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암 촘스키의 「세상의 권력을 말하다」를 읽고..매번 사회와 법률 레포트를 쓸 때마다 서두에 쓰는 말이지만 이번에도 책은 읽을 만한 가치가 있었지만 그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난감하고 어려운 작업이었다.노암 촘스키라는 책의 저자는 이 외에도 많은 책을 통해 미국과 민주주의 등을 비판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시종일관 ‘어쩜 이렇게 해박한 지식과 정곡을 찌르는 논리를 가지고 있을까’ 감탄에 감탄을 더했다. 기회가 되면 다른 책들을 더 읽어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원 제목은 이다. 제목대로 노암 촘스키와 데이비드 바사미언의 일곱 차례에 걸친 대담을 정리한 것이다. 바사미언이 질문하면 촘스키가 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고, 1권은 공익에 관한 내용, 2권은 부유한 소수와 불안한 다수, 비밀, 거짓말, 그리고 민주주의 편을 다루고 있다. 바사미언의 질문은 매우 폭이 넓었지만 번역이 꽤 잘된 편이어서 무식한 내가 읽기에도 다소 어려운 내용 외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할지라도, 오로지 한반도에만 고정돼 있는 나의 식견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폭 넓은 주제를 소화하기에는 좀 버거웠다.촘스키가 말하는 권력이란 정부(정치권력), 대기업(경제권력), 그리고 언론(언론권력)이다. 이들은 ‘자유’와 ‘자본주의’가 동의어인 것처럼 포장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또한 그는 언론을 ‘잘 짜여진 프로파간다(선동) 시스템’으로 보고 있다.97년 IMF 구제금융이 이 나라에 상륙해 각종 구조조정 작업을 벌이던 때가 있었다. IMF라는 것이 이름만 국제라는 상표를 달았을 뿐, 미국의 초국적자본이 우리나라 경제를 먹어삼키기위한 것이라는 건 당시 중학생이던 나도 알았다. 하나하나 기아, 삼성 등 큰 기업들이 휘청거리고 외국인 투자자들에 의해 인수되고, 자동차판매점을 지나다가 GM대우, 르노 삼성자동차 등 외국기업이름과 함께 바뀐 간판 로고를 보면서 큰 기업 다 먹히고 이 나라가 어떻게 돌아갈까 안타까워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왠지 합리적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뭐라 논리적으로 반박할 핑계가 없었고 어느 누구도 명쾌한 해답을 주지 못했다. 그렇게 이 나라 지식인들이 초국적자본이 주도하는 IMF 프로그램 앞에서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저 멀리 태평양 건너에 있는 촘스키는 예견했단다. 한국에서 IMF가 진행하고 있는 프로그램은 결국 미국의 거대 자본만 살찌우고 한국을 말라죽게 할 거라고. 물론, 한국의 극소수 부자들은 이익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촘스키의 예견대로 2004년 한국사회는 모두 죽고 극소수 자본가들만 살아남는 사회가 됐다. 많은 이들이 일자리에서 떨려나지 않기 위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전전긍긍하며 일하고 있다. 자본가들을 배불리기 위해 하루 24시간 피말리며 일하면서도 세상살이는 원래 그런 것이라 철썩같이 믿으며 무기력하게 살고 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꽉 짜인 틈바구니 안에서 옆에 있는 사람보다는 조금 더 낫다는 경쟁적 위안감을 찾는 것뿐이다. 그때, 우리 중에 이를 예견하고 논리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 그런 쓸데없는, 때늦은 생각을 하게 된다.1권 1장 "민주주의는 어떻게 몰락하는가"에서 촘스키는 미국이 지향하는 시장경제(신자유주의)의 허구성을 밝히고 있다. 겉으로는 국가간 자유무역을 추구하지만 실제로 미국은 자국 산업의 보호를 위해 각종 보조금 지원, 감세 등으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참 자국산업을 보호해야 되는 개발도상국에게는 자유무역을 강요하는 그들의 이중성을 고발하고 있다.요새 쌀 개방으로 농민들이 반대시위를 벌이고 있다. 자유경쟁, 신자유주의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경쟁을 통해 발전을 도모하는 점은 좋다. 하지만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무조건적으로 쌀 개방을 해라, 안하면 우리도 너희에게 일련의 조치를 취하겠다라는 식은 불합당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가고 있고 그나마 나이 지긋하신 노인들이 지키고 있는 실정이다. 농업에 관한 정부의 보조 또한 턱없이 부족하고 일 년 농사로 일 년을 산다. 반면 미국은 방대한 농토에 기계식농업방식으로 가격경쟁력 면에서 우리보다 한수 위다. 그런 상황에서 어떠한 방어의 태세도 준비하지 못하는 약소국가에게 자유무역이라는 허울을 씌워놓고 개방을 주장하는 것은 억지로 밖에 안 보인다. 비단 쌀 개방문제 뿐일까. 이런 이중성은 미국 자국내 부자와 가난한 사람간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촘스키에게 민주주의를 위한 최소한의 요건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적절하면서도 충분한 재산을 갖춰야한다는 것"이다. 즉 대다수의 국민이 중산층이 되어야 하고 현재 부자들의 손에 쥐어진 권력을 좀 더 국민들의 손으로 돌려놓아야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정부, 대기업, 언론 이 세 권력은 서로 공생한다. 