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과학과 공공선근대의 이성과 계몽뉴턴이 사과나무를 관찰한 이래로 과학은 눈부시다는 말이 모자랄 정도의 발전을 이루어왔다. 중세 암흑기의 유산은 근대의 여명과 함께 저 멀리 사라져갔고, 경험주의 철학과 귀납적 방법론이 그 자리를 채웠다. 통계와 현미경이 만들어내는 매트릭스는 절대자 神과 왕의 권위를 지상으로 끌어내렸으며, 이성을 지닌 독자적 개인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공허한 사변에 휘둘리는 무지몽매한 인류에게 빛이 거하였으니, 너희는 깨어나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자연을 정복하면 될 일이었다.21세기 한국 - 끝나지 않은 근대의 기획일반적인 경로를 따른다면 현대를 말하기에 앞서 탈근대를 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서유럽 사회를 필두로 한 근대화의 초창기에 역사의 흐름을 읽지 못한 죄로 국가적 수난을 겪어온 바 있는 한국 사회는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근대화의 담론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역사적 상처의 집단적 기억은 경제적 성취와 부국강병에 대한 국가적 열망으로 이어졌고 이는 새마을 운동, 세계화 등의 슬로건을 거쳐 현재의 선진화 논의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근대화의 3박자라는 산업화, 민주화, 민족국가 건설 중 마지막 항목이 아직 미해결인 상태이기에 진정한 근대화를 이루었는지에 대한 의문도 있지만) 서구 선발 산업 국가들이 주도하는 탈근대의 기획은 강고하게 자리 잡은 근대를 향한 열망 앞에 아직 유의미한 지분을 점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이처럼 현대 한국을 역사적 기억의 특수성과 거기에서 추동되는 근대화를 향한 열정으로 의해 추동되는 공간으로 정의한다면, ‘근대’라는 용어의 시공간적 맥락에 의거하여 한국 사회는 어쩌면 ‘생존과 번영이라는 국가적 대전제 하에 경험론적 인식론과 수학적·기계적 세계관에 근거한 이성에 따라 행동하는 개인들이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는 곳’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즉, 국가의 (경제적) 발전이라는 본원적 교리, 개체적 차원에서의 안녕을 위한 합리적 의사결정, 이러한 과정에서 역사의 쓰라린 교훈을 바탕삼아 적극적으로 활용되는 과학기술의 세 가지 요소가 맞물리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도구적 과학 - 본원적인 가치편향성거칠고 추상적인 논의를 압축하자면, 근대화를 추구하는 현대 한국의 토양에서 과학은 본질적으로 가치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가치에는 경제 성장, 국위선양, 개인적 부의 축적, 경제력에서 파생되는 강건한 군사력 등이 포함된다. 요컨대 큰 틀에서 볼 때 공동체로서의 한국 사회에서 과학의 가치중립성에 대한 질문은 다소간에 초점을 흐리는 것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한국에서의 과학이란 가치를 지니는지의 여부보다 어떤 가치를 어떤 형태로 얼마나 지니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욱 유의미하며, 그러한 가치들은 사회 일반의 것과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는 특징이 있다.물론 한국 사회가 과학에 대해 부여한 가치들에 대한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여타의 가치들을 희생한 일방적인 개발 독재에 항거하여 세계에 유례없는 민주화를 달성했는가 하면 지금 이 시간에도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형태의 다층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사회 내에서 과학에 주어지는 가치 담론은 일방 이미 주어진 테제를 축으로 하고 타방 그에 대한 대안적 성격으로서의 안티테제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특징이 있다. 두 차례에 걸친 대전쟁과 냉전, 그리고 냉전의 해체 등 패러다임의 변환을 유도할 수준의 전기를 겪은 서구사회와 달리 식민시기와 6.25 이래로 지금까지 냉전이라는 ‘평이한’ 시간을 지나온 한국의 특징이라 할 것이다.주어진 공공선과 성찰이처럼 과학과 가치라는 일반론적 차원을 넘어 21세기 한국사회라는 특수한 시공간을 고찰할 때 얻을 수 있는 하나의 결론은, 이 사회에는 공공선이 이미 특정한 형태로 규정되어 존재한다는 점이다. 동시에 과학과 기술은 그 공공선의 달성을 위해 스스로 봉사하거나 활용되어져 오고 있다는 점도 있다. 