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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문명의 조화-'문명의충돌' 을 읽고 평가A+최고예요
    문명의 충돌서두먼저 똑바로 한번 다 완독하지 못했다는 점이 서운하다. 시험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라 깊이 이해하려고 해도 일일이 머리 속에 넣질 못했다. 저자의 문체는 역시 영어식 문단을 옮겨놓은 것이기 때문에, 국문단으로 이해하려면 다섯 번은 정독해야 할 것 같았다. 또한 내용상의 역사적 이해라든가 지리적 원리, 경제와 정치적 역학 관계 등 학문적으로 부족함을 수없이 느껴야 했으며, 정립이 모호했던 역사의 틀까지도 분명히 해두어야 하는 객관성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책의 깊이를 완벽히 파악하기는 불가능 하였고 전체 내용의 집약적인 헌팅턴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어려움이 많았다.저자의 주장을 내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급변하는 국제 상황 때문이더라도 골고루 의문을 가질 수는 없었지만, 비판적인 시각을 최대가 견지하고 논리를 이해해 나가려고 노력했다. 그의 이야기 속에는 원리와 직관으로 설명하고 설득시키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으며 때문에 앞서 말한 비판의 시야를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아무튼 저자에 비해 새 발의 피와 같은 나의 좁은 지식으로 그의 생각을 탐구해보겠다.모호한 영어식 표현과 언어가 갖는 한계문명의 충돌은 단적으로 얘기해서 서구와 비서구로 양분한 세계가 단순히 이분법적인 잣대를 뒤로하고 다원적인 민족적, 국가적 가치가 등장한다는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 속에는 최근 언론이나 학회에서 주제 삼았던 세계 정세의 변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의 움직임, 중국 등 아시아권의 성장, 제3세계 국가들의 중립 선언, 전쟁을 무릅쓰는 민족 이기, 이들의 문명과 문화 등 다원적인 차원에서 분류되고 정의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루어졌으며 주로 추상 표현들이 이해를 돕고자 했지만 내가 이해하기에는 많은 부족함이 있었다. 저자 또한 문명과 문화의 차이를 기존 학자들의 말을 들어 정의내리고 구분 지으려고 했으나 저자조차도 문명과 문화를 복합적으로 쓰이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과학적, 수학적 분석 과정 없이 세계 관계의 원리적 논리성을 추구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한번 놓친 의미를 다시 떠올리기에는 어려운 고초도 있었다.비록 이 책이 인류학, 정치학, 국제역학, 역사학적인 차원에서 근거를 두고 있으나 크게 사회과학적 원리와 논지를 두고 있는 주제의 한계로 용어와 표현의 다양한 의미 해독이 필요하다. 이는 당연히 영어식 표현에서 갖는 해독의 난해함에도 이어진다. 또한 확실한 규정과 정의 없이 여기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같은 표현들이 이론에 합리성을 두텁게 해주기도 하는 듯 했다.다원화된 문명들의 세계 - 한 길을 보고 있는 세계 문화저자는 오늘날 세계의 국가가 사상 최초로 다극화, 다문명화 되었으며 기술적, 지식적 문명의 현대화는 세계를 보편 문명을 낳지 못했을 뿐더러, 서구가 자처하는 비서구 사회의 서구화를 이룩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서구화에 대한 반응으로 쇄국주의, 케말주의, 개량주의가 있으며 그 중, 민족적 가치 위에 근대화만 받아들이는 개량주의가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현대화라고 주장했다.그렇다면 현재를 살고 있는 서구문명 속의 우리는 서구화된 것이 아닐까? 우리의 문화는 분명 서구화 되어가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문명은 중국 황하 문명의 틀 아래에 있다고 본다. 보편 문명은 낳지 못했지만 보편 문화를 낳아가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가장 이상적인 개량주의의 양식도 서구 문명이 아닌, 서구적 문화에서 기초한다면 케말주의와 다를 게 무엇이 있는가? 