정부가 어떤 계획을 가지면 언론은 이것을 포장하여 선전하며, 대기업은 종종 정부와 손을 잡는 것이다. 대중은 언론에 의해서 좌지우지된다. 신창원을 예로 들어보자. 분명 사람을 살해하고 각종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 탈옥수이다. 하지만 언론은 이 사람의 치밀함 등을 집중보도함으로써 잔인한 살인범이기보다 영화에서 나올법한 머리좋은 범죄자정도로 비추고 있었다. 이 사람을 천재 범죄자처럼 재구성한 만화가 등장해서 말도 많았던 기억이 있다. 언론이 조작했든 안했든, 이렇게 쉬운 예에서도 대중들은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그 사람 참 대단하더라, 멋있더라’라는 식으로 휩쓸려다니기 쉽다. 일방적인 정보를 전달받는 이러한 무지한 대중들을 상대로 이 세 권력이 손을 잡는다면 그 위력은 과히 대단하다고 할 것이다. ‘깜빡 속았다’라는 말이 딱 어울릴 것이다. 예전에는 조작이라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물론 조작이 아예 안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중세 마녀사냥이 한 예다. 그러나 오늘날 같은 간접정보의 홍수 속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조차 완벽한 것이라고 믿을 수 없다. 더구나 매체를 통해 여론을 모을 수 있고, 훈련되지 못한 다중은 간단한 조작으로 쉽게 조종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그것은 어느 날 곧 국민의 뜻이 되어버리고, 국민의 이름으로 범죄를 자행한다. 여기서 말이 가져다주는 허구성을 여실히 느끼게 된다. 흔히 ‘국민의 뜻’이라는 허울좋은 명분이 덧씌워진 거짓말처럼 자유, 민주라는 말들 역시 권력을 위해 쓰여지는 도구로 전락해버린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 세상에 감추어진 어두운 부분들. 촘스키 교수가 말하는 세상이야기를 듣다보면 미국은 미국(아름다운 나라)이 아니다.
◈‘권리를 위한 투쟁’을 읽고..정말 난감했다. 내가 법학 공부를 전공으로 하는 사람도 아니고 법학쪽에서는 필독서처럼 알려져 있는 이 책을 읽고 보고서를 써야 한다는 교수님의 말씀에 걱정이 앞섰던 것이 사실이다. 읽으면서도 만연체로 되어있는 그 내용들이 법에 관한 일반상식정도밖에 가지고 있지 않던 나에게 어렵게 다가왔다. 지금도 저자의 요지를 일부밖에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우리나라는 일제식민지와 6.25전쟁을 겪으면서 주권을 빼앗기는 고통을 겪었고 이를 다시 찾기 위해 투쟁을 한 결과 지금 현재 우리들은 그나마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평화로운 상태에서 고통을 모르고 자라온 우리나라 대다수의 10대, 20대들이 선조들의 삶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아빠께서는 뉴스를 보시면서 ‘평화’만을 강조하며 북한과의 관계를 조심조심하는 일부 정치인들을 보며 종종 화를 내신다. 나는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평화롭게 해결해보겠다는데 왜 그러실까 싶었다. 말씀하시길,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너희들은 잘 모른다. 전쟁의 ‘전’자도 모르는 사람들이 툭하면 평화, 평화하고 평화가 제일이라고 말하지만 그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기도 하다. 최근 김영삼 정권이래로 반공교육을 중시해 오던 교육에서 정부의 햇볕정책을 옹호하기라도 하듯이 모든 생활에 있어서 평화와 타협, 양보만을 미덕으로 강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평화를 유지하고 타협, 양보하는 것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힘으로, 권력으로 싸워 이겨야만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만큼의 평화를 위해서는 단지 쉬쉬하며 그저 그렇게 좋게좋게 넘어갈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오래되지 않은 과거에 우리 선조들이 권리를 위해 피 흘려 싸운 노고와 그것을 찾기 위해 뼈를 깎는 고통이 수반되었다는 것을 책에서만 배웠지 과연 몸으로 느낄 수 있을까?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권리 없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이하의 삶이라는 것을 저자의 과장된 표현일지 모르는 주장을 통해서 중요성을 느껴볼 수가 있었다.지금도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금 우리도 하고 있다. 각종 교육정책에 대해 가두시위를 일 년에 한두 번 실시하고 있다. 갈 때마다 솔직히 별 생각없이 갔다. 얼마 전 농민들이 시내 한복판에서 시위를 벌여 과외를 가야 하는 길에 버스가 노선으로 통과할 수 없어서 다른 길로 돌아가야했던 일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그저 나에게 오는 불편함에 짜증이 났던 기억이 있다.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이 뭐 하러 그런 짓을, 시간낭비를 하느냐고 야유받는 시대가 지금이다.이 책은 5가지 챕터로 구성되어져있었는데 읽으면서 내가 이전에는 몰랐던 ‘법은 이런 것이었구나.’라는 공감을 많이 했다. 그 중에서도 ‘법의 목적은 평화며 그것을 위한 수단은 투쟁이다.’라는 1장의 제목과 내용이 제일 기억에 많이 남는다.예링은 글 중에서 ‘법은 단순한 사상이 아니라 생동하는 힘으로써, 그것의 목적은 평화며 그것을 위한 수단은 투쟁이다. 