사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래로 국가와 국민이 거두어 온 성취물들을 보건대 일견 위험해보이는 그러한 선험적/고정적 공공선의 설정이 그리 부정적인 결과들만을 가져온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과연 이러한 가치 혹은 공공선들의 기회와 위험을 분석하여 앞으로도 유효적절한 기능을 할 수 있게끔 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보는 것과 보고 싶은 것, 객관과 주관, 사실과 믿음, 존재와 인식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는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 싶다.우리들은 모두무엇이 되고 싶다.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눈앞에 줄기와 색색의 잎, 그리고 생식기관으로 구성된 식물이 있다. 영어권에서는 flower, 스페인어에서는 flor, 한국에서는 꽃이라 불리는 존재다. 하지만 명칭은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호명되건 그 식물은 분명한 사실로서 실재한다. 인식의 외형이 가지는 상이함에 앞서 실존적 물체로서의 그 존재는 확고한 진실이다.암술, 수술, 꽃잎, 꽃받침으로 구성된 이 식물은 자연과학적 탐구의 대상으로서의 ‘하나의 몸짓’이다. 의미를 부여하기에는 아직 인간의 정서를 휘감는 그 어떤 무언가가 결핍되어 있다. 그러나 이를 꽃이라 명명하는 순간, 꽃은 수많은 문학과 시상에서 보았듯 탐미적 관조의 대상이 된다. 누구도 작은포자엽과 큰포자엽이 착생하여 이루어진 겉씨식물을 원하지 않는다. 꽃을 원할 뿐이다. 이처럼 같은 대상을 향하더라도 인식을 어떻게 정의하는지에 따라 실제적 존재가 주는 함의는 달라질 수 있게 된다.파스퇴르와 푸쉐는 ‘생명의 기원’이라는 동일한 실제적 현상을 각기 다른 인식론적 틀을 가지고 바라보았다. 주지하다시피 사회적 지지를 얻은 것은 파스퇴르의 틀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러한 시각을 가지도록 일조한 근거들은 오늘날 밝혀진 과학적 사실에 의하면 오류에 기초한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당시 19세기 중엽의 프랑스 사회가 원한 것은 진실 그 자체가 아닌,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특정한 방법론이었기에 은연중 거기에 부합하는 길을 제시한 파스퇴르는 승리할 수 있었다.꽃과 생명의 기원에 대한 존재와 인식의 차이가 다소 공허하게 들린다면 인간의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 인간, 그리고 그들로 구성된 사회가 있다. 인간은 어떤 존재이고, 사회는 어떤 특성을 지니며, 그들을 둘러싼 환경은 어떻게 전개되는가? 누군가 식량의 산술급수적 증가와 인구의 기하급수적 증가라는 환경의 전제조건을 제시한다. 현 상태로는 멸망이 불가피하다는 위기감이 조성된다. 이에 즈음하여 다른 이는 적자생존, 즉 환경에 적합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으며 이것이 인류의 진보를 가져다준다고 역설한다. 논쟁의 여지가 있는 주장에 대해 ‘과학적으로’ 검증되었다는 진화론이 그 논거로 제시된다. 이에 적자가 되기 위한, 또는 자신이 적자임을 증명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사회 내에서 진행된다. 그러나 과열된 경쟁은 사회의 불협화음을 낳는다. 한 사회에 주어진 부존량으로는 인구를 부양하기 힘든 시점이 도래한다. 그러자 누군가는 그림을 그린다. 인종별 위계를 나타낸 그림이다. 물론 ‘과학적으로’ 검증된 진화론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또 다른 이는 역시 ‘학문의 이름으로’ 열등한 인종의 개량을 통한 인종적 진보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이러한 모든 열띤 노력은 몇 가지 개념들로 압축된다. 사회진화론, 우생학, 자유주의, 제국주의 등이다.전 지구적 차원에서 벌어진 생존을 위한 경쟁은 두어 번의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아무런 규칙도 없는 경쟁, 즉 전쟁을 겪은 인류는 반성을 통해 경쟁을 일정 정도 조절하고 통제하기 위한 장치들을 고안하게 된다. 정도의 차이는 다소간에 변화를 겪었을지라도 기본적으로 경쟁의 토대 위에 건설된 것이 오늘날의 사회라고 할 수 있다.이처럼 인류와 과학의 역사에는 엄밀한 사실 그 자체보다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고 바라보는가에 따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는 일들이 많았다. 그 과정에서 상당수의 경우에 해석의 준거틀로 활용되어 온 것은 화학혁명 내지 산업혁명 이래로 눈부시게 발전해 온 과학이었다. 