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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학]사회불평등과 교육
    1. 사회 불평등에 대한 관점(1) 기능론적 시각 : 계층적 시각- 계층의 기준 : 수입, 교육, 직업수준, 직업의 사회적 평판, 위세 등(2) 갈등론적 시각 : 사회 불평등 관계의 결과에 초점을 둠1) 파킨 이론 : 사회 불평등을 사회적 폐쇄)와 관련지어 설명사회적 폐쇄의 과정은 계급관계, 인종적, 성적, 종교적 불평등 구조의 이면에 존재(예, 미국의 흑인과 백인, 북아일랜드의 가톨릭교도와 신교도, 여성과 남성간 투쟁)사회적 폐쇄의 형태 - 생산적 재산에 대한 통제(자본가들은 생산수단의 무소유자인 노동자들을 이익분배나 기업 결정 과정에서 배제시키고, 이익독점을 추구)- 특권적 지위에 대한 접근차단교육에 의한 사회적 폐쇄 : 고급교육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 교육을 바탕으 로 사회적 폐쇄를 함으로써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려 함.(3) 사회 불평등과 사회적 합의 문제1) 기능론적 관점 : 계층의 불가피성에 대해 사람들이 합의한다고 봄2) 갈등론적 관점 : 권력과 위세의 불평등한 관계들이 생산수단의 통제를 위한 부단한 역사적 투쟁의 산물2. 교육과 사회이동- 근대 산업사회에 들어와서 사회이동이 학교교육의 통로를 통해서 일어나기 시작(1) 근대 산업사회에서 학교교육이 사회이동의 주요통로가 된 이유1) 기능주의적 입장 : 근대산업 사회에서 교육이 갖는 중요성 때문산업사회에서 직업의 숙련수준이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계속적으로 높아짐학교교육은 고도로 숙련화된 직업에서 필요한 훈련이나 능력을 제공해 줌고용에서 요구하는 교육적 요건이 높아지므로 사람들은 학교교육을 보다 많이 받아 야 한다.2) 갈등론적 입장베버 - 교육체제를 형성하는 것은 체제의 요구보다 갈등하는 이해관계로 봄- 교육이념 조차도 지배구조에 의해서 그리고 지배계층을 위한 사회적 상황 에 의해서 형성- 지배집단의 목적에 따라 임의적으로 학교의 성격을 결정하는 권력을 강조콜린스 - 부와 권력 및 지위를 얻기 위해 경쟁하는 지위집단의 영향 때문- 특권적 지위를 독점하려는지배집단과 그 지위에 들어갈 기회를 얻으려 는 종속집단간의 갈등- 우월한 지위집단이 그들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교육적 요구를 한층 더 상승시킴에 따라 보다 낮은 지위집단은 보다 많은 교육기회를 요구 - 교 육의 확대로 이어짐- 학교의 의미는 특정 지위문화를 가르치는 것이라 봄3. 사회이동에 관한 경험적 연구(1) 사회이동의 개념1) 사회이동 : 개인이나 집단이 어떤 사회경제적 지위로부터 다른 사회경제적 지위로 이 동하는 것을 지칭수직이동) : 사회경제적 지위의 사닥다리를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이동수평이동 : 다른 지역으로 지리적 이동을 하는 것2) 사회이동이 일어나기 위한 구조적 특징개인을 평가하는 기준이 귀속주의적(가족배경, 인종, 성) 이어서는 안되고 업적주의 적(재능, 능력, 동기요인) 이어야한다직업구조의 변동이 활발하게 일어나야 한다(2) 사회이동에 관한 경험적 증거1) 소로킨의 가설 - 어느 사회도 완전히 폐쇄적이거나 개방적이지 않다.- 사회 유형이 사회마다 다르고, 동일한 사회일지라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한다폐쇄의 명제 - 사회이동이 직업적 위계 속에서 동일한 수준에 있는 집단간에 더 빈번하다- 사회이동은 직업의 위계서열의 중간부분에서 가장 빈번하다- 사회이동은 최상층부에서 가장 적게 일어난다완충지역의 명제 - 사회이동의 대부분이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간의 경계선 부근 에서 이루어진다(3) 교육의 효과에 관한 기능론적 연구1) 지위획득 모형 연구블로와 던컨의 지위획득 모형 - 출생조건이 이후의 지위에 어떻게, 어느정도 영향 을 미치는가, 인생주기의 한 단계에서 획득된 지위는 다음단계의 성공가능성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가* 반론(155)우리나라 직업지위획득 모형(차종천) - 배경요인과 본인요인에 의해 현재의 직업성취를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미국보다 더 낮음. (p.156 그림 참고)2) 위스콘신 모형스웰 - 블로와 던킨 모형에 사회심리적 변수)를 추가포터 -(4) 교육의 효과에 대한 갈등론적 연구1) 연줄 모형사회적 자본 : 제도적 후원과 필요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는 사회적 관계- 사회적 자본의 획득과 축적은 학생의 사회 경제적 배경에 달려 있다- 사회적 자본의 수준은 문화적 자본(언어 등)의 획득과 연관된다- 학업 성취도가 높은 학생은 정보망에 있어 더 많은 사회적 자본을 갖고 있다- 교육과 직업에 대한 포부 수준이 높은 학생들은 보다 많은 사회적 자본을 지닌다한계 - 연줄이 직업 획득과 어떻게 직간접적으로 연관되는지 밝히지 못함- 연줄을 교사나 친구에 국한하고 있음* 사회적 네트워크 이론(장원섭)연줄모형보다 더 포괄적개인적 특성변인과 노동시장 성공과의 관계 설명사회적 네트워크가 개인 특성과 노동시장에서의 성공사이에 중간 매개자로서 개입개인의 배경 특성들(능력, 교육, 성, 계층)노동시장에서 정보획득 행위(사회적 접촉, 구직 행위)노동시장 성공2) 노동시장 분단론 연구노동시장이 동질적이지 않고, 분단돼 있으며 인적 특성에 따라 차별이 존재교육의 임금결정 효과는 노동시장의 어느 곳에서 일하는가에 따라 달라짐노동시장의 분단과 교육의 효과경제적 부문에 따른 노동시장 분단 : 공공산업>중심부 산업>주변부 산업