이 세상의 모든 법은 쟁취 된 것이며, 모든 중요한 법규는 이에 대항했던 사람들로부터 싸워서 빼앗은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법은 투쟁이다’라고 말하지만, 아무런 충돌 없이 살아온 사람들에게 법이란 것은 질서와 평화의 상태에서만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즉, 이것은 야누스의 상 과 같은 것으로 같은 사람이라도 시대에 따라서 법을 인식하는 관점이 다르다는 얘기다. 사비니와 푸크타 이론에 의하면 법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 아무런 고통 없이 소리 없이 이루어지며, 아무런 노력, 투쟁도 필요하지 않고 탐구할 필요도 없다고 했지만, 사실 법도 내부로부터 우러나오는 자연발생적이고 무의식적인 유기적 발전체라는 것을 시인해야 한다. 법이 아무런 고통 노력 없이 들에 난 풀처럼 생긴다고 생각하는 것은 과거의 상태를 이상화하는 잘못된, 낭만적인 견해인 것이다.2장에서는 인격주장과 관련한 주장이었는데, 현재 우리나라 처지에서 생각하니 이해가 더 잘 됐다. 사람들이 많은 돈을 들여서라도 승소를 하려고 재판을 준비하는 것은 단순히 이기겠다는 목적만이 아니다. 승소를 하여 훼손된 나의 인격, 자존심, 명예 등을 회복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상황은 너무나 복잡하다. 권리를 찾자니, 주위 강대국과의 마찰이 두렵고, 법을 개혁하고 바꾸자고 소리치자니 우리나라의 안보가 걱정이 되는 등, 여러 문제점이 많다. 북한과 미국, 일본, 중국 사이에서 끝없이 갈등하고, 얼마 전 문제가 되었던 이라크파병 같은 것도 생각해보면 이라크파병을 거부할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대국 미국 앞에서 현실적인 것들을 고려해봤을 때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파병을 결정해야 했던 정부의 모습에서 문득 너무 평화를 좇는 나머지 권리를 내팽겨 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평화를 좇으면서 동시에 권리도 찾는 방법은 과연 없는 것일까? 예링의 극단적인 듯한 이러한 주장들은 평화롭게만 살아온,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고자 하는 나에게 있어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권리를 위한 투쟁 이익은 사법, 사적 생활뿐만 아니라 국법, 국민생활에까지 미친다.’는 마지막 5장의 주장이다. 투쟁의 이익은 결코 사법이나 사생활에 한정되지 않고 이와 같은 것을 넘어서 훨씬 먼 곳에까지 미친다. 한 국가는 결국 모든 개별적인 개인의 총체에 불과하므로 개개인들이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국가도 그와 같이 느끼고 행동한다. 자기 자신의 권리조차 용감하게 방어하려 하지 않는 자는 전체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과 재산을 기꺼이 바치려는 충돌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국민 각자의 건전하고 굳건한 법 감정 속에서 국가는 자기 힘의 가장 줄기찬 원천, 즉 대내적이고 대외적으로 자기 존립의 확실한 보증을 갖게 된다. 법 감정은 국가를 하나의 나무라고 가정할 때 나무 전체를 받드는 뿌리인 것이다. 한민족의 힘이란 그 민족이 갖는 법 감정의 힘과 동일한 뜻을 가지며 국민적 법 감정의 보호는 국가의 건강과 힘의 보호인 것이다. 아무리 건전한 법감정이라 할지라도 오랜 기간 동안 악법을 이겨 낼 수는 없기때문에, 그것은 둔감해지고 위축된다. 왜냐하면 이미 수차례에 걸쳐 언급한 바와 같이 법의 본질적 행위이기 때문이다.‘국법과 국제법을 위해서 싸우는 투사는 사법을 위해서 싸우는 투사 바로 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이 문장을 읽고 독도문제와, 한일 어업협정에 대한 문제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이제까지는 그냥 ‘위에서 잘 해결 하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예링이 개개인의 법 감정 없이는 국가 전체의 법감정도 없다고 하는 글을 보니 그렇게 안이하게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될 것 같았다. 예링의 호소력 있는 글을 읽고 지금의 국제적으로 좁은 입지에 놓인 우리나라의 모습을 보고 참담함을 느꼈다. 다음에서 한일어업 협정에 대한 이야기로 예링의 책에 대한 감상을 대신 하도록 하겠다.
◈형식주의(形式主義) 비평이란?내재적 방법이라고도 하는데, 문학 작품이 순수한 언어 예술임을 강조하고, 역사주의 비평이 역사적인 배경과 작가의 생애, 창작 의도나 동기 같은 외적 조건에 치중하여 작품 자체의 이해를 소홀히 하는 경향에 반발하여 등장하였다. 이것은 순수하게 작품의 그 자체 구조를 분석하는 비평 방식이다. 이것은 문학의 내적 실체를 파악해 작품 자체의 형식적 아름다움을 밝히는데 기여했고, 문예 작품 자체의 예술성을 인정한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작가의 개인적인 상황, 그 시대 배경 등을 무시하고 오직 작품에만 비평의 초점을 두는 한계를 지닌다.◈형식주의 비평의 중요개념: 낯설게하기, 모호성, 역설, 아이러니‘낯설게하기‘란 시에서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일상 언어를 문학적인 언어로 바꾸면서 일어나는 일종의 공백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읽는 사람과 글을 쓴 사람과의 사이에 존재하는 어색함이라고 할까. 읽는 사람은 ’낯설게하기‘가 나타난 부분을 일상 언어로는 이해할 수 없다. 끊임없는 작가와 작품과의 교류를 통해 일상 언어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 공백을 채워나가야 한다. 