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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호작용학습
    상호작용학습목차Ⅰ. 서론Ⅱ. 본론1. 플랜더스의 수업분석 모형2. 역동적/상호작용적 모형Ⅲ. 결론Ⅰ. 서론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까지 우리들은 총 12년간의 의무 교육을 받고 있다. 이 12년간의 의무 교육 이외에도 대학교의 교육과정까지 합친다면 약 16년 정도의 교육을 받고 있는 셈이다. 16년은 짧은 기간이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생각을 해보아야 할 것이 있다. 과연 약 16년 정도의 교육을 받으면서 우리에게 남는 것이 있는가에 대한 생각이다. 지금까지의 교육은 대체로 암기식 위주이며 교사중심의 수업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예외도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현재 우리의 교육의 초점은 거의 수능에 맞추어 지고 있다. 수능을 위해서 학교를 다니고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입시 위주의 출세를 위한 교육 풍토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곳곳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교육은 우리 학생들의 생각을 창의적으로 하기 어렵게 만들면서 대부분이 단지 시험에 나오기 때문에 배워야 한다는 마인드를 가지고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교육풍토를 어느 정도 최소화하기 위한 여러 가지 교수학습방법이 계속적으로 연구가 되고 있다. 그 중 한 가지가 상호작용 학습이다. 교육을 성립시키는 3대 요건은 교사, 학생, 교육과정이다. 교사와 교육과정은 있으나 학생이 없는 교육은 있을 수 없다. 그만큼 교육을 배우는 학생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가 있다. 현대의 교육은 단순히 교사가 교수내용지식으로 학생을 가르치는 개념은 이미 지나갔다. 교사 또한 학생한테 배울 것이 있다면 교사도 한명의 학생이 되는 시대이다. 즉 누구나 학생이 될 수가 있고 교수자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상호작용 학습에 대해서 현재 가장 잘 알려진 플랜더스의 수업분석 모형과 더불어 역동적/상호작용적 모형에 대해 알아봄으로써 상호작용 학습의 효율성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다.Ⅱ. 본론1. 플랜더스의 수업분석 모형플랜더스의 수업분석 모형은 수업과정에서 교사와 학생의 언어적 상호작용을 분석하여 ‘수업의 형태 및 질’을 분석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분석방법은 학급 분위기와 관련된 정의적 영역의 분석방법이며, 또한 교사의 비지시적인 수업진행에 관심을 두기 때문에 학생들의 학업성취나 민주적 태도의 향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다. 즉 플랜더스의 수업분석 모형의 목적은 교사와 학생의 언어적 상호작용을 중심으로 교사의 수업태도와 수업방법을 개선하고, 학생의 바람직한 성장을 추구한다는 거창한 목적이 담겨져 있다.플랜더스의 수업분석 모형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다음과 같은 특징에 대해 유념해야 한다. 첫째, 교사중심의 일제수업(강의법, 문답법 대상)에 한해 적용시킬 수 있다.둘째, 언어 상호작용에 한해서만 분석할 수 있다.셋째, 수업형태를 분석한 결과가 바람직하게 나왔다고 그 수업이 잘된 수업이라고 결론 내릴 수 없다.넷째, 학생들의 교과 성적을 향상시키고 올바르게 변화시키는데 도움이 된다.다섯째, 수업형태분석은 교사의 행동수정에 도움이 된다.마지막으로 수업방법은 간단하고 실용적이며, 수업분석의 결과는 과학적 방법으로 정리되고 해석이 된다.플랜더스의 수업 형태는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1. 