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화 과정☆1. 서론서양 중세사회 사람들의 행동양식은 현재 서양인들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중세에는 문명 혹은 매너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발생하고 자리를 잡아가게 된다. 그를 문명화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양의 문명화과정은 대체로 12-15세기, 16-18세기 전반, 18세기 후반-20세기 등 3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엘리아스는 이들 각 시기를 주도해갔던 세력을 각각 전사(기사), 궁정귀족, 시민계급으로 보고 이들의 자아의식과 사회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행동을 총괄하는 개념으로 각각 '쿠르투아지'(courtoisie), 시빌리테(civilite) 시빌리자숑(civilization) 에 주목하였다. 쿠르투아지 (궁정예절)는 바로 봉건궁정에서 외부의 강요에 의해 형성되었던 기사들의 행동양식이었던 것이며 이는 12세기부터 17세기 근대 절대주의국가가 형성될 때까지 전개되고 점점 강화되었다. 전사계급 전체의 소유였던 독점권은 소수의 몇 사람들에게로 나누어지고 결국 물리적 폭력과 조세독점권을 장악한 왕으로 집중되어 갔으며 전사(기사)들은 점점 궁정화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16세기부터 가속화되어 점점 더 많은 수의 전사들이 궁정귀족이 되고 이들은 왕과 주종관계를 형성하였다. 이때 등장하는 좀더 세련된 행동양식과 일상의례를 가리키는 개념이 바로 시빌리테 (예절)였다.18세기 후반 시민계급이 성장하고 이들 시민계급 상층부가 궁정사회와 교류하며 궁정귀족들의 생활양식을 수용하면서 또 한번 변화가 일어났다. 수치심과 불쾌감의 한계점이 점점 낮아지고 내면적인 통제는 점점 강해졌으며 행동은 점점 세련되고 섬세해져 갔던 것이다. 시빌리자숑(문명) 이라는 개념이 시빌리테 를 대체하기 시작한 시기도 이때였다. 한편 독일에서는 민족적 성격을 지니면서 학문과 종교, 예술 등 정신적 업적만을 지칭하는 문화 라는 개념이 문명 과 대립하며 따로 등장하기도 하였다.엘리아스는 현재 서양사회에서 교양있는 또는 문명화되었다 고 생각하는 행동의 모델들이 이미 시빌 다름을 지적하고 독일에서 문화와 문명이 대립하게 사회적 기원과 프랑스에서 문명 개념이 발생하게 된 근거를 살펴보고 있다. 제2부에서는 예법서를 주 텍스트로 하여 12세부터 19세기까지의 문명화과정을 식사 중의 행동, 생리적 욕구나 코풀고 침뱉는 행위 등 일상행동과 의례를 중심으로 세밀하게 고찰하고 있다. 제3부에서는 문명화과정의 사회발생적 기원을 봉건제도의 해체와 근대 국가 발생과 연관지어 설명하고 마지막에 자신의 이론을 문명화이론의 초안 이라는 제목으로 정리하고 있다. 서양의 소위 매너라는것은 언제 생겨났는가? 또한 어떤 것들이 있는가? 에 대해 물음을 가지고 여기에서의 2부 인간행동의 특수한 변화로서의 문명 중의 많은 예와 그중에서 《공격욕의 변화》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2. 본론인간은 다양한 본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교육을 통한, 또는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기에 모조리 본능대로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의 본능 중에서 공격욕 역시 중세에는 자유분망하게 표출 되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 계기(여기서는 절대궁정 시대라 정한다.)를 통하여 자제되고 직접적이 던 것이 간접적으로 변하게 된다.엘리아스는 공격욕과 관련된 정서적 구조의 변화를 중앙권력의 형성과 연결시킨다. 엘리아스에 따르면 15세기경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사적인 감정이나 가족 간의 보복을 위해 쉽게 칼을 잡았다. 폭력은 범죄가 아니라 살아가는 방법이자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봉건영주들이 난립하고 있던 중세사회에서 자신의 감정을 자제하고 공격욕을 억제한다는 것은 곧 그에게 죽음을 의미하거나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었을 것이라고 엘리아스는 말한다. 따라서 이들이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살기 위한 기본적인 행위이고 나름대로의 목적합리성을 가진 행위다. 이는 일정한 이를 방지하기 위한 제도나 권력이 집중되어 있지 않아 무분별하게 이루어지게 된다. 중세에는 전쟁에서 포로학대에 대한 희열이나 돈이 중하게 되면서 포로를 데리고 있기에는 물질적 요소가 많이 들므로 석방금을 낼 수 있는 자에서는 16세기의 한 예로 12마리에서 24마리의 고양이를 산 채로 불태우는 의식을 설명하며 산 동물을 학대하는 것이 아무런 목적없이 적나라하게 표출되는 욕구표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오늘날 16세기 예처럼 하고 욕구표출을 한다면 이상한 취급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고 현대사회에서 공격적인 행동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현대의 전쟁에서 나타나듯이 인간의 공격욕은 컴퓨터 등의 기계를 사용하여 훨씬 더 계산적이고 비인격적인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다.어떤 면에서 보면 중세에는 본능과 감정들이 지금보다 더 자유롭게 표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굳이 나쁘게 보이고 장인하게 보이는 것은 이시대의 윤리가 그렇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대에는 이것이 오히려 당연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인간의 공격욕의 변화는 중세 때까지만 하여도 무분별하게 그것이 표출 되었으나 권력이 집중되는 절대주의 시기부터 그것들이 억제되고 절제되며, 간접적으로 표출되게 되며 그 후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세련화되고 문명화되어 오늘날에 까지 이르는 것이다.13세기의 식사중에 행동에 대해 언급한 것을 살펴보면 식사 당시 즉, 식사를 하면서 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하여 표현이 되어 있다 이것은 당시 상류층의 행동을 순수한 형태 그대로를 보여준다. 