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Ⅱ. 본론1. 버블경제1)버블경제의 발생2)버블경제의 붕괴가. 정부정책기조의 변화 나. 주가와 지가의 급락2. 1990년대의 ‘잃어버린 10년’1). 기업2). 민간소비심리의 급격한 위축과 디플레3). 은행4). 정부의 대응가. 금융정책 나. 통화정책다. 재정정책3. 현재의 일본경제Ⅲ. 결론Ⅰ. 서 론1945년 8월 히로시마 원자 폭탄 투하 이후 완전 폐허가 된 일본은 이후 일본경제는 새롭게 도약하기 시작한다. 연간 10%의 성장을 기록하며, 각국의 벤치마킴 대상이 되고 세계 제2의 경제강국으로 발돋움하는 일본경제는 버블현상이 사라짐과 동시에 1990년대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10년간의 장기적 저성장이라는 현상을 직면했다. 이렇듯 일본은 최고의 경제성장과 최악의 경제침체를 맛보았다.일본의 경제는 국내 경제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웃나라라는 지정학적 측면을 제외하고도 경제적으로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한국의 벤치마킹 대상이 일본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한국의 경제의 문제점은 지난 버블경제 당시의 모습과 상당히 유사한 점을 볼 수 있다. 그만큼 일본의 지난 경제의 발자취는 우리에게 상당한 교훈을 주기에 충분하다.이러한 생각에 경제라는 주제를 선택하였고, 그 중에서도 가장 일본 경제의 흐름중 가장 이슈가 되었던 ‘잃어버린 10년’에 대해 중점적으로 알아보고자 한다.Ⅱ.본 론1. 버블경제1)버블경제의 발생1980년대 초 만성적인 재정 적자와 무역 적자를 겪고 있던 미국에선 일본의 무역흑자와 미국의 무역적자를 개선하는 길을 환율 조정으로 보고 1985년 9월 )플라자합의를 이끌어 낸다. 이 합의는 곧바로 일본 엔화의 평가절상을 가져오게 되고 1985년말에 달러대비 200엔에서 86년 초에는 160엔 대를 돌파하여 87년에는 123엔 대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엔화강세 저지를 위해 일본은 금융완화 정책으로 재할인금리의 전격적인 인하를 단행한다. 이렇게 시작된 재할인금리의 인하는 1986년 1월부터 시작되어 1987년 2월까지 불과1년 추월하였다.또 80년대 초 84년도의 금융자유화는 대기업들로 하여금 주식이나 회사채 발행 등을 통한 직접금융을 인정함으로써 은행이 아닌 자체적으로 자금을 조달하기 시작했다. 은행들은 대기업의 자체채권 발행으로 인해 중소기업대출 늘리고, 부동산 담보를 통한 대출을 확대해 나갔다.이처럼 1985년 이후의 지가 밑 주가의 상승, 엔화의 가치상으로 인한 수입원자재가격의 하락, 초저금리, 기업들의 직접금융 등을 통하여 자금이 과잉 공급되면서 국내 경기가 폭발하고 과잉투자가 시작되었다. 결국 이것은 일본경제의 거품 발생원인이자 1990년대의 저성장의 시발점이 된다. 일본경제의 거품 발생원인자료: 현대경제연구원(1998) 『오부치 新政權의 登場과日本 經濟 展望』정오영 외12) 버블경제의 거품붕괴가. 정부정책기조의 변화이러한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의 급속한 성장의 경기과열로 인한 인플레이션 우려려 정부는 경제정책을 긴축기조로 전환하였다. 먼저, 재할인율을 1989년 5월 2.5%에서 1990년 8월까지 5차례에 걸쳐 6%로 인상하는 금융긴축정책을 취하였다. 또한 부동산 업계에 대해서는 자금융자 )총량규제를 실시하여 은행의 부동산 대출에 대한 창구지도를 강화하였고, 금융긴축정책에 이어 고정자산세를 인상하여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기업 밑 지주에게 특별내국세를 부과하였다.일본정부의 정책기조가 긴축으로 전환된 후 경기후퇴조짐이 나타나면서 주가와 지가는 절반가량 하락하는 등 경제의 거품이 소멸되기 시작하여 1990년 중 5.1%를 나타내었던 GDP성장률이 1991년 중 3.8%로 낮아졌다.나. 주가와 지가의 급락정부와 맞물려 일본은행은 거품제거를 위해 1989년 5월 최초의 금리 인상을 실행했다. 가장 낮을 때 2.5%였던 금리는 1990년 9월까지 다섯차례나 변경되어 6%로까지 끌어올려졌다. 이러한 거품제거 노력은 주가와 지가에 바로 반영되었다.주가와 지가의 하락을 보면, 1990년대 초부터 주식, 채권, 엔화의 가격이 하락 추세를 보이기 시작했지만 그중 주가의 급락이 두드러한 투자 대상이었던 주식 및 토지의 가격 하락이 거품경제의 붕괴를 가져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2. 1990년대의 ‘잃어버린 10년‘1990년대의 일본경제는 전형적인 거시경제 측면에서 악순환의 연속이였다. 거품경제의 붕괴는 곧바로 소비자들의 심리에 반영이 되고 이는 곧바로 기업의 수익성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는 경제성장률에 반영이 되고 실업률을 증가시킨다. 이러한 경제의 악순환의 고리에서 정부의 무능력은 장기간의 저성장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 기간의 경제성장률을 96년도를 제외한 다른 해의 성장률은 지극히 저성장의 수치를 보여주고 있다.일본의 GDP성장율(1900~2000)자료: 한국은행1)기업90년 이후 지가와 주가의 폭락으로 인한 경기침체로 일본 기업들은 그 동안 주식금융을 통해 조달했던 해외의 저리 자금대신 고금리의 보통채를 발행하여 자금을 조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한편 해외에서 채권을 발행하는 기업은 소수의 대기업에 국한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신용도가 낮고 또는 자본이 약한 중소기업들은 도산하기에 이른다.