의 전개4. 애국 계몽 운동의 전개4교과서PPT4. 새항 이후의 경제와 사회1. 열강의 경제 침탈41교과서PPT학습지2. 경제적 구국 운동의 전개2교과서PPT학습지3. 사회 구조와 의식의 변화3교과서PPT4. 생활 모습의 변화4교과서PPT5. 근대 문물의 수용과 근대 문화의 형성1. 근대 문물의 수용41교과서PPT학습지2. 언론 기관의 발달2교과서PPT학습지3. 근대 교육과 국학 연구3교과서PPT4. 문예와 종교의 새경향4교과서PPT{본시 교수·학습 지도안단원Ⅱ. 근대 사회의 전개소단원3)항일 의병전쟁의 전개지도교사정충진학반2학년 2반일시2005. 04. 26일교생양승철학습목표1. 항일 의병 전쟁의 배경과 전개 과정을 이해한다.2. 항일 의병 전쟁의 참여 동기를 각계각층의 입장에서 말할 수 있다.3. 항일 의병 전쟁이 일제하의 항일 무장 독립 투쟁의 기반을 마련했음을 설명할 수 있다.교수 학습 자료교사학생교과서, PPT, 학습지교과서, 필기도구, 학습지단계학습내용교수·학습과정시간유의점교사학생도입학습분위기 조성☞ 인사☞ 인사한다.5☞ 학생들이 집중할 수 있도록 한다.☞ 모둠별로 앉아 수업에 임하도록 한다.전시학습 확인☞ 구국 민족운동의 전개1)동학 농민 운동2)독립협회의 활동☞ 전시학습을 통해 동학 농민 운동과 독립협회의 활동에 관해 다시 한번 확인한다.☞ PPT를 활용하여 전시학습 내용을 확인한다.☞학습목표를 이해하기 쉽도록 보충 설명을 한다.학습목표 제시☞ 학습목표를 제시한다.☞ 학습목표를 이해한다.전개☞ 의병의 개념에 대해 발문한다.☞ 교사의 발단계학습내용교수·학습과정시간유의점교사학생전개모둠활동 1(사료학습연표그리기-을미의병-을사의병-정미의병☞ 미리 제시된 학습지를 볼 수 있도록 하고, 학습 순서를 설명한다.☞ 교사의 설명을 귀담아 듣는다-학습지에 제시된 사료를 읽고 을미·을사·정미의병의 원인과 특징을 탐구하고, 제시된 사건들을 일어난 순서대로 배열하여 연표를 작성 한다.35☞수업 분위기가 산만해지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모둠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한다.☞ 각 모둠들은 발표 내용과 토의 내용을 비교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펼 수 있도록 한다.☞ 모둠들 중 하나가 대표로 토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을미의병과 을사의병의 원인과 특징에 대해 설명하도록 한다.☞ 발표하는 모둠 이외의 다른 모둠에서는 발표자의 발표를 경청한다.☞ 발표한 모둠 이외의 모둠들 중 하나가 작성한 연표를 설명한다.☞을미의병의 주도세력이 위정척사사상을 가진 유생이었다는 것을 안다.을미·을사의병☞ 학생들이 발표한 내용을 기반으로 보충 설명을 한다.-을미의병의 해산-활빈당 활동-전술의 변화-주요 의병장들☞ PPT를 보면서 교사의 설명에 집중한다.정미의병☞ 정미의병에 대하여 설명한다.-정미의병의 배경-의병전쟁의 전개-서울 진공 작전☞ PPT를 보면서 교사의 설명에 집중한다.☞군대해산이 의병전쟁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서울진공작전 실패 후의 의병활동에 대해 설명한다.-호남지방의 의병활동-남한대토벌작전 후의 의병 활동☞ 토벌작전 이후 의병이 간도, 연해주로 이동하여 독립군의 기반이 되었음을 이해한다.모둠활동 2(사료학습연표그리기)☞ 미리 제시된 학습지를 볼 수 있도록 하고, 학습 순서를 설명한다☞ 교사의 설명을 귀담아 듣는다.-학습지에 제시된 사료를 통해 의병활동의 의의와 한계점에 대해 토의한다.☞수업 분위기가 산만해지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모둠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한다.{단계학습내용교수·학습과정시간유의점교사학생전개☞ 모둠들 중 하나가 토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의병활동의 의의와 한계점을 설명한다.☞ 발표자의 발표를 경청한 있는 문제를 통하여 중요한 내용을 다시 한 번 정리한다.☞학습지에 있는 문제를 풀어보면서 본시 학습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문제에 집중할 수 있도록 부연 설명을 곁들인다.차시 예고☞ 다음 차시인 애국 계몽 운동을 소개한다.☞ 교사의 설명을 듣고 차시에 학습할 내용에 대해 생각해 본다.☞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의 차이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한다.학습 자료1. 의병의 개념의병이란 일반 민중들로 구성된 군대이다. 나라가 위급할 때, 정부의 군대 소집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군대를 조직하여 적과 맞서는 사람이다. 이것은 털끝만치도 병역 의무와 무관한 것이었으며, 오직 충과 의를 받들면서 사방에 모여들어 죽음을 무릅쓰고 싸운 것이다. 앞사람이 쓰러지면, 뒷사람이 계속하여 적이 물러갈 때가지 싸웠다. 그러므로 의병은 한국 민족의 정수(國粹)라 할 수 있다.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2. 다음 자료를 읽고 을미·을사·정미 의병의 발생 배경과 특징에 대하여 모둠별로 토 의하고 발표해 보세요. 을미의병(1차)아! 원통하외다. 뉘 알았으랴, 외국과 통상(通商)한다는 꾀가, 실로 망국의 근본이 될 것을. 문을 열고 도적을 받아들이어 소위 세신(世臣)이란 것들은 달갑게 왜적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데, 목숨을 바쳐 인(仁)을 이루려는 이 선비들은 남의 노예가 되는 수치를 명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중략)… 원통함을 어찌하리. 국모의 원수를 생각하며 이를 갈았는데, 참혹함이 더욱 심해져 임금께서 또 머리를 깎으시는 지경에 이르렀다. 의관을 찢긴데다가 또 이런 망극한 화를 만났으니, 천지가 뒤집어져 우리 고유의 이성을 보전할 길이 없다. 우리 부모에게 받은 몸을 금수로 만드니 무슨 일이며, 우리 부모에게 받은 머리카락을 풀 베듯이 베어버리니 이 무슨 변고란 말인가. …(줄임)… 무릇 우리 각 도 충의의 인사들은 모두가 임금의 보살핌을 받은 몸이니 환난을 회피하기란 죽음보다 더 괴로우며 멸망을 앉아서 기다리기 보다는 차라리 싸우는 편이 훨씬 낫다. 을사의병(2차)1 오호라. 난신적자 조인하여 5백년 전해오던 종묘 사직이 드디어 하룻밤 사이에 망하였으니, 천지 신명도 놀라고 조종의 영혼도 슬퍼하였다. 나라를 들어 적국에 넘겨 준 이지용 등은 실로 우리 나라 만대에 변할 수 없는 원수요, 자기 나라 임금을 죽이고 다른 나라 임금까지 침범한 이등박문은 마땅히 세계 여러 나라가 함께 토벌해야 할 역적이다. 우리 의병 군사의 올바름을 믿고 적의 강대함을 두려워하지 말자. 이에 격문을 돌리니 도와 일어나라. 2 신돌석은 1878(고종 15)∼1908년에 활약한 한말의 대표적인 평민 출신 의병장이다. 강원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의병 세력을 구축하여 일본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 본명은 신태호였는데 혼히 태백산 호랑이 라고 불렸다. 영해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6년 영해에서 의병 3백여 명을 모아서 일어났다. 을진군 평해면으로 가서 다시 3천여 명의 의병을 재편하고 여러 차례 일본군과 싸웠다. 경상도, 강원도 일대와 동해의 해안선을 따라 기습전을 전개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1907년 12월 서울 공격을 목적으로 13도의 의병이 조직될 때, 그의 의병 부대도 1000여 명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연합 의병 부대의 각 도 의병 대장은 양반, 유생 출신의 의병장으로 편성하고, 그를 비롯한 홍범도, 김수민 등은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제외되었다. 이에 신돌석은 의병을 이끌고 영해로 돌아와 항전을 계속하다가 1908년 일본인에게 매수된 친지에 의해 죽었다. 정미의병(3차)1 융희 원년(1907) 8월 19이. 가평·원주·제천의 여러 의병 봉기는 모두가 해산병들로 서양 총을 가지고 있고 일찍이 조련을 거쳤으며 규율이 있어 일병과 교전에서는 살상이 심히 많고 세력이 대단히 장대하여 의병 수가 4, 5천 명이라고 한다. 2 안규홍은 머슴 출신으로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으로 나섰다. 그는 일본군 토벌대를 맞아 파정의 좁은 골짜기에 매복하여 일본군을 기습 공격으로 크게 물리쳤다. 이루 1908년 8월 24일에는 진산에서, 1909년 >
