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얼마 전 ‘청소년 문제’ 수업시간에 청소년폭력에 대해 배우면서 비디오를 봤다. 비디오의 내용은 내가 (나 역시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1년 남짓.) 어렴풋하게나마 겪었고 예상할 수 있었던 모습은 아니었다. 물론 매체에서 다루는 ‘문제 상황’은 어느 정도의 과장이 있음을 나도 안다. 솔직히 가히 충격적이었다. 비디오를 보면서 내내 피해아이들의 부모와 가족의 심경은 어떨까. 아니, 그건 둘째치고 본인의 심정과 상처는 이제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들로 머리가 무거웠다. 그렇게 생각하다 마지막에 들은 생각은 저게 내 아이의 모습이라면 이었다. 머리에 뭔 가로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피해학생들은 아무 이유 없이 맞고 있었고 그렇게 정해진 것처럼 굴고있었다. 그 아이들에게 학교는 어떤 곳일까. 나 역시 그 당사자가 되어보지 않고는 모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어른들이 쉴새 없이 늘어놓는 ‘ 꿈을 가지게 해주고 그 꿈을 준비하게 도와주고...’ 이런 곳은 아닐 거라는 사실이다. 학교폭력과 왕따, 인격무시, 주입식 교육.. 우리가 지겹게 들어오던 공교육의 문제들.. 공교육의 한 부분으로 들어서 버린 이 현상들을 어떻게 해야할까. 많은 이들이 오랜 시간동안 공교육의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리고 그 노력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그러나 변한 건 없다. 여전히 19세기 학교 현장에서 20세기 선생님들이 21세기 학생들과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다. 이것이 현실이다. 이제는 학부모들이 나섰다. 그리고 용감하고 현명한 학생들이 나섰다. 부모들은 자녀의 교육권을 지키기 위해, 학생들은 자신이 그리고 자신의 꿈이 모양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이들이 택한 길은 [홈스쿨링]이다.나는 홈스쿨링의 현황과 우리의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아보고자 한다.♤본론☞ 장단점장점1. 자녀의 능력 개발2. 부모와 더욱 친밀해 진다.3. 집단 따돌림에 의한 피해가 없다.4. 배우고 싶은 것을 자세하게 배운다5. 불필요한 것을 배우지 않아서 시간이 절약된다.6. 교과서 외에 다른 면을 보는 법을 가르칠 수 있다.단점1. 사회 적응이 부족하다.2. 친구들과 어울림이 부족하다.3. 독단으로 처리할 수 있으므로 이기적으로 생활한다.☞ 현황* 외국의 현황오늘날 홈스쿨링이 가장 화재가 되고 있는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에서 홈스쿨링을 하는 아이들은 약 150만 명에 이르고 해마다 그 수효는 7-15% 정도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1970년대 이전만 해도 홈스쿨링을 하는 아이들은 소수였으며, 대개는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부모가 자녀를 세속의 나쁜 영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경우였다.홈스쿨링이 미국에서 합법적인 교육과정으로 인정받게 된 계기 역시 종교적인 이유였다. 지난 79년 미국 유타주에서 모르몬교 신도인 농부 존 싱어(John Singer)씨가 종교적인 이유로 아이들을 가정에서 교육하겠다고 주장하며 경찰과 대치하다 경찰의 총에 맞고 사망했다. 이를 계기로 미국에서는 자녀를 교육시켜야 한다는 의무교육과 자녀를 반드시 학교에 보내야 한다는 의무취학'에 대한 구분이 생기면서 대부분의 주에서 홈스쿨링을 하나의 합법적인 교육과정으로 인정하게 됐다. 그러다 공교육에 대한 비판이 거세어지면서 자유학교(Free school)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는 한편 홈스쿨링 운동이 일어났다. 1980년대를 거치면서 홈스쿨링은 하나의 교육운동이자 사회운동으로 확산되어, 최근에는 미국전역에 걸쳐 인기를 끌고 있다.홈스쿨링을 하는 부모들은 함께 연대하여 법정 투쟁과 입법 활동도 많이 하였다. 그 결과 펜실베니아주를 비롯한 많은 주에서 홈스쿨링을 정식 교육으로 인정하고 지원하는 법도 제정되었다. 그리고 홈스쿨링을 할 경우 거주하는 군이나 시 교육 위원회에 신고하고, 최저 수업일수는 180일, 매일 적어도 4시간 30분의 수업을 해야 하며, 반드시 3년마다 평가시험을 치르는 것을 의무화하는 규정도 생겼다.홈스쿨링이 가장 먼저 시작된 미국은 선진화된 홈스쿨링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미국에서의 홈스쿨링은 대부분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무수한 홈스쿨링 단체들이 자료를 제공하고 있으며, 홈스쿨링용 교재도 잘 개발되어 있는 편이다. 홈스쿨링과 관련하여 조언하는 서적도 무더기로 출판되고 있다. 하버드 대학을 비롯한 미국의 250여 개 대학에서는 홈스쿨링을 정식 학력으로 인정해 주고 있으므로 일정한 수학능력적성검사(SAT, GED 등)를 치르고 이들 시험에 합격하기만 하면 대학 진학도 수월한 편이다.영국은 1977년 당시 스무 가정 정도 홈스쿨링을 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1996년 초에는 1만 5천 가정이 홈스쿨링을 실시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대안 교육 이라는 전국 규모의 홈스쿨링 단체가 활동 중이며 홈스쿨링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가고 있다.