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노 라투르브뤼노 라투르는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과학 철학자로, 주로 과학 사회학 분야의 연구로 유명하다. 브뤼노 라투르는 프랑스의 인류학자, 사회학자, 철학자, 과학기술학 연구자이다. 1947년 프랑스 본느에서 태어나 파리 제1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이후 1972년부터 1982년까지 파리국립과학연구소(CNRS)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과학기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82년부터 2006년까지 파리국립광업학교의 혁신사회학센터에 있었고, 2006년부터 2017년까지는 파리 정치 대학의 교수로 일했다. 라투르는 2022년 10월 8일, 파리에서 향년 75세로 사망했다.그의 연구는 과학과 기술이 사회와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탐구하여 사회 현상과 과학 연구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기여했다. 라투르는 과학기술학 분야의 개척자들 중 한 사람으로 미셸 칼롱(Michel Callon) 그리고 존 로(John Law) 등과 함께 행위자-연결망 이론(ANT, Actor-Network Theory)의 발전에 기여했다. ANT는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관점을 바탕으로 과학기술의 발전 과정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사회적 상호작용의 복잡성과 과학 지식의 형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라투르의 연구와 이론은 과학, 기술, 환경, 정치, 현대 사회의 복잡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의 연구는 사회과학, 과학철학, 환경학 및 기타 분야에서 널리 인용되고 있으며, 그의 아이디어는 과학과 기술이 사회적으로 조직되고 상호 작용하는 방식을 재고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연결망 이론브뤼노 라투르의 연결망 이론(ANT, Actor-Network Theory)은 과학기술의 발전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관점을 바탕으로 하는 이론이다.ANT에서 행위자(actor)는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도 포함된다. 비인간 행위자에는 실험실 장비, 컴퓨터, 과학적 이론, 제도, 법률, 규범 등이 포함된다.ANT에 따르면, 과학기술의 발전 과정은 다양한 행위자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네트워크는 단순히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들이 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의미와 권력이 교환되는 관계망을 의미한다.ANT는 과학기술의 발전 과정을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기존의 과학기술 연구는 과학기술의 발전을 주로 인간의 이성적 활동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ANT는 과학기술의 발전 과정에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 행위자들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ANT는 과학기술의 사회적 구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공한다. ANT에 따르면, 과학기술은 인간의 이성적 활동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행위자들의 협력과 갈등 속에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과학기술은 사회와 문화의 산물이며, 사회와 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동시에 사회와 문화로부터 영향을 받는다.ANT는 과학기술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새로운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ANT에 따르면, 과학기술은 사회와 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과학기술의 발전 과정에 참여하는 다양한 행위자들은 과학기술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인식하고, 과학기술의 사회적 영향력을 고려해야 한다.ANT는 과학기술학뿐만 아니라 철학, 사회학, 정치학, 문화학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라투르의 ANT는 과학기술의 이해와 대응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ANT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비분할적 실재론: ANT는 과학기술을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들의 협력과 갈등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과학기술을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가 분리되어 있는 실재가 아니라, 비분할적인 실재로 본다.연결망 이론: 간과 비인간 행위자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관점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과학기술을 연결망으로 이해한다.