자신이 많은 ‘객관적’ 지식을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스스로를 지적인 존재로 규정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날수록 과학의 이름으로 어떤 주관을 객관화하기 쉬워지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고 나면 과학은 과연 객관적인 것인지, 설령 과학 그 자체는 객관적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객관성이 사회적으로 어떤 유의미한 함의를 지니는 것인지 등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1. 사랑이 매력적인 이유‘부활’이라는 음악인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사랑이란건’이라는 곡을 사랑한다. 박자와 편곡에 치중해서 곡 자체가 우선시되는 음악들도 많지만, 부활의 경우 기타리스트이자 리더인 멤버가 공들여 - 대부분 만취한 상태에서 - 쓴 가사들이 감미로워 자주 되뇌게 된다. 이 노래에서는 ‘사랑이란 이유로 만나서 헤어지고 그리워 기다려’지기도 하고, 또는 ‘지쳐가던 알 수 없는 날에 또 다른 사랑이 다시 다가’오기도 한다고 한다. 사랑은 그저 사랑이기 때문에 만나고, 헤어지고, 그리워하는 것이고, 그런 사랑에 힘겨워 하다보면 어느 날 문득 새로운 사랑이 찾아오기도 한단다. 스쳐간 편린들을 더듬어보자니 과연 나의 정분들도 그러했었지 싶다. 사랑 때문에 기쁘고, 슬프고, 힘겨운데, 다시 사랑이 찾아온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저 사랑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지만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매력적인 것이 사랑이다.?2. 행복이란오늘 거의 12시간을 공부만 했다. 왜? 중간고사가 목전이라 그렇다. 중간고사는 왜? 성적을 잘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성적은 왜? 좋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다. 좋은 직장은 왜? 괜찮은 삶을 살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괜찮은 삶은 무엇일까? 명예? 부? 성공? 화목한 가정? 불만족스러운 답들을 한 군데로 모으다보니 떠오르는 단어는 ‘행복’이다. (그래서 지금 행복한지는 둘째 치더라도) 이와 같이 나는 거의 대부분의 일들을 행복을 위해서 한다. 그런데 여기서 비극은 - 또는 실상은 -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마냥 행복이 보장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실로 많은 요소들이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너무 많다보니 비극이라기엔 무안하기도 하다. 또는 진정 비극적인 사태를 아직은 겪어보지 못했거나. 아무튼 나는 내 시간의 대부분을 행복을 좇거나 달성하는데 쓰고 있지만 그 결론이 어떻게 날지는 모르는 상태라 할 수 있다. 행복도 사랑만큼이나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더더욱 행복을 찾는 건지도 모르겠다.?3. 생명과학의 지향점우연찮게 교수님 옆자리에 앉게 되어 능력 이상의 집중력을 발휘, 한층 풍성한 내용의 필기를 할 수 있었다. 전례 없이 훌륭한 필기 내용을 복기해보니 몇몇 단어들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대리모, 맞춤아기, 인간의 자원化...... 임신을 할 수 없는 여성을 위해서 또는 우수한 용모나 두뇌의 모체를 활용하려는 부부를 위해 대리로 임신을 한다거나, 원하는 형태의 건강하고 똑똑한 아기를 출산한다거나, 질병 등 기타 신체의 장애를 치료하기 위한 기초 재료로서의 인체를 생산하는 등의 이야기다. 이러한 과정에 사용되는 과학기술의 공급은 어느 날 우연히 라기보다는 수요에 부응한 것으로 봄이 타당할 듯한데, 그러한 수요의 실체는 무엇일까? 안정적이고 편안한 삶? 건강한 신체에 기초한 건전한 정신? 성형시대에 걸맞은 훌륭한 외모? 이런저런 표현을 해 보아도, 이 모든 기술과 새로운 형태의 ‘생산’의 배경에는 보다 나은/우월한, 그리고 임의적 결정에서 오는 위험성을 배제한 안정적인 사랑과 행복을 향한 소망이 응축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재생산이라는 생명체의 절대 과제를 달성하고, 출생의 순간부터 우수한 자질을 배양하고, 비장애인 위주로 구성된 세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몸을 개조하여 그 어떤 상황과 역경에서도 온전한 사랑과 행복을 실패 없이 성취하겠다는 것, 이것이 DNA를 둘러싼 생명과학기술이 목표로 하는 궁극적 지향점일 것이다.?4. 근본적 질문, 이병헌, 신민아여태껏 제시된 주제들 중 가장 어렵다. 