    교육학| 2005.05.02| 9페이지| 1,000원| 조회(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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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사] 오디세이아
    오디세이아내가 오디세이아를 처음 읽은 것은 초등학교 때였다. 오디세이아는 일리아드와 함께 서양 고전 중 하나로 누가 선정을 하던 세계명작 동화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때문에 어지간한 사람들은 초등학교 졸업 전에 오디세이아를 읽고 독후감을 써오라는 숙제를 한번쯤 해보았을 것이다. 나 역시 초등학교 때 일리아드?오디세이아를 읽고 독후감을 쓰라는 숙제를 했었다. 그리고 중학교에 입학하자 백일장 숙제로 역시 일리아드?오디세이아를 읽고 독후감 쓰라는 숙제를 또 해야 했다. 그 당시 독후감을 쓰면서 일리아드?오디세이를 일고 독후감 쓰는 일은 다시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대학교에서 또 같은 숙제를 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초등?중등학교 때 읽었던 오디세이와 지금 다시 읽어본 오디세이는 여러 면에서 차이가 났다. 일단 분량 면에서 과거에 읽었던 것보다 두 배는 더 많았다. 또 과거에 읽었던 책은 현대에 사용하는 대화체로 된 책이었는데 이번에 읽은 책은 현대의 대화체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아마도 최대한 원문에 가깝게 번역된 책인 것 같았다. 책을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라면 역시 사람들 이름 앞에 붙는 수사들이었다. 빛나는 눈의 아테네, 현명한 오디세우스, 영리한 텔레마코스 등. 이런 수사들은 대부분 그 인물의 모습을 표현해 주는 것이었지만, 인물의 심정을 나타내는 것들도 있었다. 오디세이아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와는 차이가 있어서 어딘가 어색하기도 하고 가끔은 문장의 뜻이 잘 이해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인물들을 소개하는 듯 한 수사들과 약간은 어색한 문장들은 마치 충청도의 사투리 문장을 읽고 있는 듯 정감이 가는 것이기도 했다.오디세이아는 1만 2천 110항으로 이루어진 호메로스의 장편 서사시이다.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를 주인공으로 하여 그리스 원정군이 트로이를 공략한 뒤, 그의 귀국담을 노래한 것이다. 크게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부분은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가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텔레마코스의 여행담이며, 둘째부분은 오디세우스의 표류담으로 그가 트로이를 떠나 고향인 이타카 섬으로 돌아올 때까지의 이야기이며, 셋째부분은, 그가 고향에 돌아와 아들 텔레마코스와 함께 아내의 모든 구혼자들을 퇴치하고 20년 동안이나 수절하며 외로이 살아온 아내와 재회하는 이야기이다.오디세이아는 트로이 전쟁 이후 오디세우스의 귀환을 다루는 이야기여서 트로이 전쟁의 전부를 다루진 않고 있다. 그의 또 다른 서사시 중 하나인 일리아드는 트로이 전쟁 10년째 까지를 다루고 있다.때는 이미 트로이 성이 함락 지 10년 뒤. 그리스의 오디세우스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사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여신 칼륩소가 사는 동굴에 머물고, 오디세우스의 왕비 페넬로페는 이타카 섬에서 포악무도한 구혼자들에게 시달리고, 오디세우스의 재산과 가축은 그들의 손에 유린당하고 있었다. 아테네 여신은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를 격려하여, 구혼자들을 탄핵한 뒤, 자신은 아버지를 찾아 길을 나서라고 권하고 이때 궁전 살롱에서는 음유시인 페미오스가 트로이로부터 귀국하는 그리스 군의 불행한 이야기를 노래한다.한편, 오디세우스는 헤르메스 여신의 도움으로 칼륩소의 섬에서 나오게 되지만 포세이돈이 폭풍을 보내 파선 당한다. 어느 샛강에 떠밀려온 오디세우스는 알키노오스 왕의 딸 나우시카아를 만나 그녀의 도움으로 성으로 가던 중 아테나 여신의 숲에 도착한다. 알키노오스 왕의 도움으로 배를 제공받고 저녁 잔치 자리에서 왕에게 10년 동안에 걸친 바다에서의 표류와 모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오디세우스는 이야기를 마치고 다시 배를 타고 이타카에서 멀리 떨어진 해안에 도착해 아테나 여신의 도움으로 거지로 변장한다.한편, 텔레마코스는 스파르타에서 아테나 여신으로부터 어머니의 구혼자들이 매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피해서 상륙한다. 그때 그는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의 오두막에 도착해 오디세우스와 만나게 된다. 페넬로페는 구혼자들을 모아놓고 화살로 도끼자루 구멍을 관통하게 하는 시합을 개최하고 오디세우스는 거지 분장을 한 채로 시합에서 유일하게 열두 개 도끼자루의 구멍을 관통한다. 오디세우스는 구혼자들을 아들 텔레마코스와 모두 물리치고 구혼자들과 한통속이 되었던 열두 명의 하녀들을 목 졸라 죽인다. 페넬로페는 오디세우스와 재회를 하게 되고, 구혼자의 친척들이 복수의 결의를 하지만 아테나에 의해 화해가 성립된다.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는 그리스?로마신화의 다른 영웅들과는 조금 다른 성격인 것을 알게 된다. 그리스?로마신화의 영웅들은 대부분 자기에게 닥친 위험이나 시련을 힘으로 해결한다. 하지만 오디세이아의 오디세우스는 힘보다는 지혜로 위험이나 시련을 해결한다. 트로이의 목마 작전을 세워 트로이를 함락시킨 것도 오디세우스였으며, 포세이돈의 아들이며 신인종인 외눈거인 키클로페스에게서 도망칠 때에도, 태양의 딸이며 마술사로 사람을 동물의 모습으로 바꾸어놓는 키르케에게서 동료들을 구할 때에도 힘으로 대결하여 이기기보다는 지혜로 상대방을 위험에서 빠져나왔다. 그리스의 대표적 영웅인 헤라클레스가 힘으로 상대방을 물리치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특히 세이렌의 노래에서 오디세우스가 보여주는 태도는 흥미롭다 할 수 있다. 