기업 도산건수 추이 (단위:건)199019911992199319941995199619971998전체6,46810,72314,16714,04113,96315,08614,54416,36519,171제조업9321,4772,3082,5912,7402,8182,6702,6663,325건설업1,3852,1252,8452,8683,2063,7863,7104,7855,440도소매업2,9344,4795,5585,2875,1575,5385,3785,8146,729운수통신업1472*************7510582733서비스업6271,1331,1501,6981,5371,5521,5321,7151,953자료: 총무청, 일본통계월보위의 표에서 1990년 전체 도산건수는 1998년 약 3배에 이르고 있고, 산업별 도산건수 중 건설업의 도산 증가가 타 업종에 비해 좀더 많은 폭으로 증가하였다. 이를 정부의 재정긴축정책으로 신규주택 착공건수 또99.3소비자물가3.13.31.61.30.7-0.10.11.80.6-0.1-0.4생산자물가1.61.0-0.9-1.5-1.8-0.8-1.60.6-1.5-2.1-3.4자료: 일본은행위의 두개의 표는 상당히 상반되는 자료이다. 물가는 지속적으로 하락하는데 소비지출은 극격히 감소하고 있다. 즉, 소비심리의 냉각으로 기업은 재고가 누적되고 도매물가 하락으로 이어져 기업의 매출액과 수익의 감소 요인으로 작용하고 그것이 설비투자 감소 및 임금?고용조정으로 파급되어 다시 수요가 감소하고 또 다시 물가하락으로 이어지는 디플레이션에 빠지게 된 것이다.3)은행기업의 수익 감소와 도산은 두가지의 형태로 은행에 타격을 주게된다.먼저, 80년대 부동산을 담보로 마구잡이식으로 대출을 해주었던 은행들은 90년대의 기업채무구조악화로 부실채권이 급증한 것이다. 92년부터 본격화된 은행의 부실채권 누적은 95년부터 98년까지 4년간 33조엔에 달했다. 신용금고와 신용조합을 포함하면 43조엔 규모로 GDP대비 8%규모로 늘어난다. 은행의 경우 부실채권이 전체 대출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5~7%에 달해 심각한 수준이다.두 번째로, 일본 금융기관의 가장 큰 특징인 )호송선단식 체제라는 것에 의한 타격이다. 정부에 예속되어 있는 금융기관들은 실질적으로 경쟁력이 약했고, 버블 이후의 금융기관들은 정부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고 늦장 대응하는 정부의 정책에 결국 많은 금융기관이 도산을 하게 된 것이다.)94년 12월 도쿄 교와 신용조합과, 안젠시용조합이 파산하면서 본격화된 금융기관의 도산사태는 95년 3개의 신용조합 도산으로 이어졌고, 96년 들어 효고은행, 다이헤이요은행, 항와은행 등 지방은행의 도산으로 확산되었다. 97년 들어 닛산생명보험을 시작으로 상장 증권사인 산요증권이 11월에 파산했고 이어 10대 도시은행인 훗카이도척식은행이 파산하였고, 4대증권사인 야마이치증권까지 폐업지경에 이르렀으며 제2지방은행인 도쿠요시티은행마저 파산하여 일본 금융시장은 물론 세계 금융시장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이러한 금융기1년 8월 정책윈원회?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당좌예금의 공급 한도를 5조엔에서 6조엔으로 확대하는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재할인금리를 보았을 때, 시중에는 충분한 자금이 풀려있는 상태였다. 즉, 장기불황에 따른 기업은 투자보다는 채권상환에 주력하고 있었고, 이는 자금에 대한 수요가 없다는 것을 뜻하게 된다. 결국 통화정책마저도 실폐하게 된다.다. 재정정책일본은 재정확대 정책으로 재정적자를 초래하면서까지 공공사업에 투자를 확대하였다. 이는 금융정책의 실폐로 더 이상의 선택의 여지가 없던 일본정부는 불가피하게 재정적자를 감수하고서라도 공공사업에 투자해야만 했다. 하지만 재정정책의 비효율적 투자는 무조건적인 투자형식을 취하게 되고 사실상 필요한 곳에 투자되지 못하고 필요하지 않는 곳에 투자가 되었다. 이러한 재정의 적자는 국민의 부담으로 이어지게 되었다.3. 현재의 일본경제현재 일본은 구조적 요인에 의한 경기부진에서 탈피하고 경기의 회복세가 두렷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당초 2003년 실질 GDP성장률 전망 0.6% 에서 2.10% 로 전망치 상향 수정하였다. 일본은행이 분기별로 발표하는 단칸(기업단기 경제관측조사.短觀)도 그중 하나로서 기업의 체감경기를 나타내는 지표다. 12 월에 발표된 제조업 대기업의 업황판단지수(DI)는 플러스 11이었다. 9월에 비해 10 포인트나 높아졌다. 이것은 제조업 대기업의 체감경기가 확실하게 큰 폭으로 좋아지고 있음을 의미한다노무라경제연구소 등 민간연구소도 당초 △0.1%의 마이너스 성장에서 1.0% 이상으로 전망치 상향조정하였다. 외국기관은 1% 내외의 성장을 전망한다. OECD는 0.8%, IMF는 2%의 성장을 전망함으로써 일본 경제가 플러스 성장세로 회복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일본 경제성장률 현황 및 전망구분200020012002(추정)2003(전망)실질 성장률3.2-1.40.92.0명목 성장률1.1-2.5-0.60.1%자료: KOTRA우선 기업부문을 중심으로 경제회복 국면에 진입했다고 볼 수 있다. 설비 투자 부문은 마이다.