우리가 시를 읽었을 때 무슨 뜻인지 난해한 부분이 나올 때 이 부분을 낯설게하기가 표현된 부분이라고 쉽게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라고 생각한다.또한 이 낯설기하기에서 나오는 현상이 모호성이다. 이 애매한 구절로부터 독자들은 모호성을 느끼고, 반어나 역설, 중의법 같은 표현방법을 통해 모호성을 경험한다.역설은 문장자체는 앞뒤가 안 맞지만 진리를 내포한 표현을 말하는데 우리가 알고 있듯이, 대표적인 표현으로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얏습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등이 있다.마지막으로 아이러니는 문장자체는 앞뒤가 맞지만 반대되는 뜻을 내포한 표현으로, 지각한 학생에게 선생이 비꼬듯이 "너 참 빨리왔구나.“ 하는 표현, ‘죽어도 아니눈물 흘리오리다’와 같은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1. 줄거리인력거꾼 김 첨지는 열흘 동안 돈 구경도 못하다 보이는 여인에게 귀찮게 군다는 말을 듣고 기분이 상한 후 운 좋게 또 한 손님을 태우고 인사동에 내려 주었다. 황혼이 가까울 때 벌이는 기적에 가까웠으나 불행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것 같아 집에 가기가 두려워졌다. 그럴 즈음 친구 치삼이를 만나 같이 술을 하게 되고 지나치게 술을 하자 치삼이가 말렸다. 그러나 돈을 많이 벌었다는 주정과 함께 돈에 대한 원망도 하다가 자신의 아내가 죽었다는 말을 치삼이에게 한다. 치삼이가 집으로 가라고 하자 거짓말이라고 말하고 술을 더 하고 설렁탕을 사들고 집으로 간다. 집에 들어서자 너무도 적막하며 아내가 나와 보지도 않는다는 소리를 지르며 불길함을 이기려 한다. 방문을 열자 아내는 죽어 있고 개똥이는 울다울다 목이 잠겼고 기운도 없어 보였다. 김 첨지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제 얼굴을 죽은 아내에게 비비며 "설렁탕 사왔는데 왜 먹지 못하니, 왜 먹지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 하고 한탄한다.2. 작품비평① 인물▶김 첨지: 병든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직접 표현하지 못하며, 자신의 삶을 구속하는 돈을 미워하는 사람. 다감하면서도 야성적, 반항적인 인물로 가난한 서민의 모습을 대변함."에이, 오라질년, 조랑복은 할 수가 없어. 못 먹어 병, 먹어서 병, 어쩌란 말이야! 왜 눈을 바루 뜨지 못해!" 하고, 김 첨지는 앓는 이의 뺨을 한 번 후려갈겼다. 홉뜬 눈은 조금 바루어졌건만 이슬이 맺히었다. 김 첨지의 눈시울도 뜨근뜨근한 것이었다.인제 설렁탕을 사 줄 수도 있다. 앓는 어미 곁에서 배고파 보채는 개똥이에게 죽을 사 줄 수도 있다.――팔십 전을 손에 쥔 김 첨지의 마음은 푼푼하였다."이 원수엣 돈! 이 육시를 할 돈!" 하면서 풀매질을 친다. 벽에 맞아 떨어진 돈은 다시 술 끓이는 양푼에 떨어지며, 정당한 매를 받는다는 듯이 '땡' 하고 울었다.김 첨지는 취중에도 설렁탕을 사 가지고 집에 다다랐다.▶치삼이: 가난한 친구 김 첨지의 처지를 이해하고 위로하는 인물▶ 아내: 병들고 가난한 인력거꾼의 아내로 는 객관적 상관물이다. 흔히 다른 작품들에서도 서민의 생활을 대표할 때 막걸리, 설렁탕으로 표현하는 것이 유사한 예라고 할 수 있다.김 첨지는 취중에도 설렁탕을 사 가지고 집에 다다랐다.▶돈 : 김 첨지가 선호하면서도 가장 원망하는 가치이다."에미를 붙을 이 오라질 놈들 같으니, 이놈 내가 돈이 없을 줄 알고.""이 원수엣 돈! 이 육시를 할 돈!"③ 속어의 사용▶속어를 유감없이 구사하여 현실감(하층민의 생활 감각)을 돋보이게 한다.“에미를 붙을 이 오라질 놈들 같으니, 이놈 내가 돈이 없을 줄 알고.”“빌어먹을 깍쨍이 같은 년, 누가 저를 어쩌나, ”"이런 오라질 년! 조밥도 못 먹는 년이 설렁탕은, 또 처먹고 지랄을 하게."④ 시간적 순서에 의한 구성▶작품 속의 시간은 김 첨지가 인력거를 끌고 나선 아침부터 집에 돌아오는 저녁때까지인데, 그 동안의 사건이 평면적으로만 서술되지 않고 외면적 행동과 내면의 심리, 들뜬 즐거움과 무거운 불안감 등의 반복적 교체로서 교묘하게 엮어져 있다.⇒ 인력거꾼 김 첨지는 오랜만에 행운을 만나 병든 아내에게 설렁탕을 사 먹일 수 있게 되어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행운이 계속되자 김 첨지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귀가를 서두른다.⇒ 선술집에서 친구 치삼이와 술을 마시면서 김 첨지는 아내에 대한 불안감으로 횡설수설한다.⇒ 설렁탕을 사 들고 들어온 김 첨지는 불길한 침묵에 맞서 고함을 친다.⇒ 아내의 죽음을 확인한 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하고 독백한다.⑤ 작중 인물 심리의 구체적?현실적 묘사▶대화와 직설적인 어투로 인물의 심리를 묘사하고 있다."에이, 오라질년, 조랑복은 할 수가 없어. 못 먹어 병, 먹어서 병, 어쩌란 말이야! 왜 눈을 바루 뜨지 못해!" 하고, 김 첨지는 앓는 이의 뺨을 한 번 후려갈겼다. 홉뜬 눈은 조금 바루어졌건만 이슬이 맺히었다. 김 첨지의 눈시울도 뜨근뜨근한 것이었다.인제 설렁탕을 사 줄 수도 있다. 앓는 어미 곁에서 배고파 보채는 개똥이에게 죽을 사 줄 수도 있다.――팔십 전을 손에 쥔 김 첨 집▶‘집’이라는 구체적인 공간도 갈등의 정도를 나타내는 기준이 된다. 집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주인공의 갈등이 심화되고, 멀어질수록 해소가 이루어지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집에서 멀어지는 부분에서 떨칠 수 없는 집 생각으로 갈등이 반복 심화된다. ‘집’은 김 첨지가 벗어날 수 없는 내면적 공간이며, 염려의 공간이다.이윽고 끄는 이의 다리는 무거워졌다. 자기 집 가까이 다다른 까닭이다.⑦ 반어적 표현▶이 작품에 쓰인 반어적 표현은 작품의 마지막 부분 김 첨지의 말에 나타나 있다.