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2만 가량의 가정이 홈스쿨링을 하고 있으며 캐나다에서는 6만 명이 홈스쿨링을 하고 있는데 이는 학교 갈 나이의 아이들 가운데 백 명 가운데 한 명이 학교에 가지 않고 홈스쿨링을 받는 셈이다.뉴질랜드에서도 취학 연령의 아동 백 명 가운데 한 명 이상 꼴인 7천 명의 아이들이 홈스쿨링을 받고 있다.그밖에 대만에서는 전국적인 홈스쿨링 네트워크가 조직되어 작년 4월에 첫 번째 모임을 가졌다.노르웨이에서는 1990년대 중반 이후 극소수의 가정만이 시도하던 홈스쿨링이 사회적인 이슈로 부각되어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일본의 경우 현재 4만이 넘는 가정이 홈스쿨링을 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프로이센식 교육 에 반기를 든 사람들이 1985년 도쿄슈레 라고 불리는 대안교육 단체를 만들었다. 슈레(shure) 는 그리스어로 정신을 자유롭게 쓰는 곳 이라는 뜻이다. 도쿄슈레는 회원제로 운영하는데 6세부터 21세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회원에 가입해 있다. 회원 가입 조건은 단 한 가지 - 아이가 원해야만 한다는 것. 자유로운 수업방식으로 아이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도쿄슈레의 활동이 널리 알려지면서 일본에서는 여기저기 소규모의 자유학교들이 생겨났고, 일본 문부성(한국의 교육부에 해당하는 기관)에서도 1992년 민간에서의 교육을 인정하게 되었다. 1994년, 도쿄슈레는 또 하나의 시도로 홈슈레 라는 이름의 홈스쿨링 운동을 전개했다.미국 이외의 나라를 보면 지난 97년 현재 영국에는 1만명, 호주에는 2만명, 캐나다는 3만명 정도가 가정에서 홈스쿨링을 통해 교육을 받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홈스쿨링은 획일화된 학교 체제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선택하는데 비해, 일본의 경우 체벌과 이지메(집단 따돌림), 폭력 등의 학교 붕괴 로 불리는 일련의 문제가 홈스쿨링을 시작하는 주요 요인이라는 점이 독특하면서도 우리의 교육 현실과 비슷한 점이다.* 우리나라의 현황우리나라의 경우 1980년대 후반부터 모 교단에서 교리상의 이유로 신도들에게 귀농 및 공동생활을 실시하며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대략 600가정에 달하는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고 농촌에서 교육운동으로서의 홈스쿨링이 미약하나마 시작된 것이다.홈스쿨링을 실시하는 학부모들의 모임인 '가정학교모임'에 따르면 현재 150명 정도가 이 모임에 참가하고 있지만 실제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교육하는 가정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아직 우리나라에선 음성적으로 홈스쿨링이 퍼져가고 있지만 인터넷이나 출판(대표적으로 대안교육 출판잡지인 ‘민들레’)물을 통해서 정보를 교환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그러나 한국인으로서 홈스쿨링을 하는 사람은 소수이기 때문에 자기 확신의 문제에 있어 어려움이 따른다. 특히 한국 문화는 집단 문화이며, 경쟁적인 사회이기 때문에 집단에서 이탈되었을 때 느끼는 소외감이나 불안감이 더욱 커질 수 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결국 대학 입학에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함으로 이어진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아직 홈스쿨링을 위해 잘 개발된 커리큘럼이 나오지 않았고, 제도적인 인정을 받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다. 서구인과 달리 한국인은 대부분 시간 중심이기보다는 행사 중심이거나 일 중심적이면서도 인간 관계에 의해 이끌리는 면이 많기 때문에 홈스쿨링을 체계적으로 시도해나가기가 어렵다. 자연히 부모 개인의 역량에 따라 많은 차이가 나고, 그러다 보니 부모가 부담을 많이 느껴 스스로의 한계 속에서 탈진을 하게 되는 수가 있다.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홈스쿨링의 이유가 공교육의 부적절성의 인식과 학교 붕괴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가운데 법적으로 정부는 홈스쿨링을 인정하지 않고( 교육부 통계 연보에 따르면 지난 4월 현재 초등학교 취학 적령 아동 수는 68만8690명이지만 취학자 총수는 66만9609명으로 1만9081명이 초등학교를 다니지 않고 있다. 교육당국은 이들 대부분이 정신지체, 가정결손 등으로 취학을 못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는 의도적으로 취학을 거부하고 미국 등에서 유행하고 있는 홈스쿨링(재택학습)을 하고 있지만 과태료 처분을 받은 사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홈스쿨링이 학교 형태로 운영되면 3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받기 때문에 인가된 홈스쿨링 학교는 없다. 하지만 올 3월 경기 부천시의 초등학교 학령인 아동 6명의 학부모가 취학을 유예시키고 공동육아협동조합 형태로 시흥시에 '산 어린이학교'란 대안 초등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 ‘학교 부적응자는 문제아’ 라는 인식이 널리 퍼진 사회 분위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게 현실이다.