1.절대 권력 황제 마오쩌둥(1893~1976)마오쩌둥에 대해 짧은 문장으로서 설명하자면 중국 인민의 지도자, 마르크스주의자, 무산계급혁명가, 중화인민공화국의 창설자인 동시에 지도자이면서 시인이자 서예가이다. 지난 그의 홍군 시절 이후의 사생활을 들춰봤을 때 평범한 사람들에 비해 상당히 황폐화된 삶을 산 듯 보인다. 물론 한국과 중국의 문화적인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나의 시점으로 보기엔 너무도 극단적인고 냉정한 그의 모습이 못마땅할 수 밖에 없었다.가장 먼저 기억에 떠오르는 것은 마오가 그의 수영장에서 수 많은 여자들과 즐겼다는 부문이다. 그는 새로운 여자에 대한 집착이 상당히 강하다는 것이 느꼈다. 마오쩌둥의 결혼생화에서도 그렇듯이 첫 번째 부인인 「양카이훼이가 장제스의 앞잡이들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 창사에서 처형을 기다리고 있을 때 마오는 징강산에서 허쯔쩐과 동거를 시작했다(129p)」. 그 후 그는 또 다시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937년 허즈쩐과 파경후 또 다시 쟝칭과 결혼한다. 쟝칭과의 결혼은 마오쩌둥의 인생의 실패중에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문화혁명 당시 4인방 중 한명으로써 각종 흑색선정을 이용하여 군중들로 하여금 수 많은 능력있는 인재들을 탄압하였다. 아마도 그 때부터 시작된 쟝칭의 정치개입은 좀 더 빨리 올 수 있었던 현재의 중국을 더디게 했다는 생각이 든다(지난 시간 보았던 동영상 자료중에서 쟝칭의 모습을 꼭 두꺼비를 연상시켰다. 특히 그녀가 대머리였다는 사실에 웃지 않을수 없었다. 만약 마오의 부인이 왕광메이와 같은 여자였다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특히 1958년 마오쩌둥이 캉성을 베이징으로 불러 들인 때부터 마오는 섹스라는 향략적인 부문에 심하게 빠지는 것을 볼 수 있다(캉성은 베이징에 온 후 마오와 젊은 여자들을 연결해주는 역할에 충실한거 같다). 아마도 중국의 20세기 초 여성들의 권리는 가축보다나을게 없었다. 여성들은 사고파는 상품이었고, 혼자사는 여자 쪽에 의해 결정되었다. 또 여성은 남편과 시댁의 부속물로 간주되댁의 노비로 취급되었다.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도피 수단은 매춘부가 되는 것이었다.(127~128p)". 라는 문화적 가치관이 마오의 호색(마오는 더운물을 넣은 실내수영장을 발가벗은 젊은 여자들로 가득 채우고 수중 섹스놀이에 빠지기 시작(329p))을 더 부추기고 있는 것 같다.마오쩌둥은 상당히 이성적인 것 보다 감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했다는 생각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이 기분내키면이였다. 말과 행동이 상반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그의 눈을 멀게 하고 그의 팔다리를 잘라냈다는 표현이 적절한 듯 싶다. 그가 시행했던 많은 정책들이 상당히 독단으로 이루졌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아무도 나에게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는다. (132p)라고 얘기했듯 자신에게는 올바른 정보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경호실장 리인챠오는 마오는 한편으로는 진실을 알기를 원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누구든 감히 진실을 말하는 자가 있으면 그자의 말을 견디지 못해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133p)라고 했다. 그에게 만에 하나 나쁜 정보를 그대로 보고 했을 경우의 마오를 주변 사람들은 감당하기 힘들었다는 뜻이다.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마오가 홍군시절부터 집권시절까지 항상 그와 함께 했던 아편과 수면제, 하지만 부족했던 수면이 그의 성격을 이러한 상태로 내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또 그의 중남해 생활에서 간간히 보였던 게으름은 오랜 아편과 수면제 복용에 의한 탈수증상에서 나온 심각한 변비가 하나의 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본문 내용중에 변비에 대한 내용이 대략 반페이지 정도 나오는데 상당히 집중해서 봤다). 독단적 결단에 의해 탄생된( 사실상 그의 경제 계획들 중 어느것도 당 정관상 필요한 당 중앙위원회나 정치국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225p) 이후 마오는 왜 천윈만이 경제를 다룰 수 있는 거야? 왜 나는 못하지? (540p)라고 말한것 처럼 자신의 경제정책이 상당히 문제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했다)이 대약진 운동과 인민공사 설문화혁명을 주동하여 죄없는 수많은 지식인과 충신들을 숙청하는데 온심혈을 기울였고, 이것은 마오 자신의 팔, 다리를 스스로 자르는 꼴이였다.천원은 마오가 1956년에 죽었더라면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칭송받았을 것이라도 말했다(335p). 