우리의 음식문화와 생활문화, 주거 환경도 미국적 양식을 따라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는 문명과 문화의 확실한 차이를 구분해 놓지 못하고 복합적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 나타났다고 본다. 문명과 문화의 큰 차이는 현대에서 갈라놓기 힘들다고 저자는 말한다. 복합적으로 쓰이고 있는 이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용어를 미리 확연하게 규정지어놓는다면 이야기는 틀려질 것이다.변화하는 문명의 균형 - 원래 균형이라 함은 없었다.서구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아시아 문명의 경제력, 군사력, 정치력이 확대되고 이슬람권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인접 국가들의 세력 균형이 위협받게 되면서 비서구문명들이 자기 고유문화의 가치를 내세우고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중국의 경제성장과 아시아 문명권이 일본의 독자적 문명과 예치되어 앞으로 전개되어가는 과정이 세계정세에 큰 변화를 나타낼 것과 분쟁 인접국, 즉 러시아와 이슬람이 동쪽, 유럽의 서쪽이 종교적, 민족적, 인종적 분쟁의 소지가 이슬람 인구 증가로 인해 두드러질 것이라는 예견이다.서구에서 바라본 서구는 쇠퇴하고 있다. 아시아에서 바라본 서구는 쇠퇴하지 않고 미국을 중심으로 일원화 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서구에서 바라본 아시아는 성장하고 있으며 아시아에서 바라본 아시아는 분리되고 분쟁하고 있다. 이는 시각의 차이이다. 헌팅턴은 이 기준을 유럽 중심적, 서구 중심적 경제 및 정치 체제에 두고 있었으며 세계 전쟁을 통하여 패권이 이동했다고 하는 주장도 이 같은 안목에 있는 것이다. 아시아에서 보는 서구는 문명의 고도화를 먼저 이루어 과학적, 경제적 발전의 속도가 처음보다 더디고 있을 뿐이며 늦깎기 출발하는 아시아와 제3세계 국가들은 서구 문명을 기준하여 발전하는 속도가 과거보다 빠른 것뿐이다. 서구사회는 전쟁을 통해 이룩한 경제 발전의 속도가 이후 점진화되어가고 있는 것에 초조함을 느끼는 것뿐이다. 서구의 빠른 발전과 아시아의 더딘 발전이 문명의 균형이라 말하는 것은 서구 우월주의에서 비롯된 태도이다.발칸을 비롯한 이슬람 인접국의 민족 분열은 전쟁 이후에도 말끔히 해결되지 못했던 열강들의 과오에서 벌어진 것이다. 세계 대전과 그 이전 역사 속에서부터 동양으로 뻗으려던 유럽과 남하하려는 러시아 사이에 투르크가 멸망하고 이곳을 서로 빼앗으려던 강대국들의 압력에 못 이기고 민족, 종교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온 것이 발칸 지역 분쟁국이다. 국가는 이미 생성되었고 손대려 하면 할수록 더욱더 꿈틀거리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현대 사회의 수사반장인 양 여기저기 벌려놓은 사태를 수습하려 하는 비판을 듣는 것은 마땅하다. 이슬람의 인구 증가는 예견된 일도 아니오, 접견지역의 분쟁 소지 증가도 이 때문은 아닌 것이다. 애초에 해결이 미흡했던 결과로 발생한 또 하나의 결과이다.문명의 새로운 질서 - 확실한 근거가 모호한 핵심국의 위치문화적 친화력을 갖는 사회들이 서로 협조하며 자기 문명권의 주도국이나 핵심국을 필두로 뭉쳐가고 있다고 저자는 밝혔다. 이념과 강대국을 중심으로 정의되던 제휴 관계가 문화와 문명으로 정의되는 관계로 바뀌고 있으며 정치적 경계가 문화적, 민족적, 종교적 경계와 일치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국가가 갖는 의미가 과거보다 약해지고 있다는 것이다.그 안에 러시아를 핵심국으로 표현하고 문화와 문명의 공감 영역이 확대되어 가고 있는 분단국들을 러시아 주변국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유럽에서 태동한 정교의 문명을 가지고 동유럽의 패권자, 냉전의 주동자로서 군림하다가 경제 난국과 정치 후진성으로 주도국에서 이미 벗어났다. 유럽도 아시아도 아닌 채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버린 러시아는 과거 소련 연방국이었던 인접국가의 간섭에도 확실한 파워를 보이지도 못하고 있다. 이미 패권국에서 역사의 한 켠으로 물러나고 있는 중이다.또한 아시아에서는 중국이, 아프리카에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서반아 지역은 스페인, 힌두지역의 중심은 인도가 해당 문명의 중심국이라고 지적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문명의 새 질서가 탄생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경제 수치나 정치 민주주의에 대한 근거가 부족한 상태에서 문화와 인구, 종교, 역사를 근거 삼아 중심국으로 말하기에는 다소 설득력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중국이 경제부문만 서구화하여 경제난을 해결하고 나아가 아시아를 주도할 중심국으로 발돋움 하고 있다 하더라도 정치 체제의 후진성과 쇄국주의가 언제 어떻게 발목을 잡을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고 서구와 같은 경제 성장을 이루어내려면 빈부의 차, 복지 국가 체제 등의 국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것이다.