행위자성의 확장: ANT는 과학기술의 발전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자로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 행위자도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행위자성을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 행위자까지 확장한다.사회적 구성주의: ANT는 과학기술은 인간의 이성적 활동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행위자들의 협력과 갈등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과학기술을 사회적 구성으로 본다.사회적 영향력: ANT는 과학기술은 사회와 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동시에 사회와 문화로부터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과학기술의 사회적 영향력을 강조한다.ANT는 과학기술의 이해와 대응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라투르의 ANT는 과학기술의 사회적 구성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과학기술의 이해와 대응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또한, 과학기술이 사회와 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동시에 사회와 문화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과학기술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새로운 논의를 불러일으켰다.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은 신기후체제와 관련된 주제를 다룬 브뤼노 라투르의 저서입니다. 이 책은 환경과 기후 변화, 환경 정책, 환경 문제의 사회적, 정치적 측면에 대한 이해를 다루며, 라투르의 과학 철학과 사회학적 관점을 통해 이러한 주제를 탐구합니다.라투르는 이 책을 통해 환경 문제와 기후 변화에 대한 사회적 대화와 과학적 이해를 촉진하고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이 책에는 환경 문제와 기후 변화에 대한 라투르의 논의가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기 위해 담겨 있습니다.생물막과 임계영역라투르는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자신의 주요 개념들을 앞서 소개하고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개념은 생물막이라는 개념일 것이다. 생물막, 영어로는 biofilm으로 표기하고”브뤼노 라투르, 박범순 역,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률하는 방법, 이음, 2021, 8~9쪽.또는 경험 가능한 사실상의 지구라는 뜻으로 라투르는 소개하고 있다. 사실상 인류는 지구를 덮고 있는 얇은 코팅막 같은 곳 정도만 경험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이는 인간이 이해하고 있는 지구 또는 인간을 비롯한 생명이 발 디딜 수 있는 지구가 행성으로서의 지구 전체에 비해 매우 부분적인 것임을 알려주는 말이다.라투르는 이 한국어판 서문에서 임계영역이라는 개념 또한 소개하고 있는데, 임계라는 단어의 사전적 뜻은 두 지점을 나누는 경계이지만 생물막 자체가 워낙 얇고 제한된 공간이다 보니까 라투르는 마치 임계영역을 생물막과 거의 같은 것처럼 서술하고 있기도 하다.가이아이 한국어판 서문에서 눈여겨 봐야할 개념으로는 앞서의 생물막과 임계영역뿐만 아니라 가이아 또한 있다. 라투르는 이 글에서 이른바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라는 사람들이 가이아 이론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한다.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사람들이 주장하는 자연이라는 것은 사실상 배후에 신이라는 존재를 둔 채 섭리적 에덴동산이며, 주어지고 선물 받은 것으로의 자연이라는 것이다. 반면 가이아 이론은 이러한 섭리적 에덴동산이라는 관념을 거부하고 “오랜 세월 생명체 자체에 의해 만들어진 것”위의 책, 10쪽.임을 보여준다고 말하며 가이아 이론의 유효성에 대해서 역설한다. 라투르에 따르면 생물막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살아 숨 쉬는 것들이 생존을 위한 투쟁을 이어가며 가까스로 만들어낸 얇고 소중한 공간인 것이다.한정되어 있는 생물막라투르는 땅, 흙, 토지, 영역, 영토, 토양, 지구, 행성 등의 단어들을 각각 조금씩은 다른 뉘앙스로 사용한다. 그러면서도 결론은 한데로 모인다. 영토이든 토양이든 지구이든 행성이든 간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하나뿐이고 더 늘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세계 각국이 자신들이 원하는 모양의 발전이나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얇은 코팅에 불과한 생물막을 지닌 행성이 여럿 있어야 할 텐데 실제로는 그러격적인 것은 대표단이 결정한 내용이 아니다. 심지어 합의가 실제로 이행될 것인지 그 여부조차 중요하지 않다(기후변화 부정론자들은 협약을 무효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기에).중대한 사실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던 협약을 완성하고 손뼉을 치고 있던 12월의 그날, 서명국들은 만약 각국의 근대화 계획을 계속 진행해 간다면 그들이 희망하는 발전을 모두 담보할 행성 자체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점을 경고처럼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계획을 위해선 여러 개의 행성이 필요했다. 