세이렌은 바다의 님프들로서 그녀들의 노래에 실려 있는 환상적 마력은 이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김없이 바다에 몸을 던지고픈 충동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오디세우스는 키르케의 섬을 떠나면서 이들을 경계하라는 충고를 받았다. 오디세우스는 당연히 자신과 부하들의 귀를 가려 세이렌의 노랫소리를 듣지 않고 해역을 빠져나왔어야 했다. 하지만 귀를 가린 것은 노를 젓는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이었다. 오디세우스 자신은 귀를 열어두고 대신 자신을 돛대에 묶어서 세이렌의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그 해역을 빠져나왔다. 왜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의 귀는 가렸지만 자신은 귀를 열어두었을까? 그것은 호기심 때문일 것이다. 바다에 빠져들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세이렌의 노랫소리에 대한 호기심, 오디세이스는 자신을 위험에 노출시키면서 까지 호기심을 채우고자 한 것이다. 이런 점이 오디세우스와 고대의 다른 영웅들과의 차이점이다. 서아시아의 전설적 영웅 길가메시도, 제우스의 아들이며 불멸의 영웅인 헤라클레스도 오디세우스와는 다른 종류의 영웅이었다. 오디세우스는 앎을 추구하는 영웅이었던 것이다. 외부 세계에 대해서 하나라도 더 알고자 하는 지식욕은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철학자를 낳은 그리스인들의 지식욕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온갖 난관을 물리치고 고향을 찾아가는 오디세우스의 10년 항해는 인간이 자아를 발견해가는 정신적 방황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널리 쓰이고 있다. 오디세이라는 말 자체가 '방황', '탐험'이라는 뜻에서부터 진리 탐구를 위한 지적 탐험을 뜻하는 말까지 여러 가지로 사용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오디세이아를 읽다보면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접할 수 있다. 먼저 외눈거인 키클로페스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포도주는 만드는 장면이다. 오디세우스는 키클로페스를 잠들게 하기위해 포도주를 만들어 먹이는데, 여기서 오디세우스와 부하들은 현재 포도를 만드는 방법과 같이 포도를 발로 밟는 장면이 묘사되어있다. 당시 그리스인들이 이미 현재 포도주를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것이다.또 한 재미있는 것은 오디세우스의 아내와 결혼하고자 하는 많은 구혼자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오디세이아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그리스의 암흑기로 당시 사회가 왕정이었다고만 짐작할 뿐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런대 오디세이아에선 오디세우스의 아들인 텔레마토스가 있음에도 오디세우스의 아내인 페넬로페와 결혼하여 이타카를 얻고자한다. 이것으로 당시의 사회모습을 조금이나마 알아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엔 왕정이었으나 왕권은 그리 강하지 않았고, 왕위는 아들에게 세습되었으나 왕비에게도 상속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디세이아의 내용 중 구혼자들이 왕위가 텔레마토스에게 세습되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자리를 탐내고 있는 내용이 보이기 때문이다. 텔레마토스가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장면도 아타카에서 그의 세력이 약해서 구혼자들에 의해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있어서가 아닐까?대부분의 고대, 중세 신화에서 나타나는 인간상들이 대개 그렇듯이, 인간은 신에 의해 좌우되는 허수아비 같은 존재들로 많이 그려지고 있다. 인간 행동이 이루어지고 결단되어지는 과정이 신의 책임, 외부의 힘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은 인본주의적인 가치가 팽배해 있는 현대 사회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상당히 이질적인 느낌을 줄 수 있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도 오디세이는 특수하다 할 것이다. 오디세우스는 여러 신들의 방해, 특히 포세이돈의 방해로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오랜 기간 바다에서 홀로 방황하게 된다. 하지만 여러 신들의 방해에도 불고하고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놓지 않는다. 비록 아테네 등의 신들의 도움으로 집으로 돌아가게는 되지만, 시련을 시련이나 위험을 이겨내는 것은 오디세우스 자신에 의한 것이었다. 오디세우스가 대적했던 키클로페스나 키로페 등이 신들의 자식이었다는 것은 이것을 더욱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호메로스는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이 무조건 신에게 복종할 이유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신에 의해 결정지어진 운명의 굴레를 벗고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 위한 인간의 최초의 몸짓. 그것이 오디세우스를 십년간의 긴 전쟁 외눈박이 괴물 마녀 키르케 바다의 괴수 사이렌 머리 여섯 괴수인 스킬라 사나운 폭풍의 괴수 카리부디스 그리고 아내의 탐욕스런 구혼자들을 해치우고 자지의 운명을 자신이 이루게 한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인문/어학| 2004.10.29| 5페이지| 1,000원| 조회(1,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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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사] 쟌 다르크