하지만 15세기로 넘어가게 되면 식사 중 외에도 식사 전의 예절을 언급하고 있음 살펴볼 수 있다. 이 두 표현으로 중세 사람들의 식사예절이 어떠하였는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당연하다고 생각될 예절이 중세에는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중세 사람들은 예절이란 것을 몰랐던 것이다. 16세기에 들어서면 에라스무스의 「어린이들의 예절에 관하여」에서 말하는 것을 예시로 나타내고 있다. 이 중에 살펴볼 것은 음식을 포크나 나이프로 집는 것과 자신의 앞에 있는 음식만을 집으라는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르게 손가락으로 집을 수 없는 음식은 접시로 덜어라는 표현에서 아직도 이들은 손가락으로 음식을 먹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16세기가 식사중의 예 시작되는 것에 에라스무스가 말한 소변이나 대변을 보는 사람에 대한 태도에서 중세사람들은 생리적 욕구에 대한 수치심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에라스무스는 이야기를 통해서 16세기에서부터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다는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도 불안전한 것으로 당시 사람들이 생리적 욕구를 참게하여 수치심을 없애게 하는 것을 보인다. 그러한 점을 당시 지식인들은 참지 말고 사람이 없는 곳에서 해결하도록 제시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신체부위를 노출하는 것은 삼가도록 하고 있으며, 생리적인 현상을 가릴 수 있는 대체로 기침을 제시하고 있다.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에는 생리적 현상의 용무를 보기 위해 지정된 적당한 장소로 가라는 것을 보았을 때 이 시기 전까지는 장소가 불분명해서 사람을 피할 수 있는 곳에서면 가능하다고 생각이 되어진 것 같다. 18세기에 와서는 생리적 현상을 소리 없이 하더라도 사람이 어울리는 자리에서 행함을 비판하고 있다. 또한 생리 욕구에 관한 이야기조차도 예의에 어긋남을 말하며, 용무를 마치고 가는 사람에게 못 본 척 할 것을 말한다. 이처럼 18세기에 오게 되면 생리적 욕구에 관한 태도의 변화에 있어 생리적 욕구를 남 앞에서 보이는 것이 예절이 아님을 정착시키므로써 예의에 관한 규제와 구속이 점점 늘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코를 푸는 행위에 관하여는 코를 푸는 행위에 관하여서는 식사 예절에서 언급했던 이야기와 중첩이 되는 부분이 많다. 13세기에는 신사의 행위와 시종의 행위가 구분되어 있는데 신사는 코를 풀 때 식탁위에 떨어지지 않을 것을 말하고, 시종은 손가락을 사용하지 말 것을 강조한다. 15세기에 강조되는 것은 식탁보에 코를 푸는 행위와 고기를 집은 손가락으로 코를 풀지 말 것을 강조한다. 15세기 사람들의 모습을 손으로 코를 풀며, 조각가들은 이를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고 자신의 작품에 표현하고 있었다. 16세기에 들면 손수건을 사용할 것을 권하고 있다. 하지만 손가락을 사용함을 보이는데 손가락 뱉으라는 것이었고 입이나 손을 씻을 때 세면대에다 침 뱉지 말고, 가능하면 그 옆에 뱉으라 한다. 16세기 들어오면서 사회의 압력이 강해지면서 적어도 침에 가래가 섞여 있을 경우 에는 항상 가래침을 밟으라고 명령하였고 수건의 사용이 거론 되었다. 1774년, 1859년 무렵 침 뱉는 행위는 어느 때를 막론하고 혐오스러운 습관이 되었다. 침 뱉는 행위에 대한 두려움과 이를 표현하는 수치심, 불쾌감은 19세기 들어 위생적 이유로 즉 민주화가 진행되고 하나의 과학적 이론과 결합하여 기술적인 도구로서 타구가 중요한 이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무용지물이 되어 침 뱉는 일은 전혀 불필요하게 되었다.이러한 변화는 사람들이 서로 살아가는 방식의 변화로부터, 사회구조의 변화로부터 나온 것이다. 침실은 인간생활에 있어서 가장 사적이고 가장 은밀한 영역이다. 그러나 중세사회에서 이 기능은 사유화 되지도 않았고, 다른 사회생활로부터 분리되지도 않았다.이 시대에는 육체에 대해서 생리적 용무에 대해서처럼 훨씬 자유로운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만 잠옷은 결정적인 변화를 주었다. 민감성이 증가한 것에 따른 수치심이 따라다닌 결과인 것이다. 기상과 취침은 은밀한 사안이 되고 또 사교생활에서 분리되어 핵가족 내부로 이전되면서 엄격하게 분리되고 그것을 언급하는 일조차 비교적 엄하게 금지되었다. 물론 이것을 반대하는 운동도 있었다. 젊은이들이 일찍이 가족공동체로부터 독립하는 현상으로 잠자리 속옷에서 파자마로의 전환은 단순한 수치감과 불쾌감의 파고가 낮아지거나 본능생활이 사슬과 규제에서 풀리는 현상이 아니라, 우리의 높아진 수치감의 수준과 현재의 사회생활이 개인을 몰아넣은 특수한 상황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적합한 형식이 형성되게 되었다. 19세기 잠자리 속옷은 벗은 육체에 대한 수치감과 불쾌감이 너무 높아졌을 뿐 아니라 내면으로 그 방향을 바꾸어 혼자 있거나 아주 가까운 가족과 함께 있을 때라도 몸의 형태를 완전히 가릴 수 있게 만들어졌다.강하게 내면으로 방향을 틀어 자기강제가있다.
《중국음식의 역사》☆ 들어가기 ☆인류의 위대한 창조품의 하나인 음식은 단순히 먹거리만이 아니라 인간생활의 문화현상 까지도 내포하고 있다. 중국의 음식 문화는 유구한 전통 문화 속에서 잉태되어 고금에 통하고 그 범위가 심오하고 넓다."食不厭精, 膾不厭細 (음식의 미의 추구는 영원하다.)" 이처럼 동양사상의 뿌리인 공자도 음식을 중요시 여겼다."民爲食爲天(음식은 생활의 근본이다.)" "飮食男女, 人之大欲存焉(식욕과 색욕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망이다.)" 이라는 말이 있듯이 음식은 인류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소로 요리 솜씨가 문제를 해결하는 관건이다.음식은 조리와 감각기관의 만족에 치중한다. 이는 특수한 문화로 형성되어 이미 일상생활 속에 스며들었다. 우리들이 자주 사용하는 "其味無窮(그 맛이 무궁무진하다.)", "酒池肉林(호화로운 연회)" 등 이와 같은 음식과 관련이 있는 고사성어는 많다.