지난 역사에서도 그렇듯 권력을 장악한자는 권력에 먹히고 마는 것이였고, 마오도 다를 바 없이 이를 비켜가지는 못한 것 같다. 1976년 9월 9일 수많은 업적(?)을 남긴채 세상을 떠났다.2.역사적 사건 대약진 운동과 문화혁명●대약진 운동그는 치밀한 계획없이 1958년 마오는 대약진운동을 시작했다. 오랜 내전에서 승리한 마오쩌둥은 피폐한 중국경제를 고도성장으로 이끄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오는 국가건설 기본 소재인 철강생산 능력을 극대화하면 15년 안에 영국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때부터 전 중국의 직장이나 마을마다 철을 생산하기 위한 흙용광로가 설치되었다. 농민들은 농사를 외면하고 자신의 마을에 설치한 용광로 불 때기에 밤잠을 설쳤고 공장 근로자들도 본업은 뒷전이었다. 인민들의 하루 일과는 거리에서의 폐철줍기였다. 이것으로도 모자라자 농기구와 공장 철제물, 병원기구 등도 용광로 속으로 사라졌다.마오는 어마어마한 철생산량 보고를 받아 보았다. 영국을 따라잡는 것은 식은 죽 먹기로 생각되었다. 어마어마한 것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철생산과 함께 추진한 각종 배가운동은 농업과 공업 생산량도 크게 높여 놓았다. 그러나 이것은 허구의 숫자였을 뿐이다. 철 생산량 자체는 늘어난 것이 틀림없지만 쓸모없는 것이었으며 농업과 공업 생산량은 조작되거나 과장된 숫자였다. 하지만 그 보고서는 마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것으로 현실과 숫자사이의 괴리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필연적으로 아사자가 속출했으며 공장 가동이 안되어 산업은 마비되었다. 58년부터 시작한 대약진운동이 중단된 60년까지 3년 동안 기아로 굶어 죽은 인민이 수천만명에 달했다.●문화혁명1959년 루산회의에서 마오와 펑떠화이는 상당히 대립적인 모습을 에 처음 등장하여 광란의 문화혁명의 중심에 선다). 결국 60년 8월 정치국 확대 회의 결의에 따라 펑은 국방부 부장직에서 해임되고 린뺘오가 그 후임을 맡게 되었다(248p)(이때부터 린뺘오는 자신의 권력을 비행기 추락사고로 인한 사망전까지 충분히 활용하였다). 1962년 중국의 모든 경제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에게 전담하였다(그들은 마오의 과거 재정적자문서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1961년 펑전에 의해 만들어졌다). 1962년 9월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마오쩌둥은 계급투쟁을 강조하고, 수정주의를 비판함으로써 반대파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류와 덩, 친원은 이에 반대하였다. 결국 1965년 1월 25일을 기점으로 중국 역사상 가장 해괴한 정치 운동이었던 문화혁명이 추진력을 얻기 시작하였고, 급기야는 온 나라와 온 국민이 그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갔다(323p).1966년 8월 천안문광장에서 백만인 집회가 열렸고, 이곳에 모인 홍위병(紅衛兵)들은 마오쩌둥사상을 찬양하고 낡은 문화를 일소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시위를 전개하였다. 학교를 폐쇄하고 모든 반마오적인것을 공격하였다. 또한 당의 관료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전국 각지에서 실권파들이 장악한 권력을 무력으로 탈취하였다.문화혁명 과정에서 참으로 어이없는 이유로 펑떠화이와 류사오치는 같은 치욕과 고문 끝에 죽고, 덩샤오핑은 쟝시성으로 추방되었다(덩샤오핑이 푸팡에게 쏟은 정성(462p)으로 누구 느낄 수 있는 가족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하게 해주었다). 이 운동으로 약 300만 명의 당원이 숙청되었고, 경제는 피폐해지고 혼란과 부정부패가 만연하였다. 특히 덩샤오핑의 집권 이후 취약한 교육부문의 큰 영향을 주었다.문화혁명의 주된 원인으로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대약진운동 실패 이후 권력의 위협이고, 또 하나는 그 당시 소련의 수정주의와 자본주의가 그의 동료들이 원하던 길이였음을 느낀 것이고, 마지막으로 모스크바의 심한 감정싸움인 것으로 본다.(335p)3. 덩샤오핑의 경제혁명덩샤오핑은 그 생에 있어서 노력 끝에 1976년 10월 모택동의 사망과 4인방의 체포이후 1977년 3월 모든 직책을 돌려 받은 등소평은 모택동 사망이후 1977년 7월 에 열린 당 제 10기 3중전회에서 덩은 복귀하였고(534p). 그의 정책의 모태인 실용주의적인 노선을 밟는다. 그 때부터 그의 짧은 정권시기를 시작하였다.덩샤오핑의 현대적인 경영능력이 보이는 것이 바로 인재등용이였다. 그는 두 번째, 세 번째 복귀 때 그가 가장 먼저 한일은 인재를 모으는 일이였다. 두 번째 에서는 문화혁명에 의해 숙청당한 수백명의 중견 간부들을 구제해 주었고, 세 번째에서도 일급참모진을 끌어모으는데 가장 주안점을 두었다. 1978년 12월의 당 제 11기 3중전회에서 정점에 달한 일련의 회의를 통해 그는 개혁, 개방정책을 제기하였다(547p). 이것이 바로 현재의 중국의 급속한 경제발전의 시초가 되었을 것이다.덩샤오핑의 경제정책을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당의 개혁을 통해 실용주의체제를 확립(천윈, 자오쯔양, 완리등의 경제전문관리 고용)하였고, 이를 기반으로하여 현대화정책의 경제개혁을 추진시켰다. 