“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이 부분은 김 첨지가 다른 날과는 다르게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던 날과 그의 가장 소중한 아내가 죽은 날을 대조시켜 표현함으로써, 김 첨지가 놓인 비극적 상황을 더욱 강조하는 효과를 얻고 있다. 또한 일제 강점기 도시 빈민의 비참한 생활상을 더욱 생생하게 전달하는 효과를 안고 있으며, 이것은 상황의 아이러니를 표현하고 있다.돈은 죽음을 초래하는 가난을 극복할 대안이다. 그러나 돈이 생기면서 죽음은 심각하게 드리워진다. 따라서 돈의 증가는 곧바로 죽음을 향한 하강으로 이어지며, 이 상황적 아이러니가 작품에 드러나고 있다.제목에서도 반어적인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이 소설의 표제가 된 '운수 좋은 날'은 사실 인력거꾼으로 큰 벌이를 한 운수 좋은 날이 아니라 병든 아내가 죽은 비운의 날의 '반어적(Irony) 표현'이다. 즉, 운수 좋아 돈도 벌고 선술집에서 건주정까지 부리는 김 첨지의 표면적 행동과 아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내면 심리가 대립과 갈등을 일으키는 독특한 아이러니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반어적 표현은 극중 인물의 비극적 상황을 더욱 부각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3.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기①선술집에서 치삼이와의 술자리▶내면에서 아내의 죽음에 대한 불안이 고조되어 왔기 때문에 그 불안의 확인을 유보하려는 심리가 발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 불안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게 되었다.이 없나? 다리 뼉다구를 꺾어 놓을 놈들 같으니." 하고 치삼의 주워 주는 돈을 받아, "이 원수엣 돈! 이 육시를 할 돈!" 하면서 풀매질을 친다. 벽에 맞아 떨어진 돈은 다시 술 끓이는 양푼에 떨어지며, 정당한 매를 받는다는 듯이 '땡' 하고 울었다.③치삼에게 농담하는 장면▶김 첨지는 치삼에게 아내가 죽었다고 농담을 한다. 이것으로 보아 주인공은 아내의 죽음을 이미 예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종의 복선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또한 이 장면을 통해 주인공의 내적갈등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아내가 죽은 사실을 확인하지는 않았으나 병중에 있는 아내를 돌보지 않은 채, 돈 벌러 나와서 술이나 마시는 김 첨지의 심리적 갈등이 고백적으로 나타난 부분이다. 다시 말해, 김 첨지는 불안감을 떨쳐 버리기 위해 우스갯소리를 하다가 아내가 죽었다고 엉엉 소리 내어 운다. 그리고는 치삼이를 놀려먹은 것에 대해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나 이것은 실제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과 반대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농담을 통한 웃음으로 불안감을 떨쳐보려는 모습과 심리적으로 혼란한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우리 마누라가 죽었다네.""거짓말은 왜, 참말로 죽었어. 참말로……. 마누라 시체를 집에 뻐들쳐 놓고 내가 술을 먹다니, 내가 죽일 놈이야, 죽일 놈이야." 하고, 김 첨지는 영영 소리를 내어 운다.치삼의 잡는 손을 뿌리치더니, 김 첨지는 눈물이 걸신걸신한 눈으로 싱그레 웃는다."죽기는 누가 죽어." 하고, 득의 양양. "죽기는 왜 죽어. 생때같이 살아만 있단다. 그 오라질 년이 밥을 죽이지. 인제 나한테 속았다. 인제 나한테 속았다." 하고, 어린애 모양으로 손뼉을 치며 웃는다.④죽음의 분위기를 설정하기 위한 표현들▶무시무시한 정적(靜寂), 바다 같은 정적, 무덤 같은 침묵, 어린애의 젖 빠는 소리만일 김 첨지가 주기를 띠지 않았던들, 한 발을 대문 안에 들여놓았을 때, 그 곳을 지배하는 무시무시한 정적(靜寂)―폭풍우가 지나간 뒤의 바다 같은 정적에 다리가 떨리었으리라 찼다.
처음에 ‘오만과 편견’이라는 제목을 듣고서는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인줄 알았다. 이 책은 소설도 아니고, 문학 작품 역시 아니었다. 한국인 임지현과 일본인 사카이 나오키라는 두 나라의 지식인이 저자인, 다소 무거운 주제의 책이었다. 어떤 책일까하고 책을 대충 넘겨보았다. 보기에도 두꺼운 책의 분량과 ‘오만과 편견’이라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다소 무거워 보이는 위압감에 솔직히 겁이 났다. 이 책은 세계사에 관한 이해를 필요로 했다.우선 1장, ‘식민지, 제국주의의 콤플렉스를 벗다’를 통해 식민주의적 죄의식과 세습적 희생자 의식을 넘어서는 것으로 대담은 시작된다. 과거 식민지시대의 역사를 안고 있는 우리의 역사를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식민지시대를 살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책을 통해, 영상을 통해 일본의 만행을 알고 난 후 나는 일본에 대한 막연한 미움을 가지게 되었다. 나에게, 그리고 한국국민에게 일본은 우리를 식민지상태로 만든 장본인들이며, 죄인이었다. 위안부할머니들의 사과요청에도 그들은 공식적인 보상은커녕 사과조차도 안하고 발뺌하는 모습을 보면서 법으로 말하면 그들은 가해자, 우리는 피해자라는 경계선을 그었다. 일본인들은 우리를 괴롭힌 가해자니까 당연히 한국국민에게 사과해야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가끔 일본의 인사들이 국민을 대표해 사과를 한다고 하는 발표를 보면서 작지만 일종의 통쾌함 같은 기분까지 든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이 사과하고 있는 지난날이란 결코 그들이 행한 일이 아니다. 