교사의 발언(1)비지시적 발언① 학생의 느낌을 받아들이는 것② 학생을 칭찬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③ 학생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는 것④ 학생에게 질문하는 것(2)지시적 발언⑤ 강의⑥ 학생에게 지시하고 명령하는 것⑦ 학생을 비난하거나 교사가 권위를 부리는 것2. 학생의 발언⑧ 교상의 질문에 대한 단순답변⑨ 학생의 질문 및 교사 질문에 대한 넓은 답변(자진반응)3. 기타⑩ 작업, 침묵이나 혼동이러한 플랜더스의 수업형태를 적용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유의점에 주의해야 한다.첫째, 수업시간 5분전에 입실(학습 분위기 파악, 관찰자 자신의 심적 준비)해야 한다.둘째, 각 분류한 10개의 영역에 3초마다 기록해야 한다.셋째, 40분 수업에서 900개 정도의 분류 숫자가 기록되어야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분석방법은 상당히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수업시간이 40분이면 3초마다 체크해야 하기 때문에 총 800개의 분류 숫자가 기록되어야 하지만 3초 이내에 2개 이상이 동시에 체크할 수 있는 점까지 고려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넷째, 관찰, 기록하면서 수업의 전체적인 흐름도 파악해야 한다.플랜더스의 수업분석 모형에서 약점으로 볼 수 있는 것이 강의법, 문답법에만 적용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강의법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제대로 구조화된 강의법은 학생들한테 많은 지식과 흥미를 유도할 수가 있다. 여기에 전제되는 조건은 교사의 풍부한 교과내용지식과 교수내용지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상호작용을 높이기 위해 적절한 문답을 섞어주는 것도 좋다. 멀티미디어 자료를 보조교재로 사용하거나, 중간에 간단한 학생활동을 첨가함으로써 단조로움을 탈피하고, 주위를 환기시키는 등의 변화를 줄 필요도 있다.2. 역동적/ 상호작용적 모형역동적 상호작용모형은 교육과정의 개발과정을 신축성 있고, 상호작용적이며, 수정 가능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또한 교육과정 개발과정은 어느 교육과정 요소로도 시작할 수 있고 어떠한 순서로 진행되어도 무방하다고 보고 있다. 대표적 역동적 상호작용 학자인 스킬백의 모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상황분석↘목적설정↘프로그램 구성↘해석과 실행↘조정, 피드백, 평가, 재구성스킬백은 교육과정 개발자는 어떤 교육과정 요소로부터 시작할 수도 있고, 합리적 모형의 고정된 계열과는 달리 어떠한 수준의 계열성을 따라 진행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또한 학교단위교육과정개발모형은 수단 - 목적 식의 분석을 전제하지 않고 있으며, 다만 교육과정 개발팀에서 교육과정 구성요소와 개발과정의 제측면들을 충분히 고려하고, 그 과정을 하나의 유기적 전체로 파악하며 비교적 체계적인 방식으로 작업할 것을 권장하고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이러한 역동적 상호작용모형의 장. 단점은 다음과 같다.? 장점1. 교육과정 개발자들은 목표를 진술하는 데 있어서 소위 행동목표를 진술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보다 더 창의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2. 학급교사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보다 현실적이고, 실행가능성이 높은 교육과정개발절차라고 생각할 수 있다.3. 실제로 교육과정을 개발할 때에, 개발자들에게 상당한 융통성을 마련해주고 있다. 즉 개발자들이 자신의 요구에 적절하다면, 개발과정의 어느 시점에서라도 시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융통성이 크다.