    교육학| 2006.08.06| 4페이지| 1,000원| 조회(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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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물]송경령
    머리말20세기에 중국은 과거와는 달리 많은 사회적 변화를 겪었다. 단지 한 부분에서만이 아닌 사회전반에 걸친 변화의 이유는 서구 열강들의 침략으로 볼 수 있다. 산업혁명이후 경제적인 식민지를 필요로 하였고 점차 제국주의 국가들의 동아시아의 진출은 더욱 확대되었다. 그 중에서 서구 열강들에게 가장 관심을 끄는 나라는 중국이었다, 오랜 기간 동아시아의 패자이던 중국이었지만, 왕조의 말기의 부패와, 서양세력에 대한 무지, 그리고 중화사상 등의 이유로 아시아의 거인 중국은 서구 열강들에게 의해 굴복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은 많은 애국지사들이 등장하여 쇠락의 길을 걷는 조국을 구하기 위해 힘쓰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위인들 중에서 지금까지도 중국인민들에게 가장 추앙 받는 인물로 손문을 들 수 있다. 혁명의 아버지 손문은 신해혁명의 주역이며, 청조의 종말을 실현한 인물과 그의 애국적인 모습은 아직도 중국인민들에게는 가슴속 깊이 남아있다. 하지만 만약 현대 중국의 역사에서 손문의 영향만큼 역사에 영향을 준 여성 운동가로는 그의 부인 송경령을 들 수 있다. 그녀의 인생의 90년 동안 중국의 역사의 중앙무대를 차지했던 여성이었다.1. 유년시절에서 결혼에 이르기까지(1893~1915)송경령은 1893년 1월27일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기독교 사회가 아닌 사회 속에서 경건한 기독교인이었다. 찰리 송으로 알려진 그녀의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외국에서 교육을 받고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으로 그는 당시 대다수의 중국인들과는 다른 생활을 하였다. 그는 귀국 후 매판자본가로 큰돈을 벌었고 그의 생활은 서양인의 그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그리고 송경령과 그녀의 자매들은 중국인과는 다른 아버지의 영향으로 미국유학을 한 중국의 최초의 여성이었다. 경령의 외국학교 생활은 비록 서구적인 분위기에 있었으나 그녀의 동생들과는 보수적인 면을 보였다. 그리고 중국의 운명과 세계의 관심사라는 커다란 문제들에 빠졌었다. 당시 중국은 무창봉기 이후 2000년 간 청조는 붕괴되고 손문은 신공화국의 의 소용돌이 속으로 내던졌으며 폭풍우 몰아치는 인생여정을 밟게 되었다.2. 중국의 퍼스트 레이디 시절손문과의 결혼생활은 겨우 10년 계속되었다. 1925년 3월 12일 손문은 간암으로 북경에서 사망하였다. 그들의 결혼생활 10년 중국의 정치생활이나 그들 부부의 생활에서도 늘 끊임없는 소요와 운동이 계속된 기간이었다. 손문은 권력의 안팎을 들락거렸고 손문과 경령 두 사람은 위험의 안팎을 드나들었다. 당시 경령은 손문의 통역관이자 암호해독자이며 또한 절친한 정치적 조언자로서 일했다. 또한 경령은 남편과 함께 대중에 모습을 들어낸 중국여성이었다. 거의 모든 모임에서 그녀는 단 한 사람뿐인 여성 참석자였다. 경령은 가끔씩 선명하지 손문의 사상을 정리해 주었고 손문 만년에 그가 더 급진적인 위치로 가게끔 재촉하였다고 생각할 여지가 충분히 있다.당시 중국 국내외에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해외에서는 볼셰비키혁명이 강화되고 있었으며 중국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다. 당시 손문과 경령은 서구 열강들의 점증하는 환멸감으로 볼세비즘에 대하여 점점 기대를 걸게 되었다. 그리고 경령은 국민당을 개조하여 서구 열강으로부터 러시아로 방향전환을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녀는 당시 중국으로 파견된 모스크바 특사인 보로딘과의 협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4년 1월 손문은 국민당을 개조하기 위한 회의를 소집하였고 경령은 199명의 대표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녀는 중국 역사상 어떠한 정치적 조직체에서도 볼 수 없었던 주요 위치에 오른 최초의 여성이었다. 이 회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국민당이 소련 및 중국공산당과의 동맹정책을 채택한 것이었다.1925년 손문은 59세의 일기로 서거하였다. 그리고 그의 죽음에 대한 거대한 인민들의 슬픔은 손문과 그의 사상의 정통성을 상속받은 사람, 즉 경령에 대한 정치적 지지의 표명이기도 하였던 것이다.3. 망명의 시절(1925~1931)많은 사람들이 송경령은 손문의 죽음으로 인해 무대 되로 사라질 희미한 존재로 생각되었고 또 기적인 대항을 하였고 광중에서 열린 국민당 2차 정당대회에서 최고간부로 선출되었다. 이 회의에서 좌파와 중도 좌파가 핵심을 차지하고 몇몇의 우익 관료들은 추방되었다. 그러나 우익은 곧 장개석을 영입하여 국민당을 장악하였다, 또한 그는 경령의 동생인 미령에게 청혼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 결혼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당시 그녀는 장개석이 손문의 후광을 위해 그녀의 동생과 결혼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무한으로 이동한 후 경령은 국민정부를 이끌어 나갈 새로운 위원회가 성립되고 경령은 처음으로 중요한 행정직을 떠맡았다. 그녀는 정부에서 맡은 일과 여성에 관한 일을 하는 데에 시간을 쪼개어 썼다. 그녀가 한 중요사업은 1927년초에 여정정치훈련학교를 세웠던 것이다.하지만 무한의 정부는 서구열강들과 장개석에 의해 파괴되었고 국민당은 우파와 좌파로 나뉘어 대립해갔다. 하지만 좌파정부는 곧 괴멸되고 경령은 측근들과 함께 모스크바로 떠나야했다. 