과 목 : 청소년과 가족“초는 왜 네 개야?”“이제 네 명이 되었다는 기념이지.”작가는 너무 도전적인 내용을 소설 속 인아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풀어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소설 속 덕훈처럼 그런 인아에게 끌려가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읽는 내내 괴로웠다.작가는 변해가는 결혼, 가정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던가. 처음에는 사회적인 현상에 대한 작가의 가치관을 그려내는 소설이라는 생각을 못한 채 인아가 이해가 안 되서 읽는 내내 “뭐 이런 사람이 있지”하면서 불편함을 안고 책을 읽어나갔다. 단지 축구와 연관해서 글을 이끌어가는 작가의 역량에 감탄을 할 뿐이었다. 그렇지만 종반부로 갈수록 분명해지고 첨예해지는 인아와 덕훈의 토론내용에서 잊고 있던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논쟁적이고 급진적인 소재이지만, 분명한건 현재 우리 사회에서도 결혼과 가정에 대해서도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아와 같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할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사회현상은 달라지고 있는데 그 현상을 따라가지 못하는 우리의 시선에 대해 이 책 구석구석에서 나오는 몇 부분만을 가지고 내 생각을 쓰고자 한다.“가정이면 그냥 다 가정인거야.”우리 사회에서는 이미 다양한 형태의 가정이 생겨나고 있다. 재혼을 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로인해 한부모, 재혼가정 등이 생겨나고 있다. 예전에 수강했던 ‘여성과 사회’라는 교양강의에서는 두 여성이 각자의 자녀들을 데리고 함께 살고 있는 모습의 가정도 보았다. 선명하진 않지만 그들 사이에는 ‘엄마’의 역할과 ‘아빠’의 역할을 감당하는 이가 정해져 있었다. 가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집단의 조건이 무엇일까를 묻는다면, 대부분 사람들은 ‘무조건적인 사랑과 신뢰’라고 대답한다. 사람들이 입에서는 ‘한쌍의 남녀 아래.....’이런 조건들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집단이 가정이 될 수 있다면, 앞서 언급했던 두 여성의 경우도 가정이 될 수 있으며 그들 스스로는 이미 가정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그룹홈을 이루고 살고 있는 이들은 그 곳을 가들의 가정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런 다양한 경우들을 볼 때 과연 사회적 인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친다.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가정이라는 말은 어떤 뜻을 갖고 있는가. 미국의 인류학자 머독은 “가족은 공동 거주, 경제적 협동 및 출산을 특징으로 하는 사회 집단이며, 이 집단은 양성의 성인들을 포함하고 적어도 그들 중 두 사람은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성 관계를 유지하며 그리고 한 명 또는 그 이상의 친자녀 혹은 입양된 자녀들로 구성된다” 라고 말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내가 앞서 언급한 두 경우와 이 소설 속의 경우도 가족이 아니다. 그렇지만 현대 우리 사회에서 머독의 정의에 꼭 맞는 가족은 많지 않다. 이미 우리 사회에는 공동거주, 경제적 협동, 출산을 특징으로 하지 않지만 가족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일터나 학업 등을 이유로 가족구성원이 떨어져 살기도 하고, 경제적으로 전혀 협동하지 않고 각자가 독립한 경우도 있으며 출산을 하지 않고 부부만이 살아가는 가족도 있다. 일처다부제의 모습을 띈 소설 속의 가정에는 불편함을 드러내는 나 역시 한부모 가정 등을 생각할 때는 이런 가정이 ‘결손가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는 데는 반대한다.“결손 가정? 가족 구성원 하나 없으면 결손 가정인 거야? 가족 구성원이 이래야 한다고 정해진 건 없잖아. 엄마나 아빠 중 하나가 없어서 결손 가정이면, 아이가 없으면 그것도 결손 가정이야? 결손 가정이란 말에는 편견이 숨어 있어. 가령 핵가족이나 확대가족 같은 용어에는 좋다, 나쁘다 하는 가치판단은 들어있지 않아. 핵가족이 일반적인 형태라고 해서 가족 구성원이 그보다 많은 확대 가족이 비정상적인 거라고 생각하진 않잖아. 하지만 결손 가정이란 용어는 그렇지 않거든. 뭔가 결여된 비정상적인 가정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말이잖아. 구성원이 덜 있건 더 있건 가정이면 그냥 다 가정인거야.” 이 부분은 내가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동의하는 인아의 말이다. 