    쟌 다르크역 사 교 육 과19990650 양승철세상에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많은 여성들이 존재한다. 그녀들 중에는 퀴리부인처럼 세계적인 발명으로 명성을 떨친 사람도 있고, 나이팅게일이나 테레사수녀처럼 사랑의 실천으로 명성을 떨친 사람들도 있이며, 당나라의 양귀비나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처럼 역사를 바꿔 명성을 떨친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역사를 바꾼 여성들은 다른 이유로 유명해진 여성들과는 조금 다른 평가를 받는다. 퀴리부인이나, 나이팅게일, 테레사수녀는 자신들의 힘으로 발명을 하거나 사랑을 실천하여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양귀비나 클레오파트라는 자신들의 힘으로 역사를 바꿔 유명해지기 보다는 남성들의 힘에 의지하여 유명해진 경우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이런 여성들은 사람들에게 추앙받기 보다는 좋지 못한 평가를 받곤 한다. 그러나 여성들이 모두 남자들의 힘에 의지하여 역사를 바꾼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백년전쟁의 쟌 다르크는 자신의 힘으로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었다. 특히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있었던 여성이 이러한 업적을 이루어내었다는 점에서 쟌 다르크는 다른 남성 영웅들보다도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할 수 있다. 때문에 쟌 다르크의 이야기는 우리의 흥미를 끌곤 한다. ‘택시’, ‘레옹’ 등으로 유명한 뤽 베송 감독이 쟌 다르크의 감독을 맡은 것은 뤽 베송 감독이 프랑스 인이므로 프랑스의 영웅인 쟌 다르크를 영화화해 보고자한 것도 있을 수 있으나, 쟌 다르크라는 인물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매력과 그 인물을 통해 보여줄 수 있는 많은 이야기들 때문일 것이다.영화 쟌 다르크는 영국과 프랑스를 중세에서 절대왕정으로 이끌었던 100년 전쟁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100년 전쟁의 표면적 원인은 프랑스의 왕위계승권 문제이다. 1328년 프랑스 카페왕조의 샤를 4세가 남자 후계자가 없이 사망하자, 그의 사촌 형제인 발루아가의 필리프 6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에 대하여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그의 모친이 카페 왕가 출신이라는 이유로 프랑스 왕위를 계승해 지금의 가스코뉴 지방의 몰수를 선언하였다. 원래 플랑드르는 프랑스왕의 종주권 아래에 있었지만, 중세를 통하여 유럽 최대의 모직물 공업지대로서 번창하였다. 영국은 모직물 원료인 양모의 최대 공급국으로 양모를 이용하여 이 지방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기옌 역시 유럽 최대의 포도주 생산지였으므로, 프랑스 왕들은 항상 이 두 지방의 탈환을 바라고 있었다. 따라서 전쟁의 표면적 원인은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였지만, 근본적 원인은 플랑드르 지방과 기옌 지방의 쟁탈을 목표로 한 것이다.100년 전쟁은 총 3기로 나눌 수 있는데 쟌 다르크의 배경이 되는 것은 100년전쟁 중에서도 마지막인 3기였다. 한줄기의 희망도 기대할 수 없는 역사상 가장 암울했던 시기, 로렌의 작은 마을에서 쟌이 자라고 있었다. 13세의 소녀 쟌은 매일 기도하며 신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대화하고 있었다. 어느 날 쟌은 불타는 마을과 영국군에게 자기 대신 잔인하게 강간당하고 죽어간 언니의 참혹한 광경을 목격한다. 이후 쟌은 성당에서 영국군을 결코 용서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하나님과 하나 되기 위해 포도주를 마신다. 몇 년 후, 샤를7세는 국민들 사이에 신의 메신저라고 불리며 새로운 희망이 된 쟌에게서 군대를 주면 조국을 되찾겠다는 편지를 받는다. 그러나 샤를7세와 측근들은 어린 잔을 믿을 수 없어 측근에게 왕 행세를 하도록 명령한다. 쟌은 그의 속임수를 알아차리고 군대를 받아내는데 성공한다. 첫 번째 전투에서 쟌은 오를레앙으로 가는 문을 지키고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를 공략한다. "나를 사랑하는 군사들이여 나를 따르라. 이 밤이 오기 전에 우리는 승리한다." 깃발을 들고 적진을 향하는 쟌을 보고 지쳐있는 프랑스군은 사기가 올라 대 승리를 얻어낸다. 그러나 쟌은 전쟁터에 널려진 시체들에서 피 흘리는 신의 모습을 보고 괴로워한다. 그리고 쟌은 다음 전장에서 혼자 앞으로 나아가 적에게 이야기한다. "헨리 왕에게 전한다. 이것은 명령이다. 이 들판에 묻히고 싶지 않다면 물러가라" 그리고 기적적으로 영국군 말하지만 왕은 이제 그만 전쟁을 멈추고 협상을 해야할 시기라고 생각한다. 왕과 쟌 사이의 갈등의 골은 깊어지고 쟌은 왕비의 계략으로 적군에게 잡히게 된다. 쟌에 대한 병사들의 두려움을 희석시킬 필요가 있었던 영국은 성직자들을 이용해서 쟌을 마녀로 만들어 화형 시키다.결국 쟌은 화형 당했지만 이 무렵 전황은 이미 프랑스 쪽으로 기울어졌으며,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도 아라스에서 화의를 맺음으로써 프랑스의 내란은 끝을 맺었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되었으나, 1444년 툴에서 휴전이 성립되었다. 1445년 양국의 외교적 교섭이 원만히 타결되지 못하였으므로, 이 기회를 이용하여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는 군대를 동원하여 영국 지배하의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1450년에는 노르망디 전역을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패전으로 영국에서는 랭커스터왕조의 지배에 대한 요크가의 반항이 일어났다. 프랑스의 샤를 7세는 이와 같은 영국 내의 혼란을 틈타 기옌의 회복에 나서 영국군을 격파하고, 1453년에는 영국군 최대의 거점인 보르도시를 맹공격, 이를 점령하였다. 따라서 영국은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내의 모든 영토를 잃었다. 잔 다르크의 출현 이후 프랑스의 승리는 장기간에 걸친 영국군의 가혹한 지배와 약탈행위로 인해 프랑스의 시민과 농민들 사이에 반영감정이 고조된 점과, 샤를 7세에 의하여 보병?포병을 주력으로 한 프랑스 국왕군이 강화되었던 점등이 그 원인이었다. 양국간의 최종적 강화는 1475년에 체결되었지만, 보르도가 함락된 1453년에 백년전쟁이 사실상 끝난 것으로 본다.프랑스는 장기간에 걸친 백년전쟁과 내란에 의해서 봉건귀족 세력이 극도로 약화된 반면, 국왕의 권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샤를 7세는 자크 쿠르를 등용하여 왕실의 재정을 정비하고, 국왕의 상비군을 강화하며 귀족세력을 누르고 중앙집권제를 추진해 나갈 수 있었다. 또한 100년 전쟁동안 영국군이 점령지의 마을을 약탈하면서 프랑스에서는 중세에선 찾아보기 힘들었던 국민의식이 싹트기 아있던 귀족들이 함께 쓰러지는 결과를 초래하여, 헨리 7세에 의한 중앙집권화의 기초를 굳혀주었다. 영국은 프랑스 내의 영토를 상실함으로써 그 이후 유럽대륙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문제들에 휩쓸리지 않게 되어, 독자적인 국민국가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의 공포를 피하여 기술직이민들이 플랑드르로부터 영국으로 이주함으로써, 플랑드르를 능가하는 모직물 공업이 발전하게 되어 경제적 발전의 기초가 다듬어졌다. 즉, 백년전쟁의 결과, 영국과 프랑스 모두 봉건기사의 세력이 무너지고 왕권이 강화 되었으며,이를 바탕으로 농민해방의 진전, 부르주아 계급의 대두 등을 초래하였다. 100년 전쟁은 영국과 프랑스를 중세의 지방분권적 봉건사회에서 중앙집권적인 절대왕정을 이룩할 수 있는 기초를 만들어준 사건이라 할 것이다.100년 전쟁에서 쟌 다르크는 연패에 빠져있던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했을 뿐만 아니라 오랜 내전과 영국군과의 전투에서의 연패로 땅에 떨어졌던 프랑스의 왕권을 신장 시켜 주었다. 