그 조상들이 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국민의 이름으로 죄의식을 갖고 우리는 국민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유죄를 부여하는 것이다. 마치 일본인 모두가 한국인 모두에 대한 원죄를 안고 태어난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제국주의에 대해 면죄부를 주자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들이 정말 사과를 해야 할 부분은 그 자신들이 저지르지도 않은 지난날의 제국주의적 잘못이 아닌, 그 후,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에 대해 제대로 된 처벌을 하지 않았음과, 그 역사를 덮어두고 은폐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그 사과는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가 아닌 한 사람, 한 사람의 성찰로써 이루어져야할 것이다.9.11테러에 대한 미국국민들의 이야기부분은 흥미로웠다. 9.11테러는 그 전부터 비기독교국가, 미개국가에 대한 일종의 교통경찰을 자처하던 미국 외교정책에 대해 한층 힘을 실어주고 그 당시 정부에 대한 미국국민들의 지지를 받게 만든 사건이었다. 이것은 종교전쟁이다, 단순 테러다, 미국의 패권주의다 말이 많았다. 이 당시 나는 고등학생으로서 미국의 패권주의에 관심을 기울이던 사람 중에 하나였다. 자국국민의 피해에 대해 미국인들은 암묵적으로 복수를 지지하고 있었고, 평화를 외치던 일부의 구호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은 다민족국가인 미국을 하나로 뭉치게 했다. 미국인과 비미국인, 문화인과 비문화인, 기독교국가와 비기독교국가 등으로 갈라놓고 자신들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받았다. 이처럼 우리들은 민족주의적 감정과 함께 타자화, 경계짓기를 함으로써 일본인은 한국인을, 미국인은 인디언과 흑인을, 나치는 유대인을 각각 타자로 설정하고 억압함으로써 국민 국가를 결속시킨다. 이 부분에서 두 저자는 가난한 이민자와 유색인들을 모두 미국 국민에 포섭하면서, 그 안에서 흑인과 백인, 백인중에서도 백인을 차별하는 등 서로를 타자화하고 배제하는 미국의 다민족 국민주의, 사실상 민족적 국민주의에 대한 지적을 하고 있다. ‘한 고양이한테 다른 고양이는 항상 같은 고양이인데, 한 인간에게 다른 인간은 같은 인간이 아니다.’라는 문구는 특히 인상 깊었다. 인간은 서로를 구별짓는 본성을 타고나나보다 싶었다.같은 맥락에서, 저자는 동양을 타자화하는 오리엔탈리즘을 통해 서양은 탄생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내용들을 처음 접한 나로서는 감탄사가 입에서 절로 나왔다. 지구의 동쪽에 있어서 동양, 서쪽에 있어서 서양이라고만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주변인을 타자화시켰다는 논리, 어떻게 이런 생각들을 할 수 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사실 지구는 구체이기 때문에 어떤 곳이든 서양이 될 수 있다. 프랑스는 일본의 서양이었고, 다시 일본은 한국을 타자로 서양이 된다. 현재 우리가 말하는 서양이란 단지 근대화의 정도를 나타내는 상상적 지명인 것이다. 좀 더 근대화된 곳이라면, 누구든 서양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곧, 근대화 된 서양을 바라보며 그렇기 되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그것을 기준으로 수직적 경계를 만든 것이다. 그랬다. 서양처럼 산업발전을 이루려고 애썼고, 모델로써 존재시켜왔으며, 지금도 서양강대국이라는 몇몇 나라들을 따라잡기 위해, 또 먹히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있는 중이다. 발달한 서양과 조금은 미개하고 덜 발달된 동양이라는 개념이 우리가 의심하기도 전에 원리로 자리잡고 있었다.내가 이 책에서 가장 관심있게 본 것은 친일파가 민족주의자가 될 수도 있다는 주장이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던 친일파가 민족주의자가 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은 언뜻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책을 읽어나갈수록 나의 그런 생각은 모든 사실은 다른 시각에서도 바라봐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논리에 의해 그냥 무너졌다. 근대화론자였던 일제시대 친일파는 새로운 각도에서 재평가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폭군으로만 칭해지던 광해군이 후에 중립외교를 펼친 지혜로운 왕이라는 측면으로 재평가받았던 것처럼 말이다. 친일파는 일제의 근대화 모델을 본받아 근대 국가를 설립하고자 한 민족주의자이며, 만약 조선이 러시아나 중국, 서구 열강에 의해 식민화됐다면 친일파는 일본 메이지 유신의 모델을 따라 독립을 쟁취하고자한 민족주의적 근대화론자로 칭송받았을지 모른다. 반면 민족주의자로 평가받는 위정척사파는 중국적 세계질서와 봉건 체제를 옹호한 ‘친중국 반민족주의자’로 낙인찍혔을 것이다. 역사가 민족주의자의 위치를 바꿔놓은 것이다. 실로 엄청난 시각의 전환이라 할 수 있었다.