결손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으며 우리 사회에서는 결손가정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부정적인 사회적 사건에 연관되어 사용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결손가정을 바라보는 시각은 두 가지 인데, 하나는 도와줘야 할 불쌍한 대상이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비행 청소년들을 양산해내는 곳이라는 시각이다. 소설 속에서도 덕훈은 결손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비뚤어진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비행 청소년은 가족 구성원과는 관계없이 다른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다. 심리적 요인이나 양육방식 등 말이다. 우리가 결손가정이라고 부르는 그들을 향한 우리의 시각이 달라질 수 없을까. 나는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안의 청소년들을 생각한다면 그 가정은 결손가정이 아니라 그냥 가정이다. 미국의 경우 한부모 가족이 20%에 달하며 우리나라도 10%에 이른다. 그리고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이다. 이 때문에 최근 미국 사회사업 협회에서는 가족에 대해 ‘자신들 스스로가 가족으로 생각하면서 전형적인 가족 임무를 수행하는 2인 이상의 사람들’이라고 정의했다. ‘스스로가 가족으로 생각한다’라는 것이 매우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 살아가면서 사회의 시각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지만 타인의 시각이나 인정보다는 자신 스스로가 가족으로 생각하는 범위와 조건은 무엇인가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 소수를 향해 항상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사회 속에서 우리 청소년들이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설령 자신이 남들이 말하는 결손가정에 속해있다 할지라도, 자신의 가정에서 무조건적인 사랑과 신뢰를 찾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외형적으로는 정상적인 가정이라 할지라도 사랑과 신뢰를 찾기 힘든 가정들도 무수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사랑과 신뢰이지 가족 구성원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다만 나는 차가운 사회의 시선이 한부모 가정의 청소년들에게 상처가 되어 가슴에 꽂히길 바라지 않는다. 사회는 변하고 있는데 우리의 생각은 그 속도를 따라가고 있지 못하다. 그 차이가 차별이 되어 한부모 가정의 청소년들에게 적용되지 않길 바란다. 가정의 조건은 무조건적인 사랑과 신뢰이다. 우리 사회는 그들을 그냥 가정으로 바라봐줘야 한다. 진정으로 그들의 행복을 바란다면 말이다.
과 목 : 청소년과 가족“행복이 뭔 줄 아냐? 지금처럼 이렇게 심장이 쿵쾅쿵쾅 거리는 거야.”우리 청소년들의 행복을 그린 영화, 그들이 행복하길 바라는 영화.동성애나 성적정체감에 혼란을 겪는 사람들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나이기에 영화가 불편한 것이 사실이었다. 작은 행동, 표정 하나하나에서까지 여자인 동구역을 분하고 있는 류덕환이 대단하다는 생각만이 지배적이었다.그렇지만 나는 영화 속에 나오는 청소년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그렇게 관점을 바꾸고 나서, 나는 여자가 되는 자신의 꿈을 위해 가장 남성다운 일들을 통해 돈을 모으는 오동구를 만났다. 동구는 자신을 여자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천상여자다. 그리고 여자로 수술하기 위해 500만원을 모으고 있는 동구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남성성을 이용하여 돈을 벌고 있다. 막노동을 한다던가 씨름을 시작하는 것도 모두 남성성을 이용하는 생활 아닌가. 이런 부분들은 이 영화가 본질적으로 동성애나 이성애자의 반대편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고자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했다. 단지 한 청소년의 꿈을 소중히 그리고 있는 것뿐이었다. 이는 나의 불편함을 가볍게 해주었다.영화에서는 동구의 가정, 학교, 친구 등의 배경을 상세히 그리고 있다. 청소년의 이러한 배경들은 성장과정에서 엄청난 영향을 준다. 동구의 가정은 사회적으로 보면 한마디로 깨어진 가정이다. 아빠를 피해 집을 나간 엄마, 직장에서 쫓겨나고 술과 폭력을 일삼는 아빠, 자신보다 어리기 때문에 책임져야할 동생, 이 가운데서 동구는 엄마를 계속 만나며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엄마를 이해하려고 애쓰며 실제로 이해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엄마와 친구같이 지내려고 노력하고 자신의 꿈을 엄마에게 이해받고 싶어 한다. 결국에는 엄마가 동구의 꿈을 인정해준다. 