쟌의 등장과 함께 이루어진 프랑스 왕권의 강화는 영화에도 잘 나타나 있다. 쟌이 군사들을 얻기 위해 샤를7세를 찾아갈 때 샤를 7세의 모습은 비참할 지경이었다. 왕은 스스로를 프랑스에서 가장 가난하다고 말하기도 하고 자신의 기사들을 가리키며, 그들이 자신보다 돈도, 병사들도 많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모습은 쟌이 오를레앙을 회복하고 샤를7세가 대관식을 올리면서 바뀌게 된다. 이제 그는 힘을 얻은 것이었다. 쟌은 샤를7세가 왕이 라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샤를7세는 쟌을 통해 하나님이 직접 임명한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왕의 자리는 신이 직접 내려준다는 절대왕정의 사상적 기반을 샤를7세는 쟌을 통해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쟌은 샤를7세의 군대로 영국군을 무찔렀다. 반영감정이 극에 달했던 당시 프랑스 백성들이 샤를7세를 지원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왕권의 강화 이외에도 절대왕정으로 향하는 여러 가지 모습들이 영화에는 잘 표현되어있다. 먼저 쟌의 마을이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반영감정과 소속감은 후에 국민의식으로 발전하여 중앙집권적 영토국가의 형성에 이바지할 것이다.또한 당시 사회에서 기독교적 의식이 약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장면들도 보인다. 쟌 다르크를 신의 사자로 보는 사람들의 모습과 샤를7세의 대관식에서 성스러운 기름을 일반기름으로 채우는 왕비의 모습, 그리고 종교 재판에서 세속권력에 예속된 모습을 보여주는 성직자들의 모습이 그것이다. 중세의 기독교 사회에서 성직자들은 신의 사자로 그들의 말은 곧 신의 말씀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쟌의 등장 이후 이전까지 신의 사자로 받들어 지던 성직자보다 쟌이 신의 말씀을 전하는 말로 믿어졌다. 몇 십년간 신의 말씀인 성경을 공부하고 신학을 공부한 성직자들의 말보다 겨우 글도 쓰지 못하는 19세 소녀의 말이 더 신뢰를 얻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성직자들의 권위가 그만큼 떨어져 있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것이다. 또한 샤를7세의 대관식에서 성스러운 기름이 말라버렸다는 성직자의 우려에 거침없이 일반기름을 넣어버리는 왕비의 모습에서 우리는 왕비가 이미 신의 권위를 믿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왕비의 행위에도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일반 기름으로 대관식을 치루는 성직자들의 모습에서 그들이 이미 세속권력의 밑에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왕비와 같이 신의 권위를 부정하는 권력가의 모습은 영화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쟌을 포로로 잡은 공작은 직접적으로 자신이 신의 권위를 믿지 않음을 시인하고 있으며, 종교재판 과정에서도 성직자를 가두는 영국군의 모습이나 성직자를 속이는 헨리7세의 모습 등은 그들이 이미 신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모습이라 할 것이다. 이런 모습들은 중세를 지배하던 천상의 권위가 서서히 지상을 지배하는 세속의 권위로 이양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영화에서는 대부분의 성직자들이 세속권력에 속해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쟌의 몸값에 보태라고 장군들과 부하들이 모아온 돈을 샤를7세가 주교에게 주는 장면서서 주교는 프랑스의 외교를 담당하준다.
    인문/어학| 2004.10.29| 5페이지| 1,000원| 조회(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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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양사] 일본율령국가의 성립과정과 특징, 율령국가의 동요 평가B괜찮아요
    머리말일본의 고대국가 성립은 중국이나 한국에 비해서 시대적으로 매우 늦게 등장하였다. 그 원인은 역시 고구려, 백제가 일찍이 중국에서 성립된 고대국가적 요소를 빨리 받아들여 고대국가 성립이 빨랐던 반면 신라는 상대적으로 패쇄적인 지리적 요인 등으로 인해 선진문물의 흡수가 늦었고 고대국가 성립역시 늦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과 같은 이유라 할 것이다. 일본은 대륙과 외따로 떨어져 있는 섬이다. 항해술이 아직 발달하지 못했던 고대에 일본으로의 선진 문화유입은 대륙에서 일본에 이르는 그 험한 여정만큼이나 용이하지 않았다. 이런 일본이 고대국가의 체제를 이룩해 나가는 것은 4?5세기경에 이르러 기내 지방을 중심으로 강력한 지배집단이 등장하면서 부터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일본은 점차 고대국가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고대국가의 성립에는 많은 요건들이 필요하다. 그 요건 중에서도 중요하다 할 것이 율령일 것이다. 율령의 반포는 이전까지 각지의 관습법에 의해 지배되던 것을 하나의 법에 의해 지배한다는 것이며, 전국 각지에서 율령을 시행하고 지탱할 수 있는 행정기반이 갖추어 졌다는 것이다. 율령의 반포는 중앙집권적 고대국가의 모습을 어느 정도 갖추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레포트에서 율령을 통해 일본의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의 성립과정을 살펴보고 일본 율령국가체제의 특징과 그 원인을 확인한 후 율령국가체제 동요가 나타나는 헤이죠쿄(平城京) 시대와 덴표(天平) 문화까지를 살펴보고자 한다.1. 쇼토쿠(聖德) 태자의 개혁쇼토쿠(聖德) 태자의 불교 진흥책으로 일본에서 불교가 발전하고, 한반도와 중국과의 교류를 통하여 율령체제의 기초를 다지는 이 시대를 일반적으로 아스카시대라고 부른다. 아스카시대의 주목할 만한 변화 모습은 역시 이 시기 개혁을 주도한 쇼토쿠(聖德) 태자가 펼친 일련의 정책에서 엿보인다.) 먼저 그는 불교를 적극 받아들여 불교문화를 발전시켰고, 한편 신라와 수에서 선진문화를 받아들여 왕권이 강화된 중국적 정치체제를 이루어 고래의 씨성제도(氏姓制度))에 마시로를 소가씨(蘇我氏)가 죽이게 된다. 그렇게 해서 다무라 황자가 천황에 올라서 조메이 천황이 되는데 그 결과 소가씨(蘇我氏)의 세력이 황실을 능가할 정도로 강력해졌다. 이에 소가씨(蘇我氏)를 타도하고 모든 토지와 인민을 국가의 소유로 한다는 원칙을 실행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나카토미노 가마타리(中臣鎌足)는 당시 유력 호족으로써 소가씨의 전횡에 반발하여 나카노우에(中大兄)황자 그리고 외국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삼한에서 온 사자에게 공불을 헌납 받는 예식을 치루는 날(645년 6월 12일) 이루카를 죽이고 새로운 정권을 세웠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시행된 일련의 개혁정책이 바로 대화개신이다.