경제발전, 미생물, 연구개발투자, 기후변화, 정보통신 등 지금까지의 주제는 물론 중요하되 거칠게 압축하자면 삶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하는 2차적인 문제들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주제는 인간 그 자체, 그리고 임의성/우연성이라는 삶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내용이다. 존재하는 양식을 넘어 존재 그 자체를 재정의하고자 하는 시도이기에 선뜻 접근의 방향을 정하기가 난감하다. 이병헌을 보고 잘 생겼다 생각해본 적은 있지만 그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기에, 신민아가 내 여자 친구였으면 좋겠다는 불경한 상상은 해보았지만 내 여자 친구가 신민아와 완전히 똑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기에 새로운 문제다.?5. 불확실성, 확실성, 새벽, 기도아마도 현재의 과학발전과 기술개발의 흐름 자체는 돌리거나 막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 그 자체의 조직적·사회현상적 관성이 강력하거니와, 가혹한 삶의 조건 속에서 신음하는 이들에게도 인생의 무작위성 운운하며 이를 수용하라고 강권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흐름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단언하기도 어렵다. 인간과 인생을 규정짓는 근본적 조건이 바뀐다면 그에 부응하여 선과 악, 가와 부를 결정하는 가치관에도 변화가 유발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많은 것이 모호한 가운데 여기에 인간이 존재하고, 무엇이 ‘인간’이며 ‘인생’인지를 결정하는 요소들이 불확실해지는 시점이 왔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아울러 보다 나은 사랑과 행복을 찾는 이들의 움직임이 단지 그러한 가치에 도달하는 것을 넘어 모든 사랑, 행복이 달성되었을 때 찾아올 ‘행복을 재량할 불행 없음의 불행함’, 그리고 ‘목마르지 않은 사랑의 공허함’을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점 또한 비교적 확실하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까 설레어 도저히 늦잠을 잘 수가 없었’다는 故 정주영 회장의 기대와 희망은 우성 인자들만이 존재하여 위험과 기회가 완벽하게 통제되는 정교한 일상으로 대체될 수도 있을 것이고, 불의의 사고를 당해도 나와 똑같은 모습을 한 다른 존재의 신체를 이용하여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영화 「아일랜드」의 세계가 도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것이 낫다고 확언하지는 못한다. 그저 조금씩 가시화되는 선택의 가능성과, 그래서 내게 주어진 DNA속의 정보로는 일찍이 상상할 수 없었던 세계가 열리고 있다는 것에 정체모를 기대감과 불안감이 함께 떠오르고 또 엄습한다. 아직은 새벽인가 보다. 아침에 깨어났을 때 부디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사랑과 행복이 아직은 사라지지 않았기를 기도한다.
[과학, 기술, 그리고 사회 - 다섯 번째 쪽글]정치외교학과 4학년 김 지 헌기술적 기술, 사회적 기술, 그리고 질문타이피스트라. 어릴 적 좋아했던 코난 도일이나 크리스티 여사의 추리물에는 대게 줄 달린 안경을 쓴 콧대 높은 중년의 여성 타이피스트가 등장했었다. 내게 타이피스트란 결국 흑백의 종이와 활자를 거쳐 머릿속에 만들어지는 근대 유럽의 풍경 속에서나 찾을 수 있는 상상의 이미지에 가깝다. 또는 한국의 산업화 시기에 미군의 전동 타자기를 부러워하던 어느 행정병에 대한 이미지 - 이 역시 상상속의 모습이다. 그런 타이피스트를 지금 당장 모집하려면 어떨까. 아마도 시간을 놀리는 것이 아까운 수 만 명이 몰려들 것이고, 급여는 최저임금 수준이 될 것이다. 물론, 정말로 타이피스트를 고용하려는 누군가가 있다면 말이다.이처럼 한때 각광받는 직업이었다가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해지는 이 타이피스트라는 직업의 미시史는 정보혁명이라는 거대한 패러다임의 도래로 인해 촉발된 변화의 일부분이다.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기술이 산재한 데이터의 점들을 선으로 연결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데이터를 다루기 위한 새로운 입력 수단으로서의 컴퓨터, 보다 구체적으로는 자판기가 생활의 필수품이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자판기를 다루는 기술은 너무나도 보편화되어 더 이상 소수만이 전유하는 특별한, 그래서 이윤을 보장하는 기술이 아니게 되었다.어디 타이피스트뿐이겠는가. 