하지만 행성은 오직 하나뿐이다.이제 각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글로벌화의 글로브Globe를 담아낼 행성도, 지구도, 땅도, 영토도 없다면, 이전까지 모든 사람에게 보장되었던 홈랜드homeland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우리 각각은 따라서 다음과 같은 문제에 직면한다. 계속 탈주의 꿈을 꿀 것인가, 아니면 우리와 우리의 아이들이 살아갈 수 있는 영역을 찾아 나서야 하는가?문제의 존재를 부정할 것인가, 아니면착지할 장소를 물색할 것인가?지금부터는 이것이 정치적 지형에서의 ‘좌파’와 ‘우파’라는 정체성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우리 모두를 갈라놓는다.위의 책, 22~23쪽.한정된 것이 자원의 차원이 아닌 홈랜드의 차원이라는 라투르의 경고는 기후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던 이들에게는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올 만하다. 이러한 충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라투르는 이것이 정치적 지향의 문제를 넘어선 인류 공동의 문제임을 다시 강조하면서 충격 완화를 위한 공동의 작업을 ‘착지할 장소를 물색’하는 것이라는 은유적인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지금가지 스스로를 당연하게도 지구인이라고 여겨 왔다면,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이라는 책 제목이 담고 있는 내포는 우리가 현재는 이러한 당연함으로부터 이탈하여 있고 때문에 지각으로부터 수 킬로에 불과한 생물막에 다시 정착하기 위해서는 인류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라투르는 상황이 알아서 좋아질 것이라고 믿으며 아무 행동다.
‘문’과 ‘노벨’의 장르사회학 장성규, ‘문’과 ‘노벨’의 장르사회학, 소명출판, 2015.근대소설 장르에 대한 성찰과 새로운 소설 장르의 모색1930년대 후반기를 규정짓는 문제틀은 근대에 대한 회의와 이를 대체하기 위한 다양한 담론의 실험이었다. 이는 비단 당대 담론장에서만 논의된 것이 아니라, 문학장에서도 결정적인 위상을 차지하는 문제들이었다. 카프로 대표되는 사회적 근대성의 추구도, 구인회로 대표되는 미적 근대성의 추구도 좌절된 시기, 문인들의 문제의식은 근대적 문학에 대한 근본적인 회와, 이를 대체하기 위한 문학적 실험이었다. 1930년대 후반기는 서구적 근대에 대한 인식론적 회의와 성찰이 광범위하게 진행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담론 장의 역학은 문학의 영역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기존에 자명한 문학적 규범으로 인식되던 서구적 근대문학 개념에 대한 성찰 또한 심도 깊게 진행되었다. 이는 크게 두 가지 경로를 통해 수행된바, 한편으로는 조선 및 동양의 고전 서사 장르에 대한 재인식과 이에 기반을 둔 전통 장르의 현재화가 진행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외래 모델, 특히 서구 문학의 기계적 이식과 모방에 대한 성찰과 이에 기반을 둔 서구 문학의 능동적 수용과 조선적 특수화의 기획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양상을 실제 텍스트 분석을 통해 규명할 경우, 기존에 문학적 주조가 상실된 ‘전형기’로 호명되어온 1930년대 문학의 다채로운 양상을 새롭게 평가할 수 있다.1930년대 후반기에 이루어진 영문학 수용은 크게 두 가지 경로를 통해 이루어졌다. 첫 번째 경로는 해외문학파 및 경성제대 영문과를 중심으로 한 아카데미즘적 네트워크로서, 이들은 특히 외국문학 중에서도 아일랜드문학의 수용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두 번째 경로는 전향 사회주의자들의 네트워크로서 이들의 경우 구 카프 계열의 문인들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당대 담론 장의 매커니즘에 대해 매우 예민한 감각을 제공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1930년대 후반기 외국문학의 수용은 단순한 이식과 모방이 아닌, 나름의 탈식민적 전유의 기획 속에서 진행된다. 이는 특히 서구 근대소설 장르에 대한 성찰이 진행되던 시기의 문제설정과 맞물려 조선의 고유한 특수성을 형상화하기 위한 매개로서의 외국문학 수용이었다는 점에서 이채를 띤다. 나아가 특히 구 카프계열 작가들의 소설 장르론으로 기능했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단성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형식적 실험의 참조항으로 외국문학이 수용되어 독창적으로 변용되는 지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외국문학이 식민지 조선의 특수한 현실 속에서 탈식민적으로 전유되어 새로운 소설 장르의 모색으로 나아가는 계기로 작동했음을 의미한다.동양 고전 서사의 재인식을 통한 전통 장르의 현재화1930년대 후반기는 이미 일정 정도 서구 근대 ‘novel’의 장르적 규범이 문학 장에 정착된 시기였다. 따라서 이 시기 재인식된 조선 및 도양의 소설 장르론은 서구 근대 ‘novel’의 장르론과 때로는 결합되고, 때로는 충돌하면서 새로운 장르적 특성을 형성하게 된다. 이 점이 중요한 것은 당대 전통 서사 장르의 계승이 단순한 복고주의적, 회고주의적 전통주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구 문학 장르와의 적극적인 교섭을 통해 전통 장르를 현재화하려는 문제의식의 소산이었기 때문이다.1930년대 후반기 일련의 역사소설은 정사 자체를 부정하고, 그 이면의 다른 역사적 기능을 모색하거나, 아예 공식 역사소설에 배제된 이야기를 복원하려는 경향을 강하게 보인다. 