(大化改新))이들은 오오미(大臣), 오무라지제를 폐하고 우대신?좌대신?내신(內臣)을 두었으며 정치고문으로서 국박사를 두고 최초로 연호를 정하여 대화(大化, 다이카) 원년으로 하였다. 또한 정치를 일신하기 위해 도읍을 아스카로부터 나니와의 나가라토요사키로 옮겼는데 이후 수년에 걸친 일련의 정치개혁을 대화개신(大化改新)이라한다. 646년 1월에 천황이 개혁의 칙령 을 발표하여 본격적인 개신에 착수한다. 대화개신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종래 천황이나 호족이 소유하였던 둔창(屯倉)이나 장원 및 부민(部民)을 없애고 그것들을 일률적으로 국가의 공지(公地)와 공민(公民)으로 하되 그 기초로서 호적(戶籍), 계장(計帳)을 작성하고 토지는 국가에서 농민에게 나눠주는 반전수수법(班田收授法)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세제로서는 조용조제(租庸調制)를 마련하였다. 다음으로 국가 조직면에서는 중앙집권적체제로서 중앙에 경사(京師)?기내(畿內)의 제(制)를 두고 지방엔 지방행정관이 다스리는 國?郡?里의 制를 실시하였다. 호족들에게는 봉호(封戶)의 전조(田租)의 2분의 1과 용조(庸租)를 갖게되는 식종(食封)을 지급하였다. 그리고 중앙정부를 구성하기 위해서 팔성백관제(八省百官制)를 마련하였다(649). 대화개신은 당의 율령제도를 도입하여 천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정치기구를 구축하여, 토 부터 관습으로 내려오던 대상회(大常會), 기년제(祈年祭) 등을 제정하여 신기제도(神祇制度)를 정비하고 천황의 존엄성을 표시하기 위한 각종 의전(儀典)도 정비함으로써 천황의 권위를 신격화시켰다.그가 죽자 우노노(?野)황후가 스스로 제위에 올라 지토(持統)천황이 되었다. 이 때 수도는 후지와라궁(藤原宮)으로 옮겨졌으며,(694) 대화 개신이래 추진해 오던 율령을 재정비 강화하여 701년(문무천황의 대보원년) 대보율령(大寶律令)이 제정되었다. 이로써 모든 법령이 완비되었으며 일본은 완전한 율령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3. 대화개신(大化改新)에 나타난 일본 율령의 특징대화개신은 기본적으로 중국 당나라의 체제를 모방하여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체제를 확립하고자 한 것이었다. 하지만 중국의 체제를 모방하였음에도 중국의 그것과는 다른 모습이 여러 곳이 보이고 있다. 이것은 일본과 중국의 거리상의 문제로 당의 제도를 정확히 알기 힘들었기 때문으로 볼 수도 있으나 그보단 당의 제도를 일본의 실정에 맞게 바꾸어 적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당의 체제와 일본의 체제를 비교하여보면 당시 일본의 정세를 부족하나마 알 수 있을 것이다.일본 율령에 규정된 중앙 관제는 당의 중앙관제를 기초로 했지만 당의 3성 6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당의 3성6부의 시초는 진나라의 중앙 관제인 3공9경의 9경에 둘 수 있다. 9경은 3공의 하위 실무기관이 었으나 한 이후 황제권의 강화를 위해 9경중 상서를 승격시켜 제상인 3공을 견제하였으며 위(魏)?진(晋) 이후 문하와 중서를 승격시켜 당나라 때 3성 6부의 중앙 관제를 완성시켰다). 이런 중국의 3성6부 체제는 많은 나라들에 흡수 되었다. 하지만 그 체제를 그대로 따르지 않은 나라들도 많다. 대표적으로 고려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고려는 당의 3성 6부 체제를 기초로 하여 중앙관제를 만들었으나 당에 없는 도병마사, 식목도감이나 중서성과 문하성을 합친 중서문하성 등 당의 제도를 그대로 따르지는 않고 있다. 일본 역시 고려족의 집안에서 채용하였다. 이를 보아 당시 중앙의 지방 장악력이 강하지 못했고 지방 호족의 세력이 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다른 나라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다. 한반도의 경우에도 고려 때 까진 지방호족이 지배하는 속현이 많았고 모든 지방에 관리를 파견한 것은 조선에 와서나 가능했다. 중국의 경우에도 황제가 지방의 인사권을 완전히 장악한 것은 송대 이후라 할 수 있다.국사는 군사선임권을 포함한 꽤 큰 권한을 부여받았으나 임기가 짧고 직분전도 많지 않았다. 직권상으로는 국사에 종속하는 군사의 경우 임기가 종신이었고 국사의 두 배가 넘는 직분전을 급여 받았다. 官人은 정 1位에서 소초위(少初位)에 이르는 30階로 세분되었는데, 과역(課役)이 면제되었다. 이 위계는 五位이상(종오위이하)과 이하에 명백한 선이 그어져 있었는데, 오위 이상 관인의 자손은 처음부터 높은 관위에 임명되는 음위(蔭位)의 제도로써 귀족으로의 신분이 보장되었다. 전국민은 양(良)과 천으로 크게 구별하였다. 양민은 황족에서부터 관인?승려 그리고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공민(농민)이 있었다). 천민에는 국가 소속의 능호?관호?관노비와 사유의 가인(사적인 천민)?사노비의 5개 신분이 있다. 이중에서 노비는 가족생활이 인정되지 않고 소유자의 재산으로서 매매, 양도되었다. 부민은 해방되어 있었으나 특수 기능을 가진 그들은 실질적으로는 천민대우를 받았고 세습적으로 관에 예속되어 있었다. 과역(課役)으로서는 조(租)?용(庸)?조(調)?잡요(雜?)?사정(仕丁)?병역(兵役)등이 있는데, 조는 수확량의 약 4분의 1이며, 용은 21세부터 60세까지의 남자에게 1년에 10일 동안 노역에 봉사하든지 아니면 포백(布帛) 등을 경고(京庫)로 운반하여 납입하는 것이며, 조는 토산물을 바치는 것이다. 잡요는 그 지방에서 년 60일 이내의 요역에 봉사하는 것이었다. 반전수수(班田收授)와 과역(課役)을 위한 기초가 되는 호적과 계장(計帳)은 전자가 6년마다, 후자가 매년 작성하게 되어 있었다. 병역은 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이 대불 공사에는 연 260만 명의 일손을 필요로 하는 대공사였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백성들을 대불 공사에 동원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때문에 쇼오무천황은 교오키(行基=백제의 도래인 자손)를 대승정이라는 높은 벼슬을 주고 협력을 구했다. 총책임자인 쿤나카노키미마로(國中公麻呂), 대불전 건축 책임자 이나베노모모요(猪名部百代), 대불에 바를 금을 모은 쿠다라노코키시쿄오후쿠(百濟王敬福=백제 의자왕의 6대 손자) 등, 모두가 도래인의 자손들이었다. 이렇게 대불 만들기는 민중의 희생과 도래인의 지식과 기술이 결집된 것이었다.또한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가임을 과시하기 위해서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가 만들어 졌다.『고사기』는 712년에 오오노야스마로(太安萬呂)에 의해 만들어 진 것으로 현존하는 일본 여사서 가운데 최고의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전설과 가요 등을 많이 담고 있어 일본 최고의 문학서라고도 한다.『일본서기』는 720년에 토네리신노우(舍人親王)가 총재관이 되어 그의 책임 아래 편찬되었다.『고사기』의 설화체 형식과 다른 편년체로 엮어진 역사서로 모두 30권으로 이루어져있다. 이 두 역사서는 모두 타이카노카이싱에 의해 성립된 천황의 절대성을 역사적으로 뒷받침하고 미화하기 위해 일본역사의 기원을 획일적으로 꾸며 놓은 것으로 일본은 처음부터 천왕족이 일본 왕으로 군림하였으며, 그 첫째 왕이 진무천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고사기』에는 33대 스이코천황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으며,『일본서기』는 41대 지토오천황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데 새로운 시대의 기록일수록 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서로 8년의 차이밖에 두지 않으면서도 『고사기』는 실화체로 『일본서기』는 편년체로 엮어졌다는 점일 것이다. 이는 당시 일본이 신라와 발해, 당나라 등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면서도 외래문화와 일본문화가 섞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당시사회가 외래문화를 일본적 문화에 흡.