정보혁명의 발생과 지식사회의 도래는 눈부시다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많은 변화를 유발해 왔다. 조직 운영의 구조가 바뀌고 있고, 삶의 시공간이 확장되었으며, 이러한 시대에 적합한 재능의 형태가 바뀌는 등 실로 다양한 분야에서의 동시다발적 일대변혁이 일어나고 있다. 이에 따라 새로운 비즈니스의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고 또한 이미 상당수의 가능성이 현실화되어 보다 많은 부의 축적을 가능케 해주고 있다.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온 기술의 발전과 부의 총량의 폭발적 증대. 그래프는 상승일변도에 있고, 인류는 문명의 발전을 찬양하고 있다. 그렇다. 발전이다.이상하다. 분위기는 이토록 좋은데, 다른 한 켠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들리는 듯도 하다. 타이피스트 가장은 졸지에 실업자가 되어 가족의 생계가 어려워졌다. 교과서에 나오는 노동의 산업간 이동은 아쉽게도 현실에서 그리 간단하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또 어디선가는 혼자라는 마음에, 외로운 마음에(고작 이 때문에!)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이들이 늘어난다. 그들은 거기서 동지를 만나 위안을 얻게 될까.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단어가 생활 저변의 곳곳에 포진한 오늘날이지만, 파발마를 보내고 봉화를 올리던 조선시대에도 없던 말인 ‘고독사’라는 용어가 생겨난다. 그러는가 하면 누군가에게는 24시간 이어지는 업무로 인해 외로워 할 시간조차 사치처럼 느껴지고는 한다. 오피스 프로그램을 사용할 수 있는 스마트폰은 더 이상 샐러리맨에게 실질적인 퇴근을 허하지 않는다. 그렇다. 기술은 발전했다. 그렇다면 나의, 당신의, 우리의 삶은 발전했는가?왜 질문을 하는가? 발전의 트랙에 올라타서 질주하지 않고 느긋하게 질문이나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포스트모던이라는 말은 어쩌면 타인의 말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커뮤니케이션 시대의 장식품일지도 모른다. 굳이 발음도 어려운 미셸 푸코나 데리다를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나 자신의 삶을 보건대 내게 주어진 객관성과 기존의 도그마를 성찰해야 할 필요를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절실히 느끼기에 질문을 던진다. 어제와 다른 오늘, 오늘과 다른 내일의 삶을 보며 불안을 느끼기에, 지구 어느 곳에서건 페이스북에 접속을 할 수 있음에도 내 바로 곁의 빈자리를 느끼기에,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일거리가 나를 짓누르기에 질문을 던진다.
과학, 기술, 그리고 사회 - 세 번째 쪽글정치외교학과 4학년 김 지 헌정부는 왜 연구개발에 투자하는가? - 행정학기초과학 분야는 채산성은 낮으나 소요되는 비용은 매우 많은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기술 수준과 비용의 제약 등으로 인해 시장이 아직은 미성숙하나 그 미래 전망이 낙관적인 경우에는 정부가 이를 보조해줄 수 있다. 이를 통해 기업은 초기의 이윤 확보 부담을 덜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보조에는 세금 감면, 보조금 지원 등의 방법이 있다. 한편 경제적 고려 이외에도 지구온난화 방지와 같은 당위적 목적의 달성을 위해 정부가 연구개발을 주도하는 경우도 있다. 한편 이러한 연구개발을 통한 발전에 있어 환경과의 균형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적용되는 정책 결정에 있어서는 대안의 제시가 중요한 것에 비해 한국의 환경론자 내지 정치적 지형에서는 대안이 부재하다는 한계가 있다. 끝으로, 과학기술은 중요하지만 모두가 기술 자체를 온전히 이해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기술이 가지는 사회적 영향력과 함의를 알고 그 방향을 고민하는 것이 핵심이라 할 수 있다.본 강의는 행정학, 그리고 현대의 사회 및 세계 구조를 관통하는 세 가지 코드를 내포하고 있다. 핵심어는 국가(또는 정부)의 역할, 자본주의적 원리, 그리고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국제정치적 경쟁이다.우선 국가 내지 정부의 역할에 대한 모색의 고민이 드러나고 있다. 1215년 마그나 카르타 이래로 사회와 국민에 대한 국가의 역할은 꾸준히 축소되는 추세에 있다. 최근의 경우, 1980년대 이후 나타난 경제적 신자유주의의 기조 역시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과 간섭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때로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역전 현상이 종종 나타나기도 한다. 