이 장면에서 감동을 받았는데, 동구의 꿈의 특수성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꿈을 지지해주고 믿어주는 부모를 갖는다는 것이 축복받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동구의 아빠는 이해가 안가는 인물이지만, 동구에게는 크고 작게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다. 폭력적인 아빠 앞에서 동구는 책임감을 가지고 참고 아빠를 대한다. 여느 아들 녀석처럼 반항하거나 피해서 집을 나와 버리는 것이 아니라 끝가지 가정을 지키며 동생을 말리기도 한다. 여기서 나는 맏아들이 아닌 맏딸의 동구를 보았다. 가정 안에서 자신의 위치와 할일을 배워가는 동구였다. 끝내 아빠는 사장을 때리고 제대로 사고를 치는데 동구는 결국 현실적으로 타협을 하고 가정을 지킨다. 이 과정에서 동구는 수치와 억울함, 원망 등을 배웠을 것이다. 아빠 덕분에 사회를 알아가고 있는 동구. 이 장면에서 기독교인 사장 내외가 보여주는 모습은 매우 이중적인데 사회 비판적인 감독의 시선은 역시 동구의 시선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청소년기는 자신 안에서 사회라는 밖으로 나가는 과정에서 보게 되는 여러 가지 사회모습을 현실적으로 알게 되는 시기이다. 이 장면은 청소년들의 그런 시선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학교에서 동구는 우정과 사랑을 경험한다. 동구의 사랑의 대상은 일본어 선생님이다. 동구는 그 선생님을 보며 자신의 정체성을 200% 확고히 세운다. 상상 속에서 선생님에게 첫 멘스를 축하받는 부분은 동구의 성정체성과 사랑의 욕구가 최고로 결합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선생님 꿈을 꾸며 몽정을 하는 모습, 몽정한 속옷을 울며 빠는 모습은 자신의 꿈과 너무나 먼 현실을 보며 괴로워하는 감정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우리는 자신의 꿈과는 너무나 다른 현실 때문에 울부짖고 괴로워하지 않는가. 그리고 일본어 선생님이 결혼한다는 소식에 당당하게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는 동구를 보며 사랑에 있어서도 과정 속에서 걸어가는 동구를 보았다. 동구는 아주 친한 친구를 두었는데, 작은 부분이지만 그리고 가벼워 보이지만 동구의 현 모습을 가장 잘 받아들여주는 그는 동구에게 가장 고맙고 편안한 상대일 것이다. 여자 옷을 입고 싶어 하는 동구에게 누나의 옷을 빌려주고 동구를 여자로 대하며 여자이길 원하는, 아니 자신은 여자라고 생각하는 동구를 있는 그대로 대해준다. 나는 이 친구에게서 청소년들의 혼란스러운 진로 결정하기 과정을 보았다. 청소년 중 누가 한번에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잘 정할 수 있을까. 이 아이는 항상 동구 앞에서 “드디어 내 갈 길을 정했다”며 RCY에서 신문기자로, 다시 씨름으로, 또다시 래퍼로 길을 바꿔가며 자신을 탐색한다. 이 모습이 우습기도 하지만 청소년들은 이만큼 혼란스러워하며 자신의 진로를 탐색하고 있다. 우리는 이 과정을 지켜봐주고 격려해줘야 할 것이다.다음으로는 몇 가지 대사를 통해 집중해보고자 한다. 동구엄마가 동구아빠에게 “동구는 자신을 사랑해. 그래서 나는 그 모습이 너무 대견하고 지켜주고 싶어.”라고 한다. 자신을 사랑하는 동구. 청소년기에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겉에서 보기에는 자아상이 찌그러져있다. 그들은 자신은 부족하고 모자란 존재이고 미숙한 존재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말하고 행동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에서는 자신을 너무나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이 너무 소중해서 자신의 꿈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한다. 대충 정하지 않고 고려하고 또 고려한다. 그리고 또 소중한 자신을 나타내고 지키기 위해 친구를 만들며 웃고 떠든다. 동구의 엄마는 동구의 이런 내면을 알고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동구를 지지해주고 싶다고.. 너무나 부모다운 자세인 것 같다. 또 동구엄마는 동구의 꿈을 인정해주면서 자신은 지금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며 살아가서 너무 행복하다며 “남들 눈에 보이는 것을 신경 쓰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는 삶을 살아야 해.” 라고 말해준다. 이 대사를 듣는 순간, 이 영화의 메시지를 알게 되었다. 남들 기준에 맞추지 말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는 것. 수많은 영화에서 전달하는 메시지가 이것이 아닌가. 다만 이 영화에서는 시각을 청소년으로 잡았다는 것과 소재가 특이하다는 것 뿐. 청소년기는 어느 시기보다 타인의 평가를 신경 쓰는 때 아닌가. 이로 인해 자칫 청소년들의 꿈이 다칠까봐 적절한 조언을 해줄 존재가 필요하다. 청소년들의 장래희망은 무엇일까. 무엇이 되고 싶은 걸까. 그것은 직업의 문제가 아니다. 동구의 외침대로 청소년들은 그저 살고 싶은 것뿐이다. 그들은 그저 행복하게 잘 살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외치고 있는 청소년들을 어떻게 도와줘야 할 것인가. 씨름부 감독님이 명답을 제시한다. 결승전에 올라간 동구와 선배에게 “행복이 뭔 줄 아냐? 지금처럼 이렇게 심장이 쿵쾅쿵쾅 거리는 거야.” 라고 한다. 