하지만 모스크바에서도 스탈린에 의해 정치적인 고립을 겪게 되었다. 그녀의 건강도 악화되어 갔다. 그리고 당시 송경령 자신에 대한 추문도 그녀를 곤란하게 하였고, 동생 미령의 장개석과의 결혼 소식 또한 그녀에게는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의 견해를 경청해 줄 영역을 확보하고자 노력하였다.1929년 5월 그녀는 귀국하여 손문의 이장식에 참가하였다. 당시 장개석은 이장식을 그의 정치적 도구로 사용하려 하였고 이에 경령은 국민들의 눈앞에서 손문 박사의 유언과 순문 박사의 유산에 대한 그녀의 권리를 주장하였다. 이는 장개석과의 협력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행동은 그녀를 광동 탈출 때만큼 위험에 빠트렸다. 그리고 1930년대 초 그녀는 유럽으로 가 베를린에서 적극적인 반장운동을 전개하였다.4. 장개석 통치하의 상해(1931~1937)1931년 6월 송경령은 상해로 돌아왔다. 그녀의 여동생은 손문의 유언을 배반하고 지금 중국의 정치를 주름잡고 있는 사람과 결혼하였다. 그리고 국민당과 적대세력은 도시마다 지하운동으로 확신되고 있었시인 목단을 침공하였고 이어 해안지역과 양자강 유역의 중국 땅을 침공하였다. 일본의 공격은 중국 내의 공산주의자든 아니든 모두가 즉각적이며 단호하게 일본에 저항을 요구하게 했다. 하지만 국민당의 장개석은 비저항정책을 택했다. 왜냐하면 그는 공산주의자들과 싸울 힘을 비축하고 싶었기 때문이다.장개석은 일본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으나 국내 반대자들에 대한 행동은 결코 나태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국민당에 반대하는 많은 정치범들과 시민들이 체포되면서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 송경령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 송경령은 급진주의자들을 보호하고 돕기 위한 제도적인 망상()조직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1932년 말 그녀는 위대한 작가인 노신을 포함한 일단의 탁월한 중국문화인들과 함께 중국민권보장동맹이라는 조직을 결성하였다. 국내의 이런 활동과 더불어, 경령은 중국에 대한 상황을 바깥세계로 보내고 해외에서의 결속을 자극하고자 외국인 기자 등과 자주 만난다거나 외국 잡지에 글을 올리는 활동을 꾸준히 하였다. 그녀는 바깥세계와의 접촉을 통하여 외국의 지식인과 운동가들에게 그들이 할 수 있는 핵심적 역할을 인식시키고 그들을 그녀 자신의 사업에 끌어들었다.송경령이 상해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사이에 먼 오지에서는 공산당이 중국의 역사를 변화시켜 가고 있었다. 국민당은 공산당에 대해 수차에 걸친 소탕작전을 시작하였다. 1934년 지방 근거지에 있던 공산당 주요 집단은 중국의 서북부 섬서성에 있는 먼 연안지역으로 안전을 위해 장정()을 시작했다. 대장정은 공산당과 국민들의 눈에 영웅적인 이미지를 심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모택동의 통일된 정치지도력 밑에 상당히 안전한 근거지를 확보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다음에 공산당은 중국국민에 대한 그들의 호소를 항일 쪽으로 기울였다. 송경령은 이러한 공산당의 항일민족통일계획을 적극 지지하였다.일본의 침략에 직면하고도 저항하지 않는 국민당의 행위는 거대한 대중감정을 자극시켜 1935년 12월 9일 다수 학생들의 봉기가 북경에서 일어났다. 국민당 자체 내에서도하였다. 공산당의 홍군은 8로군과 신4군으로서 장개석 휘하의 부대가 되었다. 공산당의 군대는 일본군이 점령한 지역을 계속 회복하고 그들의 힘과 영향력을 확장하면서, 일본에 대해 놀랄 만큼 효과적인 게릴라전을 펼쳤다. 통일전선이 형성되었음에도 공산당과 국민당간의 관계는 표면상으로만 조화로울 뿐이고 내면적으로는 적대관계였다.1937년 11월 상해가 일본의 손아귀에 떨어지자 경령은 홍콩으로 떠났다. 1938년 6월 그녀는 보위중국동맹을 설립하여 적극적인 구제사업을 펼쳤다. 그녀가 모집한 돈과 구호물자는 공산당이 영도하는 항일근거지에 보내진 중요한 외부물자였다. 공산주의자들은 경령의 시기적절한 도움에 감사하였다. 홍콩에서 그녀는 아파트나 개인 집에 세 들어 살았다. 그녀는 개인 소유물이 거의 없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남겨준 보석을 구제사업을 위한 돈을 마련키 위해 다 팔았다. 그녀에게 사치는 중국과 같은 전쟁상태의 가난한 나라에선 죄악이라고 여겨졌다. 경령은 금욕적인 생활방식으로 도덕적 명성을 얻었다.통일전선에도 불구하고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의 묵은 상처는 더욱 나빠져 갔다. 장개석이 일본은 피부질환이고 공산당은 심장질환이다라고 말 한 것처럼 공산당이 더 큰 세력으로 자라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장개석은 갖은 수단을 동원하였다. 1941년 1월 장개석은 신4군을 기습 공격하여 수천 명을 학살하였다. 통일전선은 이후 단지 이름뿐이었다.1941년 12월초 전쟁이 홍콩 가까이까지 다가오자 송경령은 중경으로 이동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거기서 살았다. 중경에 체류하는 동안 장정권에 대해 공개적인 비평을 퍼부었기 때문에 송경령은 엄한 감시 하에 있었다. 하지만 공산지역에 들여보낼 물자들을 얻기 위한 노력을 지치지 않고 계속하였다.1945년 8월 15일 중일전쟁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끝이 나면서 이젠 내전의 시기로 다시 돌입하였다. 1945년 12월 송경령은 중경을 떠나 상해로 갔다. 거기서 보위중국동맹을 중국복리기금회로 개편하였다. 이 중국복리기금회는 주로 어린이들과 친공산당다.