    교육학| 2008.12.15| 4페이지| 1,000원| 조회(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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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주시의 문화재 ppt
    전라북도 전주시의 문화재1. 동고산성 2. 남고산성 3. 오목대와 이목대 국사교육과 20030365 송준광1. 동고산성지정번호: 시도기념물 제44호 (전주시) 시대: 통일신라시대로 추정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면적: 성벽 높이 약 4m, 둘레 약 1,588m 소재지: 전북 전주시 완산구 대성동 산 25번지 소유자, 관리자: 전주시 지정일: 1981년 4월 1일1. 동고산성전주 동남방 승암산에 있다하여 '승암산성' 이라고도 한다. 포곡식 산성이다. 후백제 견훤의 왕성으로 전해진다. 1668년(숙종14)에 성황사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쓰여진 성황사중창기 에 표현되어져 있다. 1980년 개괄조사결과 건물터에서 '全州城' 이라 새겨진 연꽃무늬 와당이 발견됨으로써 그 연대와 성격이 후백제의 왕궁터라는 전설과 부합됨이 밝혀졌다. 그 밖에도 '中方', '官 '자 등이 새겨진 조각도 나왔다. 산성은 서쪽으로 면한 수구의 남쪽으로 뻗은 규암 절벽의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동쪽이 높은 삼태기형의 골짜기를 감은 것인데 날개모양의 익성(翼城 : 날개처럼 좌우 양쪽에 쌓아서 가운데에 있는 성의 부족한 기능을 돕는 성) 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포곡식 산성이란?포곡식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산성들이 해당이 되는데 성벽이 골짜기를 싸고 있는 형태로써, 포곡식은 성 내부에 넓은 계곡을 포용(包容)한 산성으로, 계곡을 둘러싼 주위의 산릉(山陵)에 따라 성벽을 축조한 것이다. 성내의 계류(溪流: 산골짜기에 흐르는 시냇물)는 한곳으로 모아져 평지 가까운 곳에 마련된 수구(水口)를 통하여 외부로 유출되며 성문도 대개 이러한 수구 부근에 설치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포고식산성은 5,000∼6,000m 내지 1만m가 넘는 대형 산성도 적지 않다. 이들은 가공석재를 사용한 완전한 석출성벽과 그리고 총안(銃眼)이 있는 여장(女墻)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즉 포곡식 산성은 성 내에 계곡을 포함하는 형식으로 계곡과 주변의 산세지형을 이용하여 성벽을 들렀기 때문에 성내에 수원이 풍부하고 활동공간 북쪽이 112m, 남쪽이 123m이다. 수구는 높이 230m 지점에 있으며 최고봉인 동남 우각은306.6m 이다. 석축은 능선 바깥사면 중턱을 깎아 회랑도를 설치하고, 그 바깥 밑부분에 쌓았는데 높이는 4m정도이다. 성안은 사면을 3단으로 깎아서 건물대지를 만들었다. 윗단은 길이 117m, 너비 20m, 중간대지는 길이 133m, 너비 26m로서 그 안에 건물지 초석과 기와조각들이 퇴적되어 있다. 성문은 수구에 서문지, 북익성 동변 부근에 동문지, 남익성 양쪽 부근에 두개의 남문지가 있다. 성안 중앙에는 우물터가 있고 그 아래에는 웅덩이가 있는데, 동국여지승람 의 기린봉 위에 작은 연못이 있다는 기록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견훤 왕궁지900년에 견훤에 의해 이곳 전주에 도읍을 정한 후백제 왕궁 터로 현재까지 그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견훤의 출생설화] 옛날 광주 북촌에 한 부자가 살았는데 그에게 아름다운 딸이 하나 있었다. 딸이 아버지에게 아뢰기를 밤마다 자색옷을 입은 남자가 침실에 와서 자고 간다고 하자 아버지가 그 남자의 옷에 실을 꿴 바늘을 꽂아 두라고 일러서 그 딸이 말대로 했는데, 이튿날 따라가 보니 북쪽 담 밑에서 실끄트머리가 발견되었는데, 바늘은 큰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얼마 후부터 그딸에게 태기가 있고 후에 아들을 낳았다.