나도 내가 사랑하는 청소년들에게 살아있는 것이 행복이며 심장이 쿵쾅거리는 그 일을 해야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과 목 : 청소년활동제 목 : 청소년활동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제 출 일 : 5월 2일청소년활동은 청소년, 그들에게 경험이다. 존 듀이가 경험=삶이라고 말했듯이 나 역시 그와 같은 맥락에서 청소년활동을 바라보고 있다.청소년활동은 어떤 의도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청소년들에게 활동을 통해 어떤 가시적인 변화나 학습결과를 보려고 하는 것은 내가 말하는 청소년활동이 아니다. 활동의 목적과 수단은 하나의 큰 과정인 경험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청소년활동의 목적과 수단은 경험 안에 있을 때 의미가 있고 존재할 가치가 있는 것이지, 경험과 따로 떨어져서는 대단한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해도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 ‘좋은’ 청소년활동이라고 말할 수 없다.그러나 내가 존 듀이의 ‘경험=삶’에 동의한다고 해서 청소년활동을 굉장히 거창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이 겪는 하나하나의 활동들이 청소년들에겐 경험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경험’이라는 것과 ‘경험은 그것을 겪은 사람들에게 남는다.’는 것이다. 활동은 경험 자체이다. ‘겪었다는 자체’가 청소년들에겐 소중한 것이 된다. 그것이 문화감성, 과학정보, 사회봉사, 모험개척, 자기계발, 국제교류 중 어느 것이 되었든 간에, 그리고 여기에 속할 수 없을 것 같은 시시한 것일지라도 청소년들에게 활동으로 불리고 그 안에 남아있고 기억된다면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 청소년활동이 될 수 있겠다. 나는 청소년활동의 정의는 내리지 못하겠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경험’이며, 위에서 말했듯이 ‘경험은 그것은 겪어본 사람들에게는 남아있다’는 것이다.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청소년활동은 동아리활동만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겼고, 좋은 활동은 활동의 과정에서 목적과 수단이 분명해야 하며 활동 후에 교훈적인 결과물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난겨울 실습을 하면서 청소년활동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은 변해왔다. 짜임새 있게 준비된 프로그램이나 뚜렷하고 교훈적인 목적 없이도 행복해하고 긍정적으로 변해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내가 찾아 헤맸던 청소년활동의 참모습을 만났다는 생각을 했다. 그곳에는 촘촘하게 준비된 프로그램 계획서나 일정표는 없었다. 함께 하는 지도자들조차 다음번에 무엇을 하게 될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그 시간을 ‘놀이’라고 표현했으며 ‘신나게 노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다. 지도자의 역할은 ‘함께 하고 함께 놀고 함께 경험하는 것’이지, 조금이라도 먼저 앞서나가서 이끈다거나 계산된 아이들의 변화상을 그리며 다분히 의도적인 언행을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더불어 일반 현장에서 활동의 목적이 지도자의 ‘의도’로 변질되는 것이 매우 쉽고 위험한 것임을 또한 깨달았다. 활동의 목적은 처음부터 ‘이랬던 아이를 저렇게 변화시키자’ 혹은 ‘이러이러한 결과물을 만들어내자’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서 최선을 다해 경험하자’가 되어야 한다. ‘거기서 그치느냐?’고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수많은 현장에서 ‘경험만 하면 뭐하냐? 남는 게 있어야한다.’라는 식으로 지도자 혹은 기관의 의도에 맞게 어떤 식으로든 더 개입하려고 하는데, 청소년들에게 활동거리를 주었고 그들이 활동을 했다면(즉, 경험했다면) 거기서 ‘그만’이다. 남는 게 있어야한다고 외친다면, 남는 건 당연히 있다. 바로 경험이다. 경험은 그것을 겪은 사람에게 남는다. 그리고 그 남은 경험이 후에 그 청소년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우리의 몫이 아니라고 본다. 청소년들은 우리 지도자들과 항상 함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매일의 생활 전반에, 그리고 그들의 평생에 함께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활동이 되었든 간에, 그 현재에 온전히 집중해서 최선을 다해 경험했다면 그것이 청소년들에게는 남는 것이고 선물이 된다. 청소년들과 ‘함께 하는 것’이 청소년활동에서 지도자의 역할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지도자들이 명심해야할 점이 있다. 바로 ‘사랑’이다. 청소년이 아닌, 우리 지도자들은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 그 사랑을 밑바탕으로 청소년과 함께 하는 것이다. 그들은 단순한 활동거리를 경험하고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범벅이 된 활동장면 전체를 경험하고 가는 것이다. 