이러한 정책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요소를 도입하는 계획적 상품경제의 추구 및 경제관리체제의 개혁을 수반하며 진행되었다. 이는 중국의 사회체제상 매우 놀랍고 획기적인 것이였다. 과거 마오쩌둥이 전통적으로 고수해왔던 '자력갱생의 원칙(공산진영 경제의 원칙이기도 하다)'을 벗어나 대외경제개방정책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개혁적 무역정책의 실시, 경제특구 및 경제개발구(CITIC을 이용한 외자유치)의 설치등으로 구체화 되었다(이것은 현재의 각 금융, 산업 등의 전문 도시 양성의 시초가 된다).위와같은 등소평의 실용주의노선에 입각한 개혁·개방정책은 일단 성공한 것으로 평가할수 있으나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 관료주의(가장 큰 문제점은 중국의 관료주의라고 사오양은 결론지었다(582p)), 높은 인플레이션(가격 아등)과 실업의 문제(공기업 민영화와 기업간의 경쟁체제 도입으로 인한), 소득격차의 발생과다.
사랑-아가페(Agape)아가페 사랑은 우리로 선한 것을 추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그러한 것을 추구할 수 있도록 능력을 준다. 이 아가페 사랑만이 율법과 윤리규범을 초월하는 능력이며 우리로 하여금다른 어떠한 희생을 지불하고라도 사람을 사랑하게 하는 능력이다.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인생에서 사랑은 우리에게 어떠한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 책은 ‘인간은 서로를 향한 지속적 사랑을 확인할 때 자아를 발견하게 되고 자신이 수행하는 일의 참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인생을 배우는 가장 짧은 길이요, 인격적으로 성숙한 인간이 되게 하는 능력이다.’ 라고 우리에게 정의해 주고 있다. 사랑은 각자 개개인에 있어 인생과 동일한 무게를 지니고 있다. 이성간의 사랑, 친구와의 사랑, 가족간의 사랑 등 이미 우리는 매시간 매분 매초 사랑을 주고받으며 느끼고 있다. 이러한 사랑을 개념적으로 정의 한다면 이성간의 사랑을 의미하는 에로스(reos), 형제간의 사랑을 의미하는 필리아(philia), 부모 자녀간의 사랑을 의미하는 스톨게(stolge), 그리고 조건 없는 사랑을 의미하는 아가페(agape)로 내릴 수 있다.? 이성간의 사랑-에로스(eros)'플라톤에 의해서 진리와 지식에 대한 「열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처음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점차 이성간의 육체적 사랑으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이 이성간의 사랑은 감정과 열정을 그 특성으로 하기 때문이다.(p.330) ‘본래의 에로스의 의미는 이미 변질되어져 버린 이성간의 사랑의 의미로 전락된 것이 사실이다. 현대의 젊은이들 뿐만이 아닌 가정을 가지고 있는 중년층들마저 가족을 저버린 변질적인 에로스를 추구하는 면이 강해져 있다. 구체적인 에로스로 성관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여자친구를 사귀고 있다. 에로스적인 사랑으로 가끔 많은 생각을 하기도 한다. 이미 성년의 나이를 넘어섰지만 아직은 가정을 가진 부부가 아니다. 하지만 성관계를 자주 갖는다. 나 스스로는 ‘지금의 여자친구와 분명 결혼을 하리라 마음을 다지고 있지만,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의 작음으로 헤어짐을 맞게 된다면 그 이후 여자친구와의 성관계는 변질된 에로스인가? ‘라는 생각을 한다. 그에 대한 답을 고대의 에로스의 개념을 본다면 분명 이는 변질된 에로스일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욕정만을 위한 것이 아닌 그 이성에 대한 진실된 사랑이 전제된다면 나로서는 현대의 순수한 에로스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친구간의 사랑-필리아(phila)우정으로도 정의된다고 볼 수 있겠다. 필리아의 개념을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느껴졌던 점은 에로스와 스톨게 보다는 현실적으로 힘든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궁극적인 필리아는 요한복음 구절에 잘 나와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p.334) ‘. 하지만 슬픔, 괴로움, 기쁨 등 희노애락을 서로 공유해 줄 수 있는 것이 친구이고 이것이 현대의 필리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가족간의 사랑-스톨게(stolge)스톨게는 부모님의 입장에서 아가페와 같은 사랑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부모님은 자연적이고 헌신적이고 아낌이 없는 사랑을 자식에게 베풀어 주신다. ‘탕자의 비유’는 가장 쉽게 스톨게를 설명해 준다고 본다. 이는 인간이 세상에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자연적으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무조건적인 사랑-아가페(agape)그 누구에게나 사랑을 주며 그 무엇도 바라지 아니하고 무조건적인 사랑. 