    인문/어학| 2004.10.29| 10페이지| 1,000원| 조회(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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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치즈와 구더기
    치즈와 구더기치즈와 구더기는 미시사 방법론의 선두 주자인 카를로 진즈부르그의 대표적인 저작이다. 근대 역사는 랑케에서 시작하여 마르크스주의 역사학, 프랑스의 아날, 독일의 사회구조사가 주도해 왔다. 근대이후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역사학은 각 사조의 관심분야 등에서 차이점은 있었지만 거시사라는 것에는 차이가 없었다. 이런 사조들의 공통점은 거시적 역사학,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서 이러한 관점에서 탈피하여 미시사에 관심을 가져야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미사사란 말 그대로 역사를 ‘작은 규모’를 통해 파악한다는 것인데, 거시적 접근방법이 진정한 리얼리티를 구현하는데 오히려 허상을 추구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 미시사의 연구 대상은 개인(주로 하층민, 농민, 여성 등 역사의 거대한 주류에서는 백안시되고 소외된 사람들)이나 소수집단이다. 또한 그 서술방법은 대상에 대해 미세하고도 중층적이다. 기존의 역사학, 특히 20세기 중반을 주도하던 사회사적 연구가 제도나 체제에 대한 구조적 분석으로 영위됐다면, 미시사는 개인의 일상사를 둘러싼 의미의 그 물망을 이야기체로 기술한다. 우리나라에 미시사가 소개된 후 미시사는 한국사 분야에 적용될 수 있는 새로운 역사방법론으로 환영받았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조서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등 요즘 일반에 소개되어 인기를 얻고 있는 책들이 미시사적 연구와 서술을 따른 대표적인 책들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인식론적 괴리 등으로 미시사적 연구의 성과가 많지 않은 실정이다.진즈부르그는 미시사의 선구주자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개개인의 구체적인 일상과 행동, 그리고 마음을 면밀히 탐색함으로써 복잡다단한 사회변동의 실상에 더욱 효과적으로 육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개인의 행동과 심리를 분석함으로써 사회변동의 실상을 효과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그는 그의 대표적 저서인 치즈와 구더기에서 1584년 종교 재판소에 고발되어 재판을 인 ‘민중문화’라는 거대한 구조를 이끌어 내려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치즈와 구더기를 읽으면서 하나의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분명 치즈와 구더기는 메노키오라는 인물의 우주관과 견해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하지만 ‘과연 메노키오라는 인물이 당시 농민들의 생활 속에 녹아들어 있는 집단무의식적인 민중문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을 만한 인물인가?’ 하는 점이다.치즈와 구더기는 마치 소설처럼 하나의 주인공이 존재한다. 이 책은 1584년 종교 재판소에 고발되어 재판을 받는 이탈리아 시골의 방앗간 주인 도메니코 스칸델라란 이름으로 메노키오라는 별명을 가진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메노키오는 방앗간 주인으로서 마을의 촌장을 맡기도 하였고,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 평범한 농민들과 약간은 달리, 그는 치즈 속에서 구더기가 생겨나듯 천사나 신도 우주의 초기 물질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되었다는 이단적인 주장을 하며 신이 삼라만상을 만들었다는 기독교의 창조론을 믿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1583년 9월 28일 그리스도에 대해 이단적이고 불경한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메노키오는 종교재판소에 고발되었다. 재판과정에서 메노키오는 기존에 가치를 뒤흔들만큼 엄청난 주장을 피력하기 시작하였다.메노키오는 최초의 신문에서 창세기의 내용과 교회의 정통적 해석에서 벗어나 최초의 혼돈이 존재했음을 주장하였다. 그는 “우유에서 치즈가 만들어지고 그 속에서 구더기가 나오듯, 혼돈 속에서 천사들이 나왔고 수많은 천사들 중에서는 신도 존재한다.” 라는 독창적인 천지창조설을 주장하며 기존의 종교적 교리들을 거부한다. 메노키오의 이런 독특한 우주관은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 저자는 그가 이렇게 주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종교개혁’이라는 커다란 사상적 충격이 존재하고 있었으나 엄밀히 말해서 그의 주장은 종교개혁을 통해 제시된 '재침례파’나 ‘루터파’의 주장과는 다른 그만의 것이었다고 분석한다. 저자는 메노키오의 독특한 견해는 종교개혁으로 종교적 획일성이 깨어지면서 이전부터 농민들이 믿고 있던 저변의 믿음이 수면위한 생각이 오랜 농민들의 믿음의 토대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그러나 메노키오의 독특한 견해가 농민들의 믿음에 기인한 것이라면 대부분의 농민들은 메노키오의 견해와 유사한 견해를 가지고 있어야한다. 메노키오는 결코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을 본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메노키오의 견해는 일반 농민들은 가지지 못한 메노키오만의 특징에서 온 것은 아닐까? 메노키오는 당시 대부분의 농민들은 가지지 못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이었다. 메노키오는 그의 독특한 생각은 계시나 영감이 아닌 자신의 판단력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비록 그 한계를 초월하긴 하지만 책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인하고 있다. 그러나 메노키오가 읽었던 11권의 책 중 6권이 빌린 책들 이었다. 