중국 음식문화의 특징을 한마디로 말하면 " 菜中有畵 , 畵中有話 , 話中有心, 心中有情(요리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말이 있고, 말속에 마음이 있고, 마음 속에 정이 있다.)" 중국음식 문화는 풍부하고 다채로우며 중국의 지리환경, 역사조건 여러 민족 등의 각종 요소와 불가분의 관계다.중국은 역사가 유구하고 땅이 넓고 재료가 풍부하고 기후가 다양하여 각종 다른 생태 환경 속의 동식물의 성장이 가능하며 품종 또한 다양하다.중국의 음식문화는 5천년의 역사 속에서 하나의 국가가 설립되고 왕조가 구축되면서 새로운 풍습과 음식문화를 형성하였다. 이렇게 수천년의 전통을 이어오면서 중화민족 문화의 한 부분으로 형성되어온 중국의 음식문화 안에는 중화인의 사상, 도덕관념, 민족심리, 생활방식, 신앙과 예절이 어우러져 있다.요리는 각 나라마다의 기후, 지리적 특성, 민족성에 따라 각양각색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중국요리는 다채로운 형태와 독특한 맛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특히 곰, 자라. 고양이, 들쥐 등 살아있는 것은 무엇이든 요리의 대상으로 삼아 불로장수의 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발전해왔기 때문에 한의사를 중심으로 요리법이 발전되었다고 하여 "식의동원(食醫同原)"이라는 어의(語義)를 굳게 믿고 있다.☆ 시대별 요리변천 ☆중국에서는 衣食住 대신 食衣住 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쓰일 정도로 중국인들은 식생활 향상에 가장 먼저 신경을 쓴다. 그러나 예로부터 중국인의 음식섭취 목적은 단순히 맛있는 음식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과 장수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특성은 식의동원(食醫同源)이라는 용어로 설명할 수 있는데 즉, 의약과 음식은 본래 그 뿌리가 하나라는 의미로 중국에서는 음식으로 몸을 보신하고 병을 예방하여 치료하고 장수한다는 인식이 보편화되었다.따라서 요리사의 사회적 지위도 상당하여 은나라 시대에 이윤(伊尹)이라는 사람은 요리사로서 재상이 되었다. 그는 [본미론(本味論)]이라는 요리책을 저술하였으며, 조리기구를 가지고 가서 오리통구이를 황제 탕왕(湯王)에게 바치고 궁중 요리사임을 계기로 국정에 대한 건의를 하였는데, 황제는 그의 생각이 출중하여 그를 재상으로 중용하였다고 한다.전설같은 이야기지만 요리사가 음식을 맛있게 만들므로 써 당대 권력자의 측근에서 정치에 참여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음식의 나라" 중국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 일이라고 하겠다. 요리기술이 고대로부터 확립되었다는 사실은 은나라의 [본미론], 송나라의 [중궤론], 원나라의 [운림당음식제도집], 명나라의 [송씨존생], 청나라의 [성원록], [수원식단] 등 수많은 요리책이 전해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렇게 기록으로 전해오는 왕실이나 귀족요리와 함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 서민요리가 한데 어우러져 중국요리가 더욱 발전하게 된 것이다. 만리장성을 쌓은 진시황제로부터 한방식(漢方食)이 시작되었고 가공식품도 먹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한(漢)나라 시대로 접어들면서 떡, 만두 등 곡류를 가루로 내서 음식을 만들어 먹는 조리법이 생기기 시작했고 식기도 금, 은, 칠그릇을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다.이어 수 당나라 시대에는 대운하가 건설되어 강남의 질 좋은 쌀이 북경까지 전달되어 북경 일대의 식생활이 풍요로워졌으며 화북지방에서는 식생활에 일대 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물레방아를 이용하여 제분을 시작함으로 해서 대량생산의 길을 튼 덕분에 일반서민들도 그 혜택을 받아 빵이며 전병 등을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페르시아지방에서 설탕이 들어와 재배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식사는 1일 2식이었으며 조리는 원칙적으로 남자의 일이었다.원나라 시대에 접어들면서 중국요리가 서방세계로 전달되기 시작하였는데 몽고인들은 유목민들이었으므로 고기요리와 유제품의 음식을 많이 먹었다. 요리는 주로 구워서 먹었는데 기마 민족의 특징인 것 같다.명나라 시대에는 미대륙이 원산지인 옥수수, 고구마가 수입되었고, 도로, 운하 등이 잘 발달되어 남방에 이르는 길도 잘 트였기 때문에 각 지역의 요리재료, 향신료, 과일 등을 쉽게 구할 수 있어서 요리법이 한층 더 발달하기 시작했다.이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발달하기 시작한 요리는 청대에 이르러 중국요리의 부흥기를 이루게 되었다. 중국요리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만한전석'은 청나라 시대의 화려함과 호사스러움의 극치를 이루는데 상어지느러미, 곰 발바닥, 낙타의 등고기, 원숭이의 골 등 중국각지에서 준비한 희귀한 재료들을 이용하여 100종 이상의 요리를 준비해서 이틀에 걸쳐 먹는 것으로서 이 요리법을 완벽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한다. 한편 서태후가 나들이를 할 때에는 요리사를 100명이나 대동하고 음식을 수백가지나 만들어 먹었다고 하니 그 화려함의 극치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청나라 때에는 행사음식도 성행하였는데 북경에서는 설날에 물만두를 만들어 먹었고, 2월 1일에는 태양의 탄생일이라고 하여 쌀가루로 오층떡을 만들어 태양신에게 바치는 의식을 행하였다. 사월초파일에는 콩, 팥을 삶아서 절에 가는 선남선녀에게 주는 '사연두' 풍습이 있었고, 8월 보름에는 월병을 만들어 제사지냈다. 12월에는 각종 죽을 만들어 먹으면서 만수무강을 기원했다.중국 식문화의 오랜 역사 속에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의 국가가 설립되고 왕조가 탄생하면 새로운 풍습과 식문화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때마다 다른 고장의 새로운 요리를 접하게 되고, 자기 식성에 맞게 조리법을 개발하면서 새로운 요리를 만들게 된다. 