이러한 사랑을 영위하며 사는 사람이 과연 존재 할 것인가? 이것이야 말로 하느님의 사랑이고 세상의 모든 것의 중심이다. 누가복음 6장 27절에서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p.329)’라는 구절을 보았을 때 나 자신에게는 분명 불가능한 이야기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감정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죄를 미워하기도 하지만 죄를 지은 사람을 더 미워한다. 그것이 인간이다. 그렇기에 인간이 이루기에 참으로 힘든 정점의 사랑이다.
14I. 서론..2II. 본론...21. 국내 게임시장의 특성 및 문제점....21)국내 게임시장의 특성2)국내 게임시장의 문제점2. 한국의 대 중국 게임시장 진출 현황과 전망.........71)한국게임의 중국진출 현황2)중국 온라인게임 사업 전망III. 결론13Ⅴ. 참고문헌..........16Ⅰ. 서론21c에 접어들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지닌 색다른 문화산업이 등장했다. 바로 게임이다. 현재 케이블TV의 채널에서 두개의 전용 게임채널이 약 4년전부터 신설되어 현재 방영중이며 점차적으로 방송의 질적 성장을 이루어 가고 있다. 이렇듯 언제부터인가 우리들의 생활 깊숙히 파고들어 아예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버렸다. 물론 게임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것이며, 갤러그를 위시해서 다양한 오락들을 접해왔다. 그런데 예전에는 동네에 그저 오락실에서나 볼 수 있었던 게임들이었고, 오락실에 가면 혼나기가 일쑤였고, 학교에서도 혼나고 그랬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오락을 한다고 누가 나무랄 사람도 없고, 오히려 프로게이머라는 직업도 생겨났다. 얼마전 홍진호라는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는 KTF와 3년간 4억 4천만원에 계약하였다. 이는 프로 오락성과 대중성을 가지고 있다. 장르별 게임의 질적 향상은 더욱더 대중적인 성향을 띠며 성장하고 있다. 국내 게임장르별 규모추이 (단위: 십만$)구분1998년1999년2000년2001년2002년2003년온라인게임7.710.214.522.133.448.6PC게임27.430.733.93738.9아케이드 게임177.1200.5233.7272.5316.5359.3비디오게임119.5137.4143.8156.8180.4221.1자료: 한국첨단게임산업협회의 2003년도 게임시장 조사결과(3) 고부가가치 벤처산업게임 산업은 투입 대비 산출의 비율이 매우 높은 산업이다. 보통 게임 개발업체들의 성공확률은 5%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5%에 불과한 성공률이지만 일단 성공하면 100배의 수익을 거둘 수 있다. 또 성공한 업체 하나가 수백명, 수천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미래산업이라는 점에서 게임산업이 국가 경쟁력 강화에 가져다 줄 확률은 더욱 높다. 하지만 제품출시 시기의 사회적 문화적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고, 제품의 라이프사이클이 짧으며, 게임 차별성과 완성도에 의해 사용자가 만족하기 때문에, 수요가 불확실하다. 이는 대중가요나 영화에서도 나타나는 동일한 현상이다. 하지만 사업 기획 시 철저한 시장조사와 수요자의 동향 분석을 통해 완벽한 준비와 충분한 투자를 통해 제작한다면 이러한 위험도를 현격히 줄일 수 있다.(4) 뛰어난 산업연관성게임산업은 만화, 영화, 애니메이션, 캐릭터 등 주변 산업과 그 연관성이 깊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그 예로 닌텐도사의 ‘슈퍼 마리오’ 게임의 주인공은 캐릭터 사업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또한 캡콤사의 ‘스트리트파이트’ 게임은 영화로 제작되었다.(5)게임 마인드의 새로운 변화현대의 게임산업으로의 이전으로 인해 다양한 시너지 효과가 발생하였다. 먼저 새로운 일자리들이 창출되었다. 프로게이머, 프로게이머 메니저, 프로게임단감독, 게임방송 캐스터나 해설자, 게임 테스트 혹은 게임 모니터링, 게임평론과 같은 새로운 직업들이 생겨났다.나 게임전문투자조합이 없기 때문에 개발자본금을 빌리려면 대부분이 담보를 제공해야 하는 제약으로 게임지원정책자금 조차도 융자받기 어려운 상황이다.(3) 개발 방법의 전문화 부족게임개발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함께 참여하여 이루어지는 매우 복잡한 과정이다. 따라서 다양하고 복잡한 개발과정이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전문적인 방법들이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국내 게임개발사들은 주로 경험을 중심으로 게임들을 개발하고 있는 실정이다. 단지 소수의 개발사들만이 합리적이고 능률적인 개발방법을 연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즉 철저한 시장조사와 소비자분석을 통해 게임개발 기획을 수립하고 효과적인 프로젝트 관리체계를 정립하여 게임을 개발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국내게임의 완성도와 제품가치는 외국타이틀에 비해 격차를 갖고 있다.