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 이름하고 900년에 후백제를 건국하여 완산군(현 전주)에 도읍을 정했다.안내 시설의 부재. 산속에 있는 성이기에 더욱더 각종 성터를 찾기가 어려웠음. 안내팻말 이나 안내원의 보급의 필요성. 일부 성터 만이라도 복원 시급. 무너진 성터가 산이랑 뒤덮여 성터같이 보이지가 않았음. 무너진 성터는 보호시설 없이 무방비 상태로 배치. 한 나라의 왕궁터 라는 역사적 의의에도 불구하고 흥보미숙으로 인한 인식의 부족2. 남고산성지정번호: 사적 제 294호 시대: 통일신라시대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면적: 폭 3.4m, 높이 1.2m, 길이5.3km 소재지: 전북 완산구 동서학동 위하여 축성하였으므로 견훤산성 또는 고덕산에 있다 하여 고덕산성이라고도 한다. 고덕산의 서북쪽 골짜기를 에워싼 포곡형 산성이다. 현존하는 성벽은 임진왜란 때 전주부윤 이정란이 이곳에 入保(작은성 안에 들어와 보호를 받음) 하여 왜군을 막을 때 수축하였다. 그 뒤 1811년(순조 11)에 관찰사 이상황이 증축하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박윤수가 관찰사로 부임하여 완료된 것이다. 숙종 때에 부근의 위봉산성에 이어 진(鎭)이 설치되었고, 성내에는 진장(鎭將)이 머무르는 관청과 창고, 화약고 등이 있었다. 서쪽에는 (암문)暗門이 하나 있었고, 동서남북에 각각 하나씩 포루(砲樓) 가 있었으며, 특히 천경대, 만경대 와 같은 절벽이 있는 자연요새를 이루었다. 본래 성내에는 연못이 4군데나 있었고, 우물이 25개나 되었으며, 영조 때의 기록에 의하면 둘레 2,693보, 여장1,946척이고 성안에 민가 100여채나 있었다 하나, 현재 성내에는 남고사, 관성묘 를 비롯하여 남고진의 내력을 기록한 남고사적비만 남아있다.성벽이 상당히 균일하게 구성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서문지의 이 길을 따라서 쭉 올라가면 억경대가 나온다. 억경대에서는 북쪽의 전주를 한눈에 내다 볼 수가 있다.남고사지정번호: 시도 기념물 72호(전주시)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사찰 사지 지정일: 1985년08월16일 소재지: 전북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 2가 24번지 소유자:남고사 관리자: 남고사주지백제로 귀화한 보덕(普德)의 제자 명덕(明德)이 668년(신라 문무왕8)에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남고연국사(南高燕國寺)라고 불렀는데, 연국이란 나라를 편안하게 한다는 뜻의 말로 산성에 있는 사찰 이름에 많이 나타난다. 고려 때까지는 교종(敎宗) 계통의 사찰이었으나, 조선 세종 때 선교(禪敎) 양종을 통합하여 정한 48개 사찰에 들지 못하면서 사세가 크게 위축되었고, 임진왜란,이후에는 선종(禪宗) 사찰이 되었다. 고덕산을 남고산(南高山)이라고도 불렀으므로 창건 당시 남고연국사라 하였으나 언제부터인지 남고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관음전·삼성각·사천왕문 등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 석가모니불을 주존(主尊)으로 하고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협시로 한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관음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1680년 창건되어 1992년 10월 7일 불에 탄 것을 1995년에 복원하였다. 사천왕문에는 다른 절에서처럼 사천왕상을 모시지 않고 사천왕을 그린 탱화만 모셔 둔 점이 특이하다.관성묘지정번호:문화재자료 제5호 (전주시)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무덤/ 봉토묘 지정일: 1984년 04월 01일 소재지:전북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2가 613번지 소유자/관리자: 모성희삼국지에 나오는 관운장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주왕묘(周王廟) 혹은 관제묘(關帝廟)라고도 부른다. 