이는 이 시기 근대에 대한 회의가 광범위하게 논의되며, 문학 장 역시 뚜렷한 가치 지향점을 획득하지 못한 채, 다양한 새로운 가치를 모색하려던 상황과 연결된다. 1930년대 후반기 근대의 몰락으로 상징되는 지배적 에피스테메 대한 광범위한 회의가 결합되면서 서구 근대 역사 서술 장르와는 구분되는, 그리고 동시에 동양의 공식적 역사서술 장르와도 구분되는 독특한 역사소설 장르가 형성된 것이다. 이는 특히 전통 서사 장르를 당대의 문제의식과 결합시켜 현재화한 중요한 사례로서 의미화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역사소설은 전통 장르의 계승과 동시에 이를 당대의 문학 장에 유통되던 서구적 근대소설 장르의 특성과 결합시켜 재구성하는 양상을 활발히 보인다. 사전과 야담은 모두 전근대적 장르이기 때문에, 이미 근대문학 장르가 상당부분 정착된 1930년대 후반기 조선문학에 그대로 수용될 수 없었다. 따라서 일련의 작가들은 전통 장르의 한계를 서구 근대소설 장르의 특성을 차용함으로써 극복하려는 실험을 수행한다. 이런 과정을 통한 서사 구성 원리의 도출은 동양적 ‘文’과 서구의 ‘novel’의 결합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작가들은 1920년대부터 서구의 ‘novel’ 장르의 특성을 인식하고 있는 상황에서, 1930년대 후반기 동양적 서사 장르를 능동적으로 수용했다. 그 결과 이들은 두 장르 간의 변증을 통해 전통 장르의 현재화를 기획할 수 있었고, 이것이 위와 같은 새로운 서사 구성 원리의 도출로 나아갔던 것이다. 이는 전통 장르의 외래 모델의 능동적인 변증 과정의 결과라는 점에서 그 문학사적 의의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해방 이후 현재까지 활발히 창작, 유통되고 있는 역사소설이 단순히 서구 ‘novel’의 이식만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장르 진화의 과정을 통해 현성된 것이라 할 때 동양적 역사소설의 기획은 그 의미를 진다고 할 수 있다.서구 문학의 능동적 수용과 ‘novel’ 장르의 분화김남천은 사랑의 수족관을 통해, 그 이전 단편에 등장시킨 주요 인물들을 재등장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들 인물은 이전 단편에서 형상화된 것과는 다른 인물로 형상화된다. 젠더의 층위에서 신여성을 표상하던 이경희는 그녀의 경제적 한계로 인해 하층 여성의 삶과는 괴리된 자선사업에 매몰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김광호 역시 길 우에서 등의 작품에서 보인 신세대로서의 특징보다는, 경도제대 출신의 엘리트로 기성세대에 편입하는 양상이 두드러져 나타난다. 강현순은 하층 여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등장하여 이경희의 자선사업의 허구성을 비판하는 역할을 하며, 김광신은 김광호가 이미 기성세대로 편입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더욱 새로운 세대의 표상으로 기능한다. 특히 강현순이 작품 말미에 만주로 떠나는 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이는 김광호의 만주행이 플롯상 일시적인 ‘고난’에 그치는 반면, 그녀의 만주행은 당대 하층민의 생계형 이주라는 점에서 이와 뚜렷하게 구별되기 때문이다.
『소설과 정신분석』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본 소설의 기원과 정의환상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예술이다. 예술가는 근본적으로 내향적인 사람이며, 이런 사람들은 신경증과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증상 형성의 첫 단계는 좌절이다. 즉 죽음이나 이별 등과 같은 급격한 분리로 인해 리비도집중 대상이 소멸한다. 그러나 그 대상에 집중되어 있던 리비도 에너지는 여전히 남아 있게 되는데, 이로 인해 리비도 과잉이 초래된다. 대부분의 경우 이 과잉 리비도는 새로운 대상을 찾아 안착하게 되고, 이런 경우 증상은 형성되지 않는다. 정상적으로 사후애도가 종결되기 때문이다.그러나 신경증 환자들의 경우 과잉 리비도가 새로운 대체 대상을 찾지 못하고 자아 냅로 되돌아오는 퇴행 현상을 보이게 된다. 그리고 퇴행한 리비도 에너지는 심리 발달의 초기 단계로 돌아가 고착을 시도한다. 여기서 ‘초기 단계’란 물론 인용문의 설명대로 ‘리비도가 만족을 누렸던, 행복했던 시기’이다. 대개의 경우 구강기와 항문기가 그 시기가 된다.‘신경증 환자는 그 같은 시기를 찾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자신의 인생사를 뒤적’인다. 그리하여 최초의 유아기 기억까지도 그에게는 퇴행의 거점이 된다. 결국 증상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심리 발달 초기의 유아기에 느꼈던 만족의 유형을 반복한다고 할 수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증상이 항상 고통을 수반하는 것은 그러한 퇴행에 자아가 개입하여 검열을 수행하고, 리비도반대집중을 통해 고통스런 감정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신경증이 ‘소망 충족’이면서 동시에 음란한 소망 충족에 대한 ‘단죄’이기도 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때의 증상은 자아와 이드의 갈등에서 기인하는 검열에 의해 왜곡되고, 대체로 고통스러운 느낌으로 반전된 상태가 되는 것이다.신경증의 증상 형성에 관한 프로이트의 이와 같은 언급을 토대로 볼 때, 현실적 좌절과 리비도의 퇴행이 신경증의 중요한 병인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 한 가지 덧붙여야할 것이 있다. 위에서 언급한 유아기의 행복했던 기억 리비도는 그 시절의 기억 속으로 퇴행하기 때문이다.프로이트적 의미에서 ‘환상’의 의미가 밝혀지는 지점도 여기이다. 