청소년활동장면에는 청소년을 사랑하는 지도자들이 있어야 한다. 너무 사랑해서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대로 자라주길 바라고 개입하고 보호 육성하려는 지도자들이 아니라, 비뚤어지고 못된 지금의 그들 모습 그대로를 그냥 한 사람으로서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지도자들이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 청소년들에게는 고스란히 그 활동장면이 남아있게 된다. 지도자들의 사랑은 의식하지 못한 채 그 활동거리만 기억 속에 남아있다 할지라도 지도자의 무한한 사랑은 활동거리에 녹아들어가서 활동장면을 더 아름답게 남게 한다.청소년 활동을 경험으로서의 활동으로 보는 시각은 너무 이상적이며 실제상황에서는 불가능한 것이고 비판받고 있지만 내가 겪은 현장은 그렇지 않았다. 현장에서 듣게 된 이야기이다. 어른들이 흔히 말하는 비행청소년들과 함께 한 캠프였다. 캠프기간 내내 아이들은 담배와 술로 제대로 캠프 순서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 기관에서 항상 하는 순서 중 하나는 모닥불을 직접 피워서 고구마랑 가래떡이랑 소시지랑 닭을 구워먹는 것이다. 이 캠프에서도 그 순서는 당연히 있었다. 아이들은 함께 했었다. 그렇지만 집에 돌아가는 시간까지도 아이들은 라이터로 숙소 천장을 그을려놓았고 빌린 장소를 그렇게 만들었으니 지도자들은 속이 까맣게 탔다고 한다. 그렇게 그 아이들과 헤어지고 몇 년이 지나서 한 지도자가 전화를 받았다. 어떤 남자청소년이 자신은 몇 년 전 캠프에 참가했던 누구인데 지금 손에 칼을 들고 있고 자기 아내가 밤이 늦었는데 집에 안들어오고 있다고 계속 울고 있는 아기를 죽이고 아내도 찾아나서서 죽이고 자기도 죽을거라고 고함을 치고 있었다. 기억을 겨우 되살려 전화 건 아이가 누구인지 알았고 당황한 지도자는 무슨 일이냐고 침착하게 상황을 물었다. 그 청소년은 사고를 쳐서 여자친구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고 같이 살고 있는데 여자친구가 어리다보니 밤에 자주 나가 놀고 항상 아기는 잘 돌봐지지 않은 채 통화를 하는 중에도 옆에서 계속 울고 있었다. 그 아이는 울부짖으면서 그때 캠프에서 모닥불에 닭이랑 고구마랑 그렇게 구워먹고 놀면 뭐하냐며 다 소용없다고 지금 자기 생활은 이 모양이 되었다고 소리쳤다. 지도자는 청소년상담원에 선생님과 그 아이를 연결시켜주었고 경찰과 함께 상담 선생님이 그 아이 집에 갔을 때 그 아이는 정말 손에 식칼을 들고 서있었다고 한다. 사건은 잘 해결되었다고 한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경험은 남는다는 것이다. 그 캠프 후에 이 아이가 어떻게 살았는지, 변했는지 아님 변하려고 노력은 했는지 등등은 중요치 않다. 급박한 상황에서 절박하고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그 아이는 몇 년 전 그 캠프 떠올렸다는 것이다. 지레 짐작인지는 몰라도 지옥같이 힘들었을 생활 중에 행복한 기억의 조각이 그 캠프였다는 것이다. 의지할 곳도 전화할 곳도 없던 그 아이는 자신을 말려줄 사람을 찾다가 그 기관에 전화를 한 것이다.(이 기관은 지도자 개인 휴대폰 번호는 외부에 알리지 않는다. 기관 대표전화를 담당지도자 핸드폰으로 연결해 둔다.) 이 에피소드에서 알 수 있듯이, 한번의 활동은 청소년에게 경미한 변화도 주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청소년활동은 이렇듯이 청소년들의 가슴속에 남는 것이다. 경험은 그것을 겪은 사람들에게 남는다.
과 에서의 소외의 홀든 콜필드와 영화 는 닮아있다. 홀든은 에서 어느 등장인물과가 아닌, 영화와 닮아있다.17세인 홀든에 있어 유일하게 속할 수 있는 두 집단으로부터의 소외. (학교에서의 퇴학과 집안 분위기와의 부조화.) 그리고 홀든은 자신과 만나게 되는 사람의 관계에서도 소외감을 갖는다. 앤톨리니 선생, 스펜서 선생, 애클리, 스트라드레이터, 셀리와의 만남에서 홀든은 그들과 관계를 맺고 대화를 진행하지만 그들을 엉터리라고 여기며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들과의 관계에서 홀든은 소외감을 느끼고 있는것이다.에서의 소외는 어떤모습으로 그려지는가. 이 영화에서는 [소외]가 전부이다. [소외]로 시작하고 그것이 마지막이다. 어떤 점에서 알수있을까. 이 영화의 감독인 정재은 감독은 “개 중심인 한국사회에서 고양이는 마이너리티이고 소외된 동물”이라고 말했다. 야생동물과 애완동물의 ‘사이’에 놓인 고양이의 처지는 어른도 아이도 아닌 중간자의 위치에서 제 꿈을 다 펼치지 못하는 다섯친구들의 모습을 닮았다. 들어오고 나가는 이주민들이 많은 ‘인천’이라는 공간도, 밀입국자들의 부유하는 처지도 크게 다르지 않다.에서 홀든의 근본적인 갈등문제는 자신의 생활과 외적환경인 사회생활에서 타인에 대한 진실한 관심과 사랑을 추구하는 그의 내적가치관을 지키려는 과정에서 비롯된다. 즉 홀든의 사고에는 허위와 순수라는 두 가지의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요소가 있다. 그는 자신의 자아개념의 세계와 다른, 이기적인 행동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과는 인간적 교류를 단절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자아개념을 실현하기 위한 곳을 찾지만 그러한 곳을 그가 속해있는 환경에서는 찾지 못한다. 홀든은 그가 속해 있는 사회의 가치관 때문에 소외감을 느낀다. 