    독후감/창작| 2006.08.06| 6페이지| 1,000원| 조회(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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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세계대공황 평가A+최고예요
    . 서 론대공황에 대한 의문은 1930년대 이래로 끊임없이 계속되어왔다. 왜 일어났는가? 불황이 그토록 심각하고 그토록 장기적이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 기원은 미국에 있는가, 유럽에 있는가? 등의 것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문들이 확실히 풀릴지도 의문이 든다. 그만큼 대공황이 복잡한 경제 메커니즘 속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그 원인을 찾기란 매우 힘들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러한 한계를 염두에 두고, 대공황의 원인에 대한 일반경제이론을 하나하나 설명하고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이 세계 대공황으로 파급된 궁극적 원인에 대해 짚어보기로 하겠다.먼저 제장 대공황의 배경에서는 1차 세계대전의 영향에 대해 그 변화와 충격의 여파가 어떠했는 가를 살펴보고, 다음으로 1920년대 세계경제의 위기를 여러 분야에서 살펴봄으로써 대공황의 배경을 간단히 설명할 것이다. 제장에서는 대공황의 원인에 대한 일반이론을 살펴본 후 장에서 1930년대 세계 대공황의 원인을 미국의 대공황, 리더쉽과 국제협력의 부재, 미국의 지도력 결여, 그리고 금본위제 유지를 위한 긴축재정으로 보고 그 내용을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 제장에서는 대공황의 타계책에 대해 1국의 대책과 국제적 대책을 살펴보고 그 결과가 어떠했는가를 알아볼 것이다.이를 통해서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대공황의 배경과 원인,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이다.. 대공황의 배경1. 1차 세계대전의 영향대공황의 배경을 설명하려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1차 세계대전이라고 할 수 있다. 1차대전의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영향을 빼놓고는 전간기 상황을 말할 수 없는 것이다.전쟁은 하나의 중요한 경제적 혁명이었다. 단기전으로 끝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전쟁은 총력전의 양상을 보였다. 모든 생산활동은 군수품 생산으로 신속히 대체되었고 정부가 거기에 앞장섰다. 그 결과는 너무도 파괴적이었고 후유증 또한 길었다.국제경제적 측면에서 전쟁은 두 가지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첫째, 교전국의 농업부문이 제 위치를 잃으면서 가약화시키고 노동자계급의 영향력을 급속히 증가시키면서 사회정치적 행태를 변화시켰다. 패배, 황폐화, 금융혼란으로 말미암아 긴장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오스트리아,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의 정당들은 여러 사회계급들 사이의 조세 분담에 관한 합의를 전혀 이루어내지 못했다. 독일의 경우처럼 조세와 소득에 관한 분배적 갈등이 전후 금융불안의 주요한 원인으로 대두하였다.3. 1920년대 국제자본이동1924-30년 동안 주요 채권국(미국, 영국, 프랑스, 기타유럽국)에서 100억달러 내지 110억달러의 자본이 독일을 비롯한 유럽 국가로 유입되었다. 이 중 거의 60%가 미국에서, 각각 약 15%가 영국과 프랑스에서, 그리고 나머지는 기타 유럽의 채권국에서 유출되었다. 자본 총액중 70억달러 이상이 독일로 흘러들어 갔으며, 나머지는 그보다 훨씬 작은 액수로 나뉘어 다른 많은 나라들, 특히 오스트리아, 폴란드, 그리스, 헝가리로 유입되었다.외국자본의 유입으로 독일은 국내자원이 뒷받침할 수 있는 수준보다 훨씬 더 많은 투자와 소비를 할 수 있었다. 또한 은행시스템의 유동성도 크게 개선되었다. 대규모의 해외 차입은 독일 산업 합리화와 회복에 기여했다. 하지만 필요한 자본이 수입될 수 있을 때만 이러한 상태는 안정적이었다. 기본적인 문제와 사회적 갈등이 해결되지 않는 한, 미국투자자들의 선호의 조그마한 변화에도 독일 경제는 극히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1927년 전반기에 외국 장기자본 유입이 급격히 감소하였다. 이 때문에 경제는 커다란 압박을 받았으며 금준비 감소 뒤에 면세조치가 다시 도입되고 채권발행은 곧바로 회복되었다. 외국 자본유입은 1930년 회복되었지만 1931년에 상황이 뒤바뀌어 실제로 6억달러가 넘는 순유출이 발생하였다.유럽으로 유입되는 미국자본이 줄어든 데는 몇 가지 요인이 있었다. 국내적으로는 연방준비위원회(FRB)가 긴축통화정책으로 이자율을 급격히 인상하여 해외대부의 유인을 약화시켰다. 1927년과 1928년 내내 주가지수가 치솟자 월스트리트에서 더 많은 실질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엄청나게 나쁜 결과를 초래했다. 무역부문에서 수출소득 감소는 외국산 공산품에 대한 구매력을 잠식했으며, 오랜 공산품 공급국, 특히 영국의 수출을 크게 감소시켰다. 금융부문을 보면 이들 가운데 많은 나라가 1929년과 1930년에 자국 통화를 평가절하할 수밖에 없게 되어 외환 불안정기로 빠져들었다. 몇몇 다른 나라들은 관세와 외환통제, 그리고 쌍무적 무역협정에 기댐으로써 세계무역을 더욱 위축시켰다. 영제국 내의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아르헨티나와 브라질과 같은 스털링과 강한 연계를 가졌던 나라들은 전통적으로 런던에 잉여잔고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어려움에 처하게 되자 그것을 인출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영국은 준비금을 마련해야 하는 압박을 받았다.5. 유럽 은행시스템의 안정과 위기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종전 직후의 경기상승은 1920년 중반에 끝나고 생산, 고용 및 소득이 거의 모든 나라에서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유럽의 대국()들 중에서 독일만 초인플레이션이 일시적으로 가져다준 유리한 효과 덕분에 전후 침체를 피할 수 있었다. 그 외의 나라에서는 불황이 상당히 심각한 나라가 많았다.영국은 1920-1년에 은행시스템이 가장 안정적이었다. 따라서 불황 자체도 크게 심각하지 않았다. 영란은행은 존재만으로도 은행공황의 가능성을 제거할 만큼 최종대부자로서의 명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영국만큼은 아니지만 은행시스템이 전반적으로 안정되어 있었다. 프랑스 중앙은행은 정부증권을 은행에 예치시키도록 권장하면서 은행의 노력에 도움을 주었다. 실물부문의 불황도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다행이었던 것은 물가의 디플레이션이 동반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후 독일금융시스템의 안정은 특이한 것으로 1931년 붕괴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독일의 초인플레이션은 실물부문의 침체보다는 성장을 가져왔다. 또한 정부지출의 대부분이 중앙은행의 신용으로 조달되고 있었으므로 금융기관에 대한 최종대부 여부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그러나 오의 패퇴를 설명한다고 한다. 테민은 또한 공황전달 메커니즘은 국제적인 것이므로 한 나라만 보면 안 된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고, 금본위 유지 등 국제협력이 오히려 위기상황에서는 역효과를 자아낸다고 주장하였다.3. 절충론을 선호하는 학자의 입장절충론을 선호하는 학자들은 지난 10여년간 연구결과 대공황의 모습이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이들 연구는 1930년대의 공황을 1차대전과 1920년대에 걸친 경제의 구조적 변화와 연결짓는 데 성공하였다는 것이다. 즉, 미국에 있어서의 내구재생산 팽창과 노동시장의 경직화, 국제통화제도의 취약화, 국제결제방식이 점차 미국의 대부에 의존하게 된 점등이 충분히 검토되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긴축통화정책의 파급효과가 치명적이었다는 사실이 부각되었다는 것이다.. 