나라가 혼란할 때는 새로운 요리가 생겨날 여유가 없으나 태평성대가 되면서 왕실과 권력자들의 미식욕구가 시작되어 맛있는 요리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요리가 발달하게 된다.☆ 중국요리계통 ☆오늘날 중국요리가 세계적인 요리로 각광받고 있는 것도 역사의 부침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수 천년의 유구한 역사와 광활한 영토를 가지고 있는 중국은 광동에서 만주, 티벳까지 상이한 기후와 독특한 재료로 지역마다 특징있는 요리가 발달되었는데 크게 황하유역, 북방지역의 산동 요리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북방요리"와 장강(長江)유역, 회하(淮河)유역, 상강(湘江)유역, 주강(珠江)유역의 요리를 일컫는 "남방요리"로 나눈다. 황하유역 및 기타 북방은 산동요리를 대표로 하고, 장강 유역의 하류는 회양 요리를, 장강의 중상류는 사천요리를, 주강 유역은 광동요리를 그 대표로 한다. 이들 山東· 淮揚· 四川· 廣東요리를 중국의 4대 요리계통(四大菜系)이라 부른다.♧ 산동요리계통[(산동채계) : 산동채, 노채]산동은 중국고대문화 발원지의 하나로 대문구등지에서 회도, 홍도, 흑도등 취사기구가 출토되어 신석기시대 齊魯(제노)일대에 초기 문명이 번영하였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춘추전국시기의 대학자 공자와 맹자도 식을 논하는데 정통하였는데 이것으로도 이시기에 조리수준이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였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후위의 가사협은 에 북방요리자료를 수집하여 기재하여 산동 요리의 일부분을 찾아 볼 수 있다. 산동 요리는 황하유역 중 하류 및 기타 북방지역, 멀게는 동북까지 영향을 미쳐 "북방요리"의 대표가 되었다. 산동요리계통는 재료의 선택이 광범위하고 금수 및 해산물을 많이 사용하고 탕 만들기를 중요시 여기며, 배(배)· 류(廉)·폭(爆)·고(嗜)·초(炒) 등의 조리법을 즐겨 쓴다. 맛은 약간 짜고 신선하며 깨끗하고 향기로우며 바삭거리고 부드러운 특색이 있다. 산동요리는 제남요리와 교동요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남요리는 조리법이 독특, 다양하고 제탕이 유명하다. 교동요리는 해산물이 유명하며 깨끗하고 신선한 원래의 맛을 중요시 여긴다.♧ 회양요리계통[(회양채계) : 강소채, 회양채]양주는 九州의 하나로 수당이후부터 관리되기 시작하였다. 이곳은 長江과 운하교통의 요충지로 역대 조운의 중심이 되었다. 明淸시기 소금운송은 양주에서 하고 조운은 회음에서 하여 배가 지나는 길에 반드시 정박하여야 했으므로 이곳에 상인이 운집하여 경제가 번영하였다. 요리사업도 발달하여 먼 곳까지 전파되었으며 요리사가 많았고, 노서, 장강 중하류와 동남 근해 일대까지 그 명성이 다다랐다.
≪‘이상’과 ‘현실’속의 프랑스혁명≫Ⅰ. 역사의 재조명역사적 사실이 후일 역사가에 의해 재조명 되듯이 혁명중의 혁명이라 불리는 프랑스혁명도 예외는 아니다. 이 책은 프랑스혁명의 이상과 현실이란 제목 아래 긍정적인 영향으로 ‘이상’으로 부정적인 영향으로 ‘현실’ 이라 표현하고 있다.기존 역사 교육에서 우리가 알고 있듯 프랑스혁명은 이 책을 통해 또 다른 해석을 가능케 해주었다. 프랑스 혁명의 숭고한 정신, 의의 등을 긍정적인 것으로만 보게 배운 지금 이 책 또 다른 측면인 현실의 이데올로기를 뒤엎는 수정주의적 시각에서 비춰진 프랑스혁명은 역사적 사실을 다각적으로 보게끔 만들어 주었다.그럼 이 책에서 비추어진 프랑스혁명의 이상과 현실은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다.Ⅱ. 프랑스혁명의 ‘이상’18세기 프랑스에서는 개혁의 기운이 고조되었고, 시민들은 계몽 절대 군주에 반대하여 이성?행복?관용을 열망하였다. 이 세 가지의 정신은 1750년대 이전에 이미 상당한 정도로 프랑스 사회에 확산되어 있었다. 계몽사상은 이성을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가르쳐 주었고, 이성에 대한 신뢰는 프랑스혁명이 일어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혁명이 박애사상을 기본으로 하였던 점을 생각할 때 혁명의 인도주의적인 성격인 쉽게 예상할 수 있다. 프랑스혁명에서는 시민들의 평등을 외쳤고, 불쌍한 자들에 대한 동정심이 강조되었다. 그리하여 1791년에 국민 의회는 귀먹은 남녀들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었으며, 이들을 시민으로 대우한다고도 선언하였다.르네상스, 종교 개혁 이래 신분적인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자유주의는, 혁명의 무기로 사용되어 그 결과 자유?평등사상에 기초하여 시민 사회가 성립되었다. 자유주의는 개인을 정치적?신분적인 속박에서 해방시켰다.뿐만 아니라 이러한 프랑스혁명의 이념은 나폴레옹의 원정을 통해 전 유럽에 전파되어 자유주의, 민족주의 운동을 일으키는데 기여했다.프랑스혁명은 사회의 거의 모든 부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정치적으로는 전제적인 절대왕정을 타도하고 시민계급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경제적으로는 봉건적인 잔재를 제거함으로써 자본주의의 보다 순조로운 발전을 가능케 하였다. 사회적으로는 앙시엥레짐)의 신분제적이고 법적인 평등권과 특권을 타파하고, 귀족계급에 대하여 시민계급이 승리함으로써 자유롭고 평등한 근대시민사회의 발전이 가능해졌다. 사상적으로는 종교적이고 구습에 젖은 낡은 전시대의 사고방식에 대한 계몽사상의 전면적인 승리를 뜻하였으며, 그것은 프랑스혁명의 이념 속에 압축되었다. 이로 인해 프랑스혁명은 전형적인 시민혁명이다.)하지만 프랑스혁명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지난 20여 년 사이에 크게 바뀌었다. 과거에는 프랑스 혁명이 근대 서양사에서 하나의 극점을 형성했다고 생각하였고, 이렇게 ‘위대한’혁명은 고매하고 뿌리 깊었던 ‘위대한’ 이념에 의해 발생했던 것으로 착각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이 가지고 있던 ‘위대함’은 여지없이 땅으로 추락하였다.)Ⅲ. 프랑스혁명의 ‘현실’여러 학자들에 의해 재해석 된 프랑스 혁명은 “일으킬 만한 가치가 없었던 혁명”이라고 불린다. 어떠한 ‘이념’에 의해서도 프랑스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왕이 재정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힘이 약해졌고, 그런 가운데 사회적인 문제가 노출되어서 혁명은 발생하였다는 것이다.