임진왜란 당시 명(明)나라 장군이었던 진인이 부상을 입고 지금의 서울에 있는 남묘(南廟) 에서 치료를 받을 때, 관우의 신령이 나타나 군사들을 지켜준다고 믿어 이곳에 묘를 세우고 상을 모셨다. 이것이 관우신앙의 원조가 되었고 그 후 무신으로서 그를 모시는 신당이 널리 전파되게 되었다. 1895년(고종 32) 전라도관찰사 김성근과 남고별장(南固別將) 이신문이 각처 유지들의 헌금을 받아 건립한 것으로, 30m 높이의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면 중앙에 본전이 있고 좌측에 서루, 우측에 통무가 있는 특이한 구조이다. 본전 네 기둥에 유려한 필체로 장수 관우를 봉안한 목적 등이 기록되었고 조선 말기의 화가 소정산이 그린 《삼국연의도》 10폭 그림과 관우의 소상(塑像)이 안치되었다.만경대남고산성은 3개의 봉우리를 따라가면 억경대, 만경대, 천경대 의 3봉우리가 나오는데 이중 만경대는 고려 말 충신의 포은 정몽주가 지은 우국충정의 시가 새겨져 있는 벼랑이 있어 유명하다. 즉 정몽주는 1380년(우왕6년) 당시 우리나라 남부지방에서 노략질을 하던 왜적을 토벌하러 온 삼도 도순찰사 이성계의 종사관으로 있었는데, 이성계가 마침내 운봉에서 적병을 대겨워 장차 새 나라를 세울 야망이 담긴 노래를 부르자 듣고 있던 정몽주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홀로 이곳 만경대로 올라와 멀리 북쪽 하늘을 쳐다보면서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국운을 한탄하는 우국시를 읊었다고 한다. 그 후 정몽주는 우국시를 남긴지 꼭 12년만에 선죽교에서 선혈을 뿌리며 순사했고, 고려 왕조는 망하고 말았다.안내 시설 부재 산성을 가는 길이 도중에 끊어졌고, 갈래길이 여러 군데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안내 팻말 등이 없어서 길도 잃을 수가 있고 남고산성의 문화재를 찾는데도 어려움이 있다. 남고산성 '잔존 여장 보존구간' 이라는 팻말은 있으나 '여장'이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무엇을 보존 하는 가에 대한 이해가 어렵다.시설물의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았고 안내 시설의 부재로 밑에 같이 임시로 표시해 놓은 흔적이 있었다.3. 오목대와 이목대지정번호: 시도기념물 제16호 (전주시) 분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주거건축/ 주거시설 지정일: 1974년 09월 24일 소재지: 전북 전주시 완산구 교동 산1-3번지 소유자: 국유 관리자: 전주시조선시대 왕실과 관련된 유적지이다. 1380년(우왕 6) 삼도순찰사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귀경하는 도중 승전을 자축하는 연회를 열었던 곳이다. 고종이 직접 쓴 “태조고황제주필유지 (太祖高皇帝駐畢遺址)”라는 비문을 새겨 놓은 비는 광무 4년(1900)에 세운 것이다. 이목대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 목조 이안사(李安社)의 유허(遺墟)로서 시조 이한(李翰) 때부터 누대에 걸쳐 살던 곳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용비어천가》에도 묘사되어 있다. 이목대에도 고종이 친필로 쓴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가 새겨진 비가 오목대와 동시에 세워졌다. 조선시대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 유적지는 조선 왕조의 뿌리를 찾을 수 있는 가치 있는 문화재라 할 수 있다.사각모양의 다듬돌 주추가 밑을 받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곳곳에 나무못을 사용한 흔적이 있다.오목대와 이목대 모두 팔각지붕의 양식을 유지하고 있다.w}