프로이트는 바로 그 유아기적 기억들이 ‘환상’ 즉 ‘허구’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신경증 환자들이 현실적 좌절로 인해 리비도를 퇴각시켜서 그토록 되돌아가고자 했던 유아기의 기억들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았던 ‘허구’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기억의 이차가공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유년기 기억은 허위로 꾸며진 것이거나, 최소한 진실과 거짓이 일정 분량 뒤섞여 있다.프로이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설사 그러한 기억들이 나중에 가공된 성질의 것이라고 하더라도 심리적으로는 현실성을 지니며, 오히려 물리적 실재보다도 더 중요한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환상’은 비록 그것이 실재하지 않았던 것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심리 생활에 있어서는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프로이트는 가공된 유아기적 기억,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지만 심리적으로는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 환상에 ‘원초적 환상’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설사 신경증 환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인간은 누구나 그 원초적 환상에 매혹 당하는 존재임을 간파하기는 어렵지 않다. 프로이트에게 정상인과 비정상인의 차이란 오로지 양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고, 게다가 정상인 역시 잠이나 술 혹은 백일몽에서 깨어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신경증 환자이기 때문이다.예술가는 신경증 환자와 마찬가지로 ‘환상’에 매혹 당한다. 환상에 매혹 당한 인간들이 바로 ‘내향적인 인간들’이다. 즉 자신 내부의 ‘허구’ 속으로 침잠하는 인간들이 신경증환자이고 예술가들이다. 이 지점까지는 예술가들 역시 신경증 환자들과 구별되지 않는다. 허구에 매혹 당한 내향적 인간이란 신경증 직전의 인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증상 형성에 있어서 환상이 하는 역할이 바로 그것이다. 환상은 신경증 환자의 리비도가 퇴행을 감행하는 데 일종의 안내자 역할을 한다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그렇다면 환상에 매혹 당한 인간은 언제든지 퇴행을 통해 신경증에 도달할 수 있는 인시 현실에서 좌절을 겪은 이들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들 역시 ‘매우 강한 충동의 욕구들에 의해서 움직이며, 명예, 부, 권력, 명성, 그리고 여성들의 사랑을 갈구’한다. 흔히 예술가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스캔들, 소문들, 기행들은 이렇게 해석되어야 한다. 그들 역시 신경증 환자와 마찬가지로 충동에 지배당하는 인간들이다.그러나 그들은 경제적이거나 정치적이거나 혹은 다른 이유로 이러한 충동을 만족시킬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이 ‘환멸’ 즉 ‘대상리비도 집중의 철회’를 경험하게 되고 그리하여 퇴행의 전 단계에 해당하는 환상, 즉 유아기적의 허구화된 경험에 매혹 당하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신경증 환자와 예술가들의 운명이 갈린다. 그들은 신경증 환자와 달리 ‘승화’의 능력을 발휘할 줄 아는 것이다. 신경증 환자들은 환상이 내어준 통로를 따라 유아기의 기억 속으로 회귀한다. 즉 질병 속으로 도피한다. 그러나, 예술가는 바로 예술을 통해 유아기적 환상으로부터 현실로 되돌아온다. 결국 예술적 승화의 매커니즘이 그들을 다시 현실로 돌아가게 한다.예술가가 아닌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 환상을 예술화하는 작업을 모른다. 대부분 그들은 백일몽에 만족한다. 그러나 예술가들은 다르다. 첫째로 그들은 자신의 백일몽의 내용 가운데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개인적인 것들을 걸러 내고, 다른 사람들도 함께 즐길 수 있는 형태로 가공하는 법을 알고 있다. 둘째로 그들은 자신들의 백일몽이 그것이 경멸스러운 원천들에서 연유했다는 사실이 쉽게 드러나지 않을 때까지, 그 내용을 완화시켜 표현할 줄도 안다. 물론 여기서의 경멸스러운 원천들이란 성적인 원천을 말한다. 셋째로, 예술가는 특정한 소재를 자신이 상상한 표상에 그대로 부합되는 형상을 갖출 때까지 가공할 수 있는 신비스러운 능력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프로이트는 예술가가 결국 자신이 만들어낸 무의식적 상상의 ㅍ현을 통해서 큰 기쁨을 느낀다고 말한다. 여기서의 무의식적 상상의 표현이란 작품 외없을 것이다. 결국 예술가는 자신의 환상의 힘을 빌려 현실에 대한 환멸로 인해 철회했던 대상리비도를 재집중 시킬 수 있는 대체표상, 즉 작품을 창조해 낸 셈이다. 현실 세계에 다시 애정의 대상이 생겼으니 리비도는 소모가 가능해지고, 그는 신경증을 피하게 된다.병인으로서의 전쟁도착은 대상도착과 성욕도착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대상도착자들은 성기의 결합을 통해 만족을 추구하지 않는다. 대신 다른 기관, 특히 입과 항문이 성기를 대신한다. 성욕도착의 경우는 대상이 아니라 성욕 자체에 도착되어 있다. 즉 그들은 생식과 전혀 상관없는 기관이나 사물을 통해 성욕 이외의 욕망 충족을 달성한다. 그들은 배설 기능에 성적 관심을 가졌거나, 실체의 특정 부위에 대한 비정상적인 애착을 보인다. 세 번째로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있다.