만일 혁명이 이념에 의해서 일어났고, 만일 그 이념을 추구했던 어떤 세력이 혁명을 주도했다면, 프랑스혁명에는 그 이념의 노선에 맞는 하나의 일관성 있는 흐름이나 패턴이 존재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혁명에서는 그 어떠한 것도 분별해 낼 수 없다. 혁명이 진행되는 기간 동안 각자의 길을 걷고 있었을 뿐이다.혁명의 원인은 한 마디로 말하여 구제도의 모순이었다고 하지만 이 단어는 ‘구제도’ 시절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구제도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존재하지도 않았던 제도가 모순을 일으킬 수도 없었다.) 구제도는 혁명의 원인이 아니었다. 소위 말하는 구제도 밑에서의 경제 성장은 대단했으며, 공업 성장 면에서 영국과 견주어 볼 때 크게 뒤떨어지지 않았다. ‘구제도’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전통주의적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반영된 사고이다. 혁명의 명분을 상대적으로 상승시키기 위하여, 혁명 이후에 ‘창조’한 단어였다. ‘구제도’라는 개념이 없이는 ‘새로운’ 혁명 체제의 개념은 존재할 수 없었다.프랑스 혁명은 봉건 제도에 대항해서 부르조아가 일으킨 혁명이 아니었다. 봉건제도는 이미 1789년 이전에 붕괴되고 있었다고 한다. 18세기의 프랑스가 봉건적이었다고 묘사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일반적으로 혁명은 사회의 개혁으로 좋은 인상으로 남을 수 있지만 그 시대를 살아야 했던 당사자들에게 혁명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고 비극이었다. 혁명은 너무나 많은 피를 요구했다. 혁명은 200만 명의 목숨을 빼앗아 갔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100만명이 넘는 프랑스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박애를 주장했던 혁명은, 박애와 인간성의 가장 중요한 원천인 사람의 목숨을 대량으로 빼앗아 갔다.)프랑스혁명은 많은 인명 피해를 내었고, 프랑스 사회에 그처럼 어려움을 초래하였지만, 실제적으로는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이 허무하게 끝났다. 프랑스혁명은 농민들을 봉건제도로부터 해방시켜 주지 못하였고, 봉건제도를 확실하게 폐지하지도 못하였다. 프랑스혁명이 했던 일은 혁명 전에 존재했던 영주를 지주로 바꾸고, 개인적인 봉건법을 계약으로 바꾸어 놓은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현상마저 프랑스혁명이 이룩해 낸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구제도 시절이었던 18세기 후반부터 이미 진행되고 있던 현상이었다.또한 프랑스혁명의 유산으로 강조되어 온 것 중의 하나는 혁명 당시에 선포된 인권선언)일 것이다. 세계사적으로 너무나 유명한 인권선언은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에 대하여 이상적인 단어들로 장식되었다. 그러나 인권선언은 현란한 수사학적 언어의 잔치에 불과했다. 인권선언을 발표하지 않았던 구제도 하의 정부에 서는 이와 같은 인권유린은 존재하지 않았다.) 프랑스 혁명은 인권선언에 명기했던 바로 그 인권을 모조리 유린한 사건이었다.Ⅳ.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프랑스혁명은 봉건적 속박과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면서도 특권과 정치에서 제외된 시민계급이 상공업자를 중심으로 구제도를 타파하고 시민으로서의 자유와 권리를 추구하고자 하여 전제적인 절대 왕정을 타도하고 봉건적인 잔재를 제거하고 자유롭고 평등한 새로운 시민사회를 건설할 수 있게 한 사건으로 우리는 흔히 알고 있다. 하지만 이는 한부분만 보아왔었던 것뿐이다. 또한 계몽사상에 영향을 받았다고도 한다. 하지만 떼느(Hippolyte Taine)는 18세기의 계몽사상이 프랑스혁명에 해독을 끼쳤다고 보았다. 그는 이상주의적인 고전정신과 자유주의적인 합리정신을 바탕으로 근대적인 혁명정신이 일어났는데 그 정신을 무사려하게 실천했기 때문에 무서운 비극이 일어났다고 했다.)
【혁명에 관한 견해】Edmund Burke와 Alponese Aulard교수님께서 내 주신 과제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을 다루고 있었다. Edmund Burke와 Alponese Aulard의 글이 그것이다. 글을 읽고 난 후 저자에 대해 잠시 알아보았다. 저자를 조사하고 그자의 성향을 일고 난 후면 내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서이다.Edmund Burke는 더블린 출생으로 1744년 더블린의 트리니티칼리지에 입학하였으며, 1750년 런던으로 이사하였다. 1765년 의회 내의 자유주의자를 중심으로 한 휘그당(黨)의 지도자 로킹엄의 비서로 정계에 진출하였으며, 1966년 하원의원이 되었다. 조지 3세의 독재 경향과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과세에 반대하였으며, 또 인도 통치에 관하여 당시 벵골 총독 헤이스팅스를 탄핵하였다. 1790년에 《프랑스혁명에 관한 고찰》을 써서 혁명의 과격화를 경고하였다. 웅변가로서 정의와 자유를 고취하였으며, 영국 보수주의의 대표적 이론가로서 명성을 떨쳤다.Alponese Aulard는 1886~1922년 파리대학교 교수로 있었다. 프랑스혁명 연구에 과학적인 분석 방법을 도입, 특히 정치사적 연구에 신국면을 개척하였다. 부르주아 공화주의자의 입장에서 혁명에서의 권리의 평등과 인민의 주권을 중시하였다. 또 프랑스혁명사 학회를 설립하고 《프랑스혁명》지(誌)의 편집, 혁명사료 출판을 하였다. 저서로는 《프랑스혁명 정치사 Histoire politique de la Revolution franaise》(1901) 《프랑스혁명과 봉건제도 La Revolution franaise et le regime feodal》(1919) 등이 있다.저자를 알아보고 난 후 두 사람의 입장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물론 저자들의 다른 저서를 읽어 보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다. Edmund Burke는 혁명의 과격화를 경고하였고 Alponese Aulard는 부르주아 공화주의자의 입장에서 혁명에서의 권리의 평등과 인민의 주권을 중시하였다는 것이다.