    인문/어학| 2008.04.10| 27페이지| 1,000원| 조회(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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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서거정과 동국통감
    徐居正과 《東國通鑑》국사교육과 20030365 송준광[目次]1. 머리말2. 徐居正의 생애와 그의 역사인식3.《東國通鑑》의 편찬1)《東國通鑑》의 편찬과정2)《東國通鑑》의 편찬 배경3)《東國通鑑》의 내용연구4)《東國通鑑》의 서술체계와 史論4.《東國通鑑》의 史學史的 意義5. 맺음말1. 머리말지금 현재 이 자리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역사서를 꼽으라고 하면 《三國史記》나 《三國遺事》등을 대부분 꼽을 것이다. 물론 《三國史記》나 《三國遺事》는 연구도 많이 이루어졌고 그에 따른 여러 가지 성과들이 나오며 대중들한테 널리 알려져 있기에 쉽게 접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에 비해 다른 역사서들은 연구와 그에 따른 성과가 적은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잘 알려져 있지가 않으며 생소한 것이 사실이다. 지금 설명하고자 하는 《東國通鑑》또한 마찬가지이다.《東國通鑑》은 우리나라 최초의 官撰通史이며 조선전기 국사체계의 기준이 되었던 사서로 그 비중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즉 조선전기에는 새로운 국가 건설에 따르는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조선 창업의 정당성을 역사상에서 확인하여 지배 권력을 영구히 하려는 정치성을 보였다. 또한 유교적 사대명분론을 바탕으로 중국을 중심으로 한 중화적 세계관과 유교문화가 역사에서의 판단 기준이 되었다.《東國通鑑》이런 조건들을 충분히 만족시켜주는 조선전기 국사체계의 기준으로서 역할을 하게 되었다.먼저《東國通鑑》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을 알아보기 전에 《東國通鑑》편찬에 있어서 중심적 인물이었던 서거정에 대해 알아보고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봄으로써 《東國通鑑》의 가치와 사학사적 의의, 내용과 더불어 가치를 이해하고자 한다.2. 徐居正의 생애와 그의 역사인식徐居正은 1420년(世宗21)에서 1488년(成宗19)까지 世宗, 文宗, 端宗, 世祖, 睿宗, 成宗 까지 여섯 임금을 모신 조선초기의 대학자이자 문신이었다. 徐居正의 아버지는 牧使 미성이고 양촌 權近은 그의 외조부이다. 崔恒은 그의 매부로서 집안 또한 명문가로서 화려했고 그로 인해 그의 학풍은 자연스럽게. 또한 권력구조에서도 훈신은 대체로 大臣의 주도적 역할을, 사림은 군주의 권력 강화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러한 시각 차이는 역사해석상 상당한 충돌의 여지가 있다.그의 역사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는 《三國史節要》,《東國輿地勝覽》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三國史節要》의 서문에서는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의 세력이 서로 대등하다는 이른바 三國均敵論을 내세우고 있는데, 삼국균적론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徐居正의 역사인식은 대단히 긍정적이다. 즉 徐居正은 삼국균적론을 통해 고려시대를 통해 해소되지 못했던 三國遺民)의식이 비로소 청산되고, 삼국을 동등한 동족으로 포용하는 통일의식이 한 단계 깊어지게 된 것이다. 조선 초기에 편찬된 사서들이 이른바 삼국균적론을 표명하면서 삼국을 대등하게 서술하게 된 것이 그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의식의 진전이 인재등용 정책에 반영되어 이른바 ‘立賢無方’)의 탈 지역주의가 추구되고, 옛날 삼국의 영토를 수복하여 균형있게 발전시키려는 균형잡힌 국토개발 정책이 추진된 것이다. 