대공황의 원인1. 미국의 대공황흔히 세계 대공황은 미국에서 시작되어 유럽 및 자본주의 세계 각국으로 파급되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미국 대공황의 원인에 대한 설명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몇 가지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세계적으로 농산물 과잉생산과 가격하락에 기인한 농업제품 수출의 급속한 감소이다. 1900년부터 1920년까지의 기간은 미국 농산물 생산을 강력하게 자극한, 전례가 없는 전시 미국 농산물 수요로 해서 농민들이 전반적으로 번영을 누리고, 농산물 가격은 앙등일로에 있던 시기였다. 농민들은 오랜 동안 휴한지로 남아 있거나, 아니면 과거에 전혀 경작한 적이 없는 보잘것없는 땅들을 개간했었다. 미국 농산물 가격이 올라감에 따라, 미국 농민들은 과거에 구입할 수 없었던 상품과 기계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1920년 말에 이르러 전시 수요가 갑자기 없어지게 되자, 소맥(밀) 및 옥수수와 같은 주요 곡물을 생산하는 농업은 급격히 쇠퇴했다. 농업가격의 하락은 농민의 소득감소를 야기 시켰고 나아가 미국내 소비수요의 감소로 이어졌다.미국 농업의 불황을 초래한 요인은 여러 가지로 설명되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요인은 외국시장의 상실이었다. 미국 농민들은 미으로 보아 금본위제 유지를 위한 긴축정책이었다. 한편에서는 영국처럼 물가가 충분히 하락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전전()의 금 평가를 회복했기 때문에 국제 수지가 불안했던 나라들이 긴축적 정책 기조를 유지하고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프랑스와 미국처럼 상황이 정반대인 나라들이 물가 상승, 투기 발생을 우려해서 불태화 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다. 흑자국의 불태화 정책은 적자국의 국제수지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는 적자국들에게 금본위제의 유지를 위한 더욱 강도 높은 긴축을 강요했다.1920년대 후반 긴축금융재정정책이 실시된 것은 정책입안자들이 금본위제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으며, 금본위제를 유지하는 것이 번영을 위한 중요한 전제조건이라는 세계적인 견해에 따른 것이었다. 이 이데올로기의 결과, 돌이켜보면 팽창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 명백히 입증되었던 시기에도 금융재정당국은 긴축정책을 실시하였다.테민에 의하면 특정한 행동을 야기한 이데올로기는 정책체제였다. 정책 결정권자 그리고 그의 행동에 의해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이 제도 내에서 움직였다. 그들은 이 체제 내에서, 즉 금본위제 내에서 대안적인 행동을 생각했다. 이 체제 밖의 대안은 그것이 제안되었을 때는 정책입안자에 의해, 그리고 그것이 실시되었을 때는 투자가와 소비자에 의해 진지하게 고려되지 않았다. 그것들은 안정된 금본위제로부터 이탈한 것으로 이해되었다.테민은 금본위제를 다섯 가지 특성의 측면에서 정의한다. 그 중 두가지는 다른 세가지가 의미하는 바이기도 하다. 금본위제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개인과 국가간의 자유로운 금이동, 금으로 표시된 각국 통화가치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 즉 각국 환율의 고정화, 국제적인 조정기구의 부재이다. 이 세 가지는 다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국제수지 흑자를 기록한 나라와 적자를 기록한 나라 사이에는 비대칭성이 존재했다. 금 또는 외환보유고가 고갈되었을 때(고정된 통화가치를 유지할 수 없을 경우)에는 벌칙이 가해졌으나, 금을 축적하는 데에는 아무런 벌칙이 가해지지 않었다.
    인문/어학| 2006.08.06| 13페이지| 1,500원| 조회(1,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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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3.1운동
    제 2 장 3.1운동1. 3.1운동의 배경1) 대외적 배경1910년대는 제국주의 질서가 재편되고 민족의식을 자각한 약소민족들의 반제투쟁이 격화된 시기였다. 이 시기의 세계정세는 제1차 세계대전(1914-18)과 러시아 혁명(1917) 등을 통해 국제적 역학관계가 재편되었고, 신해혁명(1911)으로 봉건적 질서가 부정되는 등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러한 세계정세의 변동은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던 한민족의 독립운동에 긍정적 조건으로 작용하였다.제1차 세계대전은 한민족의 독립운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립운동을 계획하던 인사들은 내심 일본의 패망을 기대하면서 이를 독립운동의 능동적 계기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1916년부터는 세계대전을 독립운동에 활용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의 승전으로 전세가 기울자 이러한 움직임은 중단되고 말았다.이때 독립운동세력에 희망을 준 것은 1918년 1월8일 미국 대통령 윌슨이 연두교서에서 밝힌 민족자결주의원칙이었다. 이는 윌슨이 종전과 강화의 조건으로 제시한 조항으로서, 연합국 최강국인 미국 대통령이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전후 세계질서의 재편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하였다. 그런데 이 조항은 독일 등 패전국이 보유했던 식민지를 처리하기 위한 원칙이었다. 따라서 당시 승전국이었던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던 우리나라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었다.3.1운동을 추진하던 이른바 민족대표들은 이같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의 본질과 한계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독립 운동에 유리한 조건으로 적용하거나 이용하려고 하였다. 또한 이같은 세계정세의 변화를 독립의 자력쟁취를 위한 결의를 다지는 계기로 삼고자 하였다.2) 일제의 무단통치1910년대는 대내적으로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통치 시기였다. 한국을 완전 강점한 일제는 무력을 증파하여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탄압하였고, 각종 식민지 악법을 공포하여 식민지 지배체제를 강화하고 식민지 수탈에 혈안이 되었다.일제는 1883년 이른 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가들의 흐름이었다. 신한청년당의 독립운동은 3.1운동을 가장 먼저 태동시킨 흐름으로서, 3.1운동의 최초의 진원은 상해의 신한청년당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상해에서는 1918년 8월 20일경에 여운형, 장덕수, 김철, 선우혁, 한진교, 조용은, 조동우 등 한국인 청년 독립운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신한청년당을 조직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1918년 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신한청년당은 파리 평화회의에 신한청년당 대표 겸 한국민족대표로 김규식을 파견하였다. 그는 일제의 폭압과 야욕 등을 세계 여러나라에 알리고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표명하기 위해 12개 항목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신한청년당이 파리 평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한 사실은 그후의 3.1운동의 봉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중대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 사실은 본국의 민족지도자들과 재일본 한국유학생들에게 밀사를 통해서 통보되었고, 그 후 2.8독립선언과 3.1운동은 신한청년당 대표 김규식의 한국 독립 주장이 한국민족 전체의 의사와 주장임을 전민족적 독립만세 시위로써 전세계에 선언하고 과시하는 내용을 포함하여 전개된 것이었다.