그는 한 인간으로서, 그가 살고있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속해지기를 바라지만 자신의 자아개념인 내적가치관과 외적가치관의 차이 때문에 그의 소외감과 갈등은 더욱 심화된다. 그는 갈등의 해결책으로서 반항을 하기도하며 도피를 하기도한다. 그래서 그가 속한 사회의 현실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유로운 곳을 찾는다. 즉, 홀든이 낭떠러지 가까이에 놀고있는 아이들을 돌봐주는 파수꾼의 역할을 수행할것과 그가 생각하는 복잡하고 위선적인 기성세계에 머물 것을 거부하고 정신적 안정의 구원을 찾아 '서부의 숲 속에 작은 오두막'으로의 생활을 꿈꾸는 것은 기성세대에 대한 거부와 학교와 사회에 대한 거부인 것이다.에서는 창가에 앉아 창 밖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고양이. 그러다 문득 고양이가 창 밖으로 나가는데 여기서 창은 세상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선이다. 인간은 누구나 일정시기가 되면 세상 밖으로 나가게 된다. 세상 안에서 바라보던 세상 밖과 실제의 세상 밖은 너무나 다르다. 그 차이를 절감하며‘스무살’들은 방황과 갈등 속에 ‘소외’를 느낀다. 세상이라는 거친파도에 의해서 그들의 우정에도 금이 가고, 학교라는 울타리가 그들을 보호할 때 그들은 항상 하나였지만, 세상 밖으로 나와 보니 그들은 한 명의 개개인이었다. 영화 속 한 장면에서 주인공들은 쇼핑을 하던 중 제각각의 관심사를 따라 한 명씩 흩어져간다. 그들은 친구였고 지금도 친구이지만 스무살의 우리 각자에겐 자신만의 꿈과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증권회사에 입사한 혜주는 능력있는 커리어 우먼을, 그림을 잘그리는 지영은 텍스타일 디자이너를, 항상 엉뚱한 태희는 선원을 꿈꾼다. 그리고 나름의 방법으로 꿈에 다가서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그들의 노력하는 방법은 한마디로 ‘순수함’이다. 아직 사회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그래서 아직은 순수함이 뭍어있는 나이, 스무살이기 때문에 태희는 뇌성마비인 시인을 좋아하고, 지영은 어려운 가정형편에 유학을 꿈꾼다. 혜주는 “나 다음에는 눈도 찢고 코도 살짝 높일까봐. 난 내가 바꿀 수 있을 만큼 바꿀거야.”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변화로 성공하기를 꿈꾼다. 그렇지만 이 모든 일들은 현실에 부딪쳐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들이 꿈꾸는 현실과 실제의 현실은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다. 혜주는 대학을 나오지 않은것이, 지영은 집안의 가난이, 그리고 태희는 가족들의 무관심이 그들을 꿈에서 한 발자국씩 멀어지게 한다. 사회에 대해 아직 잘 모르기 때문에 기대를 갖고, 어쩌면 그 기대로 인하여 더욱 아픔과 실망이 클 수도 있는 의 20대의 방황, 스무살의 고민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속에서 어떻게 갈등을 극복할 것인가 하는 질문들을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홀든과 스무살 고양이들은 세상을 고운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아니, 그들은 마이너리티이므로 고운시선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세상에 반항하지 않는다. 홀든은 의식적으로는 반항을 하지만 그의 의식에는 행동지침이 없는 듯하다. 그 예로써, 홀든이 몹시 싫어하는 스트라드레이터의 작문숙제를 해주었다는 것과 셀리가 그녀의 아버지에게 자기가 그녀를 울렸다고 이를까봐 걱정하는 것, 스펜서의 충고 중에서 인생은 규칙이고 누구든지 그 규칙에 따라야 한다는 말에 그는 모두가 훌륭한 학생이면 그 말이 성립되겠지만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란 생각으로 그의 말에 대하여 의식적으로는 역겨워하지만 홀든은 가만히 그의 말을 듣는 것과 장갑에 대한 상상부분에서 누가 훔쳐가도 그는 두려움 때문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는 않는 것, 디비의 옛 친구인 릴리언과의 만남에서도 그녀에게 허식성을 느끼지만 아무런 거부의 행위를 하지 않는 것 등 홀든은 세계와 자신 사이의 괴리감은 인식하지만 그는 그것에 반항하는 행동은 보이지 않는다. ‘스무살’들 역시 자신들을 잘 받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해 반항하기보다는 낙담하고 슬퍼하고 안타까워 할 뿐이다. 태희와 지영이 길을 가다가 미친여자를 만나는데 다시 등장하지 않는 이 여자를 스쳐 지나가면서 지영은 “나도 저렇게 미쳐버리지나 않을지 겁이나”라고 말한다. 지영은 미친여자를 보면서 그녀와 닮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녀 역시 자신처럼 세상에 속하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말은 자신이 미치는 것이 두려운 것보다 미치지 않고 제도 안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욕망을 말해 준다. 이렇게 아직 스무 살의 그녀들은 사회권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다. 이 욕망이 바로 자신들을 포용해주지 않는 세상을 향한 그녀들의 태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