삼국문화의 교차점이자 한반도의 중심부인 한양에 새 도읍을 정하고 밀집된 남방지역의 주민을 새로 개척한 북방지역에 대거 徙民한 것이 그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東國輿地勝覽》의 서문에서는 우리나라가 檀君이 조국하고, 箕子가 수봉한 이래로 삼국, 고려 시대에 넓은 강역을 차지하였음을 자랑하고 있다. 이 서문은 단순히 살펴보았을 때 徐居正의 역사인식이 사대성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착각을 하기 쉽다. 서문에서의 문제점은 箕子가 나왔다는 것에 있다.기자는 중국고대 왕조인 은나라 말엽의 인물로서 주왕의 폭정을 말리다가 투옥이 되었다. 후에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 무왕이 풀어주었으나 조국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를 섬길 수 없다하여 조선으로 망명을 하였다. 나중에 이를 알게 된 무왕이 그를 조선의 왕으로 책봉했으며 기자는 조선의 제도와 문화를 발전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즉 서거정은 기자를 우리나라 예의범절을 가르친 성현으로 숭배하면서, 그 교화 나타나지 않는다.徐居正의 역사인식에 대해서는 이처럼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의 여지는 있다. 하지만 徐居正은 변명의 여지조차 남기기 어려운 그의 생애에 있어서 지울 수 없는 오점 또한 남기게 되었다. 徐居正의 생애에 있어서의 오점이라고 한다면 端宗을 버리고 世祖를 모셨다는 점이다. 端宗의 할아버지는 바로 世宗대왕이다. 世宗은 집현전 학사들을 양성하면서 상당한 관심을 보였고 총애를 아끼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世祖가 端宗을 쫓아내고 자신이 직접 왕위에 오른 癸酉靖難에 맞서 집현전 학사들 가운데서도 사육신이나 생육신 등은 명분을 위해 목숨을 버리거나 세상을 등졌다. 조선시대 같은 유교가 중시되는 사회에서는 명분은 목숨과도 같은 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徐居正은 이렇듯 명분과 절개를 굽혀가며 世祖시대 때도 왕성한 활동을 보인 것이 그의 생애에 있어서의 어쩔 수 없는 오점의 하나이다. 徐居正은 이러한 자신의 오점을 만회하기 위해 조선 초기의 많은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성종은 이러한 徐居正의 업적을 높게 평가하여 그를 몹시 아꼈는데, 그가 병들자 자신이 입던 따뜻한 옷을 주고 어의를 보냈으며. 그가 죽자 수랏상의 반찬을 줄이고 조회를 폐했을 정도였다.3.《東國通鑑》의 편찬1)《東國通鑑》의 편찬과정世祖 4년(1458)편찬 명함世祖9년(1463) 최항 양성지 송처관 이파 김수녕 등에게 편찬 힘써줄 것을 당부.양성지로 하여금 대궐안의 유생들을 데리고 편찬 맡게 함.이파로 하여금 출납 맡김.편찬부서로 동국통감청 설치. 당상 낭청 두었음.世祖10년 동국통감청의 당상 낭관들을 불러 그 편차를 물어보고 범례를 직접 만들어줌.世祖11년 좌승지 윤필상에게 명하여《東國通鑑》편찬서책 봉하여 바치게 함으로써 편찬 사 업 일시중지.世祖12년 동국통감청의 당상관으로 최항 김국광 한계희 노사신 양성지 서거정 임원준 이파 이영은 9인 임명.낭관에는 이봉 성윤문 윤자영 이수남 정남종 정효상 김계창 권계희 배맹후 이경동 10인 임명.世祖13년 이시애의 난, 그 이듬해 민족 개국의 시조로 檀君을 보았고 그에 따른 숭배를 제도화 하였다. 고려 때 역대 시조로 箕子와 東明王에게 제사를 지낸 것에 비교한다면 커다란 변화였다. 우리 역사에서 처음 천명을 받은 국가시조로 檀君은 중국에서 역사의 원조로 숭앙하는 요임금과 동시대의 대등한 천명을 받은 군주라는 인심이 널리 퍼진 것이다. 즉 檀君숭배는 우리 민족의 역사가 고조선에 발원하여 중국사에 못지않다는 자부심과 민족국가의 독립성에 대한 자부심, 우리나라의 영역이 본래 만주 요동에 걸친다는 강역관의 확립 등의 의미가 있다. 즉 世祖가 생각하고 있는《東國通鑑》의 방향은 군주와 왕실입장이었던《高麗史》를 중심으로 고려시대사를 정리하고《三國史記》와《東國史略》등에서 탈락된 上古史 부분을 古記類로써 보충하여 檀君朝鮮이 중심이 된 고대사의 재구성에 주력하려 했던 것이다.