또한 신한청년당은 국내에 선우혁, 김철, 서병호, 김순애, 백남규 등을 파견하여, 이를 기회로 삼아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을 일으킬 것과 파리 평화회의에 파견하는 한국대표를 위한 자금지원을 종용케 하였다. 신한청년당의 선우혁은 1919년 2월 초에 평안북도 선천에 도착해 신민회 때의 동지인 양전백, 정주의 이승훈을 각각 만나 독립운동을 일으킬 것을 종용하여 적극적인 찬동과 약속을 받았다. 선우혁은 계속해서 기독교계의 원로인 길선주를 방문하여 찬동을 얻었으며, 이어 신민회 때의 동지들인 강규찬, 안세환, 변인서, 이덕환, 김동원, 도인권, 김성탁, 윤원삼 등을 만나 독립운동의 봉기에 적극적인 찬동을 얻고, 상해로 돌아갔다. 그 후 평안도 지방에서는 교회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감행하기로 독자적 계획을 세웠다가 서울의 천도교측에서 이 지역에 파견되어 파리 평화회의에 대표로 김규식을 파견했음을 알리고 독립운동을 적극 고취하자, 1919년 2월에 여준, 김교헌 등 39명의 이름으로 를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였다.3) 미주지방의 독립운동3.1운동의 태동과 관련된 셋째의 독립운동의 흐름은 미국에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이었다. 미국에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은 비교적 정보를 빨리 얻었으므로 파리 평화회의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예민하게 대응하였다. 미주의 대한인국민회는 안창호가 중심이 되어 1918년 12월에 전체 간부회의를 개최하고 워싱톤에 대표를 파견하여 파리 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발송하도록 결의해서 대표를 선정했지만 전승국인 일본의 항의로 미국정부가 여권을 발급해 주지 않아 미주에서는 파리에 한국민족대표를 파견하지 못하였다.미주에서 한국민족 독립운동 고양의 또 하나의 계기를 이룬 것은 1918년 12월 13일부터 뉴욕에서 열린 제2차 연례총회의 개최였다. 이 회의에는 신한협회를 대표하여 뉴욕 지방의 김헌식을 비롯해서, 중서부를 대표하여 정한경과, 대한인국민회를 대표하여 민찬호가 참석하였다. 이 약소민족동맹회의에 참가한 미주의 한국대표들은 다른 약소민족 대표들과 함께 이번 파리 평화회의에서는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모든 약소민족들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결의하였다.4) 재일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3.1운동 태동에 직접 관련된 넷째의 독립운동의 흐름은 재일본 한국 유학생들의 독립운동과 그들의 이었다.재일본 한국 유학생들은 1918년 12월 29일의 유학생 학우회의 망년회와 12월 30일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동서연합 웅변대회에서 한국독립 문제를 의제로 하여 격렬한 토론을 벌이고 생명을 바쳐서 조국 독립을 위한 실천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합의하였다.재일본 한국 유학생들은 이듬해인 1919년 1월 6일 조선기독교 청년회관에서 다시 웅변대회를 개최하고 서로 등단하여 현하의 정세는 우리 조선민족의 독립운동에는 최적한 시기로서 해외의 동포도 이미 각각 실행운동에 착수하고 있으므로 우리운동의 본격적 조직화를 준비하기 시작한 날이었다. 이 무렵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 천도교측은 그들이 일으킬 독립운동의 방법에 대하여 다음의 세가지 원칙에 합의하였다.독립운동을 대중화하여야 할 것.독립운동을 일원화하여야 할 것.독립운동을 비폭력으로 할 것.이것은 3.1운동 방법의 원칙을 천도교측에서 결정한 중대한 합의였다. 또한 이날 손병희는 독립운동의 위의 구체적 방법과 진행을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에게 일임하였다. 다시 천도교측에서는 권동진과 오세창이 천도교 내부의 일을 담당하고, 최린은 천도교와 외부와의 관계를 담당하기로 하였다.3.1운동 봉기를 위하여 천도교 종단을 동원하기로 교주 손병희가 허락했으므로, 최린은 현상윤, 최남선, 송진우 등과 함께 최린의 집에서 몇차례 회담을 갖고 독립운동의 구체적 방법을 협의하였다. 최린 등 천도교측은 2월 상순의 회합에서 독립선언과 민족대연합전선 형성을 위해 다른 종교와 접촉 연합하기로 결정하여 먼저 본격적으로 기독교와의 접촉을 시작했다.6) 기독교의 독립운동 조직화3.1운동의 태동과 초기 조직화를 추진한 여섯째의 독립운동 세력은 기독교 신교측 독립운동이었다. 기독교측의 독립운동의 초기 조직화는 관서지방의 장로교 계통과 서울의 감리교 계통 및 장로교 계통이 별도로 독립운동을 조직하다가 합류하였다.관서지방의 장로교 계통은 주로 이전의 신민회 세력이 중심이 되어 독립운동의 기운이 일어나고 있다가 1919년 1월말-2월초에 걸쳐 중국 상해로부터 신한청년당의 선우혁이 도착하여 이승훈, 양전백 등을 비롯한 신민회의 옛 동지들을 만나 협의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초기 조직화 단계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선우혁이 떠난 뒤 이승훈, 양전백, 윤원삼, 안세환, 함석원 등이 중심이 되어 평양의 숭실전문학교, 숭실중학교, 숭덕고등보통학교, 숭의여학교, 숭현여학고, 관립고등보통학교와 정주, 선천의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독자적으로 독립선언과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여 조직화가 진행되었다. 마침 이 때 기독교 장로교측의 이승훈은 2따라서 그나마 조직과 단체를 유지할 수 있었던 종교계와 학생들이 3.1운동을 주도적으로 추진한 것은 당시의 조건하에서는 최선의 방책이었다. 종교계와 학생단은 일본에서의 에 자극받아 민족대연합전선을 구축하기 이른다.민족대연합전선은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독립선언과 만세시위 준비를 진행하였다. 독립선언서는 천도교측에서 작성하기로 하여 최남선에 의해 초고가 작성되었다. 천도교측으로부터 선언서의 취지와 지침을 받은 최남선은 2월 초순부터 초고 작성에 착수하여 2월 11일경 초고를 천도교측과 기독교측의 동의를 얻어 완성하였다. 이 독립선언서는 2월 27일경 2만 1000여 매가 인쇄되었다. 이처럼 독립선언을 위한 준비가 마무리되자 각 종단은 민족대표를 선임하였고, 선임된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서에 서명 날인하였다.거사일자는 3월 3일 고종의 국장일과 3월2일 일요일을 피하되,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사람들을 최대한 동원하기 위해 3월 1일로 결정하였다. 또 독립선언식이 폭력화할 것을 우려하여 장소를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변경하였다.4.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의 전개1) 국내외의 만세시위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사정상 불참한 4인을 제외하고 태화관에 집결한 29인의 민족대표들은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독립선언 후(한용운이 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후)민족대표들은 곧 연락을 받고 출동한 일경에 의해 모두 체포되었다.탑골공원에서도 수천 명의 학생과 시민이 모여 있다가 뒤늦게 독립선언 장소가 변경된 사실을 알고 2시 30분경 독자적인 선언식을 거행하고 곧 동서로 나뉘어 시가지로 물밀 듯 밀려나가 시위에 들어갔다. 서울의 만세시위는 날이 저물도록 시내 도처에서 전개되었다. 그러나 공약삼장 () 에 밝힌 대로 질서정연하게 비폭력 평화시위를 전개하여 한 건의 폭행사건도 발생하지 않았다.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 원산 등 주요 도시에서 동시에 독립선언과 만세시위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종교조직을 통하여 사었다.