그 당시 마을 공동체의 사람들은 책을 돌려가며 읽고 있었다. 그렇다면 분명 마을 사람들 중에도 메노키오가 읽었던 책들을 읽은 사람들이 존재했을 텐데 그들은 왜 메노키오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는가? 함께 책을 읽었던 사람들 역시 메노키오처럼 ‘민중문화’의 전통위에 존재하던 사람들이었다. 같은 ‘민중문화’의 전통을 즉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같은 책을 보았다면 비슷한 견해를 가져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노키오와 다른 마을사람들의 반응이 달랐다. 이것은 메노키오의 독특한 사고방식이 그가 가진 농민들의 저변 믿음이나 읽은 책 때문이라기보다는 메노키오만의 독특한 독서방법과 이해방식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만든다.메노키오는 자신만의 ‘여과기’를 사용하여 독서를 하였다. 메노키오 스스로 자신이 읽었던 책들이 그의 사고의 ‘원천’이라고 하였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책을 읽었다는 사실보다는 책을 읽고 그 내용을 나름대로 소화해 내는 과정이다. 메노키오는 책을 읽었지만 그 책의 저자가 말하는 의도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독특한 해석을 통해 받아들였다. 『최후 심판의 역사』에서선 그 책을 쓴 저자의 의도와는 다른 “다른 자신만의 해석을 내리고 그것에서 출발한 연역을 통해 “내세는 없으며 미래의 속죄와 고통도 존재하지 않는다. 천국과 지옥은 이 세상에 존재한다. 영혼은 불멸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메노키오의 왜곡을 통한 그만의 독특한 이해 방식이다. 저자는 그의 이러한 왜곡된 해석이 본문에서 유래된 것이기는 하지만 메노키오의 확신의 뿌리는 더 깊은 곳에서 자리 잡고 있는 믿음들, 즉 구전문화의 전통과 맞닿은 곳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메노키오는 책의 내용을 자신이 가지고 있던 ‘구전문화의 전통’이라는 틀에 맞추어 해석해 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저자의 해석은 의문점을 동반한다. 바로 메노키오의 이해에 관한 부분이다. 앞에서 언급한 『멘더빌 여행기』의 “지나치게 ~ 이 시점에서 메노키오의 연역이 시작되었다.” 부분에서 메노키오의 이해의 상당부분은 잘못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연역추론에 의존하고 있음을 우리는 파악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을 저자처럼 메노키오가 ‘구전문화의 전통’에 너무나 충실히 입각한 나머지 그것의 틀에 맞추어 해석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본다면 “그리하여 메노키오의 머릿속에서는 오래된 요인들과 그리 오래되지 않은 요인들이 함께 섞이면서 새로운 형태의 사고가 형성되고 있었다.”라는 것처럼 결국 메노키오가 갖게 된 사고의 형태는 ‘민중문화’나 ‘책을 통해 얻게 된 지식’과는 다른 사고였음이 틀림없다. 결국 메노키오가 가졌던 그만의 독특한 이해방식이 구전문화의 전통에서 유래하는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그리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오히려 메노키오의 사상이 ‘구전문화’로 표현되는 종속계급의 사상이나 책을 통해 얻게 된 지식과는 거리가 있는 것 이였다는 것이 보다 더 설득력을 갖게 된다.메노키오의 견해를 형성하는데 ‘민중문화’가 영향을 준 것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메노키오는 그 민중문화에만 기반을 두고 견해나 우주관을 형성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메노키오를 통해 우리를 어디까지 확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가? 과연 메노키오의 경우를 16세기의 이탈리아, 더 나아가 전 유럽의 범위까지 확장시켜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메노키오의 견해를 통해 당시 농민들의 민중문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힘들다고 본다. 앞서 이야기 했듯 메노키오의 견해는 민중문화와 독서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의 독특한 이해방식에서 나왔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노키오라는 인물이 16세기를 연구하는 미시사의 연주 자료로서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메노키오의 견해와는 별도로 그를 통해 당시 사회에서 지배계층의 문화와는 다른 민중문화가 존재했고 그것이 민중들의 우주관의 형성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었음을 확인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당시 사회에서 지배계층과 민중 사이의 ‘간극적’ 인물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메노키오의 사례는 분명 ‘전형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는 않다. 앞서도 말했듯이 메노키오는 글을 읽고 쓸 줄 알았고, 충분치는 않더라도 서적을 통해 지배 계급의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당시 대다수의 농민이 문맹이었으며, 평생 구전 전통 문화의 아래서 살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전형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극단적이며 특수한 케이스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메노키오가 당시 종속 계급(민중)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면, 우리는 그에게서 구전 문화의 전통만을 찾을 수 있을 뿐, 지배 계급의 문화의 영향을 발견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설사 그 영향을 찾아낼 수 있다 하더라도, 지배 계급의 문화가 일방적으로 전이되어간 흔적만을 발견할 수 있을 뿐, 두 문화 사이의 ‘접점’이라 부를 만한 지점을 발견하는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메노키오는 농민이면서도 지배 계급의 문화를 접한, ‘극단적 유형’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즉, 그는 당시 전형적인 농민이 아니었기에 당시 농민 문화를 대표할 수는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농민 문화와 지배 계급의 문화가 수평적으로 만나는 모습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메노키
    인문/어학| 2004.10.29| 5페이지| 1,000원| 조회(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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