世祖가《東國通鑑》의 방향설정을 위와 같이 잡은 이유는 전제왕권강화와 부국강병책을 실시하려는 정책과 관련이 있다. 그에 따른 관련은 古記類의 사서들에 쓰여진 역사서술에서 찾아볼 수 있다. 古記類의 사서들은 고대국가의 시조나 군주들의 탄생을 신성화 시키고, 치적을 미화한 것이 대부분이다. 또한 古記類 사서들의 고대의 신화나 전설 등은 고대군주나 지배층의 選民意識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고, 자신의 지배체제 근거를 정당화시키는 지배 이데올로기적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기능은 현실적으로 전제왕권의 강화를 도모하는 世祖의 입장에도 부합되어 通史로서의《東國通鑑》편찬을 결심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世祖는 정치적 명분으로서 최대 약점인 왕위 찬탈의 정당화에 힘쓰는 한편, 전제왕권의 강화와 부국강병을 통한 실지회복에 힘을 기울이던 군주였다.그리고 편찬의 명이 내려질 때 이미《東國通鑑》의 書名이 지어져 있었는데 이는 世祖가 그 동안 편찬을 위하여 상당한 연구와 준비를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낭만적인 신화적 역사서술을 받아들여 한국사를 새로운 방향으로 재구성하며 자신의 정치적 명분 또한 강화하려는 世祖의 시도는 유교적 명분론에 얽메인 史官통괄한 것이다.《東國通鑑》역시 단군 이후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역사를 처음으로 통괄하였다. 세 번째 특징은《資治通鑑》은 군주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편찬된 사서라는 점으로 역사적 사실을 전부 기록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교훈이 될 만한 사료만을 발췌하였다. 이것은《東國通鑑》에서도 적용되어《三國史記》나《高麗史》에 있는 사료를 발췌하여 후세에 교훈을 주려 하였다. 그런데《資治通鑑》은 사료를 발췌하여 편찬하였음에도 사료의 수집에 있어서는 正史외에도 널리 구하여 그 사료를 일단 모아서 편년으로 장편을 완성하여 여기에서 발췌한 것이 특징이다.《東國通鑑》도 이와 비슷하여 널리 사료를 구하려고 노력하였다.3)《東國通鑑》의 내용연구《東國通鑑》은 編年體의 서술방식을 따른 通史로서 내용은 크게 外紀, 三國紀, 新羅紀, 高麗紀 로 나뉘어져 있다.外紀는 檀君朝鮮, 箕子朝鮮, 衛滿朝鮮, 사군, 이부, 삼한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檀君朝鮮에서 삼한까지를 本紀가 아닌 外紀로 취급한 것은 자료의 부족으로 왕대별 서술을 체계적으로 할 수 없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에 대해《東國通鑑》의 연구에 많은 기여를 하신 정구복 선생은 ‘ 단순히 上古史를 자료가 적다는 이유만으로 外紀로 처리하여 취급한 것은 역사적 성찰의 부족으로 인한 결과로서 안이하게《資治通鑑》의 外紀형식을 따른데 기인한 것이다.’ 라고 비판적 평가를 내리기도 하였다. 이는 外紀라는 것이 本紀보다 그 비중이 적은 것이 사실이며,《東國通鑑》처럼 上古史 부분을 古記類 보다는 중국측 기록에 많이 의존하여 정리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外紀로 처리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을 탓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가 있다.三國紀는 신라, 고구려, 백제로 되어 있는데, 삼국을 대등하게 취급하면서 이 시대를 무정통 시대로 처리 하였다. 또한 삼국을 독립시키지 않고 하나의 편년에 묶어서 서술하였는데 年紀는 처음에 干支, 그 다음에 중국의 연호, 다시 그 다음에 우리나라의 왕년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처럼 단일왕조가 세워졌을 때에는 干支밑에 왕년을 적고.
    인문/어학| 2007.06.16| 8페이지| 1,000원| 조회(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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