문명의 충돌 - 문명의 조화(?)문명의 보편성을 자처하는 서구의 자세는 다른 문명, 특히 이슬람 중국과 갈등을 빚고 국지적 차원에서 단층선의 분쟁은 ‘형제국들의 규합’을 통해 확전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에 따른 핵심국의 저지 노력도 두드러진다고 나타난다. 산업화가 근대화의 상징이고 인권, 민주주의 등을 부르짖으며 서구는 세계를 주도하는 입지를 문명의 보편성이라는 개념을 내세워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독후감/창작| 2005.06.24| 4페이지| 1,000원| 조회(1,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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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윤치호의 행적과 사상 평가B괜찮아요
    윤치호, 그는 누구인가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립하고 대한 자강회의 회장을 지냈던 민족독립운동가 윤치호. 격정의 세월 속에서 그가 맞이한 현실과 이상의 혼란으로 사상적 변화를 밟게 된 그의 행적과 뒷모습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 당대 최고 지식인이라 불리우는 민족의 우상에서 친일파란 낙인을 받게 된 계기가 무엇이였으며, 어떻게 그와 같은 모습으로 한국 근현대사에 남게 되었는지 앞으로 살펴보게 된다.윤치호의 일생과 행적1865년(고종 2년) 1월 23일, 충남 아산군 둔포면 신항리에서 판서 윤웅렬의 맏아들로 태어나 17세의 가장 어린나이로 ?신사유람단?에 포함되어 일본으로 파견가게 된다. 뛰어나고 명석한 두뇌를 가져 일찌감치 일본어를 유창하게 하고, 영사관 서기관으로부터 5개월의 단기간에 영어를 배우게 된다. 이듬에 조국으로 돌아온 그는 미국의 초대 주한 공사 푸트 장군의 통역을 맡고 고종을 보필하게 되나, 따르던 김옥균과 서재필의 갑신정변이 3일만에 종식되자 상해로 망명을 떠나게 된다. 상투를 자르고 양복을 차려입은 그는 기독교의 신앙을 갖고 최초의 남감리교인이 되었다. 이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청일전쟁이 일어나 개화당이 정치에 복귀하여 칼바람을 일으키자 친노파 일원들이 황제를 러시아로 옹립하는 아관파천까지 일어나는 대혼란이 일어난다. 이러한 와중에 그는 고종의 힘이 되고자 황제 곁에서 그를 보좌하고 황제는 이를 극진히 치하하게 된다. 이후 서재필이 발간한 독립신문을 인수하고 그의 천부인권 사상을 수용하고 오히려 독립신문을 발전시킨다. 또한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여 러시아 침략 정책을 규탄하고 자주독립의 수호를 주장한다. 이에 불안을 느낀 정부와 수구파는 고종의 자리를 꾀하려 한다는 익명의 전단을 배포하여 고종으로 하여금 독립협회를 해산하고 독립신문을 폐간하도록 한다. 이후 중앙 관직에서 물러나 지방의 여러 감리직을 수행하고 1905년, 이토의 협박과 공갈로 소위 ?한일보호조약?이 체결되고 실질적인 주권을 상실하자 그 역시 정계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후 종교활는다. 옛 선지자들의 현 세계에 대한 예언이 그처럼 사실로 이루어졌다면, 내세에 대한 것도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고 믿는다.?그는 그와 모국에 닥친 현실의 시련을 여느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주여의 락을 즐기며 유희로 잊으려는게 아니라 신앙에 의지했던 것이다.그는 5년동안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밴더빌트와 에모리 대학에서 신학과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명석한 두뇌로 토론회나 강연회에 나가 웅변을 하곤 했다. 