(4) 개발인력 부족국내 개발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게임산업이 성장하는 만큼의 인력들이 보충되지 않고 있다. 또한 경험이 많고 숙력된 고급인력들이 부족하여 완성도 높은 게임개발에 큰 장애가 되고 있다. 더구나 개발인력의 부족으로 인해 타사의 스카웃 경쟁으로 인해 게임개발자들이 자주 이동하는 현상도 매우 심각한 상태에 있다.(5) 교육의 고급화국내에서는 게임개발 인력양성은 학원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최근 전문대학 및 대학교에서도 학과를 개설하여 교육하기 시작하고 있다. 학원교육은 새로운 작품을 개발할 수 있는 창작중심의 교육이 아니라 게임제작기술에 초점을 맞춘 단기교육이고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은 전문교수진의 부족으로 인해 아직 교육과정이 제대로 정착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게임개발에 필요한 고급기술교육이 아직 정착되지 않고 있다. 또한 게임 시나리오 작가, 게임 기획자, 그리고 게임PD와 같은 핵심 인원에 대한 영재교육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장기적으로 우수한 개발인력이 필요한 국내 게임산업에 가장 큰 문제라고 판단된다2. 한국의 대 중국게임시장 진출 현황과 전망1)한국게임의 중국 진출 현황(1)국내게넷 산업 중 가장 수익성 있는 3대 분야로 부상하고 있을 정도다. 중국 최대의 온라인게임 제공업체인 롄중(聯衆.OURGAME)의 첸중화(錢中華)사장은 "중국의 인터넷 게임시장은 워낙 비약적으로 커가고 있어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라며 시장전망을 낙관했다. 중국의 베이징중퉁싱지(北京中通星際) 등 여러 통신회사들도 '온라인 게임이 돈이 된다'는 생각 아래 적극적으로 게임 콘텐츠 수입에 나서고 있다. 중국의 온라인 게임시장은 현재 한국과 일본. 대만의 온라인 게임들이 각축을 벌이고 있으나, 최근 들어 한국산 온라인게임들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4) 성공적인 사례가. 레드문의 한.중 국가간 게임 대항전2002년 여름, 레드문(紅月) 한.중 국가대항전이 열린 중국 베이징(北京)의 프렌드십호텔 2층. 대회에 참가한 한국과 중국의 게이머 20명이 PC모니터 앞에서 마우스와 키보드로 게임 캐릭터들을 현란하게 조종할 때마다 객석에선 환호와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레드문은 만화가 황미나씨의 SF팬터지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온라인게임이다. 이날 대회는 중국에서 서비스 중인 레드문을 홍보하기 위해 국내 온라인게임 개발사인 제이씨 엔터테인먼트와 중국 게임서비스업체 아시아게임이 공동 주최한 것이었다.이 행사는 경기 시작 전부터 3백여 석의 객석이 가득 메워진 것은 물론 CCTV. 베이징TV 등 현지 언론도 높은 관심을 보이며 취재경쟁을 벌였다.이날 대회의 우승자는 당초 예상을 깨고 광저우 출신의 무명 대학생이 차지했다. 레드문 게임 종주국으로서 당연히 1등을 기대했던 한국 대표단 입장에선 이변이었다.중국 온라인게임 시장의 한류(韓流)바람이 거세다. 레드문의 경우 현재 동시접속자수 3만9천여명, 회원 수는 2백50만명에 달한다.서비스 규모에서 중국 내 3위. 통상 온라인게임은 동시접속자수가 1만 명만 돼도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점을 감안하면 대박을 터트린 셈이다. 한국 온라인게임의 중국 내 성공작은 이뿐만이 아니다. 위메이드 엔터테인먼트의 ‘미르의 전설2’ 는 중국 내 동시 접속자수가 30만명이로써 양 사는 당초 계약대로 아워게임 운영을 위해 새롭게 설립한 합작법인 ‘아워게임 에셋(Ourgame Assets Ltd.)’의 지분 50%를 각각 확보하고 아워게임을 공동 경영하게 된다.NHN은 이를 위해 새로 설립하게 될 NHN 글로벌(가칭)과 NHN과 홍콩 PCCS와의 합작법인 NHN-PCCS(HK)를 통해 7천만달러의 현금과 신규 발행될 NHN 주식 383,020주 (주당 발행가 93,747원)를 지급하게 된다. 이 중 현금 4 천 6백만 달러는 6월 30일 이내에 지급될 예정이며, 4백만 달러는 NHN-PCCS(HK)가 지급하고 나머지 2천만 달러는 계약 이후 18개월 이내에 지급키로 했다.NHN의 김범수 대표는 “이번 계약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됨에 따라 NHN은 한´중´일을 아울러 동시접속자수 1백만 명을 확보한 아시아 최대의 인터넷 기업으로 발돋움하게 됐다” 며 ”향후 양 사는 각 사의 게임 개발 기술 및 운영 노하우를 기반으로 중국에서의 시장 지배력을 확대하는데 최선을 다할 것” 이라고 덧붙였다.아워게임은 지난 1998년 한게임과 유사한 캐쥬얼 게임 서비스를 시작한 이래 2004년 4월 말 기준으로 1억 4천만명의 회원과60만 명의 동시접속자수를 보유하고 있는 중국 최대의 온라인 게임 사이트로, 2004년 약 1천6백만 달러의 매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5)우리나라 온라인게임의 중국진출 성공이유한국의 온라인게임은 그래픽 등 기술력이 뛰어난 데다 스토리가 흥미로워 다른 나라의 게임들을 압도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문화적 배경이 비숫하다는 점이 중국인에게 크게 어필하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예컨대 미르의 전설2나 천년은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무협게임. 레드문도 무협과 팬터지를 뒤섞어놓은 작품이다. 중국 내 온라인게임 인프라가 크게 개선된 점도 한국 온라인게임의 현지 진출에 도움이 되고 있다. 현재 중국 내 인터넷 사용자는 4천 만명. 올해 말에는 5천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온라인게임을 주로 하는 PC방이 빠른 속도로 보급되는 점도 주다.