천재들을 가르치는 바보학교(다양성이 없는 교육은 틀린 문장의 마침표와 같다.)1. 각 장별 내용제 1장 교육개혁안에 대한 개혁소위 중요과목에서의 상위권 학생의 부재를 미국학교가 처한 큰 위기라고 보는 현재의 교육 개혁관념은 새로 인식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교육개혁에 있어서도 눈에 보이는 문제들만 해결하려는 임시방편적인 교육개혁보다는 원천적인 구조분석과 그 해결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미 교사와 학생을 비롯해 대부분의 사람들의 머릿속에 뿌리박힌 학교에 대한 이미지, 적응?내면화 되어버린 교사들의 수업기술, 학교구조의 정형화된 틀 때문에 학교를 개혁하기란 쉽지 않다. 교육을 개혁하려면 코앞에 닥친 문제점만 입막음 하려는 피상적 대안이 아니라, 좀 더 학교와 그 외의 여러 측면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더 나아가 교육에 대한 인식전환의 노력도 병행되어야한다.제 2장 개념형성시의 개념의 역할교육목표에서 인지발달이라는 개념은 중요하다. ‘인지’는 지금까지도 이분법적 사고론에 의해 ‘감정’과는 반대되는, 이성으로써의 측면이 부각되어 왔다. 하지만 ‘인지’와 ‘감정’은 서로 상호보완적이며, 이에 따라 우리는 인지의 개념을 더 확장시켜야만 하는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우리가 지금까지 교육이라고 생각해오던 지식적 측면, 즉 인지적 측면에서 거의 무시되고 있었던 감정?감각적 측면으로 관심을 돌려보아야 함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감각’의 계발은 의식 확장의 중요한 수단이 되며, 인간의 재능과 인간정신의 가능성을 높여준다. 때문에 ‘인지’의 개념은 더욱 확장되어야 하며, 학생들의 감각능력을 키워 인지능력을 넓히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제 3장 표상의 형식‘표상형식’이란 어떤 사람이 감각능력(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을 통해 경험한 것들을 자신이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때 사용하는 수단을 말한다. 같은 현상을 두고도 사람마다 해석하는 방법이 다르고, 전달하는 수단이 다르며, 각자의 기술이나 환경 또한 다르정권을 가지며, 표상형식의 결정에는 그 표상형식으로만은 전달할 수 있는 내용의 한계를 가진다. 표상형식을 배열하는 형식에는 산수, 문법, 띄어쓰기 같이 규칙의 지배를 받는 규칙지배적인 형식(구문)과 미술, 음악, 시 같은 비유적인 형식이 있다. 기존의 교육방식은 오직 규칙지배적인 구문론을 강조하는 표상형식들만을 익히도록 강요했고 비유적인 형식에 대한 사용이 줄어들게 되었다. 때문에 학교는 하나의 정답을 의도하는 교사가 오로지 그 정답만을 찾아가도록 학생들을 이끌고, 학생들은 그대로 학습하는 방법을 습득하는 장소가 되었으며, 감각적 측면은 소홀히 되어 왔다.제 4장 인지에서 교육과정으로이전의 학교(현재를 비롯한)는 문자?언어라는 한 가지 표상형식으로만 교과들을 가르친다. 다양한 표상형식을 통해 창의성과 다양성, 상상력을 키워주던 유치원교육과는 상대적으로, 학교는 글로 개념화된 문자적인 지식을 전달받는다. 한 가지 표상형식으로만 전달할 수 있는 내용들은 한계를 가진다. 각기 다른 소질의 아이들에게 한 가지만을 고집하여 교육하고 평가한다는 것 교육의 기회균등에도 어긋난다. 여러 가지 표상형식을 사용하는 교육과정은 아이들로 하여금 좀 더 확실한 개념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며, 그들의 적성이나 능력에 따른 다양성을 계발시킬 수도 있다. 때문에 다양한 표상형식을 이용한 교육프로그램뿐 아니라 이에 따른 교육안과 교사들의 노력, 그에 맞는 환경여건을 조성함으로써 학생들이 다양한 표상형식을 구현할 수 있도록 교육해야한다.2. 저자가 주장하는 내용 요약사람들은 항상 교육이 잘못되었다고, 개혁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그 개혁이란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것은 일종의 혁명이다. 때문에 말처럼 쉽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한 번의 개혁을 위해 수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며 각 분야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고리들 또한 재정리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뒤따른다. 교육의 개혁이 특히 어려운 것은 변화하지 않으려는 교육의 특성과 더불어 우리의 잘못된 기존관념 때문이다. 그동안 르치는 것에만 급급했을 뿐이다. 그리고는 학업성적의 저하를 필두로 각가지 경쟁을 부추기고 지식전달을 강조하는 대안들을 내놓고 있다.유치원에서의 교육은 창의성개발을 위한 교육이어야 한다는 데에는 대부분 동의하지만, 초등학교로 넘어가면 이 같은 생각은 별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창의성보다는 남들보다 공부에 뛰어난 아이(글?]언어적 표상형식에 잘 따라가는)를 만들기 위해 입시전선으로 아이들을 내보내고 혹사시키는 것이 지금의 교육현실이다. 다양한 표상형식을 통한 교육과정은 아이들의 창의성 발달에도 효과적일 뿐만 아니라 개념에 대한 이해를 좀 더 명확히 할 수 있고, 아이들이 좀 더 흥미 있게 수업에 다가갈 수 있으며, 다양성에 입각한 교육평등에 한 발 짝 다가갈 수 있게 한다. 때문에 우리에게는 다양한 표상형식을 이용한 교육프로그램이 절실히 필요하며, 교육을 포함하여 교육개혁에 대한 기존의 개념을 재인식 하는 작업들이 우선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3. 저자가 펼치는 주장을 초등학교 현장에서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에 대한 논의솔직히 이 책을 읽으면서 이해가 되지 않는 구절들이 있어서 두 번을 읽은 후에야 대충 글의 요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추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우리 교육의 문제점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저자가 말하듯이 나는 너무나 당연하게, 감각을 배제한 지식위주의 교육을 수년간 받아왔다. 