혁명의 두 세력이 만든 공화정프랑스혁명은 사회의 거의 모든 부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정치적으로는 전제적인 절대왕정을 타도하고 시민계급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경제적으로는 봉건적인 잔재를 제거함으로써 자본주의의 보다 순조로운 발전을 가능케 하였다. 사회적으로는 앙시엥레짐의 신분제적이고 법적인 평등권과 특권을 타파하고, 귀족계급에 대하여 시민계급이 승리함으로써 자유롭고 평등한 근대시민사회의 발전이 가능해졌다. 사상적으로는 종교적이고 구습에 젖은 낡은 전시대의 사고방식에 대한 계몽사상의 전면적인 승리를 뜻하였으며, 그것은 프랑스혁명의 이념 속에 압축되었다. 무지한 국민들은 이러한 결과가 오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러한 결과가 시민들의 승리로 비추어졌을 것이다.Alponese Aulard는 부르주아 공화주의자의 입장에서 혁명에서의 권리의 평등과 인민의 주권을 중시하였다. 그는 글에서 프랑스 혁명 전야에 누구도 프랑스에서 공화국의 건설을 꿈꾸지 않았으며 이것은 통합되는 단계에 있는 위대한 국가에서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정부였다. 사람들이 자유로운 정부를 건설하려한 것은 왕을 통해서였고 그들은 왕정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재조직하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 주체는 계몽사상에 입각해있다. 계몽사상은 이성을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가르쳐 주었고, 이성에 대한 신뢰는 프랑스혁명이 일어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모두 그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다. 따라서 계몽된 프랑스와 무지한 프랑스, 부유한 프랑스와 가난한 프랑스로 대변되는 계층 분화로 인하여 전자들은 능동적인 시민이 되었고 후자들은 수동적인 시민이 되어 능동자들에 의해 이끌려졌다. 이 내용만을 가지고 본다면 프랑스 혁명은 위로부터 아래의 혁명으로 공화정이 성립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래의 사람들이 없었다면 과연 그것이 가능이나 했겠는가? 비록 위로부터 선동되었다고는 하지만 엄연히 그들로부터 혁명적 성과가 나오게 된 것이다. 이는 프랑스의 공화정 성립으로 이어졌다.전통을 전복하고자 하는 혁명?Edmund Burke는 보수주의에 대한 전통적인 대변인이었고 정부의 완만하고 주의 깊으며 유기적인 성장을 추상적인 사고로 대처할 수 없다는 이론을 내세웠다. 그는 프랑스 혁명에서 기존 질서의 근본을 위협하는 파괴적인 관념들의 위험 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다른 사람들은 프랑스에서 발생한 돌발 사태를 자유주의 개봉박두의 증거로 파악하면서 환영했지만, 버크는 그것을 더욱 경악스럽고 새로운 전제주의 장치로 파악하고 비난했다. 그는 1789년의 사건을 인간이 자각한 계몽과 진보로 한 단계 성장한 것으로 파악하는 대신에 그것을 야만주의로 후퇴한 것으로 묘사했다. 프랑스 혁명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지고한 것으로 전파하는 데에는 성공하였지만 그와 함께 특정한 가치를 최상위에 두고 그에 위배되는 것들에 대해 불관용의 모습을 드러내었다는 양가적인 측면을 갖는다. 버크는 프랑스 혁명이 전파하고자 했던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역시 숭상하면서도 프랑스 혁명이 결과한 근본주의적 위계성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인간을 본성적으로 사회성을 가진 존재로 파악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자연개념을 바탕으로 버크는 전통과 문명을 옹호하였다.버크에게서 전통 전체를 전복하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용인되지는 않는다. 혁명조차도 전통으로부터 설립된 가치가 위태로워졌을 때 전통적 질서를 복원하는 의미에서 타당한 것이다. 버크가 보기에 프랑스 혁명은 전통을 전복하고자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비판된다. 글의 곳곳에서 정부는 자유보다 좋다 던지, 진정한 왕정의 무게로 전체를 억누름으로써 분리된 부분들은 왜곡을 예방할 수 있고 자신에게 할당된 자리로부터 출발할 수 있다고 표현했다.그는 혁명의 주체에게 혁명을 통하여 그동안 가져왔던 것들을 다시금 시작해야한다고 말했으며 전통적인 정부를 뒤집게 됨을 경고했다.사회가 변하면 체제도 변한다.하지만 나의 생각은 다르다. 물론 기존의 전통적 질서로 잘하면 좋겠지만 이미 사회는 그 기존 정부를 용납하고 유지하기에는 정부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프랑스혁명의 원인은 첫째로 정치적인 면에서 봉건적인 제도와 근대적인 제도가 혼재하여 일으킨 혼란을 들 수 있고 둘째로 경제적으로는 토지 소유의 심한 불균형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불균형은 소수의 부유한 특권 계층은 면세 특권을 지니고 있었는데 비해 모든 국가의 비용은 가난한 평민이 부담하는 조세 제도의 모순이 첨가됨에 따라 특권 계층과 평민 사이의 불균형은 더욱 심화 되어갔다.
☆20세기 사학사 서평☆1. 서 론20세기 사학사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을 염두에 두고 역사학이 전문적인 학문분야로 정착한 19세기의 역사에서 변화한 20세기의 서양 역사 서술의 흐름과 경향, 역사학의 방향과 역사 연구범위의 확대 등을 보여줌과 동시에 위기에 선 역사학의 전망을 다루고 있다. 19세기에 역사학이 전문분과로 출현한 이후 20세기 사학사는 정치, 외교중심에서 사회, 경제 과학으로써의 시도를 하는 특징을 보인다. 프랑스의 아날학파, 독일의 역사적 사회과학, 마르크스주의 역사학 등으로 대표되는 이 흐름은 기본적으로 역사적 사실의 실재와 인과관계라는 전제를 벗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더욱 과학적이 되려고 했다. 그러나 20세기 말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을 받게 되고 이야기체 역사의 부활, 일상생활을 다루는 미시사의 대두, 텍스트 자체의 언어 분석 등은 객관적인 역사연구 가능성을 부정한다. 