● 디노미네이션에 대한 일반론화폐개혁에 대한 논란은 지난달 28일 영국의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가 우리나라의 화폐단위를 `1유로당 1원'으로 변경하는 방안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10만 원권 발행과 디노미네이션은 그동안 잊을 만 하면 한번씩 등장했으나 약 5년 이내 '경 단위'가 등장할 것이라는 한은의 전망과 맞물려 정치권에서 이에 대한 공론화가 본격화하면서 화폐의 액면 단위축소를 지향하고자 하는 이들과 반대하는 이들 간의 공방으로 점차적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다.디노미네이션은 먼저 일반국민들의 거래, 장부상의 기록 등의 거래상의 효율성을 가져올 수 있으며, 현재 OECD가입 국가 중 화폐단위가 가장 큰 국가가 한국이라는 점을 보았을 때, 자국 통화에 대한 대외적 위상을 제고 할 수 있다. 또한 인플레이션의 기대심리 억제 효과와 퇴장된 자금이 신구의 화폐로의 교환으로 약 400조원의 자금이 양성화 될 수 있다.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화폐의 교체에 따른 막대한 비용, 금융 시스템의 변경, 명목상의 단위절하로 물가상승요인 내재, 화폐단위 변경에 따른 국민들의 불안심리 등의 문제점을 안고 있기도 하다.● 디노미네이션에 대한 나의 개인적 소견반대 의견 중 많은 이들이 화폐교체에 따른 막대한 비용에 대해 이야기 하며, 고액원의 발행으로 대체 하자는 의견을 제시한다.먼저, 디노미네이션과 같이 논란이 되는 고액화폐에 대한 교체 비용이 6000억원이다. 그리고 매년 화폐교환에 따른 비용이 1000억 원 정도 이다. 마지막으로 디노미네이션 실행으로 인한 화폐교체 비용이 2500억 원 정도다. 디노미네이션의 실행으로 인한 실질적인 비용이 1500억 원 정도의 추가비용으로 추정할 수 있다. 결국 고액원의 발행으로 발생되는 비용이 멀지 않아 반드시 필요할 디노미네이션이 실행될 경우 매몰될 것이고, 또 현재의 화폐교환비용을 보았을 때 막대한 비용을 지출 할 필요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또 국가의 국제적 위상의 제고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현재 한국의 화폐인 원은 달러와 유로의 교환비율이 1100~1200분의 1수준으로 후진국과 비슷하다(현재 장기적인 침체에 직면하고 있는 시점이지만, 이는 한국이 가지고 있는 경제적인 문제점 보다는 정치적인 혼란이 가장 큰 원인으로 생각한다). 후진국과 비슷한 통화환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세계적으로 한국의 Name Value가 낮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한국의 얼굴이 되어 줄 수 있는 화폐가 세계적으로 가치가 낮다는 점은 분명 현 화폐의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해 준다.시기상조 또한 논란이 되고 있는데, 화폐개혁에 필요한 기간은 최소한 2~3년 정도이다. 교환 후 화폐단위 명칭, 화폐의 크기와 모양, 현 시스템의 교체 및 화폐의 발행과 교환으로 디노미네이션이 결정되었다 하더라도 상당한 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본다. 1만원의 최고액권과 거래의 액면규모가 현 경제 규모에 맞지 않음을 모두가 인식하고 있다면, 하루 빨리 시행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 경제를 운운하며 차일피일 미루며, 또 언젠간 발등에 불붙어 졸속하게 실행하지 말고, 지금부터 철저한 준비와 시간을 투자하여 시행해야 한다.마지막으로, 화폐개혁의 가장 큰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부분은 바로 거래상의 효율성이다. 지난 62년 화폐개혁이후 소비자 물가는 40배 이상 올랐다. 또 72년 이후 경제의 규모는 20배 이상 커졌다. 연간 약 15%정도 성장하는 민간자산규모는 2009년경 1경원을 돌파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렇듯 경제의 규모는 지속적으로 커져가고 있는 상황에서 42년 전의 화폐를 쓰며, 32년 전 발행되었던 고액권이 현재까지도 사용되어진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사람도 성장하면 옷의 크기를 맞춰 새로 사야 하듯, 경제의 거래수단 중 가장 보편화 되어 있는 화폐라는 옷이 여전히 어릴 적에 입던 옷이라면 당연히 바꿔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