전이신경증은 불안, 히스테리, 가학신경증의 셋으로 분류 가능하다. 불안은 복제된 것이다. 그 원본은 태생 동물인 인간이 맨 처음 겪어야 했던 외상성 분리, 즉 출산 경험에 있다. 그렇다면 실제로 모든 불안한 감정은 분리불안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불안은 본질적으로 출산행위 때 각인된 불안한 흥분상태의 반복이다.그러나 현실불안 외에 정신분석이 정작 문제 삼는 불안은 신경증적 불안이다. 즉 위험 대상이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한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아주 미미한 위험성만을 가진 대상 앞에서 과도한 불안 감정이 발생하는 증상을 신경증적 불안이라고 한다. 신경증적 불안에는 기대 불안, 공포증이 있다.히스테리란 억제된 소망 충족과 자아의 갈등이 신체로 옮겨가 생리학적인 증상으로 변형된 경우를 일컫는다. 무의식적인 심리적 갈등이 생리적 기능의 이상으로 바뀌어 나타나는 심리 기제로서, 그런 기능이상은 주로 감각운동기관에서 나타나지만 드물게는 자율신경계에서도 나타난다. 요컨대, 히스테리란 외상적 체험과 관련된 심리적 갈등의 신체적 갈등으로의 전환이라고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강박신경증이란 괴로운 강박행동과 강박사고들이 반복해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을 일컫는다. 환자로잡고 있는 강박적인 사고가 논리적으로 터무니없음을 지적으로는 깨닫고 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의 의식 속에는 억지로 반복해서 그것을 인지하게 된다. 강박 행동 또한 마찬가지이다. 강박적으로 어떤 무의미한 행동을 반복하는 사람은 실제에 있어서는 그러한 행동이 불필요하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항할 수 없는 충동 때문에 자주 그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다.프로이트는 이와 같은 강박 행동을 외상적 체험과 연결짓는다. 사실상 강박증에 특징적인 ‘반복’ 행위는 외상적 체험의 반복이기도 하다. 또한 불안 감정을 피하기 위한 이차 증상 형성의 산물이기도 하다. 강박증 환자는 이 불필요한 행위를 강제로 그만두게 되었을 경우, 몹시 불안해한다. 앞서 불안 신경증에서 살펴보았듯이 불안과 신경증은 상호 대체가 가능하다. 증상이 형성되면 불안은 사라진다. 역으로 증상에 대한 대체가 실패로 끝나면 불안은 다시 나타난다.정신분석학적 견지에서 볼 때 나르시시즘이란 개념이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자기애’ 정도로 사용되는 것은 곤란하다. 프로이트는 이 용어를 대상리비도집중의 철회와 리비도의 자아리비도화 그리고 퇴행과 초기 발달 단계에의 고착 등과 같은 전과정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다. 특히 초기 발달 단계 중 ‘자가성애기’에 리비도가 고착될 경우, 그리하여 치료를 위한 어떠한 전이도 불가능하게 되는 경우를 나르시시즘적 신경증에 포함시키고 있다. 프로이트가 이 범주 내에 포함시키고 있는 신경증은 편집증(망상), 조발성치매, 그리고 우울증이다.편집증은 다시 여러 종류의 망상으로 나늰다. 그 첫째는 과대망상이다. 과대망상은 대상리비도집중의 퇴행에 따라 직접적으로 파생된 자아의 확대를 일컫는다. 대상으로부터 철회된 리비도가 대상의 소멸과 함께 퇴행하여 자아를 강화시킨다. 자아는 비대해지고, 이상화되며, 자기애의 대상이 된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나르시스트란 표현에 가장 적합한 증례가 이다.
1. 『소설신론』 조남현, 『소설신론』,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동양의 소설관몇몇 조선조 선비들 사이에서 전개되었던 소설양식 찬반론은 19세기 말로 접어 들면서 소설의 존재이유를 긍정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소설이 판각이나 필사의 방법을 통해 유포되었기 때문에 유포의 속도가 늦고 범위도 좁았으나, 개화기에 와서는 신문·잡지·단행본 등 매스 미디어가 출현하면서 소설의 공기능에 대한 긍정의 폭이 넓어지게 되었다. 소설의 유포방법의 변화는 소설 본질과 기능에 대한 관념을 수정시키는 계기가 된다.한 개인의 소설본질론은 어느 시대의 소설, 어느 나라의 소설을 논의 대상으로 삼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어느 시대의 소설이나 어느 나라의 소설을 다 만족시킬 만큼 소설의 본질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은 생각하기 어렵다. 한 시대나 한 나라의 소설작품을 다 읽고 난 다음 귀납적 추리를 거쳐 소설본질론에 닿는 것이 가장 신뢰할 만한 것임은 다 알고 있으나, 이런 방법은 사실상 현실화되기 어렵다. 결국 제한된 명작들을 근거로 하여 한 시대나 사회를 풍미하는 소설본질론의 제시를 목표로 할 수밖에 없다.서사장르론제라르 주네트는 서사를 “하나의 사건이나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서술적 진술”, “사건들이 연결되고 대립되고 반복되는 여러 관계들”, “사건을 서술하는 행위 그 자체”등과 같이 3가지 의미로 정리했다.불턴은 소설과 허구를 동일시하여 허구와 거짓말의 차이를 의도적으로 밝혔다. 거짓은 남을 속이는 대신 허구는 남을 즐겁게 해 준다고 차별하였다. 불턴은 고금의 주요 대사전에 기대어 “ 소설은 허구적 산문으로 된 긴 길이의 이야기로, 이 속에서 현실적 삶을 대표하는 인물들과 사건들은 다소간 복잡하게 얽힌 구성에 따라 그려진 것”, “대체로 길고 복잡한 산문형식의 이야기로 연속되는 사건들을 통해 인간체험을 다룬 것”, “삶과 성격의 다양함을 그리는 뜻에서 상상적인 인간들의 모험이나 감정을 다루는 허구적 산문담” 등과 같은 정의를 얻어 내고 있다. 