    인문/어학| 2006.08.06| 9페이지| 1,000원| 조회(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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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의병전쟁
    Ⅰ. 전기의병 투쟁1894년 6월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이 있자 척사유생을 비롯한 조선인들은 이를 민족존망의 위기상태로 받아들였다. 이어서 한반도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의 사주를 받는 친일적 개화정권의 개혁정책을 일본으로의 예속정책으로 인식한 조선인들이 무력투쟁을 감행한 것이다.서상철은 갑오변란으로 경복궁이 유린당하고 고종이 핍박당함에 분기하여 격문을 발표하고 1894년 7월 안동향교에서 거의하였다. 이 기병은 안동부에 의해 저지당했으나 서상철은 계속 의병을 초모하여 상주의 태봉에 있던 일본군 병참부대와 전투를 벌였다.상원의병은 관료출신인 김원교 등이 상원관아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김원교는 반개화?반침략의 이념으로 의병을 봉기하였다.1895년 8월 20일 발생한 을미사변 직후 국수보복(國讐報復)을 기치로 한 한일의병은 9월 18일 무과출신 문원봉에 의하여 유성에서 시작되었다. 의병은 600여 명에 달하였으며 회덕현을 급습하여 무기를 탈취하여 공주부 관아를 공격하였으나 패하였다. 또 1895년 11월 김이언이 만주의 삼도구에 거점을 두고 초신군 아전 출신 김봉현과 동학접주였던 김창수와 함께 압록강 양안의 포수 300여 명을 모병하여 의진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국모의 시해에 항거하는 격문을 발표하고 압록강을 건너 강계읍으로 진격하였다.1895년 11월 15일 단발령 공포 후 전기의병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서울에 있던 김하락은 구연영?신용희?김태원?조성학 등 젊은 유생들과 경기도 이천으로 내려가 포군을 포섭하여 이천의병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민승천의 안성의병과도 연합하여 1896년 1월 17일 이천의 백현에서 일본군과의 첫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리고 광주군수를 처단한 광주의병과, 심상희가 조직한 여주의병이 합세해 와 이들과 함께 남한산성을 거점으로 확보하고 서울 진공계획을 수립하는등 전과를 올렸다.춘천의병은 1896년 1월 춘천유생 정인회가 군인 성익환과 상인 박현성을 포섭하고 포군 400여 명과 춘천관찰부를 점령하였다. 여주출신의 민용호는 1월 수(尊華復讐)’의 깃발을 세우고 홍주부내에 창의소를 설치하고 김복한을 수속으로 추대하였다.진주의병은 1896년 2월 17일 노응규에 의해 안의에서 시작되었다. 진주의병은 대구부에서 파견된 관군을 두 차례에 걸쳐 격파하고 다수의 전리품을 노획하여 사기가 고무되자, 노응규는 점차 활동범위를 넓혀 부산과 근접한 함안?김해일대까지 진출하여 일본군 수비대와 치열한 접전을 전개하였다.경상북도 지역에서는 안동부를 중심으로 안동의병이 결성되었다. 단발령 공포소식을 듣고 김도화 등 안동 유생들은 통문을 돌리고 1월 17일 안동관찰부를 공격, 점령하였다. 김도화가 이끄는 안동의병은 제천의병의 소모장 서상렬과 연합작전을 전개하여 함창군 태봉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였으나 대구에서 증파된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예천?풍기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이후 안동의병은 정부의 권유에 따라 해산하고 김도현만이 민용호부대와 연합하여 항전하다가 영양에서 부대를 해산하였다.한편 김천?선산?상주 등지의 유생들은 을미사변의 소식을 듣고 이에 통분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상주의 유생 이기찬은 이기하?허위?조동석 등과 의병을 규합하여 1896년 2월 군사적 요충지인 김산으로 들어가 그 근거지로 삼았다. 이곳에는 이미 향반출신인 여영소?여중용 등이 중심이 되어 통문을 띄우고 거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기찬?허위 등은 이들과 연합하여 3월 10일 김산향교에서 의병을 일으켰다.호남지역에서는 장성?나주?광주지역을 중심으로 의병이 봉기하였다. 나주에서는 아전출신인 김창균을 중심으로 의진이 결성되었다.북한 지역인 함흥지방에서는 평강출신의 최문환이 거의하였다. 함흥의병은 특히 일본상인의 경제적 수탈에 항거하여 일어난 특성을 띠는데, 이들은 민용호의 관동의병과 연합작전을 펴서 9월 함흥을 재점령하기도 하였다.전기의병의 참여층은 지휘부와 병사층에 따라 유생과 평민으로 대별되어 나타난다. 지휘부는 주로 관료출신의 양반 유생 또는 재지유생들로 구성되어 위정척사계열의 유생들이 중심이었다. 이들 척사계열의 의병 중 다수는 동 주요이념에서 ‘주욕신사(主辱臣死)’의 정신으로써 임금에 충성하고자 하는 근왕적인 성격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근왕적 또는 충군애국적 국가관은 국왕을 전제로 한 국가의 독립, 즉 왕조의 복구에 궁극적인 목표가 있었다 할 것이다.셋째, 전기의병은 반개화적인 성격을 띤다. 척사유생들의 개화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은 중화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인륜을 파괴하여 금수화 시킨다는 것이었고, 이것으로 인해 결국 국가마저 멸망에 이르게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척사유생들은 이와 같은 반개화론, 나아가 개화망국론에 입각하여 중화질서의 회복과 국가의 독립을 위해 거의한 것이다.넷째, 전기의병은 반침략성을 강하게 띤다. 