당시 동양하면 일본이나 중국을 언급하였기 때문에 한국을 소개하고 선전하는데 주로 힘을 썼다고 한다.5년간의 미국 유학을 마치고 상해로 돌아온 그는 모교에서 영문법 교사로 취직하여 중국상류 출신 마노라 양과 결혼하게 된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김홍집 내각의 개혁 정치가 실시되자 갑신정변 때 유배를 지냈던 사람들이 복직되었고 윤치호도 귀국해 중국부인과 살림을 꾸리게 되었다. 상황은 전보다 더 혼란해져 전봉준의 동학란과 그로 인한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그 사이 명성황후가 참살되는 불상사가 연달아 일어났던 것이다.갑오개혁의 내각이 너무 급박하게 진행되는 와중에, 단발령 등의 반감으로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고 군수들이 참살되는 사건도 일어나게 되자 친러파였던 이완용과 이범진 등이 러시아 군병력을 서울로 난입하고 황제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는 아관파천이 일어난다. 그렇게 순식간에 정부는 또 다른 조직 개편을 맞고 러시아의 보호 아래 정치가 시작되고 윤치호는 고종의 관심 속에서 여전히 중추원 의관직을 맡는다. 그가 황제를 배알하러 공사관에 들어갈 때마다 뒤통수가 부끄럽다고 전했다. 국치적인 수난을 국가와 국가 황제가 당하는 것을 보고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 부끄러웠던 것이다.이 때에 서재필 박사가 미국에서 독립신문 창간의 포부를 안고 귀국한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후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그는 정변의 실패를 민중의 협력 부재로 보았고 그 뜻을 세우기 위해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신문 제작에만 고심한다. 그는 정변의 실패로 인하여 그의 몸은에도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이후 순식간에 친일 인자들의 매국행위로 인해 주권은 일본의 손에 넘어가고 윤치호는 정계에서 물러나 종교 활동과 교육 사업에 주력하게 된다. 기독청년회(YMCA)의 이사로 선임되었고 같은 해 개성에 한영 서원을 설치하여 선교사업과 개몽 교육에 앞장섰다.105인 사건과 윤치호그러던 1911년 부친인 윤웅렬이 세상을 떠나고 데라우치 암살 사건에 휘말려 그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된다. 당시 비밀결사 신민회의 회장으로 가장 명망이 높던 윤치호는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이른바 ?105인 사건?의 6명의 희생자 중 한 명으로 옥살이를 하게 된다. 이 사건은 신의주에서 거행되는 압록강 철교 준공식 도중 누군가 폭탄을 던지려 했다는 이유로 105명의 관련 인사를 체포하였는데 후에 이것이 일본의 자행으로 탄로 나게 되었다. 이는 근본적으로 신민회를 탄압하고, 기독교 지도자를 검거하여 선교사를 몰아내고, 애국 지사와 불평 분자들의 사기를 꺾는다는 무단 정치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3년 간의 복역 후에 얼마나 혹독한 고문을 당했던지 이 후 경찰이나 감옥이라는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치는 듯 얼굴빛이 홱 변했다고 한다. 일제의 조작으로 생긴 105인 사건으로 말미암아 10년형을 구형 받고 3년 만에 특사로 풀려 나온 윤치호는 ?매일신보?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일선 양민족의 동화에 힘써 볼 생각?이라는 뜻을 밝히고 이듬해엔 친일 귀족 친목모임임 대정 친목회의 평의원으로 가입하기까지 했다. 그의 현실을 보는 눈은 이제부터 냉담하게 변해버린 것이다.윤치호, 친일의 대열에서1919년 1월, 고종황제가 숨을 거두고 사인이 제대로 밟혀지지 않음에 따라 이 때부터 강한 민족의 독립운동이 각지에서 일어나게 된다. 28독립선언문을 일본의 유학생들이 발표하고 이에 질세라 국내 민족 대표 33명이 경성의 한 식당에 모인 가운데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일제히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그 해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김규식이 파리 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 극도의 고문에 끝끝내 실토하지 않아 물적 증거가 드러나지 않자 3개월만에 전원 석방되었다.35년 조선교화단체연합회가 결성되어 이사를 맡게된 윤치호는 이것이 일왕의 국민정신작흥조서에 바탕을 둔 국민통합운동이며, 20년대의 일선융화를 내선일체로 옮겨가는 교량이었다. 