나는 그 교육을 너무나 잘 따라가던 학생이었고, 어떤 과목을 막론하고 검은 글씨뿐인 교과서만 가지고 공부했다. 공부는 무조건 글자로만 전달받아야 된다고 무의식중에 나 스스로도 생각하고 있었던 듯하다.이 책을 읽으면서 4장에 예시된 ‘변태’에 관한 다양한 방식에 의한 접근과 ‘엡스타인’의 연구를 보면서, 지극히 간단하지만 그전에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광경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변태’를 공부할 때 기껏해야 변태과정을 겪는 애벌레 영상을 보는 것이 효과적이라고만 생각했던 나에게, 사회현상에서 변태과정과 비슷한 현상을 교육 관념에 대한 한계일 것으로 생각된다.우리는 어떤 문제의 답은 오로지 하나라고 생각한다. 수학문제를 풀 때도 해설지에는 한 가지 풀이방법만 나올 뿐이고, 우리는 그대로 그 풀이과정을 되풀이해서 익히는 작업이 전부이다. 그리고 그것이 문제를 푸는 유일한 진리인 양 교육받아졌다. 학생은 생각하는 주체이지, 로봇이 아니다. 모두 같은 로봇일 수 없는 것이다.작년 수학의 이해 시간에 교수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우리학교에서 영재교육 특강을 하려고 아이들을 시험해보면 한 문제를 여러 가지 방법을 가지고 창의적으로 푸는 ‘진짜’ 영재들이 있는가 하면, 일찍이 학원 등을 통한 조기학습으로 그저 남들보다 빠른 속도의 학습이 이루어진 아이들도 있다고 하셨다. 이렇듯 각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영재나 수재도, 일종의 경제적, 시간적 투자를 통해 만들어보려는 부모들도 있다.각자마다 적성이나 잘하는 분야가 다른데도 아이들은 수능시험이라는 똑같은 잣대로 평가받는다. ‘공부 말고도 한 가지만 잘하면 좋은 대학 갈 수 있다.’ 라는 말이 몇 년 전부터 나오기 시작했지만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이것은 허상에 불과할 뿐이다. 아직도 수많은 아이들은 딱딱한 의자에 허리붙이고 앉아서 책 속의 까만 글씨와 사투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우리 때만 해도 누런 종이에, 보이는 건 정자체 검정 글씨뿐이었지만 지금은 그래도 나아진 것이 고작 새하얀 질 좋은 종이에 컬러로 인쇄된 그림이나 사진 첨부 정도이다.아이들이 공부를, 교과서를 싫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의 경험을 통해 나를 비롯한 학생들이 느끼는 공부에 관한 문제점을 미약하나마 살펴보려고 한다.나는 음악과 국사를 좋아한다. 다른 아이들은 국사를 대부분 좋아하지 않는다. 이유는 외울 것이 너무 많다는 것. 글자만 빼곡히 적힌 교과서에서 연대기를 줄줄 외우며, 삼국시대에는 뭐했고, 조선시대에는 뭐 했더라 이런 식으로 교과서를 통째로 머릿속에 집어넣으려고 하니 스트레스가 아닐 수가 없다. 나는 어렸을 때 아빠로부터 국사를 옛날이야기 재미를 느꼈다. 국사책에 나오지 않은 재미있는 소담(小話)도 많고, 우리가 지식으로만 아는 한 가지 사실도 그 뒷내막이나 의미를 풀어보면서 쾌감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로 올라와서는 입시 때문에 한 학기동안 국사교과서 두 권을 몰아치기로 배우던 기억이 있다.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일제시대에 대해서 배운다고 했을 때 우리는 흔히 이것은 국사영역이라고만 생각한다. 하지만 일제시대가 국사영역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문학에도 등장하고 사회, 지리, 경제, 음악에서도 등장한다. 일제시대에 어떤 착출을 당했고 어떤 시기에서 어떤 시기를 지나왔으며 명칭은 어떠했고에 관한 문제를 떠나서, 일제시대의 생활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일제시대의 생활상에 대한, 또는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담은 문학작품을 읽어보고 시를 지어본다든지, 관련영상자료를 시청한다든지, 관련 장소를 방문해본다든지, 경험하신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를 통해 이야기를 듣는다든지, 그 느낌을 음악으로 표현해본다든지 간적접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는 방법들은 생각해보면 많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고, 이 책의 저자도 말했듯이 지식은 그저 지식일뿐, 우리는 한 가지 영역으로만 한정시켜서 일제시대에 관해서 문학은 문학대로, 지리는 지리대로, 국사는 국사대로 따로따로의 기억저장자리를 만들어 분류?정리하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한다.앞에서 말했듯이 나는 음악을 좋아하고 피아노를 7년 동안 배우면서 예체능계 진학도 생각을 해봤기 때문에 실력도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 하지만 항상 내가 자신 없는 미술시간에는 잘하는 아이들과 똑같이 즐거웠던 경험을 그림으로 표현해서 형편없는 점수에 실망할 때도 많이 있었다. 즐거웠던 기분을 음악으로도 나타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이것이 기본적 미술소양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라는 것은 이해하지만 이 부분에서라면 내가 더 잘할 수 있는데 라는 아쉬움과 실망감을 느꼈던 때가 있었다. 분명 사람마다 잘하는 것이 다 다르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한 가지 방