이러한 정의들은 소설은 산문형식, 허구성, 이야기 등의 요소로 짜여져야 한다는 조건을 공통적으로 내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야기는 인물, 사건, 플롯 등이 서로 어울려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한다.이상에 밝힌 몇 가지 정의들을 종합할 때 피르마트가 소설을 카멜레온과 같은 양식이라고 비유한 것은 날카롭지는 않지만 포괄적인 데가 있다. 피르마트는 소설의 본질을 규명하는 자리에서 일단 귀납적 방법을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소설들을 전부 다 수집하여 그들 사이의 공통점을 추출하는 식으로 소설의 본질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제껏 장르비평의 이론가들이 그렇게 해 왔던 것처럼 우수한 작품들을 추려 모아 그들의 공분모를 도출하는 일이 소설본질론의 정석이기는 하다.내러티브는 우선 ‘경험적인 것’과 ‘허구적인 것’으로 대별된다. 이 2가지 양식은 소설에서 전통적인 것이 절대적으로 통용되는 것을 막아 왔다. 현실에의 충실로 설명되는 ‘경험적 내러티브’는 다시 ‘역사적인 것’과 ‘모방적인 것’으로 갈라진다. ‘역사적인 것’은 현실을 빚어내거나 움직이는 동력과 실재했던 과거를 충실하게 서술하는 것을 말한다. 역사적인 내러티브는 역사기록에서 제시된 시공간과 인과성을 그대로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에 비해 모방적 양식은 과거의 삶이든 당대의 삶이든 관계없이 삶의 단면을 드러내는 데 목표를 둔다.서사구조론서사는 “화자가 행동과 행위자를 포함한 사건을 말하는 담론”이다. 모든 서사는 화자, 발화사건, 행위자, 서술된 사건의 4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담론은 이야기의 내용면인 스토리에 대립하는 표현면, 이야기의 ‘어떻게의 측면’, 이야기하기, 픽션에 대립하는 서술 등이다. 오늘날 담론 분석 이론은 문화연구, 페미니즘, 심리학적 방법, 마르크시즘, 러시아 형식주의, 문화사회학 등의 방법론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비중이 커졌다.주제론한 편의 소설을 읽고 난 후 우선적으로 던지는 질문은 이 소설은 무엇을 말하는가라는 것이다. 이런 질문 대신에 이 소설은 어떠한 삶을 그리고 있으며 또 어떤 인물을 보여주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건을 중점적으로 그려 내었는가 하는 물음도 갖게 된다. 이러한 질문들은 이 소설의 주제가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소설은 일정한 주제를 어떤 문학양식보다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양식으로 설명되어 왔다. 대다수 소설 독자들은 작가들에게 철학자를 대하듯 진지한 주제의식을 기대해 왔기에, 주제의식의 효과적인 구현에 실패한 작가는 단순한 이야기꾼에 머물게 된다. 소설의 경우, 이야기 자체도 흥미를 줄 수 있어야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그 이야기에 의미가 담겨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가가 특정한 이야기를 들려주게 된 의도가 묵시적인 형식이든 명시적인 형식이든 독자에게 전달될 수 있어야 한다.소설에 있어서 주제의 명분과 근거는 바로 휴머니즘에서 찾을 수 있다. 소설의 주제는 인간다운 삶의 실상의 제시, 인간다운 삶을 쟁취하는 모습의 묘사, 인간을 비인간으로 몰아가는 원인의 통찰 등과 같은 작업으로 구체화된다.다니엘 벨 이후 이데올로기의 종말이라는 말은 보편화되었다. 1990년대 초에 소련과 동유럽이 붕괴하자 냉전체제는 끝났으며, 냉전시대의 종언은 곧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뜻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포스트모더니즘과 이데올로기의 종말은 서로 인과관계를 이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페터 지마는 거대이데올로기는 사라졌는지 몰라도 혹은 소이데올로기로 대치되었는지는 몰라도, 이데올로기가 작게는 개인에서 크게는 국가에 이르기까지 그 주체를 보호해 주고 유지시켜 준다는 기능은 바뀌어지지 않았다고 여겼다.페터 지마는 이데올로기라는 말이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도로 세분화된 사회과학 분양에서 다양하게 사용된 나머지 기본 의미가 모호해지고 말았음을 간파한 다음, 특히 정치가들이 이 용어를 당략적인 차원에서 오용해 온 것을 이데올로기라는 용어의 혼란의 한 원인으로 지적했다. 또 사회과학자들 사이에서의 무분별한 용어사용도 이데올로기의 혼란을 가져온 한 원인이라고 하였다.이렇듯 이데올로기라는 용어사용의 일대혼란을 지적한 다음, 페터 지마는 이데올로기를 크게 사회과학적인 면에서 볼 때 이데올로기는 문화, 종교, 신화, 세계관 등에서 나타나고, 기호학적인 면에서는 언어, 광고, 프로파간다, 이론 등의 분야에서 나타난다고 하였다. 이렇듯 페터 지마는 이데올로기가 형성되는 바탕을 넓게 파악했다. 문화와 이데올로기의 관계에 대해 “문화적 규범이나 가치가 한 사회의 공통분모인 데 반해, 특정 이데올로기의 규범과 가치는 헤르만 브로흐식의 의미의 부분체계를 형성한다”고 하였다. 한국에서도 일제 강점기에 ‘사상’이 ‘주의’란 말로 바뀌어 통용되곤 했다.길버트 압캐리언과 몬테 팔머는 심리학적 시각과 사회학적 접근법을 혼용하여 새로운 갈등이론을 정립하였다. 이들은 갈등이 왜 빚어지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인간의 본능, 원시적 충동이 그 주요 원인이 된다고 답하였다. 이들은 인간행동의 동기는 호기심, 공격욕, 소속감, 자부심, 창조욕, 안정희구, 성취감 등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하면서 모든 개인들은 유전적 요인, 학습내용, 왜곡된 관념과 같은 여러 요소들이 상호작용한 결과로 자연스럽게 갈등에 관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상징은 시에서뿐만 아니라 소설에서도 긴요한 문제이다. 