이에 시장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분야를 포착하여 이 부분에 대한 정부 고유의 역할을 모색함은 일견 국가와 정부의 비중이 감소하는 듯한 세상에서도 여전히 그 의의를 무시할 수는 없으며 오히려 정부 기능의 작동을 통해 경제적 이익의 확보 및 증대가 가능하다는, 국가 존재이유의 역설(力說)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자연환경의 보존과 같은 당위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연구개발 투자 역시 정부 고유의 영역 설정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코드를 발견할 수 있다.두 번째, 자본주의적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 고도의 경제 사회에서 살고 있는 시점에서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역사의 긴 흐름에서 보건대 국가의 행위에 경제 논리가 투영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기에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사료된다. 여기서는 연구개발을 행함에 있어 투자 대비 편익 효과의 관점을 배제할 수 없으며, 그 과정에서의 불확실성 내지 과도한 부담으로 인한 공백을 보완하는 존재로서의 국가를 설정한다는 점에서 현대 경제학의 정부에 대한 관점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마지막 코드는 일국의 번영과 생존을 향한 국가 간 경쟁이다. 왜 정부는 연구개발에 투자하는가? 과학자들의 복리후생을 위해? 사기업의 반사적 이익 증진을 위해? 지구 환경 유지를 통한 인류 공영 달성을 위해? 모두 오답은 아니되 부분적 정답이다. 다수의 국제정치 이론에서 국가의 목표를 최소한의 생존에서 최대한의 세계정복이라는 틀 위에 설정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공담이 아니더라도 경험적으로 볼 때 과학기술의 수준이 일국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중요 요소들 중 하나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즉, 국가는 자신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도구로서의 과학기술을 인식하며 이에 그것이 반드시 자신의 수익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를 시행하여 자신의 경쟁력을 높이려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정부는 자기 존재의 이유를 증명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서 자본주의적 원리에 근거하여 연구개발을 행하며, 이는 동시에 정부, 나아가 국가 자신의 생존 및 발전을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다양한 층위와 배경에서 정부의 연구개발 투자 근거를 찾을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그러한 행위의 중요성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별론: 대안 없음의 매력본 강의에서 가장 많은 생각을 유발했던 부분은 비판과 대안에 관한 언급이었다. 그 요지는 ‘한국의 야당은 개발 위주의 정책을 비판하면서도 그에 대한 대안이 없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라는 것이었다고 기억된다(기억이 틀리다면 동 별론은 무효하다). 이 명제에 대한 몇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현대 사회의 추세는 분업화로의 진행이 아닌지? 그렇다면, 추세의 옳고 그름을 떠나, 왜 굳이 비판만은 반드시 대안과 병행되어야 하는지? 비판이 제기되었을 때 이를 검토하고 정책적 반영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은 아닌지? 나아가 정부와 국가는 그러한 비판이 제기될 수 있는 공론장의 조성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대안 없음의 공허함을 비판함은 어떤 대안을 지니는지? 현재의 지속이 곧 선이며 답인 것인지? 개발과 보존의 관점에서 보자면, 개발에 대한 (대안 없는) 비판이 수용된 결과로서의 부작위는 대안이 될 수 없는지? 비판을 넘어 대안에 이르지 못하는 수준의 지성은 우리 사회에 무의미한 것인지? 개선과 진보의 촉매로서의 비판이 가지는 순기능은 인정할 수 없는지? 개발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