조지 이거스는 1,2 부에서 근대 역사학의 출현과 사회과학에 관하여 기술하였으며 마지막으로 3부에서 그가 진정 말하고 싶었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역사가로서 자신의 인식과 입장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본론에서는 저자와 그의 학문적 업적 및 의의, 이 책에서 그가 말하고자하는 바와 입장,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2. 본 론조지 이거스는 역사이론가로 명성을 쌓은 원로 역사가로 현재 뉴욕주립대 사학과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며 세계사학사회장과 거시사학사가이다. 원래는 생시몽주의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학문적인 관심을 프랑스사에서 독일사로, 지성사에서 역사이론으로 확대한 저자는 역사 연구와 역사 서술의 역사를 국제적인 수준에서 조망할 수 있는 우리 시대의 유일한 역사가로 평가받고 있다. 이 책은 이론 중심의 사학사이면서도 마르크 블로크, 뤼시앙 페브르, 페르낭 브로델, 레비-스트로스, 미셸 푸코 등 기라성 같은 위대한 학자들을 총망라하고 있다. 따라서 1백년 사학사라는 지식의 보고를 두루 섭렵할 수 있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으며, 복잡하고 다양하게 서양사학사를 압축, 정리하고 있는 이 책은, 랑케 사학의 전통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하여 20세기 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 이탈리아 등지의 지배적인 역사서술 경향을 빠짐없이 점검하고, 저물어가는 세기말인 1990년대 관점에서 20세기 사학사 전반을 회상하면서 예언적인 소감까지 첨부하여 사학사 입문서로 자리매김하게 하였다.1960년대 이래 서구 역사계의 가장 큰 흐름은 진보를 위한 거대담론으로서의 역사의 종말을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랑케 이후 근대역사학은 과학을 닮음으로써 ‘힘’을 가질 수 있다고 믿어왔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은 역사학의 과학성을 부정함으로써 근대역사학 이전의 ‘이야기역사’로 되돌리려는 위협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고 나타난 역사학의 새로운 경향이 미시사이다. 이거스는 역사학의 이런 미시사적 경향이 대두하는 배경과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깊이 공감하지만, 그것이 역사학의 지배담론이 되는 데는 명백히 반대한다. 그는 이 책에서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을 염두에 두고 역사학이 전문적인 학문 분야로 정착한 19세기 후반에서 1990년대까지의 서양 역사서술의 흐름과 경향을 요약, 분석, 진단하여 위기에 선 역사학의 전망을 다루고 있으며 복잡하고 다양하게 전개된 20세기 서양사학사를 압축, 정리했다는 점에서 사학사 전반을 정리 한 것이다.근대적 세계관에 본질적 의문을 제기하는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은 종래 역사학의 연구방법과 서술방법만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탐구대상인 ‘역사’의 실재까지 의문의 대상으로 만들고 있다.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은 크게 ‘거대담론의 거부’와 ‘언어의 전환’이란 두 측면으로 파악된다. 역사발전의 법칙성을 부정하고 보편적 이념을 외면하는 거대담론 거부 경향은 역사학 연구주제의 파편화로 나타난다. 유럽중심, 남성중심, 산업생산력중심의 근대화과정이 한 고비를 넘기면서 변화의 중심부에 편중돼있던 가치관이 풀려남으로써 문화다원주의가 득세하는 현상과 밀접하게 관련된 변화다. 또한 언어의 전환은 현상과천적 간격을 지적한 구조주의 언어학 이론을 더욱 극단화해 계승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양자간의 연관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며 언어의 유동성을 강조한다. 이것은 근대역사학의 첫번째 원리인 ‘실제성’을 차단함으로써 그 근거를 박탈하는 것이다. 과거의 사실을 기록한 언어가 과거의 사실과 연관성을 가지지 않은 독립체일 뿐이라면 역사학의 담론은 엄밀성을 전제로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이거스는 이념의 구심점을 잃고 엄밀성에 대한 자신감을 훼손당한 역사학은 일상생활화, 미시사(微視史) 등 새로운 연구분야로 비중을 옮기는 한편 기존 연구분야에서도 해석의 틀을 운용하는 방법에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이 역사학에 치명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적절한 대응을 통해 오히려 발전의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보편이념에 얽매여 온 과거 연구주제의 편중성을 벗어날 수도 있고, 언어와 현실 사이의 간격을 융통성 있게 파악함으로써 더 풍부한 해석의 길을 찾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이 책에서 이거스가 일관되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문제의식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에 과연 역사는 어떻게 될 것인가‘이다. 조지 이거스는 20세기 사학사에서, 신문회사와 관련을 맺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학에 대해 논평하면서 "역사적 사실과 허위의 개념을 의문시함으로써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까지도 던져버리는 과오를 범했다"고 말한다. 그의 설명을 조금 더 듣는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가들은 "항상 허구적 요소를 포함하는 역사 담론과 주로 실재를 해석하는 것을 추구하는 허구 사이에 존재하는 유동적 경계뿐만 아니라, 정직한 학문과 선전, 선동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마저도 허물어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입장은 역사를 어떠한 진리도 얻을 수 없는 의미 없는 ‘논쟁’으로 치부함으로써 역사를 열등하고 가치 없는 학문으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역사학 자체에 대한 도전에 대해 저자인 이거스는 단호한 입장을 취한다. 