중일전쟁 이후에 윤치호는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 이사와 동경성 연맹 부이사장을 했고, 일본기청 조선연합회장 등으로 기독교 황민화의 중심역할을 수행한다. 1941년 5월에는 중추원 고문이 되고 45년에는 칙선 귀족원의원에 선임된다. 또한 친일 강연활동에 주력하기도 했다. 동양지광 창간 기념 강연회에서 '내선일체에 대한 소신'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고 중일전쟁이 일어난 이후에는 일본 고위층과 잦은 면담을 갖고 조선의 청년들이 일본군과 하나되어 전쟁에 참여하라는 친일적인 행동을 하기도 하였다.진주만 습격으로 강세한 듯 싶던 전세가 러시아의 맹공과 미국의 본토 공격으로 순식간에 뒤집혀진 일본 제국주의는 결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시킨 미국에 무조건적 항복을 하며 한반도를 조선 민족에게 되돌려 준다.이에 따라 어김없이 등장한 세태의 집권 노력은 80여개 정당을 창당하고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 피를 보는 사태까지 일어나게 된다. 이 와중에 미국의 이승만 박사가 귀국하고 상해의 임시정부도 합법적이진 못하지만 김구를 비롯 대거 인사들이 귀국하여 광복의 기쁨을 나누게 된다.허나 이러한 때도 잠시, 자유민주주의와 사회 공산주의가 다시 정치권을 놓고 대립하다가 결국 남북이 나뉘게되는 결론에 이르고 광복을 맞이한 1945년 12월, 80세의 일기로 윤치호는 생을 마감하게 된다.의 사상 고찰그의 갑작스런 태도 변화는 그를 따르던 이로 하여금 수많은 비난을 사도록 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과 신념은 조금씩 변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1916년부터 숨을 거두기 두해 전인 1943년까지 끊임없이 적어놓은 영어일기에 뚜렷하게 보여지고 있다. 그의 일기는 갑신정변이 발발하기 직전인 1883년부터 1943년까지동화를 강요하고 있으며, 사회경제적으로 수탈하고 차별화 정책을 실행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일본이 조선에 물질적 개선에 의해 조선인들이 부수적으로 이익을 본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인들은 자국의 이주민들을 위해 조선에서 조선인들을 내모는 게 일본의 의도임을 믿음을 주는 일을 해 왔다. 조선인들이 만주의 평야나 시베리아 산림에 가서 새로운 터전을 마련해야 한다면, 대체 뭐 때문에 좋은 도로와 울창한 산림을 고맙게 여기겠나?'그는 냉철히 일본이 저지르고 있는 조선인에 대한 만행, 즉 민족 정기를 말살시키려는 숨겨진 의도까지도 파악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조선인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법령을 만들 수 있는 총독부가 유곽과 부랑자가 늘어나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은 만들 수 없는 걸까? 조선인 부랑자들이 일본인 고리대금업자들에게 대단히 유익하기 때문인 것 같다.'우리 민족이 경제적 우위에 서 있는 일본인들에게 놀아나고 있는 현실은 당연히 빈번했으며 서구의 봉건 체제처럼 빈민층을 이루고 끝없는 수탈을 겪고 있는 것임에 윤치호는 의식을 하고 있었다.'일본이 원하는게 조선인들이 아니라 조선이라면, 누가 총독이 되더라도 어차피 조선에게는 희망이 없다.'이렇게 그는 일본이 조선에게 강요정책을 써가며 내선일체를 주장하는 것처럼 겉으로 표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는 또한 국제 정세를 뛰어나게 바라보며 가까운 미래를 예견하기도 했다.'거창한 이상이 모두 그러하듯 국제연맹이 창설되어 실제 활동에 들어가려면 앞으로도 몇 년은 더 걸릴 것이다. 조선문제는 파리강화회의에서 안건으로 상정되지 않을 것이다. 열강 중 어느 누구도 바보처럼 조선 문제를 거론해 일본의 비위를 거슬리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이 단지 조선에게 독립을 안겨줄 요량으로 일본과 전쟁을 불사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이 말은 상당히 냉철하고 가슴아픈 말이 아닐 수 없다. 그가 바라본 국제적 역학관계는 지금의 우리가 바라보는 시각과 아무런 차이를 두지 않는 현대적인 수준의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이상이 '
    인문/어학| 2004.06.04| 11페이지| 1,000원| 조회(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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