의병들은 1894년 갑오변란을 일제의 침략행위로 규정하였고, 청일전쟁 역시 조선의 국권을 위협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의병들은 친일적인 갑오정권을 타도하고 일본군을 조선에서 완전히 축출하여 민족의 자주를 수호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의병들은 단일부대로 혹은 연합부대를 편성하여 지방관청을 공격하였으며, 지방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를 주요 공격대상으로 삼아 무력항쟁을 전개하였던 것이다.Ⅱ. 의병의 재봉기전기의병전쟁은 1896년 10월에 끝을 맺었다. 비록 정부의 선유에 따라 해산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굴복한 것이나 동조한 것이 아니라 재봉기의 기회를 노리는 후퇴에 불과한 것이었다.전기의 의병이 해산한 후에도 일제의 침략은 계속 강화되고 있었다. 조선에서 제1차적 경쟁자인 청(淸)을 축출한 일제는 정치?경제?문화적 침략을 심화시키면서 식민화의 기반을 굳혀 갔다. 때문에 1894년부터 조선은 일제의 반식민지가 되어갔다. 한편 일제는 열국의 정세를 유리하게 끌어가면서 최소한 조선만은 그들의 식민지로 점령한다는 제국주의적 흥정에서 국제적 고지도 확보해 가고 있었다. 그 유리한 국제적 고지 위에서 1904년 러일전쟁을 도발하였다. 그리고 한국이 중립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적으로 굴복시켜 한일의정서와 한일협약을 늑결(勒結)하니 종래에 반식민지 상태에 있이 의병을 일으킨 사례가 많아졌다는 점이다.중기의병의 대표적인 의병장을 들어보면, 강원도의 원용팔, 경기도의 이문호, 충남의 민종식, 전북의 최익현, 전남의 백낙구, 경상도의 신돌석, 황해도의 이진룡 등을 들 수 있다.중기의병장은 명문가의 양반이나 유명한 유생이 적지 않은데, 민종식, 최익현, 고광순, 박기섭 등이 그들이다. 하지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유생이나 이족(吏族), 전직관료 등이 중기의병을 주도한 경우가 점차 늘어났다. 유생으로는 원용팔, 정용기, 이현규, 유시연 등이 있고 전직관료로는 최익현, 임병찬, 양한규, 백낙구 등이 그에 해당한다. 동학농민전쟁 당시 농민군을 진압한 공로로 관직에 오른 이족출신의 의병장도 눈에 띈다.중기의병은 양반유생이라 하더라도 위정척사적 명분론을 내세우기보다는 국가와 민족을 구하려는 의지가 강하였다. 이는 국가와 민족의 위급한 상황을 직시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양반유생출신의 경우에도 이른바 화적이나 활빈당으로 내몰린 농민층과 연대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중기의병을 주도한 의병장들은 대체로 강회(講會)나 향음례(鄕飮禮)를 통하여 의병을 모집하였으며, 방도(防盜)조직을 의병부대로 전환시킨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전자의 경우에는 최익현 의병부대, 후자에는 쌍산의소(雙山義所)가 해당된다. 일제의 관제개혁으로 인하여 실직한 관리들이 의병의 근간을 이룬 경우로는 백낙구 의병부대를 들 수 있다.한편 중기의병의 주된 활동지역은 강원, 경기, 충남, 경북, 전라도 등의 산간지대이다. 지역적 분포면에서 중기의병은 전기의병에 비하여 더욱 넓어졌으며, 산간벽지에서 봉기한 의병이 많아졌다. 의병의 전투능력도 다소 향상되었다. 그것은 상당수의 포군이나 포수 및 활빈당 등이 합류함으로써 가능해졌다.중기의병의 창의 목표는 무엇보다도 국권회복에 있었다. 이는 전기의병이 단발의 거부나 국모의 복수 등과 같은 척사적인 입장이나 성리학적 명분론을 내세웠던 것에 비하여 발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일제의 정치 경제적 침탈이 가속화되는 상황서도 의병전쟁은 대중운동으로 더욱 발전하였고, 해산 군인의 참전에 의하여 군사적인 면에서도 한결 조직화된 전쟁상태로 돌입하였다. 그와 같이 대중적 항전으로 나타난 후기의병이었으므로 중기의병에 비하여 그의 질과 양에서 발전하고 있어서 국민전쟁과도 같이 전개된 것이 후기의병전쟁이었다.후기의병으로 활동한 주요 의병부대를 지역별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먼저 중부지역에서는 김수민, 이강년, 이은찬, 허위, 연기우, 한봉수, 민긍호 의병부대 등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영남지역에서 활동한 주요 의병장으로는 신돌석, 정환직, 서병희, 변학기 등이다. 북부지역의 경우 함경도와 황해도 지방에서는 의병투쟁이 격렬한 반면, 평안도는 그렇지 않았다. 평안도에서는 김관수 등과 같은 유인석 계열의 유학자들이 의병을 일으켰다. 함경도에서는 홍범도, 차도선, 태양욱, 송상봉 등의 의병장은 포수와 해산군인 등을 이끌고 삼수와 갑산 등지에서 격렬하게 싸웠다. 황해도에서는 박기섭, 이진룡 등의 의병부대가 평산 등지에서 돋보이는 활약을 보였다. 그리고 호남 지역에서는 전기와 중기의병의 경우 그리 활발하지 않았으나, 특히 1908?1909년 사이에는 후기의병을 주도하였다. 의병장 김동신, 고광순, 기삼연, 김준, 김율, 이석용, 문태서, 전해산, 심남일, 안규홍 등이 그들이다. 전남북의 경계인 내장산에서 김동신과 고광순 등은 주로 지리산과 덕유산을 축으로 하는 산악지대에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지리산을 장기항전의 근거지로 삼았다는 점에서 주목된다.이상과 같이 1908년 이후에는 전국 어느 곳이나 의병전쟁의 무대가 아닌 곳이 없었다. 특히 후기의병의 중심지는 호남지역이었다. 이에 맞서 일제는 호남의병을 근절시키기 위한 대책을 수립하였다.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라는 전례 없는 대규모의 군사작전을 실행에 옮겨 호남의병을 잔혹하게 탄압한 것이다. 당시 호남의병은 다수의 의병장을 비롯하여 500여 명이 전사하였고, 약 2,000명이 체포되었다.후기의병은 호남의병의 종식으로 일단락되었으나 의병전쟁의
    인문/어학| 2006.08.06| 8페이지| 1,000원| 조회(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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