사실주의 소설은 실제 경험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 하고 또 그것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다. 이에 반해 상징소설은 일정한 현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이처럼 사실주의적인 소설에서 상징은 항상 소설의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 상징은 감추어진 이유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상징소설에서의 상징은 의도된 의미를 초월적으로 구체화한다. 예를 들면, 외다리는 순진한 희생물을 상징하고, 부러진 날개를 가진 새는 좌절된 바람을 상징한다.상징소설은 시처럼 견고하고 역행성이 높은 것으로, 여러 요소들의 합주에 의해서 일정한 의미를 은근히 심어 주려 한다. 이미지, 암시, 힌트, 그리고 리듬의 변화와 톤 등과 같은 암시의 모든 기법은 정신적인 부담을 덜어 주며 때때로 다른 형태로 옮겨다 준다.
김윤식·김현의 『한국문학사』-투철한 현실 인식과 민족주의의 상관관계-김윤식·김현은 『한국문학사』를 저술함에 있어, 기존 문학사들의 특성과 한계를 파악하고 그것을 뛰어넘기 위한 방법이 무엇인지 모색하려 했다. 그 방법을 ‘현실에 입각한 철저한 자기 인식’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인데, 발표자는 이를 『한국문학사』의 저변에 깔려있는 ‘민족주의의 인식’이라는 말로 설명해 보고자 한다. 발표자는 이 표현을 민족주의를 주창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했다. 저자들이 민족주의를 내세워 편향된 시각을 제공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은 표면적으로 당연하다. 그런데 이들이 주창하는 ‘현실에 입각한 철저한 자기 인식’의 궁극적 목표가 공동체 사회의 발전 도모-좁혀서는 한국 문학-에 있다는 사실과, 이 공동체 사회 혹은 계층이 민족 단위로까지 확대할 가능성이 충분함을 독서하는 동안 곳곳에서 발견했다.우선은 저자들이 앞선 문학사들을 비판하는 논리와, 그 비판을 넘어서서 나아감에 있어 활용하고 있는 연구방법에 대해 살펴보겠다. 저자들은 문학사가 문학과 역사를 동시에 포용해야 한다는 데서 어려움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과거의 문학적 집적물들을 기록해야 하는 데, 이때 집적물들 간에 의미망이 형성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18~19면, 이하 본문의 인용방법은 동일함) 이때 관계 가치를 부여하는 문학사가는 감정·예술성·미학적 평가·작품의 유효성 등을 고려해야 한다. 이는 문학사는 역사와는 엄연히 다르게, 감동의 세계를 서술해야하기 때문이다.김윤식과 김현의 공동 저작물인 『한국문학사』는 김현이 거시적이고 전체적인 맥락을 언급하고, 김윤식이 학문적 정보와 세부적 내용을 채우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수업에서 교재로 다루었던 『한국소설사』가 김윤식이 전체적인 틀을 잡고 정호웅이 세부적 내용을 채우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과 비교해 볼만 하다. 이는 비평가로서의 김현, 연구자로서의 김윤식이 상호보족적으로 공동저술을 행함에 있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역할 구분으로 여겨진다. 물론 김윤식 역시 비평가이지만, 김현과의 공동 작업에 있어 보다 효율적인 방법을 택한 결과일 것이다. 저자들은 서문에서 개성이 상이한 두 사람이 개성을 가능한 극복하려는 과정을 통해 (8면) 이라고 말했는데, 이를 통해 『한국소설사』를 완성하기까지 각 저자들의 역할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저자들은 앞선 문학사로 임화의 「신문학사의 방법」, 백철의 『조선신문학사조사』, 박영희의 『한국현대문학사』, 조연현의 『한국현대문학사』를 언급한다. 저자들은 임화의 서구 취향적 태도, 백철의 사조라는 허깨비와의 싸움, 박영희의 체험 위주의 기술로 인한 오류, 조연현의 발표 기관의 우열에 의한 판단을 비판하고 있다. 이로써 이들이 극복하고 나아가려 한 것은 민족 주체성 확립·실증을 기반으로 한 문학사 기술·작품 외적인 조건으로부터 독자들을 독립시키는 일로 말할 수 있다.그렇다면 저자들이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목표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국 문학이 주변 문학을 벗어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의 현재 실력이 어느 정도인, 그것이 어떠한 전통적 맥락 속에서 이어져 온 것인지 확실하게 알 필요가 있다. (23면) (25면) 등의 발언에서 저자들의 의도를 알 수 있다.그리고는 대안의 성격으로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유럽 문화를 완성된 모델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2) 이식 문화론과 전통 단절론은 이론적으로 극복되어야 한다. 3) 문화간의 영향 관계는 주종 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굴절이라는 현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4) 한국 문학은 그 나름의 신성한 것을 찾아내야 한다. 1)의 경우 서구 취향적 태도를 보인 임화에 대한 비판으로 볼 수 있다. 2)의 이식 문화론 역시 임화의 것으로 판단되는 데 저자들은 임화가 사용한 채용, 이식 등의 단어에 반발한다. 저자들은 이는 조선초의 유학자들이 변방의 나라라고 스스로를 낮춰 부른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하는데, 앞서 말한 자비적 어휘와 다르지 않다고 판단할 수 있다. (2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