그는 역사가 분명한 ‘역사과학’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과학'이라는 목욕물이 더러워졌다고 해서 '역사현실'이라는 아이까지 버리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거스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3. 결 론『20세기 사학사』결코 나에겐 쉽지 않은 책이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19세기~20세기의 역사흐름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19세기 역사는 산업화, 정치적인 근대화의 경향과 함께 발전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었다. 근대인이 새로이 추구되는 가치는 역사학의 전문화와 함께 역사학에 보편적 진리라는 개념을 심어주었다. 이것은 랑케의 진리를 추구하는 경향과 함께 사회과학적인 측면이 융합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의 틀은 냉전의 시대를 지나 현재 광범위한 맥락에서 다양성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영역이 정교하게 확대되어 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계몽주의가 역사학에 저지른 실책으로 ‘진리를 과학적, 즉 계량적 공식화들로 환원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처럼 과거 역사학의 한계와 맹점을 지적하기는 했지만, 이는 결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주장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왜냐하면 이들의 주장이 수용된다면 ‘의미 있는 역사서술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계몽주의적 유산을 거부하고 폐기하도록 해서는 안 되며, 그 대신 그 유산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근대 역사학의 흐름과 다양한 사회과학과의 연관성,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비롯된 역사학의 ‘실체성’ 논쟁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20세기 사학’의 다양한 측면을 이야기 하고 있다. 특히, 그가 중점을 두고 말하고 있는 부분은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한 역사의 ‘해체’에 대한 부분이다. 20세기에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한 도전은 이전과는 달랐다. 그것은 역사의 관점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역사학 자체의 존재성에 대한 위협이기 때문이다. 역사에 정해진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가는 나름의 역사관 혹은 ‘정답’을 가지고 있다. 역사에서 진정 진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인간사회를 바라보는 틀을 가짐으로써 인간을 이해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지 이거스는 대체로 다원적인 사상사의 발전과 역사서술에 대해서 비평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는 이 책의 결론에서 "계몽을 대체하는 것은 야만일 뿐이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고, 한편으로 "탈 역사시대에 살고 있다", "거대한 담론의 쇠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방향인 다원화, 정보화, 개방화를 좀 더 깊이 이해해 보면 역사학이 마치 시시콜콜한 얘기에 빠져서 위기에 처한 것이 아니라 매우 다채롭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국가사, 정치사, 외교사, 사회사, 경제사, 종교사 등에 국한된 역사학의 연구에서 지방사, 문화사, 생활사, 개인사에 이르기까지 역사학의 영역이 다채롭게 확대된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즉, 역사가는 파당적이거나 수구적이기 보다 희망을 주는, 용기를 불어 넣어주는, 역사와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것이며 역사를 혐오하거나 멸시하기 보다는 관대하고 따뜻한 마음과 말씨로써 교훈적이고 과거가 현재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역사의 대중화, 일반화에 힘써야 할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역사서술 이론의 기본관념은 역사서술은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의 과거를 준거로 한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객관적 지식의 가능성에 철저하게 도전하는 중요한 인식론적 문제들을 제기했고 역사적 지식의 직접성은 거부되었다. 이러한 배경 하에 다양한 역사적 사고가 등장하게 되었고 이것은 역사적 사고의 다양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한 점에서 다양한 역사적 사고는 이전의 이론이나 사고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연구의 범위를 확장한 것으로 그 의의를 가진다 할 것이다. 이런 것에서『20세기 사학사』는 역사학의 변화를 거듭한 20세기 서구 역사학의 발전-아날학파의 등장-과 쇠퇴-포스트모더니즘-의 모습을 한눈으로 조망하는데 기여한 지침서로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며 비평적 시각을 조금이나마 키울 수 있었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